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2)
바질은 이모진 비슬에게 달려가 자전거에 앉은 채 공연히 그녀 앞에 있었다. 그때 바질의 얼굴 무언가에 끌렸는지 이모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미인으로 자라 몇 년 후면 많은 무도회에서 여왕으로 뽑힐 아이였다. 지금은 큼직한 갈색 눈동자와 아름다운 모양의 큼직한 입술, 여윈
광대에 어린 짙은 홍조 때문에 땅의 요정처럼 보였고, 아이가 아이다워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얼굴을
좋아하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바질은 미래를 내다보는 기분이었고, 이모진의
생기가 마력처럼 단숨에 그를 덮쳤다. 여자란 그와 정반대되는, 그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존재임을 난생처음 깨달으면서, 즐거움과 고통이 뒤섞인 포근한 냉기가 엄습해왔다. 이 명확한 경험을 그는 즉각적으로 의식했다. 여름 오후-보드라운 대기, 그늘진 산울타리와 소복이 핀 꽃들, 오렌지빛 햇살, 웃고 떠드는 소리,
길 건너편에서 뚱땅거리는 피아노-는 이모진에게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이 모든 것을 떠난 향기는, 앉아서 방실거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모진의 얼굴로 스며들었다.
(63)
오랜 전통처럼 사내아이들은 어른이 된다는 개념에 집착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제약을 이따금 푸념하면서 말이다. 반면에 소년으로 지내는 것이 마냥 좋은 시절도 오랜
기간 존재하는데, 그 만족감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된다. 바질은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더러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에게 긴 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긴 바지가 갖고
싶긴 했지만, 의상으로 따지자면 풋볼 유니폼이나 경찰 제복, 심지어
밤에 뉴욕 거리를 누비는 괴도 신사들의 실크해트와 긴 망토만큼의 낭만도 없었다.
(112-113)
열다섯 살은 참으로 애매한 나이다. 손가락을 딱
짚으며 “그땐 이랬었지”라도 말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우울한 제이퀴즈는 열다섯 살을 언급하지 않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곤 소년기의 한창인 열세 살과 일종의 가짜 청년인 열일곱 살 사이의 언젠가, 두 세계 사이를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면서 생소한 경험들로 끊임없이 떠밀리고 어떤 대가도 치를 필요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가려 헛되이 몸부림치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것뿐이다. 다행히도 그 시절에 우리가 어떻게 처신했는지는 우리 자신도 또래들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해 여름 바질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 들여다보기 위해 커튼을 걷어보려 한다.
(175-176)
창밖으로는 지나가는 차들의 빛줄기가 가을의 황혼을 가르고 있었다. 이 자동차들 안에는 위대한 풋볼 선수들과 사랑스러운 데뷔탕트들, 신비로운
여성 모험가들과 국제 스파이들이 타고 있었다. 부유하고 유쾌하며 매혹적인 이 사람들은 뉴욕의 화려한
댄스파티와 비밀스러운 카페에서, 혹은 가을 달 아래의 옥상 정원에서 이루어질 눈부신 만남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바질은 한숨 지었다. 이런 낭만적인 일에는 나중에
낄 수 있으리라. 먼저, 가지 넘치고 화술이 능란한 동시에
강인하고 진중하며 과묵한 사람이 될 것. 너그럽고 솔직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약간은 신비롭고 섬세하며 애수 어린 비통함까지 깃든 사람이 될 것. 밝으면서도
어두운 사람이 될 것. 이런 점들을 조화롭게 버무려 단 한 사람으로 녹여낼 것. 아, 그러려면 할 일이 있었다. 완벽한
인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바질은 야망의 황홀경에 취하고 말았다. 잠시 더 그의 영혼은 질주하는 빛을
따라 대도시로 향했다. 그러다 그는 결연히 일어나 담배를 창턱에 비벼 끈 다음 전기스탠드를 켜고 완벽한
인생의 요건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257-258)
구제 불능의 주벌이 소유욕을 내뿜으며 다가오자, 바질의
심장은 분홍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장을 이리저리 배회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우유부단함의 안개에
갇혀버린 바질은 베란다로 나갔다. 때 이른 눈이 대기에 흩뿌려지고 있었고, 별들은 차가워 보였다. 별들을 올려다본 언제나처럼 그의 별들, 야망과 고투와 영광의 상징들이 보였다. 별들 사이로 바람은 그가
항상 귀 기울여 찾던 높은 원음(原音)을 나팔 소리처럼 울렸고, 전투를 위해 찢겨 가늘게 흩어진 구름은 열병식을 거행하며 지나갔다. 비할
데 없이 찬란하고 장엄한 광경 앞에, 사령관의 노련한 눈만이 그곳에서 하나의 별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