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방으로 





1.


아빠는 나보고 지렁이래요.

걷지도 못하고 밖에도 나가지 않으려 한다고.

엄마는 나보고 물고기래요.

모양만 사람일 뿐, 말도 한마디 못한다고.


"엄마 아빠, 큰 병원 가서 내 머리를 치료해 줘!"


속이 상한 내가 이렇게 말하자 

글쎄, 이발소가 나왔지 뭐예요.

빨간 피 파란 피가 사이좋게 빙글빙글

돌면서 내 머리를 댕강 잘라갔어요.



2.


- "이 아이 머리는 가위 자국이 많군요. 얼른 배 속의 장기를 떼 주세요. 다른 생명이라도 살려야죠."

- "아니, 그게 애 엄마한테 할 소리인가요? 게다가 당신은 죽어가는 사람 장기 받아서 살고 싶나요?"

- "당연하죠! 지금 당장 당신의 배를 갈라서 콩팥을 떼 가겠어요. 간은 보존해드리죠."

"에잇, 그럼 나야말로 당신의 뇌를 꺼내서 내 아이 머릿속에 심어야겠어요, 겟아웃!"



3. 


내가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쉿! 

천기누설은 절대 금지, 진실의 방은 안 돼요. 

비밀의 화원, 아니, 몰래 텃밭이나 가꾸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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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 좋음 





1. 


이것은 동화,

도서관이 좋아서 쓴 동화다. 


열 세 살 중학생은 방학이면 새벽 같이 시립 도서관 입구에서 줄을 섰다. 

청년을 거쳐 장년, 중년에 이르기까지 도서관은 건재하다. 

좋은 자리를 노리는 저 기나긴 줄도 여전하다. 


2. 


도서관에 가면

책도 있고 신문 잡지도 있고

책상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식당 매점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학생도 있고 아저씨 아줌마도 있고 

등나무 딸린 벤치도, 어르신도 있고 

없는 게 없더라, 그래서 좋더라. 


도서관에 가면 심지어 학교도 있더라.

도서관은 양파의 표피세포와 입안의 상피세포를, 

줄리앙 석고상과 해부대와 피아노 피리를 품었더라. 


아시다시피 학교의 시간은 열역학 엔트로피의 시간.

6학년은 1학년이, 고등학생은 중학생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도서관은 검은 구멍과 벌레 구멍을 허용한다.

광속도 초월하지, 대폭발쯤이야, 뭐.


열 세 살을 소환하는 도서관은 심리적 시간, 나아가 

우주 팽창의 시간, 4차원 5차원 무한대의 시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오묘한 테세렉트의 시간

시간 가는 줄, 시간 오는 줄 모르는 몽롱한 시간, 

도끼 자루 썩는 신선놀음 이천년 도깨비 빤스의 시간, 

갈릴레오와 뉴턴과 아인슈타인과 호킹이 만나는 

저 세상의 시간, 절대 궁극의 시간. 


저 악명 높은 보르헤스의 도서관에도

통풍구와 (아마 먹기에!) 싸고 자는 시공간은 있다.

인간은 책만으로 살 수 없다, 암 그렇고 말고.

보르헤스가 성탄절에 계단에서 구른 건 

허기와 시력 탓이었을 터.

도서관은 계단은 완만할 수 있지만

장서에 닿기 위한 사다리는 가파르다. 


중년의 사서는, 늙음과 불안에 현혹된 탓인지, 

지구가 멸망한 다음에도 도서관은 무한하리라, 생각한다. 

쓸모도 없고 귀중한, 썩지도 않는 책들을 잔뜩 장착한 채, 

미동도 없이 고독한 불을 환히 밝혀두고 질 나쁜 불멸을 누리리라.

무한한 정육각형 벌집 서고를 헤매는 우리는 

책의 꿀이나 빠는 게으른 한량. 그러게, 

도서관에는 싸고 자는 시공간이 꼭 필요하다. 

 


3. 


도서관 동화의 핵심은 구내 식당의 냄비 우동이다. 

우그러진 노란 냄비, 비 오는 날 지렁이처럼 굵은 면발, 

한 떨기 숨결처럼 드리워진 쑥갓 한 줄기,

왜소한 납작 어묵 두 세 조각. 


먹어야 읽는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 라는 말을

여전히 곧이곧대로 믿는가,

한심한 사피엔스여




















<바벨의 도서관>의 영역본을 접할 수 있다. 국역본도 물론 좋다.  

Full text of "The Library of Babel" (archive.org) "중년의 사서는 (...) 불멸을 누리리라"는 <바벨의 도서관> 마지막 부분을 변주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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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23-02-15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in angulo cum libro(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문어의 공식, 혹은 에리직톤 







1. 


지중해에서 문어 낚시를 했다. 

갑자기 땅이 흔들리고 바다가 뒤집혔다.

당장 손에 잡히는 놈들만, 그리고 목숨부터 챙겼다.


2. 


여기는 한반도, 

아이스박스 속 얼음은 거의 녹지 않았고 

문어는 무려 둘, 큰 놈이 작은 놈의 두 배다. 

작은 놈은 멀쩡한데 큰 놈은 다리가 두 개나 없다. 

상흔도, 핏물도 없이 절삭기로 싹둑한 것 같았다.  

설마 共食? 글쎄, 큰 놈이 작은 놈한테 당했을 리 없다.

반 냉동 상태, 소 닭 보듯 멀찍이 떨어진 작은 놈을

사냥하느니 차라리 제 다리를 뜯어먹었나.

역시 지중해, 어딘가 로마 제국을 연상시킨다.


3. 


에리직톤이 성스러운 나무를 벴다. 원래 독신을 일삼던 자였다.

말리는 사람의 목도 벴다. 도끼로. 나무는 피와 저주의 말을 흘렸다. 

담당 신들의 협의 끝에 파메스 여신이 잠든 에리직톤 속으로

잠입했다. 눈을 뜨기도 전에 그는 배가 고팠다. 아무리 먹어도

음식은 허기를 채우기는커녕 더 자극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하나 있는 딸을 팔아 먹었다. 변신 재주 덕분에 딸은 계속 

팔아 먹혔다. 에리직톤은 그래도 딸은 잡아 먹지 않았다. 

共食은 금물. 오히려 자신의 팔 다리를 뜯어 먹었다. 

그래도 배가 차지 않아 먹고 또 먹고, 맨 마지막에 

먹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입? 위장? 뇌수? 

허기? 그것이 궁금하다.


4.  


아깝다. 큰 놈의 사라진 두 다리, 그게 제일 통통하고 맛있어 보였는데. 

내 먹이를 문어가 먹어버렸다. 지중해의 땅과 바다는 아직도 흔들리고

그 저변에 문어가 깔려 있다. 문어는 예감했을 것이다. 문방사우를 위해

먹물 뿜는, 똑똑한 아귀병 기저질환자 문어의 公式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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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갑자기, 엄살 








어젯밤에 갑자기

내가 더는 뭔가를 꿈꾸지 않는다는,

더 이상 장래도 없고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곱 살,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고

선생님이 꿈이었다. 

열 네 살, 얼른 대학에 가고 싶었고

소설가가 꿈이었다. 

스물 한 살, 얼른 유학을 가고 싶었고 

박사가 꿈이었다. 

스물 여덟 살, 얼른 귀국하고 싶었고 

교수가 꿈이었다.


서른 다섯 살, 꿈의 잔해로 가득 찬 원형의 폐허 위에서

어느 중년 교수가 이 밥 한 끼가 너무 고맙다며 밥 한 공기와

반찬을 싹 비우셨다. 똑똑한 남편과 아들 딸을 둔

엄마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참, 

웃겼다. 아, 그러세요. 


마흔 두 살, 

하루 빨리 육아에서 해방되고, 그리하여  

하루 빨리 책과 영화로 도피하고 싶었다. 


마흔 아홉 살, 보다시피, 아무 꿈이 없다. 한편, 이제는 노학자가 된 그녀는 

서울 근교 3천 여평 땅에 서원과 정원을 짓고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여백과 초월의 미를 구현하는데, 실은, 저거야말로 내 꿈이 아니었던가 싶어 참,

웃긴다. 아, 그러세요. 아삭아삭 오이는 참, 맛있겠다. 선생님, 그런데 개망초는 말이죠, 

혼자 있어도 결코 시시하지 않습니다. 무리 지어 피어 있으면 더 예쁠 뿐이지요.  


어젯밤에 갑자기 

내가 너무 많은 잠을 자고 너무 많은 꿈을 꾼다는 사실을, 

그리고 있는 것은 오늘 하루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정신의 밥 한 끼라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득, 

너무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참척의 고통에 신을 원망하다가

남은 자식들까지 어찌 될까 봐 버럭 겁이 났다는 한 엄마 소설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게, 어젯밤에 갑자기

웬 엄살이었나. 이 모든 청승과 궁상은

호강에 겨워 요강 깨는 짓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랜만에 이렇게 뵈니 무척 반갑다!

[다큐인사이트 하이라이트] 학문과 인생의 정점에 선 일흔둘 노학자의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는 인생정원 사계를 만나본다 (KBS 20221229 방송)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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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삶, 여기는 






방안으로 빛이 샌다. 

짧은 경련 끝에 의식을 잃은 아이는 

아침 햇살, 한낮의 빛, 저녁 어스름까지 

잠들어 있다. 바깥은 빛, 여기는 어둠. 

계절이 네 번이나 바뀌도록 잠은 계속되고 

봄의 설렘도, 한여름의 열애도, 푸른 가을 

하늘도, 잿빛 겨울 냉기도 모두

꿈이어라. 바깥은 여름, 여기는 겨울. 


바깥은 삶, 여기는 죽음. 


기어코 깨어날 아이를 위해 생선을 구워줘야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선을. 

하지만 그 흔한 꽁치도 막상 찾으니 없다, 개똥이 따로 없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꽁치를 원망하며 염치를 생각한다.

온 순서대로 가주면 좋으련만. 

신이란 참 염치도 없으시지.

눈치 코치도 없으시지. 


깨진 컵은 다시 붙지 못하고 

엎지른 물은 다시 담지 못하고

노인은 아이가 되지 못하고 

바깥은 코스모스, 여기는 카오스

바깥은 에너지, 여기는 엔트로피.


치로 끝나는 두 글자 생선은 꽁치 말고도 

갈치, 삼치, 준치, 참치, 멸치, 세 글자로는 

버들치도 있는데, 아이와 함께 관악산 계곡에서 

떡밥으로 저 버들치를 잡던 추억이 있다. 


바깥은 시간, 여기는 멈춤. 


*


















성현주 : 네이버 통합검색 (naver.com) : 사인을 밝히지 않으려는 깊은 속뜻... / 병원 바깥과 안의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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