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람 스산한 고목에선 매가 새끼를 까고,
차가운 달 눈 덮인 산에서는 범이 정기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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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조선시대 명 재상 채제공이 지은 시입니다.

채제공이 어린 시절 절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없는 가난한 형편이었답니다. 채제공이 공부하던 절에는 다른 양반집 도령들도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답니다. 부잣집 도령들은 가난한 채제공을 깔보며 따돌렸답니다.

섣달 그믐이 되자 채제공의 친구들이 명절을 맞아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채제공을 업신여기자 채제공이 지은 시라고 합니다.

도령들은 이 시의 참 뜻을 알지 못했지만 그 도령들 중 한 사람의 아버지가 이 시의 참 뜻을 알아내곤 아들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가을 바람 스산한 고목이란 머지않아 기울어질 집안을 뜻하고, 그 위에 매가 새끼를 깐다는 것은 바로 그 철부지 도령들을 일컫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을에 알에서 깬 새끼 매가 어찌 건강하게 자라서 제 구실을 하겠느냐는 뜻이라네요.

또한 '눈 덮인 산에서는 범이 정기를 키운다'는 문장은 어려움을 딛고 학문에 열중하는 채제공 자신을 비유한 말이라고 합니다.

몇 년 뒤, 채제공이 과거 시험을 보러 가야 하는데 붓과 먹을 살 돈이 없자 그 도령의 아버지를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고 하네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는 책을 쓴 김현근 군이 생각났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여름 방학을 맞아 해외 연수를 가고, 문화 탐방을 가는 등 많은 아이들이 좋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반면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더 많기도 하구요.
남들이 좋은 가정 환경에서 훌륭한 혜택을 받는 것만 부러워하면 아무 것도 해결이 나지 않습니다. 요즘은 본인만 똑똑하면 국가나 기업, 장학재단에서 유학도 보내주고 연수도 보내줍니다. 무능한 부모를 원망하기 전에 본인들이 살아나갈 길을 잘 선택하고 개척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 오빠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는데요 고등학교 시절 같이 과외를 받던 친구들이 전부 서울대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그 중 한 친구는 공부를 잘 해서 과외 선생님이 일부러 끼워 넣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답니다. " 내 부모가 가난한거지 내가 가난한게 아니다"라구요. 그 친구, 결국 서울대학교 의대에 진학했답니다.

세상살이는 모두 자기하기 나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선 영조 때 채제공이나 김현근 군이나 좋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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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에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암으로 1년 넘게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네요. 더 오래 사셨으면 좋을텐데 싶어 아쉽기도 하지만 항암 치료 받으시느라 애쓰신 것을 생각하면 더 이상 고생 안 하셔도 좋게 되었다 싶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일요일, 논산 가야곡 선산으로 모셨습니다. 마침 빗줄기가 많이 가늘어져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저희 아버님때는 비가 너무너무 많이 와서 산에 올라가시는 분들께 비옷과 운동화까지 사드리느라 비용이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 비용도 아끼게 되었으니 친구에게도 복이고 아버님께도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화요일, 친구가 삼오제가 드리고 대전으로 오는 날입니다. 친구가 지금쯤 삼오제를 드리러 갔겠구나 싶어서 생각을 해보니 우리 조상들이 참 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삼일 출상을 하고 나서 하루 쉬면서 집안 정리, 고인의 유품 정리도 하고, 삼오제 준비를 합니다. 삼오제를 지내고 오는 날이면 시골에서는 장례때 도와주신 동네분들께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지요. 출상하는 날, 봉분이고 뭐고 정신 하나도 없이 산에서 내려 올텐데 이틀 있다가 와서 봉분은 제대로 되었는지 주변 갈무리는 다 되었는지 확인해 보라고 삼오제를 지내라고 했는가 싶기도 합니다.

49재라는 것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49재라는 제사를 지냅니다.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일곱 번 제사를 지내고, 100일째 되는 날, 1년이 되는날, 3년이 되는 날까지 총 10번의 제사를 지냅니다. 바로 명부전에 계시는 열 명의 지옥왕들에게 심판을 받을 때마다 제사를 지내는 거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이 하늘나라의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제사를 많이 지낸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염라 대왕이 명부전의 총책임자가 아니라 열 명의 지옥왕들중 다섯 번째 대왕이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이 열 명의 지옥왕들에게 심판을 받을 때마다 이승에 있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준다니 대단한 정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죽어서도 인연의 끈, 가족의 끈, 자식된 도리, 배우자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49재라는 생각이 들어서 49재라는 말을 입 안에서 곱씹어 보면 달콤한 맛이 나기도 합니다.

도가 지나친 관혼상제의 한 가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죽은 사람이 좋은 곳으로 가서 영면하기를 바라는 이숭 사람들의 정성이라고 생각하니 고맙고 또 고맙기만 합니다.

친구 아버님께서 좋은 곳으로 가셔서 다음 생에도 좋은 인연으로 가족들과 만나게 되시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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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아들 키우는 부모님들이 말씀하시지요, "맞지 말고 때리고 와라. 치료비 물어줄게 맞지 말고 때리고 오라."고 말입니다.   요즘 그 이야기에 꼭 맞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대기업의 총수이기 이전에 세 아들을 슬하에 둔 아버지의 행동때문입니다.  내 자식 때린 놈 찾아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남자답게 사과를 받는다는 것이 그만 일이 커졌다고 하더라구요.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 분들도 다른 집 귀한 아들들인데 말입니다.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라는 책에 보니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교황청 경비대의 한 경비병이 궁무처장에게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고 자비롭다는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만일 신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리고 우리를 보호할 수 있으시다면, 신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왜 인간의 굶주림, 전쟁, 병이 생기냐구요, 그 분은 전능하지만 우리를 돕는 것에 관심이 없든지, 자비롭지만 힘이 없던지, 둘 중 하나인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궁무처정이 대답을 합니다.   그  경비병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있다고 가정을 하고  그 아들의 인생에 고통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네가 가진 힘으로 모든 것을 행하겠느냐고 말입니다.  아이의 고통을 막을 수 있고 간섭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아이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막아주겠냐고 묻습니다.

그 경비병은 말합니다. 고통은 성장의 일부이기 때문에 아이 뒤에 붙어서 나약하게 기르지 않겠다고요.

그 경비병의 대답을 보면 하느님이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이유를 느낄 수 있지 않나요?

하느님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무게만큼의 고통만 주신다고 하지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도 있구요.

이 구절을 읽는 동안 생각했어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노력해야 겠다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숨은 뜻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저는 맹렬 신자는 아니지만  도에 지나친 아버지의 자식 사랑을 보면서 이 구절이 떠오르네요.

부모들도 생각해 볼 일입니다. 언제가 가장 적당한 때인가를요, 자식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고 등을 두드려주며 위로를 해야할 때가 언제인지 판단을 잘 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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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 몽주의 시 중에 〈태평소>라는 시가 있습니다.

봉황 새긴 관에 금으로 입을 꾸미니

맑은 상조가 여기서 나네

한 소리 높이 솟아 달을 흔들고

여섯 구멍 공교롭게 별을 팠네

가고 멎고 하는 군령 엄하고

낮았다 높았다 나그네 정 움직이네

북정의 날을 본다고 생각하니

오랑캐 왕의 뜰에 불어서 뚫어주리


포은 정몽주의 시에도 등장하고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시조에도 등장하는 날라리라는 악기가 있습니다. 원래 중국에서 건너온 악기인데요, 크기가 작지만 음색이 높고 강한 악기입니다. 소리가 크고 높으니까 통이 크고 눈에 띈다는 특징이 있구요, 날라리 소리의 곡조가 아무래도 북소리나 징소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까부는 쪽이라 경박함이 느껴다고 합니다.

요즘 소위 노는 학생들을 날라리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악기의 특징에서 유래하지 않나 싶네요. 날라리라는 악기의 크기가 작으니까 아이와 연관지을 수 있구요, 날라리가 군중(軍中)에서 어떤 신호가 필요할 때는 어느 곳에서든지 아무 때나 불기에 남과 다르게 좀 튀는 학생들을 뜻하는 은어로 쓰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큰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나니 초등학교와는 다른 느낌도 들고, 아이를 잘 이끌어주어야 겠다는 생각에 책임감이 더 커졌습니다. 초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여자 아이들끼리만 모아 놓은 학교에서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며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아이가 입학식과 함께 새 반이 정해지자 여러가지 말들이 제 귀에 들립니다. 저는 입학식 날 담임 선생님 얼굴을 뵙고 아직 성함도 외우질 못했는데 동네 선배 어머님이 전화를 주셔서 "담임 드럽게 걸렸다. 담임 복도 없다"고 힌트를 주시기도 하구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아이의 친구 엄마가 제 아이에게 "몇 반이냐?"고 물은 후, 제 아이를 딱하다는듯이, 속으로는 좀 고소하게 생각을 하는지, "그 유명한 반이냐?"는 말로 저를 당황시키기도 했습니다. 제 아이가 속한 반에 소위 날라리라고 불리우는 학생들이 대거 포진해 있기는 합니다. 과반수가 넘는 아이들이 날라리라고 한다니 그 어머니의 말씀에 토를 달지는 않았습니다. 그 어머님의 지나친 반응에 기분이 얹짢아진 제가, "왜요?"라고 되물었더니 제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아뇨, 하도 유명한 아이들이 많은 반이라고 해서요."라고 말을 돌리더군요.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멈추고 걸어가는 도중에 아이가 말하더군요.
"엄마, 유명한 애들이라는 말이 뭐겠어? 날라리 반이라는 뜻이잖아."라고 말입니다.

그래요, 저도 눈 있고, 귀 있어서 압니다. 제 딸아이와 한 반인 아이들중에 소위 튀는 애들이 많다는 것을요. 처음에는 저도 "하필이면~!"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어쩌나요, 일 년동안 아이들이 잘 지내기를 바랄 수 밖에요. 그 아이들도 자기 집에서는 소중한 아이들인데 좀 튀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선입견을 가지지 말자고 제 자신에게도 열심히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요, 오히려 어른들에게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은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서로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고 잘 지내는데 오히려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들이 드러내놓고 날라리 반이라 공부도 못한다, 날라리 반이라 그런 것도 모르는 꼴통들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아닐 말로 듣는 날라리 기분 나쁘면 어떻게 하려고요?

날라리라는 악기는 높고 강한 음색때문에 군인들이나 군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딱 좋은 악기이구요, 목청껏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고 난 것같은 후련한 느낌을 주는 악기라고 합니다. 군인들의 행렬, 임금님의 행차 시에도 날라리 소리를 드높인 것만 봐도 그 악기의 독특하고 멋진 음색을 알만하지 않나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은 이순신 장군의 애를 끓어오르게 한 일성호가도 바로 날라리 소리입니다.

날라리라는 은어가 건방지게 통이 커서 남의 이목을 집중시키거나 아무데서나 눈에 띄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고 하지만 사랑스런 아이들을 굳이 날라리라는 이름으로 부를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날라리라는 악기, 태평소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태평소라는 말의 뜻은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하는 악기라고 합니다. 날라리 소리가 튀는 것처럼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외롭고 힘든 아이들이 자기를 좀 봐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날라리라는 이름으로 그 아이들을 매도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다정한 눈빛, 정겨운 말 한마디에 그 아이들의 예쁜 눈과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질 수 있도록 날라리라는 말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이 먼저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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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머털도사 시리즈중에는 스승인 누덕 도사가 왕질악 도사의 계교에 빠져 죽음을 당한 후 스승님의 가르침을 깨달아 누덕 마을 사람들을 구하고 스승의 원수를 갚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일 스승님의 심부름만 하는 게 불만이었던 머털이, 하지만 머털이만이 가지고 있는 재주, 머리털 세우기 마법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이 만화를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무술을 수련하는 방법이 무협지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무술을 수련하는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술을 익히려면 먼저 오랜 세월 동안 물 긷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농사짓는 따위 생산에 관련된 일을 몸에 익혀서 스승을 먹여 살리고 스스로도 먹고 살 능력을 갖추어야 했스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물론 본격으로 무술을 익힐 수 있는 몸가짐이 되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일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술을 익히고 난 뒤에도 여간해서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련하다가 다른 사람을 해치게 되면 까닭이 무엇이든 가차없이 쫓겨나거나 무서운 벌을 받았구요.

그런데, 무협지에는 무술을 익히는 사람이 지켜야 할 이런 최소한의 규율조차 무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가장 힘센 놈만 살아남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장 힘센 사람이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세계, 인간과 인간의 문제가 결국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만 해결되는 사회, 힘이 없는 사람은 힘센 자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떼거리로 개죽음을 당하는 사회, 이런 사회를 두고 아마 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협지에 중독된 것은 유신 시대부터였다고 합니다. 이 무협지가 왜 하필이면 유신 시대부터 유행한 걸까요?
본디 무협지는 대만 사람들이 쓴 거라고 합니다. 대만은 우리나라보다 경제는 넉넉하지만 사실은 지독한 독재 국가랍니다.  몇 년 전에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사십 년 가까이 온 국민이 계엄 상태에서 살았다고 허합니다.  대만 국회에는 야당이 아예 없었다네요. 무협지는 독재 국가에 살고 있는 대만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데 아주 뛰어난 마취제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신 시대부터 무협지가 유행했다고 하네요.   대학 도서관에 고전문학이나 철학책은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는데 유독 무협지만은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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