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터네츠
김빛누리 지음 / 마인드레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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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터네츠 재밌었지만 조금 길었던 동화역정에 관해

 

 

 평소에 동화를 잘 보지 않지만, 조카 덕에 '캐스터네츠'를 읽게 되었다. 전체 이야기가 좀 길긴 한데, 그 중 하루의 꿈 이야기가 인상에 남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이 하루의 꿈 이야기가 이 글에서 가장 인상이 남는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너무 길어서, 중간에 집중력을 조금 잃어버렸다. 연령대를 어느 대상에 신경 쓰고 쓴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른들의 동화라고 하기에는 조금 못 미치고, 그렇다고 청소년들이 대상이라기에도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대상일 텐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무언가 내가 처음 대학 때 의무감을 느끼고 잃었던 천로역정처럼, 어쩌면 너무 간단한 이야기가 질질 끌고 간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사실, 하루의 꿈 이야기를 논외로 해도 중간중간에 재밌고, 따로 동화로 빼도 손색없는 내용들이 있었다. 아니, 작가가 소제목으로 만들어놓은 그 자체를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모두 거의 재밌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캐스터네츠라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이 글 전체를 이끌어갈 만큼 실의 궤가 잘 맞아 들어갔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사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고, 또 에필로그에서도 나오듯이 또 하나의 미래로 상정된다는 점에서 분명 연결고리는 존재하는데, 이렇게까지 길게 할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되기 위해서는 어린 왕자 정도의 풍부한 비유와 기발한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는 걸리버 여행기프랑켄슈타인처럼 완전 고전인 작품들이다. 솔직히 걸리버 여행기프랑켄슈타인은 지금이야 동화 같은 느낌이지만, 당시로선 혁신적인 작품들이었고, 지금도 그런 이유로 동화로 분류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이 소설보다 길지 않다. 아님, 그렇게 느껴지지 않든지. 어찌 됐든, 하나의 주제를 위해 너무 같은 이야기들이 똑같은 선상 위에서 반복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재밌으면서도 무언가 이건 좀 너무 긴데, 라는 생각을 내내 머릿속에서 지울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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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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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로맹 가리의 책을 오랫동안 읽고 싶었다. 불문과를 조금 다닌 탓에, 들어본 이름이기도 하고, 그의 대표 단편작들을 수록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제목이 멋있게 보였다. 일단, 전체적인 느낌은 생각보다 사회적 성격이 강한 작가였다. 아무래도 세계 2차 대전의 일선에서 전쟁을 겪었던 사람이다 보니, 나치에 대한 혐오가 보였고, 곳곳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세태 풍자도 볼 수 있었다. 물론, 프랑스 작가들의 대체적 경향인 좌파적 성향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하지만 만약에 첫 두 작품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와 ‘류트’만 본다면, 전형적인 프랑스 작가의 시적이고 몽환적인 경향이 두드러져 보인다. 내 개인적으론, 부부 내의 치열한 심리를 다룬 ‘류트’보다는 조금 더 선이 부드럽고 몽상적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더 좋았다.


 왜 수많은 새들이 페루의 해변에 와서 죽는지는 알 수 없다. 해변은 그렇게 새들의 성지 바라나시가 되어, 죽기 전 그들이 수없이 뿌려놓은 똥들이 굳어져, 조분석을 이룬 바위와 파도뿐인 고독한 공간이다. 이곳에 카페를 차려놓은 주인공은 그동안 스페인 내전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쿠바에서 전투를 치른 다음, 모든 곳이 종말을 고하는 이 페루의 해변에 카페를 차려놓고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중이다. 한낱, 피에로 분장을 한 서커스 단원 같은 떠돌이들이나 우연히 마주하는 이 바닷가에 한 여인이 자신의 나머지 생을 맞이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바다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주인공이 왜 그녀를 살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살아야겠다는 생의 본능처럼, 누군가를 살려야겠다는 생의 본능이 작용했으리라고 추측해볼 뿐. 


 “날 내버려뒀어야 했어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지만, 남자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곳에 머물게 해주세요.’라고 부탁까지 한다. 주인공의 마지막 생에 어떤 빛이 머무는 걸까? 잠깐, 간절했던 바람은 잠시 뒤 여자의 지인들 방문으로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다. 부부관계로 보이는 영국인 남자와 여자는 대화를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집착하고 있다. 여자는 무언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 보인다. 분명한 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카페를 떠나, 이 바다를 떠나, 다시 자신들이 사는 세계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새들이 이 해변에서 죽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돌아가는 길, 여자는 아쉬움에 뒤돌아본다. 카페는 비어있고, 그곳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편, 중간중간엔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그렇게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인’ 이야기이다. 새들은 왜 이 해변에 와서 죽는 걸까? 왜 카페는 비어있고, 누구도 남아있지 않는 것일까?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 글 속에 남자와 여자처럼 서툴게 살아갈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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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 (50만 부 기념 드림 에디션) -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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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 어른들을 위한 환상적인 동화

 

 

 모임에서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기성작 합평으로 결정할 때 클라우딩 펀딩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들었다. 기존 출판사에서 외면받았지만, 일반 대중들이 그 값어치를 인정하여 자금을 조금씩 투자한 책이란 이야기다. 확실히 그 값어치를 하는 책이었다. 현재 우리 한국 문학과는 전혀 다른 서사와 배경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였다. 특히, 도입부의 환상적인 기획력은 이 책에 바로 빠져들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아주 먼 옛날 시간의 신에게는 세 제자가 있었다. 시간의 신은 이제 자신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고, 세 제자에게 각자가 원하는 시간을 나누어 준다. 첫 제자는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가져간다. 마음이 여린 두 번째 제자는 추억에 빠져 향수에 잠길 수 있는 과거를 가져간다. 그럼 대충 생각하기를, 보통 이쯤이면 마지막 제자가 아주 순간이지만 찰나의 현재를 가져갈 것이라 예상하기가 쉽다. 그래야 이야기가 매끄럽게 진행되고, 누구나 생각해도 미래,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다는 설정이 이야기를 풀어가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제자의 선택은 생각지도 못하게 잠이었다. 인생에서 거의 버리는 시간과도 같은 잠을 왜 마지막 제자는 선택한 것일까?

 

 미래를 선택했던 제자는 과거를 잊으면서,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리게 된다. 미래에 갇혔는데, 미래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모순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과거를 선택했던 제자는 과거의 추억에 빠져 그대로 침체되어 버렸다. 이에 스승은 잠을 선택한 제자에게 찾아가, 잠을 자는 시간에 사람들의 그림자들을 대신 깨어있도록 하고, 꿈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달라구트 꿈 백화점의 사장은 바로 이 셋째 제자의 후손이다. , 꿈을 지배하는 족속이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어찌 됐든, 이 때문인지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는 사람들을 위한 수천 가지 꿈을 판매한다. 키스를 부르는 꿈부터,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꿈, 동물들을 위한 꿈, 낮잠을 위한 꿈, 유통기한이 지난 흑백인 꿈까지, 모든 종족을 망라한 꿈을 판매하고 있다. 주인공 페니는 이 달라구트 꿈 백화점에 지원하여, 사장인 달러구트와 면접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페니가 의외로 현실적인 사람이란 점이다. 페니는 꿈이 현실을 지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높이 산 달러구트는 페니를 채용한다. 달라구트 꿈 백화점은 총 5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인기 상품, 한정판, 예약상품 등으로 구성되어있고, 2층은 평범한 일상을 다루는 꿈, 3층은 획기적이고 역동적인 꿈, 4층은 낮잠용 꿈과 동물들을 위한 꿈, 5층은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지나서 군데군데 천연색이 훼손되거나 바랜 흑백 컬러의 꿈들을 판매하고 있다. 각 층에 맞게 매니저들이 있고, 각 매니저의 캐릭터는 마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처럼 색깔이 뚜렷하다. 페니는 입사 첫날 각층별 매니저에게 인사를 하고 면접을 보지만, 자신에게 맞는 장소를 찾지 못한다. 그러다 1층 로비의 웨더 아주머니와 달러구트 사장이 일손을 따로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어, 그날부터 바로 1층에서 일하게 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첫날부터 백화점은 대성황이다. 24시간 내내 돌아가는 백화점에 모든 물건이 동이나, 임시휴일을 갖게 된다. 일찍 퇴근할 생각에 모든 층 직원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백화점 모든 입구에 영업 마감 프린트를 붙고, 모든 직원들은 퇴근한다. 그런데 이때부터 달러구트 사장의 예약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사실 지금부터 이야기가 재밌기는 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자신의 맘을 정확하게 모르는 여자부터, 예전의 악몽을 계속 되풀이해서 꾸는 사람의 이야기, 니콜라스 불리는 산타클로스의 꿈을 파는 이야기, 남의 인생을 대신 살게 하는 꿈에 관한 이야기와 마지막 죽은 이가 나오는 꿈에 관한 이야기까지, 모든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한 편의 동화를 보는 기분을 만든다. 재미, 설렘, 긴장, 감동까지 두루두루 갖춘, 정말 잘 기획된 작품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점이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이 작품이 서두가 지난 줄거리 삼 분의 일쯤 지났을 때 이 모든 그림이 벌써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때부터 이 책을 솔직히 끝까지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 정도였다. 물론, 끝까지 읽었고, 결론적으론 잘 읽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나는 중간도 읽기 전에 그런 마음이 들어버린 걸까? 이 책에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아니면, 나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이다. 누구나 빠져들 수 있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재미에 있다. 그런데 반대로 이 책의 단점은 바로 그 재미이다. 일단, 어느 정도 줄거리가 예상된 상태에선 그 재미가 반감되게 된다. , 환상적인 배경과 서사가 차츰 그 힘을 잃어가면서, 윤곽이 드러나면, 흥미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독자는 이 책을 좋아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특히 마지막에 이르러 꿈의 제작자 도제가 만든 죽은 이의 메시지 같은 꿈 이야기는 이 글의 감동을 주고, 여운까지 끌어내기에 충분하기에, 내 개인적으로도 권장할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시리즈로 나오는 제2권에 대해서 나는 다소 회의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이 책이 주는 재미와 감동은 인정하지만, 지금 내가 추구하는 문학의 지점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나는 지금 갈등하고 있는 중이다. 문학이 과연 폼만 가득 잡으면서 어려운 이야기만 해야 하는지, 아니면 재미를 추구하면서 쉽게 소통해야 하는지, 혹은 이 둘을 모두 잡을 수 없는 건지. 물론, 마지막은 지나친 욕심이거나, 과한 허영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직은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허영과 과장으로 포장된 그 이상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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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그린기린그림 2021-09-02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평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몽원 2021-09-19 20: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물의 가족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사과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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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가족 시적인 글에 대한 현기증 혹은 울렁거림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이 책을 포함하여 세 번째로 보게 되었다. 처음, ‘밤의 기별에서 느꼈던, ‘이건 뭐지?’와 같은 궁금증과 같은 충격이, ‘달에 울다.’를 통해 시적인 글이 주는 울림과 떨림의 취기로 내 온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런데 세 번째 접한 물의 가족에서 나는 갑자기 이 취기에 사로잡힘을 넘어서, 무언가 된통 당한 기분을 느낀다. 뭐랄까, 너무 과하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너무 똑같은 반복적인 시적인 운율과 분위기에 물렸다고 표현해야 할까? 한 마디로, 시적 소설에 대한 내 화두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해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 소설 자체가 앞의 두 소설보다 떨어지는 소설은 아니다. 만약, 내가 마루야마 겐지 작품 중 이 작품을 먼저 접했다면 아마 밤의 기별에서 느꼈던, 똑같은 충격과 신선함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전과 다르게 이 취기에 흥이 오르지 않고, 울렁거림과 메스꺼움을 느끼게 된 걸까?

 

 소설은 처음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와 죽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처음부터 1인칭 주인공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소설을 전개한단 말인가? 귀신이라도 되어 전개한다는 걸까?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은 혼이 되어 그 고장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그 첫 만남은 여동생 야에코의 출산으로 나온 아이였다. 야에코,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동생, 그 때문에 주인공은 고향을 떠나야 했고, 동시에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도망을 제안했지만 야에코는 거절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혼자서 낳았다. 너무나 천진무구해서 그토록 걱정했지만, 야에코는 자신의 아이를 혼자 거뜬히 낳고 보살폈다. 조부와 함께 살면서, 이제는 아이를 위해 일도 하고, 누구보다 건강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사람들과 소통을 닫고, 깊은 산속에서 말을 키우며 살아온 조부는 이제 야에코와 손주를 통해 살아갈 또 다른 이유를 갖게 된다. 다른 가족들은 이 일을 모르거나, 아니 알지만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쉬 알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떠나간 시간 동안 가족들 사이에도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야에코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바다와 강의 경계 사이 하구에 있는 이 쿠사바 마을에 우뚝 솟은 아귀산에서 흘러내리는 담수처럼 가족들은 야에코를 받아들이고, 야에코가 낳은 아이를 자신들의 가족으로 언젠가는 받아들이게 될 것이란 예감이 든다.

 

 사실, 이 소설의 이야기를 하려면 아직도 바다에서 일만 하는 아버지, 모든 못난 형제를 대신해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형, 위험한 일을 일삼다 이제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남동생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루야마 겐지의 이전 소설도 그랬듯이, 이 소설의 중심은 야에코이고, 야에코의 아이를 모두가 받아들이고, 살아가게끔 해주는 이 마을의 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때문에, 이 소설 또한 이전 소설의 기법과 같이 풍경을 중심으로 반복과 변주, 그리고 서사를 깨는 시각적 묘사들로 가득하다. 모든 묘사는 이전과 같이 아름답고, 어떤 면에선 조금 불명확했던 밤의 기별’(나중 작품으로 알고 있지만)에서의 물의 역할을 조금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느낌도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글을 끝까지 읽는데, 이전과 다르게 어려움을 느끼고, 이전과 다른 취기에 더해진 숙취까지 얻게 된 걸까?

 

 먼저는, 계속 비슷한 캐릭터의 반복적인 사용이다. ‘달에 울다.’에서 나온 야에코와 물의 가족에서의 야에코는 이름뿐 아니라, 성격, 분위기 등이 너무나 다 비슷하다. ‘밤의 기별에서는 비록 야에코 같은 중심적인 여자 인물은 등장하지 않지만, 야에코와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샘가의 소녀가 등장한다. , 모든 작품에서 아버지 혹은 조부가 전쟁과 관련한 인물로 나오는데, 성격이 거의 다 비슷하다. 이 캐릭터들의 중첩을 보는 내내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중엔 다소 지루했다.

 

 둘째는, 너무나 폐쇄적인 공간에 대한 묘사에 관한 집착이라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나 한정적인 공간에 대한 묘사라고 해야 할지, 묘사하는 대상을 통해 전달되는 작가 자신의 불소통에 관한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작가는 전혀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나려 하지를 않는다. 그곳이 물에 관련된 곳이든, 산에 관련된 곳이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 어딘가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같은 곳에 대한 같은 묘사를 반복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시적인 소설에 대한 호불호이다. 일단 이 말 자체에 내 개인의 너무 과한 이상의 투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말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일정 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어찌 됐든, 마루야마 겐지는 분명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로 어느 경지의 시적 소설에 다다른 사실만큼은 나뿐 아닌, 많은 사람들도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이 정말 좋아하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예술에 대한 개똥철학으로 어느 정도 폼을 잡는 사람 아닌 이상, 이 책을 쉬 손에 잡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 내 개인적인 이야기로 돌아와, 이야기를 정리해보려 한다. 시적인 소설은 정말 가능할까? 마루야마 겐지가 보여준 시적 소설의 가능성에 대해 일단 나는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그 지역적 한계성과 폐쇄성, 그리고 독자와 거리를 둔 소통에 관한 혐오 의지는 그의 시적 글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떻게 매번 새로워지고, 매번 다른 글로 누군가의 감정을 훔칠 수 있겠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당연히 나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의 시적인 소설에 관한 이상은, 시는 매번 새롭게 달라져야 하며, 그런 까닭으로 매번 새롭게 읽히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조그맣게 읊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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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1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몽원 2021-09-19 20: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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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달에 울다 그 시적인 여운에 취해

 

 

 최근에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 가슴속에 깊이 남는다. 진한 여운이 남아 지금 내가 사과꽃에 취한 건지, 빨갛게 물든 달에 취한 건지, 흐드러진 야에코의 젖무덤에 취한 건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아직 정리되지 않고 취한 상태에서 품평을 하는 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럼에도 무언가 주절거리고 싶은 이 기분은 분명, 이 취기 탓이라 여겨본다. 한동안 나는 글쓰기는 재미에 있다고 생각했다. 재밌지 않은 글이, 혹은 본인이 재밌게 쓰지 않는 글이, 무슨 글이겠냐는 간단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본질이 거기에 없음은 내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재밌어도, 무언가 멈추는 지점에 대해 최근 생각했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추는 지점, 그렇게 떨림을 가쁜 호흡을 잠깐 고르고, 진한 흥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지점에 대해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이 달에 울다.’를 보고서 허튼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나의 글쓰기는 시적인 무언가에 대한 추구였다. 시에 대한 집착이 무언가 서사로써 길게 이어져, 깊은 여운을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관념이었다. 시로서 무언가 그것을 느껴보았지만, 소설에서 그걸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런 글쓰기가 무언가 목도하게 되었다. 사실, ‘달에 울다이전에 나는 마루야마 겐지의 다른 소설 밤의 기별을 읽었다. 거기서도 충격을 받았다. 이건 뭐지? 어떻게 이런 시적인 소설이 있지? 무언가 쉬 범접할 수 없는 그의 기법에 충격적인 여운이 컸다. 그리고 아쉬웠다. 만약 내가 일본어를 제대로 알았다면, 더 각별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시적인 기법을 소설 속에 녹여 놓은 것일까?

 

 첫째는, 반복되는 풍경의 묘사이다. 사실, 풍경 묘사만큼 소설에서 애매하고, 마음에 와닿지 않는 문장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마루야마 겐지는 같은 풍경에 대해 여러 번 묘사함으로써, 그 풍경에 대해 집중하게 만든다. 이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계속되는 병풍 속 노사에 대한 묘사, 사과꽃에 대한 묘사, 달에 대한 묘사, 그런데 기묘한 건 그 풍경의 묘사가 조금씩 다르게 변모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전이하는 것처럼, 풍경은 조금씩, 조금씩, 차츰차츰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로 변해간다. 그 풍경처럼 마을의 풍경도, 주인공의 심리도, 야에코도 변해간다. 비단, 이 소설에서뿐 아니라, ‘밤의 기별에서도 마루야마 겐지의 풍경 묘사는 비슷한 묘사를 택했다.

 

둘째로, 그가 각별한 점은 각 풍경을 묘사할 때마다 쓰는 암시와 상징에 있다. 소설의 병풍 속 노사는 자신의 할아버지이면서도, 아버지 같으면서도, 결국 주인공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보여주고 있다. 저 산기슭에 숨겨진 주인공만 아는 사과밭은 주인공의 이상향이다. 그곳에서 언젠가 그는 야에코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만, 그곳은 결코 다다를 수도 없고, 그렇기에 주인공 가슴 속에서만 깊이 간직된 이상향, 몽유도원도이다. 달은 계절과 함께 그 빛깔을 같이 품어내고 있다. 그래서 마치 사과꽃처럼 은은한 향을 품어내서, 야에코와의 관계와도 묘하게 연관을 가지면서, 결국엔 진다. 야에코처럼 혹은 주인공 자신처럼, 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인 촌장처럼.

 

 마지막으로, 그의 시적인 특별한 기법은 이 모든 것이 조금은 막연하다는 점이다. 어떤 것 하나 분명한 선이 없다. 마지막까지 그의 소설은 기승전결이 확실한 것이 없다. 그렇다고 불안정한 것도 아니다. 시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초에 그 시적인 암시나 상징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 그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 모든 불확실성이, 그리고 그 막연한 불안정함이 소설 전반의 분위기 속에 녹아들어, 사람을 홀리게 하고, 취하게 하는 것일까?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는 사과꽃 향을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지만 사과꽃 향기에 취했고, 그 취한 달밤의 수많은 기억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알고 있다고 느끼면서 떨리는 이 기시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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