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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앙공산당


가장의 책임에서 노동자의 해방으로, 


누구나 사랑은 쉽지만 첫 이별은 두렵다. 제아무리 그 자신이 상대에게 사랑의 헌신을 보여 주더라도, 퇴짜를 맞거나 고무신 거꾸로 신느냐는 말이 나돌 정도이니 말이다. 지금도 부르주아 사회의 일부로 편입되기 위해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는 이들에게 구애 행위란 예전만큼의 애정이 주는 일이 어떠한 사회적 보조로도 불충분한 상태 역시 존재한다. 특히 청년 간의 교제나 부부 생활보다, 가족을 이룬다는 그 결정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안다면 결혼 생활자들의 육아 비용에 비하면 두 사람이 짊어지는 시간은 너무나 고된 것이다. 이들에게 잠깐의 시간이란 한 사람이 자녀를 데리고 시댁이나 친정을 갔을 때의 숨 돌릴 여유가 그나마 이들에게 찰나의 휴식인 셈이다. 이 시간에도 이들은 생계 노동을 위해 사회화가 되어 '이미 충분히 철이 든 존재이다.' 가족을 이룬 사람이라면 이 주장을 참고만 하시라. 반대로, 그동안 '결혼 제도에 반대한다는 것'이 세간의 시선을 늘 고려하는 결정이라는 바를 말하고자 한다. 


언젠가 자본주의 발달이 심화된 형태로 인해 가부장제의 폐지가 이뤄진 시점에서는 그것의 제도적 시행보다, 오히려 그것과 무관한 다자 구조의 형성을 고려하는 편이 알맞을 수도 있겠다. 물론 그러한 선택까지 개인이 더 이상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기존의 가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족의 생산으로 인해 지금의 청년들은 그 사회의 편입 과정에서 결혼 제도로 인한 자본주의의 비효율적인 고민을 안게 된다. 그렇다면 가부장제가 주는 논의 자체가 이들을 서로 다른 존재로만 인식했을 소산이 크다.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생산한 기존의 사회적 선입견 및 편견과 닮는다. 결혼을 이룬 가정에서도 가장의 책임은 누구나 견디기 어려운 것임에도 이를 한 사람의 희생이라 말한다면 '평균 소득' 이하의 가장들은 매번 눈칫밥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버틴 것이 된다. '가사 노동'의 안배나, '육아'의 비중의 측면에서 지금도 이들은 많은 노력을 병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공교육을 통한 어린이집 및 보육원이 대신함에도 2024년의 「보건 복지부」 통계 보고에 따르면, 보호 조치 아동만 1,978명, 연간 이혼 건수는 9만 1,000건, 18세 한부모의 84.2%는 이혼 부모였으며, 18만 5,000가구에 달했다. 양육 실태는 미취학 아동의 혼자 있는 시간은 2.2-2.5 시간에 달했다. 이 통계 자료는 그동안 사회 제도가 보장되지 않은 채 방치된 아동들의 수가 생계 위협이나 결혼 생활에 불만족 등을 겪는 성인들과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 이는 2024년 기준의 통계 자료들에 기반하지만, 현재 2025-2026년은 육아 복지 제도와 저출산 감소의 영향을 어느 정도 보완하려는 시도가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밝히고 싶은 것은, 한국은 사회 복지 제도의 무상화가 전면적으로 이뤄진 적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한 시도는 늘 '포퓰리즘'으로 인한 선택적 복지로 한정되었고, 자녀 양육을 위한 고용 내 육아 휴식 기간 정도가 제도적으로 요구됐지만, 그것은 자본가 기업이 허락하는 한에서 법제화된 측면이 대다수이다. 이는 곧 부르주아 제도가 남긴 유산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는 「헌법」의 정신마저 각색하여 자본주의 경제 문제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해소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를테면 변호사 선임 비용이나 재산 분할, 또는 이혼의 명분이 각양각색이고, 노년층은 50대 정도가 되면 이혼의 여부를 선택하도록 제안하는 요구나, 예비 신혼 부부들의 결혼식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요구 등도 다수 보인다. 그렇다면 세대를 떠나, 이러한 요구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들 모두 결혼 여부보다, 이혼을 전제로 사고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결혼 풍습에 대한 관념적 현상을 다루던 사회 경제에서 심화된 자본의 격차 문제를 다루는 경제 사회 문제로 점차 이동 중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매체에서도 결혼이나 연애에 대한 청사진을 홍보한 측면이 강하지만, 그것을 시청하는 연령층은 이제 중·장년층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이와 관련된 방송에서는 이혼 가정에 대한 개인적인 심리 상담까지 노출시킨다. 이러한 주제는 더 이상 노동자의 요구를 전혀 담아내지 못한다. 오히려 자녀를 위한 길인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비극을 희화하는 지름길로 작용한다. 결국 청년들은 결혼을 아예 포기하거나, 극단적으로 실연의 상처를 범죄로 극복하게 된다. 


지금은 1:1 기준에서 정식의 부부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 꼭 결혼식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장인 어른에게 문안 인사를 뵙고, 어느 정도 동거 생활을 유지하다가 동사무소에 등록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비록 그것이 새롭더라도, 실제로는 결혼 제도를 구성하는 일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한 결혼 생활 이면에는 서서히 가족으로 인해 부과되는 경제 문제가 결부되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일면적인 자녀의 양육만으로는 가족 내 부모들의 책임 소재하에 자녀 본분에 대한 부분적이고, 파편화된 문제를 다루며 전반적인 양육 문제가 개인화될 위협을 초래하여 오히려 다자 구조보다 우려가 크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경제 제도의 문제를 고찰함과 달리 이는 사회적 관계의 문제이므로, 사회 구조 형태가 서서히 전환된다. 그리고 사회적 변동에 따라 급격한 요구가 전개될 수도 있다. 이 지점이 중요한 것이다. 마치 '화려한 결혼식'만이 부르주아 사회의 일환을 대변하는 기준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본래 결합보다 상실을 더 두려워한다. 결혼 제도에 반대한다고 해서 상대가 막연하게 떠날 것이라 전제한다면 이는 '치킨 게임'과 닮아 있다. 그동안 서로의 결실보다 손해를 먼저 계산하고,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 수로만 산정했기 때문에 본연의 관계가 실종되었다. 각자가 만난 인연의 횟수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이제는 어떤 사람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자본주의 사회가 남긴 경제 보완 제도로는 더 이상 해소될 수 없는 평생의 고립이 남는다. 결국 이 고립된 노동자들이 가장 선두에서 결혼 제도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끼리끼리 모인다.'


* 이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으로 인한 상실은 단순한 개별적 우연이 아니라, 자본의 필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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