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5.7. “밥톨 남기지 마라. 다 안 먹었네. 마저 먹어라.” 밥그릇이나 수저에 밥톨 하나 남기지 않도록, 또 밥상에도 밥톨을 붙이지 않도록 모조리 살펴서 먹으라 하신다. 아니, 따지고 보면 남기지 말거나 흘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먹으란 뜻이다. 얼른 먹고 바깥에 놀러갈 생각하지 말고, 차분히 먹고 설거지하고서 나가서 놀라고 하신다.


1998.5.6. “복숭아는 한 톨에 얼마 해요?” “네, 이 복숭아는 한 개에 이천 원입니다. 크고 맛있습니다.” “그 복숭아로 다섯 톨 주셔요.” “네, 다섯 개 담아 드리지요.” 


2019.5.14. “아버지도 사과 깎아 줘요?” “음, 한 톨이면 좋아. 아니, 한 톨 말고 한 조각만 주렴.” “한 개, 아니 한 톨을 깎아서 한 조각을 썰어서 드릴게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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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3.5. 통·번역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서 한국외국어대학교 네덜란드말 학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원어민 교수’님이 네덜란드사람 아닌 벨기에사람이다. 엥? 뭐지? 왜? 네덜란드말을 가르치고 배우는 자리에서 네덜란드사람 아닌 벨기에사람이 왜? 뜬금없이? 벨기에도 네덜란드말을 쓰니 벨기에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사람도 한 분을 두고서 벨기에사람을 둔다면 모르되, 네덜란드사람 없이 벨기에사람만 있다면? 독일사람이 스웨덴말을 잘할 수도 있으나, 스웨덴말은 스웨덴사람이 가장 잘한다. 스웨덴말을 잘하는 독일사람이 스웨덴말을 가르칠 수도 있으나, 스웨덴말을 스웨덴사람으로서 하는 스웨덴사람이 곁에 있으면서 이런 얼거리가 될 적에 알맞다고 느낀다. 아무튼 한국에서 네덜란드말을 가르치는 벨기에 교수님 이름은 ‘쿡’. 교수님은 첫자리에서 “내 이름은 ‘쿡’입니다. 쿡쿡. 그 쿡이에요. 기억하기 쉽지요?” 하고 말씀했다. 한국사람이 말하는 ‘쿡’하고 네덜란드 말소리 ‘koek’은 다르다고 처음으로 느끼면서 재미있었다. 네덜란드 말소리는 ‘쿡’보다는 ‘꾺’에 가까웠다.


2002.5.4. “웃으려면 그냥 웃어. 참지 마. 참다가 배가 터져.” 그래도 웃음을 참으며 쿡쿡거리다가 드디어 “아이고, 못 참겠네!” 하면서 까르르 터진다. 까르르 웃음이 터지고도 한참 동안 방바닥을 구른다. 그렇게 웃겼으면 그냥 웃지 왜 쿡쿡거리기만 했을까.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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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컷

1999.12.11.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녘에서는 ‘자아비판’을 시킨다면 남녘에서는 ‘자기검열’을 시킨다. 북녘에서는 멀쩡한 사람이 아무 잘못이 없는 일이야말로 잘못이라고 스스로 무덤을 파는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면, 남녘에서는 멀쩡한 사람이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게끔 자기검열(또는 자체검열)을 해야 한다. 북녘에 언론자유가 없다지. 그렇다면 남녘에 언론자유가 있을까? 자본주의와 권력자가 판치는 막짓은 있되, 목소리를 마음껏 펴는 자유가 참답게 있을까?


2010. 3.2.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하면서 실을 수 없단다. 잘라야 한단다. 내가 그쪽을 흉보는 이야기를 지어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지만, 한쪽 목소리만 담을 수 없으니 실을 수 없단다.


2019.5.29. 나는 1999년부터 열한 달을 다닌 보리출판사에서 건네준 ‘월급명세서’를 차곡차곡 모았다. 이곳에 사표를 던지고서 2001년부터 새롭게 일한 토박이출판사에서 내준 ‘월급명세서’도 차곡차곡 모았다. 1999년부터 한 해 동안 ‘달삯 62만 원에 열두 달 비정규직’으로 일했고, 사전 편집장이자 자료조사부장으로 일할 적에는 정규직이기는 하되 첫 달삯 100만 원을 받으며 일했다. 틀림없이 이렇게 살았던 일이요 겪은 일이라 꾸밈없이 글로 옮겼는데, 이 일을 믿을 수 없다면서 이 얘기를 쓴 대목을 잘라내야겠다는 얘기를 듣는다. 할 말을 잃었다.


2019.6.4. 한국은 피해자보다 가해자 인권을 어쩐지 더 헤아리는 나라이지 싶다. 피해자가 ‘언제 어디에서 누가 이렇게 괴롭히거나 들볶거나 짓밟았다’는 이야기를 밝히면, 몹쓸 짓을 일삼은 가해자를 나무라거나 꾸짖을 노릇일 텐데, 뜬금없이 ‘가해자 명예훼손’이란 잘못을 들씌우곤 한다. 피해자는 처음 시달리거나 짓밟힐 적에 한 판 괴롭고, ‘가해자 명예훼손’이란 잘못을 뒤집어쓰면서 두 판째 괴롭고, 또 이 두 가지 때문에 마음앓이를 하다가 더는 속에 묻을 수 없어서 이 일을 터뜨리면 ‘왜 이제 와서 뜬금없이 해묵은 일을 끄집어내느냐’ 하는 핀잔까지 들으면서 세 판째 괴롭기 마련이다. 참소리를 내려고 하면 ‘내부고발’이란 무시무시한 이름을 덮어씌운다. 참된 목소리를 낼 뿐인데 왜 이런 목소리를 ‘내부고발’이란 이름으로 뒤집어씌울까?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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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벅
2019.5.31. 이웃이 있으니 글을 써서 나눌 수 있다. 이웃이 있기에 책을 지어서 같이 읽을 수 있다. 이웃이 있으니 우리가 저마다 삶을 사랑하며 갈무리한 글로 엮은 책을 푼푼이 돕거나 거들면서 널리 꽃피우도록 나아갈 수 있다. 나도 처음으로 텀블벅이라는 곳에 내 새로운 책 하나를 올린다. 어떤 이웃을 만날 수 있을까. 어떤 분이 나하고 이웃이 될까. 우리는 어떤 눈빛으로 만나면서 어떤 사랑으로 책 하나를 주고받는 멋진 사이로 피어날 수 있을까. 새로운 길에 서면서 ‘텀블벅’이라는 자리에 이름 하나 새로 붙여 보고 싶다. 이를테면 ‘두레자리·두레마당·두레터’로. ‘두레판·두렛길·두렛돌’로. ‘징검다리·징검돌’로.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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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뽑기 2019.5.16. 

마을 어르신이 마늘밭에서 뽑은 마늘을 짐차에 싣는 일을 거들면 좋겠다고 찾아오셨다. 올해로 아홉 해째인가 여덟 해째인가. 해마다 이맘때에 마을싣기를 거든다. 마을싣기를 거들고서 마늘밭에 흩어진, 줄기가 끊어진 알마늘을 주워서 한쪽으로 모은다. 밭에 쪼그려앉아 일하던 아지매가 “저그 마늘 좀 뽑아 보시겠소? 두 손으로 살살 잡아뿔면 나와부려.” 한 손은 줄기 아래쪽을, 한 손은 바닥에 닿도록 알뿌리 위쪽을 잡고서 가만히 당긴다. 쏘옥 하고 뽑힌다. 쪼그려앉아서 하다가 밭자락에 무릎을 꿇고서 뽑는다. 땅에 무릎을 꿇고 마늘을 뽑으니 등허리도 펴지고 햇볕도 좋고 마늘내도 다 좋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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