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예슬씨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환상의 커플> 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미 대본이 나와 있기 때문에 슬슬 결말을 향해가고 있는 이 드라마가 저를 울립니다.
사실 저는 제 말투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공부도 좀 잘하고 더 똑똑했더라면 아나운서가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배운 것이 부족하고 사람이 덜 떨어지다보니 목소리와 말투때문에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특히 충청도 사람들은 제 말투를 더 싫어하더군요. 시댁 식구들이 제 말투를 좋아하지 않아서 자신감을 상실하고 입을 꾹 다물고 살던 때도 있었습니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도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안면이 있는 의사 선생님에게는 아이의 증상을 종이에 써 가지고 간 적도 있습니다. 번호를 매겨서...^^

그래요, 이게 저의 문제입니다. 똑 떨어지는 말투, 남을 가르치는 것 같은 말투, 톤이 높은 따지는 듯한 목소리... ^^;; 번호를 매겨서라도 정확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려는 욕심까지 말입니다. 가끔은 제 자신의 말투가 싫어서 고쳐보려고 했지만 충청도 사투리를 배우는 것도 쉽지는 않았고 의도적으로 되는 일도 아니더군요.

근데, 한예슬씨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보면서 삶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나처럼 말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물론 극중 안나 조의 남편은 안나 조의 성격이나 말투도 싫어하지만 철수와 철수의 주변 사람들은 극중 나상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역시 세상은 살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 도브 콤플렉스라는 말이 실제로 있다는 것은 사람 관계에서 피해 의식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성립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런 한예슬씨가 지난 주에는 저를 울렸습니다. "어머니도 자장면을 좋아하지만 자장면이 싫다고 해야 할 때가 있는 거야."라는 말을 합니다. 철수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 나상실이 철수네 집을 떠나려고 결심하면서 한 말이지요.

그래요, 아이들 앞에서 엄마는 닭다리도 맘대로 못 먹고, 치킨 깍두기 한 알도 맘대로 먹지 못할 &#46468;가 있습니다. 나도 먹고 싶지만 내가 먹으면 아이들이 먹을게 부족하니까 참는 것이지요. 어머니도 자장면을 좋아하지만 싫다고 하고 참아야 하는 것이 대부분 어머니들의 속마음 아닐까요? 물론 경제적 능력이 충분해서 넉넉해서 사 놓고 먹는 사람들이라면 좀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안나 조의 싸가지 없는 말투만 보면 안나 조의 성격까지 의심해 볼 수 있지만 드라마를 통해 드러나는 안나 조의 모습은 슬퍼하는 모습, 외로워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가 엿보입니다. 엄마, 아빠의 죽음, 할머니의 죽음 이후에 혼자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안나 조의 숨은 아픔이 엿보이지요. 가시 돋친 장미처럼 표정과 말투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지만 속은 한없이 나약한 안나 조를 보며 한예슬이라는 배우를 다시 평가해 보게 됩니다. 이 작품 전에는 한예슬 그녀를 그리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배우가 자기에게 맞는 역할을 찾으면 기대치 이상의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맙게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요, 저요 이 드라마를 보고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끝까지 내 모습을 잃지 않기로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지금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 속에서 힘들게 지내고 있지만 때가 되면 나를 알아주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내가 가진 달란트를 맘껏 펼쳐 보일 수 있는 날이 올거라고 믿고 열심히 살기로 했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았던 불쌍한 안나 조에게도 나상실 그 자체로도 사랑을 해주고 염려해주는 좋은 사람들이 생겼잖아요. "자장면을 좋아하지만 싫다고 할 때가 있다"는 그 말. 나상실의 그 말이 나를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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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지희(斑衣之戱)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논다는 뜻으로,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에 노래자(老萊子)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님을 봉양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고 하네요. 그의 나이 70의 백발 노인이 되었지만, 그의 부모님은 정성껏 보살피는 아들의 효성 때문인지 그때까지 정정하게 살아 계셨답니다.

노래자는 항상 어린 아이들처럼 알록달록한 문양이 있는 옷을 입고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부모님 앞에서 재롱을 떨었답니다. 그의 재롱에 부모님들 역시 자신들의 나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노래자 역시 나이 많은 부모님 앞에서는 자신의 나이를 밝히지 않았구요. 그리고 부모님께 올리는 식사는 손수 갖다 드렸으며, 식사를 마칠 때까지 마루에서 엎드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갓난아이가 울고 있는 모습을 흉내낸 것이라고 하니 요즘 사람들은 흉내내기도 어려운 지극한 효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스코틀랜드의 작가 제임스 배리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제임스 배리는 10남매 중 7번째 아이였다고 합니다. 유년기의 그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아이였는데 여섯 살 때에 그의 생애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양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열세 살 난 형 데이빗이 스케이트 사고로 사망했던 일입니다. 집안의 희망이자 가장 기대했던 아들을 잃은 슬픔에 어머니는 몸져눕고 말았답니다. 어두컴컴한 방의 병상에 누워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어머니는 제임스를 볼 때마다 데이빗으로 착각해 말을 걸었다고 합니다. 뛰어난 형의 그늘에 가려서 이제껏 부모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어린 제임스는 뒤늦게라도 어머니의 사랑을 차지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제임스는 자기도 모르게 죽은 데이빗의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데이빗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합니다. 키도 그대로이고 나이를 먹지 않으면서 조금도 어른을 실망시키지 않는 완벽한 어린이였다고 합니다. 이 강렬한 경험은 제임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위해 '자라고 싶지 않았던' 제임스의 키는 150cm 정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었지만 키도 작고 어린이의 정서를 가진 배리는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한 후 런던으로 진출하여 극작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취미는 큰 개를 끌고 켄싱턴 공원에 나가 아이들과 노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배리는 5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나온 가족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같이 이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합니다. '피터팬, 자라지 않는 아이'의 여러 캐릭터들과 줄거리는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라고 합니다. 주인공 피터팬의 피터는 아이들의 성에서, 팬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숲의 신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피터팬이 처음 연극으로 공연되었을 때, 배우가 커다란 개를 연기하고 꼬마 주인공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감각의 이 연극은 미국과 영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네요.

노래자와 제임스 배리. 살았던 환경과 살던 시대도 다른 동.서양의 사람들이지만 부모를 위한 마음,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어했던 마음은 요즘 사람들에게도 공감이 되는 이야기 아닐까요?
나는 노래자같이 부모에게 효도하기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내 자식은 노래자처럼 나에게 효도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 다른 형제들보다 특히 나만 더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 모두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나저나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효자의 대표 주자로 사람들에게 명성이 높은 노래자도 그렇구요,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죽은 형처럼 보이도록 행동했던 그러나 그것이 본인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을 제임스는 배리는 피턴 팬의 작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노래자같은 효자도 아니고 제임스 배리처럼 어머님에게 인정받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기름 보일러를 때면 기름값 아끼시느라 고생하시던 어머님이 자식들이 돈을 추렴해 놓아드린 연탄 보일러때문에 기분이 좋으시고, 안부 전화를 할 때면 "방이 뜨뜻해서 사지가 노골노골하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살아 생전에 좀 더 잘해드려야 겠다는 생각만 굴뚝같이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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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들으시면 꾸지람을 하실만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제가 대전에서 열린 조용필 콘서트 티켓을 예매해두었다가 공연장에 간 것입니다. 80년대 조용필씨가 연속적으로 히트곡을 만들어내고 부를 때 할아버지께서는 "저 것도 가수냐, 저 것도 노래냐"는 말로 조용필씨의 가는 목소리에 거부감을 나타내셨습니다. 평상시에도 KBS 1 채널만 보시는 분이니 옛말로 하면 소위 딴따라라고 불리는 조용필씨가 싫으셨을만도 합니다.

어린 나이에도 드라마를 즐겨 보고 가수 노래를 잘 불렀던 저는 조용필씨 노래도 잘 불렀지요. 그 당시 동네 친구 집에 마실을 가면 친구 어머니들이 아기 머리통만한 사과나 간식거리를 주시며 이은하씨 노래나 혜은이 씨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었고 저는 노래를 꽤 잘 불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용필씨의 노래는 조용필이 좋고 싫고를 떠나 저희 세대에는 늘 들던, 자주 들을 수 밖에 없던 노래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여기저기서 조용필씨 노래가 그만큼 많이 나왔으니까요.

할아버지가 그렇게 싫어하셨던 조용필. 저는 왜 생전 처음으로 조용필 콘서트에 가고 싶었을까 제 스스로 질문을 해 봅니다. "창 가에 서면..."이라는 노랫말로 노래가 시작되면 "으악~"이라는 비명으로 화답을 했던 <창 밖의 여자>, <촛불>, <고추잠자리> 등등의 힛트곡을 들으러 간 것은 아닙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그 겨울의 찻집>이라는 노래의 노랫말이 곱씹어지고 되새김질 되길래 조용필씨가 부르는 <그 겨울의 찻집>을 현장에서 득고 싶다는 생각에 비싼 돈을 들여 예매를 했고 남편에게도 쿠사리를 들어야 했지만 제 고집은 꺽이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그런 노래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어느 날 문득, 이 노래를 듣는데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그 한 구절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하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으면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것을 알기에 그랬습니다.
소설가 양인자씨가 작사한 노래로 알고 있는데요, 소설가들은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인생살이를 고달픔, 남과 다른 고통도 겪어야 하는지 양인자 님도 이혼을 한 평탄하지 않은 가정사를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소설가 공지영씨가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을 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다른 세 아이의 슬하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때도 공지영씨의 평탄치 않은 굴곡있는 삶이 그녀로부터 좋은 작품을 뽑아 낸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살다보면 그저 평범하게 남처럼 순탄하게 사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느낄 때가 있습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일수록 남처럼 순탄하고 무난하게 인생을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남들 안 하는 고생을 많이 해서 그저 하루하루 아무 일없이 지나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지 알기에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좀 더 조심하고 몸을 사리게 됩니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시절이 또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겁니다.

TV에 조용필만 나오면 텔레비전을 끄시던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비싼 돈 들여가며 조용필씨 공연에 갈 이유가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새해가 되면 불혹의 나이가 됩니다. <창 밖의 여자>를 아무 생각없이 따라 부르던 철없는 아이가 <그 겨울의 찻집>의 노랫말의 뜻을 음미해가며 부를 수 있다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할아버지도 이해해 주실 것 같습니다.

조용필씨 노래를 좋아하지 않으니 공연장에 안 가겠다는 남편을 설득하고 협박까지 해야 하는 바람에 집에서 출발도 늦게 했고, 갑천 대교 부근에서는 콘서트 장에 가는 차들때문에 도로가 꽉 차서 첫 곡이 끝날 무렵에야 입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 자리는 찾아가지도 못하고 무대 옆에 서서 2시간 동안 노래를 들었는데 제가 거기에 간 하나의 목표, < 그 겨울의 찻집>을 못 들으면 어떻하나 싶어서 공연을 보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았는데 결국 제가 듣고자 했던 노래를 후반부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보다 뒤쪽에서 공연을 본 남편이 말하기를 제가 가관이었답니다.
다른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빠'를 외치고 노래를 따라하고 야광봉을 흔드는데 저는 목석같이 꼼짝도 안 하고 2시간을 서 있었다고 하더군요. 누가보면 트집잡으려고 서있는 줄 알았을 거라고 하더군요.

<창 밖의 여자> 가사 중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는 말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따라부르던 소녀가 속으로는 울지만 겉으로는 웃을 줄도 아는 불혹의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조용필 공연... 대형 가수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제는 신곡으로 힛트곡을 만들어 내기 힘든 한물 간 가수라는 평을 받기도 하는 조용필씨를 보러 간게 아니었습니다.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시며 속으로는 울지만 겉으로는 웃는" 어찌보면 세상살이에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아줌마, 내숭떠는 아줌마가 되었지만 그것보다는 내 속을 감추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줌마, 나보다는 가족을 먼저 챙기는 아줌마, 내 아이를 소중히 생각하는 것만큼 남의 아이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줄 수 있는 속 깊은 아줌마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내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매일 조금씩 더 나아가지는 제 모습을 보면 할아버지도 돈 잘 쓰고 왔다고 칭찬해 주시지 않을까요?


이상 부족한 제 공연관람기였습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P.S.: 몇 번은 더 수정을 해야 제 마음에 드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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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 

요즘 영화 '괴물'이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저는 영화는 못보고 책으로 보고 만화로 읽었는데요, 한강에서 괴물이 나온다는 것이 신기하고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옛날에 보았던 영화들이 생각나서 참신한 맛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유전자 변형으로 인한 괴물, 환경 오염에 의해 생긴 괴물들은 영화에 자주 등장했었습니다. 엘리게이터, 불가사리라는 영화, 에이리언등 다양한 괴물들이 등장하지요.

근데요, 오늘 제가 잊고 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우리들도 어렸을 때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는데 잊고 사는 사이에 저렇게 아이디어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불가사리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할머니께 이야기로도 많이 들었고 책으로도 보았던 불가사리 말입니다.


때는 고려 말, 신돈이 공민왕을 등에 업고 개혁정치를 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신돈 또한 사람인지라 개인적인 욕심과 야심을 드러내는 바람에 쫓겨나게 되었지요. 게다가 반야가 임신한 아이가 공민왕의 아이가 아니라 신돈의 아이라는 의심까지 받게 되어 더 몹쓸 사람으로 인식되었지요. 결국 신돈은 공민왕의 미움을 받아 죄인으로 떨궈져 물골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수원에서 귀양을 살다가 1371년에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공민왕은 불교를 폐지하고, 불자를 모두 체포해서 사형시키라고 명을 내립니다. 법난의 회오리가 고려땅을 휩쓸었다고 합니다. 스님을 잡아 오는 사람에게는 5천냥씩 포상금을 내렸다고 합니다. 너도 나도 눈에 불을 켜고 스님 사냥을 하던 시절, 이성계의 부하 중에 경삼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경삼의 처는 경삼에게 함흥을 떠나 송도로 가서 스님 사냥을 하자고 떼를 씁니다. 결국 경삼 내외는 송도 교외에 전셋집을 얻고 불승 잡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구요.


중 사냥꾼 경삼.

그는 몇 날 며칠을 중을 잡으러 다녔지만 실패를 했구요, 다른 중 사냥꾼들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답니다. 게다가 중 사냥꾼에게 잡힌 중들이 발악을 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 걱정보다는 중생의 암울함을 더 걱정했다는 말을 듣고는 중 사냥꾼 노릇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때마침, 그 날 경삼의 처가 혼자 있는 집에 중 하나가 찾아 들었고, 그 중은 바로 경삼 처의 오빠였습니다.

경삼의 처는 오빠를 다락에 모셔 놓고 빗장을 걸어 채웠답니다. 오빠를 팔아 호위호식하려는 꿍심을 가진 것이지요. 그 날 저녁, 경삼이 집으로 돌아오자, 경삼의 처는 기뻐하며,

"중 하나가 제발로 걸어왔으니 관아게 고발을 하자"했고 경삼은 다락문을 열어 중의 존재를 확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이 처남인 것을 알고는 곧바로 밖으로 나와 부인을 우물에 처 넣어 죽이고, 그 우물도 메꿔버렸다고 합니다.

몇 날 며칠, 경삼이 해주는 밥을 먹던 경삼의 처남은, 떠날 때 경삼에게 쪽지를 하나 쥐어줍니다. 홀로 남은 경삼은 송도집을 떠나 함흥, 이성계 장군에게로 떠나려고 짐을 싸는데 다락에서 기척이 있었답니다.

경삼이 다락을 열어보니 강아지도 아니고 족제비도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고 개구리도 아닌 것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 괴상한 것이 바늘쌈지 속의 바늘을 먹더랍니다. 경삼은 그 괴상한 것에게 누룽지라도 주려고 부엌으로 나왔고 경삼이 다시 방으로 돌아가니 다락 속의 괴상한 것은 벌써 없더졌더랍니다.

그 후 경삼은 함흥으로 떠났고 경삼의 빈 집에서는 쇠붙이라는 쇠붙이는 모두 없어졌더랍니다. 그 얼마 후 송도에는 쇠붙이를 먹는 괴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고 결국 임금까지 걱정을 하게 되었더랍니다. 집채만한 몸집으로 커진 괴물에게는 '불가살(不可殺)'이라는 뜻에서 불가사리는 이름이 붙여졌구요.


느닷없이 나타나 금속성 기물을 깨물어 삼키고는 증기기관차 소리를 내며 잠적해 버리는 괴물.

그 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경삼의 처남이 다락에 숨어 경삼이 해주는 밥을 먹는 동안 밥알로 만든 괴물이었다고 합니다.


송도를 온통 헤집고 다니며 쇠붙이를 먹던 괴물은 궁궐 입구에 있던 향로를 먹더니 그 몸이 쑤욱 자라 거죽도 좀더 관록 있게 변했다고 하지요. 이렇게 되자 나라는 발칵 뒤집혔고 이 괴물을 잡는 사람에게는 '상금 50만냥, 따로 부상으로 3급 갑의 벼슬, 죄 있는 자는 즉각 사면'이라는 현상금을 주겠다는 임금님의 특별 담화가 있었구요.


이 즈음, 경삼은 잊고 있던 처남의 쪽지가 생각났답니다. 처남이 준 쪽지를 펴보니,

"불가살(不可殺) 화가살(火可殺)이라고 씌여있었답니다. 이 쪽지를 본 경삼은 이성계를 찾아가 돈을 빌려 금값보다 비싼 쇠붙이를 사서 미끼로 놓고 불가사리를 기다렸답니다.

개성 한복판 로터리에 쇠를 쌓아놓고 목을 잡고 기다리던 경삼은 불가사리가 나타나자 불가사리가 쇠붙이를 먹는 사이에 불가사리의 꼬리에 불을 붙였고 불가사리는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처남이 만들었던 아주 작은 밥알을 빚어 만든 불가사리'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 일로 경삼은 나라에서 내린 상금 50만냥과 3급 갑의 벼슬, 그리고 우물을 매운 죄를 사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경삼은 모든 부귀 영화를 뒤로 하고 처남을 찾아 삭발을 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오빠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호위호식하려던 여동생, 그러나 사람다운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매제 덕분에 목숨을 구한 오빠가 처남에게 베풀었던 호의, 그 호의를 거부하고 처남을 따른 경삼의 이야기가 아주 매력적으로 생각됩니다.


왜 저는 어렸을 때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멋진 책이나 영화를 만들지 못했을까요. 어쩌면 우리 모두는 멋진 작가,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질이 있었는데 자신의 재능을 잊고, 포기하고 산 것은 아닐까요?


영화 '괴물'을 본 아이들에게 우리의 이야기 '불가사리'를 들려주면 어떨까요?

송승환씨가 말씀하시더군요, "어릴 적 본 공연이 성인이 되었을 때 좋은 영향을 주고 기억에 남는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아이들, 모두 스티븐 스필버그나 봉준호 감독, 심형래 감독처럼 될 수 있는 꿈나무들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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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미 상원의원이 미국의 한 고등학교를 방문해서 한 말때문에 파문이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 후보였던 미국의 존 캐리 상원의원이 미국의 한 고등학교를 방문해, "숙제도 잘 하고 학교 생활도 잘 해야 한다. 공부 못하면 이라크가서 고생한다."라는 발언을 했는데요,  상대당인 공화당에서는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비하한 발언이라고, 군인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하라고 발표했구요. 부시 대통령도 "군인들은 무식하지 않다."라고 비난을 했대요.

캐리 상원의원은 "군인들을 무시하는 발언이 아니라 부시와 그 측근들을 빗대어 한 말이다"라고 했답니다.

제가 뉴스를 처음 들을 때도 떠오르는 생각은 현재 이라크 문제로 부시 대통령이 곤란하게 되었으니 그 문제를 빗대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말이라는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잖아요.

유명한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한 말이 있대요.
"말이라는 것은 나무의 잎과 같다. 나뭇잎이 너무 무성할 때는 오히려 열매가 적은 법이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잎이 아니라 열매이다.
우리는 침묵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침묵보다 나은 말을 하여야 한다."라고요.

캐리 상원 의원의 말이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대부분 이해는 하지만 상대방에게 트집을 잡힐 빌미를 제공한 것은 옳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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