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님의 "아름다운가게와 북오프, 그리고 헌책방의 미래.."

헌책방이든 미용실이든 구멍가게든 비디오대여점이든 고기집이든 술집이든 밥집이든 어디이든 다 `장사'를 하는 곳임은 틀림없습니다. 헌책방도 장사를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돈 버는 장사'만 하는 곳인지, `돈은 돈대로 벌면서 다른 마음도 함께 나눌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지 싶습니다. 이것은 헌책방뿐 아니라 다른 가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발소에서 사람 살아가는 자취를 느끼고, 문방구에서 우리가 살아온 자취를 헤아리는 사람이 있고, 밥집이나 술집에서 새삼스러운 맛을 찾는 사람도 있겠지요. 헌책방도 장사이지만, <아름다운가게>도 장사이고, 한국땅에도 들어온 <북오프>도 장사입니다. 이들이 `장사'를 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장사를 하면서 물건을 파는 쪽도 `사람'이고, 장사하는 쪽에 가서 물건을 사는 쪽도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얽혀 있다는 대목이 바로 `문화'일 테며, 이런 문화를 미시로 보든 거시로 보든, 또 생활문화로 보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재래시장에 가서 살가움을 느끼건 말건, 우리는 그 시장골목에서 `사야 할 물건'을 사면 그만입니다. 그런 한편, 시장골목을 구경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장골목을 구경하는 재미가 `문화'가 될 테지요. 어쩌면 큼직한 마트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구경하는 것도 `문화'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트는 어디를 가나 똑같기 때문에 `다양성 있는 문화'는 없겠지요. 이와 달리 재래시장은 어느 동네 어느 시골을 가나 모두 다르고(요새는 차츰 닮아가면서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지만), 헌책방도 어느 곳을 가나 개성과 `갖춘 책'과 `주인장 성격'이 모두 달라서, 책을 보는 문화 다양성이 참 이래저래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이 다양성을 `조잡한 책을 정신없이 지저분하게 쌓아놓는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요(ㅎ신문 ㅇ기자처럼).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도 `돈벌이'를 하는 것인데, `돈만 벌려고 출판사에서 일하는지', `책 하나 내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면서 돈도 버는지'를 따져야겠지요. 책방(헌책방과 새책방 모두)에서 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돈만 버는 목적'이냐 `돈은 돈대로 벌면서 다른 일도 하느냐'는 중요합니다. `돈을 어떻게 버느냐'도 중요하지요. 창작을 해서 책을 내는 사람도 `돈벌이'만을 생각하는가요? 나라밖에서 나온 좋은 책을 우리 말로 번역을 해서 내는 사람도 `돈벌이'만을 생각하는가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교수가 `돈벌이'만을 생각하나요? 헌책방 주인이 책을 사고파는 일, 작가와 번역가가 책을 내는 일,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 교사와 교수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똑같은 문화 테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휴지조각 하나 보이지 않고, 으리으리한 새 건물을 지은 `씨지브이'에서 보는 영화하고, 오래된 건물을 그대로 쓰는 극장에서 보는 영화하고 무엇이 다를까 싶습니다. 비디오로 빌려보는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영화하고 감동이 다르다고 합니다만, 큼직한 화면으로 소리도 쩌렁쩌렁 울리는 가운데 많은 이들이 보는 `느낌'이 다른 것일 테지, 영화 줄거리나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 연기하는 모습이나, 화면에 나오는 온갖 모습이 `달라서' 감동이 다르지는 않겠지요.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과 헌책방 주인장과 책손이 얽히는 일과 헌책방이라는 곳, 이런 것을 `장사'인 한편 `문화'로 보면서 즐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책만 딥다 파면 무슨 즐거움이 있겠어요? 천재가 되려고 읽는 책이 아니요, 무슨 전문가가 되려고 읽는 책도 아니요, 무슨 귀한 책을 싼값에 캐내어 나중에 한 밑천 보려고 읽는 책도 아닙니다(뭐, 이렇게 읽는 사람도 있겠지만). 좋아서 즐기는 책이듯, 헌책방도 `동네책방이나 도서관처럼' 좋아서 찾아가는 곳이 되기 마련이며, 좋아서 찾아가면서 주인장하고 말문도 틀 수 있고, 그러다가 이런저런 세상 사는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이러는 가운데 뭐 크고작고를 따질 것 없이, 서로서로 `삶'을 나누게 될 테고, 이런 것이 바로 `문화'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 문화'라고 말한다 하여, 이것이 무슨 거창한 어떤 출판머시기거시기라고 보지 않고, 그럴 것도 없고, 그런 것과 잇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름다운 가게>는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가 뒤에 든든하게 버티고 있고, 돈 걱정 없이 수없이 이 나라 구석구석, 그것도 아주 교통(목)이 좋은 자리에 가게를 얻습니다. <아름다운 가게-헌책방 : 뿌리와 새싹>은 집 기증을 받았고, 인테리어와 설비 갖추는 것도 기증을 받았습니다(재활용품으로 자원봉사자가 했다지만, 재활용품과 자원봉사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겠지요). <아름다운 가게>는 이 나라 온갖 유명인사가 다 참여를 하면서 돈과 물건을 거저로 기부해 주는 가운데, 중앙일간지에서 홍보광고(홍보기사)도 틈틈이 때려 주는 한편, 방송이나 다른 매체도 아주 쉽게 탑니다. 냐오 님께서는 이런 것을 잠깐 생각해 주시면 좋겠군요. `문화공간'으로 시작했다는 <아름다운 가게>라지만, 그 `문화공간'에서 말하는 `문화'라는 게 무엇일까요? 한 가지 더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국내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자기가 농사를 짓든 짓지 않았든.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먹는 거의 모든 곡식은 `수입농산물'입니다. 그러면 이제 수입농산물을 얼마든지 값싸게 사먹을 수 있으니, 이 나라에서 농사짓는 사람은 다 없어져야 할 퇴물들일는지요? 국산농산물을 먹자 하는 소리나, 국산농산물을 지키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 나라에서 농사꾼은 쓸모없거나 사라져야 할 사람들이냐는 거지요. `헌책방'도 이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쩝... 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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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님의 "아름다운가게와 북오프, 그리고 헌책방의 미래.."

<아름다운 가게>는 공공성을 내세우지만, 실질로는 `사업' 성격을 버릴 수 없습니다. 자원봉사자가 있기는 하지만 상근자가 있어서 상근자한테 월급을 주어야 하고, 가게 운영에 들어가는 전기세나 여러 가지 세금도 내야 하지요. 이런 데에 들어가는 돈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책을 사고파는 일은 `장사'인 한편 `문화'입니다. 그래서 헌책방 주인들은 `개인사업주'인 한편, `문화활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까닭도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헌책방-아름다운 가게]를 놓고 살필 때 어느 쪽이 `공익-공공성'을 더 생각하고, 어느 쪽이 `사익-이윤'을 생각하는지 칼로 금긋듯 자를 수 없습니다. 또한, 헌책방에 들어오는 책 가운데 적잖은 비율을 차지하는 책은 `도서관에서 버린 책'입니다. 지금 도서관법에서는 `도서관 자료는 무조건 폐기'만 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러면 도서관은 자기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셈이 되고, 헌책방이 외려 `도서관에서 내버리는 책이 사라지지 않도록 챙기는 구실'을 하는데요, 이런 것들을 두루 살피면서 `헌책방'을 생각해 주면 좋겠습니다 => 댓글 단 분한테 드리는 이야기. 일본 북오프는 `재고책 중심'입니다. 일본 책 유통구조에서는, 새책(신간)은 석 달이 지난 뒤에는 `구간'으로 처리가 됩니다. 이때 일본 헌책방조합에서는 이 책을 재고도서로 다루어 `몇 부를 받아들여 헌책방에 유통시킬 것인가를 결정'하지요. 이때 헌책방조합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버리는 책을 북오프에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북오프는 이런 재고시장만 연 것이 아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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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님의 "뻔한 줄거리, 커다란 감동..."

시공사 판보다 일과놀이 판이 값도 싸긴 하지만, 김라합 님 번역이 훨씬 매끄럽고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읽기에도 부드럽고 좋습니다. 말도 훨씬 쉽지요. 다만, 일과놀이는 정식계약을 하지 않은 판이고, 시공사는 정식계약을 한 판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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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님의 "몇 년 만에 다시 읽고 시비 걸기.."

"호안 마르토렐"보다는 "후안 마르토렐"이 알맞지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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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님의 "자연을 지키는 것과, 자연에서 살아가는 것.."

지율 스님은 어떤 흔들림없이 튼튼한 생각과 철학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비구니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라고 보아야 좋지 싶습니다. 아직 튼튼한 생각과 철학이 없지만, 차츰차츰 자기 생각과 철학을 가다듬어 나가는 가운데 `고속철도와 자연과 우리 삶'이라는 화두를 보았고, 그 화두를 보았기에 자기 길을 거기에 맞추었겠지요. 자기 화두를 풀 실마리를 어렵사리 대화로 정부와 타협을 했지만, 정부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자꾸 약속을 깼고, 이에 크게 실망하고 아무 힘도 없게 된 지율 스님으로서는 어쩌면 집권자가 바라는 대로 `죽어' 주려고 몸을 숨긴 채 기나긴 단식을 했겠구나 싶습니다. 지율 스님은 청와대와 정부기간원이 보호대상자로 점찍고 뒷간엔 언제 가고 뭘 하고 누굴 만나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까지 하나하나 감시를 받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이런 형편이었을 때 웬델 베리란 분은 그 나름대로 다른 풀이법을 찾았을 테지요. 사람과 자연이 같이 어우러지면서, 사람은 사람 나름대로 자연을 쓰면 좋지만, `사람 나름대로 쓰는 것이 아닌 문제' 앞에서는 무언가 움직임을 보일 수 있겠지요. 폭력저항이든 비폭력저항이든지요. 간디든 말콤엑스든 킹 목사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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