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26. 마


  ‘마!’ 하고 누가 말하면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첫째, “마, 됐다.”에서 쓰는 ‘마’입니다. 둘째, “하지 마.”에서 쓰는 ‘마’입니다. “마, 됐다.” 할 적에는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면, “하지 마.” 할 적에는 마음이 무겁거나 옭매입니다.


  문득 생각해 봅니다. “출입금지”라 하면 딱딱하면서 힘있어 보인다고 여기는데, “들어오지 마”나 “다가오지 마”처럼 써도 딱딱하면서 힘있어 보이지 않을까요? “흡연금지”라 해야 세 보이는 말이 되지 않아요. “담배 피우지 마”라 해도 세 보이는 말이 됩니다. 또는 “담배 끊어”나 “담배 저리 가”나 “담배 치워”라 해 볼 만한데 “담배 꺼져”라 하면 더없이 세 보이는 말이 될 테지요.


  공공기관이나 공공장소에서 쓰는 말은 부러 딱딱하거나 세 보이는 말을 써야 한다고 여겨 버릇하면서 한자말에 얽매이는 분이 퍽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말로도 얼마든지 세 보이는 말을, 아니 참말로 드센 말을 헤아려서 쓸 수 있어요.


  “절대엄금”이 아니어도 됩니다. “하지 마”라 하면 됩니다. “촉수엄금”이 아니어도 되지요. “건들지 마”나 “건드리지 마”라 하면 되어요. “무단횡단 금지” 같은 알림판이 꽤 많은데요, “막 건너지 마”라든지 “그냥 건너지 마”라든지 “함부로 건너지 마”라 할 만합니다. 부드럽게 쓰고 싶다면 “막 건너지 마요”나 “그냥 건너지 말아요”나 “함부로 건너면 다쳐요”라 해 볼 만해요.


  요새는 ‘묻지마’가 한 낱말로 굳은 듯합니다. “묻지마 투자”나 “묻지마 교육”이나 “묻지마 읽기”처럼 쓸 만해요. 이런 얼거리로 ‘하지마’나 ‘보지마’나 ‘먹지마’나 ‘읽지마’나 ‘가지마’를 써 보아도 재미있고 어울립니다.


 이용금지 → 쓰지 마 / 쓰지 말도록 / 쓰지 말 것 / 안 써요 / 안 씁니다 / 쓰지 말아요 / 쓰지 맙시다

 이용중지 → 못 씀 / 못 써요 / 쓸 수 없음 / 쓸 수 없습니다 / 쓰지 않음 / 쓰지 않아요 / 못 씁니다 / 망가졌어요 / 망가졌습니다


  둘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용금지·이용중지’ 같은 말도 새롭게 손질해서 쓸 만합니다. ‘접근금지’라면 “다가오지 마”나 “다가오지 마셔요”라 할 만한데, ‘물러서라’나 ‘물러서세요’나 ‘물러섭니다’라 해도 되어요.


  ‘촬영금지’ 같은 알림말을 쓰는 곳이 있습니다. 이때에는 “찍지 마”나 “찍지 말아요”나 “찍지 마세요”나 “찍으면 싫어요”나 “찍으면 싫어” 같은 말로 알맞게 손볼 수 있습니다. 때하고 곳을 살펴 다 다르게 쓸 만해요. 한국말은 틀에 매이지 않는 결이 좋고, 누구나 재미있고 새롭게 쓰면서 빛나요. 말끝하고 토씨를 살몃살몃 바꾸면서 결을 살릴 수 있으니, 학교나 공공기관에서 이 대목을 눈여겨보면서 서로 즐거이 말길을 트도록 북돋운다면 좋겠습니다.


  모든 말은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어떤 생각을 나타내고 싶은가 하고 마음에 그리기에 말을 떠올려서 쓸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있기에 이 말을 쓴다기보다, 이러한 생각을 나타내고 싶다고 느끼니 이 자리에 걸맞을 말을 저마다 스스로 새롭게 짓는구나 싶습니다. 아이들하고 기차를 타면서 가게에 들러 주전부리를 살피는데, 빵을 담은 비닐자루에 “소시지 중량 up!”이라 적힙니다. 이 글씨를 들여다보며 생각해 보았어요. 꼭 이렇게 글씨를 담아야 했을까요? 빵을 빚어서 다루는 곳에서는 이런 말이 아니고는 알림말을 알맞게 적을 수 없었을까요?


 소시지 중량 up! → 소시지 무게 늘림! / 소시지 무게 늘렸다! / 소시지 무게 늘렸어요! → 소시지 더 많이! / 소시지 더 넉넉히! / 소시지 더 묵직!


  말끝을 살짝 바꾸면 말결이 살짝 바뀝니다. 말마디를 새로 다듬으면 말빛이 새로 살아납니다. 공공기관이나 학교나 언론사에서도 말글을 알맞으면서 바르거나 곱게 쓰면 좋겠는데, 이뿐 아니라 여느 일터나 자리에서도, 또 물건을 빚어서 파는 곳에서도 알맞으면서 바르거나 곱게 말글을 가다듬으면 훨씬 좋으리라 봅니다.


  경기 수원에 마실을 다녀오며 수원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이 버스에서 “안전을 위하여 정차한 후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같은 글월을 보았습니다. 이 글월을 어린이가 잘 알아볼 만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알림글을 적어서 붙일 적에는 더 마음을 기울여서 상냥한 결을 느끼도록 하면 좋으리라 봅니다. 저라면 버스 알림글을 다음처럼 쓰겠습니다.


 안전을 위하여 정차한 후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 안전하도록 차가 선 뒤에 일어나셔요 / 안전하도록 차가 선 다음 일어납시다 → 다치지 않도록 차가 서면 일어나요 → 차가 선 다음 일어나서 내려요 / 차가 선 뒤에 일어나서 내리셔요


  우리는 아직 일본 말씨를 곳곳에서 씁니다. 일제강점기는 고작 서른여섯 해였으나 이동안 물들거나 길든 말씨가 매우 깊어요. 더구나 전문 일자리에서는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 말씨를 써야 하는 듯 여기기까지 해요.


  곰곰이 따지면 영어나 일본말을 쓴들 그리 대수롭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한테는 한국말이 있기에 한국말을 쓰면 될 텐데, 구태여 영어나 일본말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한국말을 새롭게 살리거나 지어서 쓰기 어렵다면 모르되, 우리 스스로 말결을 북돋우거나 살찌우는 길을 닦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 스스로 생각을 키우거나 가꾸는 삶이 못 될 수 있어요.


  “민폐를 끼치다”에서 ‘민폐(民弊)’란 무엇일까요? 꼭 이 낱말을 써야 할까요? 이런 한자말이 스며들기 앞서 어떤 말로 이러한 일이나 자리나 결을 나타냈을까요? 생각하고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말썽을 일으키다”나 “골칫일을 일으키다”나 “말썽거리가 되다”나 “골칫거리가 되다”라 할 만합니다. “걱정을 끼치다”나 “걱정거리가 되다”라 해도 어울립니다.


  ‘청렴결백(淸廉潔白)’이라 해야 깨끗하지 않아요. ‘깨끗하다’라 하면 되고, ‘맑다’라 할 수 있으며, ‘티없다’나 ‘티끌없다’라 할 수 있습니다. ‘맑디맑다’라 해도 되지요.


  일본을 거쳐 들어온 아리송한 말 ‘더치페이’는 ‘따로내기’나 ‘나눠내기’라 할 만하고, 밥자리에서 돈을 나누어서 낸다면 ‘도리기’라는 낱말을 살려서 쓸 만합니다.


  어느 책을 읽다가 ‘성자필쇠(盛者必衰)’라는 글월을 보았는데요, 한자를 묶음표에 넣어서 밝혀도 뜻을 모를 수 있어요. 이때에도 생각해 봅니다. “일어나면 스러진다”라 하면 좀 길어도 바로 알아볼 만합니다. “뜨고 지다”나 “뜨면 진다”나 “떴으니 진다”나 “떴다면 진다”라 해도 어울리고, “뜨면 지기 마련”처럼 살짝 늘려서 써도 좋아요. 더 헤아린다면 ‘뜨고지다’를 아예 한 낱말로 삼아도 됩니다. ‘뜨고지다’라는 새말을 지어서 쓰지 말라는 틀이란 없습니다. 앞뒤를 바꾸어 ‘지고뜨다’라는 말을 써도 재미있지요.


  말이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말이란, 생각을 담아낸 마음입니다. 말이란, 생각을 지어서 가꾸는 마음입니다. 어떤 말을 어느 자리에 알맞으면서 즐겁게 써서 생각을 나눌 적에 마음이 활짝 피어나는가를 헤아린다면, 말은 말대로 자라고 마음도 마음대로 자라리라 느껴요.


  ‘자라다’라는 말을 생각해 봐요. ‘자라다·크다’ 같은 한국말이 있으니, 한자말 ‘성장(成長)’은 꼭 안 써도 됩니다. “성장이 빠르다”가 아닌 “빨리 자란다”라 하면 됩니다. “성장 과정을 살피다”가 아닌 “자란 길을 살피다”라 하면 돼요. “고도 성장”은 “크게 자란·높이 자람”이라 하면 되겠지요.


  무럭무럭 자라라는 뜻으로 ‘자람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자람둥이·자람순이·자람돌이’ 같은 말도 어울립니다. 잘 자라도록 지킨다는 뜻으로 ‘자람지기’가 되고, ‘자람힘·자람꿈·자람놀이·자람글·자람노래’ 같은 말을 하나하나 새롭게 쓰면서, 말도 생각도 삶도 이야기도 넉넉히 자라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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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5. 님놈



  고흥에서 순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탑니다. 저는 짐을 도맡아 꾸리고 움직이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이 시외버스에 텔레비전이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운동경기가 흐르고 광고가 섞입니다. 곁님은 저더러 버스 일꾼한테 텔레비전을 꺼 달라는 말을 여쭈라 합니다. 그렇지만 버스에 타서도 이것저것 챙기느라 바쁘니 곁님이 바로 버스 일꾼한테 텔레비전을 꺼 달라 말합니다. 버스 일꾼은 고맙게 꺼 줍니다.


  우리는 집안에 텔레비전을 안 들이고 살기에, 어디에 갈 적마다 쉽게 마주쳐야 하는 텔레비전이 꽤 성가십니다. 시외버스에서는 텔레비전을 꺼 주십사 여쭐 수 있으나 손님이 많을 적에는 이런 말을 여쭈기 어렵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는 손님을 헤아려 텔레비전을 켠다지만, 텔레비전을 안 보는 손님을 헤아린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여기에 어린이를 헤아린다면?


  서로 가시버시 사이로 지내는 두 사람은 사랑을 짓는 님이라고 여깁니다. 보금자리라는 곳에 사랑이 흐르도록 살림을 짓는 두 사람은 곁에서 지켜보고 돌보고 헤아리는 길을 걸으니 둘은 서로 ‘곁님’이 되어요. 때로는 벗님이 되고, 삶이라는 길을 함께 걸어가니 ‘길벗님’이나 ‘삶벗님’이 될 테지요.


  보금자리에서 서로 지켜보고 돌보고 헤아리는 두 사람이 서로 곁님이라면, 두 곁님이 낳은 아이나 두 곁님을 낳은 어버이는 어떤 사이로 지낼까요? 한집에서 지내는 이들은 가시버시 못지않게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돌보고 헤아릴 텐데, 함께 삶을 바라보고 가꾸고 짓기를 바라는 마음이 흐르기에 ‘한집님’이나 ‘삶님’으로 어우러지지 싶습니다. 함께 살림을 지어 ‘살림님’이 되기도 할 테고요.


  힘센 우두머리가 나라를 다스리던 무렵에는 임금 한 사람만 ‘님(임금님)’이었습니다. 그무렵에는 벼슬아치를 지내는 이들이 벼슬님 구실을 하며 사람들을 억누르기 마련이었고, 여느 자리 사람들은 ‘평민·백성’ 같은 이름이었지만, 때로는 ‘종(노예)’이나 ‘천한 것(백정)’이라는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윗자리하고 아랫자리로 갈린 곳에 ‘윗님’은 있되 ‘아랫님’은 없었달 수 있어요. 그때에는 ‘윗님·아랫놈’이나 ‘윗분·아랫녀석’으로 갈렸다 할 텐데요, 밑에서 내리눌리다가 크게 성을 내며 들고일어나면 윗님이나 윗분을 어느새 ‘윗놈·윗녀석’으로 여겨 끌어내렸어요.


  생김새는 비슷한 외마디 말인데, ‘님’이 하루아침에 ‘놈’이 됩니다. 때로는 ‘남’이 되어요. 아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님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기에 님이에요. 이와 달리 놈이라면 아끼고 싶을까요? 놈을 사랑할 마음이 생길 만할까요? 남도 비슷해요. ‘남’이 될 적에는 등을 돌리는 사이입니다. 모른 척하기도 하지만 굳이 가까이할 까닭이 없어요.


  이 땅에서 삶을 짓고 사랑을 가꾸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님’이라는 낱말을 지어서 썼을까요? ‘놈·남’처럼 생김새가 비슷한, 또는 소리가 비슷할 수 있던 낱말은 어떤 마음으로 지어서 썼을까요?


  임금님이 서슬퍼렇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무렵에 사람들이 ‘님’이란 말을 아예 못 쓰지 않았습니다. 들을 가꾸면서 들님을 말했고, 비를 반기며 비님이라 했습니다. 바닷가에 살면서 바다님을 섬겼고, 멧골에서는 멧님을 모셨어요. 해를 보며 해님인 줄 알았고, 온누리를 헤아리며 별님을 살폈습니다.


  집집마다 나물하고 밥하면서 꽃님이며 풀님이며 나무님을 가까이했습니다. 집에는 집님이라고 하는 집지기를 아꼈어요. 철 따라 찾아오는 꾀꼬리나 제비를 보면서 이들 새는 그냥 철새가 아닌 ‘철님’으로 여겼을 수 있습니다. 이들 새(새님)가 찾아오거나 떠나는 철을 살펴서 해마다 봄가을을 어떻게 건사하고 여름겨울은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를 알았겠지요.


  우리 숨이 되는 바람을 마시니 바람님입니다. 한여름에 시원스레 그늘이 되니 구름님이요, 겨우내 내린 눈으로 들이 새봄에 한결 푸른 줄 알기에 눈님이라 했으리라 느낍니다.


  아이들이 사귀는 놀이동무는 그냥 동무가 아닌 동무님이에요. 아이랑 어른이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는 이웃은 언제나 이웃님입니다. 나그네나 떠돌이 같은 길손도 그냥 지나치기보다는 나그네님이나 떠돌이님이나 길손님, 또는 ‘길님’이라 할 만해요.


  하늘에 계신, 또는 하늘 그대로 바라보면서 하느님(하늘님·한울님)이 됩니다. 땅에 계신, 또는 땅 그대로 마주하면서 땅님(따님)이 되어요. 마음으로 만나는 사이라 마음님이고, 사랑으로 사귀는 사이라 사랑님입니다. 노래를 좋아하거나 즐기거나 잘 불러서 노래님이고, 춤을 좋아하거나 즐기거나 잘 추어서 춤님입니다. 요즈음에는 글을 좋아하거나 즐기거나 잘 쓰는 글님이 있고, 사진을 놓고서 사진님, 책을 놓고서 책님, 만화를 놓고서 만화님, 연극을 놓고서 연극님도 있어요.


  먼길을 함께 나서는 벗이라면 마실벗처럼 수수하게 이를 수 있고, ‘마실님’처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거나 듣는 ‘이야기님’이 있어요. 시골에 사는 이웃이라면 시골님이고, 서울에 사는 이웃이라면 서울님이에요. 우리는 한때 ‘시골뜨기’처럼 시골사람을 깎아내렸지만, 이와 맞서 ‘서울뜨기’라고도 하는데, ‘뜨기’보다는 ‘님’으로 서로 만난다면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너른 숲을 놓고 한자말로 ‘대자연’이라 하는데, 저는 ‘숲님’이라는 이름을 곧잘 씁니다. 숲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숲님’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우리가 숲을 살뜰히 사랑한다면 사람으로서 ‘사람님’이 되리라 느껴요. 사람답지 못한 짓을 일삼으면 ‘사람놈’으로 굴러떨어질 테고요.


  문득 생각합니다. 굴러떨어지지 말라고, 즐겁게 어깨동무를 하는 길을 가라는 뜻에서 ‘님·놈’ 두 마디에 ‘남’까지 늘 맞물리지 싶습니다. “고마운 님”이 될 수 있고, “고맙잖은 놈”이나 “고맙잖은 남”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님”하고 “나쁜 놈”은 고작 한 마디에서 갈립니다.


  늘 쓰는 말에서 새롭게 길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요리사나 셰프라고 하는 분을 보면서 ‘밥님’이나 ‘밥살림님’처럼 님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고 싶습니다. 옷을 곱게 지을 줄 아는 분을 보면 ‘옷님’이나 ‘옷살림님’처럼 이름을 붙이고 싶어요. 신나게 놀 줄 아는 아이나 어른한테는 ‘놀이님’이라고, 기쁘게 일할 줄 아는 모든 사람한테는 ‘일님’이라 하고 싶고요.


  마을에 마을님이 있습니다. 나라에 나라님이 있어요. 고을에는 고을님이고, 누리(온누리)에는 누리님이 있습니다. 아, ‘누리님’은 누리그물(인터넷)에서도 쓸 만해요. ‘누리꾼’처럼 ‘-꾼’을 붙이는 이름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누리그물에서 서로 아끼며 돌볼 줄 아는 따사롭거나 살가운 이웃이라면 ‘누리님’이 걸맞아요.


  〈전라도닷컴〉처럼 다달이 나오는 잡지를 사랑하는 이웃님한테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수수하게 잡지님이나 책님이 있을 테고, 다달이 나오는 책을 ‘달책’이라 한다면 ‘달책님’이라 할 만한데, 이보다는 다달이 벗으로 만난다는 뜻을 살려 ‘달벗님’이라 해도 어울리지 싶습니다.


  어릴 적에는 님이라는 말은 함부로 못 쓰도록 둘레 어른한테 눌려 지냈습니다. 지난날 어른들은 님은 높은 어른한테만 붙인다고, 아이들이 멋모르고 써서는 안 된다고 여겼어요. 이제는 옛날이 아니요, 열린 누리에, 트인 터전이라면, 님을 홀가분하게 풀어놓아야지 싶습니다. 서로 ‘열린님’이 되면 좋겠어요. ‘맑은님’이나 ‘고운님’이나 ‘참한님·참님’이나 ‘밝은님’이나 ‘착한님’이 되어도 좋아요. ‘좋은님’도 될 테고, ‘기쁜님’이나 ‘웃음님’도 될 테고요.


  아이들은 ‘어린님’입니다. 푸름이(청소년)는 ‘푸른님’입니다. 그리고 어른이 어른답게 ‘어른님’이 될 수 있기를 빌어요. 비는 마음으로 ‘비손님’이라는 꿈을 꿉니다. 함께 꿈을 짓는 ‘꿈님’이 되고, 같이 슬기로운 넋을 나누는 ‘슬기님’이나 ‘넋님’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님이 될 만할까요? 우리는 서로 어떤 님으로 부르면서 이웃이나 동무가 될까요? 바보놈이나 멍청놈이 아닌, 걱정놈이나 근심놈이 아닌, 똑똑님·똑님이나 바른님으로, 산들님(산들바람님)·한들님(한들바람님)으로, 상냥님·넉넉님으로 하루를 지어 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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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4. 키



  우리 집 아이들은 ‘금연 구역’이라는 말을 못 알아봅니다. 다만, 이 말 옆에 나란히 있는 그림을 보면서 “저기, 담배에 연기 나는 그림에 빨간 줄로 찍 그었으니까, ‘금연 구역’은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뜻이야?” 하고 묻기는 합니다. 열한 살 큰아이가 들려주는 말을 듣고서 제 열한살 무렵을 떠올립니다. 그때에 제 또래 가운데 ‘금연·흡연’을 못 알아듣는 동무가 꽤 있었어요. 저도 때로는 무슨 말인지 헷갈렸습니다. 아무래도 열한 살 어린이가 ‘담배 피우다·담배 안 피우다’ 아닌 ‘금연·흡연’을 알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한자말을 아는 어린이가 더러 있을 수 있으나, 모르는 어린이는 어김없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어른도 제법 있지 않을까요?


  아이들은 ‘출입 금지’라든지 ‘통행 금지’라는 말을 쉽게 못 알아듣습니다. 이때에 우리 어른들은 생각해 볼 만하겠지요. 왜 저 아이들은 이런 말을 못 알아듣느냐고 말이지요. 그리고 달리 생각한다면, 왜 아이들이 못 알아들을 만한 말을 곳곳에 알림글로 쓰는가를 따질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공공기관에서 쓰는 어려운 말을 나무라거나, 지식인이 쓰는 일본 한자말이나 영어를 놓고서 따지는 목소리가 거의 없었어요. 나라에서 쓰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여기기 일쑤였고, 지식인이 쓰면 ‘배운 사람이 쓰는 말’이니 틀린 말이 없으리라 여기곤 했어요. 오히려 그런 어려운 말이나 일본 한자말이나 영어를 써야 사회를 잘 안다거나 똑똑하다고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이제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우리는 오늘 어떤 말을 써야 서로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울까요? 우리는 어제 어떤 말을 쓰면서 마음을 나눌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앞으로 어떤 말을 쓰면서 새롭게 삶을 지피는 길을 갈 만할까요?


  “키를 재다”가 아닌 “신장을 측정하다”라 해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몸무게를 달다”가 아닌 “체중을 측정하다”라 해야 할까요? 학교나 회사에서는 으레 ‘신체 검사’를 한다는데, 이는 “몸 살피기(몸을 살피다)”입니다. 우리는 왜 아이한테도 어른 사이에서도 ‘몸살피기(또는 몸 살피기)’나 ‘몸재기’처럼 쉽게 알아들을 만한 말을 안 썼을까요? 일제강점기에 스며든 일본 한자말이니 안 써야 한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잘 따져 보면 좋겠습니다. 예나 이제나 아이들은 ‘신체 검사’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해마다 이런 말을 듣고서 몸을 살피는 일을 겪고 나면 비로소 그 말이 그러한 뜻으로 그러한 자리에 쓰는구나 하고 어림합니다. ‘신체’하고 ‘검사’가 저마다 무슨 뜻인지를 새길 적에는 굳이 안 써도 될 말을 껍데기를 씌워서 쓰는 얼거리인 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숫자가 좀 많지만 국립국어원 사전에서 ‘신장’이라는 낱말을 찾아서 옮기겠습니다. 모두 열일곱 낱말이 나오는데, 이 가운데 몇 낱말이나 한국말사전에 실을 만한지 낱낱이 따져 보면 좋겠어요.


신장(-欌) : 신을 넣어 두는 장 ≒ 신발장

신장(申檣) : [인명] 조선 전기의 문신(1382∼1433)

신장(伸長) : 길이 따위를 길게 늘림

신장(伸張) : 세력이나 권리 따위가 늘어남. 또는 늘어나게 함

신장(伸葬) : [고적] = 펴묻기

신장(身長/身丈) : = 키

신장(信章) : = 도장(圖章)

신장(信藏) : [불교] 불도에 대한 신앙심에 일체 공덕이 포함되어 있는 것

신장(神將) : 1. [민속] 귀신 가운데 무력을 맡은 장수신. 사방의 잡귀나 악신을 몰아낸다 2. [불교] = 화엄신장 3. 신병을 거느리는 장수 4. 전략과 전술에 능한 장수

신장(神漿) : 1. 신에게 올리는 음료 2. 영험이 있는 음료

신장(訊杖) : = 형장(刑杖)

신장(晨粧) : 식전(食前)에 하는 화장(化粧)

신장(腎腸) : 콩팥과 창자라는 뜻으로, ‘진심(眞心)’을 이르는 말

신장(腎臟) : [의학] = 콩팥

신장(新粧) : 건물 따위를 새로 단장함. 또는 그 단장

신장(新裝) : 1. 시설이나 외관 따위를 새로 장치함. 또는 그 장치 2. 새로운 복장

신장(Xinjiang[新疆]) : [지명] =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신발장을 가리키는 ‘신장’은 사전에 실을 만합니다. 그런데 조선 무렵 사람 이름이라든지, ‘늘리다·늘어나다’라든지 불교에서 쓰는 말이라든지, 의학에서 쓴다는 말이라든지, 중국 땅이름을 굳이 한국말사전에 실어야 할는지 아리송합니다. ‘콩팥’이란 낱말이 어엿이 있는데 꼭 ‘신장’을 써야 할까요? 새로 꾸밀 적에는 “새로 꾸몄다”고 하면 넉넉하지 않을까요? “새로 열다” 아닌 “신장 개업”이라고만 해야 할까요?


  사전을 보면 ‘키’를 가리키는 한자말 ‘신장’은 “= 키”로 풀이합니다. 이는 한국사람이 쓸 낱말은 ‘키’ 하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를 더 헤아리면 좋겠어요. ‘키’라고 할 적에 무엇이 떠오를까요? 소릿값 ‘키’로는 어떤 낱말이 떠오를까요?


 키 1 : 몸이 얼마나 높은가

 키 2 : 곡식을 까부르는 연장

 키 3 : 배가 가는 길을 다루는 연장


  한국말 ‘키’는 세 가지입니다. 제 어릴 적을 떠올리면, 저는 ‘키’라는 말을 들으면 내 몸높이가 얼마나 되는가를 먼저 생각했어요. 우리 어머니는 ‘키’라고 할 적에 곡식을 까부르는 연장을 먼저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씀했어요. “옛날에는 이부자리에서 쉬를 하면 머리에 키를 씌우고 집집마다 소금 얻으러 다니도록 했지.” 아마 우리 어머니는 머리에 키를 쓴 어린 날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적에 머리에 키를 쓸 일이 없었습니다. 제 어릴 적은 어느새 키를 안 쓰는 도시살림이었어요. 우리 집이 시골이었다면 으레 키로 까부르는 키질을 했을 테지요.


  뱃사람이라거나 바닷가에서 산다면 또 다른 ‘키’를 먼저 생각할 만합니다. 저는 바닷마을인 인천에서 나고 자란 터라 셋째 키를 둘째 키보다 먼저 생각했습니다. 키질을 하는 배를 쉽게 보고 만지면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키질’을 놓고도 세 가지로 헤아릴 만합니다. 하나는 몸높이를 헤아리는 키질이요, 누구 키가 더 크거나 작은가를 따지는 몸짓입니다. 곡식을 까부르는 키질 둘에 배가 가는 길을 다루는 키질이 더 있어요. 그런데 있지요, 이런 ‘키·키질’보다 ‘열쇠’를 가리키는 영어 ‘key’가 익숙한 분이 부쩍 늘었습니다. 요새는 자동차를 몰건 아파트에서 살건 열쇠라는 한국말보다는 ‘key’라는 영어를 매우 쉽게 씁니다.


  어느 자물쇠이든 다 딸 수 있다면 ‘온열쇠’라 할 만하지만 ‘마스터키’라고들 합니다. ‘숫자열쇠’라 말하는 분은 드물고 ‘숫자키’라 하지요. 이밖에도 온갖 자리에서 키는 키대로 열쇠는 열쇠대로 자리를 빼앗깁니다. 설자리를 하나둘 잃으면서 쓰임새가 잊히고, 이러면서 새롭게 알맞게 즐겁게 짓는 말길이 조용히 막힌다고 할 만해요.


  얼마 앞서 어느 고장에 마실을 다녀오는데 “건너지 마세요”라 적은 알림글을 보았습니다. 찻길을 함부로 건너지 말라는 뜻으로, 찻길 한복판에 울타리를 세워서 글씨를 새겼더군요. 예전 같으면 “무단횡단 금지”처럼 딱딱하고 메마른 일본 한자말을 썼을 테지만, 어느새 부드러우면서 쉬운 말씨를 쓰는 손길이 되었구나 싶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가꿀 나라를, 삶터를, 마을을 곱게 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롭고 아름다운 말길하고 글길도 곱게 그릴 수 있기를 바라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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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3. 모두


  ‘모두’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셔요. ‘모두’라는 소리를 들을 적에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엇을 헤아릴까요, 또 어린이나 푸름이는 무엇을 그릴까요? 정치를 하거나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맡는 이는 ‘모두’라 하면 무엇을 생각할까요?

 모두 : 1. 일정한 수효나 양을 기준으로 하여 빠짐이나 넘침이 없는 전체 2. 일정한 수효나 양을 빠짐없이 다 ≒ 공히
 모두(毛頭) : → 털끝
 모두(毛頭) : [불교] = 모도(毛道)
 모두(冒頭) : 말이나 글의 첫머리

  한국말사전을 펴니 ‘모두’라는 소리로 적는 낱말을 넷 싣습니다. 이 가운데 “모두 있어”나 “모두 반가워”처럼 쓰면서 ‘무엇을 빠뜨리지 않고 아우르며 가리키는 낱말’이 첫째로 나옵니다. 둘째로 나오는 한자말 ‘모두(毛頭)’는 ‘털끝’으로 고쳐써야 한다고 화살표를 붙여 놓습니다. 셋째로 ‘모두(毛頭)’는 불교에서 쓰는 한자말이라 하고 ‘모도(毛道)’하고 같은 낱말이라는데, 이는 “[불교] 1. = 범부(凡夫 2. 선사에서, 삭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소임”을 나타낸다는군요. 넷째로 ‘모두(冒頭)’는 말이나 글에서 첫머리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자, 다시 헤아려 보면 좋겠습니다. 한국말사전에 ‘모두’ 소리가 나는 낱말을 넷 싣는데, 참말로 이 네 낱말을 다 쓸 만할까요? 이 네 낱말은 참말로 한국말사전이라고 하는 책에 올림말로 실을 만할까요?

  털끝을 가리킬 적에는 ‘털끝’이라 하면 넉넉합니다. 더도 덜도 아니지요. ‘모두(毛頭)’는 사전에서 아예 털어낼 만합니다.

  불교에서 쓴다는 ‘모두(毛頭)’는 불교 전문용어로 여겨야 할까요? 아니면 불교에서 앞으로 쉽게 고쳐쓸 낱말로 삼아야 할까요? 절에서 머리카락을 미는 일을 굳이 ‘모두·모도’라 해야 하는지 곰곰이 따질 노릇입니다. ‘머리밀기’나 ‘머리깎기’처럼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낱말을 쓰면 불교라는 길을 가기 어려울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정치를 맡는 일꾼이나 대학에서 가르치는 분은 으레 ‘모두(冒頭)’라는 일본 한자말을 씁니다. 이 일본 한자말을 털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오랫동안 흘렀으나 이 한자말은 일본 한자말이 아닌 ‘토론·의회·회의 전문용어’로 여기는 분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한자말 ‘모두’는 전문말일까요? ‘글머리·말머리’ 같은 쉬운 한국말은 전문말로 삼기 어려울까요? 어린이도 할머니도 알아듣고 함께 쓸 수 있는 쉬운 한국말은 전문말이 되어서는 안 될까요?

묘(墓) : = 뫼
묘지(墓地) : 1. = 무덤 2. 무덤이 있는 땅. 또는 무덤을 만들기 위해 국가의 허가를 받은 구역 ≒ 총지(塚地)
뫼 : 사람의 무덤 ≒ 묘(墓)·탑파(塔婆)
무덤 : 송장이나 유골을 땅에 묻어 놓은 곳. 흙으로 둥글게 쌓아 올리기도 하고 돌로 평평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대개 묘석을 세워 누구의 것인지 표시한다 ≒ 구묘(丘墓)·구분·구총(丘塚)·만년유택·묘지(墓地)·분묘(墳墓)·분영(墳塋)·유택(幽宅)·총묘(塚墓)

  ‘묘·묘지’하고 ‘뫼·무덤’이라는 낱말을 헤아려 봅니다. 사전을 곰곰이 살피면 ‘묘’는 “→ 뫼”요, ‘묘지’는 “→ 무덤”이로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라에서는 ‘나라무덤’ 같은 이름을 안 씁니다. ‘국립묘지’처럼 한자말을 씁니다. 쉬운 한국말이 아닌 꺼풀을 씌운 한자말을 써야 하는 줄 여겨요. 한자말만 전문말일 뿐 아니라, 한자말이어야 높이 섬기는 줄 여깁니다.

  사전 뜻풀이를 더 보면, ‘무덤’이라는 쉬운 한국말에 갖은 한자말을 비슷한말이라며 덕지덕지 붙이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덕지덕지 덧달아 놓는 한자말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저런 말을 굳이 써야 할까요? 저런 말을 쓰지 않는다면 무덤을 앞에 두고 제대로 나타낼 말이 없을까요?

  이제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말 한 마디도 곰곰이 생각하고 찬찬히 헤아리며 가만히 살펴서 해야 할 때입니다. 몇몇 못난 사람만 나라를 어지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전문용어라는 사슬’도 나라를 어지럽힌 줄 느낄 때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전문가라는 이름을 거머쥔 어른들은 ‘전문용어라는 주먹질’을 마구 휘두릅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이 저마다 전문가로서 전문용어를 쓰니, 어린이나 푸름이는 이런 어른을 고스란히 따라서 ‘끼리끼리 쓰는 말’을 자꾸 지어냅니다. 전문말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전문가 사이에서 끼리끼리 쓰는 말입니다.

  눈을 들어 이웃나라를 바라보아야 해요. 중국이나 일본을 넘어서 온누리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해요. 온누리를 가로지르는 말이 ‘전문가 사이에서 끼리끼리 쓰는 말’이면 모두 평화나 민주나 평등하고 어긋납니다. 온누리를 아우르는 말이 ‘여느 삶자리에서 비롯한 쉽고 수수한 말’로 깊거나 넓은 전문 자리를 다루거나 나타낼 적에는 모두 평화나 민주나 평등으로 날개를 폅니다.

  철학이든 의학이든 과학이든 공학이든 농학이든 정치이든 경제이든 교육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전문가라는 자리를 권력 아닌 평화·민주·평등으로 바라보는 눈이 있다면,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담을 쌓는 전문말을 쓸 일이 없습니다. 누구나 쉽게 배우고 쉽게 나누면서 쉽게 즐길 살림말이나 삶말을 쓰겠지요.

  책을 짓는 사람들은 ‘도비라·세네카’ 같은 일본말을 쓸 줄 알아야 마치 ‘책 짓는 전문가’인 줄 잘못 압니다. 아무것도 아닌 쉽고 수수한 일본말인 ‘도비라·세네카’를 가볍게 털어내어 우리 삶자리에서 널리 쓰는 낱말로 고칠 줄 아는 작은 몸짓으로 거듭나야지 싶습니다. “모두 발언을 하겠습니다”가 아닌 “첫머리를 열겠습니다”나 “첫마디를 하겠습니다”나 “첫말을 펴겠습니다”나 “여는 말을 하겠습니다”처럼 고쳐쓸 줄 안다면, 때나 자리에 맞는 새로운 말씨를 한결 넓게 북돋우거나 가꿀 수 있습니다.

  “한 우물을 판다”고 하지요. 전문가라는 자리는 ‘한우물’이 될 텐데, 오래도록 한우물을 파서 남다르거나 빼어나게 어떤 일을 이룬다 하더라도, 고인 물이 되면 그만 썩고 말아요. 말은 물과 같아서 넓고 깊게 흐를 적에 싱그러우면서 맑습니다. 고이는 한우물 아닌, 샘솟는 골짝물이자 흐르는 냇물이자 너른 바닷물이 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어린이나 푸름이가 거친 말을 마구 쓰기에 걱정스럽다면, 먼저 어른 스스로 제 모습을 돌아볼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우리 삶터에서 어른들은 저마다 ‘전문말’이라는 수렁에 갇히지 않았을까요? 널리 쉽게 쓰면서 어깨동무하는 말이 아닌, 몇몇 사이에서 우쭐거리는 말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요?

  시골 사투리를 귀여겨들어 보면 어느 고장에서 쓰는 사투리이든 따스하면서 넉넉하기 마련입니다. 손수 삶을 짓고 살림을 가꾸던 마음하고 눈길로 지은 말이 사투리이거든요. 처음에는 이웃 고장 사투리가 낯설 테지만, 시나브로 따스하며 넉넉히 스며들어요. 샘솟는 말이요, 흐르는 말이며, 너른 말인 사투리입니다. 이와 달리 전문가로 무리를 지어 외곬로 가두는 말은 새로운 넋이 샘솟지 못하도록 가로막거나 짓눌러요. 따스하거나 넉넉한 꿈이 자라지 못하도록 억누르거나 담을 쌓습니다.

  새 정치 일꾼이나 심부름꾼을 뽑은 마당이라면, 우리가 여느 자리나 전문 자리 어디에서나 두루 쓰는 모든 말이 바야흐로 평화하고 민주하고 평등에 걸맞도록 저마다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할 일입니다. 우리 모두 새롭게 함께 즐겁게 지어서 노래하듯 나눌 말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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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2. 길벗


  우리 삶터에서 말살림을 돌아보면 아직 우리 손으로 새말을 짓거나 가꾸는 힘이 모자라지 싶습니다. 손수 짓거나 스스로 가꾸려는 마음이 퍽 모자라구나 싶기도 합니다. 이웃나라에서 쓰는 말을 고스란히 따오는 분이 많은데, 우리 나름대로 새롭게 말을 지어서 쓰자는 생각이 처음부터 없구나 싶기도 해요. 정치나 행정, 초·중·고등학교하고 대학교뿐 아니라, 글을 쓰는 이까지, 제 나름대로 깜냥을 빛내어 말 한 마디를 새롭게 길어올리지 않기 일쑤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서양 삶말이 있습니다. 저는 ‘속담(俗談)’이 아닌 ‘삶말’로 고쳐서 쓰는데요, 한자 ‘속(俗)’은 ‘속되다’처럼 여느 사람들을 낮거나 하찮게 보는 마음을 담아요. 수수한 사람들이 수수하게 쓰는 말은 낮거나 하찮게 보면서, 힘을 거머쥔 이들이 쓰는 한자를 높이려는 기운이 서린 ‘속담’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속담이란 수수한 사람들이 저마다 삶자리에서 길어올린 짧은 말이에요. 삶을 지으면서 느끼거나 배운 이야기를 짤막히 간추렸기에 속담이라면, 이는 ‘삶이야기’, 곧 ‘삶말’이라 할 만하구나 싶어요. 삶말은 때로는 ‘삶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서양 삶말 “새 술은 새 부대에”를 떠올린다면, 우리가 새로 맞아들이는 살림에 새로운 말을 붙여야 어울리겠구나 싶어요. 현대문명이라는 새로운 살림을 굳이 영어나 일본 한자말로 이름을 붙이기보다 우리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 볼 수 있습니다. ‘삐삐’나 ‘손전화·집전화’ 같은 말이 태어나듯이, ‘집밥’이나 ‘손글씨·손톱꽃’ 같은 말도 태어나듯이, ‘나들목’이나 ‘맞이방·마을쉼터’ 같은 말도 짓듯이, 서둘러 바깥살림을 들이기보다는 찬찬히 바깥살림을 헤아려 우리 나름대로 즐길 길을 살피면 얼마든지 멋지거나 좋거나 알맞거나 훌륭하거나 곱게 새말을 우리 슬기로 지을 만합니다.

  서두르기에 한국말로 새롭게 짓는 길을 안 걷는달 수 있습니다. 너무 빨리 바깥살림을 끌어들이려 하다 보니, 스스로 말을 짓는 마음을 잊는달 수 있어요. 한동안 느긋이 바라보거나 지켜보면서 마음을 기울이면, 누구나 어떤 것에든 알맞게 새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삶말에서도 ‘부대(負袋)’는 일본 한자말이에요. ‘포(包)·포대(包袋)’도 한국말은 아닙니다. 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국말은 따로 있습니다. 예부터 누구나 흔히 쓰던 한국말이 있으니, 서양 삶말을 우리 삶자리로 받아들일 적에도 이 대목을 더 헤아릴 수 있으면 좋아요.

  한국말은 ‘자루’입니다. “새 술은 새 자루에”라 하면 됩니다. ‘자루’는 쓰임새가 넓으니, ‘비닐 봉지’는 ‘비닐 자루’라 하면 되어요.

 홈리스. 노숙자. 노숙인. 떨꺼둥이. 한뎃잠이

  집을 떠나거나 잃은 채 한길에서 먹고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을 두고 어떤 이름으로 가리켜야 알맞을까 하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불쑥 ‘홈리스(homeless)’라는 영어가 들어왔고, 왜 영어를 쓰느냐고 따지는 사람이 나타나자 ‘노숙자(露宿者)’라는 한자말로 이름을 바꾸더니, ‘-자(者)’라는 한자가 낮춤말이라 하면서, 다시 ‘노숙인(露宿人)’으로 바꾸었지요.

  서둘러 말을 들여오려 하니 이렇게 뒤죽박죽이 됩니다. 더구나 서둘러 들여온 말을 놓고서 제대로 가다듬거나 손질하거나 지으려고 생각하지 않으니,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데요, 이리저리 바꾸어도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 ‘홈리스·노숙자·노숙인’을 바라보던 어느 두레에서 ‘떨꺼둥이’라는 오랜 말이 있는데 구태여 영어나 한자말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밝힌 적 있어요. 서울에서 집을 떠나거나 잃은 채 한길에서 지내는 이를 돌보는 일을 하는 두레에서 ‘떨꺼둥이’란 말을 찾아냈지요.

  그런데 ‘-둥이’란 말끝, ‘떨꺼-’란 앞말, 이 두 가지가 못마땅하다고 여기는 분이 있어요. 말은 삶결을 고스란히 담는데, 이러한 말결을 바라보지 못할 적에는 오랜 말이 있어도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안 받아들이더군요. 저는 이런 모습을 보고 ‘한데·한뎃잠’이라는 틀을 바탕으로 ‘한뎃잠이’란 낱말을 지어 보았습니다. 한데에서 지내니 ‘한뎃잠이’라 하면 되겠구나 싶었어요. 말끝을 살짝 바꾸어 ‘한뎃잠벗·한뎃잠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새말짓기를 멈추어도 됩니다. ‘떨꺼둥이·한뎃잠이’로 넉넉하다고 여겨도 되지요. 그리고 더 헤아리면서 새말을 지어도 됩니다. 길지 않으면서 뜻을 잘 담을 만한 결을 살핀다면, “길에서 사는 사람”이니까, 비슷한 틀로 다른 자리에서 사는 사람을 헤아리면 되어요. 이를테면 “들에서 사는 사람”이나 “집에서 사는 사람”을 헤아려 봅니다.

  자, 들에서 사는 일을 무엇이라 할까요? ‘들살이’라 합니다. 집에서 살림을 하면 무엇이라 할까요? ‘집살림’이라 합니다. 들에서는 ‘들살이·들살림’이지요. 집에서는 ‘집살이·집살림’입니다. 그러면 ‘들살이·들살림’에서는 ‘들살이벗·들살이님’에다가 ‘들살림이·들살림벗·들살림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집살이·집살림’에서는 ‘집살이벗·집살이님’하고 ‘집살림이·집살림벗·집살림님’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요.

  이제 길에서는 ‘길살이·길살림’이라는 말을 얻어요. 이다음으로는 ‘길살이벗·길살이님’하고 ‘길살림이·길살림벗·길살림님’ 같은 말을 얻습니다.

  말을 새로 짓기는 쉽습니다. 삶을 새로 짓기도 쉽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늘 어렵습니다. 씨앗을 심는 손길도 처음에는 낯설거나 어려울는지 몰라도, 한 걸음 딛고 두 걸음 딛다 보면 매우 쉬운 줄 알 수 있어요. 옛날부터 누구나 씨앗을 심어 흙을 보살피면서 먹을거리를 얻고 누렸어요. 이처럼 말이라는 씨앗도 누구나 마음밭에 심어 즐겁게 돌보면서 새롭게 열매를 거두듯, 알맞거나 좋은 새말을 얻을 만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을 새로 지으면, 곁따라 다른 새로운 말을 두루 얻어요. 길에서 지내는 이웃을 생각해 보셔요. ‘길살이벗’이나 ‘길살림님’인 이들은 길에서 지내는 이웃이니 ‘길이웃’이라 해도 어울립니다. 길에서는 ‘길삶’을 짓습니다. 길삶을 짓는 이를 두고서 수수하게 ‘길벗·길님’이라 해도 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굳이 ‘길살이벗·길살림님’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단출히 ‘길벗·길님’이라 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수수하며 단출한 이름을 쓸 만했어요. 집에서 살건 길에서 살건 모두 같은 사람이요 목숨이며 사랑이거든요.

  길에서 지내는 이웃을 길벗이나 길님이라 한다면, 이때에 몇 가지 새말을 저절로 얻습니다. 한집에서 지내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을 ‘집벗·집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한자말 ‘가족’이든 한국 한자말 ‘식구’이든 고이 내려놓고서 오늘날에 걸맞게 새로운 이름으로 서로 부를 수 있습니다. ‘집벗님’이라 해도 어울립니다.

  눈을 돌려 숲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별에는 사람만 있지 않습니다. 푸나무가 있고, 벌레하고 짐승하고 새가 있어요. 풀밭을 바라보며 ‘풀벗·풀님·풀벗님’을 그립니다. 숲을 마주하며 ‘숲벗·숲님·숲벗님’을 생각합니다.

  이름을 불러 주셔요. 아무 이름이나 부르지 말고, 마음을 담아 사랑으로 지은 이름을 불러 주셔요. 이름을 지어 보아요. 아무 이름이나 짓지 말고, 생각을 실어 슬기롭게 이름 하나 지어요.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늘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가 듣는 이름은 늘 우리 생각을 북돋웁니다. 흔한 살림이나 작은 세간에도 아무 이름이 아닌, 제대로 마음을 쏟아서 이름을 붙일 적에 삶이 새롭게 피어난다고 느낍니다. 이웃한테 어떤 이름을 붙이면 즐거울까요? 벗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면 반가울까요? 우리 이름은 우리 삶이요 사랑이며 슬기입니다. 2018.5.17.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숲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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