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실린 내 기사

지난 수요일인 2007년 5월 23일, 내가 새로 낸 1인잡지 《우리말과 헌책방》를 이야기하는 글이 〈조선일보〉에 실렸다. 오늘 토요일, 〈국민일보〉에 글이 하나 더 실렸다. 인천에서 〈국민일보〉를 사기가 너무 어려워,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넘게 이곳저곳 다녀 보아도 파는 데가 없어서, 서울에 있는 〈오마이뉴스〉 기자인 ㄱ 아저씨(내가 서울에 가면 잠자리를 내어 주는 선배)한테 전화로 여쭈려 한다. ㄱ 아저씨는 내 전화를 받자 첫 마디로 대뜸, “아, 조선일보에 인터뷰를 했더라고요?” “네? 인터뷰요? 하도 귀찮게 전화를 해서 아무렇게나 얘기해 주었는데요?” “그게 뭐예요. 입으로 하는 말하고 행동하고 다르고.” “어, 그거 내가 인터뷰 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까 얼결에 전화로 말해 준 것뿐인데. 하긴 뭐, 그것도 인터뷰라면 인터뷰일 수밖에 없으니.” 저녁나절, 조금씩 차오르는 달을 올려다보며 생각한다. 〈조선일보〉 기자는 나를 취재하지 않았다. 나를 만나보지 않았고(그러니 내 얼굴도 모른다), 내가 책을 낸 출판사로 전화해서 내 연락처를 알아낸 뒤, 그이한테 도움이 되는 몇 가지만 꼬치꼬치 캐물으며 알아냈다고 할까. 그리고 그 정보로 글을 썼다. 이 자리이니까 말하지만, 전화로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전화기를 붙들고 싸웠다고 해야 옳다. 참말이지, 나는 그 기자 분하고 신나게 싸움질을 했다. 그런데 그 기자가 쓴 글을 보니, 내가 ‘성을 냈다’고 적어 놓았더만. 그런데 여태 나를 만나본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 쓴 글보다, 그저 몇 가지만 나한테 전화로 물어본, 아니 물어봤다기보다 한판 싸움질을 했던 기자가 쓴 글이 훨씬 잘 썼네. 깜짝 놀란다. 그러고 보니 그 기자가 얼핏 하는 말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1998년에 한글학회 공로상 받으셨네요? 그때 사진을 보니 너무 젊어서 신문에 쓰기 어렵겠네요.”〈조선일보〉에 실린 내 사진은 내 것이 아닌, 자전거잡지 〈더 바이크〉 것이다. 그곳 사진을 얻어서 썼다. 그러니까, 나는 이 신문사에 ‘사진 제공’을 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기자는 ‘요즘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 실린 매체’를 그이 스스로 알아내서 사진을 얻었다! 엄청난 취재력이자 활동력 아닌가! 그건 그거고, 1998년에 찍힌 내 사진이라 해도 〈조선일보〉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이 아니다. 그때 1998년에도 〈조선일보〉는 나를 취재하려고 그렇게 애쓰셨지만 나는 요리조리 몸을 빼고 전화를 안 받으면서 취재거부를 했는데, 그때에도 〈조선일보〉 기자는 마치 나를 만나서 차분히 이야기를 듣고 사진도 찍은듯이 글을 척 실었다! 얼마나 대단한가! 1998년 〈조선일보〉에 실린 내 사진도 다른 매체에서 얻었을 테지. 아마 〈한겨레〉 기자가 찍은 사진을 얻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때에 나는 신문배달 일꾼으로 일했고, 내 사진을 찍은 사람은 〈한겨레〉 기자만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진자료를 아직도 건사한다니! 다른 신문사에는 그 신문사 자료가 얼마나 있을까? 아니, 다른 신문사 기자는 글을 실으며 사진 자료를 찾을 때 저희 ‘곳간(데이타베이스)’를 뒤져 보기는 하는가? 속으로 조금 소름이 돋았지만, 이런 모습이야말로 ‘기자얼’이라고 느낀다. 한켠으로는, ‘취재도 안 한 주제에 글만 훌륭하게(?) 썼으니, 소설가다운 솜씨가 많이 엿보여서, 기자보다는 소설가로 일하는 쪽이 낫다고 느낄 만한 〈조선일보〉 기자’이지만, 글을 잘 쓴다는 모습은, 그만큼 기자로서 바탕이 되었다는 소리이다. 높이 살 대목은 높이 사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진보와 혁명이 살아난다. 진보정당이든 진보매체이든, 수구꼴통이라고 하는 매체 사람들이 하는 만큼 애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거나 울릴 수 없다. 기자들 글솜씨 하나만 놓고 볼 때, ‘조선일보 기자 발가락만큼이라도 따라가려고’ 애쓰는 진보매체 일꾼이 얼마나 있는가? 현장 취재를 ‘조선일보 기자 신발 밑창이 떨어지는 만큼 따라가려고’ 다리품 파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내가 여태까지 겪어 보기로는 늘 ‘글쎄요’이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다. 이는 받아들이겠다. 다만 한 가지, 헌책집 이야기를 취재하고 글로 다루는 기자들 모습과 몸짓과 글을 보면, 이 나라 일간지와 주간지와 월간지를 통틀어 ‘조선일보 기자 1/10만큼이라도 되는 기자’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진보매체이든 진보가 아닌 매체이든 ‘조선일보 삿대질’은 신나게 해댄다. 저희는 그만큼 애쓰지 않으면서. 그래, 〈조선일보〉가 잘못하는 짓, 이 가운데 가장 크게 잘못하는 정치와 사회와 교육 글(다른 글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이 나라에 〈조선일보〉라는 신문이 있다는 대목이 큰 아픔이자 슬픔이라고 본다)은 마땅히 나무라고도 남을 만하다. 삿대질뿐 아니라 송곳으로 후벼파듯 갈기갈기 파헤쳐야 하기도 할 테고. 그러나 이런 삿대질로 그친다면? 삿대질로만 그치고, 우리 스스로 한결 나은 모습으로 거듭나려 하지 않는다면? 진보를 외치고 싶은 사람들은 느껴야 한다. 느낀 대로 움직여야 한다. 진보이든 무슨 운동이든 한삶을 바쳐서 두 눈을 감는 날까지 멈출 수 없는 일이다. 어느 한때라도 흐트러짐이란 있을 수 없다. 자, 보라. 〈조선일보〉 기자 가운데 정년퇴직을 하는 날까지 흐트러짐을 보이는 기자가 있는가?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사람’ 가운데 제 나이 예순이 되는 날까지 흐트러짐 없이 고이 제 길을 걷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아니, 있기나 한가? 술자리에서만 목소리 높이고, 정작 제 몸뚱이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은 ‘조선일보를 나무랄 품’이 없다고 본다. 2007.5.26.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조선일보 기사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07&M=05&D=23&ID=200705230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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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을 말린다

비 그친 뒤 말끔해진 하늘. 그렇지만 먼지띠를 모두 걷어내지는 못한 비. 그럭저럭 맑은 햇빛과 좋은 햇볕을 받으면 이불이 한결 뽀송뽀송할 테니, 4층에 있는 살림집 하늘마당 돌담에 이불을 걸쳐 놓는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벽돌 셋을 얹어 놓고. 뽀송뽀송 마르는 이불 곁에 서서 똑같이 해바라기를 한다. 2013년까지 재개발로 엎어버린다는 이 마을인데, 지붕 낮은 골목집을 죽 둘러본다. 이 집들이 목숨이 다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밀어서 없애려고 한다면, 이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과 터전과 마음은 어찌 될까. 이 사람들 일터는? 많이 벌지는 못한다고 해도, 조그마한 집 하나 얻을 만큼은 벌 수 있는 일터가 있는 마을. 많이 누리지는 못한다고 해도, 떡 한 접시 나눌 수 있는 마을. 짐차가 들어오지는 못해도 조용하고 호젓하게 지낼 수 있는 골목길. 체육관이니 수영장이니는 없어도 배드민턴채 하나만 있으면 골목길 한켠에서 땀흘려 뛸 수 있는 골목길. 이 골목길 사람들은 삶터에서 임자로 마을을 가꾸는 오늘이지만, 이 골목마을에서 밀려나 아파트 수위나 청소부가 되어야 하는가. 2007.5.26.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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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5

인천 율목도서관에서 이야기꽃을 편다. 2010년에 인천을 떠나면서 인천사람한테 씨앗으로 남긴 《골목빛》이라는 사진책을 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이다. 새삼스럽구나. 2010년부터 예닐곱 해를 인천에서 이 책을 안 알아보았는데, 거의 열 해가 된 이즈음 알아보아 주는구나. 율목도서관에서 이야기꽃을 펴는 터라, 이 율목도서관하고 얽힌 어릴 적 일, 1985년이라는 해에 겪은 일을 넌지시 곁들인다. 율목도서관 책지기님들이 모두 놀란다. 어떻게 그런 일이 다 있느냐 하시지만, 그때에는 그랬다. 1980년대에는 어른들이 어린이를 아무렇지 않게 두들겨패면서 키웠고, 아이들한테 막말이나 거친말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에는 도서관에 어린이책을 거의 안 두었다. 이제는 어린이도서관이 따로 문을 열지만, 1980년대에 무슨 어린이책이 얼마나 있었는가. 율목도서관에서 책지기로 일하는 한 분이 “작가님이 동시를 쓰시잖아요. 이런 부탁을 해도 될까 모르겠습니다만, 아직 관장님하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저희 율목도서관에 애정도 있으시고 하니까요, 새로 개장한 우리 율목도서관에 동시 하나를 써 주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도서관 책지기님 말씀을 듣고서 밤에 동시를 하나 쓴다. ‘율목도서관을 기리는 동시’를 “고요”라는 이름으로 한달음에 썼다. 아름다운 고요, 고요로운 사랑, 이곳이 바로 골목마을 인천 율목동에 새롭게 피어나는 도서관하고 어울리는 낱말이지 싶다.


고요 (숲노래 씀)


신명나게 수다잔치 하다가

한 사람이 문득 말을 멈추니

모두 갑자기 입을 닫아

낯설면서 새삼스러운 고요


한 사람 두 사람 열 사람

푹 빠져든 이야기로 날아가며

어느덧 아무 몸짓도 소리도 없이

서로 다른 즐거움 흐르는 고요


고요한 수다판이 되니

개미가 책상 타고 기어가는 소리

나비가 팔랑거리며 내는 소리

아주아주 크게 들린다


고요한 책터가 되니

책이 되어 준 나무가 살던

저 먼 숲에서 찾아든 바람

눈으로 보고 살갗으로 느껴 2018.10.18.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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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3

학교에 도서실이 생겼다. 도서관은 아니고 도서실이지만 반갑다. 이제는 읽고 싶은 책이 있을 적에 사서 읽는 값을 좀 아낄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런데 처음에는 동무들이 바글거리던 도서실이다가, 나날이 발길이 끊어진다. 그럴 만하지. 새로운 책을 들이지 않으니 그다지 볼 것이 없기도 하고, 시험공부로 바쁘니 책을 읽을 틈을 누가 낼 수 있겠나. 1993.6.18.


도서관 4

인천 배다리에서 헌책집을 꾸리는 〈아벨서점〉 곽현숙 아주머니가 이레째 전화를 거신다. 첫날에는 인천시가 ‘왕복 16차선 산업도로’ 막삽질을 주민 몰래 밀어붙이려 하는데, 마을 아줌마 세 사람 힘만으로 이런 삽질을 막아내기 벅차다는 하소연이었고, 이튿날부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시고, 다른 사람이 써 줄 일이 없을 듯해서 책집 아주머니가 손수 글을 써서 시청하고 구청에 보내려 하는데 어떡해야 하느냐고 물으시더니, 다음날에는 셈틀을 장만하셨는데 어떻게 켜야 하느냐고 물으신 뒤에, 다음날에는 이제 셈틀을 켜고 끌 줄은 알겠는데 글쓰기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신다. 이윽고 글을 다 썼는데 어떻게 저장하는지, 저장한 글은 종이에 어떻게 뽑아야 하는지, 그래서 인쇄기가 있어야 한다고 여쭈니 이튿날은 인쇄기를 샀는데 뭘 어떻게 이어서 어떻게 뽑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 인천하고 충주 사이에서 이레째 날마다 몇 시간씩 전화로 이야기를 하다가 대뜸 여쭌다. “저기, 아벨 아주머니.” “응? 왜?”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지 않아요?” “글쎄,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런가.” “날마다 몇 시간씩 이렇게 전화로 물어보시잖아요.” “그게, 곁에서 이런 말을 물을 젊은 친구도 없고, 도와줄 만한 사람도 없어서.” “사람이라면 제가 있는 이곳, 이오덕 어른이 살던 무너미마을 시골에 사람이 없지요. 여기에는 젊은이가 저 하나만 있는걸요.” “그야 그렇지. 사람은 도시에 많지.” “아무래도 아벨 아주머니한테는 곁에서 심부름을 해줄 만한, 도울 사람이 있어야겠지요?” “그런 젊은 사람이 있으면 좋지. 환영이지.” “저도 마침 이곳에서 이오덕 어른 글을 갈무리하는 일을 마쳤어요. 이 일을 마친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는지 저 스스로도 몰라서, 지난 한 해 동안은 오로지 자전거만 달렸어요.” “그래, 그랬다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을 꼬박 자전거로만 충주하고 서울 사이를 이레마다 다녔어요. 이레마다 서울마실을 하며 책을 잔뜩 장만해서 무너미마을로 낑낑대며 싣고 돌아왔는데요, 이제 이 자전거질은 그만하려고요. 제가 인천으로 가면 되겠지요?” “응? 인천으로 온다고? 거긴 어쩌고?” “이오덕 어른 큰아드님은 저더러 여기서 살라고 집도 하나 지어 주셨지만, 아무래도 이곳은 제가 있을 곳이 아닌 듯해요. 그리고 이제는 저도 텃마을인 인천으로 돌아가서 인천에 이바지할 일을 하나쯤은 할 때가 되었지 싶어요. 무엇보다도 아벨 아주머니가 사랑하고, 저도 무척 사랑하는 배다리를 지키자면 한 사람 손이 더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아, 자네가 와주면 든든하지. 아주 든든한 일꾼이 하나가 생기는 셈이지.” “네. 그런데 가더라도 바로 갈 수는 없어요. 여기에 그동안 그러모은 책을 다 싸야 하거든요.” “그렇지. 그 책더미를 싸야 움직일 수 있겠지.” “제가 텃마을 인천으로 돌아간다면 그냥 돌아가고픈 마음은 없어요. 그렇다고 대단한 일을 벌일 수는 없겠지만, 또 헌책방거리에 헌책방만 있기보다는 다른 책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래, 인천이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도시처럼 보이지만, 막상 속은 부실해. 도서관도 아직 제대로 없다고.” “네, 그래서 저는 배다리로 돌아가서 도서관을 해볼까 생각해요.” “도서관? 아, 도서관 좋지. 배다리에 도서관이라. 참 좋네, 좋아.” “그런데 그냥 도서관을 하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그냥 도서관은 어디에나 있거든요.” “그럼 무슨 도서관을 해보려고?” “네, 제가 1999년에 보리출판사에 들어가서 영업 일을 했거든요. 그때에 다달이 통계를 뽑아요. 우리 출판사에서 다달이 팔린 책을 어느 책이 전국 어디에서 얼마나 팔렸는가를 뽑아서 달모임에서 밝히는데, 전국 통계를 보면 인천이 가장 책이 안 팔린 곳이에요. 전라도보다 훨씬 적게 팔려요. 아주 부끄럽더라구요. 다른 출판사 영업부 선배한테 여쭈어 봐도 인천에서는 책이 참 안 팔린대요. 그래서 책마을에서 일하며 제가 인천사람이라는 얘기를 못하겠더라고요. 저는 책을 많이 읽는다치더라도 다른 인천사람은 책을 너무 안 읽으니까요.” “그래, 인천사람이 책을 참 안 봐. 우리 아벨에도 인천사람보다 서울에서 책 보러 오는 사람이 참 많거든. 인천에서 책을 좀 봐주면 좋겠는데, 인천이라는 마을에서 책을 알아보고 배우고, 책에 흐르는 숨소리를 들으면 좋겠는데.” “그런데요, 출판사 영업자로 일할 적에 겪기도 했고, 또 제가 사전을 짓는 일을 하며 전국 헌책집이며 온갖 책집을 다니고 사람들을 부대끼면서 돌아보자니, 여러 책 가운데 가장 안 팔리고 안 읽히는 책이 사진책이더군요.” “사진책?” “네. 사진책이요. 그래서 저는 다른 갈래 책도 다 있는 도서관이지만 무엇보다 ‘사진책’을 앞세우는 사진책도서관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아마 사진책도서관은 한국에도 아직 없지만, 이 지구별에서조차 한 군데도 없는 줄 알아요. 말 그대로 ‘세계 사진책도서관 1호’가 바로 인천 배다리에서 문을 여는 셈입니다.” “사진책도서관 1호. 아주 좋은데. 사진, 사진책, 책. 그렇지, 사진이란 참 묘한 데가 있어. 글이나 그림하고 다르게 사람들 마음을 끄는 알 수 없는 기운이 있지. 그런 사진으로 이룬 책을 모으는 도서관이라.” “오늘부터 부지런히 책을 쌀게요. 아마 두 달쯤 걸릴 듯합니다. 두 달 동안은 이곳에 틀어박혀 책을 신나게 싸야겠어요. 두 달 뒤에 배다리로 찾아가겠습니다.” 2007.2.3.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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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1

인천 율목동에 도서관이 있다. 동무들하고 율목풀장에서 물놀이를 하러 오갈 적마다 도서관을 보았다. 집이 가득한 골목에 있는 도서관이 궁금하다만, 동무들은 “도서관? 거길 왜 가? 그냥 놀자.” 하고만 말한다. 그러나 이런 동무들한테 “그래도, 그래도, 도서관에도 가 보자.” 하고 달래고 꼬드기고 한 끝에 드디어 처음으로 도서관 문턱에 이른다. 커다란 문을 당겨서 들어가는데 벼락같은 목소리. “너희들 뭐니! 여기는 왜 들어와! 여기는 너희 같은 애들이 올 곳이 아니야! 도서관은 공부하는 곳이야!”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 우리는 도서관 안쪽으로는 발도 들이지 못하고 달아나야 했다. 1985.8.6.


도서관 2

동무들은 독서실을 끊어서 시험공부를 한단다. 나는 독서실이 달갑지 않다. 좁은 칸을 질러서 빼곡하게 들어차는 그곳에 있으면 외려 시험공부가 안 될 듯하다. 더구나 독서실 갈 틈이 어디 있니? 날마다 학교에서 밤 열한 시까지 붙잡히는데. 토요일에는 낮 네 시까지 붙잡히는데, 고작 토요일 저녁하고 일요일에 가자며 독서실을 끊을 생각이 없다. 그리고 일요일 하루라도 기찻길을 걷거나 바닷길을 걸으면서 바람쐬며 쉬고 싶다. 그런데 다른 동무가 “독서실 말고 도서관에 가면 돈이 안 들어.” 하고 나더러 같이 가잔다. 도서관이라면 좀 다를까 싶어 가 본다. 한 시간쯤 칸막이에 앉아 숙제를 한다.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도서관이니, 이런 칸막이에만 있고 싶지 않아 책꽂이 있는 자리를 살피기로 한다. 책이 있는 자리가 그리 안 크다. 칸막이 자리는 여러 층인데, 책은 고작 한 층에만 있다. 더구나 책은 왜 이리 낡고 지저분하고 오래된 것만 있는지. 하. 인천이 이것밖에 안 되나? 이러니 다들 인천을 싫어하고, 인천에서 하루빨리 나가 서울로 가고 싶어하겠구나. 참 미친 도시이다. 인천이란 데는. 1991.4.17.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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