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insmile















(11-12)

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앞 세대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을 믿었듯이,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에 태어났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근거해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신’의 대체물로 ‘인류’를 선택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주변부에 속한 인간이고, 내가 속한 집단뿐만 아니라 집단을 둘러싼 거대한 공간까지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신을 완전히 내버리지도, 인류를 대체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내 생각에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신은 존재할 수도 있고, 그럴 경우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반면에 생물학적 개념이라서, 인간이라는 동물종 이상이 될 수 없고, 다른 동물종과 마찬가지로 경배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자유’와 ‘평동’의 의식(儀式)과 더불어 인류에 대한 숭배는, 동물이 신처럼 숭배되고 신이 동물의 머리를 지녔던 고대 숭배 신앙의 재현 같았다.


(14)

인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 여인숙에 머물며 기다려야만 하니 감옥으로 여길 수도 있겠고,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사교장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참을성 없는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숙을 감옥으로 여기는 건 잠들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방안에 누워 있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사교장으로 여기는 건 음악 소리와 말소리가 편안하게 들려오는 저쪽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넘긴다. 나는 문가에 앉아 바깥 풍경의 색채와 소리로 눈과 귀를 적시며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만든 유랑의 노래를 천천히 부른다.


(28-29)

완성을 미루고만 있는 우리의 작품이 형편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예 시작하지도 않은 작품은 그보다 더 형편없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면 적어도 남아는 있게 된다. 초라하지만 그래도 존재한다. 다리를 저는 내 이웃의 정원에 놓인 하나뿐인 화가에 핀 조그마한 식물처럼. 그 화분은 내 이웃에게 기쁨을 주며, 때로는 나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내가 쓰는 글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의 글 덕분에 상처받은 슬픈 영혼이 잠시 시름을 잊을 수도 있으리라. 그것으로 충분하고, 혹시 충분하지 않다 해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인생사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


(35)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언젠가 미래 끝자락에서 누군가 나에 대해 시 한 편을 쓸 테고, 그때 비로소 나는 나의 왕국을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신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이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39)

문학이란 예술과 사상의 결합이며 현실의 흠을 덜어낸 결과로, 인간적인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루어야 하는 목표다. 그것이 동물적인 본성의 여분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에서 비롯된 노력인 한에서 그러하다. 어떤 사물을 표현하는 것은 추한 부분은 빼버리고 미덕만을 보존하는 일이다. 들판의 푸름에 대한 묘사에서 들판은 실제보다 더욱 푸르다. 상상 속에서 묘사한 꽃의 색깔은 세포의 실제 생명력 이상의 영속성을 갖게 된다.


(40)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뒤에 오는 이들에게 우리라는 존재의 모든 것은, 우리가 강렬하게 상상할 것들, 즉 상상을 구체화하여 현실로 이루어낼 것들이다. 역사는 빛바랜 파노라마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해석들의 흐름과 믿을 수 없는 증인들의 혼란스러운 합의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소설가이고 우리가 본 것을 말하는데, 보는 것은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 복잡한 일이다.


(44)

모두가 잠들어 적막한 집, 벽 뒤편에 걸린 괘종시계가 새벽 네시를 알리는 명징한 종소리가 들린다. 난 아직 잠들지 못했고 잠들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잠들지 못하게 하는 걱정거리가 있어서도 아니고 편히 쉬지 못하게 하는 육체적인 고통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내 것인데도 낯선 육체는 죽은 듯한 침묵에 싸인 채 가로등의 희미한 달빛 때문에 낯선 육체는 죽은 듯한 침묵에 싸인 채 가로등의 희미한 달빛 때문에 더욱 쓸쓸한 그늘 속에 누워 있다. 너무 잠이 몰려와 생각을 할 수 없고, 잠을 이룰 수 없어서 느낄 수도 없다.


(56-57)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죽음의 불가사의함이야 어차피 내가 꿰뚫어볼 수 없으니 그만두고, 삶이 멈출 때 육신의 감각이 궁금하다.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어렴풋이 두려워할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삶의 전투를 잘 이어간다. 그러다 늙거나 병들면 자신이 심연이라고 인정한 무(無)의 심연을 두려워하며 거의 쳐다보지 않는다. 이 모두가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다. 특히 죽음이 일종의 잠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재고의 가치가 없다. 죽음은 잠은 닮은 점이라곤 전혀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할까? 잠의 핵심은 깨어나는 데 있으나 알다시피 죽음은 그렇지 않다. 만일 죽음이 잠과 비슷하다면 죽음에서 깨어난다는 개념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죽음을 깨어나지 않는 잠이라고 생각하는 이건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다. 강조하거니와 죽음은 잠과 닮은 점이 없다. 왜냐하면 잠잘 때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가 아는 무엇과도 닮지 않았는데, 어느 누구도 죽음이나 죽음과 비교할 만한 것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63-64)

책을 읽고 꿈을 꾸고 글쓰기를 생각하면서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교양 있는 삶을 산다면. 삶이 어찌나 조용히 흐르는지 권태에 빠질 것 같지만 너무 생각이 많아 권태에 빠지지 않는 삶을 산다면. 감정과 생각에서 멀리 떨어져 이런 삶을 살되 감정에 대한 생각과 생각에 대한 감정. 그 속에서만 산다면. 꽃들에 둘러싸인 탁한 호수처럼 태양 아래 금빛으로 고여 있다면. 인생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고결한 영혼을 그림자 안에 지닌다면. 꽃잎에 앉은 먼저처럼 오후의 바람을 타고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저물녘의 무기력을 따라 내려앉아 더 큰 것들 사이에 묻힌다면. 즐거움도 슬픔도 없이 명료한 이해만 갖고 빛나는 태양과 머나먼 별들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된다면. 그 이상 원하지도 그 이상 갖지도 그 이상 되지도 않는다면…… 굶주린 자의 음악, 맹인의 노래, 이름 없는 길손의 유골, 짐도 목적지도 없이 사막을 떠도는 낙타 행렬……


(66)

고독은 나를 황폐하게 만들고, 동행은 나를 억압한다. 다른 사람이 곁에 있으면 생각이 방향을 잃는다. 모든 분석력을 동원해도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방심 상태에서 곁에 있는 존재에 대해 꿈꾸기 때문이다.


(78)

독서로 자유를 얻는다. 독서로 객관성을 획득한다. 나는 내가 되기를 멈추고,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존재가 되기를 그만둔다. 내가 읽는 것은 때로 나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의복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명료함이고, 만물을 비추는 태양이고, 고요한 대지에 그림자를 드리운 달이고, 바다로 이어지는 거대한 공간이고 녹색 이파리를 흔드는 나무의 견고함이고, 농장 연못에 깃든 평화이고, 포도나무 덩굴이 우거진 해안이 비탈길이다.


(81-82)

환경은 사물의 영혼이다. 모든 사물은 나름대로 자신을 표현하고 이 표현은 외부 조건으로부터 주어진다. 세 가지 요소가 서로 교차하며 한 사물을 이루는데 이는 물질의 양,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 사물이 놓인 환경이다. 이를테면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책상은 나무로 만들었으며, 이름은 책상이고, 이 방에 속한 가구 중 하나다. 이 책상에 대한 생각을 글로 옮긴다면, 글은 이것이 나무로 만들어졌고, 책상이라고 불리며, 일정한 용도와 목적이 있다는 개념들로 구성될 것이다. 또한 책상 위에 놓인 사람의 배열 상태에 따라 영혼을 드러내는 물건들을 수용하고 반영하며 그 물건들에 의해 변형된다는 개념이 포함될 것이다. 책상의 색깔과, 색의 낡은 정도, 얼룩이나 흠 등은 외부 조건에 의해 생긴 것으로 사실 나무라는 본질보다 이런 것들이 책상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책상으로서 존재하는 영혼의 내밀한 본질은 역시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고, 바로 그것의 개성을 이룬다.


(92)

지금은 비록 불완전한 내 글을 보며 나는 눈물을 흘리지만, 먼 훗날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다면 내가 이룰 수도 있었을 완벽함이 아니라 이 눈물에 더 감동받을 것이다. 완벽한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울지 않았겠지만 더 이상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완벽은 결코 구현되지 않는다. 성인(聖人)들도 눈물을 흘리고, 그래서 인간이다. 신은 침묵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은 사랑할 수 있지만 신은 사랑할 수 없다.


(100)

내가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마음 깊이 절실히 느끼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낌을 가지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생각을 가지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느끼는 것이 사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살지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고, 느끼는 것은 생각을 키우는 양식을 뿐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