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아이 21. 대문 앞에서 (2013.10.5.)

 


  자전거마실 나가기 앞서 대문을 연다. 대문을 열어야 샛자전거와 수레 붙인 긴 자전거를 밖으로 내놓을 수 있다. 대문을 열면 아이들이 먼저 대문 밖으로 나온다. 큰아이는 집부터 마당을 거쳐 대문 앞으로 나오기까지 춤을 춘다. 춤을 멈추지 않으면서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고, 작은아이는 누나 곁에서 누나가 하는 양을 따라하거나 꽁무니를 좇는다. 우리 집 앞 논은 아직 더 익어야 벨 수 있겠네. 가을바람 듬뿍 마시며 나들이를 가자. 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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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302) 그동안의 1 : 그동안의 밀렸던 이야기

 

막걸리 몇 잔을 들고 취기가 돌기 시작하자, 그동안의 밀렸던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채규철-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한터,1990) 95쪽

 

  “취기(醉氣)가 돌기 시작(始作)하자”는 “술기운이 돌자”로 손보고, “나오기 시작(始作)했다”는 ‘나왔다’로 손봅니다.

 

 그동안의 밀렸던 이야기
→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
→ 그동안 못 나눈 밀린 이야기
→ 그동안 못했던 밀린 이야기
 …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사이라면, 나누고픈 이야기가 많이 쌓입니다. 이야기가 잔뜩 밀립니다. “못 나눴던 이야기”들, “밀리고 밀린 이야기”들,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나누고 싶습니다.

 

 그동안에 겪었던 일 (o)
 그동안의 겪었던 일 (x)

 

  어찌 지냈는지 궁금하기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묻습니다. “그동안의 일은 어떠했니?” 하고 묻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그동안 겪었던 일”이지, “그동안의 겪었던 일”은 아닙니다. 4341.4.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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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몇 잔을 들고 술기운이 돌자, 그동안 밀린 이야기들이 나온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96) 그동안의 2 : 그동안의 거짓말

 

앗, 그동안의 거짓말을 다 알고 있었던 건가? 진심으로 무안했다
《레아·여유-따뜻해, 우리》(시공사,2012) 42쪽

 

  “알고 있었던 건가?”는 “알았던가?”나 “알았나?”로 손질합니다. ‘진심(眞心)으로’는 ‘참으로’나 ‘더없이’나 ‘몹시’나 ‘마음 깊이’로 다듬고, ‘무안(無顔)했다’는 ‘부끄러웠다’나 ‘낯뜨거웠다’나 ‘창피했다’로 다듬습니다.

 

 그동안의 거짓말을
→ 그동안 했던 거짓말을
→ 그동안 들려준 거짓말을
→ 그동안 한 거짓말을
 …

 

  한국말은 토씨 ‘-의’ 아닌 움직씨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그동안의 거짓말”이 아닌 “그동안 했던 거짓말”이요, “그동안의 일”이 아닌 “그동안 겪은 일”이나 “그동안 한 일”입니다. “그동안의 그리움”이 아닌 “그동안 그리워 한 마음”이요, “그동안의 사연”이 아닌 “그동안 쌓인 이야기”나 “그동안 있던 이야기”예요. 4346.10.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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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그동안 했던 거짓말을 다 알았던가? 참으로 창피했다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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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집 23. 노을빛 2013.10.5.

 


  마을 뒤쪽에 멧자락 드리우니, 해가 멧봉우리 타고 넘어가는 모습만 볼 뿐, 해넘이를 보지는 못한다. 해가 뜰 적에도 마을 들판 저 앞자락에 있는 멧봉우리로 넘어오는 모습만 볼 뿐, 해돋이를 보지는 못한다. 태평양을 코앞에 낀 바닷마을이라면 바람이 모질게 부니까, 앞뒤로 멧자락에 포근히 감싸는 마을에 따사롭고 볕도 넉넉하달 수 있지만, 노을빛은 좀처럼 구경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은 가을날 노을빛 멀리멀리 퍼진다. 마을 뒤쪽 멧봉우리 너머로 아리땁게 퍼지는 발그스름한 기운이 우리 집 마당으로도 스민다. 나도 아이들도 노을빛 받으며 마당에서 깜깜해질 때까지 논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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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빗 소로우

 


  나는 문을 열고 살기를 즐긴다. 도시에서 살던 지난날이나 시골에서 사는 오늘날이나 문을 걸어 잠그지 않을 뿐 아니라, 유리문으로 늘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곳에서 지내기를 즐긴다. 서울에서 혼자 살던 지난날에는 나무로 지은 적산가옥 2층에서 툇마루 문 활짝 연 채 지내기 일쑤였고, 인천에서 짝을 이루어 살던 지난날에도 옥탑집 마당에서 동네와 먼 하늘을 내다보며 지내기 일쑤였다.


  시월 오일 저녁해 기울 무렵, 마루문을 거쳐 바깥 하늘에 발그스름한 빛이 서리는 모습을 본다. 아이들한테 만화영화를 보여주다가 부리나케 멈추고는 두 아이를 부른다. “얘들아, 마당으로 나가자!” 마당에 서서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는 하늘바라기를 한다. “벼리야, 보라야, 저기 봐. 저 하늘빛이 바로 노을빛이야.” 발그스름하다가 노르스름하다가 이내 짙붉게 물드는 하늘빛 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들에서 일하던 할매 할배 모두 저 하늘빛 보셨을까. 등이 굽은 탓에 못 보실까. 경운기 모느라 옆에 눈을 팔 수 없어 못 보시려나. 풀벌레 노랫소리 감겨드는 마당에서 노을빛을 누리는 아버지 곁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뛰어논다. 아이들 노랫소리는 풀벌레한테 스며들고, 풀벌레 노랫소리는 아이들한테 젖어든다.


  1991년에 이현주 님이 한국말로 옮긴 《소로우 평전 : 자유를 생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을 떠올린다. 이현주 님은 《소로우 평전》을 누가 썼는지 안 밝힌다. 왜 안 밝힐까. 아무튼, 《소로우 평전》을 읽으면, 소로우는 어릴 적부터 ‘나는 나다’ 하고 깨달은 사람이다. 젊은 날에 씩씩하게 냇물 따라 나들이를 다니고 숲속에서 오두막을 짓고 산 까닭 또한, ‘나는 나다’가 무엇인가를 더 깊이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다움’이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 말뜻은 ‘나다움’이라고 한다. 곧, 내가 나인 줄 느낄 때에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알기 마련이고,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알 때에 사랑과 꿈을 짓는 삶을 누리려 하기 마련이다.


  문득 김지하 님을 생각한다. 김지하 님은 왜 이녁 삶을 사랑하고 꿈꾸는 길을 아직도 못 걸어갈까. 박경리 님이 이녁 삶을 사랑하고 꿈꾸는 길을 걸었던 모습을 아직도 못 알아챘을까. 글보다 흙을 만지고, 글을 만지고 싶으면 흙과 함께 글을 만지면 될 텐데, 헨리 데이빗 소로우 님 글을 읽으며 흙빛과 흙내음과 흙숨과 흙바람을 누릴 수 있는 삶벗을 만나고 싶다. 4346.10.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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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12 12:43   좋아요 0 | URL
가끔씩 시골에 내려가서 사는 모습을 꿈꿀 때마다 저도 생각합니다.

맑은 바람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마루가 넓고 또 마당까지 넓은 집이었으면 좋겠다.
높다란 내 방에서 한 발짝만 걸어 나오면 휘영청 밝은 달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집이었으면 좋겠다.
창문 하나만 열어젖히면 풀벌레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를 실컷 들을 수 있는 그런 집이었으면 좋겠다, 하고 말입니다.

『소로우 평전』은 참 귀한 책이 된 듯한데, 나중에라도 혹시 새 책으로 나오게 된다면 꼭 놓치지 말고 읽어야 겠다 싶습니다.

파란놀 2013-10-12 14:57   좋아요 0 | URL
소로우 평전을 누군가 썼을 텐데, 제대로 잘 쓴 책은
찾기 만만하지 않을 듯해요.
어쩌면 저작권이 걸려서 번역 안 할는지 모르겠고요 ^^;;

oren 마음으로 바라는 그 고운 시골집
머잖아 누리실 수 있기를 빌어요~
 
더 크레이터 The Crater 2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262

 


살아가고 싶어 살아간다
― The crater 2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
 도영명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1.4.25. 9000원

 


  도시인 인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김상용 님이 쓴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를 배웠습니다. 교과서와 학교에서는 이 시를 시험문제로만 다루었고, 제대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밭이 한참갈이”가 무엇인지 지식으로 외워야 했고,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와 같은 말마디에서 괭이와 호미가 어떻게 다른 줄 보지도 못하고 겪지도 못했습니다.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같은 말마디에서는 이 글월이 빗대는 숨은 뜻을 외우기만 하고,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같은 말마디에서는 새가 들려주는 노래가 어떠한가를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그러니,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가 어떤 마음인지 배우지 못했어요. 마지막 말마디 “왜 사냐건 웃지요” 같은 글월은 어떤 넋이요 삶인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재미로 삼아 말장난 하듯 읊는 말인 듯 가르치고, 동무들은 우스갯소리처럼 이 말만 외워서 노닥거립니다.


  1934년에 썼다는 시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이 시는 하느작거리는 시골살이를 보여줄까요. 이 시는 시골살이 참모습을 숨기거나 가릴까요. 이 시는 소작인 삶하고 동떨어진 지식인 노닥거림이라고 나무라도 될 만할까요.


  한솥밥 먹는 식구가 몇인가에 따라 일굴 땅 넓이 달라질 텐데, 아이들까지 해서 열 식구쯤 된다면, 논이나 밭은 얼마쯤 있어야 할까요. 소가 있으면 일이 수월할 테지만, 소가 없다면 괭이를 쓸 테지요. 지난날에는 오늘날처럼 비닐을 함부로 쓰지 않았을 테고, 땅에서 돌은 나오더라도 비닐쓰레기나 농약병이 튀어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돌만 고르면서 땅을 일구었겠지요. 괭이로 일군 땅에 씨앗을 심었으면 호미로 김을 맬 테고요. 참 맞는 소리입니다.


  구름이 놀자고 부른대서 시골일 하다가 놀지 못합니다. 구름이 드리우는 그늘 아닌 해가 내리쬐는 뜨거운 볕을 온몸 가득 후끈후끈 받으며 구슬땀을 땅뙈기에 떨굽니다. 구름이 빨리 지나가지 말고, 천천히 그늘 드리우다가 가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덥네 고되네 하고 생각할 무렵, 들새와 멧새가 날갯짓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너는 참 좋겠네. 이렇게 힘들게 땅을 일구지 않아도 되니까.’ 하고 생각하며 새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힘드니, 네(새)가 나를 달래 주는구나.’ 하고 여기며 새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농악대는 아니지만, 옛날에는 들새도 멧새도 많았을 테니, 온갖 새들이 온갖 노래를 들려주었겠지요.


  그래, 한여름 지나며 강냉이 익을 무렵 도시살이 벗어나 시골로 나들이 갈 수 있겠지요. 이웃과 이웃이 서로 마실을 다니며 막걸리 한 사발 나눌 수 있겠지요. 우리 집 강냉이 나누어 먹고, 이웃집 강냉이 함께 먹습니다.


  이런 시골살이를 보고 누군가 “여보, 왜 이렇게 사시오?” 하고 묻는다면, 무어라 말할까요. 조촐히 흙을 일구는 사람이건, 소작인이건, 무어라 말할까요.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할까요. 살고 싶어 산다고 말할까요. 밥을 먹으려고 산다고 말할까요. 참말 그예 빙그레 웃을밖에 없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어우러진 웃음을 짓고, 고단함과 즐거움이 묻어나는 웃음을 짓습니다.


- “너는 무엇이든 의뢰를 받지? 내 의뢰를 받아준다면 자네가 바라는 만큼의 돈을 지불해 주지.” (14쪽)
- “내가 30만 엔을 왜 모으는지 말해 줄까? 난 신문에서 아직 원폭피해자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는 기사를 읽었어. 30만 엔을 모으면 치료를 받는데 쓰도록 하자고 결심했다. 너희 같은 녀석들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리게 할 것 같아?” (33쪽)

 

 


  시골사람한테는 예부터 모자란 것 어느 하나 없었습니다. 다만, 시골사람한테는 권력자가 부리는 소작료 짐이 넘쳤어요. 나랏님이 내려주는 부역과 사역 짐이 넘쳤어요. 권력자와 나랏님이 아니라면, 시골사람한테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흙에서 밥을 얻고, 흙에서 옷을 얻으며, 흙에서 집을 얻거든요.


  흙을 일구는 시골사람은 흙에서 얻은 밥을 먹고는, 흙에다가 똥오줌을 돌려줍니다. 흙을 돌보는 시골사람은 흙에서 자란 풀에서 실을 뽑아 옷을 지어 입고는, 이 옷이 다 해지면 다시 흙한테 돌려주어 거름이 되게 합니다. 흙을 가꾸는 시골사람은 흙으로 흙집을 짓고, 흙에서 자란 나무로 기둥과 대들보를 삼으며, 흙에서 뒹구는 돌로 주춧돌 쓰고 섬돌 쓰며 집을 건사했어요. 흙에서 자란 풀줄기(짚)로 지붕을 이으며 비와 해를 그었지요.


  시골사람으로서는 쓰레기가 없습니다. 시골사람한테는 찌꺼기가 없습니다. 시골사람은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해를 정갈한 넋으로 살았습니다. 미움과 다툼이 아닌 사랑과 꿈으로 살았습니다.


  등골 휘게 하는 소작료 아니라면 시골사람이 등골 휠 일이란 없습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성벽 쌓고 궁궐 지으라며 젊은 사내 모조리 사로잡아 서울로 데려가는 짓 아니라면 시골사람 슬프거나 힘겨울 일이란 없습니다.


- “그렇지만 만약 오쿠친에게 걸리는 게 없다면, 무죄인 사람을 의심한 게 되니까 난 미움을 받겠네.” (41∼42쪽)
- “나는 그 흐름 속을 헤엄쳐서 전에 내가 실수해서 일을 망친 적이 있는 때의 앞으로 돌아가, 거기서 다시 한 번 새로 시작한 거야. 거기서 또 망쳤다면 한 번 더 시도했어. 몇 번이고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결국엔 반드시 성공하게 되겠지.” (54쪽)

 


  도시가 서면서 시골사람이 고됩니다. 나라가 서니까 시골사람이 고단합니다. 권력자가 생기고 관청이 나타나면서 시골사람이 고달픕니다. 스스로 일하지 않고, 스스로 흙하고 사귀지 않는 도시와 나라(중앙정부)와 권력자와 관청이 시골사람 등허리를 졸라매며 억누릅니다. 이 흐름은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밥 한 그릇 못 먹으면 굶을 도시사람이지만, 정작 도시사람 스스로 흙알갱이 하나 안 만져요. 물 한 모금 못 마시면 목이 탈 도시사람이지만, 막상 도시사람은 온갖 막개발과 물질문명으로 시골마을과 숲과 멧자락과 냇물 모두 망가뜨리거나 더럽혀요. 바람 한 숨 못 들이켜면 이내 숨이 넘어갈 도시사람이지만, 엄청난 발전소와 공장과 골프장을 시골 곳곳에 함부로 짓고는 하늘과 땅 모두 짓밟고 더럽힙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왜 살아갈까요. 아이를 낳는 까닭은 무엇이고, 이 아이들은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도록 가르치는가요.


  대통령을 바꾸면 삶이 달라질까요.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를 갈아치우면 삶이 나아질까요. 공무원을 죄다 물갈이하면 삶이 거듭날까요.


- “어떤 인간의 미래를 훔쳐내서 네 미래로 만들어 버릴 거야. 즉, 다른 사람의 주머니를 네 엉덩이에 붙여 주지. 네 미래를 최고의 것으로 만들어 주겠어.” “왜, 왜 날 그렇게 신경쓰는 거지?” “네가 새로운 운명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면 나는 만족하고 죽을 수 있으니까.” (79쪽)
- “이제 와서 내려간다고? 뭣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그쪽이 멋대로 날 데려온 거잖아.” “네가 그 똥덩어리 선생에게 소리치던 그때의 기운은 어디로 간 거야. 힘내라고! 힘!” (88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The crater》(학산문화사,2011) 둘째 권을 읽습니다. 옛날과 오늘과 앞날을 넘나드는 이야기가 흐르고, 삶과 죽음을 오가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하느님과 만나는 아이 이야기가 흐르며, 꿈속에서 꿈을 찾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삶이란 무엇인가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즐거울까요. 어떤 삶을 지을 적에 아름다울까요. 학교에서는 삶이나 사랑을 가르쳐 주나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삶이나 사랑을 보여주나요.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삶이나 사랑을 다루는가요. 책을 읽으면 삶빛이나 사랑빛이 환하게 드러나는가요.


  삶은 어디에 있을까요. 삶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삶은 어디에서 싱그럽게 빛날까요. 삶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삶은 어디로 잎사귀를 벌려야 할까요.


- “실망했어? 다른 사람의 미래를 훔쳐 볼 거야?” “어차피 다른 사람의 것도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겠지. 겉으로 보면 누구라도 행운이 연이은 것처럼 보이는 법이야.” (93쪽)
- “아침부터 밤까지, 여름도 겨울도 내 주위에는 벽과 같은 빌딩의 숲이 있어요. 그 너머의 별님은 보이질 않네뇨. 한평생 여기서 사는 한 말이죠.” “낸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나는 무면허 의사니까 말이야. 다른 땅에서는 먹고살 수가 없어. 여기니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아아, 아아, 만약 나를 여기서 빼내어 어디론가 먼 세계로 데려가 줄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려나.” (101쪽)

 


  살아가고 싶으니 살아갑니다. 죽고 싶다면 바로 죽겠지요. 죽지 않는 까닭은, 죽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느껴요. 살아가고 싶으니 죽지 않는다고 느껴요.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아닌, 살고 싶어 사는 사람이라고 느껴요.


  군사독재 권력이 무시무시했어도 사람들은 사랑을 꽃피우며 아이를 낳았어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같은 이름으로 권력자와 나랏님이 전쟁을 그치지 않았어도, 시골사람은 사내를 임금님한테 빼앗기면서도, 끝끝내 아이를 낳으며 시골마을과 보금자리 지켰어요. 엉터리 소작료와 엉터리 정치가 판을 쳐도, 사람들은 꿋꿋하게 흙을 일구고 마을을 돌보면서 보금자리를 보살폈어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터를 돌아보면, 새마을운동 때부터 온 시골이 하루아침에 망가지고, 온 숲이 하루아침에 더러워집니다. 풀로 이은 ‘쓰레기 없는 지붕’을 ‘석면 지붕’으로 바꾸어 온통 쓰레기밭 만들었습니다. 비닐농사 비료농사 농약농사로 시골사람 내몰면서 ‘더 많이 거두어 더 빨리 흙을 망가뜨리는 길’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기계를 쓰고 석유를 쓰게끔 등을 떠밀면서 지구별이 시름시름 앓도록 내몰았습니다.


  도시사람 가두려고 시골마을 물에 잠기게 하는 댐을 지어 수도물 먹입니다. 온 나라 냇물을 망가뜨려서 시골사람조차 수도물을 안 마시면 안 되게끔 닦달합니다. 냇물만 망가뜨리지 않아요. 항공방제라는 이름으로 숲과 멧골 구석구석 농약을 뿌려대어 냇물도 골짝물도 샘물도 못 마시게 합니다. 땅밑에서 흐르는 물에 농약이 스며들도록 내몰아 수도물 아니면 꼼짝 못하도록 붙잡습니다.


  아이들이 밟을 흙땅과 풀밭이 어느새 모조리 사라집니다. 학교 운동장조차 흙운동장 아닌 인조잔디 플라스틱이 뒹구는 운동장으로 바뀝니다. 시골아이도 도시아이도 들풀(나물)을 배우지 못하고, 가게에 가서 더 싼 물건 사다 먹는 버릇에 길들도록 학교에서 가르치고 언론에서 부추깁니다. ‘갯벌은 쓸모없는 땅’이라는 거짓말을 퍼뜨려 지구에서 갯벌과 바닷가 몹시 아름답던 이 나라 숲과 시골을 몽땅 어지럽혔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믿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을까요.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믿고 어른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입시지옥에 뛰어들까요.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바라며 아이들을 집에서 쫓아내어 학교에 새벽부터 밤까지 갇히도록 몰아세울까요.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믿고 어른들처럼 쳇바퀴와 톱니바퀴 같은 회사원이나 노동자나 정치꾼이나 예술가나 운동선수 따위가 되려고 악을 쓰고 용을 써야 할까요.


- ‘거기에 비해 토모에 공주 쪽은, 정직하고 마음 따뜻한 여성이었지만, 얄궂게도 그의 얼굴은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131쪽)
- “자네들, 아무리 열심히 험상궂게 굴어도 말이지, 도저히 탈옥수로는 안 보인단 말씀이야. 탈옥수란 건 그렇게 거세게 위협하거나 으름장을 놓거나 하지 않아. 그건 영화에서 만든 이야기란 말이지. 히히, 히히, 자네들은 가짜지?” (168쪽)


  누구나 흙밥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누구나 흙옷을 입으며 살아갑니다. 누구나 흙집에서 드러누우며 몸을 쉬고 마음을 다스립니다.


  살아가고 싶어서,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어서, 우리들은 웃고 노래하며 춤을 춥니다. 연예인 노닥거리로 흐르는 텔레비전 코미디·유행가·막춤이 아니라, 우리 겨레 먼먼 옛날부터 두레와 품앗이 이루며 서로 웃고 함께 노래하며 같이 춤추던 삶입니다.


  씩씩하게 함께 일합니다. 즐겁게 함께 놉니다. 야무지게 함께 일합니다. 신나게 함께 놉니다. 땀을 흘려 일하고, 땀을 흘리며 놉니다. 땀을 흘려 집과 옷과 밥을 짓고, 땀을 흘려 사랑을 하고 꿈을 키우며 뜻을 이룹니다.


  삶이란 언제나 우리 가슴에 있어요. 사랑이란 언제나 우리 가슴에서 자라요. 꿈이란 언제나 우리 가슴에서 곱게 피어나요.


  함께 살아요. 웃으면서 함께 살아요. 함께 노래해요.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노래해요. 함께 춤추어요. 권력자나 나랏님이나 공무원이나 회사원이나 노동자 따위 되지 말고, 흙을 함께 만지며 흙노래와 흙춤과 흙삶으로 어우러진 어여쁜 춤을 기쁘게 추어요. 4346.10.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골사람 만화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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