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시 책소개는 잘 뽑아야 한다. 타이완의 <스카이 캐슬>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타이완 작가 우샤오러는 소녀시대 주축 멤버와 나이가 같은 1989년생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에 해당하는 국립타이완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는 대신, 작가의 길을 선택한 것 같다. 오랜 세월 과외교사로 일한 자신의 체험을 살려 <상류 아이>를 발표했다고 한다.
<상류 아이>는 연대기적 배치가 아닌 과거와 현재 또 다시 과거를 오가는 다소 복잡한 시간 구성을 취하고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간의 배열과 재구성이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다만, 현재의 사건을 다루는데 있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설정이다. 하긴 과거가 모아져서 현재가 되는 거니까.
모든 것은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천위셴과 양딩궈의 아들 양페이천(제임스)이 사장 테드네 아들 차이하오첸(크리스)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면서 시작된다. 참고도 양딩궈는 사장 테드네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이다. 5년 째 이런저런 낙하산에 밀려 승진을 못하고 있다. 한 때 잘사는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 양이잔이 투자사기에 걸려 신이취라는 부자동네에 있던 아파트를 날려 먹으면서 시골 출신 천위셴이 꿈꾸던 강남 아파트, 아니 타이베이 부촌 지역 아파트에 입주하겠다는 소박한 꿈(?)은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아니 왜 이렇게 우리나라의 그것과 상황이 비슷한 거지. 결국 25평 정도의 작은 아파트에 살게 된 천위셴네 가족. 너무 서둘러서 대학 시절 룸메이트였던 친구 양이자의 오빠 딩궈와 결혼해서 아들 페이천을 낳은 국숫집 딸 천위셴은 가계대출을 갚고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직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회사에서는 까칠한 상사 예더이에게 호되게 갈굼을 당하고, 자신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해 줄 것처럼 보였던 신이취 아파트는 임신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그것만 바라보고 혈액암에 걸린 시모의 병간호까지 마다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그리고 이제 곧 페이천이 초등학교에 진학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공립초등학교는 맞벌이 부부에게 바람직한 선택지로 보이지 않는다. 이미 유치원에서부터 아이 픽업 문제로 골치가 아프다. 이런 와중에 테드 사장과 량자치 부부의 아들 하오첸의 생일파티에 갔다가 페이천이 하오첸과 잘 어울리게 되면서 천위셴 부부에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타이베이의 유명한 사립초등학교에 하오첸과 같이 진학하면 어떨까라는 그야말로 너무나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물론 천위셴 부부에게는 막대한 학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언감생심이었지만, 량자치 부부는 페이천의 학비까지 자신들이 지원하고 입학 문제도 해결해 주겠다고 말한다. 세상에나, 이럴 수가! 이제 천위셴 부부에게 드디어 대운이 틔우기 시작하는 것인가. 그전에 좀 찜찜한 점들이 있긴 했지만 이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그런 제안이었다.
마냥 천위셴 부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되었을까? 그렇다면 세상이 너무 만만하게 보이지 않을까. 독자들이 예상하는 대로 이야기는 흘러가기 마련이다. 소설의 초반부 어디선가 “그 뉴스”가 터지고 천위셴의 친정엄마가 전화로 왜 방송에 자신의 딸과 손주가 나오는지 묻는 장면이 나오지 않던가 말이다. 흥미로운 전개로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는 순간에, 작가는 이렇게 단서를 심어 두었다.
쑹런사립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경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연필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벌써부터 그런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는 장면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참 천위셴은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던데, 혹시 그 중에 <스카이 캐슬>도 있지 않았을까. 작가는 한국 드라마가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살짝 가미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국 드라마가 세상에서 인기를 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천위셴은 하나 뿐인 아들 양페이천의 학업 뒷바라지를 위해 어렵게 들어간 직장까지 때려 치우고 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제임스가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또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주자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이룬 것 같은 순간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잠시 뿐, '성적바꿔 치기' 사건과 금융업계를 주름잡는 대단한 집안의 딸 린판샹과 엮인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마치 줄타기를 하듯 위태롭게 버텨 가던 관계가 순식간에 붕괴되어 버린다.
결국 천위셴은 자신의 절제되지 않은 탐욕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끼고 싶어했던 상류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신기루에서 벗어나고, 자신과 아들에게 허용된 곳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이런 결말은 상투적이면서도 또 동시에 너무 현실적인 거라 더 할 말이 없었다. 국립타이완대 출신의 작가로 다년간의 과외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라 그런지 교육에 모든 것을 불사르는 타이완식 리얼리즘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한국의 교육열도 타이완 못지않게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지 않은가.
우샤오러가 창조한 서사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페이천이 아니었을까? 자식의 학업적 성취와 성공을 위해 무리수를 둔 엄마 때문에 공정한 경쟁은 출발점부터 무너져 버렸다. 나중에 모든 사건이 끝난 뒤에도 아들은 엄마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엄마는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지만 과연 계획대로 진행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초등학교 1학년은 미래를 예단하기에 너무 어리니까 말이다. 그리고 페이천의 미국 유학이라는 미래의 거대한 도전에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볼 때, 천위셴의 욕망이 여전히 살아 꿈틀거린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우샤오러 작가는 부모라면 누구나 기대할 수밖에 없는 자식의 성공, 교육에 대한 투자라는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주제를 가지고 독자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천위셴이라는 문제적 인물의 심리 상태를 통해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추체험을 관찰할 수 있었다. 과연 내가 천위셴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지 가늠해 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동안 느낀 재미 중에 하나였다. 과연 타이완판 <스카이 캐슬>이라는 광고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고도의 심리전과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각축을 벌이는 치열한 교육 현장에 대한 묘사들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제 더 강력한 주제를 담은 같은 작가의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를 읽을 차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