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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 화폐 재료의 재생산

 

금과 은의 연간 재생산은 지금까지 분석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치품이나 도금 등의 단순한 재료로 금과 은은 다른 모든 생산물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금과 은은 화폐 재료, 곧 잠재적 화폐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간략한 논의를 위해 여기에서는 금을 유일한 화폐 재료로 전제하여 취급한다.

 

과거 통계에 따르면, 세계의 연간 금생산은 80만-90만 파운드(약 363,000-408,000kg), 가치로는 11억-12억 5,000만 마르크에 달했다. 그러나 제트베르의 통계에 따르면, 1871-1875년 기간의 연평균은 170,675kg으로, 가치 환산 시 약 4억 7,600만 마르크스에 불과했다. 주요 공급원별로는 호주가 약 1억 6,700만 마르크, 미국은 1억 6,600만 마르크, 러시아는 9,300만 마르크를 차지했으며, 기타 국가들의 공급액은 각각 1,000만 마르크 미만이었다. 동일 기간 연평균 은 생산량은 약 200만 kg 미만으로 가치는 3억 5,450만 마르크 수준이었다. 국가별로는 멕시코가 약 1억 800만 마르크, 미국이 1억 200만 마르크, 남아메리카는 6,700만 마르크, 독일은 2,600만 마르크 등을 각각 공급하였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적인 국가 중 미국은 금과 은을 모두 생산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반면,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필요한 금의 거의 전부와 은의 대부분을 호주, 미국, 멕시코, 남아메리카, 러시아 등으로부터 충당(수입)하고 있다.

 

그럼에도, 연간 재생산 분석 과정에서 금 광산을 해당 자본주의 국가 내에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대외 무역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그러나 일정한 규모의 연간 재생산을 전제할 때, 대외 무역은 다만 국내 생산물을 다른 유용한 사용 가치 형태(또는 현물 형태)로 대체할 뿐 가치 비율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간주한다. 곧, 생산 수단과 소비 수단이라는 두 부문 간의 교환 가치 비율은 물론, 각 부문 생산 가치를 구성하는 불변 자본, 가변 자본, 잉여 가치 사이의 비율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연간 재생산 가치 분석에 대외 무역을 개입시키는 것은 분석의 혼란을 초래할 뿐, 문제 해결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본 분석에서는 대외 무역을 배제하며, 금을 외부에서 수입되는 상품 요소가 아닌 연간 재생산의 직접적 구성 요소로 취급한다.

 

금 생산은 금속 생산 일반과 마찬가지로 생산 수단의 생산을 담당하는 제Ⅰ부문에 속한다. 연간 금 생산물의 가치를 30으로 가정하고(간략한 계산을 위한 수치 설정임), 이 가치가 20c + 5v + 5s로 분할된다고 전제한다.

 

불변 자본에 해당하는 20c는 제Ⅰ부문 내의 다른 불변 자본(c) 요소들과 교환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후술할 내용을 참조하도록 한다. 반면, 제Ⅰ부문의 가변 자본과 잉여 가치의 합인 Ⅰ(5v + 5s)는 제Ⅱ부문의 생산물인 불변 자본 요소들, 곧 소비 수단과 교환되어야 한다. 이 과정은 제Ⅱ부문 입장에서는 자신의 불변 자본(c) 요소를 보충하기 위한 화폐 실현 과정이 된다.

 

가변 자본 5v의 전개 과정을 고찰하면, 금 생산 기업은 먼저 유통 중인 화폐의 일부로 노동력을 구매한다. 노동자들은 수령한 5v로 제Ⅱ부문 소비 수단을 구매하며, 제Ⅱ부문은 해당 화폐로 제Ⅰ부문의 생산 수단을 구매(또는 확보)한다. 제Ⅱ부문이 금을 상품 재료(불변 자본의 구성 요소)로 제Ⅰ부문으로부터 2만큼 구입한다면, 2v는 화폐 형태로 제Ⅰ부문의 금 생산자에게 회수된다. 반면, 제Ⅱ부문이 금을 추가로 구매하지 않더라도, 제Ⅰ부문은 생산된 금을 화폐로 직접 유통에 투입하여 제Ⅱ부문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이는 금이 즉각적인 구매력을 지닌 특수 상품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제Ⅰ부문 금 생산자는 일반적인 판매자가 아닌 고유한 구매자의 지위를 갖게 된다.

 

일반적인 방적업자의 경우, 5v를 임금으로 지불하고 노동자로부터 5만큼의 면사를 인도받는다. 잉여 가치는 제외하고, 노동자가 제Ⅱ부문에서 5만큼의 Ⅱc 상품(소비 수단)을 구매하면, 제Ⅱ부문은 다시 그 화폐로 제Ⅰ부문의 면사를 구매한다. 결과적으로, 5v는 방적업자에게 화폐 형태로 회수된다. 그러나 금 생산자(Ⅰg)의 경우, 노동자에게 지급한 5v 중 2만이 제Ⅱ부문으로부터 회수되더라도 재생산 과정에는 차질이 없다. 노동자가 생산한 5 가운데 3은 그 자체로 직접적인 화폐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 생산자는 제Ⅱ부문의 매개 없이도 생산된 금을 주화나 은행권으로 전환하면서 가변 자본 전액을 화폐 형태로 즉시 확보할 수 있다.

 

연간 재생산의 초기 과정에서 유통 분야의 실질적 또는 잠재적 화폐량에는 이미 변화가 발생한다. 설정된 가정에 따르면, 제Ⅱ부문은 금 생산자(Ⅰg)로부터 재료로 2만큼을 구입하였고, Ⅰg는 다시 3만큼을 가변 자본의 화폐 형태로 제Ⅱ부문에 지출하였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금 생산으로부터 공급된 화폐 중 3은 제Ⅰ부문으로 회귀하지 않은 채 제Ⅱ부문에 잔류한다. 제Ⅱ부문은 이미 금에 대한 수요를 충족한 상태이므로, 이 3은 퇴장 화폐의 형태로 제Ⅱ부문에 귀속된다. 해당 화폐 3은 제Ⅱ부문의 불변 자본 요소로 기능할 수 없으며, 제Ⅱ부문은 이미 가변 자본 마련을 위한 충분한 화폐 자본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고정 자본의 마멸분 보충이라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제Ⅱ부문의 상품 생산물은 원칙적으로, 제Ⅰ(v+s)의 생산 수단과 교환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화폐액은 제Ⅱc에서 제Ⅱs로 이전되어야 하며, 이에 상응하는 상품 가치는 반대로 제Ⅱs에서 제Ⅱc로 이동하게 된다. 그 결과, 제Ⅱ부문 잉여 가치의 일부는 화폐 축장(퇴장 화폐)의 형태로 축적된다.

 

재생산 제2차 연도에도 전년도와 동일한 비율로 금이 산업적 재료로 소비된다면, 생산된 금 중 2는 다시 금 생산자(Ⅰg)에게 회귀하고, 3은 ‘현물 상태’로 보충된다. 곧, 3만큼의 가치는 제Ⅱ부문 내에서 다시 퇴장 화폐로 고착된다.

 

가변 자본의 경우, 금 생산자(Ⅰg) 역시 타 부문의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노동력 구매를 위해 해당 자본을 지속적으로 화폐 형태로 투하해야 한다. 다만 가변 자본(v)에 대응하는 소비 수단을 실제로 구매하는 주체는 금 생산자가 아닌 그의 노동자들이다. 따라서 제Ⅱ부문이 자발적인 구매자로 나서지 않는 한, 금 생산자가 직접 구매자가 되어 금을 제Ⅱ부문에 투입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 제Ⅱ부문이 불변 자본(Ⅱc)의 보충을 위해 금 생산자로부터 금 재료를 구입하는 경우에만, 가변 자본 (Ⅰg)v의 일부가 제Ⅰ부문의 여타 자본가들에게 회귀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금 생산자에게 회귀한다.

 

그 외의 경우, 금 생산자(Ⅰg)는 자신의 생산물인 금으로 가변 자본(v)을 직접 보충하게 된다. 이때 화폐로 투하된 가변 자본이 제Ⅱ부문에서 환류하지 않는 비율만큼, 기존 유통 화폐의 일부(제Ⅰ부문에서 제Ⅱ부문으로 유입된 후 제Ⅰ부문으로 회귀하지 않은 화폐)는 제Ⅱ부문 내에서 퇴장 화폐로 전환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제Ⅱ부문 잉여 가치의 일정 부분이 소비 수단으로 지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금광의 개발이나 가동 중단되었던 금광의 재개로 인해 금 생산자(Ⅰg)가 지출하는 화폐 자본의 상당 부분은 기존에 유통되던 화폐량에서 충당되며, 이는 노동자를 거쳐 제Ⅱ부문으로 유입된다. 이 화폐가 다시 금 생산자에게 회귀하지 않는 한, 해당 가치는 제Ⅱ부문에서 화폐 축장의 요소로 남게 된다.

 

잉여 가치 (Ⅰg)s의 경우, 금 생산자(Ⅰg)는 상시 구매자의 지위를 점유한다. 그는 생산된 잉여 제품인 금을 유통 과정에 직접 투입하여 제Ⅱ부문의 소비 수단을 인출한다. 이때 제Ⅱ부문으로 유입된 금의 일부는 산업적 재료로 활용되어 해당 부문 생산 자본의 불변적 구성 부분(c)을 형성한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금은 제Ⅱ부문의 잉여 가치(s) 중 화폐 형태로 잔류하는 부분으로 화폐 축장의 요소가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Ⅰc는 제외하더라도, 확대 재생산이 아닌 단순 재생산의 과정에서도 화폐 축적 또는 화폐 퇴장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화폐 축적은 매년 주기적으로 반복되며,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분석 기점이었던 전제, 곧 재생산 개시 시점에 상품 교환을 매개할 충분한 화폐 자본이 제Ⅰ부문과 제Ⅱ부문 자본가들의 수중에 존재한다는 설정의 근거를 해명한다. 이러한 화폐 축적 과정은 유통 과정에서 화폐의 마멸로 소실되는 금의 양을 상쇄하고도 지속적으로 진행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해마다 지속됨에 따라 모든 부문에서 축적된 화폐의 절대량은 필연적으로 증가한다. 이에 따라 매년 새로 생산되는 금이 전체 화폐 총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 절대적 규모가 상당하더라도, 상대적으로는 점차 감소하게 된다.

 

투크의 견해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은 핵심적 의문에 직면한다. 유통되는 화폐의 궁극적 원천이 자본가 계급 자신이라고 전제할 때, 개별 자본가가 연간 생산물로부터 잉여 가치를 화폐 형태로 회수하는 것, 곧 자신이 유통 과정에 투입한 화폐량보다 더 많은 액수를 회귀시키는 원리는 과연 어떻게 성립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제17장) 상술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제시한다.

 

(1) 본 논의에서 요구되는 유일한 전제, 곧 연간 재생산되는 총 상품량의 각 요소를 교환하기 위해 충분한 화폐가 존재한다는 전제는 상품 가치의 일부가 잉여 가치로 구성된다는 사실로부터 부정되지 않는다. 설령 모든 생산 수단이 노동자 소유이며, 이들의 잉여 노동이 자본가가 아닌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유통하는 상품 가치의 총량은 불변하며 그 유통에 소요되는 화폐량 또한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석의 핵심은 잉여 가치의 화폐화를 위한 별도의 화폐 출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총 상품 가치 전반을 교환하는 데 필요한 화폐가 어떠한 경로로 공급되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개별 상품은 c+v+s로 구성되므로, 사회적 총 상품의 유통을 위해서는 자본(c+v)의 유통에 소요되는 화폐액과 자본가 계급의 수입인 잉여 가치(s)의 유통을 위한 일정한 화폐액이 각각 요구된다. 개별 자본가와 자본가 계급 전체에 있어 자본으로 투하되는 화폐와 수입으로 지출되는 화폐는 구별되나, 이 지출의 원천은 결국 자본가 계급이 보유한 화폐 자산이다.

 

곧, 사회 내 총 화폐량의 일정 부분은 자본가들의 수입 유통을 매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앞서 고찰한 바와 같이, 새로운 기업을 설립한 자본가가 초기 생활 유지를 위해 소비 수단에 지출한 화폐는 기업 운영이 안정 궤도에 진입한 후 자신의 잉여 가치를 화폐화하는 과정에서 다시 회수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발생하는 분석적 난점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천에서 기인한다.

 

첫째, 자본의 유통과 회전만을 고찰하며 자본가를 단순히 자본의 인격화로만 규정할 경우, 자본가가 잉여 가치를 상품 자본의 구성 부분으로 유통 과정에 투입하는 것은 확인되나, 그가 개인적 소비를 위해 수입 형태의 화폐를 지출하는 과정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곧, 자본주의적 소비자로 자본가가 잉여 가치 향유를 위해 화폐를 유통에 투하하는 행위는 분석에서 누락된다.

 

둘째, 자본가 계급이 수입 지출을 목적으로 일정액의 화폐를 유통에 투입할 때,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연간 총생산물의 해당 부분에 대해 등가를 지불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잉여 가치의 성격이 은폐될 수 있다. 그러나 잉여 가치를 체현하는 잉여 생산물은 자본가 계급에게 아무런 비용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자본가 계급은 집단적으로 잉여 생산물을 무상으로 점유하고 소비하며, 화폐 유통의 매개는 이러한 본질적 사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화폐 유통 원리(메커니즘)는 다만 개별 자본가가 자신이 생산한 잉여 생산물을 직접 소비하지 대신, 취득한 잉여 가치액에 상응하는 여러 상품을 사회적 잉여 생산물 총량으로부터 인출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유통 원리 분석에서 입증한 바와 같이, 자본가 계급은 수입 지출을 위해 화폐를 유통에 투입하더라도 동일한 화폐를 다시 회수하며,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잉여 가치의 화폐화에 필요한 화폐액을 지속적으로 보유한다. 결과적으로, 자본가가 상품 시장에서 소비 수단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그 구매에 사용한 화폐까지 회수한다면, 이는 실질적으로 등가를 치르지 않고 상품을 취득한 것과 같다. 자본가는 화폐라는 형식을 빌려 대가를 지불하나, 해당 상품은 본래 그에게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은 것이다. 이는 1원으로 상품을 구매했을 때, 판매재가 잉여 생산물의 대가로 다시 그 1원을 돌려주는 것과 같으며, 이 경우, 구매자는 상품을 무상으로 획득한다. 이러한 순환이 반복되더라도, 자본가가 상품을 인출함과 동시에 화폐를 재소유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자본가는 자신에게 비용 부담이 없는 잉여 가치의 화폐 등가물을 지속적으로 재확보하게 된다.

 

앞서 고찰한 바와 같이, 애덤 스미스는 사회적 생산물의 총가치를 오직 수입(v+s)으로만 분해하면서 불변 자본 가치(c)를 배제하였다. 이러한 전제하에서는 연간 수입의 유통에 소요되는 화폐량이 곧 연간 총생산물 전체의 유통을 담당하기에 충분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곧, 3,000의 가치를 지닌 소비 수단 유통에 필요한 화폐가 9,000에 달하는 연간 총생산물 전체의 유통까지 감당할 수 있다는 논리이며, 이는 투크로부터 되풀이된 스미스의 핵심적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적 총생산물의 유통에 필요한 화폐량과 수입의 실현에 필요한 화폐량 사이의 관계를 이처럼 규정하는 것은 연간 총생산물의 소재적·가치적 요소가 재생산되고 해마다 보충되는 원리를 오인한 결과이다. 따라서 이러한 오류에 기반한 견해는 재생산 과정의 본질적 분석으로 이미 논박되었다.

 

이제 스미스와 투크가 제시한 논거를 직접 검토해 보자.

 

스미스는 『국부론』제2편 제2장에서 유통 체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한 국가의 유통은 상인 간의 유통과, 상인·소비자 간의 유통이라는 두 개의 상이한 영역으로 구분된다. 화폐의 종류와는 무관하게 동일한 화폐가 양 영역에서 교차 사용될지라도, 두 유통 과정은 동시에 진행되므로, 각 영역은 일정량의 화폐 수단을 필요로 한다. 이때 상인 간에 유통되는 재화의 가치는 상인과 소비자 사이에서 유통되는 재화의 가치를 결코 초과할 수 없는데, 이는 상인이 구매한 모든 재화가 궁극적으로 소비자에게 판매되기 때문이다.

 

상인 간 거래는 도매 형식을 취하므로, 개별 거래당 대규모 화폐액이 소요되는 반면, 상인과 소비자 간의 소매 거래는 소액의 화폐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소액 화폐는 고액 화폐보다 유통 속도가 훨씬 빠르다. 따라서 모든 소비자의 연간 구매 총액이 가치 측면에서 상인들의 구매 총액과 최소한 동일할지라도 (이 최소한이라는 단어 선택은 훌륭하다!),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화폐량만으로도 전체 거래를 수행할 수 있다.’

 

[스미스,『국부론』, 제2편 제2장, 394].

 

스미스의 논지에 대하여 투크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상기한 유통 영역의 구분은 사실상 타당하다. 상인과 소비자 사이의 교환에는 소비자 수입의 근간인 임금 지불 과정이 포함된다. 반면, 생산자나 수입업자로부터 시작하여 제조업 등 매개(중간) 공정을 거쳐 소매상이나 수출업자에 이르기까지 발생하는 상인 간의 모든 거래는 자본의 운동 및 이전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의 이전은 대다수의 거래에서 화폐(은행권이나 주화)의 물리적 인도를 반드시 전제하거나 수반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상인 간 거래의 총액은 궁극적으로 상인과 소비자 사이의 거래 규모로부터 규정되며, 그 범위 또한 제한될 수밖에 없다.’

 

[투크, 『통화 원리의 연구』: 34-36].

 

마지막 문구만을 개별적으로 고찰할 경우, 투크가 상인 간의 교환과 상인·소비자 간의 교환 사이, 곧 연간 총수입의 가치와 그 수입을 형성하는 자본 가치 사이의 일정한 비율 관계를 확인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는 실질적으로 스미스의 오류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스미스의 이론적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는 투크의 유통 이론을 별도로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2) 모든 산업 자본은 사업 개시 단계에서 고정 자본의 전체 구성 부분을 구매하기 위해 막대한 화폐를 일시에 유통 과정에 투입한다. 이후 해당 고정 자본의 가치는 수년에 걸쳐 연간 생산물을 판매하면서 점진적으로만 회수된다. 따라서 각 산업 자본은 초기 단계에서 유통으로부터 인출하는 화폐보다 훨씬 많은 양의 화폐를 유통에 주입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는 전체 자본의 실물적 갱신 주기마다 반복되며, 매년 일정 수의 기업에서 고정 자본의 전면적 또는 부분적 갱신(수리)이 이루어질 때마다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자본은 특정 시기에는 유통에서 회수하는 화폐보다 더 많은 화폐를 투입하는 반면, 다른 시기에는 그 반대의 과정을 거치며 화폐 순환을 지속한다.

 

생산 시간(노동 기간과 구별된다)이 비교적 긴 산업 부문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자는 고용된 노동력의 대가 지불 및 생산 수단 구매를 위해 생산 전 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화폐를 유통 과정에 투입한다. 이에 따라 생산 수단은 상품 시장에서 직접 인출되며, 소비 수단은 임금을 지출하는 노동자들로부터 간접적으로, 또는 소비를 지속하는 자본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상품 시장에서 인출된다.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자본가들이 그에 상응하는 등가물을 상품 형태로 시장에 즉시 공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기간 중에 투입된 화폐는 타 부문 상품 가치(잉여 가치 포함)의 실현, 곧 화폐화에 기여한다. 이러한 원리(메커니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주식 회사 등이 착수하는 장기적인 사업(예: 철도, 운하, 항만 및 부두, 공공 및 지방 자치 단체 건물 건설, 대형 선박 건조, 대규모 간척 사업 등)과 관련하여 매우 중대한 경제적 함의를 지닌다.

 

(3) 일반적인 산업 자본가들이 고정 자본에 대한 지출을 제외할 때, 노동력과 유동적 생산 요소의 구매를 위해 유통에 투입한 화폐액보다 더 많은 화폐를 판매로부터 회수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금·은 생산자들은 원료용 귀금속 거래를 제외하면 유통 과정에 화폐만을 투입하고, 그 대가로 상품만을 인출한다. 그들은 고정 자본의 마멸 보충분을 제외한 불변 자본의 대부분과 가변 자본, 그리고 스스로 축장하는 화폐를 제외한 잉여 가치 전량을 화폐 형태로 유통에 주입한다.

 

(4) 대지나 가옥 등과 같은 당해 연도에 생산된 것이 아닌 자산, 그리고 가축·목재·포도주 등과 같이 그 생산 기간이 1년을 초과하는 생산물들이 상품으로 유통된다는 점은 주어진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유통에 투입된 화폐액 외에도, 상시 잠재적(비기능적) 상태로 존재하다가 필요에 따라 기능을 개시하는 유휴 화폐가 존재함을 유념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생산물들의 가치는 일시에 실현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유통되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가옥의 가치는 수년에 걸친 임대료 형식으로 단계적으로 유통 과정에 진입한다.

 

한편, 재생산 과정의 모든 운동이 반드시 화폐 유통으로부터 매개되는 것은 아니다. 전체 생산 과정은 각 생산 요소가 일단 구매되면 화폐 유통 영역에서 이탈한다. 생산자가 생산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직접 소비하는 모든 생산물과 농업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현물 급여 등 역시 화폐 유통 범주 밖에 존재한다.

 

따라서 연간 생산물의 유통을 담당하는 화폐량은 이미 사회 내에 존재하며 점진적으로 축적되어온 것이다. 이 화폐량은 마멸된 주화를 보충하기 위해 새로 투입되는 금을 제외하면, 당해 연도의 가치 생산물(새로운 가치)에 포함되지 않는다.

 

금속 유통이라는 단순한 토대 위에서도 화폐는 지불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실제로 그러하였다. 또한 이러한 기초 위에서 신용 제도와 그 원리(메커니즘)의 일정 측면이 발전해온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본 서술에서는 분석의 명료성을 위해 귀금속 화폐만이 유통된다고 전제하며, 더욱이 유통의 가장 원초적 형태인 현금 매매를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는 방법론적 필연성에 기인한다. 투크를 비롯한 은행주의 학파와 그 대척점에 선 통화주의 학파가 은행권 유통을 논쟁할 당시, 결국 순수한 금속 유통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비록 그들은 사후적으로 이러한 가정을 도입하였고, 그 분석에서 금속 유통이 부차적인 역할에 머물렀기에 이를 지극히 피상적으로 다루는 데 그쳤다.

 

연간 재생산 과정의 내재적 계기인 화폐 유통을 그 자연 발생적 형태에 따라 고찰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a) 임금 노동 제도가 지배하는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할 때, 화폐 자본은 가변 자본의 투하 형태로 결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임금 노동 제도의 확산에 따라 거의 모든 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환되며,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생산물의 가치 실현을 위해 반드시 화폐 형태로의 전환을 거쳐야 한다. 이에 따라 유통 화폐량은 상품 가치의 화폐화에 충분한 규모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 화폐량의 상당 부분은 임금의 형태로 공급된다. 곧, 산업 자본가가 노동력 지불을 위해 가변 자본을 화폐 형태로 투입하면, 노동자의 수중에서 이 화폐는 주로 유통 수단(구매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는 농노제를 포함한 인격적 예속 관계가 지배적인 자연 경제나, 원시적인 공동체 질서하의 경제 구조와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자본주의만의 특성이다.

 

노예 제도하에서는 노동력 구매에 투하된 화폐 자본은 고정 자본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며, 이 자본은 노예의 생산 가용 연한이 경과함에 따라 점차적으로만 회수된다. 고대 아테네인들이 노예의 직접적인 산업 이용(광산 노동 등)이나 임대로부터 얻은 수익을 투하 자본에 대한 이자와 감가상각으로 간주한 것은, 현대 자본주의 생산에서 산업 자본가가 잉여 가치의 일부와 마멸분을 고정 자본의 이자 및 보충분으로 산정하는 방식과 궤를 같이한다. 이는 고정 자본인 가옥이나 기계 장치를 임대하는 자본가들의 회계 관행과도 일치한다. 다만, 가사 용역(서비스)나 사치적 목적에 동원되는 가정 노예는 오늘날의 하인 계급에 해당하므로, 본 논의의 생산적 범주에서는 제외된다. 


노예 제도가 농업, 제조업, 해운업 등 생산적 노동의 지배적 형태였던 그리스와 로마의 경제 체제는 본질적으로 자연 경제 요소를 내포한다. 노예 시장은 전쟁이나 해적 행위 등으로부터 노동력을 상품으로 공급받으나, 이러한 취득 과정은 유통 원리(메커니즘)가 아닌, 직접적인 신체 및 노동력 강제로 인한 타인의 현물 탈취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임금 노동제의 북부와 노예제의 남부가 공존했던 미국에서조차, 남부 시장에 노예를 공급하는 사육 지대가 형성되어 노예 시장에 매물로 나온 노예 자체가 연간 재생산의 요소로 포섭된 이후에도, 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프리카와의 노예 무역이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노예 노동력 공급의 특수한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b) 자본주의적 생산 체계 하에서 연간 생산물의 교환에 수반되는 화폐의 유출과 환류는 자연 발생적 원리에 따라 수행된다. 고정 자본은 그 가치 총액이 일시에 투입되나 수년에 걸쳐 점진적으로만 회수되므로, 매년 발생하는 화폐 퇴장 과정으로부터 화폐 형태로 서서히 복구된다. 이때의 화폐 퇴장은 새로운 금 생산에 따른 축장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산업 부문별로 생산 시간의 길이가 상이함에 따라 화폐 투하 기간 및 상품 판매 이후, 화폐 회수 이전까지의 화폐 보존 기간 역시 달라진다.

 

생산지와 판매 시장 간의 거리 차이 또한 화폐 투하 기간을 결정하는 변수로 작용한다. 더불어 각 생산 분야 및 개별 자본의 생산용 재고 규모 및 상태에 따라 화폐 회수의 규모 및 시기가 결정되며, 이는 곧 불변 자본 요소의 보충 시점 차이로 이어진다. 연간 재생산 주기 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자연 발생적 운동의 다각적 양상들이 실무적으로 파악되고 체계화되면서, 신용 제도의 기계적 보조 수단(예: 수표와 어음 등)을 계획적으로 활용하고, 기존의 대부 자본을 실질적으로 가동할 토대가 마련된다.

 

이와 더불어, 일반적인 조건하에서 연중 동일한 규모로 생산이 지속되는 산업 부문과, 농업과 같이 계절적 추이에 따라 투입되는 노동력의 양이 가변적인 사업 부문 사이의 질적 차이 또한 분석의 요소로 추가되어야 한다.

 

XIII. 데스튀트 드 트라시의 재생산 이론

 

사회적 재생산의 고찰에서 나타나는 정치경제학자들의 혼란과 몰이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위대한 논리학자’ 데스튀트 드 트라시를 들 수 있다. 필자는『자본』 제1권 제5장 주17에서 그를 비판적으로 언급한 바 있으나, 리카도는 『정치경제학 및 과세 원리: 364』에서 그를 ‘아주 유명한 저자’라 부르며 진지하게 다루었다.

 

이러한 리카도의 태도는 당시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자본의 순환과 재생산 과정을 하나의 연속된 순환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생산의 조건이 곧 재생산의 조건이라는 점을 간과했음을 증명한다.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의 재생산이 단순히 가치를 유지하는 수준만이 아니라, 투하된 가치를 증식하는 자본으로 재생산하는 과정이라는 본질적 규명이 결여되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해당 ‘유명한 저자’는 사회적 재생산과 유통의 총 과정을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산업 기업가들이 막대한 이윤을 어떠한 방식으로, 누구로부터 창출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자 한다. 그들은 모든 생산물을 생산 원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면서 이윤을 획득하며, 이러한 판매 대상은 다음과 같은 부류로 구성된다.

 

첫째, 기업가 상호 간의 거래다. 이들은 각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획득한 이윤의 일부를 지출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의 생산물을 구매하는 소비 주체로 존재한다.

 

둘째, 자신이 직접 고용하거나 유합계급인 자본가가 고용하는 가사 하인 등 모든 임금 노동자를 대상으로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가는 임금 노동자의 미미한 저축을 제외한 임금 총액을 자본으로 회수하며, 이는 노동의 대가로 지급된 가치가 소비 과정을 거쳐 다시 자본가에게 귀속되는 순환 구조를 형성한다.

 

셋째, 유한계급인 자본가들에게 판매한다. 이들은 자신의 수입 중 직접 고용하는 임금 노동자에게 지급한 몫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으로 산업 자본가의 생산물을 구매한다. 결과적으로 산업 자본가가 이들에게 매년 지불하는 지대 총액은 상술한 유통 경로 중 하나를 거쳐 다시 산업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데스튀드 드 트라시,『의지와 의지 작용론』: 239].

 

(1) 결국 자본가들이 개인적 소비를 위해 지출한 수입, 곧 잉여 가치의 교환 과정에서 상호 기만으로부터 부를 축적한다는 논리는 모순에 직면한다.

 

가령 400의 잉여 가치 또는 이윤을 분할하는 자본가들이 각자의 몫을 25% 할증하여 판매하면서 총액을 500으로 팽창시킨다 하더라도, 모든 구성원이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는 한 실질적인 교환 결과는 가치대로 매매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일한 변화는 400원의 상품 가치를 유통시키기 위해 500원의 화폐량이 요구된다는 점뿐이다. 이는 부의 증식이 아니라, 오히려 총자산의 상당 부분을 비생산적인 유통 수단 형태에 묶어두면서 자본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론적으로, 자본가 계급이 상품 가격을 명목상 500으로 인상하더라도, 개인적 소비를 위해 분할되는 실질 상품 자본은 400에 불과하며, 그들은 단지 과잉된 화폐량을 투입하여 기존의 상품량을 유통시키는 비경제적 행위를 지속하게 된다.

 

여기서 ‘이윤을 표상하는 상품량’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전제한다는 점은 논외로 하더라도, 데스튀트가 시도한 이윤의 근거에 대한 설명은 본질적인 한계를 지닌다.

 

이윤 유통에 필요한 화폐량의 문제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며, 정작 그는 자본가들이 상품을 서로 교환할 뿐만 아니라 더 높은 가격에 매매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이윤이 창출된다고 보았다.

 

결국 이러한 논리는 자본가 계급 내의 명목상 가격 인상이 부의 원천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프리츠 로이터의 『그의 농사 시절』에 등장하는 ‘브레지히 감독관’의 ‘가난은 더 큰 가난에서 나온다.’는 수수께끼 같은 궤변과 다를 바 없는 순환 논증에 불과하다.

 

(2) 또한 자본가들은

 

‘그들 자신이 고용하거나 유한 자본가에게 고용된 임금 노동자들에게 상품을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임금 노동자들의 미미한 저축을 제외한 임금 전액은 다시 자본가에게 회수된다.’

 

데스튀트는 이처럼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급된 화폐 자본이 다시 자본가 계급에게 회수되는 구조를 부의 축적을 담보하는 두 번째 원천으로 규정한다. 이는 임금 지불과 상품 구매라는 순환 과정에서 투하된 화폐 자본이 가치 증식의 형태로 회귀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자본가 계급이 100을 임금으로 지불하고, 노동자가 그 금액으로 다시 자본가의 상품을 구매하면서 투하 자본이 회수되는 구조를 부의 축적 원천으로 보는 것은 논리적 오류다. 원칙적으로 자본가는 최초에 보유했던 100의 화폐로 노동력을 구매하며, 노동력은 그 가치에 상응하는 100 상당의 상품을 생산한다. 자본가가 이 상품을 노동자에게 판매하여 100을 회수한다면, 결과적으로 자본가는 원래의 화폐 100을 다시 보유하게 되고,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100 상당의 상품을 소유할 뿐이다. 이러한 화폐의 단순 순환은 자본가가 더 가난해지지 않는 근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실질적인 가치 증식이나 축적의 원천을 설명하지 못한다. 100의 화폐가 회수되지 않는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100의 임금을 지불하는 데다 100만큼의 생산물까지 무상으로 제공해야 하는 이중의 손실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폐 회수는 자본 유지의 조건일 뿐 치부의 원인은 될 수 없다.

 

나아가, 데스튀트는 자본가가 최초의 100을 보유하게 된 이유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화폐와 교환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에 대해 자명한 전제로 치부하며, 본질적인 규명을 생략한다.

 

데스튀트 역시 단순한 화폐 회수만으로는 가치 증식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100의 화폐를 지출하고 동일한 액수를 회수하는 과정은 단지 자본의 소멸을 방지하는 방편일 뿐,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자본가들이 ‘생산에 투입된 비용보다 높은 가격으로 생산물을 판매’하면서 이윤을 얻는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자본가는 노동자와의 거래에서도 상품을 할증된 가격으로 판매하여 치부한다. (훌륭하다!)

 

‘기업가는 임금을 지불하되, 노동자들이 그 임금을 지불하여 상품을 구매할 때는 원래의 임금 가치보다 더 높은 대가를 치르게 하면서 지출한 임금 전액을 초과하여 회수한다.’

 

[데스튀드 드 트라시,『의지와 의지 작용론』: 240].

 

결국, 데스튀트에게 있어 이윤이란 노동자가 수령한 임금보다 할증된 가격으로 자사 상품을 재구매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통상의 차익에 불과하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100의 임금을 지급한 뒤, 그들이 생산한 결과물을 다시 120에 판매하여 20의 차익을 얻는다는 가설은 성립할 수 없다.

 

노동자는 자신이 수령한 임금 총액인 100 범위 내에서만 지출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의 120을 지불할 경제적 수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통 과정에서의 단순한 가격 할증으로는 이윤의 원천을 해명할 수 없다.

 

다만,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100의 화폐로 상품을 구매하되, 실질적으로는 80의 가치에 불과한 상품을 제공받는 형태의 기만적 교환이 성립한다. 이 경우, 자본가는 노동력의 대가를 그 실질 가치보다 20% 낮게 지급하거나, 명목 임금을 우회적으로 삭감하면서 20의 이득을 취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방식의 치부는 생산 과정에서의 가치 증식이 아니라,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할 가치를 유통 과정에서 부당하게 탈취하는 원시적인 수탈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가 계급이 당초 노동자에게 80의 임금만을 지급하고, 그 대가로 80의 실질 가치를 지닌 상품을 제공한다면 결과는 동일하다. 데스튀트의 관점에서 이는 지극히 일반적인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는 노동자 계급이 생존과 노동 능력을 유지하며 ‘최소한의 생존 수단을 확보할 수 있는’(같은 책: 208) ‘충분한 임금’(219)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이 수준에 미달한다면 ‘근면의 죽음’(208)을 초래하여 결국 자본가의 부를 축적할 수단조차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이 지급하는 임금이 어느 정도이든, 예컨대 80이라는 특정 가치를 지닌다면 자본가는 그에 상응하는 80의 상품 가치를 노동자에게 제공해야만 한다. 이 경우 80의 화폐가 자본가에게 회수되더라도, 가치 증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100을 지급한 뒤, 80의 가치를 지닌 상품을 100에 판매한다면, 이는 명목 화폐로는 실질(등가) 임금보다 25%를 더 지불했으나, 실질 상품으로는 그만큼을 덜 제공한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러한 유통상의 기만은 부의 실질적인 창출이 아닌, 가치의 명목적 재배치에 머무르게 된다.

 

결국, 자본가 계급의 이윤은 노동력의 가치, 곧 일반적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 수단의 가치 미만으로 임금을 지불하여 그 차액을 가로채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데스튀트의 전제대로 일반적인 임금이 지불된다면, 산업 자본가나 유한 자본가 모두에게 이윤의 근거는 소멸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데스튀트는 자본가 계급의 자본 축적에 숨겨진 비밀을 임금 수탈로 귀결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가 (1)과 (3)에서 언급한 잉여 가치의 다른 원천들은 모두 존립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의 화폐 임금이 계급 전체의 생존에 필요한 소비 수단의 가치로 귀착되는 국가에서는 자본가를 위한 소비 및 축적 재원이 존재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존립 근거 자체가 소멸하게 된다. 더욱이 데스튀트의 견해에 따르면, 고도의 문명을 가진 부유한 발전 국가일수록 이러한 모순은 더욱 심화된다.

 

‘이는 오래된 사회일수록 임금을 지불하는 재원의 규모가 거의 고정적인 불변의 크기에 머물기 때문이다.’

 

[데스튀드 드 트라시,『의지와 의지 작용론』: 202].

 

임금 삭감을 가정하더라도, 자본가의 부가 증식되는 실질적 이유는 100의 화폐를 지급하고 80의 상품을 제공하는 유통상의 25% 할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본질은 자본가가 생산물 중 잉여 가치뿐만 아니라, 원래 임금으로 귀속되어야 할 25%인 20까지 추가로 전유하는 데 있다.

 

데스튀트의 가설처럼 100을 지불하고 80의 상품 가치를 환류시키는 방식은 자본가 계급에게 어떠한 실질적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다음 생산 단계에서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기 위해 다시 100을 투하해야 하므로, 이는 80의 화폐로 80의 상품을 유통시킬 수 있음에도 굳이 100의 화폐를 투입하는 비효율적 행위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가변 자본 유통을 위해 25%의 화폐 자본을 상시적으로 과잉 투하하며, 이를 부의 축적 방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3) 끝으로, 산업 자본가 계급은

 

‘유한 자본가들에게 상품을 판매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수입 중 직접 고용하는 임금 노동자에게 지급한 몫을 제외한 나머지로 산업 자본가의 생산물을 구매하며, 결과적으로 산업 자본가가 매년 지불하는 지대 전액은 유통 과정을 거쳐 다시 산업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산업 자본가의 이윤이 200이고 그중 100을 개인적 소비에 지출한다고 가정할 때, 나머지 100은 지대 취득자나 대부 자본가와 같은 유한 자본가에게 지불해야 할 몫이 된다.

 

유한 자본가가 수령한 100 중 80을 자신의 소비에 지출하고 20을 가사 하인 고용에 사용한다면, 이들은 80 상당의 소비 수단을 산업 자본가로부터 구매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80의 상품이 이동함과 동시에 산업 자본가가 지불했던 화폐 100 중 80(4/5)이 다시 자본가에게 회귀한다. 또한 하인 계급 역시 임금으로 받은 20을 소비 수단 구매에 지출하므로, 나머지 20의 상품이 이동하고, 그만큼의 실물이 산업 자본가의 수중에서 탈락함과 동시에, 최종적으로 지대나 이자 등의 명목으로 지불되었던 100의 화폐 전액이 산업 자본가에게 귀착되는 구조를 이루게 된다.

 

거래가 완료되면, 산업 자본가가 지대 및 이자 지불을 위해 유한 자본가에게 건넸던 100의 화폐는 다시 산업 자본가에게 회수되며, 그 대가로 잉여 생산물의 절반인 100 상당의 상품은 유한 자본가의 소비 재원으로 이전된다.

 

따라서 해당 화폐가 유한 자본가와 그들의 피고용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분할되는지를 논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 해결과 무관하다. 사태의 핵심은 명백하다. 곧, 200의 총 잉여 가치 중 유한 자본가에게 귀속되는 100의 몫은 산업 자본가로부터 화폐 형태로 우선 지불된다. 이후 유한 자본가들은 이 화폐를 사용하여 산업 자본가로부터 소비 수단을 구매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산업 자본가에게 100의 화폐를 다시 환수(반환)하는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100 상당의 실질적인 소비 수단을 획득하게 된다.

 

산업 자본가가 유한 자본가에게 지불한 100의 화폐가 다시 회귀(환류)하는 과정은 데스튀트의 몽상과 달리 결코 치부의 수단이 될 수 없다. 거래 전 산업 자본가는 화폐 100과 소비 수단 100, 곧 총 200의 가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래가 완료된 시점에서 그들의 자산은 초기 가치의 절반으로 감소한다. 비록 화폐 100은 회수했으나, 소비 수단으로 존재하던 100의 가치는 유한 자본가에게 이전되어 소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업 자본가는 100만큼 부유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의 실질 자산을 상실한 셈이다.

 

산업 자본가가 화폐를 매개로 소비 수단의 대가를 회수하는 우회적 경로를 택하지 않고, 지대나 이자를 생산물 형태의 현물로 직접 지불했다면 화폐의 회귀(환류)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화폐를 유통 영역에 투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물 지불을 전제할 경우, 산업 자본가가 200의 잉여 생산물 중 절반을 아무런 등가물 없이 유한 자본가에게 양도한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러한 자산의 일방적 이전을 데스튀트처럼 치부의 수단이라 강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산업 자본가가 유한 자본가로부터 임차한 토지와 자본은 생산 과정에서 잉여 가치를 창출하는 필수적 조건으로 작용하며, 실질적인 이윤을 발생시키는 원천이 된다. 그러나 이윤은 해당 생산 수단을 활용하는 생산 과정 자체에서 창출되는 것이지, 그 사용 대가로 지불하는 지대나 이자라는 가격 형태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비용은 이미 형성된 이윤의 일부를 사후적으로 분할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산업 자본가가 잉여 가치의 잔여분을 타인에게 이전하지 않고 전액 보유할 경우, 그들이 이전보다 가난해질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논리적 오류는 화폐의 회귀(환류)라는 단순한 유통 현상을, 그 유통으로 실현되는 생산물의 실질적 분배 구조와 등치한 데서 기인한다. 곧, 화폐가 수중에 회귀한다는 사실이 가치의 증식이나 손실의 복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본질적인 부의 증감은 가치 생산과 분배의 실질적 원리 내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데스튀트는 교묘한 논리를 전개하며 유한 자본가들의 수입 원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들의 수입은 결국 자신들의 자본을 운용하는 자들, 곧 투입된 비용 이상의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을 고용하는 산업 자본가들이 이윤의 일부로 지불하는 지대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모든 부의 원천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산업 자본가에게 주목해야 한다.’

 

[데스튀드 드 트라시,『의지와 의지 작용론』: 246].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유한 자본가가 고용하는 가사 하인 등 비생산적인 임금 노동자 계급을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주체 또한 다름 아닌 산업 자본가들이다. 이는 지대와 이자의 지불이 단순히 부의 이전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소비 체계를 유지하는 산업 자본가의 핵심적 역할임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지대와 이자의 지불은 본래 산업 자본가의 이윤에서 참감되는 항목임에도, 앞선 논의에서 데스튀트는 이를 도리어 산업 자본가의 치부 수단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그가 제시하는 또 다른 자구책은 산업 자본가들이 상호 간의 거래나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그러했듯이, 유한 자본가들에게도 상품 가격을 25% 할증하여 판매한다는 설정이다.

 

이 가설은 유한 자본가가 보유한 추가 자금의 유무에 따라 두 가지 경우로 구분된다. 유한 자본가가 연간 수령하는 지대 100 외에 추가 자금을 보유하여, 100의 가치가 있는 상품을 120에 구매한다고 전제하자. 이 경우 산업 자본가는 유한 자본가에게 지불했던 100을 회수함과 동시에 20의 명목상 이득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질적인 손익 계산을 따져보면, 산업 자본가는 자신의 화폐 100을 지불하고 그 화폐를 다시 회수하는 과정에서 100 상당의 상품을 무상 양도한 셈이므로, 100의 실질적 손실을 입은 상태다.

 

여기에 가격 초과분인 20의 이득을 합산하더라도, 최종 결과는 80의 순손실에 불과하며, 결코 양(+)의 가치 증식으로 전환되지 않으며, 언제나 음(-)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유한 자본가를 상대로 한 기만적 할증은 손실의 폭을 일부 축소할 뿐, 부의 손실이라는 본질을 치부 수단으로 바꿀 수는 없다. 더욱이 유한 자본가의 가용 화폐가 연간 수령액인 100에 한정되어 있다면, 120의 지불 자체가 성립할 수 없으므로, 이 방법은 지속될 여지조차 없다.

 

또 다른 방법은 산업 자본가가 유한 자본가에게 지불한 100의 화폐를 회수하는 대가로, 실질 가치가 80에 불과한 상품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에도 산업 자본가는 이전과 다름없이 80 상당의 가치를 지대나 이자라는 명목으로 무상 제공하는 셈이다. 이러한 기만적 거래로 산업 자본가는 유한 자본가에게 지불하는 실질적인 공물의 양을 소폭 축소할 수는 있으나, 가치의 일방적 이전이라는 본질적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더욱이 가격이 판매자의 의사에 달려 있다는 논리를 적용한다면, 유한 자본가 역시 자신의 토지와 자본에 대한 지대 · 이자 등의 대가로 기존의 100이 아닌 120을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된다. 결국 유통 과정에서의 가격 할증은 근본적인 부의 증식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상호 간의 명목 가치 상승만을 초래할 뿐이다.

 

이러한 논리적 귀결은 한편으로 애덤 스미스의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다.’ (같은 책: 242)라는 명제를 차용하고, 산업 자본가기 ‘이윤을 재생산하는 노동을 고용하기 위해 자본을 투하한다.’ (246)는 문장을 답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 자본가만이 ‘사회적 부를 증대시키고 모든 향락 수단을 창출하며 나머지 계급을 부양한다.’ (242)는 상반된 결론에 도달하는 데스튀트 특유의 사고 방식에서 기인한다.

 

그는 노동자가 수령한 화폐 임금이 결국 자본가의 상품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회귀(환류)된다는 점을 근거로, 노동자가 자본가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노동자를 부양한다고 주장하며 이 ‘심오한 사상가’ 특유의 궤변으로 결론을 내놓는다.

 

‘곧, 노동자는 한 손으로 임금을 받고, 다른 손으로 이를 다시 자본가에게 귀속시킬 뿐이기에, 노동자의 소비는 본질적으로 그들을 고용한 자본가로부터 창출되고 유지되는 부차적인 과정에 불과하다고 간주한다.’

 

[데스튀드 드 트라시,『의지와 의지 작용론』: 235].

 

화폐 유통을 매개로 한 사회적 재생산과 소비 과정을 이토록 장황하게 서술한 뒤, 데스튀트는 다음과 같이 논의를 맺는다.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부의 영구적인 운동을 완성하는 핵심 기제다. 이 운동이 비록 인민에게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으나 (명백히 그러하다!),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순환을 형성하며 언제나 그 출발점인 생산의 완료 시점으로 회귀한다는 점에서 유통이라 부른다.’

 

[데스튀드 드 트라시,『의지와 의지 작용론』: 239-240].

 

곧, 생산에서 시작된 가치가 유통을 거쳐 다시 생산의 조건으로 되돌아오는 순환 구조로 자본주의 경제의 재생산 원리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프랑스 과학원과 필라델피아 철학 협회 회원이며 속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거물인 이 ‘아주 유명한 저자’ 데스튀트는, 끝으로, 자신이 사회적 과정의 진행을 서술하며 보여준 경탄할 만한 명석함과 그가 대상에 던진 밝은 빛에 탄복할 것을 독자들에게 요청한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관철의 근원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며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자축한다. 이것은 실로 원문(불어)으로 읽어 보시라.

 

‘부의 소비를 고찰하는 이 방식이 부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이전의 서술과 얼마나 긴밀하게 일치하는지, 그리고 그 방식이 사회의 전체 운동에 얼마나 밝은 빛을 비춰주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일치와 명석함은 우리가 진리를 포착했다는 증거다. 이는 거울의 원리와 같다. 거울 앞에 올바른 위치에 서면 모든 사물이 똑똑하고 정확하게 나타나지만, 위치를 벗어나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리 서면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왜곡되어 반영된다.’

 

[데스튀드 드 트라시,『의지와 의지 작용론』: 242-243].

 

그러나 이러한 자화자찬은 결국 순환 논증의 함정과 유통의 외관에 매몰된 채, 스스로의 오류를 진리로 오판한다.

 

이것이야말로 항상 최고의 행복만을 느끼는 부르주아적 유아론(백치병)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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