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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님의 서재
  • 말 한 마디 때문에
  • 류전윈
  • 13,320원 (10%740)
  • 2015-03-11
  • : 197
첫 출근을 앞둔 어느 날, 아빠가 의붓자식 소 팔러 보내는 것 같은 심정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한 마디 하신다.

“차라리 못 해주는 사람이 낫다. 잘해주는 사람은 이유가 있어.”

어릴 적부터 내가 청개구리 짓도 잘하고, 고집도 없진 않아서 애당초 ‘미끄러져 봐야 알겠지’라는 생각이신건지 잔소리도 별로 안 하셨었는데, 그래도 막둥이가 사회인이 되는 첫 출근을 앞두고 눈 동그랗게 뜨고 무슨 말을 해주시려나 기대에 들떠 있건만 참고 참다가 던진 한 마디 치고 산뜻함이 없긴 하다.

이 책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다루고 있어서인지 자연스럽게 나의 지나간 일들이 소환됐다.

중국 허난성 옌진을 배경으로 두부장수 라오양과 그의 세 아들 양바이예, 양바이순, 양바이리가 이 소설의 중심에 있고, 이들 주변인물의 서사까지 풍성하게 채우고 있다.

그 중 평생 수많은 사람의 병을 고쳤던 한의사 아버지와 그의 아들 라오후의 대화가 예전 나와 우리 아빠의 대화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라오후의 아버지는 굉장히 신중한 사람이다.
맥을 짚고 다음 붓을 한번 드는데도 세 번이나 망설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라오후가 거시에 합격하고 관원이 되어 허난 옌진으로 부임할 때, 모두 그를 축하하며 배웅해주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의 아버지만 우는 것이었다.

(P. 76) “너는 착실한 천성을 타고 나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건 문제가 없다만, 관원이 되어 잔혹한 악인들 가운데 있다 보면 손해를 보기 십상이지. 짧으면 일 년이고 길어야 사오 년이니, 큰 죄명으로 감옥에 가지 않으면 실컷 얻어맞고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게다.”

라오후가 말했다.

“남들은 관직에 부임할 때 빛나는 말만 해주는데 아버진 왜 그렇게 재수없는 말만 한 무더기 늘어놓으시는 겁니까?”


어릴적에는 부모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이 왜 그리 다 잔소리처럼 들리는지,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려고도 안 했던 것 같다.
세상 안팎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이 감춰져 있는지도 모르면서, 알아야 할 게 있다면 내가 성장하면서 차차 알아나가고 싶었고 사회로 나가서 직접 부딪히며 깨우치고 싶었다.
그리고 내심 속으로는 살면서 일이 많아 봤자 뭐 얼마나 많다고 걱정부터 하나 싶어서 지나친 노파심이다 판단해버리고는 다른 세상을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내가 왜 그때 끝까지 듣는 모습이라도 보이지를 못했을까 후회가 뒤늦게 밀려온다.

어려운 일도 아닌 그 일이 졸음 참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못 미더워도 믿는 마음으로 자식을 바라보면서, 속으로는 찜솥에 김이 풀풀 나는 듯했을 텐데도 꾹꾹 잘 참아오신 게 놀라울 따름이다. 때가 되면 알겠지 하는 그 마음 안에 애간장이 시커멓게 탔어도 골백번은 더 탔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두부장수 라오양만큼 애간장 타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자식들이 자신을 도와 두부를 만들기는커녕, 세 아들 중 첫째 양바이예 빼고 나머지 둘은 아버지도 싫고, 더욱이 함께 두부나 만들면서 살고 싶지 않았기에 집을 떠난 것이다.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아 자식들이 결혼도 미루고 본인 곁에서 두부 만드는 일에 전념해주길 바라는 라오양의 모습에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할 것 같다. 누군가는 자식들에게 희생만을 요구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집안 사정 뻔하니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싶다.

먹는 것만 기억하고 얻어맞은 것은 잊는 성격인 아버지 라오양과 얻어맞은 것만 기억하고 얻어먹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첫째 양바이예, 가장 싫어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일이 아버지와 두부인 양바이순, 입이 한가하면 답답해 죽는 양바이리까지.
간단한 소개만으로도 이들의 덜그럭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버지 라오양이라는 인물 자체가 내 시선으로는 결코 호감스럽지는 않았다. 집안의 중대한 사항이나 자식들 장래 문제 관련해서도 늘 친구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자니, 차라리 친구와 소통하는 시간 대신에 자식들 말 한마디라도 경청해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의 눈빛으로 들여다봤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와 안락을 누리고 사는 형편이 되지 못하니 아버지는 아버지 대로 먹고 사는 일 하나만이 급급했을 테고, 자식은 자식 대로 그 밑에서 단순한 욕망도 억누르며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았을 테니 서로 뒤틀리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을 생각하면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비판할 수만도 없는 것 같다.

(P. 198) 옌진은 알칼리성 토지라 십 년에 구 년 꼴로 재난이 일어났다. 주로 한재가 아니면 농작물 침수였다. 현 전체의 삼십여 만 명 인구 가운데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겨우 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옌진 사람들이 비교적 야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밥을 먹다가 절반만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하는 셈이었다.


(P. 114) 모든 것이 그 놈의 입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 통틀어서 자신이 한 말과 행동에 후회한 적 한 번 없는 사람 없고 마음속 근심 하나 없는 사람 없을 테니, 그렇다면 이 책에서 공감 못 할 이야기 하나 없을 거다.

등장인물 중 두부장수 라오양의 둘째 아들 ‘양바이순’이 어릴 적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가슴에 묻고, 곡절이 많았던 옌진 땅을 떠나 이일 저일 배워가며 힘들게 지낸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애잔해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비빌 언덕 하나 없이 노력도 꽤 하고 지냈는데 과정보다 결과만을 따지고, 살면서 적당한 말 한마디 둘러댈 줄도 모를 만큼 유약했던 양바이순에게는 한숨 푹푹 나올 사정 또한 곧잘 생겨 한 곳에 정착하기가 어려웠다.

한 가지 일에 방법을 터득해서 여유를 갖게 되더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시간은 흘러 흘러 고단함이 주름이 되었을 양바이순의 떠올려지는 얼굴이 어쩌다가 들여다본 내 집 식구 주름을 본 것처럼 마음이 짠했다. 저자가 담백하게 담아내서 그렇지, 먹고 살기 어려워도 어쩜 이렇게 어려울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 앞날은 모르는 거니까.

(P. 269) 사람은 운이 따르면 문짝으로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새털 같은 입으로 사고나 치고 된통 당하는 짠내 풀풀 풍기는 이야기에 실소가 터지기도 하고, 딸을 잃고 추스를 수 없는 고통과 그리움에 이곳저곳을 한없이 걸어도 남는 거라고는 그저 자신의 발자국이었을 뿐인 아버지의 모습에는 눈물도 죽죽 흘렸고, 단 한 번의 실수일지라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어 후회하는 이의 모습에는 그를 타산지석 삼아 겸연쩍은 다짐도 은근슬쩍 해봤다.

더운 여름밤, 이렇게 남의 나라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여다보며 내 인생도 한번 되돌아보고, 그러다가 책 읽기를 멈추고는 잠시 옛 기억들 속에서 한참을 머물러보니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구나 싶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만큼 정말 다양한 인간군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사람경험 했다고 치기에는 일도 많고 탈도 많았다.

사느냐고 고생이라는 내 마음속 진심이 튀어나오게 할 만큼 참 성격도 다르고 기질도 다른 사람들끼리 섞여 살아가면서 부딪히고 갈등을 일으키는 모습에는, 세끼 먹고 사는 거 다 똑같고 달라 봤자 한 끼 더 먹고 덜 먹고 차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다름의 차이를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살면 안 되나 혼잣말도 했지만, 그게 또 우리 인생이구나 싶다.
내가 누군가에게 풍겼던 불쾌감과 흘린 먼지도 만만치 않을 테니 말이다.

마음까지 뜨끈하게 데워주는 공감되는 이야기들 덕분에 국적과 시대의 차이의 틈을 충분히 메울 수 있었고, 정곡을 찌르는 따끔함이 읽는 흥미를 놓지 않게 해줘서 야금야금 읽으며 여름밤 며칠을 재밌게 채울 수 있었다.
최대한 내용을 많이 숨기고 숨겼지만, 곱씹어 볼 문장들이 많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에 재미와 더불어 심란하고 복잡한 감정까지 느꼈던 <말 한 마디 때문에>였다.

(P. 365) 한 사람이 상대방의 생각에 거스름이 없게 되면, 자기 마음에는 약간 불편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과 틀어지는 것이 남에 의해 틀어지는 것보다 더 자신을 강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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