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3

‘마을발전기금 200만 원’을 내지 않았대서 따돌림을 받고 괴롭다던 분이 고흥군청에서 1인시위를 했다 하고, 이 이야기가 누리신문에 올랐다. 글을 곰곰이 살피니 고흥군청이건 마을에서건 딱히 말썽거리를 풀 뜻이 없어 보인다. 생각해 보라. 군수이든 군청 과장이든 주무관이든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 마을지기(이장)한테 전화를 걸어서 한마디만 해 주어도 말썽을 풀 수 있다. 군수란 사람은 바로 이런 말썽거리를 풀라고 앉힌 심부름꾼이니 마땅히 마을에 가서 마을지기더러 ‘마을발전기금 200만 원’을 왜 내라고 하느냐고, 그래서 누가 시골에 마음붙여 살겠다고 오겠느냐며 따지고 타일러야 한다. 고흥군은 이런 말썽거리 하나를 풀 생각을 안 하면서 ‘앞으로 사라질 지자체 2위’라는 이름을 씻겠다며 목돈을 들여 ‘귀농귀촌대책본부’를 세운다. 그런 대책본부 세울 돈이 있으면, 군청에서 ‘귀촌인’한테 200만 원을 주어, 이 돈을 마을발전기금으로 삼으라 할 노릇이다. 군청 공무원이든 마을지기이든 모두 한통속인 터라 이런 앙금은 앞으로도 이어지겠지. 나는 2011년에 고흥에 깃들면서 “쓰러져 가는 빈집”을 900만 원에 샀다. 이때에 마을에서 아뭇소리를 안 하더라. 왜 그러한가 했더니 한 해 뒤에 이웃집 할아버지가 넌지시 “쓰러져 가는 빈집”은 200만 원에 팔 집이었다 하고, 내가 700만 원 덤터기를 쓴 셈이라고, 나는 처음부터 700만 원을 덤터기를 썼기에 “마을발전기금을 다 낸 셈”으로 쳐서, 나더라 다른 돈을 내라는 소리를 앞으로 안 하리라고 알려주더라. 2019.4.25.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글쓰기 사전)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17&aid=000040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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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3

마을책집에서 이야기꽃을 펴는데 어느 분이 묻는다. “독립책방이 늘고 1인출판물이나 1인잡지 이야기가 많이 나도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제는 큰 출판사를 바라보지 않고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서 스스로 이웃을 사귀려는 분들이 차츰 눈을 뜨는구나 싶어 무척 재미있어요. 저는 1994년부터 그 1인출판물이나 1인잡지를 냈어요. 그때에는 사람들이 시큰둥할 뿐 아니라 뜬금없다고, 게다가 뭔 1인소식지를 이레마다 몇 가지씩 척척 찍어내느냐고들 했어요.” “네? 1994년부터 1인출판물을 내셨다고요?” “네, 1994년부터 이레마다 두어 가지씩 손수 글을 쓰고 엮고 학교도서관에서 종이로 뽑은 뒤에 복사집에서 복사한 다음에 돌렸어요. 제가 낸 1인출판물이라고 할 만한 작은 꾸러미라면 얼추 1000가지쯤 됩니다.” “헉! 독립출판물의 원조 아니에요?” “하하하, 그건 모르는 소리예요. 혼자서 모든 일을 다해서 낸, 이른바 독립출판물 원조라면, 《성서조선》을 펴낸 김교신 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평구 님이 엮은 《성서연구》가 있어요. 저는 헌책집을 다니다가 《성서연구》를 만났는데요, 깜짝 놀랐어요. 그 《성서연구》를 보면서 제 1인소식지, 그 1인출판물을 더 씩씩하게 낼 수 있었어요. 이 작은 ‘독립출판물’인 《성서연구》는 1946년부터 쉰 해 남짓 500호가 나왔다지요. 그토록 엄청난 땀방울로 어마어마한 ‘독립출판물’을 낸 어른이 계셨으니, 이러한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제가 걸어가는 길에 더 기운을 내었습니다.” 2017.2.3.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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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

“좋은 책”이 따로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좋은 책을 읽지 않는다. 그저 “책을 읽”는다. “좋은 사람”이 따로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저 “사람을 만난”다. “좋은 길”이 따로 있는지 잘 모르니, 그저 “내가 갈 길”을 간다. “좋은 글”이 따로 있는지 아리송하기에, 그저 “내가 쓸 글”을 쓴다. 둘레에서 묻는다. 그래도 좋은 책이나 글이 있지 않겠느냐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고서 대꾸해 본다. 나는 “좋은 책”을 읽기보다는 “그냥 책”을 읽지만, 굳이 가리자면 “아름다운 책”을 읽으려 한다. 이웃을 마주할 적에 “그냥 사람”이기보다는 “아름다운 사람”이라 여기며 만난다. 내가 쓰는 글이든 이웃이 쓴 글이든 모두 “아름다운 글”이기를 바라고 생각하고 꿈꾸면서 마주한다. 내가 걷는 길은 “아름다운 길”이 되기를 바라면서 한 발짝씩 내딛는다. 2019.4.25.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아름다운 글

“좋은 책”이 따로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좋은 책을 읽지 않는다. 그저 “책을 읽”는다. “좋은 사람”이 따로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저 “사람을 만난”다. “좋은 길”이 따로 있는지 잘 모르니, 그저 “내가 갈 길”을 간다. “좋은 글”이 따로 있는지 아리송하기에, 그저 “내가 쓸 글”을 쓴다. 둘레에서 묻는다. 그래도 좋은 책이나 글이 있지 않겠느냐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고서 대꾸해 본다. 나는 “좋은 책”을 읽기보다는 “그냥 책”을 읽지만, 굳이 가리자면 “아름다운 책”을 읽으려 한다. 이웃을 마주할 적에 “그냥 사람”이기보다는 “아름다운 사람”이라 여기며 만난다. 내가 쓰는 글이든 이웃이 쓴 글이든 모두 “아름다운 글”이기를 바라고 생각하고 꿈꾸면서 마주한다. 내가 걷는 길은 “아름다운 길”이 되기를 바라면서 한 발짝씩 내딛는다. 2019.4.25.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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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i Lakshmibai, Mahasweta Devi

Rani Lakshmibai(락슈미바이), Mahasweta Devi(마하스웨타 데비), 두 사람을 모른다. 잘 모를 뿐 아니라 거의 모른다. 어쩌면 아예 모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를 헤아려 본다. 두 사람은 저마다 선 자리가 어디였든 스스로 갈 길을 간 꿈순이요 사랑순이요 빛순이요 노래순이가 아닌가 싶다. 아름다움은 사랑에서 태어나고, 사랑은 아름다움에서 태어난다. 겉모습이나 몸매나 손놀림이 아닌, 눈빛하고 발걸음하고 마음씨가 바로 삶을 이루는 사랑이면서 아름다움이겠지. 2019.4.21.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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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

대구 달서구에 계신 이웃님이 ‘대구 북소리 축제’ 이야기를 들려준다. ‘북소리’란 말을 듣고 무슨 자리인지 척하고 알아채긴 했지만, 누구나 척하고 알아채지는 않으리라. 대구 벼슬아치 분들로서는 재미나게 ‘북(book) + 소리’로 이름을 지은 듯한데, 이런 이름은 참말 재미있을까? 이를 말놀이로 여길 만할까, 아니면 따분한 말장난이라 해야 할까? 아이들은 ‘북’이라 하면 ‘둥둥 울리는 장단’이다. 영어를 말하는 이라면 대뜸 알 테지만, ‘book’은 ‘북’으로 소리나지도 않는다. 그나마 ‘북페어·북페스티벌’이라 안 하고 ‘소리’를 썼으니 낫다고 여겨야 할까? 벼슬아치 분들이 살짝살짝 슬기롭게 바라볼 수 있다면 ‘책소리’란 이름을 넘어 ‘숲소리’라든지 ‘숲노래’ 같은 이름을 지어서 쓸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책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책은 언제나 우리 살림터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태어난다. 그런데 이야기로 흐르는 책을 누구나 보도록 종이에 앉히려면 숲이 있어야 한다. 잘 자란 나무를 고맙게 베어서 기쁘게 종이로 빚어서 책을 묶는다. 우리가 누리는 책잔치란 알고 보면 ‘숲잔치’이다. 우리가 책을 사이에 놓고 소리를 나눈다면 으레 ‘숲소리’이기 마련이다. 책은 오롯이 숲이면서 넉넉히 숲바람을 담는다. 책은 옹글게 숲이면서 푸르게 숲노래를 일으킨다. 마을이란 삶터에 숲을 옮기는 책 하나이다. 숲으로 피어날 책을 우리 손에 살포시 쥐니 웃음꽃도 눈물꽃도 피어나면서 이야기꽃으로 거듭난다. 2019.4.12.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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