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데 가끔 뭘 몰라
정원 지음 / 미디어창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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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화를 보고 있자니 만화에 심취했던 어릴 적 기억들이 떠올랐다. 세상 어떤 것보다 재미있었던 기억들이었다. 정원이 그리고 쓴 만화는 어린이들에게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일깨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날들의 감정과 함께 말이다.

 


김정훈은 열한 살의 초등학생이다. 새학년이 되고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 같아 좋다. 다만 여자와 남자를 짝꿍으로 앉힌다는 게 조금 별로다. 정훈이는 석진이랑 앉고 싶다. 석진이는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는 아이다. 정훈은 같이 앉고 싶은 사람과 짝꿍을 하고 싶다고 일기장에 적어 선생님께 건의한다. 앉고 싶은 사람과 앉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우연히 정해진 짝꿍과 친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금을 그어놓고 넘어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지만, 학교생활을 함께하다 보면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우산은 소중해에서는 우산이 필요한 아이에게 우산을 전해주는 따뜻한 정훈이를 만날 수 있다. 누나를 기다리던 아이였음에도 자기는 집이 가깝다며 우산을 건네주고 빗속을 달리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정훈이다. 돌려받은 우산을 펴자 그곳에는 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다만 수채화 물감으로 색깔을 칠해 옷에 물감이 묻는 일이 생기긴 했다. 정훈이 더 어렸을 때 비 오는 날 우산을 건네준 언니가 있었다. 이름 모를 언니가 베풀어준 친절에 정훈이도 우산을 건네줄 줄 아는 따뜻한 아이가 되었다.




 


소중한 것은 이처럼 많다. 바뀐 짝꿍도 소중하고, 떡볶이도, 여름방학도 소중하다. 할머니가 맛없는 짜장라면을 끓여줘도 그것 또한 소중하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고, 원하는 바를 확실히 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많은가. 동물을 사랑할 줄도 안다. 정훈이는 소중한 것을 아는 착한 아이다.




 


정훈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름만 듣고는 성별이 구별되지 않는다. 차별을 배제해 어린아이들이 바라볼 평등한 세상을 보여준다. 정원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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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방
엘리너 파전 지음, 이도우 옮김 / 수박설탕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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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는 나이가 들어서도 우리의 마음을 훔친다. 책으로 가득 찬 작은 책방에 앉아 있는 소녀를 상상해본다. 책먼지들이 흩날렸을 공간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을 소녀. 읽지 못할 책이 없으며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다. 보물찾기와도 같았던 공간에 머물렀을 소녀는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읽을 수 있는 책. 작은 책방의 먼지 속에서 태어난 책이다. 동화를 읽고 자란 소녀는 어른이 되어서도 동화를 읽는다. 추억과 감동이 공존하는 순간이다.


 

한평생 머리카락만을 위해 살았던 여섯 공주 이야기 일곱 번째 공주는 행복은 여왕이 아니라 자유롭게 삶을 살 수 있을 때라는 것을 말한다. 머리카락이 가장 긴 공주가 여왕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유모들은 공주들의 머리카락을 감기고 빗겨주었다. 세계의 왕자가 찾아왔을 때 여섯 공주의 머리카락 길이는 똑같았다. 일곱 번째 공주만이 빨간 손수건을 풀어 헤쳤을 때 소년처럼 짧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레몬 빛깔 강아지는 가난한 나무꾼이 공주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다. 안데르센의 동화처럼 닮았으면서도 다른 색깔을 지녔다. 지혜와 빛나는 재치를 발한다.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숲에 나가 나무를 베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조 졸리에게 남은 거라고는 낡은 의자와 구리로 만든 어머니의 결혼반지뿐이었다. 새로운 삶을 위해 길을 떠난 조 졸리는 레몬 빛깔의 스패니얼 개를 구하고, 금빛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를 구했다. 팔이 부러진 왕실 숲의 나무꾼을 보살핀다. 길 잃은 동물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줄 알았던 조 졸리는 꿈속의 예언대로 행동하여 공주의 사랑을 얻는다. 흔한 이야기이지만 어렸을 적 상상의 나래로 빠지는 듯 흐뭇하다.


 

견습생 신분임에도 실력이 뛰어난 작은 재봉사는 이 나라 최고의 재봉사였다. 여왕은 일흔 살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않아 왕위를 계승할 자녀가 없었다. 이웃 나라 왕의 고모 역할을 했던 여왕이 나라를 통치할 젊은 왕의 결혼을 재촉했다. 결혼 생각이 없었던 왕은 열아홉반의 나이, 허리둘레 19인치반인 사람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며 가장무도회를 열어 결혼할 귀족 아가씨를 찾겠다고 했다. 밤을 새워가며 드레스를 만들었던 로타는 드레스를 입고 가 무도회에 참석할 귀족 아가씨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공작 따님의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던 방 밖에 시종이 기다리고 있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었다.

 


, 그랬습니다. 아시다시피, 시종은 그냥 시종이니까요. 단지 젊은 왕은 조금도 결혼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자리에 시종을 보냈던 것입니다. 시종은 로타에게 첫눈에 반했고, 첫 번째 무도회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정해졌습니다. 요거트 아가씨든 캐러멜 아가씨든 밀크젤리 아가씨든, 안타깝지만 전혀 기회에 없었던 거예요. (111페이지, 작은 재봉사중에서)

 


작은 재봉사신데렐라와 이야기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신데렐라였다면 젊은 왕이 시종으로 가장하여 현명하고 지혜로운 아가씨를 찾았을 거다. 하지만 작은 재봉사에서 젊은 왕은 결혼이 싫었으며, 시종은 시종일 뿐이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동화다.

 


샌 페리 앤은 인연에 관한 이야기다. 어둡고 찌푸린 얼굴을 한 채 완두콩을 따는 캐시 굿맨은 늙은 바이닝 부인의 감시를 받는다. 소녀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까 궁금하다. 들판 연못가를 바라보는 두 여성 마을 의사의 아내 레인 부인과 학교 선생님 반스 양이 있다. 냄새가 지독할뿐더러 쓰레기로 가득 찬 연못을 청소하기로 한다. 레인 부인과 반스 양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연못의 잡동사니를 주워 올렸다. 밤이 깊어지자 진흙투성이 팔로 집으로 돌아갔다가 연못 한복판에 있던 어린 소녀를 발견했다. 샌 페리 앤 인형을 구해주지 않았다며 울고 있었다. 도자기 인형의 머리를 찾자 캐시 굿맨은 샌 페이 앤를 외쳤고, 레인 부인은 셀레스틴을 외쳤다. 19392차 세계대전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던 아이들은 여기저기 흩어졌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어린 소녀, 아끼던 인형을 잃어버린 소녀는 찌푸린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베푼 친절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부지런한 나라의 젊은 왕의 대신들은 그에게 이웃 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라고 조언한다. 청혼을 위해 간 북쪽, 남쪽, 동쪽 나라에서 청혼을 부디 거절해달라는 시를 읊는다. 울타리로 막힌 서쪽 숲은 덤불숲이 가로막고 있었다. 왕이 쓴 시를 소중하게 간직했던 청소부 셀리나의 손을 잡고 서쪽 숲에서 청혼의 시를 읊는다. 고아원에서 발견됐던 셀리나는 서쪽 숲의 공주였다.

 


서쪽 숲은 우리 마음속의 동화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열리지 않은 미지의 숲. 마음을 열었을 때만 보이는 숲이다. 혼자서는 안되며 누군가와 함께했을 때라야 비로소 열리는 숲이다. 진실한 마음과 자질을 갖추었기에 가로막힌 울타리를 영원히 떼어낼 수 있었다.

꿈을 간직한 소녀는 동화와 더불어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작은 책방을 사랑하는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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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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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성장은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시련과 고통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삶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확고한 신념이 있더라도 영향을 끼치는 법이라는 걸 우리는 삶을 통해 알아간다.

 

영원한 이방인의 작가 이창래의 신작 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이 출간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계의 피가 약간 섞인 백인 이십 대의 틸러 바드먼이다. 틸러가 어렸을 때 엄마는 이유 없이 가출하여 아버지와 둘이서 살았다. 엄마가 떠난 뒤에도 아버지는 변함없이 아버지의 자리를 지켰으며 혼자서 말없이 울었을지언정 틸러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을까. 틸러는 내면에 커다란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식당에서 접시 닦던 일을 하던 틸러는 친구의 대타로 컨트리클럽의 캐디 일을 했다가 퐁 로우를 만났다. 퐁 로우는 중국계 미국인 제약회사의 화학자였다. 그를 만나 틸러의 삶은 변한다. 학기를 다 마치지 않고 호놀룰루, 중국 선전, 마카오, 홍콩 등을 다니며 새로운 사업 아이템 자무를 유통할 계획에 따른다. 틸러는 퐁을 아버지처럼 의지했고 따랐다.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을 준비가 되었다고 해야 맞겠다.

 

틸러는 현재 증인보호프로그램을 받는 밸과 그녀의 아들 빅터 주니어(비즈)와 살고 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퐁의 신용카드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엄마가 자기를 떠났던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밸이 사라지자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에게 버려진다는 건 두려움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틸러는 타국에서의 일 년을 떠올렸다. 타국에서의 일 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틸러가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말에 집중하려 했던 것 같다.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의 발자취에 마음이 쓰였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 나는 내가 극도의 고난을 견딜 수 있다는 걸 안다. 나는 갈려 나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픔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다. 그런 찡그린 표정을 상상하기만 해도 무너질 것 같다. 아마 모두가 그럴 것이다.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겠지. (160페이지)

 

틸러가 밸을 보호하려고 했던 행동과 다르게 밸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비즈와 다르지 않게 말이다. 자살하려던 밸을 퐁의 날카로운 칼로 구하면서 그는 달라졌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한 것 같다. 드럼의 저택에서 퐁을 기다리는 일념으로 그들이 시키는 일을 했던 것처럼. 그가 하는 말은 어떤 것이든 믿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 누군가를 지킬 마음의 변화를 느꼈다는 게 옳을 것 같다.

 

나는 늘 내가 태어난 직후부터 어정쩡한 것들의 강에 담긴 것만 같았다. 그냥 괜찮음이라는 투명한 잉크가 내게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일부 사람들은 즉시 그 점을 알아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결국 나에 대해 알고 나서 , 그렇군.’ 하는 표정을 잠시 짓는다. 보통 그 표정은 출구로 안내되는 전주곡이었다. (551페이지)

 

세상을 떠도는 자들을 떠올려본다.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들. 작가는 틸러와 이민자 퐁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세계에서 헤맸을 한 남자를 상상해본다.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고 살아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그 해답에 다가가고자 했다. 확신의 감정, 마음의 변화와 성장을 알려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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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01-08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창래 작가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주제인 것같아요. 정착이 어려운 외로운 사람들, 떠도는 자들이요.
저도 관심도서로 올려놓고 아직 못읽은 책인데 잘 보고 갑니다.
 
치치새가 사는 숲 오늘의 젊은 작가 43
장진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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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고통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과거의 불행한 기억은 현재를 고통스럽게 한다. 과거의 기억을 붙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치도록 과거에 매달리다 보면 현재를 살아낼 수 있을까.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앞에 두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우리들의 열네 살 시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내 이름은 치치림. 치치새가 사는 숲이라는 뜻이다. 치치새는 아주 진귀한 새로, 세상에 존재하는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그 새는 마음씨가 고운 사람에게만 보인다. (7페이지)





 

초등학교 때 왕따였던 주인공은 평준화에 의해 온조중학교에 배정되었다. 팥죽색의 교복 색깔 때문에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던 학교였다. 왕따의 피해자였던 학생이 가해자가 되는 일은 흔하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던 달미의 마음에 들고자 했던 행동 때문이었다. 어른이 보기에 발칙한 소녀일 수도 있다. 모두가 보는 사물함 위에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던 소녀라서 그랬던 걸까. 수업 시간에 나가서 쉬라는 교사의 말에 진짜로 쉬고 있었던 소녀는 학주한테 뺨을 맞는다.

 


여상을 다니던 언니가 집을 떠나 깡촌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언니의 생일에 미역국을 가져갔던 소녀는 봄옷을 주러 갔다가 언니 회사의 차장님차에 올라탔다. 소녀는 왜 아무렇지 않게 차장님의 차에 올라탔던 걸까. 그가 차장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을 알았던 것일까.

 


소녀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왜 아무도 소녀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것일까. IMF 이후로 엄마는 눈썹을 까맣게 물들이는 일을 하고 엄마를 너무 사랑하는 아빠는 엄마의 곁을 지킬 뿐이다. 그렇다. 부모는 소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떤 학교에 다니는지, 어떤 친구를 사귀는지. 고작 열네 살 소녀에게 용돈은 스스로 벌어 쓰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방임 또한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어쩌면 학대에 가까운 게 아닐까.

 


성폭행당한 게 고작 만 열두 살이었다. 경찰서에서 질문할 때 차장을 보호하려고 했다는 게 안타깝다. 이제 소녀는 서른 살이 넘은 여성이 되었다. 가려움증으로 병원에 다니면서 언니에게 졌던 빚을 다 갚았다. 마지막에야 드러나는 진실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왜 언니마저 소녀를 고통스럽게 했느냐 말이다.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했던 소녀였다.

 




불행한 과거의 기억과 현재가 맞물려 혼재한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숲, 치치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와 가려움에 온몸을 긁어 차라리 게가 되고 싶은 현재까지. 진짜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다. 딸들에게 남자를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게 서글프다. 불안한 사회가 가진 딜레마다. 보호받지 못했던 소녀는 무관심이라는 학대에 노출되고, 또 다른 폭력의 희생양이었다. 불행한 기억은 현재를 옭아매 고통스럽게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가진 두 얼굴을 마주했다. 타인보다 오히려 더 폭력적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무마하려 했다. 과거의 기억에 그만 아파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 너의 삶을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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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듣는다
루시드 폴 지음 / 돌베개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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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루시드폴이 나오는 유튜브를 보았다. 그가 제주에 머문다는 것과 이름만 익숙할 뿐, 그의 사적인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글처럼 조곤조곤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음악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거라는 걸 실감했다. 자연의 소리를 담는다며 마이크와 스피커를 들고 제주 중산간을 헤매는 그를 상상해본다. 자연의 소리가 음악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익숙하게 듣는 바닷소리가 음악의 한 형태로 나타나면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정을 느낄 것 같다. 파도치는 소리, 게나 바다 생물이 살아 움직이는 모든 소리에 집중하게 되지 않을까.


 

모두가 듣는다는 소리로 나타낼 수 있는 음악의 세계를 말하는 산문이었다. 날 것의 소리, 자연이 살아 움직이는 소리, 그것을 녹음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소리의 세계였다. 우리는 귀를 열고 음악을 들을 것이며, 귀 기울여 소리에 집중하지 않을까. 제주에서 감귤을 키우는 농부이기도 한 저자는 소리의 경이로움을 말하였다. 식물이 물소리를 듣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뿌리를 뻗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식물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햇볕뿐 아니라 물소리를 향한다는 것도 새로운 발견이다. 식물들의 세계, 특히 소리가 가진 영향은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가 말이다.




 


음악은 누구의 것인가, 만드는 이의 것인가, 듣는 이의 것인가. 들려주는 이의 것인가.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하지만 음악은 '흐르는' 것일 뿐, 누구의 것도 아니다. 강물이 누구의 것도 아니고 바람이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듯이. 내가 만든 음악조차 나의 것이 아닌, 나와 함께 춤추는 세상 모두의 것이다. (19~20페이지)

 


루시드폴의 녹음수첩을 읽는 순간은 우리로 하여금 음악이 머무는 순간으로 이끈다. 앨범을 만드는 작업의 고유한 느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앨범이란 집 하나를 잘 짓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음악을 대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자기의 것을 만드는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신중하고도 열정적인가. 최선을 다하는 자세에서 좋은 작품에 대한 만족과 기대감이 높아지는 것 같다.


 

Being-with위한 라이너 노트에 노트에 실린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변해가는 제주, 나무들을 쓰러뜨리고 새 건물이 올라오며 들리는 삐걱거리는 자연의 소리를 음악으로 나타냈다. 가사가 없어 귀 기울이며 음악에 빠져들게 된다. 루시드폴이 추구하는 세계에 조금은 다가선 느낌이다.


 

아주 오래전, 좋아하는 음악을 테이프에 녹음해 들었었다. LP 음반을 살 수 없을 때 값싸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게 카세트테이프였다. 음악사에 좋아하는 음악을 메모해가면 얼마간의 돈을 받고 녹음해 주었었다.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듣던 때, 음악이 가진 행복이었다. 저자의 글을 읽고 있자니 음악을 듣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던 과거의 날들이 떠올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시드폴이 화학박사이며 귤 농사를 짓는 농부라는 것, 꽤 많은 음반을 냈던 음악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음악 하는 사람은 아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다.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여 음악으로 표현하는 자체가 새로운 발상이다. 음악을 듣다 보면 처음에는 거슬렸던 소리에 점차 익숙해져 편안한 순간에 이르게 된다. 루시드폴이 추구하는 음악을 이해하는 순간이다. 음악처럼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의 음악과 닮아있다. 이렇게 한 음악가, 한 작가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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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23-12-3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한 시간이 넘는 곡도 있다고 하던데, 루시드폴은 싱어송라아티에서 음향연구가의 길로 가나 봅니다. 귤을 사면 앨범을 서비스로 준다고 했던 홈쇼핑 방송 생각도 나고요.

루피닷 2024-01-01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