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Song Of The Sea (바다의 노래)(한글무자막)(Blu-ray)
Universal Studios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바닷노래 (바다의 노래)

Song of the Sea, 2014



  바닷가에 서면 오직 ‘바닷노래’만 흐른다. 바닷물은 끝없이 물결치면서 다른 모든 소리를 잠재운다. 드넓은 바다가 함께 일으키는 파란 노래를 들려준다. 들에 서면 오직 들노래만 흐른다. 들풀은 가없이 한들거리면서 다른 모든 소리를 녹인다. 푸르게 퍼지는 들녘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푸른 노래를 베푼다. 멧골에서는 멧노래를 듣는다. 시골에서는 시골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도시에서는 도시노래를 듣는다.


  도시노래는 무엇일까? 도시에서 어우러지는 모든 소리가 터뜨리는 노래이다. 아무래도 도시에서는 공장과 자동차와 온갖 기계가 들려주는 노래가 가장 클 테지. 이 모든 노래가 노래 같지 않다고 여겨서 귀를 막는 사람도 막을 테고.


  노래는 어디에나 있다. 지구별 어디에나 노래가 있다. 더 나은 노래나 멋진 노래는 없다. 덜떨어지거나 나쁜 노래는 없다. 그저 ‘노래를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달라지는 노래일 뿐이다.


  만화영화 〈바닷노래(Song of the Sea)〉는 아일랜드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한국에도 찾아왔다. 언제나 바다와 함께 삶을 짓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노래가 고이 흐르는 만화영화이다. 줄거리를 살짝 살피면, ‘셀키’라고 하는 ‘바다님’은 뭍사람과 함께 살면서 아이를 둘 낳고는 바다로 돌아간다. 셀키가 낳은 아이 가운데 큰아이는 여느 뭍사람하고 같으나, 작은아이는 여느 뭍사람하고 사뭇 다르다. 사람 피도 흐르지만 셀키 피도 흐르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바닷내음이 그리워서 뭍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 말을 안 한다. 이 아이는 노래를 부르면서 살고 싶지만, 도무지 노래를 터뜨리지 못한다.


  셀키하고 마음을 섞은 등대지기는 셀키가 바다로 떠난 뒤 왜 ‘뭍에 남은 두 아이’는 바라보지 못하면서 술만 마실까. 셀키가 바다로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둘이 사랑으로 맺은 새로운 두 아이가 있는데, 왜 아이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까. 곰곰이 돌아보면, 이 사회에서 아이를 낳는 수많은 여느 어버이도 만화영화 등대지기하고 비슷한 모습이다. 아이들을 낳아서 학교와 학원에 보내기는 하지만, 막상 아이들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겨를이 없이 하루를 보내기 일쑤이다. 그나마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보더라도 중학교 문턱만 들어서면 얼굴 보기도 어렵고, 아이들이 대학교에 들어가면 이제부터 얼굴 아닌 목소리 듣기조차 어렵다.


  삶은 어떻게 해서 삶이 되겠는가. 사랑은 어떻게 해서 사랑이 이루어지겠는가. 마냥 그리워해서는 삶도 사랑도 되지 않는다. 바로 오늘 여기에서 스스로 웃고 노래할 때에 삶도 되고 사랑도 된다. 셀키가 낳은 아이가 ‘어머니를 따라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남겠다’고 말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뭍이든 바다이든 똑같은 지구인데, ‘여기’는 참말 어디인가? 작은아이가 말하는 ‘여기’를 등대지기는 뒤늦게 깨달을 수 있을까? 오빠인 큰아이도 이제 동생이 말하는 ‘여기’를 따사롭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귀를 기울이면 바닷노래를 언제 어디에서나 듣는다. 귀를 기울이면 들노래와 멧노래와 숲노래뿐 아니라, 하늘노래와 바람노래와 꽃노래도 언제 어디에서나 듣는다.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서로 부르는 사랑노래와 삶노래를 우리가 스스로 터뜨리면서 서로 따사롭게 어깨동무를 할 수 있다. 4348.4.19.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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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뤽 베송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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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출간


루시

LUCY, 2014



  영화감독 뤽 베송 님은 〈루시〉라는 영화를 찍으려고 양자물리학을 어느 만큼 살피거나 배우거나 헤아리거나 알아보면서 이녁 마음에 담았을까? 이 영화 〈루시〉를 보는 사람은 양자물리학을 어느 만큼 알거나 배웠거나 새로 알거나 배우려고 할까? 한국에서는 이 영화를 ‘액션’ 갈래로 나누는구나 싶은데, 영화 〈루시〉는 ‘액션’ 영화일까? 액션으로 보고 싶으면 액션으로 보아도 된다. 다큐 영화로 보고 싶으면 다큐로 보아도 되고, 공상과학으로 보고 싶으면 공상과학으로 보아도 되고, 드라마로 보고 싶으면 드라마로 보아도 된다. 어느 갈래에 넣든 대수롭지 않다. 대수로운 대목은 오직 하나이다. 이 영화가 밝혀서 보여주려고 하는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루시’라는 가시내는 영웅이 아니다. 그저 수많은 지구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말하자면, 루시가 아니어도 우리 누구나 ‘루시와 똑같이 뇌를 100퍼센트 쓰는 몸’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우리 가운데 이처럼 뇌를 100퍼센트 쓰려고 훈련하거나 공부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고, 훈련과 공부를 하는 사람조차 뇌를 어느 만큼 쓰는가를 제대로 읽거나 아는 사람은 몹시 드물다.


  왜 모를까? 왜 알 수 없을까? 실마리는 아주 쉽다.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 수수께끼를 풀 수 없다. 스스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살듯이,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죽는다. 루시는 처음에는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자, 이때에 루시는 어떻게 될까?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주먹잡이 사이에서 죽음길과 똑같이 뒹군다. 루시는 이 다음에 ‘반드시 살겠다’고 생각을 고친다. 자, 이때에 루시는 어떻게 될까? 루시는 그냥 죽을 몸이었을 테지만 그냥 죽지 않는다. 스스로 살아남는 길을 갈는지 아니면 몸이 조각조각 찢기면서 죽는 길을 갈는지 모르나, 루시는 ‘나 스스로 바라보기’를 한다. 이리하여 뇌를 꽤 많이 연다.


  스스로 죽음으로 가다가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어느 만큼 떨친 루시는 ‘웃음도 눈물도 없는 고요한 넋’이 된다. 그러나, ‘뇌가 열리는 흐름’을 느낀 뒤, 이 뇌는 끝까지 열릴 수밖에 없구나 하고 알아차리는데, 끝까지 열리는 길에 어떤 일이 생길는지 아직 모른다. 이리하여 이 한 가지 두려움이 있고, 이 한 가지 두려움을 모질게 겪고 난 뒤(몸이 조각조각 나는 일) 비로소 고요한 마음을 되찾는다.


  고요한 마음을 되찾은 루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도 ‘어떤 것’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아직 모른다. 아니, 알기는 알지만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이러니, 굳이 ‘루시처럼 뇌를 연 사람보다 똑똑하지 않은 과학자’한테 찾아가서 묻지. 스스로 할 일을 알면서도 아직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니까 과학자한테 물어 볼밖에 없다. 스스로 다 아는 것을 남한테 묻는다.


  루시는 뇌가 많이 열렸어도 아직 스스로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아마 우리 가운데 거의 모든 사람들도 루시와 같으리라 느낀다. 뇌가 제대로 열리는 줄 알아채고, 제대로 된 슬기를 받아들여서 몸과 마음이 새롭게 거듭나더라도 이를 옳게 느끼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나머지 바보스러운 짓을 일삼을 수 있다. 그리고, 뇌가 어느 만큼 열리면 ‘순간이동’쯤 손쉬울 테지만, 이런 대목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사회의식에 갇힌 지식이 아직 몸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루시는 100퍼센트로 뇌를 열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어디에나 있다’를 깨닫고, 이를 손전화 쪽글로 보낸다. 루시는 처음부터 ‘어디에나 있’었으나 그동안 이를 못 보았다.


  책이나 영화나 삶이나 모두 매한가지이다. 흐르는 대로 쳐다본대서 알 수 없다. ‘쳐다보기’와 ‘들여다보기’와 ‘바라보기’와 ‘살펴보기’는 모두 다르다. 이 모두 ‘보기’이지만, 어떤 눈길과 마음과 생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 그러니까, 그저 쳐다보면 제자리걸음이고,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쳐다보면 뒷걸음이다. 생각을 새로 지으며 바라보면 첫걸음이다. 새로 지은 생각을 마음에 사랑으로 심으면서 들여다보면 두걸음이다. 내가 손수 지은 생각이 마음에서 아름다운 사랑으로 자라도록 돌보면서 살펴보면 ‘새걸음’이다. 이 얼거리를 우리가 스스로 배우고 헤아리면서 책이나 영화나 삶을 마주할 수 있으면, 어떤 책이나 영화나 삶을 마주하더라도 가장 깊고 넓은 ‘고요누리(제로포인트)’까지 깨달을 수 있다.


  그러니까, 루시도 깨달아서 철이 든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고, 우리들 누구나 깨달아서 철이 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약물 힘을 빌어야만 깨닫지 않는다. ‘약물’은 우리가 스스로 수수께끼를 내고 실마리를 푸는 온갖 ‘길(가능성)’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밥을 먹다가 깨달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길을 걷다가 깨달을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죽음을 보고 깨달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새나 나무를 보고 깨달을 수 있다. 아무튼, 철이 들어 새로운 숨결로 거듭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굳이 ‘1차원 세계에 있는 몸뚱이’를 붙잡을 까닭이 없다. 1차원 세계 몸뚱이는 가만히 내려놓고, 모든 차원을 홀가분하게 넘나들면서 날아다니는 ‘까만 씨앗’이 되어 ‘하얀 바람’을 타고 다닌다. 영화 〈루시〉를 보는 사람들이 적어도 ‘양자물리학’은 공부하기를 바라고, 양자물리학을 웬만큼 공부했다면 ‘람타’도 공부하고서 이 영화를 새롭게 볼 수 있기를 빈다. 4348.4.1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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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늑대와 춤을 : 오링케이스 한정판
케빈 코스트너 감독, 케빈 코스트너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늑대와 춤을
Dances With Wolves, 1990


  영화 〈늑대와 춤을〉은 모두 ‘꾸며서 찍은 이야기’라고 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믿지 말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똑같이 믿을 마음은 없다. 다만, 이 영화는 여러 가지 삶을 보여준다. 저마다 제가 옳다고 하면서 금을 죽 긋고는 서로 신나게 죽이는 남북전쟁이 있고, 이 전쟁터에서 더 살고 싶지 않으려 했으나 외려 죽지 않는 사람이 있다. 흰둥이한테 삶자리를 차츰 빼앗기면서 끝내 아스라이 사라지는 토박이가 있고, 총이 아닌 사랑으로 삶을 짓고자 하는 군인이 있다. 같은 겨레라 할 테지만 어깨동무를 하기보다 팔아먹기를 하는 사람이 있고, 마음으로 믿고 아끼는 사람이 있다. 너른 들과 숲을 보듬으면서 이야기를 지으려는 사람이 있으며, 그저 술과 노름과 총질로 들과 숲을 신나게 망가뜨리려는 사람이 있다.

  늑대와 춤을 추는 사람이 있고, 늑대한테 총을 겨누어 죽이는 사람이 있다. 늑대와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람이 있고, 늑대 따위는 총 한 방에 죽이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살 때에 사람다운 삶이 될까. 어떻게 사랑할 때에 사람다운 사랑이 될까.

  어느 한쪽이 옳거나 맞다고 할 수 없다. 둘은 서로 다른 삶이다. 둘이 걷는 길이 사뭇 다르다. 둘이 바라보면서 나아가려는 길이 참으로 다르다.

  ‘미국’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인다면, 어느 곳이 미국이 될까? 1900년대를 지나 2000년대로 온 미국은 앞으로 2100년대나 2200년대에는 어떤 모습이 될까? 앞으로도 미국은 온갖 전쟁무기로 수많은 사람을 짓밟는 나라로 버틸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미국은 그네들이 믿고 기대는 전쟁무기에 휘둘리면서 모래알처럼 무너지고 말까?

  ‘늑대와 춤을’ 추는 사람은 군인옷을 벗는다. 늑대와 춤을 추는 사람은 총을 내려놓는다. 늑대와 춤을 추는 사람은 ‘늑대가 밟는 땅’을 맨발로 밟고 맨손으로 짚으면서 제 삶을 지으려고 한다.

  주먹을 쥐고 일어선다. 늑대와 춤을 춘다. 누군가는 바람처럼 날 테고, 누군가는 흙처럼 포근할 테며, 누군가는 햇살처럼 눈부실 테며, 누군가는 맑은 웃음일 테며, 누군가는 곰처럼 기운찰 테며, 누군가는 나뭇잎처럼 푸를 테지. 우리가 스스로 붙이는 이름은 ‘직업’이나 ‘가문’이나 ‘명예’나 ‘권력’일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 붙이고, 이웃과 동무가 우리를 부르는 이름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지으려고 하는 삶과 사랑이 고이 묻어나는 이야기’이다. 영화 〈늑대와 춤을〉에 나오는 새파란 하늘과 짙푸른 숲과 샛노란 가을들과 새하얀 구름이 더없이 싱그럽다. 하늘과 숲과 들과 구름은 늘 그 자리에 있을 텐데, 이를 보는 사람과 안 보는 사람이 뚜렷하게 갈린다. 4348.4.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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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자이언트 SE
브래드 버드 감독, 제니퍼 애니스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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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이언 자이언트

The Iron Giant, 1999



  만화영화 〈아이언 자이언트〉를 본다. 지구별에 무시무시한 로봇이 하나 떨어진다. 이 로봇이 맡은 일은 아마 ‘지구 궤멸’이었지 싶다. 그런데, 이 로봇은 지구별에 떨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듯하다. 그래서 그냥 쇠붙이만 먹어댄다. ‘지구궤멸 같은 일’을 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인 로봇은 제 일을 잊으면서 ‘착한둥이’가 된다. 그럴밖에 없지. 아무리 무시무시한 주먹힘을 휘두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남을 때려!’나 ‘남을 죽여!’ 같은 말을 잊어버리면, 착한 길로 접어든다.


  지구별에서 무시무시한 로봇을 본 아이는 처음에는 무섭게 여기지만 이내 무서움을 떨치고 커다란 로봇을 동무로 삼는다. 로봇이 얼마나 착한지 알기에 로봇을 믿고 아끼며 좋아한다. 이와 달리, 다른 수많은 어른은 로봇을 ‘나쁜 녀석’으로 밀어붙인다. 로봇이 무시무시한 힘을 쓰는 줄 알아챈 어른은 로봇을 믿으려 하지 않고, 로봇을 동무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어른은 언제나 전쟁무기를 새로 만들 뿐이고, 새로운 전쟁무기로 새로운 ‘나쁜 녀석’을 찾아내어 다스려야 한다고 여긴다. 가만히 보면, 어른들부터 전쟁무기를 끔찍하게 만들어서 ‘동무 사귀기’나 ‘이웃 사랑’은 처음부터 하나도 안 생각한 삶이 아닌가?


  〈아이언 자이언트〉를 보던 여덟 살 어린이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어른들이 온갖 미사일과 무기를 로봇한테 쏘아대는 모습을 보더니 “멈춰!” 하고 소리를 지른다. 아이와 함께 만화영화를 보는 내 마음도 똑같다. 왜 어른들은 자꾸자꾸 남을 괴롭히려고 할까. 왜 어른들은 그들 스스로 전쟁무기 만드는 짓을 멈추려 하지 않으면서, ‘다른 데에서 온 전쟁무기’만 나쁘다고 여기려 할까. ‘내 손에 쥔 전쟁무기’는 평화를 지키는 데에 쓰고, ‘네 손에 쥔 전쟁무기’는 그악스럽다고 여기는 눈길은 얼마나 올바른가.


  로봇은 죽는다. 미사일을 얻어맞은 로봇은 죽는다. 전쟁무기로 태어난 로봇은 죽는다. 그런데, 이렇게 죽은 몸이기에 다시 태어난다. 전쟁이 아닌 사랑을 생각하는 로봇으로 다시 태어난다. 싸우지 않고 즐겁게 뛰놀 동무가 되려는 로봇으로 다시 태어난다. ‘새로 태어난 로봇’은 머잖아 동무를 찾아 먼길을 나설 테지. 오랜 동무를 오랫만에 만날 아이는 ‘새로 태어난 로봇’과 함께 조용한 곳으로 떠나서 여느 어른들이 없는 곳에서 새 보금자리를 일굴는지 모른다. 오직 사랑만 숨쉬고 자라는 곳에서, 두 삶지기가 기쁘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4348.3.23.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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ドラゴンボ-ルZ神と (ムック)
集英社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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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볼Z : 신들의 전쟁
ドラゴンボ-ル Z 神と神, Dragon Ball Z Battle of Gods, 2013


  만화책으로 나오는 《드래곤볼》은 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극장판 드래곤볼〉은 꾸준히 새로 나온다. 〈ドラゴンボ-ル Z 神と神〉도 극장판으로 나온 드래곤볼 이야기이고, 이 만화영화는 〈신들의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일본말을 제대로 옮기자면 “신과 신”이고, 이를 다시 풀면 “님과 님”이며 “하느님과 하느님”이다.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인가 하면, 온별누리(은하계)를 낳은 님(하느님)이 둘 있는데, 하나는 ‘짓는 님(생명 창조 신)’이고, 둘은 ‘없애는 님(생명 파괴 신)’이라 한다. ‘온별누리’란 온(모든) 별이 있는 누리라는 소리이니, 모든 별은 ‘짓는’ 님이 지으면서, 이 별 가운데 어떤 별을 ‘없애는’ 님이 없앤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님은 별과 별 사이에만 있지 않다. 님은 우리 사이에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 마음속에는 저마다 다르면서 모두 같은 님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못 느낀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왜 느끼지도 못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까? 바로 사회의식이 이를 안 바라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 같은 곳에서 모든 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언제나 님이면서 사랑’인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를 바라고, 스스로 깨닫지 못해서 스스로 제대로 바라볼 줄 모르기를 바랐다. 그래야, 사람들을 종으로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저 스스로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에는 모든 것이 멈춘다. 모든 것이 멈추면서 새롭게 흐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좋음도 나쁨도 아닌, 오직 고요하면서 가없는 몸짓인 삶이 된다.

  〈님과 님(신들의 전쟁)〉에 나오는 ‘없애는 님(파괴신)’을 다시 생각해 본다. 만화영화를 보면 ‘파괴를 해야 창조가 된다’는 말이 살짝 나온다. 부수지 않으면 새로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만화영화에서는 ‘부수다(없애다, 파괴)’라는 말이 나왔으나, 곰곰이 따지면, ‘부수다’라기보다는 ‘하나에서 새로운 하나가 나올 수 있도’록, ‘낡은 나를 버리라’는 뜻이다. 낡은 나를 버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새로운 나가 설 수 있다. 그래서, ‘파괴에서 창조가 나온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짓는 님’과 ‘부수는 님’은 남남이 아니다. 한몸이자 한마음이다. 이를 헤아릴 수 있으면, 〈님과 님〉에서 손오공은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 ‘사이아인 님’이 될 수 있고, 손오공뿐 아니라 베지터도 ‘사이아인 님’이 될 수 있다.

  샛노란 물결일 때에는 여느 때에는 내지 못한 놀라우면서 새로운 힘을 쓸 수 있다. 그래서 ‘여느 사이아인’ 울타리를 넘어서면 샛노란 빛(금빛)으로 바뀌는데, 이때에는 ‘뭇느낌(감정)’이라는 것을 끌어안는다. 그래서 샛노란 빛으로 ‘빨간 빛’인 파괴신과 맞서면 제대로 된 힘을 내지 못한다. 파괴신과 맞설 수 있으려면, 스스로 ‘새로운 님’이 되어야 하고, 이 님은 파괴신과 똑같이 ‘빨간 빛’이다. 까만 빛에서 샛노란 빛으로 거듭난 다음, 이 빛을 모두 털어서 파란 빛으로 온몸을 새롭게 감싼 다음 태어나는 빨간 빛이라고 할까. 우리 몸에 빨간 피가 흐르는 까닭도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를 제대로 느끼거나 바라보는 사람이 드물고, 이를 제대로 말하거나 밝히려는 사회의식은 하나도 없을 뿐이다. 4348.3.17.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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