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든 피해자든 수용소 생활을 한 자는 많다. 죽은 자들보다 적겠지만 산 자들도 꽤 된다. 사건이 하나라고 해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몸 전체가 젖은 자와 발만 담근 자,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겪은 자와 일부만 경험한 자 등 그 가해와 피해의 경험이나 기억의 범주가 전부 같지도 않을 것이다. 피해자에게 망각의 욕망이 차올라도, 가해자의 왜곡과 은폐 노력이 아무리 절실해도, 기본적으로 세상에 비밀이란 게 있을 수가 없다(고 믿는다). 살아 돌아온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통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싶어했다. 말하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거나 그 용기가 함께 생활했으나 처참히 떠난 이들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 일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은 상황 전반을 해석해보려 하지만 겪지 못한 일을 빠짐없이 알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이고 눈물겨운 반면, 애초부터 한계를 갖는다.

 

홀로코스트 반백 년을 훌쩍 지난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수용소에 관한 지식은 매체를 가리지 않는다. 손만 뻗으면 닿고 언제든 꺼내볼 수 있다. 그전에나 후에도 끔찍한 일은 많을 텐데 유독 더 혹독하고 야만스럽게 기억하는 자들이 많다. 프리모 레비는 사람들이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고통과 아픔과 비극의 진실을 알기 거부한다고 말한다. 내것이 아닌 상처를 헤집어서 괜한 죄의식이나 죄책감에 시달릴까봐 두려워서겠지. 그런데 왜 유독 프리모 레비는 더 많이 읽히거나 주목 받는가. 단지 그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3.1운동은 어린 학생들이 먼저 거리로 뛰쳐나와 일어난 일제시대 최고의 독립운동이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목이 터져나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역사는 유관순 만을 기억한다. 그녀는 어렸고 붙잡혀 처참한 고문을 당했고 그러면서도 목이 터져라 소리쳐 결국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같은 일을 겪어도 소수의 몇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그림자로 남는다. 안네와 프리모 레비가 대표주자가 될 수 있는 건 그들이 문학적 글쓰기를 뽐냈기 때문이지, 그들만이 살아남거나 유독 심한 고통을 겪었거나 역사에 희생당했기 때문은 아니다. 우린 이름있는 자들 뒤에서 그림자의 그림자로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비교적 덜 알려져 있고 덜 연구된 부분은 비밀을 간직한 수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쪽, 즉 압제자들 쪽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롯 대다수는 알고 있는 게 적었고, 극소수만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놀라우리만치 잔혹하게 저질러진 일들에 대해, 나치 기구 내에서 모를 수 없었던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할 수 있었는지,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눈과 귀를 (무엇보다 입을) 꽉 닫고 있겠다는 보다 신중한 길을 선택했는지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됐든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대학살을 받아들였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게 보면 라거에 대한 진실을 확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집단 범죄의 하나이며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 민족이 다다른 비겁함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습 속으로 들어와버린 비겁함, 너무나 깊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비겁함이다. 이 비겁함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고 유럽과 세상은 오늘날 달라져 있을 것이다. (p.14)

 

특수적 상황이 보편화가 되어버렸고 그들이나 장소 혹은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면 여러 수용소에서의 삶과 죽음, 가해자와 피해자, 기억과 망각을 굳이 프리모 레비의 목소리로 읽을 의미가 사라지니까. 한여름에 아우슈비츠라니, 어딘지 모르게 뭉클하고 알싸하다. 더 많이 공감하고 아파하고 이해해야지. 나치스와 아우슈비츠 담론을 써내려간 철학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읽는 페이지는 아직 50p..

 

 

이현수의 <나흘>은 구소은의 <검은 모래>만큼, 김영하의 <검은 꽃>만큼 좋다. 임철우의 <황천기담>을 어서 읽어야 하는데 생각하며 떠올리는 <이별하는 골짜기>와 <등대>만큼 좋다. 여기서 '좋다'는 '아프다'와 동급의 의미에서다. 무겁고 질기고 깊고 아련하다. 때로 너무 아득해서 끝끝내 닿지 못하는 삶들이 여기저기서 툭툭 솟구친다.  

 

 

 

사랑보단 미움이 훨씬 강한 화력과 점액질의 성분을 갖고 있다는 걸 그때야 나는 알았다. ... 폭발을 억누르며 사는 경우가 가장 나쁘다고 하던데. 그럼에도 나는 남은 목숨을 부지하며 변함없이 인영을 기다린다. 우리는 너무 깊고 무거웠고 불안한 세월은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지금 세속의 질서를 지키며 수도승처럼 살고 있다. 우리는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넘어선 상태이고, 인영이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대도 나는 이 오래된 기다림을 멈출 수가 없다. 비록 고독과 황폐의 끝을 본다 할지라도. 이건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경우의 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이현수, <나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는 피해자가 어떤 사정으로 가해자가 되어버리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피해 사실을 영원히 묻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가해자를 온전히 미워하지도 못하게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품은 대상을 보는 일이라든가. 아버지의 가정 폭력 앞에 자식이 느끼는 애증같은 것. 여자라서, 남자라서, 가난해서, 사랑해서, 나약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한때, 그 처참함과 애절함을 <나흘>은 마치 어제처럼, 내 일처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또렷하게 포착한다.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 더한 상처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자가소독하고 아물도록 기다리지만 상처는 터져 피가 나고 곪고 닳고 삭혀야 겨우 아물 기미가 있을 뿐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한 이들의 충실한 죄의식은 그로부터 다시 반 백년이 지날 때까지 죽은 채 살아숨쉰다.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로 인해 드러난 진실은 추악하고 처참하고 아프지만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내시가家, 동학 혁명, 6.25까지 현대사 60년의 세월을 두 가문과 마을 사람들을 통해 듣는다.

 

여자들이 머무는 부엌에는 칼과 피와 꽃이 있다. 여자들은 한 달에 한 번 자기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가랑이 사이로 아기를 낳는다. 여자들은 하루에 세 번, 날카로운 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자르고 벤다. 무심한 얼굴로 생선을 토막내고 포를 뜨며 살아 있는 닭의 모가지까지 비튼다. 그런 뒤 피 묻은 손을 씻고 정결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꽃을 예쁘게 꽂는다. 강인하고 헌신적인 어머니라는 이미지 뒤엔 이런 잔인함이 숨어 있다. 아버지의 말처럼 나는 지금도 여자를 모른다. 여자들의 산수도 헤아리지 못한다. (이현수, <나흘>)

 

 

 

이 책을 읽은 시점은 츠바이크의 또 다른 책 <어제의 세계>를 펼쳤지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을 때였다. 아직도 그 책은 앞쪽 어딘가 책갈피가 꽂힌 채 집구석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을 테지만 지금으로선 당장 그 책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라앉은 1인칭 시점이 묵직해서 굉장한 몰입이 필요한 책이었다. <체스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정우성과 이시영이 키스신 드립으로 제작발표회를 했지만 정작 줄거리상 그 키스신은 있으나마나 한 사소함(심지어 욕망도 아님)인 걸로 기억되는 <신의 한 수>를 볼 때였다. 집에 돌아와 보니 정우성보다 피프광장에서 먹은 매운 어묵과 씨앗 호떡이 더 기억에 남는 그런 영화였는데, 바둑이 꼭 체스 같고, 보는 내내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이 츠바이크의 소설을 읽었으리라는 확신 아닌 확신을 했다.

 

 

그러나 예술의 영역에 나타난 한 명의 천재는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마찬가지로 역사상의 별 같은 순간은 이후 수십 수백 년의 역사를 결정한다. 전 대기권의 전기가 피뢰침 꼭대기로 빨려들어가듯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이 시간의 뾰족한 꼭지점 하나에 집약되어 실현되는 것이다. 보통은 평온하게 전후로 나란히 일어나던 일이 단 한 순간 속에 응축되어 나타나고, 그러고 나면 그 순간은 역사상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결정하게 된다. 단 한 번의 긍정이나 단 한 번의 부정, 너무 빠르거나 혹은 너무 늦거나 하는 일이 이 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서 개인의 삶, 민족의 삶 심지어는 인류 전체의 운명의 흐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서문)

 

예전에 하나의 별과 또 하나의 별이 십자가처럼 겹쳐져 중앙에서 만나 빛나는 사실을 믿었다면 요즘은 뾰족한 세 개의 꼭지점이 겹쳐지지 않은 채 손을 붙잡고 있는 트라이앵글을 믿는다(고 누구에게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그런 이야기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누구나 보고 듣고 공부할 수 있는 시공간이지만 아무나 배열할 수는 없는 특별한 우연과 열정의 역사. 그렇게 어느 영역에 나타난 반짝이는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십자가 혹은 트라이앵글을 가능하게 하는가. 우리는 그걸 운명이라고도 우연이라고도, 그것도 아니면 역사 혹은 이미 지나왔지만 앞으로도 올 수 있는 일이라고 부른다. 전후, 좌우, 위아래처럼 그때 그 시간 그곳에서 하필이면 그 순간이 실현되었다는 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익숙한 내용에 독특한 시각(관점)에 구성과 문체의 독창성에 감탄하지만 다소 이렇게 수긍하게도 하는 책이다. 그렇지만 평범했어, 라고.

 

 

 

 

보르헤스의 강연은 어렵다. <칠일 밤>도 그랬고, 그의 강연은 머릿속에서 잘 정리되지 않는다. 비유와 암시가 많고 그걸 적절하게 이용하는 글쓰기에 능한 문학가이자 비평가라 그럴 거라고, 내가 스페인권이나 남미 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한 권 두 권 읽으면서도 계속 같은 느낌이라 이제 잘 모르겠다. 소설도 이론(강연)도 어려운 보르헤스에게 끌리는 이유가 낯선 예문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암시의 마력에 빠졌기 때문일까, 손에 잡히지 않는 멀고 두렵고 아득한 느낌 때문일까.

 

에머슨(Emerson)은 어딘가에서, 도서관이란 죽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일종의 '마법 동굴'이라고 쓴 듯싶군요. 여러분이 그들의 책갈피를 펴면, 이 죽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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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부(敎父)의 또 다른 문장이 생각나는군요. 그 교부는, 무식한 사람의 손에 책을 건네주는 것은 아이들의 손에 칼을 건네주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말했지요. 그래서 책이란, 고대인들에게는 한낱 임시변통물에 불과했습니다. 한 편지에서 세네카(Seneca)는 거대한 도서관들에 반대해서 썼습니다. 그리고 한참 지난 뒤, 쇼펜하우어는 책을 사는 것을 책의 내용을 사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고 썼습니다. 가끔 저는 집에 쌓인 많은 책들을 바라보면서 그 책들을 다 읽기 전에 죽을 것이라고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새 책을 사고 싶은 유혹을 견딜 수 없답니다. 서점에 들어가서 제 취미-예를 들어 그대 영시, 또는 고대 노르웨이 시-에 딱 맞는 책을 발견할 때마다 저는 이렇게 되뇝니다. "저 책을 살 수 없어서 얼마나 애석하냐, 이미 집에 한 권이 있으니 말이야." (보르헤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척하는 삶>(제목이 척하는 삶이 뭐냐!)에서 내가 접은 부분은 지난번에 썼던 리뷰를 참조했더니 두 구절이다. 주로 닥 하타가 세계 2차 대전 일본 군의관으로 참전했을 때 거기서 만난 위안부 자매와의 기억의 일부. 사실 이창래의 소설은 소재에 비해 도드라지게 확 튀어오르는 문체는 아니다. 한국전쟁, 참전 군인, 고아원에서의 삶을 다룬 <생존자>도 그렇지만, 입양된 재일한국인, 참전 군의관, 위안부, 입양을 다루는 <척하는 삶>도 예외는 아닌데, 시점이 주로 다 겪은 후의 시간을, 아프고 고통스런 기억을 담담히 회고하는 형식을 취하기에 독자가 직접 주인공의 삶에 뛰어들지 않게 되면서 고통의 맥락이 조금 희석되는 느낌을 받는다. 겪은 사람도 이리 덤덤하게 살아가는데 징징대는 내 존재가 사치 아닐까 싶은 마음에서 오는 위안. <생존자>는 또 다른데, 이 소설은 정말 좋다. <척하는 삶>은 <생존자>에 비하면 구성이 훨씬 단조롭고, 아픔을 제대로 터치하지 못한다기보다는 일부러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작년 봄 쓴 페이퍼를 열어 보았더니 당시엔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세 작품을 연달아 읽는 시간은 정말 끔찍했다. 우울에서 나와 다시 우울에 빠지고 또 다시 빠지며 다가올 낙관을 고대하던 시간이.  

 

 

누군가 그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면 대답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 젊은 남자를 대신해서 말할 수 있다면, 내가 그를 위해 진실의 일부를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그녀의 거기 있음 그 자체에 끌렸다고 말하겠다.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이 결국 아름다움 같은 것조차 옆으로 밀어 버렸다. 그는 그때 그것을 몰랐지만 그는 자신이 그저 그녀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면,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의 몸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또 그녀의 잠든 정신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그러면 그녀가 그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pp.333-334)

 

닥 하타의 인격이나 인간성을 의심한 적은 단연코 없지만 이상한 점이 많다. 모든 것을 겪은 후 철저한 이방인이 되기로 하면서 미국으로 이민오면서 한국 태생의 부모 모르는 버려진 여자아이 입양하는 것. 규정에 어긋나 불가능하다며 남자아이를 권하는 담당자를 설득해 기어이 여자아이를 데려오는 것. 딸이 간절했을 수도 있지. 혼자 사는 나이든 남자가 자신이 태어나 버려진 땅에서 버려진 여자아이를 입양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의심할 만한 일인데, 설정이나 상황이 어색해서 자꾸만 나쁜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그간 쌓인 내 선입견에서 나온다는 걸 깨닫고 근거 없는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지 제대로 자각했다. 그는 그저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을 원했을 뿐이었을지도. 연애도 하고 호의와 선의를 베푸는 삶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고, 과거에 느꼈던 고독을 나누고 위로받으려는 마음으로 예쁜 딸을 원했을 뿐인지도 모르는 일. 내가 너무 오해 했다. 딸도 왜 하필 자신을 데려왔냐며 자라는 내내 오해 한다. 게다가 왜 당신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냐며 질책한다.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에서 문제의 본질을 피한 채 계속 소리없이 삐걱대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떠오르기도 한다. 군의관으로서의 경험, 한국인 위안부 자매를 보며 느꼈던 자기 정체성의 혼란이 과거의 갈등이라면, 시니컬한 딸이 계속 엇나가기만 하는 이유와 관계 회복은 현재를 떠받치는 갈등이다. 

 

나는 이제 뭘 '본다' 해도 내가 보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내가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 중간쯤으로 우리가 삶에 기대하는 것 때문에 만들어 놓고 공유하는 환상인지. 아니면 이렇게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최대한 버텨 내고 만족하고 목적을 부여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만 할까? (p.116)

 

 

그러니 사람이든 문학이든 그외의 어떤 것이든 약간은 내가 들어갈 틈을 주는 은근함이 좋다.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겉과 속이 뻔한 사람보다는 사기는 안 친다는 가정 하에 조심스럽게 자기를 감추는 사람이 매력 있다. 혈액형, 별자리 모두 나더러 완벽주의 성향이란다. 다 믿을 것도 못 되지만 영 아닌 것도 아니라서 절반쯤은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는데 생활 속의 나는 덤벙대고 고집 센 다혈질에 가깝지만 막 쓰는 페이퍼조차 이렇게 괜찮은 마무리 하려고 애쓰는 걸 보면 맞는 것도 같다. 집앞 슈퍼에도 씻고 옷 갖춰입고 가는 건 또 어떻고. 꼭 그런 날 몇 년 안 보던 친구나 이웃 사람 만나는 법이니까. 지식욕이 강하고 생각이 많고 유능하지만 성욕을 감추는 순수기질에다 뮤즈와 완벽주의 성향.. 나는 그리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영감은 나한테 더 필요하지 남한테 그 좋은 걸 왜 주냐고. 더해서 자부심이나 자긍심 꼭대기에 닿기 전에 여기서 끝낸다. 항상 그랬지만 더우니 쓰는 것보다 읽는 거, 읽는 것보다 데굴데굴 누워서 보는 게 더 편하다. 요즘은 장나라와 장혁, 한그루와 연우진, 우에노 주리, 기무라 타쿠야, 에이타와 나가사와 마사미, 오구리 슌 나오는 드라마랑 <MOZU>.. 그것만 보면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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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7-26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세월호 참사를 다룬 신간인 줄 착각했어요. 이달 초에 베를린에 갔을 때 '홀로코스트 추도비'를 직접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했을 때 베를린에만 무려 16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보르헤스의 문학은 아이리시스 님한테도 어려운가 보네요. 저는 철학자들의 책 가운데 쇼펜하우어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고 자만할 정도인데, 어느날 밤 늦게 라디오를 듣다가 '보르헤스와 쇼펜하우어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나중에 꼭 '보르헤스'를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마구 솟구치더군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보르헤스의 책은 단 한 권도 펼쳐보지 못하고 있네요. 어려우면 도대체 얼마나 어려울까 싶어서라도 언젠가는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도 드네요... ㅎㅎ

* * *

······ 나는 스위스에서 머물던 시절 쇼펜하우어를 읽기 시작했다. 만일 나에게 한 명의 철학자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그를 택할 것이다. 만일 우주의 수수께끼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면 나는 그 언어가 그의 책 속에 쓰여져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의 책을 독일어로 읽었고 나중에 스페인어로 번역된 것도 읽고 또 읽었다. ······

아이리시스 2014-07-28 18:56   좋아요 0 | URL
oren님 안녕하세요.

제목과 시점이 딱 맞아떨어져 오해할 만 해요. 댓글 읽고 서재 놀러갔는데 사진 보니까 이 세상 같지 않고 좋네요. 독일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3년 전부터는 독일에 가보고 싶어요. 프랑스는 파리 빼고 다 좋다는 얘기를 오랫동안 살던 지인에게 많이 들었는데, 저는 그래도 이탈리아를 좋아하거든요. 그 거대한 유적의 도시가 이 세상 같지가 않아서요. 독일 일주하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oren님이 부러울 뿐이에요ㅠㅠ

보르헤스는 소설도 강연도 미로 같고 철학적 사유를 많이 요구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어렵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난해함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비유와 암시는 철학으로도 해결되는 게 아니라서. 아래 구절은 보르헤스가 스위스에서 쇼펜하우어를 읽고 단 한 명의 철학자로 선택하는 구절인가요? 쇼펜하우어를 다 읽고 자부심 느끼는 oren님이라면 보르헤스가 궁금해지기도 할 것 같네요. 그럼 저는 쇼펜하우어..ㅎㅎ

루쉰P 2014-07-27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워낙 좋아하는 프리모 레비의 작품이라 나오자 마자 샀어요. 근데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겠더라구요. 레비가 난해한 게 아니라 내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 할 지 말이에요. 음, 그러니까 인간은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고 또 자신이 당했던 기억을 망각하고 또 다시 그런 행동을 하고 있구나 하고 말이죠. 레비가 자살한 이유는 그런 인간에 대한 실망이었지 않나 싶기도 하구요.

근데 아이리시스님 너무 많이 읽으시는거 아녀요? ㅎ 밖은 폭염으로 불타고 있는 데, 아이리시스님의 서재는 독서열로 뜨거우네요. ㅎㅎㅎ

저도 한 달에 한 권은 읽을거에요. 그리고 쓸거에요. 뭔가 사람이 계속 도전을 해야죠!!!

아이리시스 2014-07-28 19:02   좋아요 0 | URL
의외로 잘 안 읽혀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저는 얇고 익숙한 사유라서 후딱 읽으려고 했는데 불가능하더라는 의미! 이스라엘이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 업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행하는 학살이요.. 현재 이스라엘의 주체는 당시 히틀러에게 당한 유대인의 민족이 아닌 다른 유대인이라는데 뭐가 맞을까요. 누구 알려주실 분ㅠㅠ 유엔사무총장 된 후로 가장 많이 반총장님께서 욕을 드시고 계시더라고요. 망각도 능력이라고 자주 생각하는데, 안 좋은 기억을 잊지 못하고 끌어안은 채 전전긍긍하며 힘든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답답해서요.

너무 많이라니.. 우리 모두 늘 읽는 정도죠.ㅎㅎㅎ 쓰긴 쓰고 있으신 겁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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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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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자신을 포지셔닝해보는 게 좋다. 결단력 있는 태도는 올바르지만 냉소적이면 공감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기 쉽고, 세상을 똑바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는 자에게는 철 없는 몽상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스타일이 아니라면 정치적 포지션은 어떤가. 헤겔이 인종분리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인격에 심한 결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자의 철학적 사유를 익히기 위해 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저작을 읽고 공부하나. 자신이 권력지향형이자 친미주의자였으므로 굳이 친일파를 처단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그래서 흉내만 내는 걸로 소임을 다해 끊임없이 프랑스의 드골과 비교되는 이승만과 일본 왕에게 폭탄을 던지려다 실패하고 체포된 이후 사체조차 찾지 못한 걸로 알려진 의인 이봉창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이승만이 미국 유학 5년 만에 학석박사를 전부 딴 천재적 두뇌의 소유자였고, 이봉창이 보잘 것 없는 집에서 태어난 가난한 노동자였다는 걸로 그 거리를 짐작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은 대통령으로 초호화 생활을 했고 또 한 사람은 국가의 독립을 위해 비참한 삶을 감수하면서까지 희생했다는 사실로는? 

 

정치는 말이 쉽다. 비유도 대체도 대비도 쉽다. 지나간 생은 하나의 결과로만 남겨지고 죽은 자는 더이상 말이 없기에 우리 삶과는 조금 동떨어진다. 히틀러에게 동조한 철학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히틀러의 동조자와 관조자라는 대결구도. 독재자의 매커니즘은 늘 같다. 어째서 본인을 내려놓고 타인을 아끼고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가난하고 불행한가. 히틀러를 중심으로 도는 세상 혹은 시대를 기술記述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떤 면을 훑어도 무궁무진한 자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의 히틀러가 실시간 등장하지 않는 한 그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카테고리에서 별종이든 괴물이든 영웅이든 어쨌든 악명 높은 대상일 것이다. 시간의 축이 명확하다는 점과 히틀러가 접할 수 있었던 모든 철학사상가의 책과 사유를 대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히틀러의 철학자들>은 잘못 읽기 쉬운 책이다. 수십 명의 철학자를 빵쪼가리처럼 맥락없이 툭툭 던지는데다 그들의 철학적 사유가 어떻게 히틀러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는지까지 나아가기 때문에 철학자 혹은 시대적 배경에 대한 기본지식이 요구된다. 내용을 독해하며 읽어야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웬만한 호기심으로 인내하지 못하면 길을 잃기 쉬운 책이라고 읽는 내내 생각했다. 긴 시간 들여 이 얘기 저 얘기 다 들어보지만 결론은 뻔한데, 그 결론이 나오나마나한 상황이라면.

 

삶의 지향점이라는 단서로 우리는 몇몇 철학자들의 정치성향과 가치관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와 별개로 또 상당 부분은 우리가 당시를 살지 않았기 때문에 짐작이나 상상으로만 채우려는 선입견이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지식인들은 왜 각자 다른 길을 걷는가 혹은 글(철학)은 역사의 맥락 속에서 얼마만큼 왜곡될 수 있나에 대한 해답이다. 첫 번째 해답은 지식인이든 철학자든 '사람'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 해답은 '늘(always)'이다. 누군가의 말 한 마디, 글 한 줄을 앞뒤 정황도 맥락도 없이 떼어내서 자의로 해석하는 일에 대한 위험성. 철학자와 그들이 남긴 저작(사유, 의견, 목소리), 저작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으면 좋았겠지만 막상 철학이론 계보를 줄줄 읊을 정도로 이론지식이 꽉 들어찬 사람이 굳이 이 책을 집어들 것 같지도 않다. 이 공간에서도 나는 의도치 않게 어느 글이 타인에 의해 오해를 낳고 비난을 받고 의도적으로 이용되는 광경을 많이 봤다. 불특정 다수라는 익명에 숨어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횡행하는 편 먹기, 의도의 왜곡, 의미의 교묘한 짜깁기, 언뜻 논리적인 듯 보이기도 하는 의견다툼을 넘어선 감정싸움, 도 넘은 비난까지. 거기 동조하고 있는 나도 참 싫었다.

 

철학자의 삶이 내가 느끼는 소설가의 삶을 향한 거리만큼 가깝다면 어느 철학자가 어떤 식으로 이용됐는지, 동조하거나 저항하는지 가능한 한 주목하며 읽는 게 좋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이야기 읽듯 한 편의 에세이처럼 읽어나가야 막히지 않는다. 저자가 그렇게 썼다고 밝히기도 했고 대화체와 인용이 등장하니 약간의 어려움이 와도 그냥 돌파하는 게 무난해 보인다. 나는 당연히 철학자를 다 몰라서 슬픈 편에 속하는 독자였다. 손택의 글을 좋아해서 문학비평 역시 무척 좋아하지만 그녀가 다루는 작품 일부는 읽을 수 없거나 번역되지 않은 작품으로(그게 그거다) 이루어졌다는 걸 감수해야할 때의 막막함과 아쉬움처럼 히틀러라는 게임판 위에 슈미트, 하이데거, 니체, 헤겔, 벤야민, 아도르노, 아렌트, 후버, 바그너, 스피노자, 해켈, 슈펭글러, 칸트, 레싱, 실러를 잘못 혹은 다르게 배치했다면 순전히 내 오류다. 지식인으로서 저버린 양심과 영혼, 박해와 망명을 감수하면서도 지키려 했던 양심. 두 가지 양심은 얼마나 다른 동시에 또 같기도 했을까. 우리 역시 독립운동사에서 완전한 흑백논리를 적용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와 '그러려는 의지가 명백한' 이를 똑같이 취급한다. 아마 홀로코스트 논리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게 바람직한 걸까, 그래도 될까. 인류 평생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히틀러는 동시대,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죄 없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저서에서 유리한 부분만을 따오고, 뜻이 전혀 통하지 않는(그런 의미가 아닌) 부분조차 억지로 유리하게 변형하거나 비틀어 통치를 뒷받침하는 정당한 근거로 만들었지만 그가 '총'이 아닌 '머리'로 세계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냐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자살과 타살을 불문하고 독재 정권 아래 시인과 소설가들이 입은 피해를 더해보면 이 상황이 오로지 동시대 철학자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스페인 시인 로르카, 인도 출신의 영국 소설가 살만 루시디의 삶이 정치와 얽혀 어떻게 흘러갔는지만 보더라도. 열등한 혈통이 통용되면 자기가 다스리는 세상이 하급의 인종으로 가득 찰까봐 시작한 유대인 청소는 결국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똑같이 이용되고 있다. 이를 두고 이스라엘이 말하는 방식을 보면 주로 '먹히기보다는 먼저 먹는 게 낫다'는 뜻인 것 같다. 이래서 역사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고 하는 걸까. 선조대에는 당하기만 했으나 이제는 조금 되갚을 수 있게 된 이스라엘 민족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세상이 늘 변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놀랍게도 많은 부문에서 논리와 역사는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 나치에 저항한 이들의 거룩한 삶을 여기서 굳이 더 말로 해야 할까. 그들이 독일에서는 독일 사람이 아니고 프랑스에서도 프랑스 사람이 아닌, 영원한 이방인이었다는 걸. 후버, 아도르노, 아렌트, 벤야민은 할 말을 한 덕분에 영원한 망명과 난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박해나 처형은 빈번했고 자연스러웠으며 당연했다. 어쨌거나 독일 철학 혹은 히틀러가 서로 상대방에게 빚을 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논리는 오늘날 더이상 회자될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저명한(절친한) 지식인들이 눈앞에서 나를 배신하고 돌아설 때, 나를 처형하고 유대인의 학살을 승인하는 지시를 내릴 때, 그게 다 나치라는 잔학과 야망과 폭력으로 얼룩진 정권을 타당화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이 다시는 이쪽으로 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혹은 자신이 저들 반대편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들의 절박한 시도와 숨가쁜 저항과 절절한 희생이 지금처럼 숭고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어떤 윤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다. 이봉창, 윤봉길, 안창호 등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이 모두 가난하게 숨죽이며 평생을 살아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지금의 우리가 이 땅에 멀쩡히 사는 이유는 눈 감고 싶고 모르고 싶고 알면 죄의식에 휩싸이는 진실, 바로 그들의 희생 때문이다. 히틀러가 만든 세상에서 히틀러 아니면 죽음을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서 무엇을 보고 어떠한 방향으로 갈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내가 내릴 결정인데 마냥 그렇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세상은 더 발전하고 더 빨라지고 더 편리해졌다고들 하는데 모른 척하는 사이 선택의 폭은 십 년 전 이십 년 전과 비교해 하염없이 좁아지고 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보고 있으며 어떠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아서 생기는 게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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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린저 평전 - 영원한 청춘의 상징,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케니스 슬라웬스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1919-2010)의 공식 여인은 세 명이다. 결혼을 세 번 했다는 의미다. 비록 매체에 작품을 싣기 위한 과정은 험난하고 고달팠지만 일단 작품이 인정 받고 난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작품을 성공시키며 평탄했던 작가 생활에 비해 그의 사랑은 그다지 평온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샐린저가 릴케나 카프카처럼 유리감성이나 신경쇠약이 동반된 우울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이 평전에서 본 경우지만, 전쟁 중 군인으로 뽑히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죽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곳에서 살아돌아온 샐린저의 대담함과 담담한 회고가 샐린저가 생각보다 훨씬 고집스럽고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책에는 샐린저가 1980년대 말 결혼한 콜린 오닐이 언급되지 않는다. 이미 언론을 극도로 기피하게 된 그가 세 번째 부인과의 결혼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으며, 사생활을 꽁꽁 숨겨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첫사랑은 <밤으로의 긴 여로>, <느릅 나무 아래 욕망> 등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이자 코미디 천재, 마임 예술가 등의 별칭이 따라붙는 배우 우나 오닐이었다. 교제중이던 우나는 할리우드로 막 진출해 서른 여섯 살 연상인 채플린의 네 번째 부인이 되며 샐린저에게 큰 배신의 상처를 입힌다. 채플린과 우나의 사랑 역시 평생 견고한 콘크리트 사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첫 번째 부인은 2차 대전에 참전해 온갖 고난을 겪고 살아난 직후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몰래 결혼한 실비아 벨터, 두 번째 부인은 아직 사교생활에 한창이었을 때 파티에서 만난 심리학 전공의 클레어 더글러스, 세 번째 부인은 일흔이 되어갈 무렵 만난 마흔 살 연하의 콜린 오닐이다. 실비아는 첫눈에 사랑을 느낀 타입이라 맞지도 않고 맞을 수도 없는 상대임을 자각 못했고, 클레어 역시 샐린저처럼 우울한 내면을 가진 여인으로 서로를 거울처럼 비췄기 때문인지 초기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각자 외롭고 고독한 결혼생활을 한다. 2010년 샐린저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킨 아내는 콜린 여사로 보이지만 앞서 말했듯 언급되지 않는다.

 

창작자일수록 필연적으로든 우연적으로든 작품과 본인(사생활)을 분리할 수밖에 없다. 많은 예술가들이 창작물과 사생활 사이에서 방황하지만 은둔과 단절로 점철된 샐린저의 삶은 더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미국에는 트루먼 커포티, 존 업다이크, 실비아 플라스, 나보코프, 헤밍웨이 등이 활동하고 있었고, 비트 제너레이션 세대를 대표하는 잭 케루악과 윌리엄 버로스도 빠질 수 없다. 이들과는 대개 한때 무난한 관계를 맺는다. 명성에 비해 작품수가 많지 않은 샐린저지만 유독 사건사고가 빈번했으며 주로 미국문학사에 유일무이한 캐릭터로 우뚝 선 홀든 콜필드를 낳은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으로부터 나온다. 1980년 존 레논의 아파트에 침입한 25세의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살인 당시 품에 지니고 있었고 체포 직전 계단에 앉아 태연히 읽으며 "모든 사람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야 한다"고 밝혀 충격을 주었다. 다음 해 푹 빠져있던 배우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해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에게 총을 쏜 존 힌클리가 머물렀던 호텔에서도 이 책이 발견되었으며, 영화 [컨스피러시]에는 서점 갈 때마다 이 책을 사와서 꽂아두는 약물 중독 남자 주인공(멜 깁슨)이 등장한다.

 

 J.D. 샐린저의 삶을 살피려면(정확히는 판단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의 삶을 둘러싼 복잡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용감한 군인과 실패한 남편, 창조적인 열정으로 가득 찬 작가에서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은둔을 택한 남자까지, 모두 한 인물 안에 들어 있다.
 인간의 본성에는 스스로 세운 우상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을 그의 실제 미덕보다 더 높이 극찬하다가도, 돌연 상대에게 부여한 높은 가치가 탐탁지 않은 듯, 다시 그를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스스로 만든 우상을 파괴하려는 충동이 분명 우리 안에 있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무언가를 우러러보고 싶다는 욕망 또한 존재한다.

 적어도 어느 한 시기 동안, 샐린저는 자신이 미국의 야만적인 환경에서 부조리를 울부짖는 예언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 샐린저는 짧게나마 그가 고발한 것들 덕분에 기억되고, 그런 성찰을 계속 밀고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도 받는다. 마치 그는 세상에 내어 준 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빚지고 있는 것만 같다. 어쨌든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재현의 순간들처럼 J.D. 샐린저가 작가로서 자신의 의무를 완수했다고, 심지어 예언자로서의 소명도 이미 예전에 이룩했다고 밝혀질지도 모르겠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상, 무언가를 해야 하는 책임은 우리의 몫이다. 그렇게 샐린저의 이야기는 작가로부터 출발해 독자를 거쳐 완성되는 과정을 되풀이할 것이다. 우리는 J.D 샐린저의 삶에 담긴 슬픔과 불완전함, 그가 작품을 통해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모두 살펴봄으로써 자신의 인생, 자신이 맺은 인간관계, 자신이 지닌 진실의 무게를 다시 검토하게 될 것이다. (pp.574-575)

 

샐린저는 말년에 언론으로부터 깊숙이 자신을 숨기고 보호한 이유로 흔히 괴팍한 은둔형 작가로 통하지만, 젊은 시절 그는 혼란한 시대와 부조리한 상황을 스스로 개선해나가려 부딪치는 행동파에 가까웠다. 전쟁이 발발하자 전장에 나가기 위해 군인에 자원하고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며, 떨어지고 나서 속상해한다. 전우들의 비극을 대할 때도 회피보다는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는 용기와 살아있음에 감사로 응대할 만큼 실질적인 모습이었다. 작가로서 완전한 성공궤도에 오르기 전에도 끊임없이 매체에 작품을 보내고 또 보낸다. 서서히 주목 받았고 대부분의 작품이 성공했으며, <호밀밭의 파수꾼>을 빼놓고는 미국 문학사를 논할 수 없다. 홀든 콜필드는 그 탄생부터 지금까지 미국 문학사에서 전무후무한 방랑아 혹은 자유로운 청춘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다. 샐린저가 은둔형 작가라고는 하지만 기질이나 성격이 괴팍하다거나 혼자 있는 걸 즐기거나 사회성 부족 문제는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자발적으로 세상과의 단절을 택함으로써 본인과 작품을 보호한다. 예술가와 작품을 분리하지 않는 세속(언론)에 대한 회피, 유명세 끝에 찢어발겨지고 훼손될 가능성이 높은 작품들을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

 

급작스런 성공이라기에는 억울할 만치 매체의 문을 두드리는 기고의 시간이 길었지만 완벽한 성공은 늘 시기와 질타, 칭찬과 비아냥을 동시에 받는다. 그의 은둔을 두고 한때는 습관적으로 10대 소녀를 탐한다거나 콩만 먹고 산다는 등의 소문이 돌기도 했다. 아름다움과 천박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샐린저의 이미지는 거의 성공과 동시에 자신의 몸과 사생활을 숨겨버린 데서 유래된 것들이다. 작품수가 많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성공하면서, 홀든 콜필드 신드롬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청소년 금서로 지정되게 한다. 또 성공 후 속출하는 아류작들이 홀든을 고정된 인물로 두고자 하는 샐린저에게 커다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영화화, 연극화 등 텍스트의 2차 사용을 일절 불허한 그는 1980년 이렇게 말한다. "이제 홀든 콜필드는 없습니다. 홀든 콜필드는 그대로 고정된 한순간일 뿐입니다." 하나를 허용하면 다른 작품도 줄줄이 허용해야 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샐린저가 우울한 기질의 내면을 보유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괴팍해서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을 택했다는 가정은 틀렸다. 아마 "세상에 있지만 거기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의 의도 역시도 거기 있다고 여겨진다. 2008년 일찌감치 서른 아홉 편의 작품을 제 이름을 딴 문학 재단을 설립하여 모든 저작권 사용을 일임했다는 것은 사후에도 작품이 생전처럼 지켜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평전은 위인전이 아니고 일대기를 순서대로 서술하지 않는다. <아홉 편의 이야기>, <프래니와 주이> 등의 작품집에 실린 [웃는 남자],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등의 대표작이 어떻게 세상에 나와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지를 읽고 싶다면 이 평전이 도움이 되겠지만 장편소설 보다 단편소설을 여럿 남긴 작가이다보니 한 편 한 편에 작가가 가진 만큼의 의미를 두고 읽기가 쉽지 않다. 다만 그가 끊임없이 작품을 썼고 그로 인해 가족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정도였다는 것과 기고를 거절당할 때도 절망하지 않고 늘 처음처럼 닫힌 문을 두드렸다는 의지만은 높이 사야할 것 같다. 인용한 글처럼, 한 인물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거나 하나의 단어 혹은 문장으로 설명하려할 때 대부분 실패한다. 한 인간은 하나의 세계는 아니고, 보이는 각도에 따라 그 이상 혹은 그 정도밖에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전은 그중 하나의 각도에서라도 잘 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삶은 세상에서 제일 단순하고 단조롭고 간단하다. 작가는 글을 썼고 인물과 세계를 창조했으며 그것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다. 2010년 1월 27일 샐린저가 사망했을 때 그의 모든 책이 미국 전역에서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극적이거나 영화롭지도, 대단하거나 유일하지도 않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는 일 역시 그러했음을, 살아간다는 게 결국 채우고 비우고 궁금해하고 얻는 과정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누군가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일은 큰 용기와 인내를 요한다. 어떤 작가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 영원히 죽은 채 단 한 순간도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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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7-1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샐린저는 참으로 대단했던 거 같아요. 사람은 항상 인정투쟁을 하잖아요. 세상에 나란 존재의 증명을 하고 싶어하고, 그것을 인정 받을 때 즐거워 하고 말이죠. 그런데 샐린저는 그런 것에 거리를 두고 자신을 철저하게 보호다다니 말이죠. 그러니 더욱 언론이나 독자들이 더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하고 하는 것 같아요.
글을 쓰면서 고독하게 지내면 꽤나 피곤할 텐데 그걸 평생 지켜간 샐린저는 참으로 대단하네요.
하지만 부인을 그렇게나 많이 바꾸며 사는 건 별로 ㅋ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ㅋ
'어떤 작가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 영원히 죽은 채 단 한 순간도 죽지 않는다.' 흠 이 문장 좋아요. ㅋ

아이리시스 2014-07-11 12:57   좋아요 0 | URL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점이 몇 가지 있지만, 홀든을 주인공으로 하는 아류작들이 여기저기서 막 나오기 시작해요. 보통은 인기의 척도로 여기며 넘어갈텐데 정도가 심해지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저는 샐린저가 특히 고독하거나 독선가 혹은 신비주의자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작가인 것 말고는 다른 삶을 지향하지 않는, 심지어 (글을 왜 쓰는지도 모르겠는) 그냥 평범한 작가였는데 세상이 시끄러워지고 삶이 피곤해지니 그런 길을 택한 게 아닐까요. 작가가 그 정도라면 배우로는 어떻게 살았을지..참.. 샐린저 최초의 꿈이 극작가 아니면 극배우였어요. (저 왜 이렇게 진지 모드..)

왜요, 좀 바꿔보세요, 부인(흙흙). 히히히

결혼생활이 크게 언급되는 건 아니라서 샐린저에게 여자, 사랑 혹은 아내란 어떤 의미였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고보면 이 책은 평전이지만 인물보다는 거의 다 작품 탄생 배경, 그 즈음, 작품 자체에 대해 쓰고 있어요. 샐린저를 안 좋아했으면 진짜 지겨웠겠다는 생각은 많이 했어요 :)

루쉰님, 어디서 뭘하든 더운데 오늘도 잘 보내시길요!

루쉰P 2014-07-12 14:28   좋아요 0 | URL
홀든이 매력적이잖아요. 어느 세상이나 완전한 세상이 없으니 홀든과 같은 사람은 항상 존재하죠. 샐린져에 의해 홀든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하나의 생명을 그와 비슷한 류파를 많이 만들거라 생각이 들어요.
아무래도 주변에서 너무 신비주의 작가로 몰아서 그렇지 어찌보면 샐린저는 그냥 귀찮을 수도 있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ㅋㅋㅋ 굳이 뭐 말할 것도 없는 데 왜 들 그러나 하면서 피했을 수도 ㅋㅋ
샐리져가 워낙 숨어서 말을 안 하니 사람들은 그의 책을 더 사서 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왠만한 작가들은 인터뷰도 하고 작품에 대해서도 말을 하니 다들 그런 설명을 듣고 내심 만족하는 데 샐린져는 말을 안 하니 도대체 저 사람은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하는 원초적 물음에 휩싸여 ㅋ 책을 더 사본 건 아닌지 ㅋ
저 말 샐린져가 그걸 노리고 은둔했다면 그는 천재에요. ㅎㅎㅎ

전 2년 간의 비정규직 생활을 5월에 청산하고 2년간 알뜰하게 모은 돈으로 1년만 노무사 공부할려고 모든 것을 접고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일주일 내내 도서관에 있어요. 후후후
여긴 대학 도서관이라 대학생처럼 입고 다녀요. 티에 다가 청바지, 얼굴은 비록 늙었지만 마음만은 20대라 대학생들 무리에 섞여 학생회관 가서 밥 먹고 마치 학생들처럼 생활하고 있어요.

이른 아침에 전철을 타고 와서 저녁에 나가면 해가 지고 그 생활의 반복이에요. 어두운 동굴에 들어와 혹독한 자기 수련을 하고 있다고 할까요?
여긴 근데 엄청 시원해요. 24시간 운영 도서관이라 냉방도 빵빵해요. 집 보다 더 시원한 걸요 ㅎ
시험에 대한 1년의 도전이라 학원도 저녁에 다니고 정신 없이 하고 있는 데, 무엇보다 하루 종일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답답할 때가 있어요 푸하

하루 종일 말 걸 사람도, 말 할 사람도 없거들랑요. 고독 속에서 책을 넘기고, 또 넘겨요. 이제 시작이거든요. 앞으로 1년이에요. ㅎ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는 데 전 이번 아님 기회가 없을 듯 싶어서요. 35년 간 하고 싶었던 공부를 원 없이 해 볼라구요 ㅋㅋㅋ

전 여기서 공부하다가 인생의 비밀을 깨달을 수도 있어요 푸하
아이리시스님도 어디서 뭘하든 더위는 피하셔야 해요! ㅋ
전 너무나 잘 피하고 있습니다. 푸하하하하하

아이리시스 2014-07-13 03:02   좋아요 0 | URL
그렇구나. 옛날에 한번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긴 해요. 그때 아자아자했던 기억이. 노무사 준비하던 친구가 있었는데(지금은 공무원) 법대라 1차는 붙었고, 2차가 어렵잖아요, 제가 많이 아쉬워했는데 몸이 안 좋아서 오래 공부를 못 하겠다며 안 하더라고요. 제가 처음 일하던 곳도 노무사 사무실이었는데, 제 업무는 그게 아니라 근로복지공단 산하기관이었지만요. 졸업 막 하고난 다음이라 노동쪽으론 어려서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상담해주는 거 보면서 신기했던 기억이 나요. 친분있던 분이라 일을 배울 기회가 있긴 했는데 저는 2차 서술시험을 도저히 엄두를 못 내겠더라고요. 루쉰님은 꼭 하셔야 돼요!! 꼭 할 거예요!!

도서관 요즘 시원하죠. 우리집이 대학 캠퍼스랑 걸어서 3분 거리에 있어요. 중앙도서관 열람실 하나가 24시간인데 여름엔 거의 춥죠. 대학재학때만 애용했는데. 자격증이나 토익 공부할때요ㅎㅎ 거긴 아직 24시간 하는 것 같아요. 뒷산 가려면 지나서 가야하고 가끔 운동코스로 학교 운동장에 가거든요(온동네 아줌마들 모임). 거기가 대학때까지는 동네 친구들이랑 함께하는 아지트였는데(어느새 추억에 젖음). 저는 우리집에서 왕복 세 시간 걸리는 학교를 다녔거든요. 바로 위에 국립대가 있는데ㅎㅎ 오랜만에 도서관 추억에 대해 젖어봤네요.

혼자가 제일 좋아요, 공부할 때는. 밥 먹을 때 쓸쓸하지만 울지는 말고요. 어차피 인생은 혼자ㅎㅎ 우리가 가까운 데 살았으면 저녁에 맛난 거 사들고 갈텐데, 저녁에는 학원에 간다면서요+_+ 에잇, 아쉽다, 지난 주엔가 서울 갔었는데 루쉰님은 서울 아니라 경기도였죠?( '')( '')

열심히 해서 원하는 거 이룬 다음에 꼭 자랑해요!! ^_____________^


2014-07-13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13 0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4-07-18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역시 아이리시스님은 저랑 뭔가 통하는 게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노무사란 일을 잘 아시는군요. 2차까지 얘기하시다니 ㅋ 전문가세요 ㅎㅎㅎ
네, 그럴려구요. 기를 쓰고 할려구요. 후후후
여기도 뒷산이 있는 데 동네 시민들은 모두 오시는 거 같아요. 혼자 도시락 먹을 때 여기 뒷산 쪽에 약간 음침한 곳이 있어 혼자서 밥을 먹거든요.
집에서 세 시간 거리라니 집념의 통학이셨네요. ㅎ

맞어요. 혼자가 제일 좋아요. 공부할 때는 최고죠. ㅋ 밥 먹을 땐 쓸쓸하지는 않는 데 약간 민망하다고 할까요? 혼자 밥 먹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게 싫어요. 왠지 소심하다고 할까요? 그것만 없으면 혼자 열심히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지난 주에 서울 오시다니 ㅋ 저 경기도에요. ㅋㅋ 아깝다...맛난 거 먹으면 좋은데...하지만 그 마음 이해해요. ㅋ

열심히 해서 원하는 거 이루면 아이리시스님이 일 하시는 가 못 받으신 돈 있으심 반드시 받아 드릴께요. 소중한 돈 지켜 드리겠습니다. ㅎ

아이리시스 2014-07-18 22:11   좋아요 0 | URL
노무법인 사무실에서 일한 것 때문에ㅎㅎ 2차에서 합격자수 제한이 있나요? 1차는 절대평가고. 저는 그 정도만 알아요, 과목도 몰라요. 그래도 음침한 곳 말고 당당하게 먹기..가 쉽지가 않죠ㅠㅠ 거긴 대학도서관인데 파릇한 애들 천진데ㅠㅠ 그 마음 어쩐지 알 것 같아요. 저도 뭔가 공부할까 생각한 거 있는데 일단 돈이 들고.. 계속 생각만 하고 있어요. 조만간 하고 싶어요. 그동안 너무 논 것 같아요. 요즘 도서관에서 제가 신청한 책을 일주일마다 꼬박꼬박 사주고 있는데 읽기는커녕 그걸 빌려오는 것도 일이예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집에서 세 시간 거리 아니고(그러면 부산 벗어날 것 같아요-) 왕복 세 시간...( '')
제가 돈 떼일 사람도 아닐 것 같지만 루쉰님이 받아준다니 떼여도 될 것 같네요. 막 떼여도 되..될..까요? :)

루쉰P 2014-07-23 10:28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전 예전에 노무법인 사무실 면접 봤다가 떨어졌어요. 부끄러워요. ㅋ 2차는 합격수가 250명으로 제한이 돼요. 1차 합격생이 3천명 정도 되는 데 거기서 250명이죠. 푸하!!

혼자 먹는 거 이제는 단련이 되어 괜찮아요. 내 배가 고픈 게 먼저지. 얘들 눈치 볼 수가 없더라구요. 대학교 공원이고 어디건 벤치에 앉아 혼자 먹어요. 노숙자로 오해 받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냥 먹어요. ㅎ 그리고 먹으며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봐요. 저랑 눈이 마주치면 흠칫하고 사람들이 놀라요. 역시 인생은 당당해야 해요.

공부하고 싶으신 게 있으신거에요? ^^ 흠...장기적 계획으로 돈을 비축하셔서 꼭 하셨으면 해요. 돈이 없으면 공부가 참 힘들어요. 일 할 때는 몰랐는 데 100원도 참 소중해서, 커피 한잔 사먹는 것도 꺼리게 되요. ㅋ

하기사 집에서 3시간 거리면 부산 벗어나죠. ㅋㅋ 왕복 세 시간이라 우왕!!!

아이리시스님은 돈은 안 떼이실 거에요. ㅋ 노무사되면 아이리시스님의 친구들이라도 소중한 돈 지켜드릴께요. ㅋ 100원이라도 지켜 드립니다.

여기는 비가 엄청 오네요. ㅎ 경기 북부라 그런지. 전 아침부터 와서 공부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들어와서 댓글 남겨요. ㅋ 8시에 왔어요. 8시 ㅋ 일할 때보다 더 일찍오고 있어요. 스스로 대견해요. 하루 13시간 정도 있다가 가는 데 동영상만 들으면 졸아요. 무슨 마법에 걸린 거 같아요. 나도 모르게 스르륵 침을 흘리고 자다가 깨어요. 무척 흉해요.

그래도 침 닦고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해요. 책상에 조는 게 어디냐구요. 저 너무 낙관적인 거 같아요. 아 35년 평생이 낙관적이에요 ㅋ

암튼 아이리시스님도 인생 재미지게 사시는 거에요. 같이 뭔진 모르지만 하고 싶은 거 하고 사시자구요. 장마 조심하셔요 ㅋ

아이리시스 2014-07-25 01:13   좋아요 0 | URL
요즘은 뭘하든 다 경쟁률이 쎄요. 편의점 알바를 뽑아도 몇 명을 제껴야 되는 세상이잖아요. 면접 보고 떨어지는 건 뭐 창피거리도 아니예요. 특출난 자리 특출난 사람이 아닌 한 붙는 수보다 떨어지는 수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렇구나, 합격자수 제한이 있어야 진정한 시험..( '') 밥도 잠도 여름도 다 이겨내시길. 뭘하든 너무 덥고 너무 가혹한 계절이에요. 심지어 독서도. 그래도 루쉰님 자주 보니까 그거 하나는 좋네요. 달밤 체조를 좀 하고 왔더니 더워서 미치겠어요. 몸보신도 하고 삼계탕도 드시고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커피도 한 잔 하고 재미나게 신나게 공부해요. 만약 체력강화, 두 시간 자고도 멀쩡한 법 이런 거 터득하게 되면 꼭 알려주시고요!

네, 저도 아마.. 꿈이 있으니 하게 될 거예요^^

루쉰P 2014-07-27 17:43   좋아요 0 | URL
전 밤 9시 정도 도서관을 나와 대학교 캠퍼스를 밤귀신 처럼 1시간 정도 걸어요. 스스로의 내면 세계를 탐구하며 말이죠. 푸하
근데 사람은 잠을 자야 해요. 두 시간 자고 버티는 건 불가능해요. 제가 나폴레옹 수면법이라고 3시간 자는 방법이 있다고 해 봤거든요. 첫 날은 뭐 밤을 안 자고 두번째 날 조절해서 자야 하고 그런 거 였는 데.
토할 뻔 했어요. 아예 밤을 못 새더라구요. 귀신 볼 뻔 했어요.

아이리시스님 지금도 좋아요. 책을 읽고 쓰시고 ㅋㅋ 공부란 언제가 혜성처럼 다가와 하실 때가 있을 거에요. ㅎ 그전에 시집을 가실 수도 있고요. ㅎ

저도 자주 뵈니 좋네요. ㅎ 동영상 강의를 보니 항상 노트북을 끼고 살아요. 하지만 서재에 너무 자주 들어오면 공부 안한다고 걱정하실까봐 나름 조절 하면서 들어와요.

왜? 동영상 강의를 들으면 1시간도 버티기 힘든 데 서재는 와서 글 보다 있으면 2시간도 그냥 지나가는지..이것은 뭐 아이리시스님의 글이 좋기도 하지만, 전 뭐랄까 쉬는 데 아주 독특한 능력이 있는 걸 수도 있고요.

일요일에도 도서관은 꽉 차 있어요. 아~~이 청춘들이여. 옆에서 입 벌리고 자는 남학생이 참 짠하네요. 몇 시간 전에는 제가 그러고 있었거든요. 음하하하하

암튼 공부 열심히 할께요 ㅋㅋㅋ 아이리시스님 돈 지켜드려야죠. ㅋ

아이리시스 2014-07-28 19:09   좋아요 0 | URL
음, 나이를 계속 먹고 있어요.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흐르면 좋겠는데, 좀 더 놀다가 시집가게요( '').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나이만 차면 당연히 가야 하고 가서 또 뭘 해야 하고 해야 하고 안 하면 이상한 취급 당하고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잠 엄청 자거든요. 저는 고3때도 다음날을 위해 12시에 꼭 자는 그런 애였어요. 잠 못 자면 내일 어떨 거란 걸 뻔히 아는데 그게 정말 괴롭고 싫었거든요. 그래서 3시간만 자고도 멀쩡한 법 그런 게 있으면 꼭 실천하고 싶은데, 루쉰님, 불가능한 거 확실해요?

저는 동영상 강의 되게 좋아하는데.하하. 시간을 제가 사용할 수 있는 게 좋아요. 그래서 집중이 중요한데 저는 다행히 집중력은 좀 있는 편이라.. 아무것도 없는데 집중력만 그런 이유가 제가 움직이는 거 싫어해서 한번 앉으면 잘 안 일어나거든요.푸하하. 이거 좋은 건지 어떤 건지..( '')
 
[다산 정약용 평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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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정조와 다산의 관계에 대한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연암과 다산의 라이벌 평전 <두 개의 별 두개의 지도>는 정조와 직접적 관련이 없지만 두 학자의 삶의 일부를 정조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었다. 내 지식이 무한하지 않다보니 이 리뷰가 좀 버겁다. 같은 얘기 반복하는 게 싫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나는 평균보다 더 잘 잊으므로 그때 배운 사실을 지금도 안다는 보장이 없다. 내가 이런 글을 썼었어, 화들짝 놀랄 때도 있다. 독서로 얻은 지식은 얼마든지 퇴보할 수 있다. 다산에 대한 기억 역시 일부는 겹치고 일부는 놓치고 일부는 새롭다. 다산 평전을 읽으며 알고 있는 다산을 확인했을 뿐, 그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된 건 거의 없다. 관리, 학자 모든 지위에서 성공한 조선 후기 최고 실학자라 일컬어지는 다산은 알려지지 않은 업적이 드물다.

 

아버지 역시 청렴한 분이고 천주교 박해가 대대적 정치탄압으로 번졌다는 사실과 다산의 가문이 풍비박산 났다는 진실을 알지만 다시 읽으니 새롭다. 기본적으로 운명에 순응하는 편이다. 그 반대라면 살아가는 게 너무 괴롭고 어렵고 힘들다.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태어난 시대와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 시대, 국가, 정권, 체제, 제도 등등. 개혁과 혁신을 부르짖는 삶을 산 자도 결국 당대의 흐름 안에서 움직이고 멈출 뿐, 뜻과 의지만으로 처한 상황을 완전히 격파할 수는 없다. 흘러가버린 역사의 소소한 사건에 '만약'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건 달콤한 반면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지만, 이런 상상의 확장조차 닫아버린다면 오늘날 흘러간 책을 읽고 옛 인물을 배우고 지난 역사를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많은 방향에서 생각해볼 만한 가치를 찾을 수 있지만 다만 이 한 가지 물음을 안고 리뷰를 써본다. 다산의 군주가 정조가 아니었다면. 다산의 세상이 고려 혹은 현대였다면. 정조가 다산보다 오래 살면서 군주의 자리에서 그를 돌봤다면. 평전으로서의 평점은 현저히 낮지만 평전이 아니라 다산이라서 고른 책이므로 업적에 주목할 수만 있다면 평전이 아니라도 상관 없다.

 

한 인간의 운명은 역시 자신의 뜻이나 의지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일인가. 다산 같은 불후의 대철인도 그것만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 시파와 벽파의 싸움에 늘 시달려야 했고, 서교,서설이라는 천주교 문제 때문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파였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한없이 애달파하던 정조의 지우知遇를 입어 승승장구 벼슬길이 트이기도 했지만, 숱한 고초를 겪지 않을 수도 없었다. 천주학으로 인해 서양 과학 사상까지 섭렵하여 사상의 폭이 넓어진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반대로 쓰라린 유배생활을 감내해야만 했다. 고난의 생활이 계속되어 불행하기도 했지만, 벼슬을 차단당하고 긴긴 세월 동안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어 위대한 업적을 이룩해 내기도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비태否泰다. 인생의 행과 불행, 한 인간의 운명, 화와 복, 즐거움과 괴로움은 물고 물리면서 순환하는데, 누가 작위적으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pp.83-84)

 

다산 연구소에 들어간 학자는 칠십 프로쯤 좋아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굉장히 일할 맛 나겠다. 지루할 틈이 없고, 한 분야만 깊게 팔 일도 드물고, 지루해지면 다른 쪽을 살짝 파도 되고, 정약용 지겨우면 정조나 그의 형제들을 뒤적여도 되고, 정 안되겠으면 역사 기행을 떠나면 된다. 단언하건대, 유배지 다산 초당을 비롯해 남한산성이나 수원 화성에서 하늘과 산을 등지고 한참 놀다오면 두말 없이 다시 일하고 싶어질 듯하다. 남한산성이 바로 얼마 전 한국의 열한 번째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다양한 시간(역사)을 껴안고 있으나 병자호란과 인조 탓에 늘 굴욕의 장소로만 떠오르는 곳인데 너무 멀지만 기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다산이 남긴 저서가 자그마치 500여권이고, 역사, 지리, 문학, 과학, 건축공학, 의학, 약학, 천문학, 음악까지 절대로 양립하지 못할 것 같은 분야를 넘나들며 백과전서적 경지에 이르렀으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후 이런 분 처음 본다. 하나라도 제대로 하지, 이것저것 손 대는 사람 치고 하나도 제대로 하는 거 못 본다는 비난을 들을 만도 한데 그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이유 중에는 많은 분야에서 그의 연구가 해박하고 정밀하며 전문성이 높고 치밀하다는 점도 포함된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함은 인지상정이다. 과거 합격 전부터 다산에 대한 정조의 총애는 지극했고, 다산 또한 능력껏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나타냈다.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다산의 이런 행운의 뒤에는 또 다른 악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산이 그런 정도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천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산은 책이라고는 보지 않은 책이 없었고, 제자백가의 책을 모조리 섭렵하며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 시절 이미 다산의 학문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체계와 방향이 잡혀 정조 같은 학자 군주로서는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다산을 향한 정치적 반대파들의 시기와 적의는 그때부터 싹텄다. (pp.136-137)

 

『경세유표經世遺表』는 관제, 토지제도, 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를 제시하고,『목민심서牧民心書』는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다.『흠흠신서欽欽新書』는 형법서,『마과회통麻科會通』은 마진(홍역)에 관한 의서이다. 또 분수分數와 소장逍長에 밝아 산수 같은 분야의 학문에 통달할 거라 했던 아버지 정재원의 판단대로 수리학에 뛰어나고 과학적 사고가 탁월해 기중기와 거중기 등의 기계를 제작하고, 수원의 화성과 한강의 배다리 등 공학적 기능이 높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다. 다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슬픔에 젖어 3년 상을 치르고 나서 33세의 나이로 암행어사 벼슬을 내려받는다. 임무 수행 중 경기 관찰사 서용보의 비행을 고발한 것이 발단이 되어 18년 간의 긴 유배생활이 계속 된다는 점에서 시작을 주목할 만하다. 보복 차원이었을까, 다산이 풀려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리자 자리에 있던 서용보가 가로막거나 저지했기 때문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초계문신에 발탁되어 국왕과 머리를 맞대고 국사를 의논하며, '공정과 청렴'으로 나라에 모든 정성을 바치기로 결의를 다진다. 다산은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던 정조 나이 열한 살 되던 해 태어나 1800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정조보다 36년을 더 산다. 두 사람이 함께 한 18년의 역사는 창조의 드라마였다. 온 마음을 다 바쳐 군주를 보좌하는 관리, 관료의 지혜와 능력을 인정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군주의 몰입과 시너지는 엄청났는데 곁에 있는 누구라도 시샘했을 만하다. 배교 혐의로 벼슬을 내려놓고 떠나야 했을 때 임금의 간절한 만류를 뿌리쳐야 할 정도로 끈끈한 연대를 유지한 그들이었다. 시작은 퇴계의 '이발'과 율곡의 '기발'이 학문상 논쟁을 넘어 노론과 남인의 당파 싸움으로 번지자, 남인의 신분으로 당당히 율곡의 견해에 동조하는 다산에게서 자신과 닮은 신념을 본 정조가 묘한 동질감을 느낀 데서부터다. 다산은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관료로서의 길과 자의반 타의반 학자로서의 길을 평행선처럼 걸어간다. 세상을 바로잡고 국가의 화합을 위해 애쓰지만 신유옥사로 핏빛 어린 종교 재판의 희생자가 되어 가문이 초토화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 사건은 겉으로는 서교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지만 실질은 권력 싸움의 패악상을 반영하며 진보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지식인들을 처단하는 구실로 이용된 사건이다.

 

이에 격분한 다산은 위에서 확인했던 대로 강렬한 상소로 임금을 설득하였다. 목민관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 들어 본 적이 없을 만큼의 큰 죄를 지은 사람을 임금의 측근이었다고 처벌하지 않는다면 '중민수법重民守法', 즉 백성을 중히 여기고 법을 지킨다는 통치 원리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따지면서, 다산이 일생 동안 추구했던 통치술의 대명제인 자신의 경세 철학으로 임금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pp.45-46)

 

서교와 서학의 분리를 가장하고, 형의 긍정을 부정하는 등 다산으로서는 구렁이 담 넘듯 흐르고 싶은 타협과 굴복의 순간이 분명 있었다. 정조 말엽부터 시파, 즉 남인 계열의 세력이 확연히 기울고, 체제공과 정조라는 옹호자들 때문에 근근이 버티던 신서파들에게 정조의 죽음은 사교도라는 비난을 더욱 강력하게 옭아매는 토대로 작용한다. 천주교는 조선의 유교 근본을 뒤집고 왕조 정치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조상의 제사조차 폐하려 하니 당대 전통으로 인정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 있었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의 끝은 흑산도와 강진이었고, 시대의 흐름에 답하지 못하는 조선 왕조 말기의 보수성은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모든 지위와 위치에서 구구절절 옳은 말과 행동을 하고 촌철살인의 비판 정신과 끊임없는 연구성과, 뛰어난 문학성을 보유한 점도 그렇지만 지독한 외유내강형 인물, 그는 자신을 컨트롤하는 힘이 엄청난 사람인 듯하다. 능력은 물론 이성과 감정까지도. 귀양살이의 아픔도 다산의 삶을 꺾지 못한다. 유배 시절 이룩한 높고 깊은 학문의 경지는 강고한 의지와 희망과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외로움, 쓸쓸함, 서러움에 빠져 고독과 어둠으로 침잠할 때도 많았지만 이는 고스란히 시와 문학을 창작하는 토대가 된다. 가장 낮은 곳에서도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그마저 훌륭한 업적으로 남았다. 

 

다산은 가르치고 읽고 연구하고 쓰면서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애국자가 된다. 다양한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와 시대를 감내한 저릿한 삶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몽땅 믿기도 어렵다. 정조 곁의 다산도 좋지만 학문과 사상을 정립시키며 제자를 가르치고 동시대 학자들과 치열한 토론을 주고 받던 후기의 다산이 더 좋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지만 그에게서 특별히 권력지향적인 야망이 보이지 않는 점이 돋보인다. 인간이 칠십 평생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던 인물이라 몇 가지 흠이 있어도 과감히 이해했을텐데 이 평전에는 정말이지 한 치의 허물이나 의혹도 없다. 천주교를 믿은 게 잘못은 아니고, 가족과 신념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걸 두고 그가 나빴다고 말하기 어렵다. 최근 현 정부 인사도 그랬다. 객관적으로 공적인 자리에 미달된 이력의 인물을 들고 나온 경향도 있지만 상대편에서 하나만 걸려라, 물고 뜯겠다, 하고 덤벼드는 게 능사는 아니고, 정권이 정권인 만큼 통과할 사람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애절과 절실을 넘어 바른 뜻으로 지어올린 하나의 삶을 보았고, 이제 황홀에 지친 나머지 그의 모든 업적과 그로인한 매혹의 체험을 완전히 덮는다. 나도 다산이 그립다. 아니, 이 시대에 다산 같은 사람이 많아지길 바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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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7-10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전 당첨되실 줄 알았다구요 ㅋ
영광의 당선에 제가 1등으로 댓글 달았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돼요 ㅋ
저에요. 저라구요! 제가 1등 축하 댓글 달았다구요. 흐흐흐

아이리시스 2014-07-11 12:35   좋아요 0 | URL
당첨.. 아.. 당선작? 저도요, 저도 될 줄 알았어요(푸핫) 제가 쓴 글이 이거 뿐이니까 히히히
무댓글 방지해주셔서 고마워요. 생각해보니 진짜 고마워요. 근데 이제 생각났는데 리뷰 한 편 더 써야되구나. 책 한 권 더 있구나..('' )( '' )( '')

만화애니비평 2014-11-28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다산 선생님은조선의 빛이요 영광이죠

아이리시스 2014-11-29 02:10   좋아요 0 | URL
네! 저는 다산 선생님을 정말 좋아해요. 퇴계와 율곡도 좋아요. 글을 많이 읽지 못해 이렇게 말하는 게 정말 어색하지만요.
 

 

 

 

서재에서 도서관 타령해봐야 별 수 없다. 여긴 책을 파는 곳이니 나는 별로 좋은 고객이 아닐 터. 이제야 책값 걱정을 한다. 주문하는 책 태반이 문학일 때는 정해진 금액에서 어떤 책을 택하는 게 가장 이상적일까만 고민하면 됐다. 관심사 아니 갖겠다는 욕망이 커질 때 상황은 더 열악해진다. 이러면 어떨까. 세상에서 가장 두껍고 어려운 책을 구입해(그래도 한글로는 쓰여있어야 함) 일 년 내내 읽는다면.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든가 단테의 <신곡>을 암기해보는 건 어떨지. 이래도 괜찮을까. 이언 매큐언과 슈테판 츠바이크, 요 네스뵈와 줌파 라히리, 산도르 마라이와 옌롄커와 오에 겐자부로, 줄리언 반스가 한 페이지에 등장하는 페이퍼. 지금까진 생각의 골이 얕을 때 페이퍼를 썼다. 이제 그냥 단상이 되어버렸지만. 비교적 같은 시기에 내가 '읽었다는' 사실 빼고는 만날 이유나 까닭이 하나도 없는 작가들. 김경주의 시로 표현하자면, 오늘은 몇천 년 전부터 살았던 작가가 내 마음을 멀리 데리고 날아갈 것이지만 쓸 책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쓴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하고 있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불가피하게 너를 사랑해서 내 뒤편엔 무시무시한 침묵이 놓일 테지만 너를 사랑해서 오늘은 불가피하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영혼에 처벌 받을지 모르지만 시체를 사랑해서 묻지 못하는 사제처럼 불가능한 영혼을 꿈꾼다 환영에 습격받은 자로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몇천 년 전부터 살았던 바람이 내 머리칼을 멀리 데리고 날아갈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김경주, 『몽상가』중에서

 

아빠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니고, 설령 맞다 해도 내가 아는 건 당연히 남들도 알고, 하물며 내가 모르는 것까지도 남들이 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0.1%를 제외하면 주어진 정보, 해결능력, 생각의 방향이나 가치 등이 큰 범주내에서는 대체로 일치하는 법이니 상황의 난이에 휘둘리지 말라는, 그럴 경우 특별히 주눅들것도, 특별히 잘난척할것도 없다고 하신 말이다. 좀 유리하다고 나서고 좀 불리하다고 숨으면 언젠가 내가 휘두른 칼에 내가 다치는 거라고. 그렇건 아니건 어떤 범주에서 이 난이를 인정한다 해도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소통의 불안정성이다.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했다면 이 사회에서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퇴폐적이고 예리한 감수성의 천재 피아니스트가 생겼을 리 없고, 누군가 미쳐 정신병원에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 왔을 리도 없다. 너무 평범해서 그 평범함이 진저리칠 만큼 싫은 우리는 과연 미치지 않아서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 언젠가 그들은 고위 관료가 되고, 경례를 붙이고, 권력을 과시하고, 틀에 박힌 일장 연설을 뿌리다가 유순한 닭대가리가 되어 예전의 적들이 되는 대로 던져주는 부스러기에 감읍하리라. 하지만 잊힌다 해서 과거도 죽음도 묻히는 건 아니다. 시간 안에 시간이 있고 과거는 현재를 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은 다시 죽을 테고, 저주받은 자들은 다시 저주받을 것이다. 절름발이를 제조하는 체제는 예견된 붕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또 다시 그렇게 작동할 것이다. -니콜라이 그로츠니, <분더킨트>

 

 

분더킨트(Wunderkind)는 '음악, 문학, 예술계의 조숙한 어린 천재나 신동'을 일컫는다. 배경은 1987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2년 전부터 역사가 이뤄지는 날까지, 소피아의 영재음악학교에 다니는 소년 콘스탄틴의 기록이다. 소년의 눈에 비치는 모든 세계-레슨, 연주, 수업의 단상과 친구, 사랑, 선생님에 대한 느낌-는 브람스와 쇼팽과 차이콥스키, 멘델스존, 리스트, 라벨, 슈만, 드뷔시, 베토벤, 모차르트 등 수많은 음악의 불꽃과 절망, 음모의 선율로 형상화된다. 핍박당하는 시대와 체제의 아르페지오. 세속적 속박과 창공의 경계선, 화음과 흐름과 모욕과 경멸의 순간을 허공으로 날려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의 흐느낌은 와인에 취한 자의 눈에 비친 거리의 네온사인처럼 흔들린다.

 

소년은 누릴 수 없는 불행을 타고났다. 이해받을 수 없는 약점. 재능을 갖춘 자의 영혼을 먹어치우는 열정은 다양한 방법으로 모두를 괴롭힌다. 붉은 저주가 되어 비밀을 속삭이는 음성, 시간 안에 갇혀 시간을 뛰어넘는 자의 슬픔, 생각 없는 시계 같은 연주의 야만성. 예술의 열정이 사라진 세상에서 음악이란 최면에 걸린, 악령에 사로잡힌 복종과 다름없다. 같은 상황을 남과 다르게 느끼는 것. 천재는ㅡ 땅 밑에 사는 자, 인생 전체에 걸쳐 반쯤 파인 터널을 걸으며 연주하는 사람이다. 자발적으로 현실에 갇혀 신음하고, 영혼과 유령을 연기하는 카니발에 음악이라는 도구를 들고 참여한 사람이며, 삶의 대부분을 몽유병 상태로 보내는 존재들이다. 시대가 버린 도주한 용의자들. 이 소설을 읽은 후 열고 나온 문을 닫아야 했다. 쏟아진 이데올로기, 불가능한 사랑, 교만하고 잔인한 십대의 레퍼토리가 다시 지하 감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가 미친 8주간의 기록>을 읽고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갇혀있다는 사실에서 놓여나기 어렵다. 방, 거실, 집, 놀이터, 공원, 하다못해 기차역, 관광객 들끓는 여행지에서조차도. 나는 기꺼이 갇히는 대신 더욱 바짝 더듬이를 세운다. 겨우 주인공과 함께 비슷한 이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울고 웃을 수 있었다. 미쳤다는 걸 인정하는 게 보통 정신으로는 되는 일이 아닐테니, 독서가 가능한 만큼 덜 미쳤다는 뜻도 된다, 안심하자. 뛰어난 문장도 대단한 사건도 없다. 소소한 사연이 있을 뿐인데도 그게 삶의 본질인 만큼 잘도 굴러간다. 우리가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날 이해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기 때문일까. 나라는 존재의 균형점이 타인에게 있다는 역설이 조금은 슬프게 들린다.

 

 

 

 

 

어둠침침한 침실에서 보면 그녀의 집은 황량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대륙처럼 보였고, 그 광활한 대지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가족들은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달라고 보채는 것 같았다. 그녀에겐 어떠한 환상도 없었다. 예전에 자신이 세운 계획들은ㅡ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는지 모르겠지만ㅡ시간이 지나 빛이 바랬고,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세운 것이라서 모든 사건을 다 통제하려는 과도한 낙천주의적 경향이 있었다. 그녀는 육감의 덩굴손을 집 안 곳곳에 뻗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미래에까지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또한 자신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남에 대한 친절이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을 때가 제일 좋은 법이었다. -이언 매큐언, <속죄> (p.107)

 

호손의 <주홍글씨>, 매즈 미켈슨의 영화 [더 헌트]가 다루는 지점은 같다. 합리의 무모한 도전이 어떻게 불합리가 되는가, 그러니까 마녀사냥 당한 헤스터와 루카스가 어떻게 이 상황을 버텨나가는가 혹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 대우 받는가에 초점을 둔다면, <속죄>는 <주홍글씨>와 [더 헌트]에 해당하는, 사건발생 후 마녀사냥의 행보와 로비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의도적으로 지워져 있다. 다만 로비가 군인이 되어 전쟁의 시기를 견디는 순간만으로 로비가 견디는 죗값의 상황이 압축되어 펼쳐질 뿐. <속죄>에 한 챕터를 더 쓸 수 있다면 그건 <주홍글씨>나 [더 헌트]가 될 것이다.  

 

 

 

 

원제는 구판 <연민>이 아니라 신판 <초조한 마음>이다.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츠바이크는 같은 내용이라도 여느 작가들에 비해 굉장히 집요하게 쓴다. 순간을 포착하는 묘사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읽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고 감정몰입도가 점점 높아진다. 단편도 그런데 심지어 장편에 대해 덧붙여 뭣하겠나 싶으면서도, 이 가능한 상황의 불가능한 묘사, 꼼꼼한 심리전, 예민하고 날카로운 관찰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연민'이 이토록 양가적인 감정이란 데 어김없이 동의하면서도 어느 경우 소모일 수도 있지만 또 어느 경우 최소한의 호의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고 생각한다. 연민이 아무리 부조리하다고 해도 우리가 인간인 한, 좋은 사람이고 싶은 한,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성격상 한 작가를 연달아 전작할 가능성은 지금까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어떤 독서 스타일이나 습관은 각기 다른 분야의 책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거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위대한 해리 홀레 반장만 기억한다면 이 작가를 잊을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것 같다. 놓칠 때가 많았던 추리 시리즈물 중 그나마 첫 스타트를 첫 (번역)작품으로 시작한 드문 작품인데, 겨우 두 권째. 앞으로도 나는 기존에 출간된 해리 홀레 시리즈가 한 권 한 권 구간으로 전환될 때마다 읽기로 한다. 이왕 늦은 거 책값이라도 굳게. 얼마 차이도 안 난다는 게 함정, 이러다 도서정가제 실시되면 그건 그것대로 또 낭패. <스노우맨>이 시릴 정도로 차갑고 순백의 눈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면 <레오파드> 역시 흰 이미지가 월등하지만 콩고 때문인지 상상 돋는 살인무기 때문인지 붉고 단단한 강렬함이 먼저 느껴진다. 더 생생하고 더 정교하고 더 가차없는 스토리. 더 말하기에 이미 늦기도 했고, 더 써봤자 앞으로 읽을 분에게 방해라면 몰라도 도움이 될 리 없다.

 

 

 

파리누쉬 사니이는 1949년 이란에서 태어나 심리학자, 사회학자, 연구자로 정부 각 부처에서 고위직 간부와 고문으로 다년간 경력을 쌓아온 다소 지긋한 나이의 작가다. <나의 몫>을 읽는 일은 말하면 입만 아픈 아랍(이란)의 진부한 현실을 꼼꼼하게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아프간의 실상을 다뤘던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다르지도 않다. 생각해보면 모르는 사건도 더 알아야 할 사건도 없는 현실을 굳이 두꺼운 책과 힘겨루기하듯 읽을 이유가 없다. 아무리 배우고 싶어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아버지나 오빠에게 돌아가는 대가를 위해 제 입이나 덜어줄 양으로 팔려가듯 시집을 가야 한다. 강간과 다름없이 관계를 가지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나이 차 큰 남편 수발과 함께 평생 부엌데기로 사는 삶이 나의 몫이 아님을 아랍의 여자들이라 하여 몰랐을 리 없다.

 

여주인공은 가족 몰래 연애를 하지만 오빠에게 처절한 응징을 당한 남자가 도망가고 힘든 시간을 겪는다. 다행히 잘못된 전통과 관습을 전복시키려는 소수의 반집단(혁명집단) 소속의 남자와 결혼하면서 불행을 피한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관습적 결혼과 핍박의 삶으로부터는 구해졌다. 하지만 남편은 가정보다는 바깥 일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아내에게 원하는 공부를 하게 하고 혁명을 돕게 하지만 가정을 안정감 있게 꾸리지 못한다. 남자가 잡혀가고 홀로 가사와 육아, 생계를 책임지는 마수메에게 더이상의 공부는 무의미하다. 전통과 관습이 고수되는 테헤란에서 여자에게 교육이란 그야말로 삶을 방해하는 사치다. 남편을 잃어도 자식은 커간다. 이 고단한 시간, 지난한 고통의 보상은 아들이 보내는 감사인사다. 서글프고 막막하다. 아직도 이런 사회가 지구상에는 대단히 많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삶이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나, 만약 그 반대라면 우리는 매일 아침 같은 철로를 걷기 위해 사는 것처럼 지루할 것이다. 영혼을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어떨지, 나는 모른다.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문학을 아주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살다가 약속도 인사도 없이 한 사람이 먼저 떠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믿을 만한 조력자이자 배우자라는 이름으로 존재한 사람들. 어쩌면 다른 사람에 비해 나눌 수 있는 기쁨을 하나 더 가졌기에 잃었을 때 내 팔다리가 두 배로 잘려나가는 듯한 절망을 느끼지 않았을까. '팻에게 바친다'는 줄리언 반스의 헌사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랑고백으로 들릴 즈음, 오랜 시간 침묵을 거듭하다 비로소 입을 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삶의 일부였음을 조심스럽게 선언하는 목소리.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보내기까지 여전히 함께였으므로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말은 대개 옳다.

 

 

 

 

 

<저지대>를 읽으며 별로 재밌지도 않은 <나의 몫>이 떠오른 이유가 아마도 '혁명'이라는 화두 때문일 것이다. 배경은 완전히 다르지만 상황은 별다를 것 없는, 어쩌면 단지 '현재'나 '행복' 혹은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그저 지금 힘든 상황에 대한 '회피'에 치중했을 평범한 선택이 삶을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이유. 참으면 현상유지가 가능하지만 삶이 고통스럽고 대항하면 무언가에 나를 바칠 것처럼 살아야 하면서 미래를 가늠할 수가 없어지는 것. 혁명. 하지만 이 얘기는 혁명이 주가 되는 내용은 아니다. 모든 키를 수바시와 우다얀의 한가운데 있던 가우리가 쥐고 있기 때문에. 역사에 떠밀렸다기보다는 셋은 혁명이든 책임이든 배반이든 어떤 식으로든 선택이란 걸 했기 때문에. 행복과 사랑의 순간이 무척 짧고 고달팠던 기억과 그 기억으로 인해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내어줄 수 없던 한 여자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그렇다면 유독 정해진 운명에 매몰당한 사람은 벨라가 아니었을까. 출생에 얽힌 비밀, 엄마를 향한 원망과 그리움. 그러나 벨라 역시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꾸리게 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전적으로 '선택'의 범주로 엮인다. 처음으로 어떤 역사적 사건에 휘말릴 때는 차라리 가만히 있어야 그 소용돌이가 날 그저 스쳐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에 가까웠기에 선택을 하면 할수록 더 끈적한 갯벌 속으로 자꾸 빠지는 상황을 혼자서는 도저히 그려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아니란 걸 알지만 되돌아 갈 수도 없을 때 우리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세 명의 주인공, 어쩌면 그들의 딸 벨라와 형제의 부모까지도 그들이 한 선택을 후회했으리라 가정해본다. 하나의 삶이란 곧 포기한 다른 삶에의 영원한 갈증이기도 하니까. 결국 가장 불행한 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일지도.

 

 

 

 

<아름다운 폐허>는 옅고 싱겁다. 아름다우면서 폐허같은 느낌을 형상화했다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 제일 외로워졌고, 그 외로움은 정말 폐허같았으니까. 영화로 치면 압도하는 장면이 없다고 해도 좋다.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아쉽다는 기분이 절로 들 때 그건 어느 정도 필요했던 것이다. 서정적인 표지그림과 '이탈리아 리구리아 해안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 포르토 베르고냐'라는 배경에 끌렸다. 만약 50년이라는 시간 사이로 흐르는 강과 베르고냐에서 할리우드까지의 거리를 짐작했다면 읽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탈리아 외딴 섬마을(한적)과 할리우드(복잡)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감명깊은 스토리 경우의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놓칠 수는 없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아무도 모르게 훔쳐 수첩 귀퉁이에 적어두고 싶은 문장이 제법 있다. 잊힌 시간과 그리움에 관한 절절한 관조. 이 소설을 관통하는 감수성은 역시 멀찍이 떨어져 낯설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지난 시간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다.

 

 

 

 

어쩌면 고통이란 밤이 새벽빛에 서서히 물드는 것처럼 그렇게 차례를 지켜 오기로 예정되어 있는 숙명이 아닐까. 꼭 만나기로 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고, 내가 만든 아이의 평화로움은 순식간이며, 악순환의 고리, 카르마, 불투명한 미래, 오랜 습관, 불행의 꿈나무 같은 사람들. 이 전쟁같은 삶은 실은 아주 극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문학적으로 특별하다는 느낌도 없다. 그런데 간절하다. 뭔가에 쿡쿡 찔리듯 아프다. 현란하고 기교있게 씌어진 소설보다 훨씬 더 깊이 흔들리는 정직한 비극. 삶은 계속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겠다 아우성이고, 그걸 지켜내려는 노력은 전쟁과 같다. 아이는 부모의 땀이고 눈물이고 비밀이다. 더 완벽하고 대단하고 멀쩡해야만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둠과 어둠이 만나면 더 짙은 어둠이 된다는 공식은 끝내 믿지 않으련다. 그럴 수가 없다. 여행은 절망이었다. 수많은 위기의 확률을 마지못해 이겨낸 절.망.

 

 

 

 

 

산도르 마라이는 분명 세 명의 주인공 시점에서 각자의 입장을 써내려가기로 철저하게 구상한 후 쓰기에 돌입했을 것이다. 일롱카의 입장에서 일단 쓰자, 다음은 페터의 입장에서 써볼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유디트의 입장에서도 쓰자, 하고 썼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 서늘하고 개인적인 독백을 내것으로 소화하기에는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내가 뭘 하는지 몰랐다. 총알처럼 달렸던 상권이 끝나고 하권을 시작하며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기 시작했으니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좋았다, 고 쓰기에 민망한 책이 될 것 같다. 좋았지만 좋지 않다? 이상하다. 평소대로라면 일롱카의 마음을 읽었으니 페터도 궁금해야 정상 아닌가. 페터를 읽어야 유디트의 마음을 읽을 차례가 오는데, 요즘은 읽던 책을 미뤄두는 경우 없이 대체로 끝나면 다른 책을 시작해왔다. 어쩔 수 없이 잠시 미뤄두었다. 이 질식할 듯한 책장과 책장 사이를 오갈 힘이 지금은 부족하다. 

 

 

 

 

동물이라면 또 모르지만 식물에는 통 감정이입이 안 된다. 장미 꽃다발은 집구석에서 몇 년을 갔고 핑크색 국화 다발은 거기서 벌레가 기어나올 때까지 몰랐다. 꽃은 예쁘지만 세심하지 못한 나는 문학 속 꽃들을 일일이 확장시킬 능력이 거의 없다. 한 권의 문학 속에 활짝 핀 꽃들에 동그라미 치며 읽으면 대략 몇 송이의 꽃을 만나게 될까. 저자가 고른 서른 세 편의 문학에서 찾아낸 알록달록한 꽃들을 담은 책이다. 김유정부터 박경리, 박완서, 김훈, 이승우, 신경숙, 정이현까지 골고루 담겼다. 읽고 또 읽어도 꽃이 등장하는 문장은 늘 낯설다. 훌쩍 들판에 나갔다가 한켠에 곱게 핀 야생화 이름을 내가 알아채는 날까지 꽃을 알아가도록 노력해야지. 희고 노랗고 빨갛고 보랗다. 사진이 알록달록 참 예쁘다. 마음이 다 참해진다. 늦기 전에 곱디 고운 꽃을 꺾어 책갈피로 만들어봐야지. 적어도 오늘만은 꽃 생각으로 내 안이 환해진 느낌이다.

 

 

 

 

 

중국에서 인육 식용이나 사체강간은 그리 충격적 소재가 아니다. 내가 읽어온 몇 안 되는 중국문학은 죄다 처음에는 포기하고 싶다가 끝에 가서 전율을 느끼고, 비로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거나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같은 대륙의 다른 책을 집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독서는 망각과 기억이 점강과 점증을 반복하는 증상을 확인하는 일이다. 나는 어느 작가의 작품이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 좋을 때 비로소 긴 시간에 걸쳐 전작을 읽으려 결심한다. 비교적 최근에는 모옌과 옌롄커, 앨리스 먼로가 그랬다. 딱 두 권씩 읽어봤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는 같은 기간 비교해 모옌이 앨리스 먼로보다 두 배 가까이 덜 팔렸다는데 중국 역사와 문화가 우리에게 얼마나 이질적인지 말해주는 지표다. 어떤 식으로든 미국보다 중국이 더 멀게 느껴지기는 한다.

 

앨리스 먼로보다 모옌이 월등하게 좋았다. 첫 권 첫 장에서 간파했다. 모옌은 처음부터 매몰차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나는 대개 고통 속에서 질척거리는 삶, 끝까지 가는 삶, 시대적 핍박과 굴종의 삶을 다루는 작품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소재에 끌린다. 읽은 작품이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삶의 처절함과 무거움, 일상의 소소함 중에 내가 끌리는 쪽은 기질상 전자일 수밖에 없다. 기대를 완전히 넘어서거나 배반당할 때 나는 전율한다. <물처럼 단단하게>가 붉고 뜨거웠다면 <사서>는 질펀하고 차갑다. 게다가 이 작품으로 나는 이제 중국문학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굳히게 됐다. 미지의 영역에서 성큼성큼 다가온 중국문학은 아직 정체 파악이 완전히 되지 않을 뿐더러, 오롯이 제모습을 보여준 것 같지도 않다. 넓고 큰 나라인 만큼 문학의 무궁무진한 세계가 열릴 것 같다. <열세 걸음>의 첫 열 장을 다섯 번쯤 재시도한 경험에 비추면 <사서> 역시 읽기 편한 작품은 아니다. 단번에 손아귀에 잡히지 않더라도 일단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교훈, 그러면 더 큰 감동을 얻으리라는 확신이 이제는 생겼다. 뒤죽박죽, 흐릿흐릿, 읽고나서 더 어려워졌다. 절절하고 웅숭깊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상한다 해도 직접 읽는 지식인들의 강제노동수용소 묘사는 더 멀고 더 이 세상 같지가 않다. 심상찮다. 문화대혁명, 대기근의 실정은 잘 모르지만, 처연하고 서늘한 느낌만은 다음 읽을 작품에 되려 압사당할 때까지 지속될 것 같다.

 

 

그런데 왜 우리들이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더 정당하고 너그러운지 아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칵테일을 한 잔 마시고 예쁜 애인과 만나고 하는 사이에 틈을 내어, 말하자면 여가가 있을 때 찬사를 드리면 그만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무슨 의무를 떠맡긴다면 그건 추억을 요구하는 것일 터인데, 우리의 기억력은 짧거든요. 그러니 친구들 가운데 우리가 사랑하는 건 갓 죽은 사람, 마음 속에 고통을 주고 있는 사람뿐으로 결국 그건 우리들의 감동을 사랑하는 것이요, 우리들 자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카뮈, <전락>

 

자유를 구속당하고 시간을 빼앗긴다 해서 추억과 사랑을 멈출 수 없듯 고통과 후회와 감동과 의무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나는 과거나 현재보다는 미래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고, 가장 불행할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책 속에서 미래를 찾으려 소설 읽기를 멈추지 못하는 건 아마도 내가 모르는 천상의 시간을 흐르게 하고 색다른 세계를 선물받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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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5-30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잘 지내고 계시는군요.
여전히 많이 읽고 좋은 글 올리시고~^^
오랜만에 들러 좋은 글 읽고 가요.^^

아이리시스 2014-05-31 07:24   좋아요 0 | URL
꿈섬님, 잊을 만하면 그래도 한번씩 만나서 정말 반갑고 좋아요.
저는 잘 지냅니다.. 별일 없는 게 너무 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리면서요.
자주 보고 싶어요. 글을 핑계로라도요^^
주말 잘 보내세요. 세상에서 제일 즐겁게.

2014-06-01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02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8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11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