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

 

 

거센 폭풍우가 지난

다음 날 아침이면

빌딩 사이 참새들이

짹짹 짹짹 짹짹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다

참철아, 아무 일 없었지

참순아, 너도 무사했지

지지배배 지지배배

이름 모를 새들도

구구 구구 꾹꾹

거리의 비둘기들도

서로 안부를 묻는데

아무도 떠오르질 않는다

문득 당신께 안부를 묻고 싶다

간밤에 아무 일 없으셨지요

언제나 잘 지내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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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욜로욜로 시리즈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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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마음속 깊은 응어리이거나 괴물 같은 형상이거나

 

 

 얼마 전 집중호우로 어린 남매 둘이 맨홀에 빠져 죽은 사건이 있었다. 평소라면 누구도 신경도 쓰지 않을, 맨홀이 갑자기 언론에 집중조명 되었다. 하수도가 흐르는 곳, 혹은 공사 때 간혹 볼 수 있는 어두운 공간과 사다리, 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들어가 보지 못한 곳. 만약 이 소설이 어설프게 관념적인 마음의 구멍에 관해 설을 풀었다면, 제대로 된 소설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맨홀을 등장시켜 그 안에 구축해놓은 주인공의 세계와 누나와의 추억, 그리고 마지막 시체를 집어삼키는 자기 안의 괴물까지, 생생하게 눈에 보이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기에, 이 소설은 평범한 가정 이야기로도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결코 평범한 가정이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안다. 맨날 엄마를 구타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피해 맨홀로 숨는 남매의 이야기가 어떻게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아버지가 소방관으로서 한 가정을 구하고 순직하여, 세상에 집중조명된 영웅이 되었다면, 어떻겠는가? 여기서 한 가지 모순이 발생한다. 늘 맞은 엄마는 새삼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자신에게 맨홀의 자리를 가르쳐주고, 인도해준 누나가 갑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도저히 이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다. 어떻게 수년간 자신들을 폭행하고, 한 집안을 좌지우지한 공포의 대상을 아버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는 주인공은 바깥으로 자꾸 맴돌고, 집안에선 누나와 부딪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 자신이 누나에게 폭행의 전조를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끔찍한 전조는 결국 외부의 파키라는 외국인을 향해 폭발한다.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친구들 사이에서 쪼다가 되고 싶지 않아, 몇 번 발로 같이 찬 것뿐이다. 아니, 같이 모여서 발길질을 했는데, 그냥 인형처럼 맥을 못 추고 죽어버린 것이다. 그때 그의 여자친구가 맨홀을 떠올려, 다 같이 시체를 맨홀에 던져버린 것, 그뿐이었다. 그런데 약 39일 동안 주인공은 내면의 고통과 실질적인 대상포진까지 겹치면서, 악몽에 시달린다. 자신과 누나와의 아름다운 추억이었던, 아니 아버지로부터 유일한 도피처였던 맨홀이 시체구덩이가 되어, 이제 주인공의 내면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결국, 주인공은 견디지 못하고 자수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아이러니가 또 발생한다. 다른 아이들은 사실 모두 주인공이 예전에 그 외국인으로부터 맞은 것을 복수해주기 위해 가담했을 뿐인데, 제대로 된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 때문에, 친구들은 폭력을 행사하여 살인을 주도한 죄로 3년 형을 받았고, 주인공의 여자친구는 살인 방조죄로 1년 형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주인공은 영웅인 아버지 때문에 정상참작이 되어, 재활센터에서 16주의 생활 후 1, 2년의 보호관찰 처분으로 판결을 받는다. 게다가 가장 아이러니의 극은 변호사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주인공이 방황했다는 사실을 재판부에 호소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여기에 대꾸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 소설은 이렇게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은 채 끝을 맺는다. 아버지를 용서하지도, 그렇다고 쿨하게 저주하지도 못하면서, 구멍은 구멍으로 남겨둔 채,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맨홀로 우두커니 존재한 채, 그렇게 끝을 맺는다.

 

 소설을 읽고서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한 가지는 정말 죽도록 증오하는 감정이란 게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해결되지 않는 감정의 응어리를 어떻게 푸는 게 정답일까, 하는 또 다른 의문이었다. 소설처럼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감히 알지도 못하는 응어리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소설가도 침묵으로 남겨둔 것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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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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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미국이 한때 꿈꾸었던, 그리고 끝나버린

 

 

 처음부터 분량에서 진입장벽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글의 주인공 스위드의 동생 제리가 나올 때까지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조금 지친 느낌이었다. 우선 요즈음 글쓰기 방식과 너무 달라서, 같은 이야기를 너무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경향이라든가, 너무 많은 설정을 둔다든가, 이런 점들이 이 글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면이 있었다. 사실, 제리가 등장하면서, 이 글이 단순히 길게 쓰인 글이 아니라,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미국이란 사회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낸 소설이란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존 에프 케네디, 베트남 전쟁,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그리고 자이나교와 목구멍 깊숙이까지, 이 글이 다루는 사건은 미국의 현대사를 아우르는 핵심의 한가운데 있다. 그렇지만 다루는 방식이 특이하다. 직접적으로 다루기는 하되, 한 가정사를 통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올드림록이라는 첫 번째 장소적인 설정이 들어간다. 이름부터 무언가 아메리카 드림을 연상시키는 이 마을에 가장 이상적인 남자가 이 글의 주인공 스위드이다.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든 눈에 띄게 두드러진 그의 외모와 매너, 그리고 탄탄한 근육은 그 동네 모든 아이들의 모범이었다. 탄탄한 근육의 소유자답게 모든 스포츠에서도 두드러지게 뛰어나, 스카우트를 받아서 대학을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스위드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여자 장갑 사업을 이어받는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는데, 스위드는 유대인이다. , 이민자이며, 유대인들은 전형적인 이미지상, 장사를 하게 마련이다. 스위드도 그런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아버지 사업의 길을 물려받은 것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스위드가 아버지에게 저항한 일이 있다. 결혼에 관하여 그는 미스 유니버스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아일랜드인이었으며, 가톨릭을 믿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지는 힘들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겐 그의 또 다른 성공의 증표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에 낳은 딸이 문제였다. 어렸을 때부터 말더듬이로 태어나 속을 썩이더니, 어느 순간 공산주의자로 변하여 반전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시대 자체가 베트남 전쟁이 이미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국민 모두 자각하기 시작하고, 젊은이들이 반전을 시작한 시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겨우 열여섯 살밖에 안 된 딸이 반전을 위해 뉴욕까지 외박을 일삼고, 급기야 올드림록의 작은 우체국이 딸린 상점을 폭파하는 테러범이 된다면, 과연 어떤 부모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스위드는 늘 이해하려 하며, 어떻게든 딸과 대화하려 시도한다. 단 한 번도 그의 인생에서 누군가를 배척하거나, 호의를 무시한 적이 없는 스위드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어떻게 내팽개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딸은 단호하고, 둘의 대화는 서로의 뼈를 때린다. 아니, 미국 사회에 대한 뼈를 때린다. 다만, 여기도 조금은 너무 많은 반복이 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여하튼 이렇게 딸에 대해 지극정성인 스위드는 딸의 테러 사건 이후 사라진 딸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그리고 5년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어느 하천 밑에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서 사는 딸을 발견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미국 사회의 아이러니가 보인다. 딸은 한 번의 테러가 아닌 세 번의 테러를 더 했다고 스스로 밝힌다. 그리고 그 후 자이나교도가 되어 채소만 먹고, 씻지도 않고, 거리를 헤매고 있다고 했다. 그사이에 강간을 두 번이나 당했다. 스위드는 딸의 죄책감을 덜어내기를 바라며,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을 간절히 바라지만, 이번에도 딸 메리는 단호하다. 이에 처음으로 스위드는 동생 제리와의 통화를 통해 자신을 향한 분노와 울음을 터트린다.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절망한 상태에서 미국 상류 사회와 교류하는 스위드의 이중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진실도 없다. 아내는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놀아나고 있고, 모두 목구멍 깊숙이와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며 잘난 척하지만, 다 쓸데없는 이야기뿐이다. 이 가운데 공상인지, 실제인지, 딸 메리가 거지꼴을 하고 돌아와 스위드의 아버지는 혼절을 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소설은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질문한다. 무엇이 문제냐고? 왜 아메리카 드림이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졌냐고? 왜 끊임없이 당신들은 위선을 떨고 있냐고?

 

 이 소설의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로써 여러 설정이나 메시지나, 서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하다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다만 모든 것이 너무 과하다. 설정도 너무 많고, 메시지도 너무 많다. 서사는 그리고 너무 길다. 만약 스타일을 조금 바꿔 조금 더 간략하게 표현했다면, 이 책 분량의 반만으로도 충분히 핵심을 담았으리라 개인적으론 생각한다. 그럼에도 누군가에 추천할 여지는 있다. 미국 사회에 대한 어떤 여러 가지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분명 좋은 소설이다. 그것도 사회적인 시선이 아닌, 가정적이고, 매우 주관적인 시선으로, 하나의 측면이 아닌, 다각적 측면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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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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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누구를 위해 복무해야 하는가? 

 


 중국 문학에 대해서 과연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적지 않게 읽어왔지만, 동시에 현대문학에 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삼국지, 노자, 장자, 중국 역사서 10권의 서적 등, 모두 과거의 중국일 뿐, 현대의 중국과는 관련이 없는 책들이다. 그나마 가장 최근 읽은 책이 루쉰의 아큐정전정도? 이것도 사실은 1920년대 나온 책이니, 중국이 공산주의 사회로 들어선 후 책을 읽은 바는 전혀 없다고 말해야 할 거 같다. 사실, 관심도 없었다. 너무나 다른 사회인 것처럼, 북한이 오늘날 말은 같은 민족이지만, 전혀 다른 민족 같은, 아니 짐 덩어리 같은 느낌인 것처럼, 아니 전혀 모르는 사회인 것처럼, 중국에 관심 가질 일이 없었다. 솔직히 내가 어릴 적 북한에 대해 나온 한 만화는 김일성의 정체를 돼지 두상으로 해놓을 정도였다. 그러니 중국의 폐쇄성에 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어디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 폐쇄성은 어찌 보면, 중국 사회의 폐쇄성이라기보다는 내가 가진 시선의 폐쇄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번 기회에 해보게 되었다. 가장 많은 공산품을 수입하는 나라, 동시에 가장 많은 우리 사회의 선진성과 그 안에 감춰진 부패를 답습해가는 중국에 대해, 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걸까? 사실, 그 사회도 똑같이 사람이 사는 한 사회일 뿐인데.

 

 이 소설의 배경은 아마 1970년대이거나 80년대쯤일 거로 추측해본다. 그러니까 아직 본격적으로 중국이 문화를 개방하지 않은 때이다. 이 소설 속에서도 소련 수정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아직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기 전인 것만은 분명하다. 중국 역사에 대해 자세히 몰라서 기술하기는 애매하지만, 중국 문화대혁명 후기쯤이 아닌가도 생각해본다. 그만큼 중국 공산주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확립하던 시기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주인공인 우다왕은 이 시대에 충직한 당원으로서, 모범적인 군인이다. 그는 모든 마오쩌둥의 어록을 외울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타의 모범이 되어 군 사단장의 사택의 취사병으로 뽑히게 된다. 이제 출세의 길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아내와 장인에게 약속했던 대로 군인이 되어, 당 간부가 되고, 도시에 진출할 가장 좋은 발판을 마련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묘한 일이 발생한다. 항상 벽 위에 세워진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나무 팻말을 사단장의 부인인 류롄이 들어서 식탁 위에 놓더니, 앞으로 이 나무 팻말이 원래 자리에 없으면 2층의 자기 침실로 오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마침, 사단장은 중요한 회의로 두 달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벌써,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웬걸? 사단장 부인인 자신에게 누나라고 부르라고 하지를 않나, 속옷 바람으로 침실에 있지를 않나, 말 그대로 유혹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우다왕은 사상 무장이 투철한 사나이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거절은 한다. 그러자 바로 다음 날 사단장 사택에서 나가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그를 추천한 지도원은 그에게 하루의 기회를 더 준다. 결국, 진퇴양난에 빠진 우다왕은 류롄을 누님이라고 부르고, 거기서부터 남녀의 운우지정이 시작된다. 거의 이 책의 삼 분의 이가량을 할애한 우다왕과 류롄의 정사에 관해선 따로 논하지 않겠다. 그저 이 정사가 남녀의 애절한 상열지사로 묘사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넘을 수 없는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 이유로 그들의 마지막 3일간의 사랑은 짐승과도 같은 섹스의 묘사로 치중되어 있다. 이때까지는 그저 이 소설이 이러다가 주인공 우다왕이 총살당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가 급전환하는 장면이 발생한다. 류롄이 임신을 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다. 사실, 사단장은 사내로 구실을 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이제 갓 30대를 넘은 류롄은 우다왕을 애초에 쳐다볼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았고, 은연중에 사단장의 사택으로 추천받도록 힘을 쓴 것처럼 보인다. , 여기엔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던 것이다. 물론, 책에서 정확하게 그 음모에 관해 기술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애를 못 낳는 사단장이 애를 갖고 싶다면, 남자구실을 할 수 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면, 어떤 방법을 선택하겠는가? 애초에 이 모든 것은 기획이고, 계획된 정사라고밖에 나로선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사단장 복귀 전날 우다왕은 한 달의 휴가를 받는다. 아니, 사실은 기약 없는 휴가였다. 부를 때까지 오지 말라는 그런 휴가였는데, 한 달이 넘는 휴가 동안 류롄에 대한 그리움으로 우다왕은 일찍 복귀한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사단이 갈가리 해체되고 있었다. 사단장이 솔선하여 사단을 해체하여 다른 부대에 예속시키는 중임을 떠맡았다는 것이다. 이런 급변하는 정세에도 우리 주인공 우다왕은 그저 류롄 누님 생각뿐이다. 그렇지만 그를 추천했던 지도원과 중대장이 그를 만류한다. 애초에 그들도 공모자였던 것이다. 사단장이 남자구실을 못 하고, 류롄은 사단장 부인으로서 아이를 임신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모든 이들은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 그렇기에 모든 부대는 뿔뿔이 흩어져야만 한다. 다만, 우다왕은 류롄의 적극적인 선처로 도시 공장의 공장장 자리를 얻게 된다. 그렇게 우다왕의 사랑은 허무하게 끝이 난다. 15년 후, 우다왕은 예전과 달리 성처럼 높아진 사단장 사택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보초병에게 아마도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고 써진 나무 팻말을 보자기에 싸서 류롄에게 전해주기를 부탁하며, 이 글은 끝을 맺는다.

 

 이 글을 읽고 놀란 점은 일단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글 속에서 어느 누구도 총살을 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단장의 비밀을 아는 세 사람 모두 현역 군인을 은퇴하기는 했지만, 누구도 유괴를 당하지도 않았고, 총살을 당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인공의 경우는 나름의 특혜까지 얻는다. 중국 사회에 대한 편견이 그동안 얼마나 심했는지, 스스로 자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놀란 점은 이 소설이 말살되지 않고,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책이 나왔을 때 중국에선 전면 출판과 유통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으로 이 때문에, 이 책의 명성이 자자해져, 몰래 읽혔고, 이제는 세계 각국에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물론, 작가도 총살되지 않았고, 어디 잡혀가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아직도 현직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까닭이다. 사실, 아무리 2000년대 중국 사회가 서구화되었다고 해도,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그들 나름의 위대한 마오쩌둥의 경구를, 이렇게까지 조롱하는 책을 중국 사회가 암암리이긴 해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생각해볼 거리가 있다. 끝으로, 이런 내 개인적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를 깨고, 처음 접한 이유로 신선했던 중국 문학을 앞으로 기회가 있다면 종종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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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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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구질구질한 글쓰기에 관해

 

 

 요새 은행에서 남는 시각에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곤 했다. 왜 이렇게 글들이 구질구질할까? 똑같은 말을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말만 바꿔 미화하고, 비하하고. 그렇게 장수를 늘려가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그렇다 해서, 내가 근래 읽은 책들이 결코 단편이었던 건 아니다. 대부분 철학, 심리학, 인류학책이었다. , 육백에서 칠백 가까운 그 서적들을 읽고 나면,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해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또 꼭 무식하게 삼사백 페이지씩 되는 책들을 읽었다. 그 책들이 의미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그동안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기반 지식이 전혀 없던 내 개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암흑의 핵심은 읽는 내내 나름 긴장감을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그 외 무엇이 더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글쎄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다른 철학, 심리학, 인류학책이 내 지적 호기심 이외에 뭘 더해주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최근 잘난 척한다고, 오랜 시간 보류해 두었던 보르헤스 전집을 읽으면서, 구질구질한 글쓰기에 대한 의문이 더 구체화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보르헤스 또한 괜히 어려운 말들과, 숱한 주석으로 패러디를 해, 얼마나 많은 독자를 당황케 했던가? 결국, 글이란 게 구질구질함을 벗어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뜨거운 피는 이런 구질구질함에 정점에 있는 책이다. 글 내용도 그렇고, 글의 서사와 페이지 수 모두 구질구질하다. 그렇지만 단 한 순간도 책을 쉬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긴장감을 준다. 왜일까?

 

 이 책의 주인공 희수는 건달이다. 구암 앞바다의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으로, 한마디로 말하자면, 구암 앞바다의 이인자다. 이십 년 동안 희수는 손영감 밑에서 일을 해왔다. 손영감의 스타일은 정말 구질구질함의 극치이다. 건달임에도 결코 손에 피를 묻히려고 하지 않으며, 돈이 되는 위험한 불법 밀수를 벌이려 하지 않는다. 고작 하는 사업이란 게, 조상에게 물려받은 만리장 호텔과 그 앞바다의 관리, 그리고 중국산 고춧가루를 국내산으로 위장하는 정도로, 소액의 일거리 정도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매사에 쩨쩨하다. 멋지게 아랫사람을 챙기는 일도 없고, 보호해주는 일도 거의 없다. 그가 오직 관심 있는 건 구암 앞바다의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도 그 손자 도다리는 안하무인으로 설쳐대면서, 여러 사람의 삥을 뜯고, 벤츠를 몰고 다니면서 띵가띵가 하는 꼬락서니란, 정말 못 볼 지경이다. 그에 비해 주인공 희수는 온갖 구암 앞바다의 자질구레한 사업들을 중재하고, 처리할 뿐 아니라, 가장 더러운 일까지 도맡아 처리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삼억이라는 사채로 가진 빚이 있다. , 그가 사랑하는 여자인 인숙 또한 술집을 차리면서 사채로 빚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아들 아미도 술집 여자를 내오기 위해 빚을 졌다. 이십 년 동안 손영감에게 몸 바쳐 충성했지만, 빚 말고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런 때 그의 전임자였던,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이었던 양동이 성인 오락실을 하자며 새로운 사업 제안을 해온다. , 아무리 털어도 더 나올 것 없는, 손영감의 그늘막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제안한 것이다.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었다. 이 제안을 통해 그의 새 가족의 사채로 쓴 빚이 모두 탕감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달콤한 것들엔 항상 가시가 있고, 독이 있는 법이다. 막상 새로 사업을 시작하려니, ‘희수는 그동안 몰랐던 손영감의 거대한 영향력과 버팀목의 역할을 깨닫게 된다. 돈이 되는 사업에 꿀을 빨기 위해 너도나도 달려들었고, 언제라도 살얼음판을 걷는 모양새가 되었다. 새로운 성인 오락실 사업에 파친코 사업을 하던 이들과 다툼이 일어났고, 양동의 보드카 밀매 사업은 기존의 전농동 일대 포주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여기에 불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양동은 손영감과 달리, 앞뒤 안 재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그 틈새에서 그의 양아들 아미가 전농동 포주 일당들에게 습격을 당해 칼에 찔렸다. 전쟁의 서막이 불붙은 것이었다. 양동은 바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구암 앞바다의 건달들을 모아 반격을 가했다. 그러다 전국구 깡패인 달호파의 조카를 죽이게 되었다. 이제 전쟁은 걷잡을 수 없는 서막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예견된 것처럼 전국구 건달인 달호파와 그 본가 계열인 남가주파까지 이 싸움에 끼어든다는 게, ‘희수는 영 탐탁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보다 더 큰 권력 간의 다툼에 있었다. 새로운 항구의 개발로 밀매 사업 루트가 막힌 남가주파가 구암 앞바다에 눈독을 들이면서 생긴 일이었다. 손영감은 이미 이 일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말 하지 않고, ‘희수를 내보내고, 양동의 무리한 사업 확장을 수수방관한 것이다. 아마 그 특유의 성향상, 끝까지 전쟁을 피하기 위한 체념이었으리라 추측해본다. 하지만 더 이상 전쟁을 피할 순 없게 되었다. 한 번 불법 밀매 사업이 들어오면, 구암 앞바다의 그 구질구질한 서민들의 삶을 되돌이킬 수 없게 된다. 손영감은 결심하고, ‘희수는 다시 그의 칼이 되어 전쟁의 전면에 뛰어든다. 하지만 건달 세계에 의리란 있을 수 없다. 거짓과 배신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는 양아들 아미를 잃고, 사랑하던 인숙마저 떠나보내게 된다. 사실, 그 자신도 죽은 것과 진배없는 상황이었는데, ‘희수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영감이 자신의 만리장 호텔을 바로 희수의 등기 앞으로 올려놓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십 년 동안 죽 쒀 개 준 줄만 알았건만, 손영감은 희수자신도 모르게, ‘희수를 양아들로 입적해놓았다. 이제 모든 전쟁은 끝났다. ‘희수의 만리장 호텔 인수와 함께 손영감은 교통사고로 위장된 공격을 받아 병원 신세고, ‘희수는 사랑하던 마지막 정붙이었던 새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렇게 남가주파의 승리로 자축하는 파티가 부산 앞바다 멍텅구리배 안에서 벌어졌다. 여기서 모든 셈이 끝나면, 남가주파는 자유롭게 구암 앞바다에서 밀매 사업을 시작할 것이고, ‘희수는 손영감을 대신하여 구암 앞바다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셈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희수는 그동안 죽기보다 더 싫어하고 미워했던 달호파와 손을 잡고, 그 자리에서 다섯 발의 총성을 울리며, 남가주파의 중요 인물들을 몰살한다. 승리의 주인이 남가주파에서 달호파로 바뀌는 것뿐이지만, 진정한 배후를 제거했다는데, 의의를 둔 걸까? 병원에서 돌아온 손영감은 달호파와 잘 공생할 것을 당부하며, 그의 머저리 같은 손자 도다리를 희수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며칠 후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의 배신 속에 도다리가 있었다는 걸 손영감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손영감이 죽은 후, ‘희수도다리를 조용히 처리하고, 새로운 만리장 호텔 주인이 되면서, 이 글은 끝을 맺는다.

 

 이 글의 장점은 첫째도, 재미이고, 둘째도, 재미이다. 글을 읽는 몰입감이 너무 좋았다. 더불어 건달의 세계를 통해 구질구질한 바닥의 삶들, 예를 들어, 바닷가 앞 건어물 가게, 노래방 가게, 횟집 등의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교훈이나 감동에 대해선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잡힌 지 얼마 안 된 횟감처럼 통통 튀어 오르는 글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그런 삶을 잘 표현했다고 해야 할지, 이런 점에선 배울 점이 많았다. 결국, 글쓰기에 첫째가 만약에 재미와 몰입도라면 이 글은 단연 최고급의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취향 따라 다르겠지만, 여하튼 그런 측면에서는 괜찮다. 하지만 이런 재미와 몰입감이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을지, 그 점은 사실 잘 모르겠다. 아쉬운 점은 바로 그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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