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카페 UE (무삭제 확장판) - 아웃케이스 없음
퍼시 애들론 감독, 마리안느 제게 브레히트 외 출연 / 에이나인미디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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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까페

Out Of Rosenheim, Bagdad Cafe, 1987



  네 식구가 함께 볼 만한 영화란 무엇일까 하고 헤아리면서 〈바그다드 카페〉를 본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열다섯 살부터’ 볼 수 있다는 딱지가 붙는다. 알쏭달쏭하다. 왜? 영화를 보니 할배 그림쟁이가 아줌마를 그림으로 그릴 적에 젖가슴이 나오기도 하고, 처음에 아줌마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모습에서 젖가슴이 나오기도 한다. 이 때문인가? 아무튼 나는 이 딱지를 못 본 척하기로 하면서 여덟 살 다섯 살 두 아이하고 나란히 이 영화를 본다.


  로젠하임을 떠나 바그다드 아닌 미국 ‘바그다드 카페’에 똑 떨어진 아줌마는 가야 할 곳이 없으며 갈 곳도 없다. 그러나, 아줌마는 뚜벅뚜벅 걷는다. 다른 신도 없이 뾰족구두 한 켤레뿐이지만 이 구두로 그야말로 씩씩하게 걷는다. 아줌마를 사막과 같은 곳에 내버린 채 자동차를 몬 아저씨는 어떤 마음일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렇지만, 사람은 성이 나면 그야말로 바보가 된다. 성이 나는 바람에 스스로 사람다움을 잃고 바보짓을 한다.


  〈바그다드 카페〉에서 모든 일을 혼자 짊어져야 한다고 여기는 아줌마도 늘 성이 난 마음이요 몸이다. 늘 성을 부리면서 살아야 하니, 성을 내고 난 뒤에 눈물을 흘리고, 성을 내고 나니 기운이 없어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늘 똑같은 성풀이랑 괴로움이랑 눈물이 되풀이된다. 남이 풀어 줄 수 없는 실타래인데 어디부터 어떻게 꼬였는가를 모르는 채 늘 바보짓을 하고야 만다.


  땅은 드넓지만 사람들이 머물 자리는 너무 좁다. 할 일은 많다지만 정작 아무도 어떤 일부터 손에 잡아야 하는지 모른다. 알뜰한 살림살이인지 아니면 쓰레기인지조차 살피지 않으면서 그저 쌓는다. 버려야 하는지 건사해야 하는지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그저 내팽개친다. 이러한 자리에 독일 아줌마가 들어온다. 독일 아줌마로서는 삶도 죽음도 아닌 하루이지만, 아니 하루하루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나날이지만, 문득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줄 알아차린다. 삶은 성을 내기만 해서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줄 느낀다. 이제부터 모든 일을 스스로 찾고 즐기면서 살자는 생각을 천천히 피운다. 그래, 그렇지. 마치 꽃을 피우듯이 생각을 피운다. 모든 꽃이 스스로 씨앗을 퍼뜨려 스스로 햇볕과 바람과 빗물과 흙을 먹으면서 깨어나듯이, 독일 아줌마는 스스로 꽃이 되어 찬찬히 깨어난다. 그리고 이 독일 아줌마가 스스로 꽃이 되어 피어날 적에 이 독일 아줌마 둘레에 있는 사람들도 꽃내음을 함께 맡으면서 천천히, 그야말로 모두들 천천히, 그렇지만 고운 꽃내음을 풍기는 새로운 숨결로 거듭난다.


  웃으려 하기에 웃는다. 노래하려 하기에 노래한다. 아주 쉽다. 울려고 하니 울고, 성을 내려고 하니 성을 낸다. 자, 우리는 우리 삶에서 무엇을 하면 될까? 4348.10.14.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영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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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프리 윌리
사이먼 윈서 감독, 제이슨 제임스 리처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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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 윌리

Free Willy, 1993



  바다에서 사는 범고래나 돌고래를 사로잡아서 놀이공원에 가둔 뒤에 ‘쇼’를 보여주도록 길들이려고 하면, 범고래나 돌고래는 어떤 보람을 느낄까? 범고래 쇼나 돌고래 쇼를 돈을 내고 구경하는 사람은 어떤 재미나 즐거움을 누릴까?


  고래를 보려면 바다에 갈 노릇이다. 하늘을 보고 싶으면 하늘이 활짝 열린 곳에 갈 노릇이다. 맑은 바람을 마시려고 온갖 전기시설을 끌어들여서 도시 한복판에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맑은 바람이 흐르는 숲으로 가야 하는가? 맑은 냇물을 전기를 써서 도시 한복판에 흐르게 해야 할까? 아니면, 도시 한복판에도 맑은 냇물이 저절로 흐를 수 있을 만큼 삶터를 정갈하게 가꾸는 길을 걸어야 할까?


  영화 〈프리 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가지 이야기를 말한다. 바로 ‘자유’이다. 자유로운 삶과 자유롭지 않은 삶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대목을 여러 사람과 삶과 사회를 빌어서 보여준다.


  사람도 자유로울 때에는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답다. 사람도 자유롭지 않을 때에는 안 사랑스러우면서 안 아름답다. 범고래나 돌고래도 자유롭게 삶을 누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답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누릴 자유를 빼앗거나 억눌러서도 안 되지만, 다른 모든 짐승과 푸나무가 누릴 자유도 빼앗거나 억눌러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자유를 빼앗거나 억누르는 짓은 아직 그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나 짐승이나 푸나무한테서 자유를 빼앗거나 억누르면서 돈이나 이름이나 힘 따위를 얻는다고 바보스레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 밥그릇을 챙기려는 바보스럽거나 미련한 이들은 다른 사람 자유를 억누르면서 막상 이녁 자유조차 스스로 억누른다.


  나한테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고, 너한테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짐승이랑 푸나무한테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우리는 서로 어떻게 살 때에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울까. 우리는 서로 무엇을 헤아리며 어깨동무를 할 때에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울까. 자유로운 범고래는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몸짓과 노래와 웃음을 보여준다. 자유로운 사람은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생각과 꿈과 이야기를 보여준다. 너와 내가 저마다 가야 할 길은 아주 환하다. 4348.10.12.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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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볼 (28disc)
니시오 다이스케 감독 / 나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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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볼 Z : 부활의 F

ドラゴンボ-ルZ復活の「F」, Dragon Ball Z: Resurrection of Frieza, 2015



  만화영화 〈드래곤볼 Z : 되살아난 F〉를 혼자서 재미나게 본다. 우리 집 두 아이한테는 아직 이 만화영화를 보여줄 수 없다. 고작 여덟 살하고 다섯 살이니까. 다만, 이 만화영화에 흐르는 이야기는 살짝살짝 바꾸어서 들려줄 수 있다. 자, 그러면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


  먼저, ‘파랑(블루)’하고 ‘노랑(골드)’를 이야기하려 한다. 파랑하고 노랑은 누가 더 높거나 낮지 않다. 둘 모두 ‘사람누리(인간 세상)’을 뛰어넘는 자리이다. 그래서 파랑하고 노랑은 모두 ‘하느님(신)’ 자리에 있다고 할 만하다. 파랑하고 노랑이 맞붙어서 싸우면 어찌 될까? 어느 한쪽이 이기지 않는다. 둘은 온힘을 다해 맞붙는 동안 새로운 길과 눈썰미를 익힌다. 서로 배우려고 ‘맞붙어서 싸운다’는 얼거리로 ‘만난’다.


  〈드래곤볼 Z : 되살아난 F〉에서 손오공은 앞선 만화영화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 아니 새롭게 거듭났다. 〈드래곤볼 Z : 하느님 싸움〉에서 손오공은 ‘빨강(레드)’이 되었다. ‘빨강’은 어떤 빛깔을 나타낼까? 빨강은 사람누리 자리에서 스스로 눈을 뜨고 새롭게 깨어난 넋이라는 대목을 보여준다. ‘스스로 하느님이 된’ 넋이 바로 빨강이라는 빛깔로 나타난다. 〈드래곤볼 Z : 되살아난 F〉에서는 ‘파랑’이다. ‘파랑’이란 무엇일까? 파랑은 저 스스로 아프거나 모자라거나 다친 곳을 다스릴 수 있는 하느님 자리이다. 그래서 이 만화영화에서 손오공은 마지막 대목에서 스스로 ‘다친 자리’를 다스리는 이야기가 나올 만했는데, 아직 이러한 이야기까지 그리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그리겠구나 싶다. 어마어마하게 멀리 떨어진 별에서도 순간이동을 하는 손오공한테 ‘자기치유 능력’이 없다는 대목은 좀 우습다. 바보스럽다고 할까. 그러나 바보스러움이란 바로 손오공이 스스로 갈고닦으면서 천천히 거듭나도록 하는 밑바탕이자 밑천인 만큼, 오래지 않아 새 만화영화에서는 ‘자기치유를 하는 손오공’도 나오리라 본다. 이를테면, 나메크별 사람들이 ‘부러진 팔다리’쯤 새롭게 지어내듯이.


  손오공을 맞수로 여기면서 언제나 몸닦기를 하는 베지터는 이제 손오공 못지않게 몸을 다룰 줄 아는 싸울아비로 거듭난다. 앞선 만화영화에서는 그저 ‘비루스한테 놀림감이 되던 베지터’였으나, 베지터는 끝없는 몸닦기를 하면서, ‘왕자’라는 허울을 내려놓는 몸짓을 보여주면서, 손오공 다음으로 ‘파랑 하느님’으로 곧바로 몸을 바꿀 수 있는 만큼 발돋움했다.


  그러면 베지터는 어떻게 파랑이 될 수 있는가? 손오공을 비롯하여 ‘다른 목숨’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마음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목숨을 죽여서 없애야 ‘나 혼자 으뜸’이 된다는 멍청한 생각을 버렸기 때문이다.


  〈드래곤볼 Z : 되살아난 F〉에서 잘 나오는데, 앞선 이야기에서도 살짝 나오기는 했으나 ‘비루스’보다 ‘우이스’가 훨씬 힘이 세다. 대단히 마땅한 노릇이다. 파괴신을 다스리고 담금질하도록 이끈 우이스는 비루스가 대들 만하지 않다. 그리고, 우이스이든 비루스이든 지구별을 부술 생각이나 마음이 없다. 말로는 지구별쯤 얼마든지 부수겠노라 하지만, 막상 지구별을 부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하면, 지구별에는 ‘맛있는 먹을거리’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고작 맛난 것 때문에 지구별을 안 부순다고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이 있을 텐데, 참말 그렇다. 게다가 지구별에는 온갖 나라와 겨레가 있는 터라, ‘맛있는 먹을거리’는 ‘지구별 사람 숫자’만큼 많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지구를 지킨 영웅은 없다는 뜻이다. 손오공이 아주 힘이 센 싸울아비이기 때문에 지구별을 지켜 주지 않는다. 손오공한테 지구별이 없다면, 또 착하며 아름다운 이웃사람이 없다면, 손오공은 터럭만큼도 오늘 모습처럼 거듭날 수 없었다.


  파랑 하느님이 된 손오공과 베지터이지만, 여느 지구별 사람도 누구나 ‘하느님’이다. 다만, 손오공하고 베지터는 ‘싸움을 할 줄 아는 몸놀림’으로 하느님이 되었을 뿐이고, 우이스나 비루스는 ‘파괴별’을 지키고 다스리는 넋으로 하느님이 되었을 뿐이다. 부르마는 과학천재로서 하느님이 되었다고 할 테고, 다른 모든 주인공도 저마다 제 삶을 찾는 하느님으로 거듭난다.


  손오반 이야기도 해 볼 만한데, 손오반은 제 아버지 손오공보다 훨씬 더 힘이 세다. 그렇지만 손오반은 주먹힘을 키우거나 끌어낼 마음이 없다. 이는 피콜로가 잘 안다. 피콜로는 손오반한테 숨은 모든 힘을 끌어내고 싶으나 손오반은 ‘몸으로 쓰는 힘’보다는 ‘머리로 쓰는 힘’이나 ‘마음으로 쓰는 힘’으로 가려 한다. 손오공은 책 한 권 안 읽고 글 한 줄 쓸 줄 모르지만, 손오반은 꾸준히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갈고닦는다. 손오반은 ‘평화를 가꾸며 새로운 길을 배우는 기쁨’을 누리는 ‘사이어인 전사’도 있다는 대목을 그리는 주인공이라고 할 만하다.


  2016년이나 2017년에도 새로운 미르구슬(드래곤볼) 이야기가 나올까 궁금하다. 이만 한 짜임새라면 다음 이야기도 멋지고 아기자기하게 엮어서 나오리라 본다. 4348.10.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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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아웃 (디즈니 무비 클로즈업) 디즈니 무비 클로즈업 6
디즈니 글.그림, 성초림 옮김 / 꿈꾸는달팽이(꿈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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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슬픔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 2015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아이들하고 보다가 생각한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미국사람이고 미국말로 “Inside Out”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우리 집 어린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려고 “Inside Out”을 “인사이드 아웃”으로 말할 수 있으나, 아직 영어를 모르는 아이들한테는 한국말로 풀어서 알려주어야 한다. “안팍”이라든지 “뒤집기”라든지 “온(모두)”이라고 알려줄 수도 있지만, 영화에 흐르는 이야기를 살피니 “기쁨 슬픔”으로 말해 주면 되겠구나 싶다.


  기쁨이는 머리카락이 파랗고, 새싹빛(옅은 풀빛) 치마를 입었으며, 온몸에서 노란 빛이 흐른다. 파란 머리카락은 스스로 ‘4차원 상태인 사랑’을 나타내고, ‘사랑일 때에는 모든 것을 새롭게 지으면서 살린다’는 뜻을 보여준다. 그런데, 슬픔이는 온몸이 파랑이다. 기쁨이는 머리카락만 파랑이고, 옷(치마)은 이 땅에 새롭게 태어나면서 모든 목숨한테 밥(먹이)이 되는 풀 빛깔을 나타낸다. 기쁨이 몸에서 흐르는 노란 빛은, 풀이 맺는 열매(쌀알과 밀알)가 노랗게 익는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텐데, ‘아름다운 열매’란 바로 ‘사랑’이다. 그나저나 슬픔이는 머리카락도 몸도 옷도 모두 ‘파랑’이다. 대단한 숨결이다. 모두 파랑이라고 하는 뜻은 슬픔이도 바탕은 ‘4차원 상태인 사랑’이라는 소리이다. 그리고, 슬픔이도 기쁨이하고 똑같이 모든 것을 새롭게 지으면서 살릴 수 있는 기운을 쓴다는 뜻이다.




  기쁨이와 슬픔이는 서로 다른 몸이자 목숨이면서, 서로 한몸이자 한마음이다. 서로 다르면서 같다. 영화 《기쁨 슬픔》을 보면, 맨 먼저 태어난 아이가 기쁨이요, 이 다음으로 슬픔이가 태어난다. 두 아이는 언제나 어깨동무를 하는 한넋이자, 왼손과 오른손처럼, 1차의식과 2차의식처럼, 언제나 함께해야 참다운 꿈을 지을 수 있다.


  기쁜 슬픔이요, 슬픈 기쁨이라고 할까. 그러나,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으면서 어우러지면 ‘기쁜 슬픔’도 ‘슬픈 기쁨’도 아닌, 오직 하나, ‘삶’이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삶’이요 ‘아름다운 삶’이다. 기쁨이는 저 혼자서만 신나게 일한다고 여기면서 그만 슬픔이를 비롯해 다른 동무들 몫까지 혼자 짊어지려고 했다. 이러다 보니 ‘이 아이들을 마음속에 담은 아이(사람인 아이)’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힘들다.


  사람이라고 하는 몸을 입고 태어난 아이는 기쁨도 슬픔도 미움도 시샘도 투정도 노래도 춤도 모두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두를 겪으면서 삶을 지으려고 태어난 아이이기 때문이다. 기쁨이는 ‘기억 쓰레기터’에 떨어지면서 비로소 이를 깨닫는데, 이 영화에 나오듯이 ‘기억 쓰레기터’에서 ‘기억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사람들은 ‘기억이 사라진다고 생각할 뿐’, ‘기억은 늘 그대로 있’다. 우리 넋이 마음에 아로새긴 ‘기억’이라고 하는 ‘감정’은 늘 그대로 아로새겨져서 남고, 이것이 바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이라는 감정으로 거듭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늘 그대로 그곳에 있다.


  “기쁨 슬픔”이란 한결같이 “삶”이다. 삶을 노래하기에 삶이다. 삶을 꿈꾸기에 삶이다. 이리하여, 삶에서 사랑이 흐르고, 삶에서 사랑이 나타나며, 삶에서 사랑으로 사람다운 넋으로 아름다운 짝님을 만나서 새로운 하루를 지을 수 있다. 4348.8.22.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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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22 19:58   좋아요 0 | URL
영화 볼 때 색상까지 눈여겨 보지 못했습니다. 말씀에 깊이 동감합니다. ^^

숲노래 2015-08-22 21:09   좋아요 1 | URL
슬픔이가 `파랑 옷`이라고도 이 글에 적었는데,
포스터를 살피니 흰 웃도리에 까만 바지였어요.
영화에서는 옷도 파랗구나 하고 느꼈는데
스틸사진을 네이버영화에서 얻으며 찬찬히 보니
흰옷과 검은옷까지 파랑으로 보이도록 물들이는
`슬픔이`인 파랑이로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끼기도 했어요.
 
[수입] Legend of Drunken Master (취권)(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Miramax Lionsgate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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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취권

醉拳, Drunken Master, 1978



  어릴 적부터 영화 〈취권〉을 퍽 자주 보았다. 텔레비전에서 이 영화를 꽤 자주 보여주었으니 자주 볼밖에 없었다. 그런데 〈취권〉은 보고 또 보아도 눈길을 끄는 재미가 있다고 느꼈다.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도 놀랍지만, 영화 주인공인 ‘황비홍’이 스스로 바보스러움을 깨닫고는 비로소 ‘몸을 갈고닦는 길’을 제대로 걷는 모습이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취권’이라고 하는 무술은 ‘틀에 박힌 눈길이나 몸짓’을 모두 내다 버리면서 오로지 바람에 몸을 얹어서 부드러우면서 날렵하고 여리면서도 단단한 숨결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이지만 모든 것이 있는 숨결로 손이랑 발을 놀리는 무술이 취권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니, 딱딱하게 굳은 손짓이랑 발짓을 쓰는 무술은 취권을 깨지 못한다. 취권이라고 하는 무술은 ‘남이 이 무술을 깨’기 앞서, 이 무술을 쓰려는 사람이 스스로 모든 틀을 깨기 때문에, 이 무술을 쓰는 사람 스스로 ‘어떤 손짓이랑 발짓이 나올’는지 모른다.


  영화에서 황비홍이 제 장난꾸러기 모습이랑 바보스러운 삶을 깨닫는 대목도 재미있다. 왜냐하면 참말 아무것이 아니라 할 만한 데에서 욱하거나 울컥한다. 그동안 숱한 말을 듣거나 일을 치렀어도 꿈쩍을 않더니, 놀림을 받고 아버지를 깎아내리는 말을 듣고 ‘스무 해를 갈고닦아도 안 된다’는 핀잔까지 듣고서야 비로소 꿈틀거린다.


  스무 해를 갈고닦아도 안 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이 말마따나 스무 해를 갈고닦아도 안 되는 일을 바로 한 해 만에 해낸다. 어떻게 해낼까? 황비홍 스스로 모든 바보짓을 멈춘 뒤, 새로운 몸짓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해낸다. 가야 할 길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똑똑히 몸을 가눌 수 있을 적에, 무술을 하는 참뜻인 ‘몸을 갈고닦으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린다’는 삶이 된다.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리지 못하면 주먹질이나 발길질로 이웃을 괴롭히는 바보가 된다.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릴 때에는 참다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나아간다. 몸을 갈고닦아서 마음껏 온갖 몸짓을 할 수 있을 때에 어떤 느낌인지 아는가? 몸을 갈고닦아 보면 안다. 뒤돌려차기나 빙그르르 돌아 내려앉기를 할 적에, 참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도록 주먹을 질렀다가 끌어당길 적에,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한 ‘짜릿한 아름다움’이 온몸으로 짜르르 하고 퍼진다. 4348.7.4.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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