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 허구론 - 대한민국은 기후 악당국인가?
박석순 지음 / 어문학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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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한민국에서 환경공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반 기후 위기론을 펼치며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반하는 연구들을 번역해서 알리고 기후지성인연합(Clintel)의 회원이며 20239월 기준으로 1600여 명에 이르는 학자들이 서명하며 선언한 세계기후선언에 동참한 한국을 대표하는 환경공학자가 쓴 저작이다.

 

그간 종말론적 환경주의와 기후변화라는 반 협박조의 공포 조성에 반대하는 저작들을 몇 권 읽어보았는데 본서는 그 가운데 가장 쉬운 서술과 핵심 주제만 딱 명확히 펼치는 대중서가 아닌가 싶다. 대중에게 어려울 대목들을 너무 쉽고 명료하게 짚어주고 있는데 서술을 광범위하게 확장하지 않으면서 핵심을 확실히 이해하도록 풀어주는 책이다.

 

본서에서는 기후변화 주장이 대중에게 얼마나 스트레스와 우울, 과도한 공포를 조성하는지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한 공포 조성이 20세기 극초반부터 지구냉각화설이 이후 지구온난화설로 변이하고 지구온난화가 거짓임이 판명되자 기후변화라는 이름으로 거듭났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생태계와 인간에게 극히 유익하다 못해 축복일 수밖에 없는 이산화탄소 증가까지 인간을 종말로 몰고 가는 원인이라고 치부하며 공포와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사실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1 기후위기와 환경주의가 가닿은 신세계 질서

 

20세기 초반에 지구냉각화설과 20세기 중반에는 지구온난화설이 주장되었으나 두 경우 각각 지구냉각화가 끝나서 중단되었고 지구온난화설도 지구온난화가 중단되며 폐기되었다. 그런데도 UNIPCC는 데이터 조작을 서슴치 않으며 기후위기설 주장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본서에서는 진짜 데이터로 몇십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지구의 기온은 냉각화와 온난화를 거듭해 왔었음을 증거하고 있고 인류세에서도 중세온난기와 소빙하기가 거듭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IPCC(정부간 기후협의체)UNEP(유엔 환경계획)의 주장과는 다르게 오히려 인류의 탄소배출이 극대화되어가는 시기에는 냉각화와 온난화가 반복되었고 탄소배출이 극소하던 과거에는 온도가 올라간 역설적인 상황이 분명히 있었다며 저자는 다수의 데이터를 제시하며 설명하고 있다.

 

UNIPCC가 데이터를 어떤 방식으로 조작하는지는 [지구를 구한다는 거짓말]이란 저작에서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본서에서 등장하는 경우는 UN사무총장이나 UNEP의 책임자가 기후위기를 주장하며 근거도 없는 데이터를 날조하며 주장하다가 실상이 드러난 경우들을 여럿 증언하고 있다. 기후위기설을 위한 날조와 조작의 증거가 되는 사례는 전 세계에 기후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경우인데, 2009년 영국 이스트잉글리아대 기후연구소의 인터넷 서버가 해킹당해 조작자들이 주고 받은 이메일 내용이 언론에 폭로된 사건이 1차 기후 게이트라고 한다. 20세기에 기후가 냉각화된 것을 숨기라고 하며 데이터 조작을 지시한 내용과 함께 1980년 이후 20년간의 데이터를 조작한 것이 폭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구의 역사 주기를 따라 오랜 시대 전부터의 데이터를 근거로 지구가 온난화되고 있다는 대중적인 주장의 근거로 삼던 마이클 만의 하키 스틱을 닮은 그래프 역시 데이터 사기였음이 밝혀졌다. 다른 메일 내용에서는 다른 연구자들이 데이터를 검증하기 위해 데이터를 요구해도 절대 제공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이 담겨 있다. 그리고 지구온난화가 중단된 이후에는 이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어서 다른 연구자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자조 섞인 토로가 담겨 있기도 하다. 이것이 1차 기후 게이트 폭로를 통해 밝혀진 내용 중 일부이다. 2차 기후 게이트는 오바마 행정부의 국립해양대기청(NOAA)에서 존 베이트 박사의 내부고발로 폭로된 것이다, 산업화 이후 배출된 총량의 25%에 해당하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있었던 2015년까지의 18년 동안에 전혀 기온상승이 없었으며 오히려 기온 하강 추세를 보였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히말라야 빙하 게이트라고 불리는 것인데 지구온난화로 2035년까지 히말라야 빙하가 다 녹아서 아시아인 20억 명의 생명수를 위협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IPCC가 제시했는데 이것이 사기란 것이 밝혀진 것이다. IPCC는 이후 2035년이 아니라 2530년을 오타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이들의 보고서가 전 세계적으로 보고되고도 문제 제기가 있고 또 사실이 아님이 밝혀질 때까지 이들은 오타란 것을 수정하지 않고 있었다. 과연 오타일 수 있는가.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다가 밝혀진 것이 아닌가. UNIPCC의 기후위기 보고서는 데이터의 보정(조작)이 기본적이며 특정 아젠다를 고수하기 위해 거짓인 걸 알면서도 주장하기 일쑤이며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반론과 증거를 제시하고서야 겨우 수정되는 정도이다. 일관되고 지속적인 이 행태는 의도가 명확하기에 가능한 짓들일 것이다.

 

지구온난화라는 주제는 마가릿 대처 영국 전수상의 유엔 연설이 발화점이 되기도 했는데 그 시대에는 과학이 불분명하게 현실을 보여주기도 해서 당시로서는 지구온난화와 그로 인한 인류의 위기가 명백한 기정사실로 믿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말년의 마가릿 대처 수상은 이 사안에 대해 후회했으며 오히려 기후위기 주장이 세계를 사회주의화 하는 방향으로 악용되고 있다고 걱정하는 말을 그녀의 회고록에 남겼다. 그녀가 영국 총리시절 그녀에게 지구온난화에 관한 자문을 했던 정치가 역시 그에 대해 후회하며 현재는 반 기후론자가 되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기후나 환경에 관한 책이 아니더라도 불평등에 관한 책(제이슨 히켈의 [격차] 같은 책)만 읽어보아도 현재의 기후위기 또한 사회주의와 세계화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가늠이 되는 바다. 본서에서 등장하듯 각국은 RE100, EV100, C40 같은 대안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하려 하지만 이런 체제들은 모두 극부층의 부를 확대하고 일반인들의 일상을 제한하는 용도로 악용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과정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와는 동떨어진 기형적 세계상으로 인류를 데리고 갈 수밖에 없다. 종말론적 환경주의와 기후위기 등의 문제는 기술의 발전을 파괴적 혁신과 잇고 디지털 코인 등과 연계하고 15분 도시제 등을 부과하게 된다면 확실한 세계인들에 대한 제재라는 결론으로 이를 수 있으며 이는 명백한 통제사회로 이행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2 선전과는 다른 현실

 

이산화탄소는 식물의 생육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식물이 번성하면서는 밀도가 다시 낮아진다고 한다. 식물과 농작물 생산에 유익한 이산화탄소는 재앙이기는커녕 축복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기도 하다. 현재 인류의 농산물 생산은 한 해 100억 명을 먹이고도 남을 양이라고 하는데 부의 불평등이 기아와 빈곤의 원인이지 음식이 없어서 굶주리고 죽어가는 것이 아니란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본서에 근거해 보자면 극지방의 빙하가 녹고 있다지만 남극의 빙하는 오히려 순증가량 800억 톤 이상씩 증가하고 있다. 통계를 산출하기 시작한 과거부터 지금까지 북극곰도 개체수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으며 서력 2000년이면 수몰된다던 나라들이 오히려 관광산업으로 활성화되고 침수는커녕 국토면적이 넓어져 버렸다. 이를 보며 대중의 상식이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빙하는 남극지방에서도 온천이 있고 활화산이 있는 지역에서는 녹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막대한 양의 빙하가 그 반대편 지역에서 생겨나고 있다. 빙하가 가득하던 지역이 빙하가 녹으며 육지가 되었다는 지역들 역시 화석연료 사용이 없거나 미미하던 1930년대 이전까지 90% 이상이 녹았으며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몇 %도 안 되는 지도상으로 미미한 지역만 해빙되었을 뿐이다.

 

저자는 기후의 변화는 구름, 에어로졸, 지표의 빛 반사 등과 태양의 흑점 운동 등에 영향이 있지, 이산화탄소와는 무관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나타나기도 전부터 현재까지 이산화탄소는 지속적으로 감소해왔고 오히려 현재보다 더 오랜 과거에 이산화탄소량이 극단적일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지구의 역사에서 오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기후는 이산화탄소량과는 상관없이 상승하거나 하락해 왔다. 이산화탄소 위협설이 괴기스러운 헛소리일 뿐으로 들리는 설명이었다. 본서를 읽으며 지구과학, 환경과학을 기반으로 기후위기설을 검증해 보고 기후변화가 과연 종말의 징후인지를 다시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

 

기후변화가 과연 인간의 실수로 찾아오고 인간의 노력으로 대책이 될 수 있는 문제인지 다시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몇 명이나 기후위기를 헛소리라며 일소하고 있고, 환경공학자가 기후 위기를 허구라고 할 때는 기후위기설에 빠진 사람이라도 그 반대의 목소리를 들어보아야 하지 않나 싶다. 다수의 목소리가 언제나 옳은 것만은 아니란 것을 아실만한 지성을 가진 분들이라면 읽어보셔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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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우니히피리 - 안녕! 내 안의 진정한 나 처음 만나는 시리즈
이하레아카라 휴렌.KR 여사 지음, 조현희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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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알 수 있듯 호오포노포노에 관한 책인데 이와 같은 주제의 책은 많지만 내가 읽어본 몇 권 중에서는 가장 와닿는 서술이었다. 이 책 이전에는 박한진 님이 카후나 박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한 호오포노포노와 후나를 융합한 하와이안 힐링요법에 관한 책을 입문편, 완성편, 실천편 이렇게 세 권을 읽었었다. 읽고 나서 이론은 알겠는데 우니히피리와의 동행은 왠지 하지 않고 있었다. 접근부터가 박한진 님은 마법 체계의 하나로서 처음 호오포노포노에 접근하신 느낌이어서 그런지 내 입장에서는 흥미가 깊어질 여지는 있었지만 일상에서의 실천은 꽤 성가신 체계처럼 여겨져서 이후 하와이안 힐링 이론 하나를 알게 된 경험으로 남았지 우니히피리와의 동행은 중단되었다.

 

그런데 본서는 이론은 최소화되어있고 호오포노포노 전문가들의 체험담과 아이린이라는 일본인 여성의 결혼 생활에서의 우니히피리와의 동행이 체험담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 대목이 일상에서 우니히피리와의 동행을 어떻게 해야 할지 더 와닿았다.

 

이 책은 이하레아카라 휴렌 님과 KR여사의 공저인 호오포노포노 연작들 중 하나로 Self Identity Through Ho’oponopono라는 SITH를 소개하는 책이다. 모르나 여사가 창시한 호오포노포노 계열이라는데 상세한 설명은 본서에는 없지만(아마 다른 연작에서 상세히 설명할 듯싶다) 기술적인 기법들을 중시하기보다 우니히피리와의 교감을 통한 힐링에 주목한 호오포노포노 계열이 아닌가 싶다.

 

본서에서는 표면의식인 우하네, 초의식인 아쿠마쿠아, 잠재의식인 우니히피리가 서로 통합되며 신성한 존재로부터 영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통합은 우니히피리와 교감하며 정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간단한 이론만을 소개한 후 일상에서 우니히피리와 교감하며 정화하는 과정을 간략히 소개한다. 그리고 이후의 절반 이상은 SITH 전문가들의 체험단과 조언 그리고 아이린 씨의 결혼 생활에서의 우니히피리와의 동행을 소개하고 있다.

 

호오포노포노에 관한 배경지식 없이 읽는다면 너무 간략한 이론 소개에 이게 뭐야 싶을 수 있는데 약간이라도 배경지식이 있는 분들은 일상에서 평화롭게 함께 가는 우니히피리와의 동행이 다가오실 것 같다.

 

그리고 본서까지 읽으며 정화의 방식이 호오포노포노 게열마다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박한진 님은 사미용감’(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순서였고 다른 계열에서는 보통 미용감사였는데 SITH 체계에서는 고미용사’(고는 고맙습니다) 였다. 이전에 읽은 책에서 박한진 님은 전제 없는 사랑이 우선되는 정화라서 사랑합니다가 먼저라고 했지만 SITH에서의 고맙습니다가 전제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내게는 사랑합니다가 무작정 외쳐지는 것보다 더 다가왔다. 일상에서도 내면의 바람이나 감정 변화들에 주목하며 우니히피리와의 대화와 함께 사랑해라는 말로 정화하는 과정이 참 쉬우면서도 실천적일 수 있다고 생각됐다.

 

호오포노포노에 관해 처음 입문서로 선택하시겠다면 이 책의 다른 연작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서 본서를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다. 마음의 짐과 상처를 외면만 하기보다 자신을 치유하려는 실천을 이어가 보자는 마음이 들 때 호오포노포노와 그와 맥락이 같은 힐링 체계들에 관심이 생기지 않나 싶다. 자신을 치유하고 더 홀가분한 하루하루를 이어가실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의 우니히피리를 통해 당신에게 내적 제로가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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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명상 - 육체의 각성이 정신의 각성을 이끈다, 제2판
클로드 보리롱 라엘 지음 / 메신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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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래전 읽었었는데 전혀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다시 선택하고 읽어보게 되었다. 저자인 끌로드 보리롱 라엘은 뉴에이지운동이 활발하던 시기 외계인과의 조우를 주장하며 종교를 창시한 인물이다. 그가 창시한 라엘리안무브먼트라는 종교단체의 교리가 매혹적인 면은 없지만 대중에게 익숙해진 면도 없지 않을 것 같다.

 

인류는 진화된 것도 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아니라 엘로힘이라는 외계인들에 의해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했다는 것이 이 종교의 핵심 도그마다. 기독교 성경의 창조주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지 않은가? 창조주라는 경외의 대상이 되며 인류의 역사에 개입해온 존재가 바로 엘로힘이란 외계인이라는 주장이다. 신도 영혼도 없으며 개인의 개성과 자각은 세포와 유전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 인간은 생물 컴퓨터라는 것이 그들의 신조이다. 영혼이 없다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과 교리가 같겠지만 신도 없다는 그들의 주장은 신비를 체험하도록 제작되어 있는 인간이라는 종에게는 쉽게 미혹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무한을 주장한다. 무한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무한은 유한한 인간을 감싼 우주에도 인간의 내부에도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 교리에 불가피한 공허를 잠재우고 있다.

 

인간의 문화와 정신은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건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라는 개념이나 마르틴 우르반이 말하는 ()’과 해리 팔머가 말하는 신념과 같은 개념이다. 이 시절에는 용어만 다를 뿐 익숙한 개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으로 인해 입력된 바대로 사고하고 활동하는 것을 반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자못 교리들이 체계적이고 뉴에이지운동 시기에 창건한 종교답게 영성적인 면도 있다. 생물 컴퓨터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기능과 작용을 본래적 수준으로 회복하고 프로그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수단으로서 본서의 제목과도 같은 감각 명상을 수행해야 한다는 식으로 감각 명상의 중요성을 주지시키고 있기도 하다.

 

본서에서는 감각 명상수행의 대강을 요약하며 어떤 빛깔의 수행인지 엿볼 수 있도록 전개하고 있으며 본 수행은 CD나 카세트 테입을 청취하며 수행하라고 하고 있다. (다소 아쉽게도 별도 구매를 해야 한다) 체험담을 보면 음성 유도만으로 명상하는데도 불구하고 일상에서의 효과가 선도 수행에서 수행이 깊어지는 단계에서 마주하는 작용 중 하나인 기취(氣醉)와 유사한 상태를 체험한 대목이 엿보인다. 최면에 가까운 음성 유도 명상으로 근접했다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효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서양에서 주류가 된 바디 스캔 명상이나 요가니드라 같은 경우 음성 유도가 없이는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 음성 유도의 경우 보수적인 수행가분들은 그걸 명상이라고 볼 수 있느냐고 하실 수도 있는데 요가니드라를 수행해본 경험으로 볼 때 명상과 최면의 중간 정도의 의식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 자율훈련법보다 상당히 명상에 가깝고 그렇다고 삼매와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중간 상태 정도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어느 수준의 효과는 분명 있는 기법이라고 미더운 면이 있다. 요가니드라도 바디 스캔 명상도 감각 명상의 경우도 유투브에서 찾을 수 있으니 명상이 친숙하지 않은 분들은 한 번쯤 수행해보시는 것도 좋으리라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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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로 읽는 명상입문 - 스티브 잡스, 유발 하라리, 오프라 윈프리는 왜 명상을 할까? 도표로 읽는 시리즈
김말환 지음, 배종훈 그림 / 민족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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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를 선택한 까닭은 아나빠나삿띠 이후에 위빳사나로 이행하기 위한 저작들이 대개 실수행서라고 해도 실수행으로 접근하기가 수월치 않아서였다. 보다 간소하고 쉽게 위빳사나로 이행하도록 도와줄 만한 책이라고 생각되어 선택한 책이 본서다. 민족사의 이 시리즈의 불교서 가운데 내가 읽어본 책들은 모두 이해가 쉽게 불교 용어와 개념을 풀어주고 있어서 고민 없이 선택했다.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되리만치 신수심법으로 풀어지는 위빳사나를 쉽게 해설해 주고 있지만 실수행으로 접근하기 용이하게 체계를 잡아주고 있지는 않았다. 위빳사나는 남방불교 수행의 근간이니 남방불교 스님들께서는 서로 어떻게 수행의 체계를 제시하실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칸니 명상]이라는 책도 아나빠나삿띠는 체계를 쉽게 설명하고 있지만 위빳사나로 가면서 현학적이고 도그마스러운 문장들이 난무해서 독서가 정체되다가 중단된 상태인데 1일 수행, 2일 수행 이런 순이나 1단계 수행 이거, 2단계 수행 이거라고 명쾌히 체계화된 저작은 없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로서는 목차만 보고서는 이런 책을 쉽게 찾지 못해서이다.

 

하지만 본서는 8정도를 수행의 견지에서 너무도 쉽게 설명하고 있고 신수심법의 위빳사나를 해설한 대목도 이해는 쉬웠다. 어떻게 수행하면 되는지가 아둔한 나로서는 명쾌하게 와닿지 않은 것뿐인데 그게 가장 아쉽다.

 

본서는 불교 수행을 근간으로 걷기 명상(물론 불교 수행이지만), 자애 명상(이것도 불교 수행), 차 수행, 바디 스캔 명상, 만트라 명상, 만다라 명상 등을 수행하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기도 하다.

 

요즘은 명상에 관심이 깊은 분들이 대다수겠지만 불교 수행을 중심으로 수행 체계들이 궁금한 명알못 입문자분들께 유용할 책이다. 명상에 대한 정의와 명상 필수 정보부터 시작하는 본서는 마음챙김 명상같이 불교에서 시작된 수행 체계 전반에 대한 이해의 대강을 잡아줄 만한 책이다. 아나빠나삿띠는 분명히 수행 가능하고 위빳사나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만한 서술이다. 본 리뷰의 리뷰어인 저처럼 아둔한 분이 아니면 본서만으로도 위빳사나를 수행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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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차 - 빈곤과 불평등의 세기를 끝내기 위한 탈성장의 정치경제학
제이슨 히켈 지음, 김승진 옮김, 홍기빈 해제 / 아를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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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도 해제에서 홍기빈님이 언급하고 있지만 많은 분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책인 [팩트풀니스]에서는 빈곤 문제도 통계를 언급하며 200년 동안 나아져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사안에 대한 전면 반박과도 같은 사실을 서술하며 본서는 시작된다.

 

본서는 통계가 기준점을 다시 잡거나 교묘하게 호도되며 빈곤 문제를 호도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시작되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률과 달러 절하를 무시하고 빈곤의 기준을 하루 1.25 달러의 수입으로 책정한데 대하여 저자는 이 선으로는 기대 수명이 5세 미만일 때나 가능하며 하루를 겨우 연명하기도 힘든 비용이라고 지적한다. 기대 수명과 최저 생계를 보장하는 적절한 비용은 적어도 1.25 달러의 4배에 해당하는 5달러라고 한다. 1.25 달러를 빈곤 기준으로 삼을 때 세계의 빈곤 인구는 10억 명이 넘는 정도인데 이것 역시 1980년대와 지금의 차이가 없는 인구이다. 그런데도 세계은행이라던가 국제기구들은 비율적으로 빈곤에서 벗어난 인구가 많은 것으로 광고한다고 한다. 게다가 중국처럼 개도국이 빈곤에서 탈출한 경우가 많은 1980년부터 1990년을 기준점으로 다시 잡거나 빈곤을 탈출한 개도국 빈곤 인구만을 기준 삼는 통계 꼼수를 부려 통계를 산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수로는 그대로이지 않은가 하는 것이 저자의 말이며 실제 빈곤 기준일 수 있는 5달러를 기준으로 다시 책정하면 세계의 빈곤 인구는 43억 명이 된다.

 

그렇다면 세계기구들은 왜 빈곤 인구를 축소하는 왜곡과 호도를 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 문제를 세계화와 자유시장에서 답을 찾고 있다. 애초에 빈곤 인구를 평가할 때 1.25 달러는 기준선이 될 수 없었기에 빈곤 인구를 계산할 때 많은 학자들이 빈곤 인구가 10억 명보다 거대한 통계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글로벌 남부 지역에 구제 비용을 대출해 주는 서구로서는 서구의 대중들에게 내세울 만한 새로운 기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제 비용이 글로벌 남부 지역으로 이동해야만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글로벌 북부 지역의 큰손들에게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구제금융의 조건은 글로벌 남부 지역에서의 규제 완화, 공기업의 민영화, 서구세력의 투자의 자유 보장,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의 값싸고 해고가 쉬운 노동자들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 이러한 조건들은 글로벌 남부 민중의 생존을 위협함으로써 서구세력의 부를 약속하는 시스템이다. 이 구제금융으로 글로벌 남부로 가는 돈의 흐름이 1000억 달러라면 그와 함께 글로벌 남부에서 글로벌 북부로 가는 보상은 4800억 달러라고 한다. 이것은 구제가 아니다. 원조나 수혜가 아닌 투자일 뿐이고 다시 보면 투자라는 명분의 탈취인 것이다. 가난한 이의 집에 들어가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으며 발가벗겨 밖으로 쫓아내는 행태가 구제금융의 본 모습이었다.

 

이런 행태의 기원을 저자는 식민화와 산업화 이전의 인클로저에서 찾고 있다. 식민지를 구축하던 과거부터 인클로저까지의 당시 상황을 저자는 신랄히 비판하기도 한다. 인클로저의 경우 방직기가 만들어져 모직물 생산이 가열차게 진행되며 공유지였던 대부분의 땅에 영주들은 양을 목축하기 위한 울타리를 치며 농사짓던 농부들을 내쫓았다. 농부들은 살길이 없어 방직 공장에 저임금을 받으며 노동자가 되거나 영주들의 농노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국왕이 이 문제를 직시하고 금지시키자 영주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무력화된 왕은 어쩔 수 없이 인클로저를 승인하게 되었다. 현재의 세계화와 자유시장 그리고 구제금융은 이러한 공유지의 탈취와 다르지 않다고 저자는 소리 높인다. 세계의 불평등과 격차는 서구 세력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작업들의 결과라는 것이 본서의 주제이다.

 

글로벌 남부가 주축이 되어 이에 대해 저항했던 역사도 있다. 중동지역에서 석유를 무기화하여 권리를 강화하는 과정과 같이 글로벌 남부에서도 자신들이 보유한 자원을 무기로 권리를 강화하려 한 것이다. 중동은 석유를 무기로 성공했으나 원자재를 무기화하려던 글로벌 남부는 쿠테타를 지원하거나 암살을 시행하는 등 모략을 꾸민 글로벌 북부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다. 보다 나은 상황을 자국 국민에게 가져다주었거나 제시했던 글로벌 남부의 정치가들은 모두 죽거나 강제 해임된 것이다.

 

그리고 환경 문제를 근거로 탄소비용을 타국에 비해 더욱 부과당하는 국가들도 개발이 정체된 국가들이 다수란 것도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탄소배출은 당연히 중국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미국이 중국의 5배 독일도 중국의 거의 2배라고 한다. 인도의 경우는 이산화탄소 배출에 1.4 톤의 책임이 있는데 세계평균은 4.5 톤이라고 한다. 아프리카의 1인당 배출량은 0.5 톤에 불과하다. 기후변화에 대한 비용은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더욱 지고 있는데 각각 GDP4%5%에 해당한다. 이는 물질 소비가 감소하기보다는 점점 더 확대되고 있는 선진국들과 개도국이나 모든 것에 대한 부족함이 일상인 저개발국가들을 볼 때 격차를 유지하고 지속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요소들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탄소제로는 격차의 유지와 지속이 가능하게 하는 원칙이 되어버리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과거 기후운동이 조명되는 시기부터 갖고 있었는데 그에 대해 더욱 편향에 가까운 인식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격차에서 말하는 내용들은 과거 동아일보사에서 출간한 [위대한 전환]에서 인지한 것들이기도 했는데 2001년 출간한 그 책에서 다각도로 여러 저자의 시각으로 접했던 것을 20년이 넘어서 다시 돌아보는 것만 같았다. 세계는 변한 것이 없다. 변화의 가능성과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저자는 본서의 후반부에서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변화의 시점인 현재에, 미래를 향하고 있는 대중의 시선을 지금까지의 문제들로 돌려, 미래의 문제를 막자는 시도가 때늦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초극부층이 인클로저 시대에 영주들이라면 대중은 문제를 직시하지도 못한 왕과 다르지 않다. 인클로저 당시의 왕은 문제를 직시하고도 무력화되었지만 우리는 직시하지도 못하면서 무력하다. 시절은 확연히 뻔한 결과로 향하고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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