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한국중앙공산당


달콤한 말


우리는 더 이상 상품을 '소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가령 어떤 물건을 불가피하게 구매해야 할 때에도, 그것이 물가 변동에 따라 정당하게 '지불된다.'고 말할 때도, 늘 노동력의 착취가 내재한다고 말한다. 당신이 기업에서 생산된 제품을 구매하든 협동조합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구매하든 결국 노동력의 소모는 동일하다. 노동력의 착취는 시간의 길이를 언제나 연장시킬 수도 있고, 자본가들이 존재하는 한 그러한 상품들은 계속 과잉 생산될 것이다.


'잉여 가치'는 자본가들이 창출하는 고정 자본과 유동 자본의 지분에 따라 형성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윤 추구를 위해서라면 막대하게 창출된다. 당신은 그것을 '아르바이트'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장·단기직'이나 '고용' 등이라 말한다. 모두 자본가들이 고안한 개념이다. 우리의 요구는 '법'이 담을 수 없어야 한다. 그리고 법의 상품이 정치가 되어 언론에서 소비될 때조차, 우리는 '선거를 치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즉, '나를 죽이는 사람을 내가 뽑는다.'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선거철이 되면 분명 우리는 그러한 언론 선전과 홍보에 대비해야 한다. 


당신은 동네에 있을 때조차 사는 곳을 늘리고 '토지를 계약하여 매매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당신의 지대가 아니다. 그곳에 사는 당신의 자녀들은 자본가 간의 거래로 행해진 자손들까지 물려주어 토지를 '합법적'으로 약탈하고, 자신의 나라를 파는 매국노에 다름없다. 토지 소유를 일부분 정당화해야 한다는 말도 차분히 살펴보시라. 그것은 거짓말이다. 


부르주아 정부는 살인마이다. 우리는 '민주화'로 인해 '평화롭게' 무기를 더 이상 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전투'는 끝났는가. 노동자를 연행하는 시도는 그것의 착취에 대한 명분이 아닌가. 상대를 알려면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반대로 생각할 수 없다. 자신이 처한 관점이 전부인 것이기에, 자본가의 말이 옳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점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관점을 관철하여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랬을 때, 세상이 주는 정신적 가치에 막연하게 감사하며 안분지족을 추구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이기에, 자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제국주의와 파시스트의 부상에 힘입은 모든 자본주의 제도의 그늘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저주받은 이들을 차례로 조사하여 그러한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노동자에게 돌아가 자본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큰 임무이다. 당신의 자녀들은 지금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매매하여 착취된다.' 그리고 자신들을 문명인이라 칭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원시인보다 못한 자들인 것이다.  


예전부터 가끔 내게도 총 한 자루가 있다면 좋겠다. 사유 재산을 내놓지 않는 부르주아지 집단을 철저히 조사하고 정확히 겨냥하여 쏠 수 있다면 나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 폭력은 나쁘다고 말하면서 부르주아지 하수인들의 총기 사용은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도 재산의 환수가 아니라, 노동자에게 '반납'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일수록 배고프지 말아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과연 누구의 편에 가담하는가. 계급 투쟁은 지금도 존재한다. 모든 생산 수단의 명의는 부르주아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것이어야 된다.


비록 프루동 자신의 관점은 그릇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이 남긴 노동자의 유산은 우리에게도 역시 중요하다. 


'그것을 노동자도 생각할 줄 알기 때문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