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연


지난 주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이틀 연속으로 중요한 일정들이 있었다. 금요일 저녁에는 내가 일하는 일터인 협동조합에서 조합원 송년회가 있었다. 지난 글에서도 썼는데, 우리 조합 송년회는 매년 재미있는 행사들을 기획하기 때문에 참석하시는 조합원들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이 송년회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다시 이야기 해보자. 토요일 오후에는 우리 동네 작은 도서관의 12주년 후원의 날이자,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나는 이 도서관과 초기부터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초기부터 이 작은 도서관을 후원하는 후원회원이며, 초기 한동안 운영위원도 했었다. 우리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에는 자주 여기 데려와서 함께 놀기도 했다. 12년 전에는 녹색당 창당할 즈음이었다. 여기 도서관이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녹색당 지역 모임을 여기서 했었고, 이후 긴 시간 동안 녹색당 활동의 거점 공간이 되어주기도 했었다. 2020년 초에 비례위성정당 사태로 인해 탈당하기 전까지 나는 지역 녹색당 모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그때 이 도서관이 중요한 거점 공간이 되어주었다. 















이 도서관의 12년 역사를 담은 책이 나왔다. 출판기념회에서 책을 구매하고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당일 두 저자의 대담 내용을 들어보니 옛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다.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 아이들도 어렸을 때 이 도서관에서 많이 놀았는데, 책 제목에도 표현되어 있듯이, 이 작은 도서관은 조용하게 책만 읽는 도서관이나 독서실의 역할만을 하는 곳이 아니다. 이 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하나 있는데, 이 친구 역시 나와 함께 녹색당 활동을 했던 친한 지인이다. 놀이 강사라고 불리지만,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함께 놀고 지내는, 아이들의 친구라 할 수 있다. 한때 유행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에서 비슷한 에피소드가 나와서 좀 신기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구체적인 행위를 들여다보면 그 드라마의 등장인물과는 많이 다를 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함께 노는 태도는 비슷하다.


토요일 행사장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주최측에서 준비한 다양한 공연과 프로그램들은 모두 얼마나 성실하게 준비했는지 느낄 수 있는 훌륭한 프로그램이었다.무려 3부까지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제공된 식사를 마치고, 행사장의 뒷정리를 도왔다. 그리고 주최측이 알려준 뒷풀이 장소로 갔다가 아주 특별한 인연들을 다시 만났다.


무척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인연은 두 시인이었다. 안상학 선생님과 문동만 선배님이 그 두 사람이다. 일단 문동만 선배님은 예전에 일했던 노동자 문학을 주로 내는 출판사에 일할 당시에 알게된 분으로 당시 여러 시인 선배님들을 만났는데, 그중 개인적으로 제일 호감이 가는 분이었다. 너무 오래만에 만난 거라 혹시 나를 못 알아보실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인사를 드리니 조금 기억을 떠올리다가 알아보신 듯하다.


안상학 선생님은 이 도서관 덕분에 인연을 맺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잠시 운영위원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 시기에 안상학 선생님을 모시고 문학 강좌 프로그램을 열었는데, 그 프로그램의 진행을 내가 맡았었다. 강의야 선생님이 그냥 하시면 되었지만, 강의를 마치고 질의 응답 시간을 좀 길게 가졌는데, 그 진행을 내가 맡았었다. 그날은 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날이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 도서관에 와 있었다. 아이들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자기들끼리 그림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등 알아서 놀았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간단한 음식과 술을 먹으며 안상학 선생님과 참가자들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당시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큰 아이가 자기가 쓴 시에 직접 그림을 그려서 내게 보여주려고 가져왔었다. 옆에 계시던 안상학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쓴 시를 보셨고, 그 시가 무척 좋다고 칭찬을 하시더니, 다른 시도 있으면 보여달라고 하셨다. 큰 아이는 신이 나서 직접 시를 쓰고 그림도 그린 종이들을 가져왔다. 당시 선생님은 아이가 쓴 시를 크게 칭찬하시며, 나중에 모아서 출판하면 좋겠다고 하셨고, 그 중 일부를 가져가고 싶다고 하셔서 몇 장을 드렸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때 초등학생이었던 큰 아이는 지금 고3이며, 이번에 모 대학 문창과에 합격했다. 약 한 달 반 뒤에는 졸업을 할 것이고, 3월에는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다. 안상학 선생님을 엄청 오랜만에 뵙게 되어서 반가웠던 나는 그 옛날 아이의 시를 보시고 크게 칭찬하셨었다고 기억 나시냐고 여쭤봤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기억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그 초등학생이 지금 모 예고 문창과에서 시를 전공하고 있으며, 이번에 모 대학 문창과에 합격했다고 큰 아이의 소식을 전했다. 선생님께서는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시인들에게도 옛날 그 일화를 전하시며, 우리 아이가 당시 썼던 시들이 엄청 훌륭했다고 칭찬을 하셨다. 나는 딸바보 팔불출이라 계속 입이 귀에 걸리고 어깨가 으쓱한 상태로 그 시간을 즐겼다. 사실 낮에 큰 아이에게 그 도서관 행사에 같이 가자고 권했었는데, 만약 아이가 따라왔다면 다시 선생님을 뵙고 직접 인사드릴 수 있었을텐데 하고 아쉬운 생각이 떠오르기는 했다. 아이가 귀찮다고 집에 있고 싶다고 했던 것이 아쉬웠다.


안상학 선생님은 앞서 언급한 문동만 선배님에게도 내 큰 아이 이야기를 했고, 문동만 선배님도 놀라며 아이의 문창과 합격을 축하해주셨다. 그리고 안상학 선생님은 가방에 1권 있는 본인 시집에 아이의 이름을 적고 사인을 해주셨다. 아이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나중에 시집을 전해줬는데, 불행히도 큰 아이는 당시 그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음에 언젠가 인사드릴 일이 또 생기겠지.
















이 책이 그날 안상학 선생님께서 사인을 해주신 책이다. 그 자리에는 이 시집을 발행한 '걷는 사람' 출판사의 대표인 김성규 시인도 계셨다.


정신 없었던 날


올해 송년회 이야기를 아주 짧게 언급하고 지나가야겠다. 늘 이런 저런 행사를 기획할 때마다 어떻게 홍보하고 얼마나 많은 참가자를 모시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고,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번에도 며칠 전까지 참가자가 적을 것 같아서 걱정을 많이 하면서 행사 준비를 했다. 그런데 당일 시간이 다 되었을 때부터 사전에 참가 사실을 알리지 않은 조합원들이 오시기 시작하더니 점점 사람들이 더 많이 들어왔다. 행사를 본격적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준비했던 약 서른 개의 의자가 다 차버려서 새로 의자들을 옮겨와야 했다. 우리가 준비한 공간이 그리 넓지 않아서 딱 30명 정도가 알맞은 곳인데, 막판에 살펴보니 거의 5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오셨더라. 의자를 더 가져와도 배치할 공간이 없었는데, 몇몇 분들은 아예 서서 참여하시기도 했다.


준비 단계에서 영화 퀴즈(유명한 대사를 듣고 제목 맞추기)를 한다고 들었는데, 당일 낮까지도 어떤 방식으로 명대사를 보여줄 지 정하지 못하고 있길래, 그냥 내가 대사를 말하겠다고 했다. 준비팀에서 뽑은 대사들을 보니 거의 대부분 아는 것들이었고, 몇몇 대사는 그 특유의 억양을 살려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대모사는 절대 아니고, 그저 대사 톤 흉내내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 그런데 막상 그 많은 사람들 앞에 서고 보니, 진행자가 '연기'라고 표현했다. 아! 나는 절대 연기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었는데. 암튼 졸지에 여러 명대사를 연기하게 되었는데, '발연기' 라는 말들이 쏟아졌다. 뭐, 어쩌겠는가? 내가 무슨 연기자는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리고 노래. 약 10 팀의 장기자랑 공연이 있었다. 시낭송과 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노래였다. 두 팀은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준비팀은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내 노래를 맨 뒤로 돌렸다. 지난 글에서는 친한 후배와 함께 노래를 준비한다고 썼었는데, 둘이 직접 노래를 불러보니 서로 좋아하는 스타일이 달라서 의견이 갈렸고, 결국 각자 따로 부르기로 했다. 나는 한때 참 좋아했던 [푸른 하늘]의 [마지막 그 아쉬움은 기나긴 시간 속에 묻어둔 채]라는 긴 제목의 노래를 골랐다. 일단 이 노래의 음정을 외우고 있어서 별도로 연습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유가 제일 컸고, 다음으로 가사가 송년회와 잘 어울린다고 후배들이 말해줬기 때문이다. 이 선곡 때문에 내 순서가 맨 뒤로 간 것이기도 했다. 노래는 내 기준으로는 망했고, 몇몇 친한 지인들 외에는 내 노래를 거의 들은 적이 없는 당시 참가자들 입장에서는 그럭저럭이었던 것 같다. 일단 첫번째 실수는 마이크 선택이었다. 유선과 무선 마이크가 있었는데, 앞의 참가자들이 유선 마이크와 무선 마이크 중 각자 가까이 있는 것들을 골라 쓰는 것을 보았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내 바로 옆에 손이 닿는 곳에 유선 마이크가 있어서 그걸 집어 들고 노래를 불렀는데, 생각보다 내 목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았다. 여기서 조금 당황해서 음정이 좀 불안해지거나, 원하는 형태의 목소리가 안나오는 등의 실수들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워낙 오랜만이기도 했고, 앞에 글에서 썼듯이 무대에서 실수했던 경험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긴장을 하기도 했다. 암튼 결론적으로 내가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어서 이 정도면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 할 수 있는 정도인 것 같았다. 하나 다행인 것은 내 순서가 맨 뒤이기도 했고, 곡의 분위기 덕분에 행사장의 불을 완전히 끄고 사람들이 휴대폰 플래쉬를 켜줬다. 한창 긴장해 노래를 시작했다가 갑자기 불이 꺼지고 관객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불 끄고 폰 플래쉬를 켜 달라고 한 사람에게 속으로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유튜브 알고리즘


새해를 맞자마자 여러 사건 사고들 소식이 이어진다. 우리 집에는 티비가 없어서 나는 뉴스를 유튜브로 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주요 뉴스 클립들을 몰아서 보고,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꼭 날씨를 보는 편이다. 밤에 집으로 돌아오면 8시 뉴스나 9시 뉴스를 켜놓고 씻고 가벼운 집안 일을 한다. 내 유튜브 메인 화면에는 뉴스,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 일부 스포츠 소식들, 영화 관련 소식들이 나온다. 내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렇다. 


일본의 지진 소식은 정말 참담하고 충격적이었다. 작년 튀르키예, 시리아 지진도 정말 충격이었는데, 이번 일본 지진도 그에 못지 않았다. 폭삭 무너진 건물들을 영상으로 보면서, 이 겨울 추위에 삶의 터전을 잃어 버린, 혹은 소중한 생명을 잃은 분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항공기 폭발 사고 소식도 지진 못지 않은 충격이었다. 정말 다행인 것은 370명이 넘는 탑승자 전원이 무사히 탈출했다는 소식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화염에 완전히 휩싸인 기체에서 인명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승무원들이 잘 이끌고 승객들이 잘 따라주어서 정말 다행인 것 같았다. 이게 일본이어서 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이어 들었다. 우리나라였다면? 5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4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일사분란하게 탈출할 수 있었을까? 장담하기 어렵겠지만, 어려울 거란 생각이 먼저 든다.


이재명 대표의 피습 소식도 좀 충격이긴 했는데, 내가 워낙 파란당을 싫어하다 보니, 크게 마음이 가지는 않았다. 물론 아무리 싫어해도 그렇게 흉기를 습격을 가하는 피의자를 두둔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 자는 마땅한 법의 심판을 받아 죗값을 치러야 한다. 목에 치명상을 입긴 했지만, 천만 다행으로 수술을 잘 마쳤다고 하니, 생명에 지장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필이면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보러 가서 습격을 당한 것이다. 가덕도 신공항은 무조건 파란당의 실책이며, 절대 추진하면 안 되는 개발 사업이다. 이래서 내가 파란당을 빨간당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에서 보니 구급차가 늦게 도착했다고 원망하는 목소리들이 들리던데, 그 동네가 그런 동네다. 언론에서 15분 걸렸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면 정말 빨리 도착한 거다. 그런 외진 동네에 신공항을 짓겠다고? 아니 전국적으로 이용객 수가 말도 안되게 적은 공항들이 몇 개나 되는지 알긴 하나? 제주 신공항도 그렇고 가덕도도 그렇고. 이 기후위기 시대에 신공항이 무슨 말도 안되는 짓인지 모르겠다. 인간의 다양한 활동 중에 가장 온실가스를 많이 내뿜는 일은 우주로 로켓을 날리는 일이고, 그 다음이 비행기를 띄우는 일이다. 말로는 기후위기를 떠들면서 비행기를 자주 타고, 공항을 많이 이용하는 일은 내로남불과 마찬가지 태도다. 


1:1 테스트 강의 평가


아, 알고리즘 얘기하면서 외국어 공부 영상들을 빠뜨렸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인도네시어아어 등이다. 내가 즐겨보는 몇몇 영상들에서 자주 하는 말은 외국어를 공부하려고 들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냥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말이 쉽지 한국에 살면서 다른 외국어에 익숙해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일은 꾸준히 하는 일이다. 몇몇 외국어 익힘 앱에 재미를 붙여서 며칠, 몇 주 정도는 꾸준히 하지만, 그게 몇 달까지 가기는 참 어렵더라. 늘 바쁘다는 핑계로 잊혀지곤 한다.


그나마 조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잊을만 할 때쯤에는 다시 시작하곤 한다는 것. 최근에는 새로운 언어 익힘 앱을 다운 받았는데, 다른 앱들이 무료 서비스를 일부 제한적으로 제공하면서 유료 서비스를 끊임없이 제안하는 것과 달리, 무료 서비스가 맨 처음 단 1회 제공되고 이후엔 무조건 유료 결제를 해야 하는 앱이라는 것을 다운 받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첫 1회는 일종의 레벨테스트 성격의 강의였다. 맨 처음에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셋 중 하나의 언어를 선택해야 했고, 그 다음에는 현재 자신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스스로 선택하도로 되어 있었다. 저 3개를 다 배우고 싶은데, 셋 다 선택은 안 되려나? 아니, 어쩌면 다 돈을 내면 되지 않을까? 


일단 영어를 선택해봤다. 중국어와 일본어는 뭐 기초 중의 기초를 선택할 수 밖에 없겠지만, 영어는 그래도 조금은 자신이 있으니까. 영어를 선택한 후에 자신의 레벨을 선택해야 하는 단계에서 나는 좀 오래 망설였다. 레벨 0부터 레벨 7까지 총 8단계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레벨 3과 레벨 4 사이에서 좀 망설였다. 레벨 3은 간단한 표현을 할 수 있다? 아마 이런 설명이었던 것 같고, 레벨 4는 익숙한 분야에 대해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예전에 열심히 영어 회화 학원에 다녔을 때에는 자신있게 레벨 4나 레벨 5를 선택했을 것 같은데, 이후로 긴 시간 영어를 잊고 살았기 때문에 레벨 3도 좀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레벨 3을 선택하기에는 또 자존심이 상해서 결국 레벨 4를 선택했다.


원어민 강사와 1대1 레벨테스트 성격의 시범 강의 시간을 정하도록 되어 있어서 방해받지 않을 시간을 정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 8시에 매장을 정리한 직후에 그 수업을 받았다. 직접 원어민과 1대1로 소통하는 강의를 받는 것은 처음이라 좀 긴장이 되긴 했다. 강사님은 약간 영국식 억양이 느껴지는 여성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젊은 분은 아니고 조금 나이가 있는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폰을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 스피커 폰 상태로 진행했는데, 목소리가 좀 멀게 들려서 아쉬웠다. 암튼 강사님의 말투는 조금 빠른 편이라 처음에 좀 당황했다. 아, 나 역시 레벨 3을 선택했어야 했을까? 그런데 어쩌면 레벨 선택과 말의 빠르기는 크게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감이 조금 멀게 들리기는 했지만, 열심히 집중해서 들었다. 말이 빨라서 제대로 다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 유추할 수 있는 핵심 단어들은 들렸다. 나는 조금 어버버 하다가 곧 적응하여 열심히 대답했다. 강의 안은 미리 정해져 있었는데, 그 수준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강사님이 즉흥적으로 내 상황이나 선택을 묻는 질문이 어려웠다.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았고, 문장을 만들어야 하는데, 전치사나 동사 변형 형태가 헷갈렸다. 그래도 묻는 질문들에 크게 당황하지 않고 답을 이어갔다. 


20분간 정해진 분량의 강의를 마치고, 개인적인 질문들과 기본 내용에서 응용하는 질문들까지 다 소화를 하고 수업을 마쳤다. 강사님은 내 대답에서 어법에 어긋나는 표현들을 짚으며 바른 표현들을 알려줬다. 예를 들면 단수, 복수 표현의 실수들. 전치사 실수들. 동사형과 명사형을 잘 못 쓴 실수들 등. 딱 하나 발음 실수도 짚어주셨다. 길게 발음해야 할 단어를 짧게 한 경우였다. 마지막에 강사님은 종합적으로 내 상태를 알려주셨다.


일단 총평은 레벨 4가 적절한 단계라고 했다. 문법은 7점 만점에 5점을 주셨다. 다양한 표현들을 주저없이 사용하는 것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흠, 문법에 전혀 안 맞는 말들만 떠든 것 같아서 민망했는데, 그렇게 엉망은 아니었나 보다. 어휘도 7점 만점에 5점을 주셨다. 의사 표현에 문제가 없을 정도의 어휘력을 갖췄다고 평했다. 다만 한 단어가 가진 다른 뜻들을 유의해서 잘 쓰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듣기 역시 7점 만점에 5점을 주셨다. 앞에 쓴 것처럼 사실은 말이 생각보다 빨라서 못 알아들은 부분들이 좀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핵심 단어들을 캐치했기 때문에 답을 놓치지 않았는데, 그 부분을 들키지 않은 것 같다. 사실대로 하면 이건 3점 이나 4점을 받아야 했을 듯. 발음은 6점 만점에 6점을 주셨다. 왜 여기서는 7점 만점이 아니라 6점 만점인지 모르겠지만, 암튼 만점을 받았다. 단 하나 지적 받았던 단어, 장음을 단음으로 잘못 발음한 단어 하나만 지적했을 뿐, 원어민과 소통하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발음이라고 했다. 마지막 평가 항목은 자신감이었는데, 이것도 6점 만점에 6점을 주셨다. 주저하지 않고 끝까지 문장을 말하는 자신감을 높게 평가한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너그럽게 좋은 평가를 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냉정하게 본다면 문법이나 듣기는 점수를 후하게 줬다는 생각이 든다. 말이 생각보다 빨라서 당황한 것 외에는 그 선생님의 태도와 강의 방법은 마음에 들었다. 만약 유료 결제를 한다면 이 강사님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핵심은 유료 결제 금액이 얼마이냐 하는 것이겠지. 당연히 타임 리밋을 정해놓고 이벤트가 곧 끝난다고 서둘러 결제하라는 안내가 접속할 때마다 떴다. 결제는 3개월, 6개월, 12개월 중에 선택할 수 있는데, 12개월은 1달 강의료가 저렴하고 할인이 많이 들어가는 대신, 한번에 결제해야 할 금액이 너무 부담스러웠고, 3개월은 할인이 거의 없지만, 한번에 결제할 금액은 부담이 덜했다. 뭐, 이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지. 헬스클럽과 회화학원도 다들 마찬가지다. 와! 할인이 이만큼이나! 하면서 12개월을 결제하기엔 나는 이미 이런 경험이 너무 많다. 


강사님의 좋은 평가 덕분에 결제를 해야지 하고 마음 먹었던 것이,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1회 20분 수업은 짧고, 내가 몰랐던 것들을 친절하게 짚어주는 원어민 강사님은 너무 감사하지만, 그 정도 내용을 위해 매달 지불해야 할 금액은 역시 부담스럽다. 사실 조금만 더 부지런하면 다른 무료 앱들을 통해 어지간한 내용들은 다 익힐 수 있다. 물론 제일 좋은 점은 실수를 교정해주는 것인데, 그것도 다른 무료 앱에서 제공하는 것들이 있긴 하다.


일단은 조금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일단은 기존에 써왔던 다른 무료 앱들을 좀 더 잘 이용해보는 것으로. 확실히 사람은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맞다. 갑자기 영어를 좀 더 열심히 해보고 싶은 의욕이 막 든다. 일단 오늘 자기 전에 다른 무료 앱들을 돌면서 최대한 잘 활용하는 법을 생각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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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1-04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4년 건강하게 하고 싶은 거 즐겁게 하시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따님 학교 붙었군요 축하합니다 어릴 때부터 시를 잘 썼군요 시인이 칭찬하기도 했다니... 도서관이라고 해서 조용하기만 하면 안 좋겠습니다 어릴 때는 도서관도 놀이터 같아야 즐겁게 다니겠습니다 한국에도 그런 도서관이 있군요 그 도서관 오래오래 가기를 바랍니다


희선

감은빛 2024-01-05 20:1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희선님.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안상학 선생님 말씀으론 아이들만 쓸 수 있는 시가 있다고 하시더라구요.
당시 어렸던 큰 아이는 그런 시를 썼던 것 같아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인 그 작은 도서관이 참 소중한 존재인 것 같아요.
저도 아이들과 함께한 추억들이 많거든요.

호시우행 2024-01-04 0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 대학 입학을 축하드려요.

감은빛 2024-01-05 20:13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님.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yamoo 2024-01-04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님의 작은 도서관에 대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그런 도서관들이 활성화되었으면 합니다!

따님이 이번에 문창과에 입학하는군요! 축하드립니다. 거기다가 시까지 잘쓴다니, 입이 귀에 걸릴만합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이 아닌 시인의 칭찬이니 오죽하것습니까~~

24년은 감은빛 님의 영어공부를 응원하겠습니다!^^

감은빛 2024-01-05 20:14   좋아요 0 | URL
야무님, 안녕하세요.
축하와 응원 그리고 남겨주신 말씀들 모두 고맙습니다!

야무님께서도 새해에 그림과 함께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 잘 되시길 응원합니다!

다락방 2024-01-04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시 쓰던 아이가 문창과 갔다니 너무 잘됐네요. 축하합니다!! >.<

감은빛 2024-01-05 20:1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고맙습니다!
참, 시간이 빠른 것 같아요.
조그맣던 아이가 이제 성인이 되었다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갈 예정이니, 용돈을 달라고 하더라구요.

꼬마요정 2024-01-04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님!! 작은 도서관 책 출간과 행사 축하드려요!!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아요.
그리고 따님이 문창과에 합격했다니!! 격하게 축하드립니다. 멋진 문인이 탄생할 것 같아요. ㅎㅎㅎ
지진 피해 보고 무섭더라구요. 아파트 넘어간 거 보고 진짜... 우리나라에 이렇게 지진이 발생하면 아파트 어쩔...ㅠㅠ 몇 년전에 지진 났을 때 엄청 무서웠는데, 그에 비할 바가 아니겠죠. 에휴...

저도 영어공부 해야 하는데... 일로 필요한 게 아니라서 그런지 참 안 되네요ㅠ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은빛 2024-01-05 20:17   좋아요 2 | URL
꼬마요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축하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계속해 문인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평생 시를 쓰는 삶을 살 것 같아요.

지진 정말 무섭죠!
한 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을 생각하면,
참 한 숨 밖에 안 나와요.

꼬마요정님도 올해 하시는 일들 잘 풀리길 바랍니다.
건강하시구요.

페크pek0501 2024-01-07 1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가족 중 시인이 탄생하셨군요. 따님의 문창과 입학을 축하합니다. 따님이 부럽군요.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일찍 아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 말이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재밌게 보았고 여주인공 팬이 되었죠.ㅋㅋ
님의 영어 공부를 응원하겠습니다. 저도 한때(40대 중반쯤) 오헨리의 단편을 영어로 읽겠다고 책을 막 사들인 때가 있었어요. 소설로 영어를 배우면 흥미롭고 쉬울 것 같아서였죠. 그런데 아니었어요. 의역이 많아 오히려 문학작품으로 영어 공부를 하는 건 어렵더라고요. 차라리 대학 교재가 쉽다고 하더군요. 의역이 별로 없고 반복되는 단어가 많아서래요.
의미 있는 멋진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은빛 2024-01-15 18:07   좋아요 1 | URL
페크님, 축하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아이가 등단을 해서 시인으로 살 시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평생 시를 쓰면서 살아갈 것 같기는 해요.

문학으로 영어를 배우기는 오히려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영화나 드라마가 훨씬 더 좋은 수단이라고 하더라구요.
요즘은 쉐도잉이라고 해서 대사 따라 하는 것도 많이 하더라구요.
평소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인 듯 합니다.
 

연말


12월 들어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좀 있었는데, 계속 여유가 없어서 글을 쓰지 못하고 12월이 거의 다 지나버렸다.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내가 준비하고 진행한 행사 이야기도 있었다. 강의 이야기도 있었고, 내 실수로 잘 진행이 되지 않았던 업무 이야기도 있었다. 이제와 시간이 조금 지나고 보니 그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는 것이 조금 귀찮아졌다. 참 이래저래 일이 많았던 12월이었다.


배우 이선균 씨의 자살 이야기가 어제 오늘 여기저기서 돌고 있다. 늘 그렇듯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아진다. 안타까운 사건이고 너무나도 아까운 한 생명이 그렇게 사라진 것에 대해 일단 애도의 마음을 보탠다.


언론에서 자꾸 '극단적 선택'이란 단어를 쓰는데, 자꾸 마음에 걸린다. 왜 그 단어를 쓰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 단어가 과연 바람직한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대안은 없을까?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들에 많은 시간을 뺏기고 있다. 하나 둘 해결해나가면서 하고 싶은 일들도 조금씩 시도해보고 싶다. 내일과 모레 이틀 연속 또 중요한 행사들이 있다. 토요일까지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고 나면, 일요일은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겠지.


사주와 MBTI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사주팔자도 믿지 않는다. MBTI 도 사람의 경향성을 보여주는 지표라는 측면에서 재미는 있지만, 그 역시도 믿지 않는 편이다. 무척 친한 후배 한 명이 언제부턴가 지인들의 사주를 열심히 보고 있다. 내 사주도 여러 번 봐주었다. 그 말들을 속속들이 믿지 않지만, 그 친구는 사주팔자가 보여주는 방향성과 우리 실제 삶의 양상을 연결해서 설명하곤 하는데, 그런 측면의 이야기는 조금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서 조금은 마음이 바뀌었다. 무조건 안 믿는다고 선을 긋고 벽을 세우기 보다는, 그렇게 우리 삶을 바라보는 방법도 있구나. 그런 시각으로 보면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경향과 방향이 보이기도 하는 구나.


요즘은 누구든 MBTI 를 묻는 일이 많다. 나는 두 번 검사를 받았는데, 두 번 모두 INTP 가 나왔다. 그게 정확하게 뭘 의미하는 지는 잘 모르지만, 듣는 이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은 내게 N 이 뭘 의미하는 지, T 는 무슨 뜻인지 등을 알려주곤 한다. 반면, 매우 의외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맨 앞의 I 가 아니라 E 가 아니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나는 잘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뭔가를 해야 하는 일이 많고, 그때마다 주도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모습을 주로 본 사람들은 E 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반면 개인적으로 나와 친한 사람들은 I 라는 내 말을 수긍하는 듯하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겠지. 그 중에 본인이 좀 더 편하고 마음이 가는 성향이 있을 것이고, 그럼에도 반대 성향으로 행동하고 움직이는 일들도 분명 생길 것이다. MBTI 유형을 취업 면접에까지 적용한다는 뉴스를 보고 실소가 나오는데, 사람을 겪어보지 않고 그저 알파벳 4개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노래 연습


내가 일하는 조합의 송년회는 매년 마지막 금요일에 하고 있다. 다른 곳들 대부분 12월 초에 하는 편이고, 좀 늦어도 중순에는 하는데, 우리는 반대로 아예 연말로 일정을 정했다. 해마다 이런저런 컨셉으로 재미있게 놀아보려고 고민을 많이 했었다. JTBC 손석희 사장의 뉴스룸이 한창 화제가 될 때에는 뉴스룸과 유사한 구성으로 해서, 당시 이사장님이 손석희 역할을 내가 기자 역할을 맡아서 키워드로 조합의 주요 뉴스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었었다. 대본도 작성하긴 했었는데, 나는 전체 행사 준비에 시간을 많이 뺏겨서 해당 코너 준비를 잘 할 시간은 없었다. 결국 당일 임기응변으로 어떻게 넘어갔는데, 당시 이사장님은 나름 준비를 많이 하셔서 손석희 사장의 손동작이나 표정 등 디테일을 잘 살렸었다. 게다가 그날 맨 마지막 코너였던 앵커 브리핑을 아주 감동적인 내용으로 잘 준비해서 참석하신 분들이 모두 감명 받았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임원들과 활동 조합원들이 나서서 다양한 공연이나 영상 등으로 재치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었었다. 뭔가 이슈가 되거나 유행하는 걸 잘 캐치해서 응용하길 잘 하시는 분들이 기획을 잘 해주셨었다.


한편 초기부터 송년회에서 조합원 장기자랑을 종종 했었다. 춤과 악기 연주, 노래, 시낭송, 꽁트, 코메디, 성대모사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조합원들이 참가해 의외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고, 거의 프로급의 실력을 가지신 분들이 멋진 무대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작년 송년회에는 아예 가요제 형태로 진행했다. 우리 조합원이자 나와도 무척 친한 사이인 분이 여러 투쟁 현장들에서 노래(민중가요)를 부르곤 하시는데, 이 분을 초대했었고,또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을 가진 또 다른 나와 친한 지인도 초대했었다. 우리 조합에서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 활동가 역시 노래 실력이 무척 출중하여 참가했었고, 임원 중 한 분도 무척 매력적인 목소리와 판소리 창법을 접목한 독특한 창법으로 참가했었다. 그렇게 사전에 주위에서 어지간히 노래 잘 하는 분들을 여러 분 모셨고, 당일 현장에서도 즉석 신청을 받았는데, 다소 멋적어 하며 참가하신 두 분의 조합원도 노래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암튼 이렇게 작년 가요제가 대흥행하면서 참가자들의 반응이 엄청났었다.


올해는 다시 장기자랑으로 돌아가 노래 외에도 다른 것들을 보여주실 분들을 골고루 섭외 중이다. 지난 11월에 나와 동료활동가가 준비하고 진행한 체육대회도 대흥행이었고, 분위기도 좋았는데, 그날 뒤풀이 자리에서 임원 한 분이 내게 물었었다. 노래를 제법 잘 하는 것으로 아는데, 왜 한번도 조합 행사에서 보여준 적이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솔직히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저 앞에서 언급한 작년 가요제에 참여한 분들 대다수와 무척 친한 사이라서 그 분들과 노래방을 갈 일이 종종 생기는데, 그때마다 나는 가수라 해도 손색이 없는 그 분들 사이에서 절망감을 느끼곤 했으니까. 암튼 이번 송년회에는 나도 뭔가 해보라는 요청을 두어 번 받았기 때문에 조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그래. 노래를 한번 불러보자. 혼자 해도 좋지만, 나와 친한 다른 후배에게 듀엣으로 노래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이 친구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참 매력적인 친구인데, 고음에 조금 약점이 있는 편이다. 나는 최근 두성을 배워서 고음을 익히는 중인데, 서로 약점을 보완해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제안을 했고, 같이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바로 내일로 다가온 송년회를 위해 노래 연습을 해야 하는데, 나와 그 후배 모두 어지간히 바쁜 사람들이라 지금까지 시간을 내지 못했고, 오늘 밤에 만나 노래방에 가기로 했다. 어떤 노래를 할지 몇 개의 선택지를 두고 이야기는 나눴으나, 아직 정하지는 못했다. 만나서 불러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솔직히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상이 안 되어서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뭐 폭망하면 웃음을 줄 수 있어서 좋은 것이고, 나름 괜찮게 부르면 이미지 변신을 하는 것이라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망가져도 좋다는 심정으로 참가를 결정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는데,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잘 하고 싶은 욕심이 나는 것이 사실이다.


어렸을 때 나는 참 바보같이 내가 노래를 그럭저럭 괜찮게 잘 한다고 착각했었다. 목소리도 작고, 성량도 작고, 음역대도 좁은 내가 어쩌다 그런 착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내 기준에 내 노래가 괜찮게 들렸던 거였겠지. 그게 착각이 깨진 사건이 둘 있었다. 하나는 과 축제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건인데, 그때도 듀엣이었구나. 당시 유행하던 가수 녹색지대의 노래를 과 동기랑 함께 불렀는데, 그 친구는 박치에 음역대가 나보다 더 좁았다. 그때도 노래방에서 연습을 한다고 했지만, 뭐 별로 제대로 못했고, 사실 둘 다 노래를 잘 부르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저 음정과 박자만 잘 맞춰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과는? 정말 완전 폭망이었다. 같이 불렀던 동기 녀석이 자꾸 박자를 반박자씩 늦게 들어가고 뒤로 갈수록 음정도 안 맞았다. 나는 당황했고, 뒤로 갈수록 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둘 다 너무 어이없는 실수들을 저지르고 청중들의 웃음 속에 무대를 내려왔다. 그때 나는 정말 노래를 못하는구나 느꼈다.


두 번째 사건은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달 후에 있었다. 과에서 몇몇 선배들이 노래패를 만들면서 후배들에게 가입을 권했는데, 나도 거기 포함되어 있어서 들어간 것이다. 노래를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기타도 칠 수 있으니 뭐든 할 수는 있겠다 싶었다. 동기들과 함께 민중가요 창법을 배우며 노래 연습도 하고, 기타 연습도 했는데, 둘 다 썩 실력이 늘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몇 달 후에 또 어느 행사에 우리 노래패가 무대에 오르게 되었고, 나는 그 무대에서도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선배들에게 정말 많이 혼나고 욕도 많이 먹었다. 나는 바로 노래패를 탈퇴했고, 다시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노래를 좋아하는 내가 바뀌지는 않더라. 환경단체 활동가 시절 전국에서 모인 선배 및 동기 활동가들과 교류하는 자리에서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또 나름 자신 있었던 민중가요를 불렀었고, 그 노래를 들은 동기이지만 나이가 훨씬 많은 형이 내게 호감을 갖게 되어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그 형의 제안을 받아 평택의 환경단체 실무자로 옮겨갔었는데, 그때 그 형의 후배를 만났다. 그날 나는 그 분에게 첫 눈에 반했고, 고백해서 사귀고 결국 결혼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날 내가 불렀던 그 노래 덕분에 결혼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틀린 말은 아닌 것이 그날 그 노래를 안 불렀다면, 그 형과 그렇게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 형의 후배였던 그 사람과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


암튼 어릴 때에도 그렇고 이제 늙어버런 지금도 여전히 노래를 잘 하지는 못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걸 즐기는 건 마찬가지다. 좀 못하면 어떤가? 즐기면 그만이지. 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임해야겠다. 대신 할 수 있는 만큼 준비는 잘 해야겠지.


책이 왔다.


연말에 책을 좀 구매했다. 올해는 유난히 책을 적게 샀다. 이미 구매해 놓고 제대로 못 읽은 책들이 너무 많기도 하고, 일에 치여서 책 읽을 시간을 많이 만들지 못한 탓도 있다. 작년까지는 그래도 책 욕심에 꾸준히 책을 사모았는데, 올해는 그러지 않았다. 좁은 집에 책이 자꾸 쌓이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언제 이사를 나가야 할지 모르는데, 저 수많은 책들을 어떻게 처치할 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지는 것 때문이기도 하다.















참 좋아하는 지인이 최근에 읽고 정말 좋았다는 평을 보고 이 책을 바로 구매했다. 새 책을 사려다가 알라딘 중고매장에 책이 있다고 나오길래 그걸 주문했다. 며칠 남지 않은 올해가 가기 전에 새로 주문한 책들 중 적어도 2권을 읽어야지 라고 생각해본다. 음, 밤 늦게 집에 들어가면 박스를 열어보고 제일 두께가 얇은 책을 찾아야지. 자, 이제 노래 연습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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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2-29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님 2023년 사흘 남았네요 남은 날 잘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노래는 즐기면 되죠 연습하시고 노래 하는 거 배우시기도 했으니 전보다 잘 하시겠지요 노래 잘 하려고 연습도 하신다니... 송년회에서 노래 잘 하셨기를 바랍니다

감은빛 님 늘 건강 잘 챙기세요


희선

감은빛 2024-01-03 19:4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희선님.
이제 해가 바뀌었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송년회 노래는 남들 기준으로는 그럭저럭.
제 기준으로는 망했어요. ㅎㅎ

루피닷 2024-01-01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은빛 2024-01-03 19:42   좋아요 1 | URL
루피닷님, 인사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루피닷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yamoo 2024-01-0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의 MBTI 검사....저하고 똑같네요!! 저도 첨에 두 번 했고 나중에도 했는데 동일하게 나와서 그려러니 합니다. 헌데 감은빛님이 INTP라니 놀랍네요. 저도 E로 시작되는 줄 알았는데...^^;;

동지애를 느낍니다..ㅎㅎ 하지만 저는 노래 부르기를 아주 싫어해서 거의 부르지 않고 누가 노래 시키면 안합니다..ㅎㅎ 노래방 간 건 1994년 딱 하 번...다시는 안갑니다..ㅎㅎ

감은빛 님 새해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은빛 2024-01-05 20:19   좋아요 0 | URL
야무님께서 동지애를 느끼신다고 말씀하시니, 영광입니다. ^^

노래방을 딱 한 번 밖에 안 가셨다니, 그건 좀 많이 의외네요.
94년이라. 저는 그보다 훨씬 더 일찍 노래방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중학생 시절부터 자주 다녔었네요.

새해 인사는 요 윗 댓글에 남겼어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2024-01-07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15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212


요즘은 날짜 가는 걸 모르고 살고 있다. 아니 요즘이 아니라 날짜 모르고 살아온 게 제법 오래 된 일이라고 느낀다. 그냥 매일 아침 일정표를 보면서 뭘 해야 하는 날인지 확인하고 그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잘 안되면 속상해 하거나 아쉬워하고, 어쩌다 잘 되면 살짝 자만심에 취해 내가 이렇게 잘난 놈이야 하는 생각을 짧게 해본다. 대게는 시간 안에 해내지 못해 다음 날로 미루고, 그 다음날에도 못 하고 다시 또 미루기도 한다. 그러다 이제 도저히 더는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어떻게든 마무리 하기도 한다. 어떤 일은 손을 대자마자 쉽게 끝까지 해내는데, 어떤 일은 시작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기만 하다가 다른 일로 옮겨가고 다시 손을 댔다가 또 멈추기를 반복한다. 얼른 끝내버리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계속 머리 속에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데, 자꾸만 그런 일들이 쌓인다. 그렇게 몇 개의 일들이 계속 쌓여 있으면 그 스트레스가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힌다. 


아직 창 밖이 밝아오기 전 새벽에 잠에서 깨어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보고, 일정표를 열어 오늘 일정을 확인하고 머리 속에서 쌓여있는 일들과 새로 시작해야 할 일들을 떠올려본다. 그러다가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어, 1212네. 기억해야 할 날짜들. 4.3, 4,19, 4.16, 5.16, 5,18, 10.26 그리고 12.12. 아, 여기에 10.29도 추가해야 하겠구나.


오늘은 꼭 넘겨야 할 일이 있다. 쌓여 있는 일들은 또 하루 뒤로 미뤄야 하겠구나. 일단은 급한 일부터 먼저 처리해야지. 마감에 쫓기면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오늘도 그게 될지 모르겠다. 아니, 무조건 되어야 한다. 중요한 일이니 안 되어도 되도록 만들어야 하겠지.


이런 날엔


날짜도 날짜인데, 오전에 일 때문에 통화를 한 어느 활동가에게 장시간 신세한탄을 들었다. 서로 바쁘고 어렵고 힘든 삶을 살면서 가끔 연락하고, 가끔 하소연도 하고, 가끔 따뜻한 밥 한 끼 사주는 관계인데, 최근 힘든 일들이 겹치면서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았다. 결국 몸이 망가져 며칠째 아프다고 했다. 그렇게 힘든 일이 있었으면 진작 얘기라도 좀 해주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렇게 혼자 끙끙 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좀 화가 나고 속이 상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불러내 맛있는 걸 사주며 함께 욕해주고, 함께 아파해주고 싶었으나,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하필 이런 날에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 슬프고 속상했다. 하필 이런 날에 바쁜 내가 원망스럽다. 


책 담기


이렇게 바쁜 날이라도 책 소식은 반갑다.
















오래 전 출판사에서 일할 당시에 김준 선생님의 책 작업을 맡았었다. 영업을 하다가 편집도 병행하기로 하고 초보 편집자가 된 후 두 권 가량 책을 낸 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전에 만든 책 한 권의 저자가 무척 까다로운 분이어서 애를 많이 먹었었는데, 김준 선생님은 정말 함께 작업하기 좋은 훌륭한 저자였다. 글도 깔끔해서 교정교열에 필요한 시간도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피드백도 빠르고, 답도 부드럽고 예의를 지키는 말투였다. 책을 다 만들고 나니 전라남도 어느 섬으로 초대해주셔서, 책을 갖고 찾아뵈었었다. 1박2일 동안 맛난 것들을 잔뜩 먹고 왔었다. 그 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다. 여전히 섬 이야기를 계속 쓰고 계시구나. 이 책은 조만간 사서 읽어야지.
















오늘 채효정 선생님이 이 책 북콘서트를 하시나보다. 페이스북에서 북콘서트는 못 오시더라도 이 책은 꼭 읽어 달라는 글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저자 중 한 명이다. 이 책도 꼭 사서 읽어야지.


오늘 이 바쁜 와중에 오랜만에 페이스북에서 출판계 선배들의 글들을 여럿 보고, 아주 오랜만에 댓글을 좀 달았다. 책 값을 얼마로 하면 좋겠냐는 한 선배와 표지 시안 3개 중에 하나를 골라달라는 다른 선배, 그리고 올해 마지막 신간 소식을 올리는 또 다른 선배. 모두 못 보고 산지 아주 오래되었다. 다행히도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인사를 건네 주시는 분이 계셔서 그 소중한 인연을 잠시 떠올려 본다. 새해에는 얼굴 한 번 보자고 하시는데, 과연 뵐 수 있을까? 억지로라도 시간을 만들어 찾아 뵈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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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2-14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책에서 보니 동업을 할 땐 상대편의 능력만 중요하게 보면 된다고 하던데
성격이 그 못지않게 중요하죠. 책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성격인지도 모르겠어요.

감은빛 2024-01-03 19:40   좋아요 0 | URL
페크님, 해가 바뀌어 답글을 쓰네요.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저는 성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몇 해 전에 정말 능력이 출중한 젊은 여성이 인턴으로 들어왔는데,
일은 정말 잘 하는 사람이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무척 힘들었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사람은 딱 인턴 기간 동안만 이력이 필요해 들어왔다고 했어요.
곧 다른 곳으로 이직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 사람을 겪은 후로는 능력 보다는 성격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어요.
 


일본 대학원생 인터뷰


한국 대학원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 학생들의 인터뷰는 여러 번 했었다. 다 기억도 못할 정도로 자주 있었다. 그때마다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고 자료도 많이 챙겨줬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는지 몰라도 일본 나고야 대학 환경대학원 학생이라고 하면서 인터뷰 요청이 이메일로 왔다. 메일을 받자마자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는데, 그 학생이 중간에 영어 기사 하나를 링크로 보내줬다. 열어보니 내 이름과 활동 내용이 담긴 기사였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싶었던 것이,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그 영어 기사를 썼다는 기자와 인터뷰를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언론 인터뷰도 제법 많이 했었는데,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해도 대체로 이름을 보면 아, 그때 했었지 하고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이긴 한데, 이 영어 기사를 쓴 한국인 기자 이름은 너무 낯설었다. 게다가 그 내용도 낯설었고, 심지어 사실관계가 잘못된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영어 기사만을 쓰기 위해 나를 인터뷰 했을 리는 없을테고, 같은 내용의 한글 기사를 영어로도 올린 것일텐데, 검색해봐도 그 기자 이름으로 된 한글 인터뷰 기사는 없었다. 나를 인터뷰 한 기자가 기사를 올리기 전에 나에게 최종적으로 사실관계 확인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그런 요청이 있었다면 저 사실관계가 틀린 내용을 그대로 뒀을 리는 없다.


내 생각에는 다른 인터뷰 기사와 내가 기고한 기사를 바탕으로 저 기자가 영문 기사를 쓴 것이 아닐까 싶다. 암튼 그 영문 기사 덕분에 일본 대학원생이 나와 우리 조합의 활동 내용을 알게 되었고, 내게 인터뷰 요청을 해온 것이다. 나는 당연히 인터뷰에 응했고, 사전에 질문지를 보내주길래, 아주 꼼꼼하게 상세하게 답변을 달아서 미리 보내줬다. 질문들이 조금 평이했고, 구체적이지 못하고 일반적인 내용도 있어서, 그냥 간단히 답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있어서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을 달았다. 그래서 답변을 적은 문서가 7쪽이 넘는 분량이 나왔다. 


다만 이 답변을 영어로 작성할 정도의 여유는 없어서 그냥 한글로 적었는데, 그 대학원생들이 일본어로 다시 번역하는데 애를 먹었을 것 같다. 물론 요즘은 번역기가 잘 되어 있긴 한데, 일상 용어가 아닌 전문 용어들의 번역은 또 그리 신통치 않은 것 같아서 세세하게 더 찾아보고 교차 검증을 해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쪽에서 일본어 원문과 함께 영어와 한글로 질문을 적어줬길래, 한글 질문이 좀 애매하거나 이상한 문맥이 있어서 문장 단위로 교차 검증을 하면서 정확한 질문을 파악했었다.


예전에 일본 대학생들하고 국제교류행사를 준비할 때에나, 출판사에 있을 당시에 해외에서 도서 주문이 오면 모두 영어로 소통했었는데, 그건 젊은 시절이었으니 가능했던 것 같다. 이젠 영어로 문장을 쓰려니 도무지 자신이 없다. 답장을 보내면서 한글로만 적어 보내서 미안하다고 언급했다. 관련 참고자료를 좀 챙겨서 보냈느데, 그것들도 모두 한글 자료라 미안하다고 했다. 다행히 인터뷰 하러 올 때에는 한국인 교수와 함께 올 예정이며 그 분이 통역을 맡아주실 거라고 답이 왔다.


그렇게 서로 이메일로 소통한 것이 지난 달 중순부터 지난 주 까지였다. 내가 미리 답변서를 자세하게 써서 보낼 것을 그쪽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무척 놀라며 매우 고맙다고 했다. 한국 언론이나 대학원생들에게 사전에 질문지를 받으면 늘 미리 답변서를 보냈었다. 그래야 인터뷰 당일 더 구체적인 내용들을 설명할 수 있고, 보다 정확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 이번에는 특히 내가 일본어를 모르고, 그쪽은 한국어를 모르는 입장이라 아무리 통역이 있어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조금 더 자세하게 써서 보낸 것 뿐이다.


그리고 오늘 일본 대학원생 10명과 한국인 교수 한 분이 왔다. 대학원생 10명 중에는 인도에서 유학원 학생 한 명과 이스라엘에서 유학원 학생 한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먼저 우리 조합에서 운영하는 제로웨이스트 매장을 꼼꼼히 둘러본 후에 내가 매장의 특징에 대해 설명을 했고, 지하 교육장으로 이동해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맨 처음에는 5명의 학생과 한국인 교수 한 분이 오실거라고 해서 매장에 있는 테이블에서 인터뷰를 할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학생이 10명으로 늘어난다고 연락이 왔다. 매장 내 테이블에는 최대 7명 정도까지 앉을 수 있어서 6명이 오는 건 괜찮은데, 11명은 도저히 앉을 수 없어서 어쩔수 없이 인터뷰 장소를 지하로 옮겼다.


인터뷰 때는 일본어와 영어로 질문이 오면 통역하시는 교수님이 우리말로 옮겨주셨고, 나는 우리말로 답하고 다시 교수님이 영어와 일본어로 옮겨 주셨다. 간단한 답변은 영어로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 역시 일상적으로 쓰지 않으면 말이 잘 나오지 않더라. 그대로 일본어와 영어 모두 흥미를 가지고 익히려고 노력했던 말들이라서 들으면서 조금은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평소 좀 더 열심히 익혔다면, 더 잘 알아듣고, 간단하게 답변도 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는 생각을 했지만, 다시 금방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리 쉽게 될 리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즐거운 경험이었고, 내가 나눠줄 수 있는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일본인들은 정말 계속 반복적으로 감사합니다! 를 얘기하더라. 대체 얼마나 많은 감사합니다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처음 내게 이메일을 보낸 후에 계속 소통했던 대학원생은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원을 병행하는 사람인데 정말 열심히 하는 학생이라고 한국인 교수님이 칭찬을 여러 번 했다. 인터뷰 할 때에도 내 옆에 앉아서 번역 앱으로 뭔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글로 변환하여 폰을 보여주곤 했다.


인터뷰까지 공식 일정을 다 마치고 학생들이 매장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는 시간 동안 나는 그동안 소통해왔던 학생을 포함해 한 두 학생과 개인적인 대화를 좀 나누고 싶었다. 가능하면 일본어로 말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하아! 정말 간단한 몇 가지 표현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일본어로 말을 건 후에 하고 싶은 말은 영어로 했다. 학생들을 데리고 온 한국인 교수님은 이렇게 친절하게 잘 해주실 줄 몰랐다면서 다음에는 정식으로 강의를 편성해서 강사비도 책정해서 오겠다고 했다. 계속 교류하면서 다음에 꼭 다시 오겠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예전에 프랑스 르망 대학교 교수님이 한국 협동조합 전공 교수님과 함께 와서 인터뷰를 했던 것이 외국인과 인터뷰 첫 경험이었는데, 이번이 두번째가 되었다. 그때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교수님이라고 들었고, 통역하러 함께 오시는 한국 교수님도 엄청 유명하신 분이어서 (게다가 엄청 깐깐하신 분이셔서) 긴장을 좀 많이 했었다. 이번에는 대학원생들이 오는 거라서 긴장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준비를 미리 다 해뒀기 때문에 아주 여유있게, 편한 마음으로 차근차근 질문에 답을 했다.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되면 아예 ppt 로 시각 자료를 띄워놓고 강의나 발표 형식으로 설명하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과 작별하면서 여러번 말한 것처럼 이 교류가 단발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있기를 바란다.


안면도


주말에 아이들과 안면도에 다녀왔다. 모처럼 일 없이 쉬는 주말이기도 했고, 아이들과 아무 생각없이 어디 놀러 가고 싶기도 했다. 친한 후배가 매년 연말 회사에서 숙박비로 쓴 경비를 정산해서 돌려받기 때문에 겨울마다 친한 사람들에게 숙소를 끊어 주곤 한다. 몇 해 전에는 그 비용으로 친한 선후배들 모아서 놀러 다녀오기도 했었다. 올해는 수능 시험을 본 우리 큰 아이를 위해 선물하고 싶다고 나에게 숙소를 예매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 온양온천 쪽에 숙소를 잡아달라고 했는데, 그쪽은 지금이 성수기인지 여의치 않다고 하더라. 그래서 아무데나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잡아 달라고 했더니 안면도의 해안가 펜션을 잡아주었다.


아이들이 오전엔 늦잠을 자는 편이라 점심때가 지나 데리러 갔고, 준비가 덜 되어 있어서 조금 기다렸다 출발했는데, 서해안 고속도로가 제법 막혀서 숙소에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해질 무렵이 다 되어 있었다. 나는 금요일 밤새 일을 하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상태로 에너지 음료와 커피를 들이붓고 운전을 시작했다. 혹시 졸릴지 몰라서 입에 씹을 사탕과 초콜릿을 미리 챙겨두었다. 도로를 달리면 졸립지 않은데, 차가 막혀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미 뒷좌석에서 자고 있었다. 누가 말을 붙여 줄 사람도 없고, 음악을 틀어놓아도 졸리긴 마찬가지였다. 사탕을 입에 넣고 간신히 졸음을 쫓으며 운전했다. 막히는 구간을 벗어나자 다시 금방 졸음이 달아났고, 또 막히는 구간이 오면 그땐 사탕의 힘으로 버텨서 졸음 때문에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전에 출판사에 다닐 때에는 정말 피곤한 상태로 운전하는 일이 잦았다. 욕심이 많아서 영업과 편집을 같이 했는데, 낮에는 영업하러 다니고, 밤에는 교정교열을 보느라 밤을 새곤 했다. 그런다고 월급을 더 받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러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때 졸음을 쫓기에 좋은 여러 방법들을 많이 시도해봤다. 내 결론은 작은 사탕이나 초콜릿이었다. 평소라면 달아서 입에도 대지 않는 것들이지만, 운전할 때 입에 넣으면 졸음이 싹 달아났다. 그래서 그 후로 그리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도 운전할 때에는 그런 것들을 꼭 챙기는 편이다.


숙소에 도착해서 조금 쉬니 해가 졌다. 창 밖으로 일몰 모습이 정말 멋졌다. 저녁을 먹기 위해 차를 타고 조금 이동해 식당을 찾았다. 저녁을 먹고 미리 검색해 둔 카트 체험장으로 이동했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웠다. 전화로 미리 물어보니 해가 져도 라이트를 켜 둬서 운전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 체험이 가능하다고 해서 우리 아이들 모두 따로 운전을 해볼 수 있었다. 카트를 운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핸들이 엄청 무거워서 (즉 파워핸들이 아니라서) 힘을 계속 주고 돌려야 했고, 엑셀과 브레이크가 모두 힘껏 밟아야 해서 쉽게 적응하기 어려웠다. 큰 아이는 그래도 재미있어 하고 금방 적응해서 운전을 잘 했다. 아주 작은 자동차 경주 트랙을 요리조리 움직였다. 작은 아이는 타기 전부터 무서워하며 걱정을 많이 했고, 타고 나서도 차가 마음대로 잘 움직이지 않아서 무서워했다. 재미를 느낄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초반에 일부러 작은 아이 뒤쪽에서 아이를 응원하며 몇 가지 요령을 알려주고 칭찬해주며 뒤따라 갔는데, 아이 입장에서는 집중하느라 힘든데 내가 자꾸 말을 시키는 것이 오히려 방해되는 것 처럼 느낀 것 같았다. 그래서 작은 아이를 믿고 그냥 내 페이스대로 즐겼다.


최고 속력이 약 40킬로미터 까지 나오는 작은 카트를 크게 커브를 돌아야 하는 트랙으로 모는 일은 스릴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다만 엔진 소음이 제법 컸고, 해 떨어진 이후라 찬 바람이 제법 불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트랙을 몇 바퀴 돌고 나니 손도 시렵고, 몸도 좀 추웠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아이들이 늦게까지 놀도록 내버려뒀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고 아이들은 과자 먹으며 늦게까지 놀았을 것이다. 다음날 조금 늦잠을 자고 일어나 숙소 정리를 하고 나와서 미로 공원에 갔다. 미로 공원은 제법 넓은 부지에 요일마다 돌아가면서 6개의 코스로 운영을 한다고 했다. 재미있었다. 나는 일부러 아이들을 앞세워 알아서 길을 찾아보라고 했다. 나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아이들이 이끄는대로 그냥 따라만 다녔다. 아이들은 중간에 좀 길을 헤매였으나 나중에는 어렵지 않게 길을 찾았다. 미로 곳곳에 스탬프를 찍는 거점이 4개 있었는데, 그걸 다 찍고 나가려면 좀 헤맬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스탬프 4개를 다 찍고 미로를 빠져나왔다.


점심으로 맛있는 걸 사주고 싶어서 여기저기 식당을 찾아 좀 돌아다녔다. 아이들 입맛에 딱 맞는 식당이 별로 없었다. 제법 오래 식당을 찾아서 차를 몰고 다니다가 지칠 무렵에 전라도 밥상이란 식당이 눈에 보이길래 전라도식 백반을 떠올려 들어갔는데, 간장게장 정식집이었다. 아이들은 간장게장을 안 먹어봤으니 먹어보면 맛있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좀 비싸도 정식을 주문했는데, 대실패였다. 아이들은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나만 혼자 3인분의 간장게장과 양념게장과 대하장을 다 먹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다른 반찬으로 밥을 맛있게 먹었다. 뭐 결과적으로 맛있게 먹었으니 됐지 뭐. 하면서 위안을 삼았다.


저녁 늦게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니 밤이었다. 야간 운전 때문에 좀 피곤했다. 정말 딱 씻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들어 버렸다.


이번 주도 일정이 많고 준비해야 할 일들도 많다. 무사히 잘 보내길 바라며, 힘을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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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신드롬


오래 전 영화 [쉬리]가 개봉했을 때, 주위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영화를 봤다고 얘기하곤 했었고, 언론에서도 다루는 걸 봤었다. 나는 이상하게 삐딱한 기질이 있어서 남들이 다 하는 건 일부러 피하곤 하는데, 남들이 다 보는 영화는 이상하게 보고 싶지 않았었다. 그래서 영화관을 찾지 않았다. 남들이 잘 보지 않을 것 같은, 그러나 나에게는 뭔가 끌리는 영화를 찾아보곤 했었다. 문득 [쉬리]의 관객수가 궁금해 찾아보니 580만 가량이다. 언젠가부터 천만 관객 영화가 종종 나오곤 했던 걸 생각하면 [쉬리]는 내 기억과는 달리 그렇게 크게 유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일까? 아니면 당시로서는 그 정도 관객수도 많았던 것일까? 내 기억에 비슷한 시기에 [쉬리] 보다 더 크게 흥행했던, 정말 내 주위에 안 본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영화 [타이타닉]의 흥행성적도 궁금해 찾아보았다.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했던 것으로 아는데, 우리나라에서는 590만으로 추정한다고 나온다. 재개봉 포함 전국 635만이라고 나온다. 그럼 확실히 당시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의 총 인원수가 적었던 것이다.


암튼 삐딱한 나는 저 두 영화를 일부러 보러 가지 않았다. 남들이 그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듣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두 영화는 아주 나중에 티비로 봤다. [쉬리]는 재미있었지만, 그냥 딱 재미있는 오락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그렇게 유행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과 일부러 극장을 찾지 않은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타이타닉]은 달랐다. 와! 영화의 스케일 자체가 달랐고, 그때까지 보았던 어떤 영화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압도하는 느낌이 있었다. 저 영화는 극장에서 보았으면 더 좋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올해 초 나는 우연히 작은 아이와 영화 [아바타 물의 길]을 극장에서 보았다. 원래 영화를 볼 계획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즉흥적으로 영화를 보자고 했고, 마침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들 중 제일 끌리는 영화가 바로 그거였다. 암튼 그렇게 아바타를 보고 또 한번 감탄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극장에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비나 태블릿으로 봤으면 이 정도의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 [쉬리]와 [타이타닉] 이야기를 한 것은 요즘 언론과 사람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 때문이다. 지금 이 분위기 어쩐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만 떠올려보니 딱 저 두 영화의 개봉 시기의 내 기분이 지금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외에 다른 영화들도 제법 있었을 것이다. 이 사회는 좀 과할 정도로 유행에 민감하고, 뭔가 하나가 회자되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그에 편승해 더 많은 이야기들을 퍼트린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만, 내 개인적인 기억에서는 저 두 영화가 제일 먼저 떠올랐을 뿐이다. 최근의 흐름으로 보면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나 [더 글로리]의 흥행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서울의 봄] 흥행은 두 가지 생각이 들게 한다. 일단은 12월 12일이 다가오는 시기에 저 군사 쿠테타의 부당함과 죄상을 전 국민들에게 다시 상기시키고, 그래서 다함께 전씨와 그 일당들에게 분노하는 국민적인 유행을 일으킨 것에 대한 반가운 감정이다. 아마 저 영화가 이렇게까지 흥행할 수 있는 요인 중에는 전씨와 노씨의 죽음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과거 영화 [26년]은 제작과정에서 수차례 외압을 받아 프로젝트가 중단되거나 와해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고 들었다. 게다가 전씨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이 영화에 저렇게 유명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최근 며칠 동안 언론과 각종 유튜브 채널에서는 앞다투어 그날의 실제 이야기, 영화 속 배역의 실제 인물들, 당시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결정적인 순간들 등의 다양한 연관 콘텐츠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런 내용들이 충분히 널리 알려지는 것은 이 영화의 힘이자, 매우 고무적이고 바람직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도둑질 했던 독재자의 죽음 이후 다시 또 다른 군부 독재자가 내란을 통해 정권을 훔친 과정을 잘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이후 우리나라는 87년까지 많은 희생을 치르며 간신히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으나, 그것은 제도적 민주화에 그쳤을 뿐, 살인마이자 학살자의 친구가 다시 권력을 손에 쥐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후 삼당 야합으로 이뤄진 소위 말하는 문민정부 역시 권위주의 정권으로서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얼마나 많이 퇴보하게 만든 사건인지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면 좋겠다.


두 번째 드는 생각은 아쉬움이다. 물론 나는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내 의견을 잘못된 편견일 수도 있다. 일단 [서울의 봄]이란 제목은 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광주 학살의 간접적인 원인이 된 이 일로 인해 1212 군사 쿠테타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그 사건 말이다. 결국 오지 못한 '서울의 봄'을 제목으로 쓴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 이 답은 나중에 영화를 본 후에 더 고민해봐야겠다.


이 영화는 결국 내란이 성공해 군대 내부 일부 장교들의 사조직이었던 하나회와 그 수장인 전씨가 권력을 손에 넣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게다가 대체로는 실제 역사적 사건의 흐름을 담아냈겠지만, 일부 내용은 현실과 다르게 그렸다고 들었다. 이미 성공한 군사 쿠테타를 세부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폭도들을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거둔다. 비록 전씨와 노씨는 죽었지만, 당시 쿠테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폭도들 중 다수는 아직 막대한 부와 권력을 틀어쥐고 잘 살고 있다. 혹시 이들은 이 영화를 보며 자랑스럽게 자신의 무용담을 떠올리지는 않을까? 특히 저 내란을 주도했던 폭도들의 두목인 전씨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생각은 좀 과한 것일 수 있다. 다만 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영화라는 틀로 담아낼 때 그 영향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스불재? 누칼협?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내가 속한 여러 조직들은 서로 어울려 노는 자리에서 초성 퀴즈를 자주 하곤 했다. 나와 친한 사람들은 내가 초성 퀴즈를 잘 할 거라고 예상하며, 문제가 나오면 나를 보곤 했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초성 퀴즈를 정말 잘 하지 못했다.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의 뇌는 초성만 가지고 그에 맞는 특정 단어를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몇 년 동안 종종 초성 퀴즈를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순발력이 좋은 몇몇 사람들이 유난히 잘 맞추는 것을 깨달았다. 약간의 선입견을 갖고 말하자면 저들은 그다지 어휘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암튼 그랬다.


초성을 단어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분명 아는 사람이 맞는 것 같긴 한데, 그가 누구인지 얼른 기억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아주 친한 사람과 가족들의 얼굴을 못 알아보기도 했었다. 어쩌면 나는 시각적인 정보를 빠르게 내가 아는 정보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초성 퀴즈에 유난히 약한 것처럼 줄임말에도 약한 편이다. 아, 그런데 초성 퀴즈는 눈으로 보고 단어를 유추하는 것이라 시각 정보가 중요한 것이 맞지만, 줄임말은 기본적으로 발음으로 단어를 유추하는 것이라 또 성격이 다르긴 하다. 둘 다 전체 정보가 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부 정보만을 제한적으로 제공한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물론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널리 퍼지는 줄임말들이 있고, 이미 익숙해진 줄임말은 읽거나 듣는 순간 바로 본 뜻과 연결된다. 다만 요즘은 젊은? 아니 어린? 암튼 육체적 나이로든 문화적 나이로든 나이 차에 따라 유행하는 줄임말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다.


아, 내 지인들이 내가 초성퀴즈를 잘 할 거라고 오해하는 이유는 일반적인 상식 퀴즈와 같은 것들을 상대적으로 잘 하기 때문이다. 한때 국문과 전공이었다는 점, 편집자였다는 점 등이 그런 오해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와 친한 다른 국문과 전공자와 편집자들도 초성퀴즈는 썩 그리 잘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것과 그것은 크게 관계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아이들이 대화할 때 전혀 모르는 단어가 들리곤 한다. 그 뜻을 물으면 아이들은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나는 외국어 아니 외계어라도 들은 느낌이 든다. 큰 아이의 자세한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안되는 경우도 자주 있다. 다른 적절한 표현이 분명 있을텐데, 왜 저렇게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표현을 일부러 쓰는 걸까? 저 아이들은 모두 저 표현의 정확한 표현을 알고 쓰는 걸까? 하고 궁금해지기도 한다.


오늘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저 두 단어를 보았다. 스불재와 누칼협. 전혀 뜻을 짐작할 수 없는 단어였다. 평소 하는 것처럼 검색을 해 보려다가 한번 맞춰보고 싶어서 조금 생각을 해봤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연관되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검색 대신 댓글들을 읽었다. 댓글들 중에도 정확한 뜻을 알려주는 것은 없었다. 한 절반 정도는 나처럼 그게 뭐냐는 질문을 남기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려주지는 않았다. 음, 결국 검색을 해야겠네 하며 새 창을 띄우려다가 갑자기 어떤 느낌이 떠올랐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이것저것 떠맡은 일들이 많아 여러가지 일들의 마감에 쫓기고 있다는 뉘앙스의 글을 쓰면서 저 두 단어를 썼다. 갑자기 누칼협의 칼이 그 칼이라고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누가 칼로 협박한 것도 아닌데' 라는 말이 떠올랐다. 스불재는 좀 더 고민하다가 갑자기 신해철 형님의 노래 가사가 문득 떠올랐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 즉, 시시각각 다가오는 여러 원고 마감에 쫓기는 이 상황이 남 탓이 아닌 제 탓이란 의미다.


여기까지 이해하고 나니 동지를 만난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나 역시 딱히 원하지는 않았지만, 또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은 이런저런 일들을 자주 떠안는 편이라 동시에 여러 개의 마감에 쫓기는 일이 잦다. 내일은 아이들과 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는데, 월요일 오전까지 마쳐야 할 일을 아직 절반도 못 했기 때문에 이 새벽까지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일하다 말고 약간의 리프레쉬를 위해 서재에 글을 써본다. 자, 이제 다시 일하자. 내일 운전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잠들어야지. 


마지막으로 책 이야기















어쩌다 이 책의 북콘서트 진행을 맡았다. 미리 책을 다 읽어야 재미있는 질문도 뽑고, 원활하게 진행을 할 수 있을텐데. 다가올 10일 안에 공부모임도 있어서 읽어야 할 책이 또 한 권 있다. 두 권을 최대한 빨리 읽으면서도 내용을 잘 이해할 방법을 터득하면 좋겠다. 아! 빨리 일하자. 빨리 책 읽고 빨리 대본도 작성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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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2-09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의 봄...겁나 재밌게 봤습니다.
스토리를 다 알았지만...배우들의 연기가 보는 내내 몰입하게 되더군요.
근래 본 한국영화 중 최고였습니다..^^

감은빛 2023-12-11 18:50   좋아요 0 | URL
네, 야무님.
보신 분들 모두 연기가 좋았다고 하시더라구요.
편집을 잘 했다는 분들도 계셨구요.
저도 기회를 만들어 꼭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