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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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을 따르지 않다 보니 나의 독서는 언제나 뒷북이 되곤 한다. 이게 독서보다도 서평에서, 특히 유명작을 리뷰할 때가 제일 문제이다. 기존 평이 많을수록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중복일 거란 말씀. 근데 또 내 성격상 남들과 겹치는 글쓰기를 싫어하거든. 하여 어쩔 수 없이 비평모드일 때가 더 많은 것이다. 내가 이유 없이 까칠한 게 아님을 이제라도 밝혀둔다. 매우 늦은 감이 있지만.


<동급생>도 꽤나 명성 있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번에도 비평 위주로 가려 했는데 이거 잘 될지 모르겠다. 나치즘으로 인해 멀어져 버린 두 친구의 이야기. 유대인과 독일인의 민족을 뛰어넘는 우정은, 커져가는 히틀러의 세력 앞에 조각나고 말았다. 유대인 친구는 왜 자꾸 거리를 두냐며 서운해하고, 독일인 친구는 감정만 앞세우지 말고 자기를 이해해달라 한다. 그렇게 숨겨두었던 본심은 유일한 친구관계를 원망으로 바꿔놓았다.


유대인 친구는 사랑을 공급할 대상이 필요했고, 독일인 친구는 가문까지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렇게 출발점부터 다른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착 달라붙어 지내는 동안에도 선을 긋던 독일인 친구는, 기꺼이 상처받을 준비가 됐다는 절친에게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경고한다. 아니, 귀족이라면서 그게 할 말인가? 안 그래도 계급 차이를 절감하는 친구한테? 유대인들을 경멸하는 모친을 방패 삼아 제 감정을 속였던 독일인 친구는 우정의 어디까지가 진심이었을까.


부모의 권유를 따라 유대인 친구는 미국으로 넘어간다. 이때 독일인 친구가 쓴 편지가 아주 가관이다. 히틀러가 조국을 구할 테니 훗날에 다시 돌아와도 좋단다. 이런 놈하고 우정을 맹세했었다니. 얼마나 실망스러웠으면 미국에서 30년이나 짱박혀 살았겠나. 아무튼 괜히 읽었다 할 정도로 평범했는데 마지막 챕터가 작품성을 확 끌어올려놨다. 솔직히 뻔한 반전이라 놀랍지는 않았고, 잘 살고 있는 주인공에게 추모비 기부 요청서를 날려서 겨우 묵혀둔 감정들을 끄집어내게 한 연출이 압권이었다. 대부분 친구와의 끊어지지 않은 우정을 주목하는 반면, 나는 부모의 자살 소식과 본인의 인종차별, 친구에 대한 실망을 떠올렸을 주인공의 아픔에 주목했다.


그리고 나는 좀 그렇다. 마지막 문장 한 줄로 수십 년간의 묵은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개연성이라곤 1도 없는 말 같은데, 여기에 많은 독자들이 펑펑 울었다니까 좀 어이없다. 주인공처럼 여리고 섬세한 성격들은 평생을 가도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단 말이다. 그런데 무슨 뷰티풀 엔딩 어쩌구 저쩌구. 이런 게 바로 유행 타는 독서의 단점이다. 아무튼 이만하면 중복은 아니겠지? 힘들다,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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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9-11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지막에 울진 않았지만 그래도 울컥! 했답니다. 이 책은 중고등학생이 읽으면 좋을 거 같아요.

물감 2023-09-11 08:47   좋아요 1 | URL
물론 그렇게 유도한 작품이지만요,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땠을까... 기쁘거나 감동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나를 괴롭히던 일진이 훗날 노벨평화상을 받았다해서 내 기분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아 모르겠다. 너무 과몰입한 것일까요 ㅎㅎㅎ

책읽는나무 2023-09-11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까칠했던 이유가 이제 밝혀지는군요?
근데 정말 그런 걸까?
문득 그렇게 또 생각을...
근데 전 이 책 아직 안 읽었답니다.
메모했어요.^^

물감 2023-09-11 10:3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이제와 말하긴 뭐하지만 꼭 좀 믿어주세요...
좋은 작품은 맞는데요, 솔직히 낡고 낡은 이야기였습니다.
워낙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그런건지도요.
위에 쿨캣님 말씀대로 청소년한테는 좋을듯 하네요 ^^

자목련 2023-09-11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써야지 하면서 미룬 책인데,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ㅎ

물감 2023-09-11 17:04   좋아요 0 | URL
음.. 리뷰를 위해 재독하실 것까지야. 막상 읽으시면 별 감흥 없으실 걸요 ㅎㅎㅎ 읽어야 할 책은 많으니까요! ^^

잠자냥 2023-09-13 1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 울었던 거 같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9-13 10:35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가만보면 꼭 제가 T같고 자냥님이 F같다니까요?
자냥님 분발하세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9-13 12:29   좋아요 1 | URL
분발해서 검사 다시 해볼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9-13 12:59   좋아요 1 | URL
49 대 51 나오실지도 ㅋㅋㅋㅋㅋㅋ
 
이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6
알베르 카뮈 지음, 이기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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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기분이 안 좋았다. 몇 날 며칠을 치통에 시달렸고, 빌린 책들은 연속으로 꽝이었으며, 새 직장을 들어가서 계속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무기력하던 여름에도 독서를 놓지 않았거늘, 정작 독서의 계절이 되고 나니 잘 간직했던 여유가 흩어져 버렸다. 인생의 3라운드를 맞이한 요즘, 늘 그랬듯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지만 어떻게든 통제하는 중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좀 더 단순하고 현실적이게 살자는 것인데, 이 새로운 마음가짐을 위해서 지긋지긋한 이방인의 자아를 떼어낼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이참에 고이 모셔두었던 카뮈의 <이방인>을 경건히 읽음으로써 평생의 애물단지와 그만 헤어지기를 다짐했다. 과연?


이 오래된 작품을 문학동네에서만 <이인>으로 출간했는데, 읽어보니까 ‘이방인‘보다는 확실히 ‘이인‘이란 표현이 더 와닿는다. <노인과 바다>만큼이나 단순 건조한 이야기. 주인공 뫼르소가 모친의 장례를 치른 뒤,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내다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러 재판을 받는다. 그런데 전 과정에서 주인공의 태도가 심드렁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런 친구들의 영혼 없는 리액션은 꼭 오해를 낳고 소문을 키우곤 한다. 사실 이들이 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거늘 대중들은 그 언행에 타당한 이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조차도 설명을 못하니 그저 나사 빠진 사회 부적응자 정도로 치부할 따름. 최근 들어서 이런 사람들이 뉴스에 자주 나오는데, 그걸 다 정신질환으로 퉁쳐버리면 끝날 일일까. 뫼르소를 보는 내내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모친의 장례를 치르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그렸던 게 아니었나 하는. 삶이 부질없다고 느낀 뫼르소는, 자신이 생각하는 해방과 새 출발을 모친의 죽음에서 발견했다. 하여 자신 또한 그렇게 되고 싶어서 더 이상 사회적 가면을 써야 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게 아닐까. 작중에서는 뫼르소의 성격이 원래부터 그런 것처럼 나오지만, 직장도 다녔고 모친도 부양했던 걸로 보아 모태쿨병은 아니다. 그저 은연중에 어떻게 살든(혹은 죽더라도) 무방하다고 판단했지 싶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뫼르소한테는 이성과 논리가 먹히지 않는다. 게다가 종교와 신까지 거부하여 영적으로도 접근이 불가했다. 그런즉 뫼르소는 스스로가 유일신이며 절대자가 되었다고들 해석한다. 그러한 관점으로 말하자면 모친의 죽음도, 자신의 살인도, 심문과 재판들도 전부 의미를 잃어버린다. 마치 머리 위를 알짱거리는 저 날벌레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죽으면 되지 않느냐는 뫼르소의 발언은, 아무리 나를 설명해 봤자 이해도 납득도 하지 못할 테니 죽고 난 뒤에 알아서들 지지고 볶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글쎄, 장례식에서의 태도야 그렇다 쳐도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범죄는 그리 쿨하게 넘어갈 일은 아닐 터. 정녕 카뮈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정의하는 이방인은, 울타리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겉도는 사람이다. 애매한 공감대로 형성된 소속에서 잘해보겠다며 장단도 맞춰보지만, 그럴수록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의 관계라는 사실만 분명해진다. 끝내 자발적 아싸를 선택한 이들은 그 순간부터 타인에게 이해받기를 포기해버린다. 어차피 나도 너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서로 취향 존중해 주자는 것이 오늘날의 암묵적인 룰이다. 그 정도로 차고 넘치는 이방인들의 사회가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와 뫼르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법정에 선 친구들은 패륜아에다 살인자가 된 뫼르소를 가리켜 의리와 사랑이 충만한 진짜 사나이라 증언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었다. 선악이 공존하는 인간에게서 한쪽만을 택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못하는 뫼르소의 입바른 소리가 정직해서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한 의도라도 누군가에겐 악이자 불편한 진실이 되고 만다. 그러니 이해하지도 않을거면서 취향을 존중하겠다는 건 모순된 말이다.


그 밖에도 생각할 문제가 많은 작품이다. 확실히 카뮈 작품의 매력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데에 있다. 시간이 된다면 더 많은 내용들을 다뤄보고 싶다. <이인>에서 느낀 점은 한 가지다. ‘정의‘와 ‘부정‘은 같은 의미라는 것. 누군가를 정의하는 즉시 그 사람의 일부는 부정당한다는 말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모두가 ‘이인‘인데, 우리는 꼭 누군가를 지목하여 요주인물을 만들고 싶어 한다. 타인한테 관심 없다는 사람들도 이 부조리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어쩐지 카뮈가 콧대 높은 인간들의 저격수처럼 느껴지는데, 이 또한 함부로 정의해서는 안 될 일이지. 아무튼 나는 이번 독서로 이방인의 자아를 확 잘라내고 싶었다. 근데 반대로 우리 모두 이인이니까 그렇게 알라는 듯한 분위기여서 되게 민망하다. 아직은 때가 아닌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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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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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아무래도 어렵다. 아니, 어렵다는 단순한 표현보다 난해함과 복잡 미묘 쪽이라고 해야 하나. 전혀 못 알아들을 내용은 또 아니니까. 이번 작품도 얇아서 도전해 봤다가 낭패를 봤다. 그나마 해설 덕분에 뭐에 대한 부끄러움인지를 알겠더라. 에르노의 말은 명확하게 나가는 법이 없고 늘 빙빙 돌려대기만 한다. 실제로 이런 타입과 대화하다 보면 나까지 붕 떠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사람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싶어 화병도 생기고. 여하간 이 분은 나랑 안 맞음.


어머니를 죽이려던 아버지를 목격한 게 시작이었다. 그때의 강렬한 장면은 12살의 세상을 하나에서 둘로 갈라놓았다. 집안은 화목하기만 한 곳이 아니었고, 학교는 흙수저들을 차별 중이었으며, 2차 성징이 온 친구들은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상의 모든 법칙들은 하나도 지켜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실을 ‘그 사건‘으로 마주하게 되었고, 그 신세계가 당연하다는 듯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말 못 할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제2의 세계에서는 당연해야 할 일관성이 없이도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제멋대로인 행동, 쓰지 말아야 할 언어, 외설적인 활동, 어긋난 예절법 등등 관례와 규칙에서 벗어나는 모든 짓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집단이든지 우위와 서열이 있었으며, ‘나‘는 이 오류의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이 점을 알게 해준 ‘그 사건‘은 저자의 불행을 벌어놓았던 것이다.


저자의 부끄러움, 즉 수치심의 원인은 자신이 속했던 안쪽 세계와 바깥 세계를 구분 짓는 계급 때문이었다. 폭력과 소외를 마주한 뒤로는 다시 안쪽 세계에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남들 따라 범법자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윤리와 종교의 가르침들은 정녕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그날의 일로 12살의 어린아이는 순수를 잃었고, 그 후로 저자는 논란을 몰고 다니는 파격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작품을 쓰고 난 후로는 저자가 부끄러움에서 해방되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해설에 따르면, 마음속 밑바닥에 깔려있는 은밀한 치부를 후련하게 떨쳐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했을 거라는데, 나도 이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에르노는 이것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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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8-28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에르노의 작품 중 그래도 난감하지 않은 작품 중 하나였던 듯요. 오래 기억에 남구요.
에르노, 읽기 편한 작가는 아니었습니다.^^

물감 2023-08-28 10:38   좋아요 2 | URL
이게 무난한 축에 끼는군요...ㅎㅎㅎ 에르노가 어려운 문장은 없는데, 이 얘길 왜 하지?싶은 생각이 계속 들게 해요. 세 권쯤 읽었으니 이제 보내줘도 되겠죠 뭐^^

고양이라디오 2023-09-01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왠지 서친분들 리뷰 보니깐 저랑 안맞을 거 같더라고요ㅎ

저도 애매하고 두루뭉실한 표현은 어려워하고 싫어해서ㅜ

물감 2023-09-01 19:11   좋아요 2 | URL
프랑스 문학이 유독 그렇더라고요. 좋을땐 한없이 좋은데 아닐땐 고구마 삼키는 기분ㅋㅋㅋ 저도 단순명쾌함을 더 추구하는지라 😃

잠자냥 2023-09-02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병 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9-02 11:09   좋아요 1 | URL
죽겠어요...ㅋㅋㅋㅋ
 
케이크와 맥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4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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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아온 소설가들은 크게 세 가지의 유형이 있다. 먼저는 사회에 불만이 많은 자. 그래서 이슈의 공론화를 위해 책을 쓰고 갈등을 만든다. 다음으로 변태 같은 감성의 소유자.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증명해야만 속이 풀리는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비상한 관점의 현자. 이들은 독자의 허점을 찌르고 편견을 깨는 것이 목적이다. 서머싯 몸은 세 번째 유형에 해당된다. 그는 작품 속에서 공감도 원치 않고 설득도 하려 않는다. 그저 내 생각은 이렇다 할 뿐인데 그게 꼭 남들과 달라서 신경 쓰이는 것이다.


<케이크와 맥주>는 작가들에게 관점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물론 독자들도 배워두면 유익할 테니 잘 봐두면 좋겠지만 솔직히 재미는 없다. 잘나가는 소설가 A는 타계한 거장의 전기문 집필을 위해 화자를 찾아온다. 세계적인 작가, 드리필드와의 추억을 말해달라는데 영 내키지가 않는다. 작품의 명성과는 별개로, 드리필드는 인간적으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못되었기 때문에. 화자만의 기억은 남들하고 어떻게 달랐을까.


이야기는 ‘나‘의 과거 15살로 돌아간다. 소년은 평판이 나빴던 드리필드 부부와 친해진다. 소문과 다르게 좋은 사람들이었고, 특히 부인의 매력과 인간미가 퍽 훌륭했다. 이토록 순수하고 쿵짝도 잘 맞는 부인의 어디가 음탕하다는 걸까. 의심은 이내 현실이 되었지만 부인은 오늘도 내일도 천진난만할 뿐이었다. 결국 소문이 맞았고 배신감마저 느껴졌으나 그것이 부인을 싫어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심지어 남편과 야반도주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소년이 어려서 뭘 모른다고 생각했다면 축하한다. 당신도 꼰대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모두에게 욕먹는 드리필드 부인에 대한 ‘나‘의 애정이 유별나다고만은 볼 수 없다. 소년은 시샘하는 이들과 잘만 지내는 부인의 매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자기만의 평판을 쌓아갔다. 과연, 체면을 벗어두었더니 그녀의 장점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다 생각하기 나름이란 뜻이겠지. 어렸을 때만 해도 사람을 겉으로 판단해선 안된다고 배웠다. 지금은 처신을 잘해야 하는 시대인 만큼 겉으로도 판단이 가능하다는 추세다. 이 문제를 자신에게 적용시켜보자. 타인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정의할 수 있을까. 그 정의가 들어맞을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나는 No인데 다수가 Yes라고 한다면 그게 정답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왜 있는가. 사람이란 이렇게나 복잡하게 만들어진 존재이다.


부인의 비중이 더 큰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성공에 눈이 먼 작가들을 풍자한다는 내용이다. 화자를 찾아온 A는 재능과 실력까지 겸비한 처세술의 달인이었다. 그렇게 야무지고 눈치 빠른 양반이 거장의 일면만을 보고서 극찬한 것도 그렇고, 거장의 비판을 모르쇠 하는 것도 그렇고 참. 화자에게는 A나 거장이나 한 통속이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드리필드는 기나긴 무명시절에도 개성과 여유를 간직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알게 된 후원자를 통해 사교계를 접수하고부터 명성을 쌓게 된다. 그렇게 해서 훗날 거장이 되었다지만 화자는 그것이 누군가의 꼭두각시놀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성공과 맞바꾼 작가의 영혼.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기엔 변질돼버린 그의 오리지널이 자꾸 생각나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드리필드 부부에 대한 대중과 ‘나‘의 인식은 정반대로 흘러간다. 비난의 아이콘이던 부인한테는 남들이 보지 못한 매력이 넘쳤고, 공경의 아이콘이 된 거장에게는 남들이 맡지 못한 구린내가 풍겨났다. 어째서 ‘나‘는 부인의 불미한 행실에도 취향을 존중하고, 줄타기에 성공한 거장을 위선자로 보았는가. 두 사람 다 고통을 앗아가는 쾌락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각자의 말 못 할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선택이었고, 그 결과 부인은 비난받고 남편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사랑으로 가득한 부인의 삶이었고, 비난받아도 할 말 없는 남편의 삶이었음을 알게 된 화자였다.


물론 너도나도 ‘역행자‘가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잘못했다간 사회 부적응자란 소리나 듣게 될 것이다. 온갖 상황과 변수로 가득한 인간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비결은, 유연한 사고와 발상을 길러주는 ‘관점‘에 달려있다. 유독 한국인들은 판단하고 분류하고 정의하기를 좋아하는데, 수학 문제가 아니고서야 꼭 정답일 필요가 있을까. 답이 없는 문제일수록 차라리 중용을 택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더 이롭다. 근데 한편으로는 내 앞가림도 잘 못하면서 정신건강이 웬 말이냐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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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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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말하길,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상황과 배경은 그렇다 쳐도 그 말의 뿌리까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를 통해 자신을 파괴한다는 의미를 겨우 알아듣게 되었다. 다만 그 권리를 알아차렸을 때에 난 이미 파괴된 후였고, 가난한 권리마저 박탈 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해 보지도 못했다. 츠바이크 또한 불안의 근원과 분노의 방향에 대해서 소송을 걸었고 이 책과 죽음으로써 판결을 내렸다.


<우체국 아가씨>는 전쟁세대의 잃어버린 청춘과 인권에 대한 연가이다. 이모의 초청을 받은 우체국 직원 C양이 스위스 호텔을 찾아가는 것으로 1부가 시작된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그녀는 바깥공기를 맡고 기뻐하기보다 자신의 초라함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호텔에 머물면서 온갖 즐거움을 누렸지만 휴가가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텐데, 후유증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우물 속에서 계속 있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지독한 가난의 해방감과 경험의 희로애락 등 인간의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막아선 안되겠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모친도 잊고 사는 젊은 그대 C양은 누가 보더라도 위험했다.


그럼에도 이모 부부는 저 방정맞은 조카를 말리지 못한다. 시궁창에 빠져있던 청춘을 드디어 건져냈는데 그 기쁨이 오죽했을까. 그렇게 물 만난 물고기는 저도 모르게 수족관 밖으로 튀어나온다. C양의 나쁜 소문에 대해 이모가 둘러대지 말고 제대로 설명했으면 좋았을 것을. 조카의 순수함을 지켜줄 게 아니라, 성인으로서의 교양과 덕목을 심어주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2부에서 그토록 자기 파괴적인 모습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둥지 아래로 떨어진 아기 새처럼 불안해진 C양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거지 같은 시골 처녀로 되돌아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모친이 위독하단 소식에 별 수없이 귀향하지만 어째선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저자는 지칠 대로 지친 그녀의 심정을 꾹꾹 눌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 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 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 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234p


총량을 넘긴 감정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슬픔이 슬픔인 줄도 몰랐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슬픔인 줄 알고도 슬프지가 않게 되었다. 분명히 삶을 송두리째 뺏겼는데 누가 뺏어갔는지를 알 수가 없다. 화가 나는데 화를 낼 대상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하늘 아래서 누구는 풍요롭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가. 어째서 가난은 공평치 못하고 사람 봐가면서 찾아오는 건가. 그것은 철없던 내가 줄곧 하던 생각이었다. 점점 가난을 망각하고 살았더니 여유가 생긴 지금은 뭘 해도 즐겁지가 않다. 그 감정을 모른 지가 너무 오래됐다. 차라리 이대로 계속 몰랐으면 좋겠는데 츠바이크가 전부 다 망쳐놨다. 나쁜 사람.



2부에서는 시궁창 현실로 복귀한 C양의 신세한탄이 펼쳐진다. 호캉스 후로 날카로워진 그녀는 바람 쐬러 간 타 지역에서 형부의 군대 친구인 P군과 친해진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불만과 똑닮은 그의 불행하고 가까워진다. P군은 참전용사의 대우를 받기는커녕 어떠한 혜택도 없이 절망 속에 살아간다. 국가와 전쟁에 바쳤던 자신의 젊음이 잠깐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품만도 못하다니. C양의 폐부를 찌르고 작품 전체를 관통한 P군의 발언을 살펴보자.

"사소한 부상이야, 그렇지 않아? 세계대전을 겪고 시베리아에서 4년간 지내면서 겨우 손가락 두 개 다쳤을 뿐이니. 그런데 죽은 손가락이 살아 있는 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사람들은 잘 몰라. 건축사가 되고 싶은데 그림을 그릴 수도 없고, 사무실에서 타이핑할 수도 없고, 무거운 물건을 들지도 못하지. 가느다란 힘줄 하나가 썩었을 뿐이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꼭 하고 싶은 일들이 그 실처럼 가느다란 힘줄에 매달려 있다는 게 문제야. 집을 설계할 때 도면에서 1밀리미터만 잘못 그려도, 겨우 1밀리미터이지만 집 전체가 붕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야." - 281p


내게서 떨어져 나간 한 줌의 무언가로 인해 삶의 통로가, 세상과의 창구가 닫혀버린 것이다. 나는 멀쩡히 존재하건만 겨우 1%의 결함 때문에 남은 99%를 무가치하다고 판단한 국가였다. 왜 이들은 남들처럼 평범한 인생을 누리지 못하는가. 아픔만 남겨놓고 말없이 떠나간 청춘들을 어디에 가면 보상받을 수 있는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한 나는 제한된 일상의 고통과, 소모품으로 살아야만 하는 설움을 너무나도 잘 안다. 쳐다보지도 못하게 된 꿈과 도전들은 질리지도 않고 손짓을 해대는데, 그게 다 희망고문인 줄 알면서도 괜히 연민에 빠져보고 동정 속에 나를 밀어넣어도 봤다. 가난은 나와 C양을 초라하게 만들었고, 신체적 결함은 나와 P군을 세상 밖으로 계속 몰아냈다. 츠바이크도 그렇게 밀려나다가 벼랑 밑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불행한 가정의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고 했지만, 현대사회에 와서는 죄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누가 더 불행한지 겨루는 게 무색해진 현실 앞에서 개인의 아픔은 어린아이의 반찬투정 정도로 느껴진다. 글쎄, 나 같은 사람은 건물주나 복권 당첨을 바라지도 않는다. 기본적인 생활 유지와 인권을 보장받는다면 그걸로 족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눈치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남들과의 비교로 나의 불행을 키우는 상황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평등하길 바랄수록 옐로카드만 꺼내드는 세상이다.


나보다 더한 이들한테서 위안을 얻는다는 건 말도 안 될 뿐더러 할 짓도 못된다. 반대로 잘 사는 누군가가 내 아픔을 감당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남녀의 울분은 끝내 복수와 배신으로 이어진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다가도 저자의 말로를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나 또한 가슴속에 총 몇 자루씩 품고 살아가니까. 츠바이크가 그린 시대의 자화상이라. 마음이 참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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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8-21 11: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크- 정말 좋은 소설이죠. 좋은 소설 읽고 나온 감상은 좋지 않을 수 없네요. 크-

물감 2023-08-21 15:55   좋아요 1 | URL
저 아무래도 츠바이크한테 빠질 것 같습니다.
한두 권만 더 읽어보고요 ㅋㅋㅋㅋ

은하수 2023-08-21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물감님 생각에 바로 공감입니다. 멋진 작품이죠!!

물감 2023-08-21 15:57   좋아요 1 | URL
은하수 님도 총잡이?! ㅋㅋㅋㅋ
츠바이크는 사랑입니다 ^^

coolcat329 2023-08-21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빨리 읽어야겠어요~^^

물감 2023-08-21 15:58   좋아요 1 | URL
쿨캣님 이거 얼마만입니까요! 잘 지내시죠? ㅋㅋ
언넝 읽고 리뷰써주세요~~~!

은오 2023-08-21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저 아직 초조한마음산것도 안읽었는데 이거 벌써 오별주시면 스트레스받습니다..
굉장히..
매우..
하........

물감 2023-08-21 19:2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근데 요즘의 은오님 행보를 보면 츠바이크도 긴장해야 할 듯요ㅋㅋㅋㅋㅋ

은오 2023-08-21 19:38   좋아요 1 | URL
근데 질문있습니다. 물감님 병렬독서 안하시는걸로 알고있는데 읽고있는책에 왜 4권이나 있는거죠?! 읽으실 책인가요? 😯 리뷰예정 이런거..?

물감 2023-08-21 19:48   좋아요 1 | URL
곧 읽을 목록이에요. 지금 4권은 대여한 책들이고요. 물론 병렬독서는 안합니다ㅋㅋㅋ

은오 2023-08-21 19:56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또질문있습니다. 대여하시는 책과 구입하시는 책은 어떤 기준이죠? 궁금한게 많아 죄송..ㅋㅋㅋ 그래도 알려주세요!!

물감 2023-08-21 20:11   좋아요 1 | URL
음 딱히 기준이 없네요. 그날그날 제 기분에 따라서?ㅋㅋㅋ
그래도 평소에 눈여겨봐둔 작가들 안에서 고르려고는 하네요. 아 그건 있어요. 저는 신간, 베스트셀러, 추천 책, 입소문 책을 철저히 외면합니다. 절대 유행이나 지름신에게 휘둘리지 않아요. 제 스스로 읽을 책을 발견하는 맛을 좋아해서요ㅋㅋㅋㅋ또 질문있나요😀

은오 2023-08-21 20:37   좋아요 1 | URL
기분에 따라서라니 이건 좀 의외입니다! ㅋㅋㅋ 오늘은 질문 여기까지하겠습니다 알찬 질문타임이었다 😆 물감님 굿밤!!!!

구단씨 2023-08-21 1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제목만 봤을 때는 잔잔한 분위기가 먼저 연상되었는데,
내용 듣다 보니 파도가 막 치는 느낌입니다.
문제는,
제가 이 책을 구판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ㅠㅠ
네, 가지고만 있었어요.
제목만 보고 다른 책인 줄 알았는데, 물감님 리뷰 안 봤으면 같은 책인 줄도 몰랐네요. ㅎㅎ

물감 2023-08-21 19:35   좋아요 1 | URL
잔잔한 파도가 계속 치다가 어느새 해수면이 상승하더니 쓰나미로 바뀌더군요. 꼼짝없이 당했습니다....
구판은 제목이 다른가봐요? 내용은 같으니까 이번에 한 번 읽어보셔요ㅎㅎㅎ

잠자냥 2023-08-21 20:44   좋아요 1 | URL
물감 님, 구판 제목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이건 줄 모르고 산 책 또 산 사람(다락방) 읽은 책 또 읽다 중간에 알아차리고 접은 사람(골드문트), 다행히 구판 갖고 있는 거 알게 된 사람(구단씨) 등등 ㅋㅋㅋㅋ 사연도 재미납니다.

물감 2023-08-21 20:56   좋아요 1 | URL
딱 보니까 출판사가 노린 거네요. 피해자 속출ㅋㅋㅋ 이래서 신간은 주의해야 하나봐요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