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저녁나절, 뜨신 물을 받아 아기를 씻기는데 물이 몹시 뜨겁다고 느낀다. 곁님은 하나도 안 뜨겁고 아기한테 꼭 알맞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내 손은 뜨겁다 못해 따끔거리기까지 한다. 꾹 참는다. 이맛살도 찌푸리지 않으면서 아기를 씻긴다. 아기를 씻기는 내내, 씻고 난 다음, 내 손을 들여다본다. 벌겋다. 불그스름하다. 퍽 썰렁한 방에서 손가락 마디마디 얼어붙으면서 글을 쓰느라 뻣뻣해진 손으로 뜨신 물을 받으니, 조금만 미지근해도 퍽 따뜻하다고 느끼고, 웬만큼 씻을 만하면 뜨겁다고 느끼고, 아기를 씻길 물에는 손이 덴다고 느끼는 셈일까. 2009.1.7.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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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값 1만 원

사진 찍어 달라는 일이 들어왔다. ‘청소년 문화’를 사진으로 100장 찍으면 100만 원을 일삯으로 준다는 일감인데, 나라안에서 손꼽히는 언론사에서 돈을 대는 재단에서 들어온 일감인데, ‘장비값 + 필름값 + 교통삯’ 들을 모두 쳐서 100장에 100만 원이라고 한다. 나야 자동차를 몰고 다니지 않지만, 요즘 말하듯 ‘기름값도 안 나오는 일’이라고 할까. 아니, 이 일을 하면 돈이 더 나갈 수밖에 없는 셈이라고 할까. 이 일감을 받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모두들 ‘너무 적은 돈이다’고 말하는데, 일을 맡기는 쪽에서는 ‘우리 살림으로는 더 주기 어렵다’는 말만 한다. 꼭, 칼자루를 쥔 사장님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부리는 듯한 느낌이다. 실랑이를 한참 지켜보다가 칼자루를 쥐신 분한테 넌지시 한 말씀 건넨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한테 버스삯이나 전철삯쯤은 주셔야 옳지 않나요? 한 달에 다문 5만 원씩 쳐서, 여섯 달 동안 30만 원이라도 찻삯을 보태야, 그나마 어느 만큼 보람이 있지 않습니까?” 하고 묻는다. 따지고 보면 한 달 5만 원은 턱도 없는 찻삯이다. 손꼽히는 언론사 돈으로 굴러가는 문화재단 일꾼은 내 말을 듣더니 “그러면 교통비를 포함해서 130만 원이면 될까요?” 하고 묻는다. 어라? 뭔가 받아들일 구석이 있네? 그러나 찻삯을 그만큼 담는다 해도, 일삯이며, 밥값이며 여러 가지를 헤아려야 하지 않나. 그래도 둘레에서는 내가 찻삯 얘기를 해서 고맙다고, 턱도 없는 100만 원에 터무니없는 일을 할 판이었는데 조금이라도 나아졌다고들 말한다. 2008.9.20. (덧말 : 이때에는 이 문화재단 이름을 밝힐 수 없었으나 이제는 말해도 되겠지. 동아일보사가 꾸리는 일민문화재단이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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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책

아기 낳아 기르면서 육아책 말고는 볼 겨를이 없더라는 어느 분. 그런데 나는 예전부터 육아책을 곧잘 읽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 큰 깨우침과 가르침이 담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던 때에도 즐겨찾아 읽었고, 기쁘게 받아들이며 마음에 담았다. 2008..9.11.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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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나라에서 전투기 한 대 살 돈을 아끼어 도서관 백 군데를 마련하도록 마음을 쏟거나, 도심지 거님길돌을 갈아치우지 말고 이 돈으로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 새책을 사 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해 본다. 나라에서 잠수함이나 구축함이나 미사일 하나를 덜 만들면서, 이 돈을 모든 사람한테 조금씩 고루 나누어 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해 본다. 전투기를 줄이고, 미사일을 줄이고, 탱크를 줄이고, 막삽질도 줄이면서, 사람들한테 기본소득으로 나누어 주면, 사람들 스스로 이 돈으로 마을살림을 가꾸지 않을까. 2009.1.20.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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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사전에 싣는 낱말뜻은 누가 풀이할 적에 어울릴까? 어느 갈래에서 오랫동안 한길을 판 사람이 풀이해야 어울릴까? 이제껏 사전풀이는 ‘전문가’란 사람들이 붙였다고 한다. 그러면 생각해 보자. ‘아이’나 ‘기저귀’ 같은 낱말은 어떤 전문가한테 뜻풀이를 맡겼을까? ‘집’이나 ‘옷’ 같은 낱말은 어떤 전문가한테 뜻풀이를 맡겼을까? ‘사랑’이나 ‘마음’ 같은 낱말은 어떤 전문가한테 뜻풀이를 맡겼을까? ‘빨래’나 ‘빗자루’ 같은 낱말은 어떤 전문가한테 뜻풀이를 맡겼을까? ‘꾸중’이나 ‘타이르다’는? ‘돌보다’나 ‘부엌칼’ 같은 낱말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사전] 주로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하고 어린이의 정서를 읊은 시 2. 어린이가 지은 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1. 어린이가 지은 시 2.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사고와 정서에 맞게 지은 시

[보리 국어사전] 어린이가 쓴 시. 또는 어른이 어린이 마음이 맞추어 쓴 시


세 가지 사전에서 ‘동시’ 뜻풀이를 찾아본다. 이 뜻풀이는 알맞은가? 좋은가? 어울리는가? 이 뜻풀이로 ‘동시’가 무엇인가를 헤아리거나 알아차릴 만한가? 세 사전 모두 동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동시를 어떻게 마주해야 즐겁거나 아름다울는가를 짚지 못한다. 그래서 다음처럼 새로 뜻풀이를 붙인다.


[숲노래 말꾸러미] 어린이부터 누구나 쓰고 읽고 나누고 즐기며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알맞게 줄여서 쓴 글


동시는 어린이부터 읽는다. 어린이만 읽지 않는다. 동시는 어린이부터 읽되 어린이한테 맞추지 않는다. 어린이부터 온삶을 슬기롭고 즐겁고 따뜻하고 상냥하고 사랑스럽고 곱고 기쁘게 맞아들여서 새롭게 가꾸는 길을 스스로 찾고 나누도록 이끄는 이야기를 담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전문가란 사람이 될 까닭이 없다. 우리는 살림님(살림순이 또는 살림돌이)이 되면 넉넉하다. 우리는 사랑님(사랑순이 또는 사랑 돌이)이 되면 즐겁다. 뜻풀이는 살림님이나 사랑님 숨결로 붙일 적에 어울린다. 2019.4.9.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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