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마실길에 읽는 책 2017.6.5.


두 아이를 이끌고 고흥서 일산으로 가는 길. 곁님은 몸이 무거워 집에서 쉬기로 하고, 즐겁고 씩씩하게 아이들을 데리고 이모랑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조카를 보러 가기로 한다. 군내버스로 읍내로 가고, 읍내에서 시외버스로 순천에 간 뒤, 김밥하고 만두를 맛나게 먹고서 기차에 오른다. 두 아이는 퍽 오랜만에 기차를 탄다. 서울로 빨리 달리는 기차를 탈까 하다가, 이 아이들이 오랜만에 기차를 누리도록 하려고 무궁화 기차를 타기로 한다. 네 시간 반을 달리니 아이들도 살짝 힘들었을까.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고, 먹이고, 재우는 틈틈이 《나로 살아가는 기쁨》을 읽는다. 이 책을 쓰신 분이 예전에 낸 책이 집에 한 권 있으나 아직 그 책은 읽지 못한 채 새로운 책을 읽는다. 암에 걸려 죽음을 맛본(임사 체험) 글쓴이는 죽음길을 헤매다가 삶길로 돌아온 뒤로 우리 목숨이 ‘몸이 아닌 빛’이고, ‘빛으로 이루어진 마음’인 줄 깨닫고는 스스로 기쁨길로만 나아가기로 했다고 밝힌다. 학교 지식이나 책 지식이 아닌 ‘마음 지식’을 얻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 되었고, 삶을 기쁘게 마주하는 하루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누구나 ‘죽어 보아’야 새로 깨어나는 셈일까. 아마 틀림없으리라. 한 번 죽고 나서 ‘새로 태어나’야 삶을 사랑하는 기쁨으로 나아갈 만하지 싶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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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이 좋은 공부 - 글쓰기 지도 길잡이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2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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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44



작은 별님처럼 새로 태어나는 글

― 글쓰기, 이 좋은 공부

 이오덕 글

 양철북 펴냄, 2017.5.18. 16000원



  스스로 배우는 삶이 있기에 글을 쓸 수 있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배우는 삶이 없다면 글을 쓸 수 없다고 느낍니다. 오늘 하루 새롭게 배우는 이야기가 있기에 어제 글을 잔뜩 썼어도 오늘은 오늘대로 새롭게 글을 쓸 기운을 얻는다고 느껴요. 어제하고 다른 오늘을 살아가기에 오늘은 어제 쓰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배우는 삶이 있기에 글을 쓸 뿐 아니라, 글이나 책을 읽을 수 있다고도 할 만할까요?


  저는 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스스로 배우려 하기에 글을 쓰기도 하지만 글을 읽기도 해요. 날마다 스스로 새롭게 배울 수 있는 삶이기에 스스로 새롭게 글을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한다고 느껴요.



글쓰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저마다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일인데 그것이 안 되고 있다.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16쪽)


글쓰기 교육의 목표가 아이들을 소설가나 시인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에 다른 의견을 제시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17쪽)


아이들이 글을 쓰는 행위는 밥을 먹는 행위와 같다. 먹고 싶어서,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 먹는 것은 아니다. (19쪽)


쓰고 싶은 것을 쓰게 해야 한다. 쓰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글을 쓰는 데 기쁨을 느끼는 아이만이 글을 쓰는 데서 성장한다. (20쪽)



  우리는 둘레에서 구경한 이야기를 글로 써 볼 수 있습니다. 둘레에서 구경한 이야기를 ‘관전평’이라고도 합니다. 스스로 겪지는 않았으나 두 눈으로 지켜본 느낌을 적는 글이에요. 이 관전평은 보는 자리마다 다 다른 글이 나옵니다. 가까이에서 볼 적하고 먼발치에서 볼 적하고 다를 테니까요. 다만 스스로 겪거나 하지 않은 채 구경하며 쓰는 글은 으레 벽에 부딪혀요. 손수 김치를 담가 보고 나서 글을 쓸 적하고, 김치를 담그는 사람을 옆에서 구경하고서 쓰는 글은 달라요. 손수 씨앗을 심어서 돌본 끝에 거둔 살림을 짓고서 쓰는 글하고, 씨앗심기나 거두기를 옆에서 구경하고서 쓰는 글은 다르지요.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면서 쓰는 글하고,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를 옆에서 구경하면서 쓰는 글도 달라요.


  요즈음 사회를 돌아보면 ‘구경글(관전평)’이 대단히 많습니다. 운동경기를 지켜보고서 쓰는 글은 모두 구경글(관전평)이지요. 연속극이나 책을 보고서 쓰는 글도 구경글에 들 만해요. 이러한 구경글이 ‘구경’을 넘어서려면 한 가지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본 이야기를 스스로 삶에 녹여야지요. 즐겁게 보았구나 싶은 대목을 속으로 삭여서 삶으로 펼칠 적에는 ‘구경’이 아닌 ‘삶’이 됩니다. 이를테면 흙살림 이야기를 책으로 읽기만 했을 적하고, 흙살림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를 몸으로 옮겨서 흙을 만져 새롭게 느낄 적에는 사뭇 달라요.


  아이를 돌보며 가르친 다른 어버이 이야기를 책으로만 읽다가, 비로소 우리 스스로 아이를 낳아 몸으로 부대끼며 돌보는 나날을 누려 본다면 이때에도 사뭇 다르구나 싶은 대목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몸으로 부대끼는 동안 ‘내가 내 나름대로 부대끼며 배운 이야기’를 ‘내 글’로 써 보자는 생각이 들곤 해요.



옛날부터 ‘글은 사람’이라고 했다. 글을 보면 그 글을 쓴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22쪽)


어린이들은 문학을 창조하지 않는다. 창조할 능력이 없다고 하기보다 그런 문학이란 것을 창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왜 그런가? 어린이들이 어른들에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 그대로라면 그들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 진이요, 미요, 선이기 때문이다. (28쪽)


땅과 어린이의 삶이 또 너무나 비슷하다. 땅은 그것을 가꾸고 섬겨야만 거기 생명이 싹트고 풍성한 열매가 맺을 수 있듯이, 어린이의 삶도 그것을 지키고 가꾸지 않으면 결코 아름다운 생명이 피어날 수 없고, 살아 있는 글이 써질 수 없다. (39쪽)


농사짓기와 글짓기는 그 원리가 사랑이라는 점에서도 같다. 농사일은 땅과 곡식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잘될 수 없다. 이해타산으로 화학비료와 농약을 함부로 뿌려 땅을 혹사하고 오염시키고 땅에서 빼앗기만 할 때, 농토는 척박해져서 곡식은 병들고 결국 농사는 파멸의 날을 맞을 것이다. (41쪽)



  이오덕 님이 쓴 《글쓰기, 이 좋은 공부》(양철북,2017)를 읽습니다. 이 책은 1983년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이오덕 님은 이 책에서 밝힌 이야기를 이녁이 2003년에 숨을 거두고 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고이 가꾸었어요.


  “글은 사람”이라고 하는 대목을 깊이 돌아보았고, ‘글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됨’을 헤아리면서 한길을 걸으셨어요. 억지로 꾸미거나 매만지는 글이 아니라, 스스로 짓는 삶을 스스로 즐겁게 글로 옮길 수 있도록 이웃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할 수 있어요.


  《글쓰기, 이 좋은 공부》는 ‘글쓰기란 더없이 좋은 배움길’이라고 하는 뜻을 밝혀 주는구나 싶습니다. 글쓰기를 하면서 삶을 가꿀 수 있다는 뜻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삶을 가꾸기에 글을 쓰고, 날마다 즐겁게 배우며 좋은 살림을 짓기에 저절로 글감이 샘솟는다고 하는 얼거리를 찬찬히 알려주기도 해요.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 삶을 놓고 말해 본다면, 아이하고 부대끼며 가슴 가득 샘솟는 사랑이 있기에, 이러한 사랑을 신나게 글로 씁니다. 남한테 보여주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스스로 가슴이 벅차면서 터져나오는 글입니다. 굳이 책으로 묶겠다는 뜻으로 쓰는 글이 아닙니다. 스스로 마음에 기쁜 숨결이 넘실거리기에 밤잠을 잊으면서 쓸 수 있는 글입니다.


  여행길에 글을 쓰는 분들도 이러한 마음이기 마련이에요. 여행길에 새로 배우는 삶이 있기에, 이 좋은 배움을 차곡차곡 되새기려고 글을 써요. 날마다 새로 얻고 누리는 기쁜 삶을 누구보다 나 스스로 되돌아보려고 글로 쓰지요.



글이란 단순히 글자라는 부호를 집합시켜 놓은 것이 아니다. 글은 사람의 생각, 정신을 나타낸다. 글은 곧 길(진리)이다. (43쪽)


지금까지의 글쓰기 교육은 손끝으로 잔재주를 부리도록 가르쳐 왔다. 이러한 재주 부리기는 문예 교육이란 이름으로 초등학생들에게는 말장난을 일삼도록 하였고, 중고등학생들에게는 주로 애상과 회고 위주인 일부 문인들의 글을 흉내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63쪽)


어른들이 쓰는 글은 반드시 문학작품이어야 하는가? 문학이 아닌 글을 쓸 수는 없는가? 쓸 필요가 없는가? 문학작품이 아닌 글은 가치가 없는 것인가? (68쪽)


어른이 쓰는 시나 어린이가 쓰는 시나 다르지 않다. 시란 괴상한 말재주도 수수께끼 놀이도 아니고 가슴을 울리는 감동인 것이다. (85쪽)



  이오덕 님이 들려주려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입니다. 참말로 ‘글은 길’이라고 할 만하지 싶어요. 이 말씀마따나 ‘말은 마음’이라고 할 만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요, 저마다 살아갈 길을 스스로 밝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하고 ‘글’을 ‘마음’하고 ‘길’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우리는 글쓰기를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될 만합니다. 글재주나 글솜씨를 굳이 안 키워도 되는구나 하고 느낄 만합니다. 그저 고운 마음이 되면 넉넉해요. 그저 즐겁게 삶길을 걸으면 되어요. 문학을 해야 글이 아닐 테니, 우리 스스로 시인이나 소설가나 수필가 같은 이름이 없더라도 흐뭇할 수 있어요. 따로 책을 써내지 않더라도 조용조용 우리 삶을 정갈하게 글로 옮기는 기쁨을 날마다 누릴 수 있어요.


  글을 쓰는 동안 생각을 갈무리합니다. 글을 쓰는 사이에 우리가 스스로 걷는 길을 씩씩하게 바라봅니다. 글을 쓰고 나서 우리 생각을 새롭게 보듬습니다. 내가 쓴 글을 내가 스스로 되읽는 동안 내 마음을 새삼스레 깨닫고 내가 걸으려는 길을 더욱 알차게 가꾸려는 몸짓이 됩니다.


  글을 쓰기 앞서 어수선해 보인 생각이라면, 글을 쓰는 동안 고요히 그러모아서 가꿀 수 있으리라 느껴요. 스스로 품은 생각을 알뜰살뜰 가꿀 수 있으면, 이 글쓰기란 배움이면서 기쁨이고 보람이면서 다짐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어른의 그림을 베껴 그리게 한다면 얼마나 어려워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베껴 그리는 노릇을 몇 번쯤 시키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전에 그렇게 재미있게 그리던 자신의 그림을 그만 못 그리게 되고, 언제까지나 남의 그림을 보고 흉내내는 짓밖에 할 줄 모른다. (101쪽)


어린이들에게 글을 쓰게 하는 까닭은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해 주기 위해서다. 삶을 가꾸는 일이 없이는 어떤 교육도 이루어질 수 없다. (109쪽)


말을 순화한다는 것은 겉도는 말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쓴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말은 살아 있는 사람의 창조성 있는 삶의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순수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찾아 가지는 것이 된다. (125쪽)



  ‘베껴쓰기’는 자칫 흉내내기로 그치기 쉽다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쓴 훌륭해 보이는 글을 베껴서 적어 보는 일은 나쁘지 않을 터이나, 다른 사람이 쓴 훌륭하구나 싶은 글만 자꾸 베끼고 또 베끼는 동안 정작 우리 이야기는 한 줄도 못 쓰기 마련이에요. ‘다른 훌륭한 글’을 베끼다 보면 어느새 ‘내가 쓴 수수하거나 투박한 글’은 안 훌륭하다고 여길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 글만 훌륭하다고 여기는 사이에 우리가 저마다 짓는 살림살이는 글로 쓸 만하지 않다는 생각에 젖어들기도 해요.


  이오덕 님은 《글쓰기, 이 좋은 공부》에서 ‘베끼는 그림’이 얼마나 고된 노릇인가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한테 ‘어른 그림을 베끼도록 시키’면 아이들은 이 짓을 괴로워하다가 어느새 이런 ‘흉내 그림’에 길든다고 이야기해요.


  아이들이 ‘어른 글’을 베껴서 쓰도록 이끈다면, 우리 어른들 스스로 우리 이야기를 수수하거나 투박하게 써 보기보다는 자꾸 ‘훌륭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 글’만 베껴쓰기(필사)를 하다 보면, 참말로 자꾸자꾸 나를 나 스스로 낮보거나 얕보는 버릇이 몸에 붙으리라 느낍니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 우리 그림을 우리 손으로 그릴 적에 즐거워요. 잘 쓰든 못 쓰든 우리 글을 우리 이야기로 엮어서 쓸 적에 즐거워요. 잘 찍든 못 찍든 우리 사는 이야기를 우리 손으로 상냥하게 사진으로 찍어서 나눌 적에 즐거워요.



시를 읽고 맛보는 재미, 시를 느끼고 시를 붙잡아 쓰는 재미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또는 뜨거워지고, 풍성해지고, 깨끗해지고, 긴장하게 되는 재미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착해지고 진실해지고 순화되는 데서 느끼는 기쁨이라 하겠다. (273쪽)


일기장을 ‘검사’한다는 말은 아주 나쁜 말이다. 검사할 것이 아니라, 읽어서 아이들의 마음과 생활과 가정환경을 알고 깨달아 교사가 배우는 것이다. (306쪽)


아이들의 글은 아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을 자기 말로 정직하게 쓴 것이다. 그러니 글이 있기 전에 말이 있었고, 말이 있기 전에 삶이 있었던 것이다. ‘삶→말→글’이지, ‘글→글’이 아니며, 삶이 없이 글은 써질 수 없다. (343쪽)



  살아서 싱그러이 숨쉬는 말을 글로 옮겨 봅니다. 꾸미지 않는 마음을 글로 담아 봅니다. 겉치레가 아닌 속가꿈이라는 생각으로 말 한 마디를 글 한 줄로 가만히 그려 봅니다.


  착한 길을 걸으려는 뜻으로 글을 씁니다. 꼭 시나 수필 같은 갈래에 들지 않더라도 오늘 하루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대단한 문학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 하루 새로 지은 살림을 일기로 꾸준하게 적어 봅니다.


  삶이 말이 되고, 이 말이 글로 되는 흐름을 되새깁니다. 나한테 없는 모습이 아닌 나한테 있는 모습을 스스럼없이 바라봅니다. 어제를 되짚으면서 오늘을 씩씩하게 가꾸려는 마음이 글꽃으로 피어나도록 담금질을 합니다.


  작은 들꽃을 마주하면서 기쁨을 배우기에 들꽃 이야기를 씁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과 제비와 왜가리를 바라보기에 구름과 제비와 왜가리 이야기를 씁니다. 아이를 돌보며 짓는 보금자리를 즐겁게 맞아들이면서 아이 이야기를 씁니다. 삶을 글로 쓰고, 살림을 글로 씁니다. 생각을 글로 쓰고, 사랑을 글로 씁니다. 서로 아끼는 기쁨을 글로 쓰고, 서로 나누는 웃음을 글로 씁니다. 서로 짓는 노래를 글로 쓰고,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오늘 이곳에서 작은 별님처럼 새로 태어나는 글 한 줄입니다. 2017.6.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이오덕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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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투스 - 코르착이 들려주는 영화 같은 이야기
야누쉬 코르착 지음, 송순재.손성현 옮김 / 북극곰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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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43


‘교육 받기’보다 ‘사랑 받기’ 바라는 마음
― 카이투스
 야누쉬 코르착 글
 송순재·손성현 옮김
 북극곰 펴냄, 2017.4.19. 14800원


  마법사하고 요정이 나오는 어린이문학이 있습니다. ‘마법사’하고 ‘요정’이라고 하면 흔한 어린이문학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어느 모로는 판타지문학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이문학은 마법사하고 요정이 얽힌 이야기를 판타지문학이 아닌 ‘배우는 살림’으로 다룹니다. 아이가 스스로 삶을 배우는 길을 보여주는 어린이문학이요, 어른은 아이를 어떻게 가르치면서 이끌 적에 슬기로운가 하고 짚는 어린이문학입니다.


카이투스의 소원은 학교에 가서 모든 걸 몽땅 배우는 거였어. 그래서 학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막상 학교에 들어가니까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거야. (8쪽)

“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주문을 외울 거야. 꼭 그럴 거야. 난 마법사가 될 테니까. 선생님은 주문이나 마법이 없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냐. 선생님이 모르는 거지. 위대한 시인들도 마법사 이야기를 하잖아. 왕들도 그런 게 있다고 믿었어.” (11쪽)


  유럽에서 전쟁 기운이 불거지던 무렵 폴란드에서 어린이 사랑을 몸소 펼친 야누쉬 코르착 님은 《카이투스》(북극곰,2017)라는 책을 씁니다. 이 책은 마법사가 된 어린 사내하고 요정이 된 어린 가시내가 부딪히는 여러 이야기를 가만히 다루어요.

  마법사가 된 어린 사내는 처음부터 마법을 마구 쓰려는 생각은 없어요. 그저 학교에서 즐겁게 새로운 삶과 살림을 배우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막상 학교라는 곳에 가 보니 아주 딴판이었대요. 학교는 아이가 바라는 대로 삶과 살림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고 해요. 또래들은 서로 괴롭히거나 놀리는 짓궂은 짓을 일삼고, 으레 장난질을 해댄다고 합니다. 배울 만한 것이 없는데다가 사귈 만한 동무를 찾지 못한 어린 사내는 오직 스스로 길을 찾고 생각을 기울여 마법을 하나하나 익힌대요. 어느 누구도 가르치지 않았으나 스스로 마법사가 되었대요.

  아이는 스스로 마법사가 될 수 있을까요? 이는 책에서만 엿볼 수 있는 모습일까요? 어쩌면 아이가 스스로 마법사가 되는 이야기는 책에서만 엿볼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더 헤아려 본다면 마법사 아닌 다른 길, 이를테면 ‘아이 스스로 식물 박사’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 스스로 나무 박사가 될 수 있어요. 자동차 박사라든지 컴퓨터 박사가 될 수 있지요. 책 박사라든지 만화 박사가 될 수 있어요. 누가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 스스로 요리 박사가 될 수 있기도 하지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착한 마음씨란다.” 이건 할머니의 말이야. “착한 사람은 걱정이 없단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도 주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잖니. 착한 이웃을 많이 만나야 어려울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단다.” (26∼27쪽)

의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어. “직접 이 아이를 간호하시겠다는 말씀이죠? 뭐, 좋습니다. 가출한 녀석이니까 회초리 좀 맞아야겠죠.” “아닙니다. 저는 아이들을 때리지 않습니다. 아마 다른 친구들 꼬임에 넘어갔을 겁니다. 얘야, 너 정말 가출했던 거니?” (55쪽)


  배우려는 뜻이 있기에 배워요. 아이나 어른이나 매한가지입니다. 배우려는 뜻이 없을 적에는 아이도 어른도 못 배워요.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제아무리 훌륭하거나 뛰어난 교사가 코앞에 있어도 졸음이 쏟아지기 마련이에요. 배우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은 대단히 뜻있고 아름다운 책을 코앞에 들이밀어도 한 쪽조차 못 읽고 하품을 하기 마련입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먼 길을 마다 하지 않아요.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책으로도 배우고, 몸으로도 배우며, 마음으로도 배워요.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어린이여도 배우고 젊은이여도 배우며, 쉰이나 일흔이나 아흔이라는 늦깎이 나이여도 배워요.

  예순 살이 넘어서 화가로 우뚝 서는 사람이 있고, 예순 살이 넘어선 뒤에 즐겁게 사진가로 서는 사람이 있어요. 비록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지만 시나 소설을 아름답게 써서 따사롭고 너른 이야기를 베푸는 사람이 있지요.


카이투스는 집 생각이 났어. 엄마 아빠 생각도 났어. ‘분신이 함께 있으니까 내가 집을 나온 줄도 모르실 거야. 그러면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116쪽)

서커스 단장은 전보를 쳐서 카이투스를 위해 멋진 집을 마련해 놓았지. 엄청나게 큰 정원이 있는 집이었어.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집이었지. 하지만 거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정원에서도 놀면 안 되고 친구들을 불러도 안 되고 파티를 열어도 안 되고 집 안에서 뛰어다녀도 안 되고. (159쪽)


  《카이투스》에 나오는 ‘안톤 카이투스’는 마법을 하나하나 익힐 적마다 마법힘이 커지는데, 이렇게 커진 마법힘으로 도시 하나를 수렁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만큼 마법힘이 세지기까지 해요.

  아이는 스스로 마법을 익혀서 마법사가 되었으나, 막상 마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하는 마음을 배우지는 못했어요. 카이투스네 아버지는 카이투스를 따사롭고 부드러이 마주할 줄 알지만,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카이투스하고 말을 섞을 기운이 없어요. 어머니도 매우 착하고 상냥하지만 카이투스가 스스로 배우고 싶은 삶길을 밝히는 데까지는 돕지 못해요. 할머니는 카이투스한테 늘 슬기롭고 따스한 마음을 베풀지만, 카이투스는 아직 할머니 말씀을 가슴에 새길 만큼 철이 들지는 못했어요.

  카이투스는 그저 마법힘을 빌려서 돈을 잔뜩 얻고, 마법힘에 기대어 이름을 높이 드날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이며 이름을 한껏 얻고 나서 ‘이 모두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똑똑히 깨닫습니다. 학교가 싫어서 달아나고, 집이 귀찮아서 달아난 아이는 자꾸자꾸 달아날 수밖에 없는 고비에 이르고, 이렇게 달아나고 달아나다가 어느 날 ‘요정’이 된 아이 조슈아를 만나지요.


“조슈아, 넌 언제부터 요정이었엉?” 카이투스가 물었지. “나도 잘 모르겠어. 난 오래전부터 요정이 되고 싶었거든. 숲속에서 블루베리를 따거나 작은 꽃을 엮어 모자를 만들다 보면 언젠가 요정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이들에게 잘 해 주고 싶었어.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들을 잘 지켜 주고 싶었어. 가난한 사람들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어. 그런데 요정이 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정말 몰랐어.” (215쪽)

“안톤, 진정해. 살다 보면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그때마다 화내고 흥분하면 정말 도움이 안 돼. 이제 중요한 건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는 거야.” 조슈아는 카이투스를 달랬지. “엄마한테 돌아간다고? 엄마는 널 알아보지도 못하실 거야!” “하지만 내가 엄마를 알아보겠지. 그리고 가까이 가겠지. 난 노력할 거야. 엄마를 돌봐 드리고 위로해 드릴 거야!” (221쪽)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마주하면서 가르칠 적에 즐거울까요? 어버이로서 바깥일이 너무 바쁘다면서 오직 학교에만 아이를 맡겨도 될까요? 교사인 어른은 교과서 수업만 잘 알려주고 아이들한테 마음 됨됨이에는 눈길을 보내지 못해도 될까요?

  마법사 아이는 마법을 쓸 줄은 알아도 마법을 건사할 줄 몰랐습니다. 요정 아이는 마법사 아이처럼 대단한 힘은 없지만 따사로운 사랑이 있습니다. 따사로운 사랑을 찬찬히 베풀면서, 마음이 아프거나 힘겨운 마법사 아이를 달래요. 마법사 아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이웃 사랑’을 일깨워 주고, 이웃에 앞서 ‘마법사 아이가 스스로 나를 사랑하는 길’을 이야기해 줍니다.

  이때부터 작게 물결이 일어요. 마법사 아이 마음속에 물결이 일지요. 학교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대목을 요정 아이한테서 배우면서 고개를 숙이는 마음을 받아들여요. 이웃을 따사로이 품는 요정 아이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마법사 아이 스스로 그동안 어떤 짓을 어떻게 했는가를 되새기고 뉘우칩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앞서 남긴 ‘착한 마음이 되는 삶’을 돌아봅니다.


“선생님, 아이들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아이들에게 잘 해 주세요. 우리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또 그것이 때때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어른들은 잘 몰라요. 사람이 항상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목표점까지 가는데 모두가 반듯한 길로 가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들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과 소원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항상 어른들 마음에 드는 아이가 될 수는 없엉요. 선생님, 보고 싶어요. 저를 믿어 주세요.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할게요. 제자 안톤 올림.” (242쪽)


  《카이투스》는 두 아이가 ‘학교 밖’에서 온갖 수렁과 고비와 벼랑길에 맞닥뜨리면서 어떻게 슬기를 모으고 사랑을 길어올려서 하나하나 풀어내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판타지문학이라고 할 만하면서 가르침·배움을 들려주는 책입니다. 꿈 같은 이야기라 할 만하면서 삶·살림을 이루는 바탕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조금 더 어른스럽게 아이를 따스히 마주하자는 뜻을 들려줍니다. 우리 어버이들이 조금 더 상냥하면서 넓게 아이를 가르치고 함께 살림을 짓자는 뜻을 밝혀요.

  아이들 누구나 ‘교육 받기’에 앞서 ‘사랑 받기’를 누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어른들 누구나 ‘지식 가르치기’에 앞서 ‘삶과 사랑 나누기’를 함께 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아이들이 저마다 씩씩하게 꿈길을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른들도 저마다 아름답고 즐겁게 사랑길을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7.6.4.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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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군내버스에서 읽는 책 2017.6.3.


어제에 이어 다시 군내버스를 탄다. 고흥읍에서 오늘 ‘고흥청정연대’라는 자그마한 모임이 첫발을 떼는 날이다. 고흥이라고 하는 고장이 시골스럽게 푸르며 정갈한 터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작은 힘을 모으려는 날이다. 이 자리에 살그마니 한 손을 거들려는 뜻으로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마실을 한다. 두 아이가 모두 아버지를 따라가겠노라 한다. 그러렴. 낮 네 시 이십 분이 봉서마을에서 지나가는 버스를 타기로 한다. 두 아이 모두 땡볕에 제법 먼 길을 아주 씩씩하게 걷는다. 큰아이가 문득 “아버지, 예전에는 여기 걸을 적에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하나도 안 힘들고, 하나도 안 머네?” 하고 말한다. “그럼, 우리 어린이는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고 힘이 붙으니, 이만 한 길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아주 잘 걷는구나. 너희는 참 멋져.” 군내버스를 기다리며 《글쓰기, 이 좋은 공부》를 읽는다. 군내버스를 탄 뒤에도 읽는다. 이오덕 님이 1980년대 첫무렵에 쓴 글쓰기 책이 새롭게 옷을 입고 나왔다. 서른 몇 해를 묵은 글쓰기 길잡이책이라 할 텐데, 글넋을 찬찬히 짚으면서 슬기롭게 읶그는 대목이 아름답다. 글은 꾸미려고 쓰지 않는다는 대목을, 글은 스스로 삶을 밝히는 생각을 살찌우려고 쓴다는 대목을, 마음에 새긴 이야기를 글 한 줄로 풀어내면서 스스로 자란다고 하는 대목을 매우 상냥하면서 너그러이 들려준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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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군내버스에서 읽은 책 2017.6.2.


우체국에 책을 부치려고 읍내로 간다. 스토리닷 출판사에서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2쇄를 찍으면서 책을 스무 권 보내 주었다. 열 권은 2쇄 드림책, 열 권은 내가 둘레에 선물하고 싶어, 택배로 열 권 받는 김에 즐거이 장만한 책. 이 책을 그동안 취재를 다닌 전국 여러 마을책방하고, 앞으로 취재를 다닐 전국 여러 마을책방에 띄우려 한다. 작은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군내버스를 탄다. 둘이 함께 노래를 들으면서 《공덕을 꽃 피우다》를 읽는다. ‘공덕’은 불교에서 흔히 쓰는 한자말인데, 좋은 일이나 착한 일을 하면서 쌓은 보람이라고 할 만하지 싶다. 스스로 즐겁게 좋은 일을 하니, 이 좋은 기운이 둘레에 퍼지면서 저절로 우리한테 돌아온다. 스스로 기쁘게 착한 일을 하니, 이 착한 기운이 골골샅샅 번지면서 시나브로 우리한테 찾아온다. 굳이 우리한테 좋거나 착한 살림이 되찾아오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우리가 좋거나 착하게 살림을 지으면 저절로 우리 삶이 좋거나 착할 수밖에 없다. 쓰레기를 버리는 마음은 언제나 우리 삶자리를 쓰레기밭으로 바꾸고, 씨앗을 심어 돌보는 마음은 언제나 우리 삶자리를 숲으로 바꾸어 낸다. 기쁨을 말하는 책이 반갑고, 스스로 삶을 짓는 이야기를 짚어 주는 책이 재미나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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