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
유미리 지음, 한성례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숲노래 인문책 / 숲노래 책읽기 2023.6.10.

헌책읽기 12 세상의 균열과 혼魂의 공백



  저는 전라남도 고흥이라는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전남 작은시골에 깃들어 열 몇 해란 나날을 보내기 앞서까지 ‘전라도가 이다지 썩은 줄’ 조금도 몰랐습니다. 인천에서 나고자라는 동안 ‘인천이 허벌나게 썩었다’고 늘 느꼈고, 서울로 옮겨 대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서 출판사에 들어가 일할 즈음 ‘서울이 더럽게 썩었다’고 으레 느꼈으며, 충청북도로 옮겨 이오덕 어른 글자락을 갈무리하며 다섯 해쯤 사는 동안 ‘충청도를 비롯해 글판·배움판(교육계)이 썩어문드러진 꼴’을 언제나 새삼스레 보았습니다. 이따금 부산마실을 하면서 부산 곳곳에 ‘부산시가 헛돈을 쏟아부은 얼나간 관광시설’을 지켜보면서, 그야말로 이 나라 구석구석 안 썩은 데가 있나 고개를 갸웃합니다. 우리나라에 ‘진보·보수’가 있을까요? ‘다 썩은 무리’하고 ‘확 썩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유미리 님이 쓰는 글이 한동안 한글판으로 잇달아 나왔지만 이제는 거의(또는 아예) 안 나옵니다. 《세상의 균열과 혼魂의 공백》을 읽고 보면, ‘속속들이 썩은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도무지 뭘 할 수 있겠는가 싶어 속으로 앓다가 조용히 눈물을 거두고서 차분하게 ‘오늘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눈빛’을 느낄 만합니다. 한글이되 우리말이라 하기 어려운 “세상의 균열과 혼魂의 공백”은 뭘까요? 이렇게 옮기고서 ‘번역’을 했다고 여기는 쓸쓸한 민낯입니다. “世界のひびわれと魂の空白を”인데 ‘を’는 어디에 팔아먹었나요? ‘ひびわれ’하고 ‘魂の空白’은 ‘틈’과 ‘빈얼’로 옮겨야지 싶습니다. ‘世界’는 “이 땅”으로 옮겨야 할 테지요. 왜 그럴까요? 유미리 님은 “푸른별(지구)이라는 이 땅에 아무런 ‘틈(틈새)’이 없어 싹틀 수도 움틀 수도 없는 사랑이 슬픈 나머지, 사람들이 잊다가 잃어 ‘텅 빈 얼’을 스스로 아파한 나머지, ‘이 꼴을’ 어떡해야 아이한테 안 물려줄까?” 하고 속삭입니다. ‘물려주고 싶은 땅과 틈과 얼을’ 생각하는 글자락입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얼차릴’ 일입니다.



《세상의 균열과 혼魂의 공백》(유미리/한성례 옮김, 문학동네, 2002.5.25.)


#이땅에서틈과빈얼을

#世界のひびわれと魂の空白を #柳美里


ㅅㄴㄹ


내 이름은 미리(美理)다. 구청에서 알아보았더니, ‘밀양(密陽)’의 어원은 ‘수룡(水龍/미리리)’이라고 한다. 밀양, 미리리, 미리. 그리고 두 살 때 죽은 외할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은 ‘수룡(水龍)’이라는 이름이었다. (51쪽)


그들의 무례를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시간 약속이나 일을 진행하는 게 분명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사과하지 않으며 깊이 생각하지 않고 우선 행동부터 하고 있는 그들에게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살면서 몸에 밴 법칙과 습관으로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고 화가 났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내 안에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으로 그들을 비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9쪽)


전후 일본인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한 것일까? ‘나라를 위해’를 ‘회사를 위해’로 바꾸고 기업 전사가 되어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거품경제가 터진 지금, 사람들의 손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평화? 전후 민주주의? (72쪽)


며칠 전에 있었던 일본 교직원 노동조합 대회와 사회당 임시 당대회를 보도로 알았는데, 두 대회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매우 놀랐다 … 무엇이 닮았는가 하면, 논의 끝에 방침을 결정하는 게 아니고 사전에 다수파에 의해 방침이 결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간파나 반대파가 뒤엉켜서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게 위해 물밑에서 혹은 공공연히 흥정으로 일관한다. (81쪽)


선거권도 없는 재일한국인에게 왜 납세 의무가 있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듬해부터 나는 아주 간단하게 납세자가 되었다. (111쪽)


대동아 공영권의 망령은 고도성장기에도 출현했다. 회사를 위해 다른 건 개의치 않고 멸사봉공으로 일했다. 공해로 사람이 죽어도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한 회사는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수은중독 공해병인 미나마타병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127쪽)


대화가 가장 활발하게 오가던 그 당시조차 대리인이라는 무사시 대학의 여교수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네가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자랐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재일한국인들 중에서 너 같은 사람은 흔하다. 그런데 그걸 장사밑천 삼아 텔레비전이나 잡지 인터뷰에서 주절주절 떠들어대고 있다니, 바보 아니냐! 자살 미수 경험도 있다고 하던데 자실을 팔아먹겠다면 지금 당장 죽는 게 어때?” 이렇게 작품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일로 매도하고 협박하더니 덧붙였다. “두고봐라. 너를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릴 테니. 우리는 너 같은 사람 간단하게 매장시킬 수 있는 인맥과 힘이 있어.”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화해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177)


류세이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아이 초상화를 다른 가족의 찬성을 얻을 때까지 고쳐 그려야 한다고 요구하면 어떤 화가라도 경악할 것이다. 이런 얘기는 누가 들어도 황당무계한 얘긴데, 회화에서는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 어떻게 소설에서는 가능한지, 꼭 오에 씨에게 묻고 싶다. (190쪽)


그러자 그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문예지에 실린 형편없는 소설 따위를 뭐 하러 읽나? 차라리 플로베르의 작품을 읽는 게 백 번 낫지. 그러고 보니 얼굴이 제법 반반하군. 누드 사진집 내면 팔릴 것 같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내 손은 가만히 있었다. 내 손이 날아간 것은 바로 그 다음에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기 때문이었다. (227∼228쪽)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무식한 작가가 확고부동한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갖고 있는 인물들을 향해 언론전을 벌였다는 사실도 그들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들은 내 의견을 일축할 수도 없었다. (245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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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3.6.8.

수다꽃, 내멋대로 45 생일이 없다



  밤늦도록 술에 절어 들어오던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언니나 내가 태어났다는 날에 이따금 ‘아주 늦지는 않게’ 밤 열두 시나 한 시 무렵에 들어오면서 달콤이(케익)를 부엌에 던지곤 했다. “이 집안 가장이 들어왔는데 벌써 자빠져 자는 놈들이 어디 있어?” 하고 큰소리를 치면서 “생일이라서 케익을 사왔으니 어서 일어나서 먹어야지!” 하고 또 큰소리를 보탠다.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자다가 먹어요. 이튿날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 되지.” 하고 말리면 언제나처럼 주먹이 춤춘다. 나는 왜 ‘달콤이(케익)’를 못 먹는 몸이 되었을까? 집안이 돌아가는 꼴을 보다가 숨이 막히면서 속에서 갇히지 않았을까? 여덟아홉 살 무렵부터 스물한 살에 이르도록 ‘생크림케익’이라는 것을 한 입이라도 먹으면 바로 게웠다. 자다가 일어난 한밤에 억지로 ‘술에 전 아버지 앞에서 달콤이를 몇 입’을 먹다가 또 게우니 “이놈의 자식들, 모처럼 비싼돈 들여서 사온 케익을 뱉어?” 하면서 두들겨팬다. 처음으로 달콤이가 몸에 받던 날을 돌아본다. 스물한 살이었을까. 강원 양구 싸움터(군대)에 들어가서 배를 곯으며 짐(완전군장)을 지고서 한겨울에 멧길을 밤새 오르내리던 어느 날, 열여덟 시간째 쉬잖고 걷다가 지치려던 즈음, 멧자락에 그득 쌓인 눈을 손으로 떠먹으며 “이 눈은 케익이야. 난 여태 케익을 못 먹었지. 그러나 살아남으려면 이 케익눈송이를 먹어야지.” 하고 스스로 말씨앗을 심었다. 싸움터에서 첫 쉼(휴가)을 받아서 바깥(사회)으로 나온 날, 동무들이 물었다. “너 뭐 먹고 싶어? 다 사줄게. 고생 많잖아.” “케익 둘 사줄래?” “너 케익 못 먹잖아? 어쩌려고?” “그래도 먹어 보게. 군대에서 날마다 눈을 퍼먹었으니 먹을 수 있을는지 몰라.” 이날 밤, 혼자 ‘생크림케익’을 둘 통째로 다 먹었는데 처음으로 안 게웠다. 어릴 적부터 난날(생일)을 반기지 않았다. 제발 조용히 넘어가기를 바랐다. 누가 “생일 언제예요?” 하고 물으면 “모든 하루가 새로 태어난 날입니다.” 하고 대꾸하며 넘겼다. 내 난날(생일)도, 우리 집 네 사람 난날도, 둘레 누구 난날도 안 챙긴다. 아이들하고 으레 “우리는 밤에 잠들어 아침에 눈뜨는 모든 하루가 새로 태어난 날이야. 한 해 내내 새롭게 태어나는 셈이지. 어느 하루만 ‘태어난 날’이지 않아.” 하고 얘기한다. 이런 우리 집을 둘레에서는 ‘너무 무뚝뚝한 사람들’이라고 핀잔을 하는데, “그날 하루뿐 아니라 삼백예순닷새가 우리 난날(생일)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아침에 서로 얼굴을 보면 늘 기뻐요!” 하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문득 “알면 알수록 힘들다” 하고 말하지만, ‘알다’를 참답게 ‘알’ 적에는 힘든 일이 없구나 싶다. 그러니까 ‘앎(알다·알·알맹이·알차다·알뜰살뜰)’이 아닌 ‘앎 가까이’나 ‘아는 척’이나 ‘아는 듯’일 적에 힘들 수 있구나 싶고. ‘앎(알)’이기에 허물을 벗고서 깨어난다. 아기란, 알을 깨어난 숨빛이다. 어른(얼)이란, 알을 깨어나고 자라서 빛이 무르익어 철든 숨결이다. 아기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는 길은 ‘알아가는 길’이기에 가시밭길이나 고단한 나날이기 일쑤이다. 아직 ‘앎(알)’이 아닌 ‘앎 가까이’이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태어난 숨빛으로 이미 ‘앎(알)’이고, 어머니 뱃속에서도 벌써 ‘앎(알)’이었으나 ‘삶(살다)’을 새롭게 맛보면서 배우려고 ‘이미 아는 빛’을 다 내려놓고서 처음부터 걸음마부터 다시 뗀다. 그러니 아기는 넘어지고 울고 다시 일어나면서 걸음마부터 익히는데, 이에 앞서 목을 가누고 뒤집기를 하고 일어서기를 한다만, 아무튼 아기는 새얼(새알)이 되려는 몸짓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앎(알)’이 아닌 ‘아는 척·아는 듯’에 머문다면 여러모로 힘들거나 어렵거나 까다로운 나머지 두 손을 들고서 벌러덩하고프기 쉽다. 아직 알지 않을 적에는 쉽게 불타오르거나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고. 그렇지만 비로소 철이 드는 어른으로서 ‘어짊·슬기·철’ 세 가지를 고루 갖추어 ‘사랑·빛·숨’으로 거듭나면, 마음에 씨앗을 품는다. 이때 비로소 ‘마음’이 아닌 ‘마음씨’로 바뀐다. 우리는 저마다 ‘마음씨(마음씨앗)로 바뀐 다음’부터 ‘앎을 새로 맞아들이고 바라보는 하루’를 누려서, 이때부터는 힘든 일이 없다. 아직 알지 않을 뿐이기에 힘들 뿐이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이렇게 아는구나’ 하고 깨달으면, 환하게 웃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나날이 난날이니 참말로 난날이란 따로 없다. 깨어나는 날이고, 일어나는 날이고, 살아나는 날이고, 피어나는 날이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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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3.5.31.

수다꽃, 내멋대로 44 분노



  ‘불타오르(분노·증오)’면, 앞뒤를 안 본다. 불타오르는 터라, 오직 ‘미워하고 싫어하는 놈’만 쳐다보면서 이글이글 태워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으로 타오르기 때문에 ‘저놈만 죽이면 다 돼!’ 하고 여기는데, 저놈을 불길로 태워서 죽였는데, 뜬금없이 ‘아무 잘못이 없는 딴사람’을 불태우기 일쑤이다. 또는 ‘미운놈을 태워죽이’려다가 애먼 사람까지 태워죽이기 일쑤이다. “모기를 잡으려다 집을 불태운다”라는 옛말이 있다. 우리가 ‘불(분노·증오)’이 되어버리면, ‘앞뒤가림’을 아예 잊고 말기에, ‘참(진실)’을 보려는 마음이 아닌, ‘미운놈을 찾아내고 솎아내어 죽이고픈 마음’이 가득하고 만다. ‘참(사랑이 가득한 마음)’이 아니라 ‘차가움(미움이 가둑한 마음)’으로 기운 탓에, 그놈도 죽이지만, 나도 죽고, 우리 둘레 착한 사람까지 다 죽인다. 이른바 ‘정의의 용사’가 나와서 ‘밉놈(악당)’을 물리치는 만화를 보자. ‘밉놈’ 하나를 죽인다면서 그만 마을(도시)을 송두리째 불바다로 만들지 않는가? 이 모습이 바로 ‘분노라고 하는 민낯’이다. 불(폭탄)은 아무것도 안 가린다. 무턱대고 덤벼서 모조리 죽음이란 잿더미로 몰아붙이는 기운이 불(분노·증오)이다. 얼핏 보았을 적에 아이가 그릇을 깨뜨렸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얌전히 있었는데, 바람이 훅 불고 지나가면서 그릇이 흔들려 저절로 떨어져서 깨질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엄마아빠가 아끼는 그릇을 왜 깼니!” 하면서 확 불타올라 아이를 다그치거나 나무라거나 때리기까지 한다. 불타오르는 엄마아빠를 본 아이는 ‘불타오른 엄마아빠는 내(아이) 말은 아예 안 듣는’ 줄 알아차리며 그저 두려워 말도 못 한다. 숱한 어버이는 아이가 잘못하지 않은 일을 아이한테 그만 덤터기를 씌운다. 왜냐고? 어버이 스스로 앞뒤를 못 가리도록 스스로 불(분노)이 된 탓이다. 이른바 나라꼴(정치·사회)을 보면, 이쪽도 저쪽도 못난놈이다. 우두머리(권력자)란 모름지기 ‘사람들 눈을 속이면서 돈·이름·힘을 거머쥐는 자리’이기에, ‘깨끗한 우두머리’란 없다. 참말로 없다. 깨끗한 사람은 우두머리(정치·교육·문화예술 지도자)가 되지 않는다. 깨끗한 사람은 조용히 철들어 착한 어른이 될 뿐이다. 착한 어른은 언제나 아이들 곁에서 도란도란 같이 소꿉놀이를 하고, 아이 눈높이를 헤아려 ‘쉬운말’을 쓰고, 언제 어디에서나 아이들을 품고 감싸고 돌보는 길을 간다. 착한 어른은 우두머리 짓을 안 하고, ‘이슬떨이’로서 ‘길잡이’를 할 뿐이다. 길잡이는 앞장서거나 나서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즐겁게 스스럼없이 나아가고서, 아이들이랑 손에 손을 잡고 나란히 노래길·놀이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보라. 대통령·국회의원·시도지사·시의원·군의원 가운데 ‘이슬떨이로서 어린이 곁에서 소꼽눌이를 하고 쉬운말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어른’이 있는가? 아예 없다. 그러니, 우리는 나라꼴(정치·사회)을 쳐다보면 그저 불(분노)이 치밀어오를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라꼴을 쳐다보지 않을 노릇이다. 아이들 얼굴을 쳐다보고, 들꽃을 쳐다보고, 들숲바다를 쳐다보고, 해바람비를 쳐다보고, 마음빛을 쳐다보고, 이웃이랑 쉽게 주고받을 ‘착한 우리말’을 쳐다볼 노릇이다. 그러나 정 나라꼴(정치·사회)을 쳐다보고 싶다면, 먼저 ‘불타오르(분노·증오)’지 말아야 한다. 이놈이건 저놈이건 누가  더 잘못했는지 따지거나 탓할 마음을 싹 지워야 한다. 이놈이건 저놈이건 ‘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는지만 쳐다볼 노릇이고, 어느 쪽에 선 어느 놈이건 값(벌)을 달게 받도록 마음을 기울이고서 끝내면 된다. 보라! ‘전두환 손자’한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엄마아빠랑 할매할배를 ‘잘못 만난 탓’에 제법 오래 굴레에서 허덕인 줄 오래도록 모르다가, 뒤늦게 알아차리고서 하나하나 알아가는 동안 ‘전두환 손자’ 스스로 알게 모르게 저질렀을 숱한 잘잘못을 털어내려고 용쓰는데, 잘못을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한테 어찌 돌을 던지는가? 그러니까, 이쪽이건 저쪽이건 잘못을 말끔히 뉘우치고서 값(벌)을 달게 받으려는 사람은 너그러이 보아줄(용서) 노릇이요, 어느 쪽에 선 놈이건 콧대가 높고 핑계에 달아나기만 하는 놈은 ‘불길’이 아닌 ‘참(진실)’이라는 눈빛으로 딱하게 보며 타이르거나 나무라되, 그놈 스스로 값을 치를 때까지 안 잊으면 된다. 문득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이 눈물로 뉘우치는데, 이 아이들을 안 봐줄 수 있는가? 다시 잘못을 저지르면, 다시 돌아보면서 되새기도록 타이르고, 자꾸자꾸 타이르고 보듬을 노릇이다. 그런데, 우리가 불길(분노)에 휩싸이면 다 죽여버리고 마니, 불길이 아닌 ‘별빛’에 ‘햇볕’으로 스스로 숨길을 가다듬어야지 싶다. 밤길을 밝히는 횃불이나, 집안을 고요히 밝히는 촛불이 되자. 오직 사랑이라는 빛줄기를 가만히 품어 어른이 되자. 우리 엄마아빠가, 또 싸움터(군대)에서, 또 일터(회사)에서, 숱한 사람들이 불길(분노)에 휩싸여 나를 괴롭히거나 두들겨팬 짓을 치러 왔다. 그분들 눈에는 사랑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불이 아닌 사랑을 오롯이 그리려 한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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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3.5.30.

수다꽃, 내멋대로 43 88만원세대



  어릴 적에 골목이나 너른터(운동장)에서 동무들하고 뛰놀다가 갑자기 우르르 서로 무리를 지으며 부른다. “종규야! 이리 와!” 이쪽에서 무리지은 아이들도 동무이고, 저쪽에서 무리지은 아이들도 동무이다. 둘로 나눈 무리는 한 사람을 더 늘리려고 용을 쓴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땀을 삐질삐질 흘린다. 드디어 한마디를 터뜨린다. “난 어디에도 못 들어가겠어! 둘 다 동무들이잖아!” ‘그냥 놀 뿐’이라지만, 줄다리기나 오징어나 콩주머니를 하며 끝없이 짝을 바꾸어서 어울리는 놀이가 아닌, 처음부터 무리를 갈라서 누가 이기느냐 지느냐로 다툰다면, 어디에도 안 끼었다. 뒤로 홱 돌아서서 달아난다. 쌩 하고 달아나는데, 동무들은 ‘달리기’를 하자는 줄 여겨 어느새 무리가 풀어지고 달음박질놀이로 바뀐다. 우리는 왜 ‘어느 쪽’에 서야 할까? 어느 해에 태어났기에 ‘태어난해’라는 또래로 묶여야 할까? 어느 해에 무슨 배움터(학교)를 들어갔기에 ‘학번’이라는 금을 갈라야 할까?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살아갈 뿐, ‘나이·주민등록번호·학번·군번’으로 갈라야 할 까닭이 없다. 이쪽이건 저쪽이건 그쪽이든 똑같다. 저마다 옳다고 외치지만 ‘갈라침·금긋기(분단·분열·분리)’일 뿐이고, 이 무리짓기부터 ‘따돌림(차별)’이 싹튼다. 2007년이던가, 《88만 원 세대》라는 책이 나오고, 둘레에서 이 책을 마구 추켜세우던 그즈음, 나는 어쩐지 코웃음이 나왔다. “무슨 얼어죽을 88만 원?” 그무렵 내 한달벌이는 ‘88만 원’은커녕 ‘50만 원’도 ‘30만 원’도 아니었다. 때로는 ‘10만 원’으로 볼볼 기었다. ‘그들(지식인)’이 금긋는 ‘88만 원 세대’라는 말은 고약했다. 왜 이런 ‘무리짓기(세대갈등)’를 일삼아야 하는가? 일부러 틀(프레임)을 만들어서, 왜 자꾸 갈라치기(이간질)를 하는가? 이 틀(프레임)로 이 나라에 새롭게 불길(분노)을 일으키고, ‘분노 프레임’으로 강단·강의를 차지하면서 ‘새길’이 아닌 ‘불길(분노)’로 금긋기(이분법에 따른 사회분열)로 치닫겠구나 싶었다. 《88만 원 세대》가 ‘나쁜책’일 수는 없되, 이런 책을 쓰고 이야기를 펴는 이들은 ‘통장잔고 0원’을 겪어 본 적이 없을 텐데 싶더라. ‘가난·구조적 차별·학벌’을 따지는(비판하는)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분들 가운데 고졸·국졸인 사람이 있을까? 또는 서울·수도권 아닌 시골에서 사는 사람이 있을까? 가난하지도 않고, 가난을 겪지도 않고, 빈곤층·차상위계층도 아닌 그분들은 ‘근로장려금’을 받은 일도 없겠지. 예전에 최영미 시인이 ‘근로장려금 수령 대상자’로 딱 한 해 된 적 있다는 글을 남긴 적이 있는데, 그저 웃음이 났다. 여태 가난해 본 적이 없다가 꼭 한 해 돈벌이가 줄었대서 징징거리면, 늘 가난하게 살아가는 차상위·근로장려금 수령자는 어찌해야 할까. 달콤발림으로 꼬드기면서 ‘시키는 대로 나팔수가 되면 다달이 통장잔고가 늘어난다’고 다가오는 무리가 늘 있다. 온나라 어느 고장에서나 그 고장 기득권(시장·군수)을 봐주는(옹호하는) 글을 써주면 짭짤한 벌이와 자리(교수 또는 고문 또는 원장)를 준다. ‘나눔’은 아름길이 될 수 있지만 ‘가름·쪼갬’은 서로 미워하고 손가락질하고 불길을 일으켜서 그저 싸움(전쟁)으로 치닫는 굴레이다. 우리가 스스로 사랑을 지피지 않고서 불길(분노)만 지필 적에는, 모든 정치·문단·언론·교육 권력자들이 뒤에서 팔짱끼며 낄낄댄다. 그들은 우리가 ‘아름다운 책’이 아닌 ‘분노를 지피는 책’을 더 많이 읽어서, 스스로 ‘생각을 멈추기’를 바라더라.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산다”는 말씀이 있듯, 참말로 우리는 ‘사람’일 노릇이다. 우리말 ‘사람·살다·살리다·사랑·사이·새(멧새)·생각’은 말밑이 같다. ‘살(살갗)’도 같은 말밑이다. ‘살빛(살색)’은 나쁜말이 아닌, “사람 겉몸을 감싼 얇으면서 빛나는 옷”인 ‘살’을 드러내는 빛깔인데, ‘살빛’이란 낱말을 따돌림말(차별어)로 여겨 ‘살구빛’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논리)가 판치는 대목도, 우리가 스스로 사람됨과 사람빛을 잊어버리도록 내몰고 만다. 그런 목소리도 다 ‘금긋기(분열·이간질)’일 테지. 거짓말을 앞세워 틀(질서·프레임)을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목소리가 높은 곳에는 어깨동무(평화)가 깃들 틈새가 없다. 그래서 나는 혼길을 걷는다. 몸에도 마음에도 날개를 달면서 뚜벅뚜벅 걷는다. 먼길을 갈 적에는 버스를 얻어타고, 버스에서 내리면 하늘빛을 머금으며 걷는다. 걷다가 멈추어 들꽃을 보고, 바람길을 읽고, 구름꽃을 느낀다. 나는 ‘그들이 세운 틀·무리’에 깃들 마음이 없다. 언제나 ‘아이들’하고 도란도란 어울리고, ‘곁님’하고 ‘나 스스로’ 우리 보금자리를 숲빛으로 가꾸는 길을 가려는 마음이다. 나는 아무 또래(세대)가 아니다. 그저 ‘숲사람’이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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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3.5.29.

수다꽃, 내멋대로 42 딴청



  어릴 적을 돌아보면, 나로서는 일곱 살까지 신나게 놀던 나날이 있고, 여덟 살에 이르러 어린배움터(국민학교)에 깃든 나날이 있다. 여덟 살에 이르기까지 둘레 어른들이 으레, 거의 날마다, 자주 하던 “그래, 여덟 살 때까지는 내버려 둬. 그때까지는 실컷 놀아야지.” 같은 말이 있다. 더 옛날에는 더 달랐겠지. 더 옛날에는 아이들이 무엇을 하든 ‘딴짓·딴청’이라 여기지 않고 ‘놀이’나 ‘소꿉’이라 여겼다. 그러나 ‘틀’에 가두려 하면 모든 놀이·소꿉은 그만 ‘딴짓·딴청(주의력 결핍)’으로 여기면서 ‘나쁜짓(태도 불량)’으로 못박더라. 아무래도 ‘틀(제도권·학교·군대·감옥·정부·사회)’이라는 눈으로는 이렇게 보겠지. ‘틈(자유·기회·시간·소통·대화)’을 두지 않는 ‘틀·굴레’이기에 ‘단단’하게 ‘틀어막’고 ‘틀어쥔(거머쥔)’다. 사람들 넋(영혼)을 틀어쥐어서 마음대로 부리려 하는 나라이다. ‘틈(자유·기회)’이 없으니, ‘틔울(싹틔울)’ 수 없고, ‘틈(시간·대화)’이 없으니, ‘열(생각을 열·말길을 열)’ 수 없다. 우리가 배움터(학교)를 따로 세워서 겪은 지는 이제 고작 온해(100년)이다. 온해 앞서라 하더라도 누구나 배움터를 다니지 않았고, 가난하거나 종(노예·백성·천민)이라는 자리에 있던 사람은 얼씬조차 못 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거나 모르는데, 1400년대에 세종임금이 훈민정음이란 글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이 글을 배우거나 구경할 수 있던 사람은 한줌(1%)조차 안 된다. 한문을 익혀서 쓰던 나리(권력자)가 아니면 훈민정음을 듣거나 배울 길이 없었다. 종살이(노예살이·농부·천민)를 하던 사람들은 언제나 짓밟힌 삶이었고, 종이나 붓은 만질 수 없었고, 종이랑 붓은 너무 비싸기까지 했고, 종(노예·백성·천민)으로 살던 사람들은 나리(양반·사대부·권력자)가 쓰는 글을 어깨너머로 구경하려다가 들키면 볼기(곤장)를 얻어맞거나 목숨까지 잃었다. ‘훈민정음·정음·언문·암클’은 1900년대에 접어들 즈음까지 참말로 ‘아무나 못 배우고 못 쓰던, 숨죽이던 글’이다. 나는 1993년에 푸른배움터(고등학교)를 마쳤는데, 그무렵에는 배움터에서 이 대목을 가르쳐 주었고, 적잖은 책에 이 대목이 나왔지만, 어쩐지 요새에는 이 대목을 안 가르칠 뿐 아니라, 마치 1400년대부터 ‘종(노예·백성·천민)으로 억눌린 숱한 사람들’이 글살이(문자생활)를 할 수 있었다는 듯, 거짓말을 가르치는 분이 부쩍 늘었다. 아무튼, ‘딴짓·딴청’이 무엇인가 하고 헤아려 보면, ‘시키려는 쪽에서 시키는 대로 안 한다’요, ‘심부름을 맡기려는 쪽에서 말하는 대로 안 듣는다’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 보자. 아이들은 왜 딴짓이나 딴청을 할까? 어른이 시키는 일·짓·말이 썩 달갑지 않거나 어렵거나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스스로 생각하고 살필 틈이 있어야 한다. ‘어른들은 다 아는 말’이라지만, ‘아이로서는 다 모르는 말’이기 일쑤이다. 아이 곁에서 ‘한자말이나 영어나 일본말씨’를 손질하거나 걸러야 하는 까닭을 다들 제대로 모르는데, 아이들한테 너무 어려워서 뭔 소리인지 알 길이 없거든. ‘어른들이 교과서나 책으로 적은 글’은 ‘아이한테는 뜬구름잡는 헛소리’이거나 ‘우격다짐으로 외워야 하는 굴레’이곤 하다. ‘숲·숱하다·수북하다·수박·수수하다·수두룩하다·쉽다·쉬다·숨·숨다’는 말밑이 같으며 얽힌다. ‘스스로·스승·스님’도 말밑이 같으며 얽히는데, ‘숲·스스로’는 만난다. 아주 쉬워 흔한 우리말은, 서로 잇닿으면서 생각을 북돋우고 틔우며 연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아이 곁에서 ‘쉽고 수수한 우리말’을 써야, 어른으로서도 어질게 철이 들고, 아이로서도 즐겁게 소꿉놀이를 하면서 마음틔움·생각열기·사랑나눔으로 뻗게 마련이다. ‘집(보금자리·살림터)’이라면 가두지 않는다. ‘틀(학교·군대·감옥·정부·사회)’이라면 가둔다. ‘집’은 심부름이나 시킴질이 안 흐르는, 함께 짓고 가꾸고 일구어 나누는 ‘날개’이다. ‘틀’은 오직 심부름과 시킴질이 판치면서, 외워야 하고 똑같아야 하고 따라가야 하는 ‘수렁’이다. 아이들은 차림옷(교복)을 입으면 안 된다. 똑같은 옷을 맞춰 입히는 데는 ‘틀’인데, 이런 틀은 ‘학교·군대·감옥·정부’인걸. 옷과 몸짓과 말이 틀에 박히면 ‘날개(자유·민주·평화·평등)’를 못 편다. 마음껏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때라야, 날개를 펴면서 틈을 내어 철빛을 읽는 어른으로 자라날 만하다. 틀로 틀어쥐어 억누르고 똑같이 맞추면, 틀에 박히고 말아 마음도 생각도 사랑도 살림도 집도 없이 ‘학생·회사원·지식인’이라는 굴레에 갇혀서 종살이로 흐른다.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몸짓·말짓·눈짓’은 ‘딴짓(다른 짓)’을 해야 맞다. 손가락도 꼬물거리고, 발가락도 꼼지락거리면서 놀아야 아이답다. 아이 아닌 어른도 매한가지이니, 얌전히 앉아서 듣기만 하거나 외우기만 해서는 둘 다 갇힌다. 이른바 ‘수업·강의’에서도 왁자지껄 떠들고 수다를 펴면서 생각과 마음을 주고받아야 ‘교사(강사)·학생’ 모두 날개를 펴며 신나게 새길을 배운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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