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한국중앙공산당


출판사와 친일 문학


식민지의 유산이 잔존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군부 독재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유신 정권하에 정권을 잡은 이들은 정치·경제적 지위까지 독점하며 민주 공화국을 강타했다. 그들은 여전히 20세기의 ‘미시마 유키오’를 동경하며 '이광수' 등과 같은 인물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미화한다. 이와 반대로, 한강 작가 ‘노벨 문학상’ 수상과 같은 쾌거나 귀감을 준 영향력도 있지만, 지금의 출판계 전반의 경영권이 법제화됨에 따라 자본 기업과 결탁되어 관련 작가의 출판 권한을 자본 기업이 결정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착오를 남긴 것이다. 이제는 작가들이 자본의 옹호를 위해 문학의 글쓰기를 대신하고 있다. 이는 식민지 청산의 문제에서 가히 ‘친일’ 행적과 다름없는 식민지적 관점이 자본의 관계에서 가장 유효하다는 말이다. 더불어, 현대 비평의 순수 문학 관점에서 피식민지 국가는 성립할 수가 없게 된다.  


특히 글쓰기 위한 독서 방식에서 큰 차이가 발생한다. 이를테면 ‘친일’을 추구하여 읽는 것과, 상대를 비판하기 위해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전자가 작가를 염탐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작가가 남긴 행적을 비판하기 위해 치밀하게 독서하는 것이다. 그러한 인용 및 발췌를 토대로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활용할 여지가 남는다. 예컨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는다고 했을 때 그러한 주장에 일부 동의하는 것과, 전적으로 파헤쳐 그 모순을 체계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상반된다. 그리고 그러한 독서 행위가 과연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 이는 피식민지의 역사를 거친 나라에 해당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식민지 국가 내의 ‘순진한 국민’들이 반드시 거론되어야 하는 ‘역사적 논의’이다. 


이러한 편파성를 두고도 ‘중립’과 ‘평균 이윤’이라는 위치를 고수하는 자본의 시각적 착시야말로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민주적’이라는 착각에 호소하며 그 자신이 보수를 대변한다고 믿는다면 그러한 갈피를 상실한 것이다. 하물며 이와 관련된 정치적 협상조차 노동자의 요구를 담아 내지 못한 채 자본가 중심의 협상 구도가 불가피했다는 식의 변명으로 일축한다면 그것을 거부조차 못하여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이 또한 과오인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죄를 범하고 있다. 특히 민족 문학을 위시하여 주름잡던 백낙청이나 이어령 등과 같은 인물이 군부 독재 시절을 위안 삼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부르주아 사회의 큰 거물로 부상한 것은 문학을 팔아 상인이 된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적어도, 황석영 작가, 그 자신은 그러한 비평적 견해를 몹시 비판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묵은 논쟁보다, 오히려 노동자 문학의 실천에 있다. 그것은 곧 이 전반의 모든 것을 포착하여 비판하기를 선택하여 글쓰기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러나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소속된 국가가 식민지나 피식민지였는지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면 과거의 정권을 미화하며 예술마저 ‘상업적 홍보’의 명분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은 별수없는 것인가. 도대체 이 무슨 염치없는 수작일까. 동일한 부류의 자본가 집단 내 대다수의 경영권을 가진 이들도 사태의 심각성이 전무하다. 

 

다음 문장을 살펴보자.

 

이 경우 타인의 미지불 노동을 착취하고 취득하는 행위는 자본 소유자가 마땅히 수취해야 할 임금으로 둔갑한다. 이러한 논리의 극치는 1859년 12월 19일 뉴욕 집회에서 미국 노예 제도 옹호론자인 변호사 오코너가 행한 ‘남부에 정의를’이라는 구호 아래 행한 연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여러분, 흑인을 노예 상태로 운명 지운 것은 다름아닌 자연입니다. 자연은 그에게 강인한 체력과 노동할 힘을 부여했으나, 정작 그 힘을 다스릴 지능과 일하려는 의지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청중의 박수) 흑인에게는 그 무엇도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노동할 의지를 거두어간 자연은 그 대신 그 의지를 강제할 주인을 예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흑인에게 적합한 풍토 속에서 그 자신은 물론 그를 다스리는 주인을 위해 스스로를 유용한 종으로 변모시킬 주인을 점지한 것입니다. 흑인을 자연이 정한 질서 속에 머물게 하는 것, 곧 자신을 관리할 주인을 대면하게 하는 것은 결코 불의가 아닙니다. 그에게 노동을 강제하고 그 과정에서 그를 관리하며 그 자신과 사회에 유용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주인이 투여한 노동과 재능에 대하여, 주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보상을 거두게 하는 것은 결코 흑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가 아님을 단언하는 바입니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1859년 12월 20일자』

 

이 주장은『자본』에서 발췌된 기사 중의 하나이다. 오코너라는 이 미국 변호사는 뉴욕 시에서 ‘남부에 정의’이라는 구호로, 미국 남부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여 청중의 박수를 얻었다. 이 발언이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단순히 ‘흑인의 권리’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노예제’와 직결된 경제·역사의 기나긴 계급 투쟁의 역사를 거쳐 온 또 하나의 줄기이자 증거인 셈이다. 문장을 지나칠 때, 이러한 논거의 근거를 자칫하면 발언자의 모호한 주장으로 여겨 정당한 근거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한다는 것은 그러한 의도를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온전히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현재의 논란을 부추긴다는 점을 간과한다. 이처럼 이들은 이전부터 ‘흑인을 자연적 힘’으로 규정하고, 동시에 그러한 원리에 따라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전제를 대놓고 말한 것이다. 

 

피식민지를 언급하기 이전에 막연한 민족 내 인종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가장 큰 핵심은 사회적 요소의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경제·역사 분석의 본질이 정치적으로 가닿을 때 의미 있는 것이다. 현상의 외피에만 익숙할수록,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그러한 문제를 간과할 소산이 매우 크다. 과거에도 이들 중에는 ‘친일’이라는 과오를 범한 이들도 있었다. 이는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불가피한 변명’과 허심탄회한 호소로 설득하지만, 실제로 그것의 판단은 피식민지의 노동자들이 겪은 문제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며, 이보다 더 심각한 상태를 이어 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지식 계급하에서 그 자신이 중간 계급의 위치에 속했음에도 노동자를 배척한 채 자신들의 작가상을 미화했다는 것이 된다. 그것은 곧 ‘노동자는 독서를 하지 않는다.’는 큰 선입견과 편견을 부추기고, 이 부르주아 작가들이 단정하는 '까막눈 노동자'라는 왜곡된 시각을 주입하여 이제는 그러한 노동자 운동의 진행을 가로막는 걸림돌 이상의 존재가 된 것이다. 

 

그들은 평생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발췌하여 마르크스·엥겔스의 몇 마디를 소개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인의 권능마저 지녔음에도 정작 자신들이 몸담은 사회 전반의 출판사에 대해 한 마디의 말도 전하지 못한 채 그저 세월을 견뎠다는 ‘정신 승리’를 보여 준 것은 오히려 그쪽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렇게 읽힌다. 그렇다면 지금의 ‘미시마 유키오’ 현상은 그것의 종언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고언에 해당된다. 그것은 더 이상 언급조차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본 비평계의 순진한 가라타니 고진 씨가 그 자신이 『자본』 Ⅰ권의 서론 정도만을 잠깐 읽고는 『자본』을 온전히 읽었다고 말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존경심이 아니라, 비웃음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이 지점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김윤식 평론가 역시 그 자신이 큰 과오를 범했다.  


출판 권력의 형성과 경영권 (주주 자본)의 관계

 

군부 독재의 여파로 많은 정치적 이윤을 남기고 있는 정치권 인사 중에서도 그들의 자손들은 대대로 군주의 시녀로 지내거나, 또는 유신의 대장을 역임하고, 또는 민주주의의 우두머리를 지내면서 그러한 최정상이 주는 만족을 자손에게 물려준다. 한국은 <시공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출판사들이 이러한 부르주아 역사관을 정당화시키며 서민들에게 자신들의 '고귀한' 가치를 일러준다. '삼위일체'의 경영권의 중심하에 이들에 대한 부르주아 '교육'을 주입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책의 소비자들은 이러한 자본가들이 현재의 출판 문학계에 거두가 된 출신 배경 따위에는 관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출판사의 운영도 결국 자본과 결탁되기에 그것은 매주 열리는 주주 총회의 참석만으로도, 임금 노동자들이 겨우 받는 월급의 배가 되는 기업가의 이득을 창출하는 기회가 된다면, 서민들이 남긴 주식의 손해가 결국 경영자들의 손으로, 그리고 그것이 다시 이윤의 약탈 경쟁으로 심화되어 자본가의 독점 형태를 구축하게 된다.


모든 세계 은행과 더불어 '자신들의 중재 권한'을 법적으로 정당화시키고, 또는 각국의 금융법으로, 심지어 토지 및 사유 재산까지 도구화하여 자신의 소유라고 자부하고 만 것이다. 이제는 부르주아적 정신의 가치를 교육으로 치장하여 문학인들에게 정치적 입장을 수단화시키면서 노동자를 배척하고, 사상계 전반을 연출하여 <교양인>, <문학동네>, <시와서>, <현대문학> 등과 같은 여러 출판사에도 영향력을 미쳐 그들만의 연합하에 막대한 소비 경향을 부추기는 유행을 생산하면서 국내 시장의 상품 소비를 유도하고, 과대 포장된 '책'을 납품하여 결국 자신만의 교육적 목적에 합당한 사례를 주장이라 우기는 책들이 표면화된다. 실제로 1969년 5월 진행된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 논쟁이 남긴 흔적은 일본 작가가 그 자신의 '극우화'라는 일면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적 파시스트의 부흥을 지지함을 대강단에서 연설한 것에 다름없다. 그들 중 일부가 반발했으며, 그것은 미시마 유키오의 업적으로만 치부되었다. 그러한 논쟁의 여파는 존재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 작가들의 일부만이 '친한파'라는 말을 내세웠고, 세간의 시선을 무릅쓰고 한국의 식민지적 유산에 대해 자신의 과오를 겨우 인정하였다. 


임종국의 헌신을 새기며


최근 위안부 피해자 분들에게 직접 사죄하신 무라오카 다카미스 씨가 별세하셨다. 그는 자신의 선조가 범했던 과오에 대해 책임을 묻고 피해자 분들을 정성스레 모셨다. 그것은 채만식 작가의 모호한 반성과도 비견되는 행보이다. 대부분은 일본 국민마저 이러한 역사적 피해 사실에 대해 자신들의 경제적 수탈 및 약탈 과정과 관련된다는 시각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쉽게 식민지 근대화 및 개화론에 동화된다. 사람들은 단순히 '민주적 교육'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그 실상은 모호한 관념이 도배된 채 가치의 역사를 자본가 우두머리를 위한 「헌법」 기초를 토대로 삼아 정신적으로 주입시켰을 뿐이다. 그들은 지금도 언제든 토지와 사유 재산을 옹호할 수 있는 막강한 법적인 관할의 주체적 위치와 막대한 자본, 그리고 경영권을 갖고 있다. 반면, 임종국은 그 자신이 비록 친일 집안이었지만 이러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비평계에 종사하는 대부분은 저명한 가문 출신이라는 편견이 생겼을 정도로, 이러한 가문과 무관하게 말해야 하지만, 친일을 정말로 비판한다면 적어도 자신이 가진 것을 '선의의 기부'가 아니라, 노동자 국가에 환수하겠다는 지지 의사 정도라도 표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적 시선'을 신경 쓰느라 소극적인 침묵을 보이는 것은, 그 자신의 명예를 함부로 놓기를 꺼리거나, 여태껏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활동의 종사가 지금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에 다름없다. 그리고 외양으로 나타난 현상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나 임종국은 결국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였고, 그것의 의미가 단순히 가문의 행적에도 있지만, 식민지의 과오를 분명하게 짚은 증명인 것이다.


오늘날 '민족문제연구소'의 존재는 단순히 「헌법」의 위상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역사적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은 더 이상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모든 식민지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유효하며 그 반대의 이면에서도 꾸준하게 헌신한 이들에게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는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가 형성된 기틀을 일본 국민들도 알아야 할 시기이다. 문학이란 미국의 증권 거래소를 말하며 기껏 세계 민족의 부르주아 행사를 위한 노벨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제 무대의 가난한 작가들에게 있다. 그렇다면 세계 문학을 소비하는 지금의 부르주아 비평가들은 자본 시장의 상인들인 것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