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살배기 산들보라 첫 머리깎기



  네살배기 산들보라가 처음으로 머리를 깎는다. 아이는 어떤 마음일까? 아이는 어떤 느낌일까? 나는 산들보라 몸짓과 눈길과 얼굴빛을 가만히 살펴본다. 산들보라는 머리를 깎는 내내 움직이지 않는다. 곧잘 빙그레 웃고, 가끔 뚱한 모습이다가, 이내 모두 잊은 느낌이다.


  보라네 누나인 사름벼리는 몇 살에 처음으로 머리를 깎았더라? 다섯 살 적에는 틀림없이 한 번 깎았는데, 이에 앞서 한 번 깎았는지 안 깎았는지 헷갈린다. 아무래도 한 번 더 깎은 적 있지 싶다. 그런데, 사름벼리 누나는 머리를 깎을 적에 몸이 잔뜩 얼어붙었다.


  곰곰이 돌아보면, 사름벼리가 머리를 깎도록 할 적에 곁님과 내가 제대로 마음을 추슬러 주거나 이끌지 못했다. 산들보라와 머리를 깎으러 마실을 할 적에는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아이도 이러한 기운을 잘 알고 느끼겠지. 사름벼리 머리를 깎을 적에는 나도 좀 굳은 몸짓이었다면, 산들보라 머리를 깎을 적에는 가만히 지켜보면서 빙그레 웃는 몸짓이 된다. 4347.6.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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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



  ‘단추 꿰기’를 쳐다보지 않던 네살배기 작은아이가 며칠 앞서부터 제 어머니 옷에 있는 단추를 제가 꿰거나 풀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아직 하나도 못 한다. 차근차근 손을 놀리며 놀다 보면 곧 ‘단추’를 아이 스스로 ‘내 것’으로 삼으리라. 4347.6.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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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합니다. 숲이 우거지고 푸른 바람이 불며 포근하게 우리를 감싸는 별빛이 늘 잔치를 벌이는 시골에 보금자리를 두어 살아가니 얼마나 즐거운가요.

  도시에서 살기에 서운하거나 아쉽지 않습니다. 비록 숲이나 냇물이나 골짜기나 바다가 없다 하더라도 마음 가득 따사롭게 마주하는 눈빛이라면,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숲집을 누립니다.

  우리는 숲집을 누립니다. 나무와 풀과 꽃이 있는 부동산을 누리지 않습니다. 나한테 있는 돈으로 지구별을 통째로 사들여야 숲이나 바다나 꽃을 누리지 않아요. 마음을 활짝 열어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을 적에 비로소 삶을 누립니다.

  시외버스는 도시를 벗어나고 더 벗어나며 자꾸 벗어납니다. 우리 시골집과 가까울수록 시외버스에서 우리 집 풀내음을 맡습니다. 네 식구가 함께 탄 시외버스에 탄 다른 분들이 시외버스에서는 냄새가 안 좋아 머리가 아프다고 말합니다.

  아, 그렇지요. 참말 나도 얼마 앞서까지 그렇게 말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달리 말해요. 나는 내가 누리고픈 냄새를 맡아요. 나는 내가 보고픈 빛을 봐요. 나는 내가 먹고픈 밥을 기쁘게 차려서 먹습니다. 돌아갈 시골집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시골빛이 사랑스럽습니다. 4347.6.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살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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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바깥마실을 마치고 나서 시외버스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마실길 내내 고단하다는 느낌은 없었으나 갑자기 졸음이 쏟아집니다. 쉼터에 닿는다는 안내말씀을 얼결에 듣고는 부랴부랴 눈을 뜹니다. 곁님과 작은아이는 곯아떨어진 채 못 일어납니다. 전철에서 내 무릎에 누워 자던 큰아이는 말똥말똥 내 무릎을 베고 누워 혼자 노는군요.  큰아이한테 신을 신으라 이르고는 오줌 누러 버스에서 내립니다. 아이 손을 잡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 번호를 살펴봅니다. 이러고 나서 앞을 보려는데 뒤쪽에서 누가 빵빵거립니다. 하얀 자가용이 우리더러 길을 비키랍니다.

  나는 길을 비키지 않습니다. 다시 앞을 보고 아이 손을 잡고는 두 걸음 내딛습니다. 아이와 내가 두 걸음 내딛은 뒤 우리 뒤에는 아무도 없고, 하얀 자가용이 지나갈 길은 넓게 트입니다.

  나하고 아이가 이 길을 걸어서 지나가는 데에 아마 삼초쯤 걸렸지 싶습니다. 하얀 자가용은 저 뒤에서 왔을 테니 나와 아이를 보았겠지요. 이 자가용은 왜 고속도로 쉼터에서 삼초를 기다리지 않고서, 아이 손을 잡고 길을 지나가는 사람한테 빵빵거릴까요.

  삼초를 빨리 가면 얼마나 더 빠를까요. 삼분이나 세 시간을 빨리 가지만, 빨리 가고 나서 어떤 일을 하는가요. 아이는 빵빵거림을 이내 잊습니다. 나는 이 흐름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아이와 얘기할 적에 나는 아이가 들려주는 말을 얼마나 귀를 기울이는지, 또 곁님과 얼마나 마음을 쏟아 생각을 주고받는지 되새깁니다. 4347.6.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빛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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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굽는 팔



  팔이 안으로 굽지 않으면 팔을 펴지 못하고 쓰지 못해요. 참말 그렇지요. 예부터 팔은 안으로 굽는다 하고 말한 까닭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이 말을 들은 어릴 적에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했어요. ‘칫. 팔만 안으로 굽나? 발도 안으로 굽는걸. 손가락과 발가락도 안으로 굽는걸. 모두모두 안으로 굽는걸.’


  어릴 적에 이렇게 ‘팔’을 ‘발’과 ‘손가락’으로 바꾸어 생각하고 보니, 모든 것이 그러했어요. 귀도 안으로 굽어요. 그래야 소리가 나한테 스며요. 입도 안으로 굽어요. 그래야 말이 터져서 나와요.


  안으로 굽어야 하는구나 하고 느낄 적에, 내 동무들이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나를 따돌리거나 괴롭힐 적에 하나도 안 힘들었고 하나도 안 슬펐어요. 힘듦이나 슬픔을 느낄 일이 없이 ‘안으로 굽는 마땅한 흐름’을 알고 보며 느꼈어요.


  나도 ‘안으로 굽는 팔’처럼 내 곁님과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곁님과 아이들이 배고플 적에 밥을 차리고, 즐거울 적에 함께 노래하며, 고단할 적에 다독이면서 안거나 업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려면 안으로 굽어요. 밥을 우리 안에 담지요. 우리 몸 안쪽으로 밥을 담으면서 새로운 숨결이 태어나고, 새로운 기운이 솟으며, 새로운 마음이 됩니다.


  즐겁게 내 팔을 바라봅니다. 안으로 굽는 내 팔을 기쁘게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즐거움과 기쁨을 잊습니다. 안으로 굽는 팔은 그저 안으로 굽으니, 나는 이 빛을 그대로 느끼며 바라볼 뿐입니다.


  팔한테 다른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안으로 안 굽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아니, 내 팔한테 안으로 굽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내 팔을 사랑하는 길을 가만히 떠올립니다. 내 팔을 아끼면서 언제나 내 삶으로 곁에 있는 길을 조용히 헤아립니다. 내 팔에 고운 빛을 뿌리렵니다. 안으로 굽는 내 팔에 맑은 빛을 드리우렵니다. 안으로 굽으면서 살며시 펴고, 또 굽으면서 살펴시 펴는 내 팔에 착한 빛을 하나둘 심으렵니다. 굽기에 펴고, 펴기에 굽습니다. 4347.6.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빛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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