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에게

 

 

무지한 네 자신을 알라는 당신의 격언이

그저 밑도 끝도 없는 말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를 알면 둘을 모르고 둘을 알면 셋을 모르고

무언가 안다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우주의

쏟아지는 별들의 무량수처럼 그 먼 거리만큼

헤아릴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단 사실을

그 무지의 진실을 이제야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모른다는 진실을 배워

아무것도 모르는 태아적 지고무지의 경지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태아날 순 없지만

이제 차마 무언가를 안다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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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 목련공원 Magnolia Park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22
이승우 지음, 유진 라르센-할록 옮김, 전승희 외 감수 / 도서출판 아시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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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공원 마지막 총성이 울리기 전 생의 절정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봄꽃들 가운데 목련을 가장 좋아한다. 물론, 봄을 수놓는 꽃들은 가지가지이고, 저마다 아름다움의 이유가 있다. 그중 목련과 벚꽃은 새하얗게 만발한 그 자태만큼 유려하게 낙화하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 다만 그 차이가 있다면 무게의 차이일 것이다. 내겐 가볍게 흩날리는 벚꽃의 유려함보다는, 어쩐지 무겁게 그렇지만 결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유유히 떨어지는 목련의 낙화하는 모습이 늘 가슴 한구석에 맺혀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떨어지는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그 이유 혹은 그 잔혹한 진실은 대체 무엇일까?

 

  이 글의 스토리는 어쩌면 너무 단순하다. 화자인 남자 주인공이 목련 공원으로 향하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장례식장으로 유명한 이 목련 공원에 그는 동시에 결혼식 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초대한 사람이 자신의 불륜 상대였다. 우연히 아는 지인의 미술 전시회에 초대받아서 들렸던 목련공원 내 찻집 목련에서 만났던 여자, 처음부터 그는 그녀에게서 어떤 불안한 예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현실이 되어 그는 멈출 수 없는 그녀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암컷 사마귀와 같은 그녀의 집게라는 족쇄에 갇히게 된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사마귀가 교미할 때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그 사실을. 하지만 거기서 어떤 에로틱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목련 찻집의 그녀는 자신의 생명마저 내어주는 수컷의 정렬을 사랑이라 이야기하며 주인공을 그녀의 강력한 집게와도 같은 품으로 가둬버린다. 그 집게가 얼마나 강력한지 그는 늘 그 잔인한 품에서 벗어나길 발버둥 치지만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얼마나 교묘한지 그녀는 그의 일상생활 범위로 그 집게를 좁혀 들어와, 아내가 있는 그의 집으로 수시로 전화를 걸기까지 한다. 마치 자신의 먹이가 잘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양, 그렇게 그를 옥죄고, 결국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아내와 별거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목련 찻집의 여자와는 정반대로 너무나도 이성적인 여자이다. 비록 별거했지만, 그 사실을 그의 형제에게도 숨기고, 가족 행사 때면 남편인 주인공을 부르기까지 한다. 별거 후 딱 세 번, 그녀는 그에게 전화했는데 그 일이 모두 그녀의 형부와 관련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집을 사기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일했던 그의 형부가 별안간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이제 속절없이 마흔다섯이라는 나이에 이 세상에서 하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장례식의 발인 날과 그의 불륜 상대였던 목련 찻집 여자의 결혼식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는 당연히 장례식장에 가야만 한다. 이제 그 여자에겐 그 어떤 미련도 끌림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묘지에서 마지막 섹스 후 그녀는 차갑게 돌변하여, 마치 그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매달려 보고, 애걸해봤지만, 그를 용서하지 못 하는 그의 아내처럼 그녀에게서 되돌아온 것은 차가운 냉소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그녀가 또 다른 애인에게 그에게 했던 것처럼 비슷하게 사마귀와 생쥐의 싸움 장면을 보여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 달리, 사마귀가 방아깨비를 잡아먹는 것처럼 흡사하게, 사마귀가 생쥐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자신의 집게로 생쥐를 파먹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그녀를 깨끗하게 털어내고 단념했다. 그러하기에 그의 발걸음은 당연히 자연스럽게 장례식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 밑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자연스럽게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산 밑으로 걸음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녀의 결혼식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녀가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자기와도 똑같은 처지였을 한 남자가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끌고 가고 있었다. 순간 그는 속으로 어서 빨리 그가 방아쇠를 그녀의 가슴에 한 발 더 쏘아주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그는 살 것이고 그녀의 구렁텅이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 확실하니까. 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그 순간에도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끌고 가는 것이 그가 아니라 그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소설을 읽어가면서 사실은 조금 너무 극적인 설정들이 많지 않나 생각했다. 장례식장과 결혼식장의 설정도 그렇고, 마지막 그녀를 향한 총성의 장면도 너무 극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그 극적인 장치를 통해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목련 찻집 여자의 미소를 드러낸 순간, 그 총성으로 가기까지 그 모든 장치와 설정이 꼭 필요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총성은 내 가슴에 찌릿하게 박혀, 토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소화하지도 못해,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 내내 머물 것만 같다. 왜냐하면, 이제야 왜 내가 목련의 낙화를 생의 어떤 절정으로 동경했는지, 왠지 깨닫게 된 거 같으며, 동시에 이제껏 나를 끌고 온 그 무언가가 내가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이거나 거기서 폭발한 블랙홀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미소는 이렇게 이성적인 설명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표현할 길이 없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그 미소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자칫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표명하지도 못하고, 자신이 총을 쏘는 것인지, 총을 맞은 것인지 알 수도 없게, 그렇게 시나브로 젖어 들어 그 머금은 모든 피가 자신의 것인지 알 수도 없게 되어, 그렇게 넋이 나가지 않도록, 혹은 반대로 간절하게 그렇게 되기를 영영 바라도록, 그녀의 미소를 이 소설 너머 어딘가에 고이 놓아주거나 혹은 내내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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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 봄에 우리 그 누구도 없었다

 

 

  언젠가부터 소설을 읽는데 조금 흥미를 잃어버렸다. 원래 문학에 대한 동경이 소설보다는 시적인 무엇인가에 대한 목마름인 탓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내게 어떤 커다란 화두가 있었을 때 소설은 그 시적인 무언가를 탐미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커다랗던 화두였던 신이었거나 화두 그자체가 사라진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체되어버렸고, 그냥 그렇게 현실이란 무난한 하루 속에 혹은 일정한 조류에 흐름을 맡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가슴속에 박동은 뛰고, 뛰는 박동 속에 흐르는 피는 어릴 적부터 새겨진 시에 대한 갈망을 품고서 가끔씩 온몸을 달아오르게 만들곤 한다. 지금 이 소설을 읽고서 내가 그런 달뜬 감정을 느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기억들을 계속 끄집어내고,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글의 주인공 조앤은 영국의 중산층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여자 캐릭터이다. 모험과 꿈보다는 안정된 미래를 지향하며, 지독하게 현실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그녀는 행복했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와 결혼을 했고, 자식 셋을 낳아 반듯하게 잘 길러서 모두 잘 출가시켰다. 완벽한 삶이다. 이 소설은 그런 완벽한 삶을 산 그녀가 아주 낯선 환경인 사막에서 사흘 동안 지내면서 자신이 알던 자신의 삶이, 그리고 자신의 주위가 붕괴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그려낸 소설이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서 그녀가 무너져버린 걸까? 그녀의 남편 로드니는 성공한 변호사이다. 다만, 단 한 번 그에게도 위기가 있기는 했다. 그는 그녀 모르게 농장에서 사는 삶을 동경했다. 변호사 생활이란 결코 그가 꿈꾸던 삶이 아니다. 때문에 그는 그의 아내 조앤과 농장 생활에 대해 의논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뻔했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답이었다. 변호사가 주는 사회적 위치와 월급,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에 관한 이야기, 그녀는 그녀의 남편 로드니의 생각을 철없는 생각이라고 단정지었다. 만약 그때 그녀가 그와 함께 시골로 내려갔다면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그녀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다. 그랬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자랑하던 그 완벽한 삶을 살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거기가 불행이 시작점이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불행히도 그녀가 낳은 자식들은 그녀 자신보다 그녀 남편 로드니의 기질을 닮아있었다. 이상하게도 자식들은 모두 그녀 자신보다 로드니를 더 따랐고, 모두 이제는 잘 자라 출가를 했지만, 한 번씩 그 기질 탓에 속을 썩였다. 늘 자신을 은근히 비아냥거리며 조소하던 큰딸 에이버릴은 갑자기 스무 살이나 나이 많은 유부남과 결혼을 하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그때 그녀는 도무지 무얼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남편 로드니가 이성적으로 그녀의 딸을 설득시켰다. 마치 자신이 로드니의 꿈에 대해서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는 결혼이라는 것이 일시적인 감정적 격정이 아니라 계약이기 때문에 계약 당사자인 또 다른 한 사람, 에이버릴이 사랑하는 남자 아내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에이버릴이 앞으로 사랑할 남자가 에이버릴과 결혼함으로써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사라는 사회적 신분과 위치가 위협받게 될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그로 인해 나중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동시에 결혼이라는 신성한 의무인 계약 파기를 한 번한 사람이 다시 한 번 그 계약 의무를 파기할 수 있음을 이야기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에이버릴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의 권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에이버릴에게 상기시켜주었다. 다행히 에이버릴은 똑똑하고 이성적인 아이였다. 그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수긍하고, 그녀의 연애를 끝냈다. 그리고 지금은 성공한 부동산 중개사와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조앤은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녀의 딸 에이버릴과 그녀의 남편 로드니가 냉랭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원래 현실은 그런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그렇지만 도덕적이고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제 길을 가게 마련인 법이다. 그녀는 그렇게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아이들은 다 제각각이었다. 둘째인 아들 토니는 어떻게 자신의 남편 로드니를 똑 닮았는지, 갑자기 농장 생활을 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녀는 아들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번엔 남편이 도와주질 않았다. 오히려 남편 로드니는 그녀를 설득했고, 아들 토니의 길을 열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막내 바버라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늘 자신을 못마땅하고 시비를 걸었다. 게다가 어찌나 천박하고 상스러운 아이들과만 노는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 시시때때로 하는 연애는 얼마나 경박스럽고, 변덕스러운지,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는 딸 바버라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막내 바버라가 다행히도 자신이 주선한 성실한 청년 사업가 윌리엄을 사랑하게 되어, 급기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편 로드니는 그 결혼에 대해 너무 급하다고,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자신과 의견을 달리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늘 그랬듯이, 그녀 자신 남편의 의견을 무시하고, 바버라를 결혼시켜 보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바버라는 사실 윌리엄을 사랑했다기보다는 그저 집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변덕스러운 그녀는 결혼하고도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고, 아이까지 가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그저 바버라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그 둘이 사는 이라크까지 한 걸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이 글은 주인공 조앤이 그 둘과 함께 있다가 이유는 모르지만, 그 둘이 자신과 오래 머물기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집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시작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조앤은 예기치 않게 여정 중에 사막의 한 여관에 갇혀버린다. 도무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사막이라는 공간에 사흘 동안 갇혀서, 너무나 뜨겁게 빛나는 태양 아래 이 모든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그녀는 스스로 무너져 내려간다. 그런데 여기에 또 가장 중요한 인물인 그녀의 남편 로드니의 중요한 이야기 하나가 숨겨져 있다. 처음부터였는지 아니면 그의 부인 조앤이 자신이 동경하던 농장 생활에 대해 반대했을 때부터인지, 그는 단 한 번도 그의 부인 조앤을 사랑한 적이 없다. 물론, 그도 어쩔 수 없는 영국의 전형적인 성공한 중산층 남자이기에 조앤의 삶의 방식과 목적에 대해 부인할 도리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는 자신의 딸 에이버릴에게 얼마나 그것이 합당한 삶인지 스스로 입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랜 동경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천성의 연민과 정 때문이었을까? 그는 단 한 번 사랑했던 여자에게 끝내 고백하지 못 한 사실을 후회하고 있다. 레슬리 셔스턴, 찰스 셔스턴이란 사기꾼 기질이 있는 남편을 만나서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암으로 죽은 불쌍한 여인, 그렇지만 그녀는 결코 불쌍한 여자가 아니다. 그녀의 남편 찰스가 감옥에 가있을 때도 정원을 가꾼 채소들을 시장에 팔아 자식들을 거뜬히 건사해냈고, 그 무능한 남편이 돌아왔을 때도 그를 위해 끝까지 헌신하면서 개도하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누가 봐도 그녀는 정상적인 안색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고, 늘 자신의 삶을 긍정한 그런 여자였다. 그녀와 그는 10월의 어느 날 따사로운 햇살 아래 1m 남짓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거기서 그는 그와 그녀 사이에 전기장처럼 갈망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으리.’라고 낮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 전기장을 그의 부인 조앤 역시 먼발치에 바라보며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둘은 신성한 결혼이란 계약 관계 당사자들이다. 무엇이 어찌됐든 사랑을 끝까지 연기해내야 하며, 서로 영원히 외톨이임에도 둘인 것처럼 위장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앞으로도 쭉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 글을 다 읽고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중후반까지 정말 매력이 있는 소설이었다. 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면서, 진실에 대한 진정성 있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지금까지 한 인간의 진실을 해체시키면서 제기했던 문제의 핵심들을 그대로 복원하여, 현실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소설 막판에 등장하는 공작부인과의 대화에서 어느 정도 암시가 있기는 하다. 우리는 예수와 같은 성자가 아니다. 사막에 사십일 동안 갇혀 무언가를 깨닫고 각성했다고 해도, 자신의 기존의 모든 삶을 부인하고 예언자이거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선언할 수 없다.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인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은 현실이 아닌 소설이다. 소설은 현실 이상의 그 무언가를 찾아내야 하고, 그 무언가를 던져주어야 한다. 물론, 이 소설은 완벽한 현실에 대한 어떤 틈을 발견하고, 그 틈에서 발견된 문제들을 제기했다. 거기까지만 해도 대단한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문제제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화두이거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구심을 가져본다. 물론, 이 또한 너무 막연한 이야기란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글이란 것이 밑도 끝도 없는 화두를 던져야할 의무도 없는 법이고, 꼭 어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이 소설은 그 모든 가능성을 봄이라는 닿을 수 없는 존재였던 레슬리 부인에게 전가시켜 놓고, 그렇게 시라는 상징 속에서만 살라고 강요하고서, 모든 봄에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고 어느 정도 단정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이미 죽어버린 애슬리 부인처럼 모든 과거의 시점으로 지나간 계절로 봄을 상정하고, 혹은 영원한 여름을 그렇게 상정하고서, 남겨진 로드니이거나 조앤인 우리는 서로 뻔한 거짓말로 위로하면서, 일종의 의무감으로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렇게 마무리한 점이 나는 조금 씁쓸하면서도 서글퍼서, 이 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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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

 

 

태풍이 올 거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연일 거센 바람이 여기저기 불어왔지만

폭풍우는 어디에도 쏟아지지 않았고

높은 습도에 가끔 잔비만 흩뿌렸습니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기승을 부리며

연일 들이칠 거라고 위협을 알리는데

소문만 무성하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

미국에서 나래 짓을 한 나비효과라고

누군가는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더러는 북한의 고냉저습한 독립적 기후가

한반도 전체에 영향을 끼쳐 안전하다고

해괴한 해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과장에 과장을 더했지만

연일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았습니다

나도 아무 일 없이 그렇게 잘 지냈지만

뜻밖에 집에 김치냉장고가 고장이 나서

드르륵 드르륵 태풍 소리를 들어야했습니다

너무 낡아버린 김치냉장고를 바꿔야한다고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께 간청했지만

나이가 들어 옹고집이 되어버린 아버지는

수리하면 괜찮을 거라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오래된 세월은 쉽게 청산할 수 없는 것인데

이젠 더 이상 어찌할 도리도 없이 방치되어

집에서 태풍 소리와 함께 김치 쉰내가

연일 진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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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과 한 덩어리

 

 

동네 편의점 그늘 쉼터 옆

이름도 생소한 고압 정유기

철책 너머 한 귀퉁이에

조그만 약과 한 덩어리를 보고

참새 한 마리가 날라왔다

짹짹, 짹짹거리며 쪼아 먹는데

어디서 알고 왔는지

여기저기서 참새들이 날라온다

다 먹지도 못 할 거면서

그 거 조금 붙어 먹어보려고

여기저기서 싸움이 붙는다

짹짹, 짹짹거리며 마치 투계인양

종종걸음으로 퍼덕이면서

서로 얼굴을 쪼아대기 시작하는데

그 사이를 피해 몰래 주워 먹는 놈

그걸 또 쪼아서 빼앗아 먹는 놈

여기저기서 정말 가관이 아니다

이러보아도 저리보아도

그 놈이 그 놈 같고 저 놈 같은데

그래도 그 안에서 제일 센 놈이

모두 쫓아내고 혼자서 독식한다

다음날 참새들은 어데 간 데 없고

개미들이 한데 달라붙어 있다

며칠 후 약과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누가 다 먹어버린 걸까?

참새일까? 개미일까? 시간일까?

아니면?

다 꼴 보기 싫어 누가 치워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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