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


숲에서 짓는 글살림 (102줄) 

48. 틈새두기


  ‘슈퍼전파자’는 ‘super-spreader’라는 영어를 옮긴 말씨라는데, 이런 말이 갑자기 퍼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앓거나 아픈 이웃을 돌보려는 마음보다는 그 사람 탓으로 돌리면서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낱말에 담았거든요. 살짝 앓든 크게 아프든 앓거나 아픈 이웃이 있을 적에는 더욱 사랑을 기울이는 손길로 보듬은 우리 살림길이었다고 생각해요. 오늘날은 그야말로 어깨동무라는 마음이 확 사라지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 있어야 한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우리 스스로 못나거나 어수룩하거나 바보스런 모습을 나타내는 말을 새로 지어야 할까요. 아니면 영어나 일본 말씨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떤 모습이나 몸짓이나 일을 가리킬 적에 두렵거나 미운 티를 걷어낼 노릇이라고 봅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확 퍼뜨린다고 하기에 ‘슈퍼 + 전파 + 자’라면, 누구보다 확 퍼뜨린다고 하겠지요. 누구보다 세거나 크다면 이러한 모습을 ‘꼭두·으뜸’으로 나타냅니다. 무엇을 퍼뜨릴 적에는 ‘씨·씨앗’이란 말로 빗대곤 합니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꼭두씨·꼭두씨앗’이나 ‘으뜸씨·으뜸씨앗’이 될 만합니다. ‘꼭두씨앗·으뜸씨앗’ 같은 낱말은 ‘시초·시원·시작’ 같은 한자말을 풀어내는 자리에도 쓸 만합니다.


 서로 떨어지기


  2020년 한 해는 아무래도 ‘사회적 거리두기(社會的 距離-)’란 말씨로 이야기할 만합니다. 어디를 가나 온통 이 말이 넘칩니다. 걸개천으로도 나붙고 시골 알림말로도 퍼지며 여기저기에서 흔히 듣습니다.


  가만히 보자면 시골은 워낙 예부터 서로 떨어져 살았습니다. 마을로 모이기도 하지만, 마을에 모인 집은 울타리뿐 아니라 나무를 심어 서로 알맞게 떨어져요. 나무가 자라는 틈만큼 떨어진달까요.


  섬이나 바닷가에서는 옹기종기 붙어서 함께 바람막이를 하지만, 여느 들이나 숲에서는 으레 띄엄띄엄 지내요. 두레나 품앗이나 울력을 하자고 모이곤 하지만, 여느 때에는 저마다 조용히 지내던 시골살림입니다. 이와 달리 서울을 비롯한 큰고장은 다닥다닥 있어요. 그야말로 빈틈이 없는 서울이요 큰고장입니다. 서울이나 큰고장은 나무 한 그루 자를 틈바구니가 없습니다. 애써 자란 나무라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뎅겅 자르거나 뿌리를 뽑습니다.


 틈·틈새·떨어지기·띄엄띄엄


  쉴 틈이 없이 일하면 지칩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쉬엄쉬엄 가야지요. 쉴 겨를이나 말미가 없이 몰아치면 고달픕니다. 아무리 일이 쌓여도 조금씩 겨를도 내고 말미도 누려야지요. 차 한 모금을 하든, 담배 한 개비를 태우든, 막걸리 한 그릇을 비우든, 그저 구름바라기를 하거나 책을 읽든, 저마다 느긋하게 숨을 돌리는 틈새가 있어야 일하는 기운이 새로 솟기 마련입니다.


  자, 그렇다면 서울이며 큰고장도 이제는 틈을 둘 노릇이에요. 가게나 집을 빼곡하게 놓을 일이 아닙니다. 자동차를 대느라 빈터가 사라지면 안 될 일입니다. 되도록 집 사이사이에 빈터를 마련하거나 나무가 자라도록 하고, 가게가 가득한 길거리라 해도 곳곳에 걸상이며 너른터를 둘 노릇입니다.


  푸른별에 확 퍼진 돌림앓이는 요 백 해 사이에 너울치듯 뒤바뀐 도시물질문명이란 길을 멈추라고, 틈바구니 하나 없이 기계나 자동차나 전기나 아스팔트나 시멘트나 플라스틱을 쏟아붓지 말라고 알려주지 싶습니다. 이름부터 알쏭하거나 어린이한테 너무 어려운, 또 일본 한자말스러운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닌, ‘띄엄서기·띄엄있기’나 ‘띄엄살림’으로 나아가자고 알려주는구나 싶어요. ‘서로 떨어지기·서로 벌어지기’를 하자고, ‘틈새두기’를 하고 ‘틈새살림’이 되자고 속삭이는구나 싶어요.


  너무 빈틈없이 걸어온 우리 발자국이에요. 바늘 하나 들어갈 귀퉁이조차 없는 우리 발걸음이에요. 느긋하지 않은 사람은 일에 치여서 쓰러져요. 느긋하지 않은 사람은 아이 곁에서 활짝 웃으며 노래하고 춤출 줄 몰라요. 느긋할 적에는 마음이 넓지만, 느긋하지 않을 적에는 마음이 비좁아요. ‘느긋하다 = 나긋하다 = 넉넉하다 = 넓다 = 너르다 = 널리’처럼 가지를 칩니다.


 꽃이 필 틈


  사전을 보면 ‘화도(花道)’를 “나뭇가지나 화초 따위에 인공을 가하여 풍취(風趣)를 더하는 기술”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이 한자말은 일본에서 ‘はなみち(花道)’처럼 으레 쓰고, 이 일본말은 “1. 歌舞伎에서 관람석을 건너질러 만든 배우들의 통로 2. 씨름판에서 씨름꾼이 출입하는 길 3. 활약하던 사람이 아깝게 은퇴하는 시기 4. 눈부신 활약을 시작하려는 때”를 가리킨다지요.


  곰곰이 보면 우리나라에 어느 때부터 문득 퍼진 ‘꽃길’은 일본 말씨를 옮겼구나 싶습니다. 다만 일본 말씨에서 퍼진 ‘꽃길’이라 해도, 우리 스스로 꽃을 사랑하고 반기면서 이러한 말씨를 새로 일구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사전을 보면 한자말 ‘화도’를 열두 가지나 싣는데요, 어느 하나도 쓸모가 없어요. 죄 군더더기입니다.


  봄에 피는 봄꽃을, 여름에 피는 여름꽃을, 가을에 피는 가을꽃을 그려 봐요. 그리고 겨울에 피는 겨울꽃을 고요히 두 눈에 담아 봐요. 푸나무에 꽃이 필 틈이 없다면 푸나무는 열매를 못 맺습니다. 열매를 못 맺는 푸나무라면 씨앗을 못 남깁니다. 씨앗을 못 남기는 푸나무라면 어느새 자취를 감추겠지요.


  씨앗이란 열매이면서 새로운 숨결입니다. 씨앗이란 어제 그곳에서 태어나 오늘 이곳에서 놀다가 모레 저곳으로 나아가려는 빛줄기예요.


  두려움이나 미움이 아닌 사랑을 포근히 마음에 담으면 좋겠어요.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옛말을 따른다기보다 ‘아픈 동무한테 더욱 마음을 쓴다’는 살림말을 헤아리면 좋겠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을 적에는 물이 맑고 바람이 깨끗하고 풀내음이 고우며 숲빛이 싱그러운 곳으로 보낸다고 했어요. 아픈 사람을 꽉 막힌 곳에 외롭게 가두지 않던 우리 살림길입니다.


  서울이며 큰고장에서 아프거나 앓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그곳이 너무 꽉 막힌 탓이에요. 빈틈이 없으니 쉴 만한 틈이 없고 꽃이 필 만한 틈마저 없는 탓입니다. 꽃이 필 틈이 없는 곳에서는 풀꽃나무를 못 누릴 테고, 철마다 다른 바람이며 햇살이며 빗방울도 못 느끼겠지요. 밥을 고루 먹어야만 튼튼하지 않아요. 철에 맞추어 바람이며 햇살이며 빗물이며 냇물을 고루 누려야 튼튼해요. 두 손에 풀빛을 담고 두 발에 나무빛을 얹고 온몸에 하늘빛을 실을 적에 튼튼합니다.


  한밤에 별빛 아닌 전깃불빛이 넘치는 서울이며 큰고장에서는 누구나 아플밖에 없어요. 이제 삽질을 그치기로 해요. 한밤에 별빛을 마주하고 미리내를 두 눈에 듬뿍 담을 수 있어야, 한낮에 구름빛을 바라보고 바람숨을 가득 먹을 수 있어야 다같이 튼튼하면서 즐거운 나날이 되리라 생각해요.


  삶이 튼튼하면서 생각이 튼튼하고, 생각이 튼튼하다면 마음이 튼튼할 테며, 이 튼튼한 마음에서 비롯하는 말 한 마디는 그지없이 숲빛이 가득한 푸르게 일렁이는 노래가 될 만하다고 봅니다.


  아무 말이나 안 쓰면 좋겠습니다. 생각하면서 말하면 좋겠습니다. 정부나 사회나 언론이나 학교에서 퍼지는 말은 내려놓고, 우리 나름대로 마을빛을 가꾸고 마을살림을 북돋우며 마을이웃을 사랑할 만한 말을 즐겁게 생각하기를 바라요. 나랑 너는 다르기에 동무가 되고 이웃이 돼요. 우리는 서로 다르기에 어깨동무를 해요. 마음으로 아끼고 생각으로 살찌우는 말 한 마디는 바로 우리 삶에 ‘숨쉴틈’을 둘 적에 피어납니다. 이 틈은 곁이 되고, 곁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씨앗 한 톨로 어느새 무르익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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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숲에서 짓는 글살림

47. 셈꽃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교과서를 보면 ‘算數’처럼 한자로 적습니다. 우리는 이 이름을 꽤 오래 썼고, 요새는 ‘수학(數學)’으로 쓰지요.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에 지긋지긋한 일본말 굴레에서 벗어난 만큼, 교과서를 새로 엮을 적에 끔찍한 일본 한자말을 걷어내자는 물결이 일었습니다. 이즈음 ‘셈본’이란 이름으로 교과서가 나왔어요. 이러다가 남북이 갈려서 싸움수렁이 불거졌고, 남녘에 군사독재가 서슬이 퍼렇게 으르렁대면서 ‘셈본’이란 이름은 짓눌려 사라져야 했고, ‘수학·산수’ 두 가지 이름만 나돌았습니다.


  ‘셈’이란 무엇일까요? ‘세다’는 어떤 결을 나타낼까요? 적잖은 분은 ‘셈’은 얕거나 낮은 낱말이요, ‘수학’이나 ‘계산’ 같은 일본 한자말을 써야 제대로 배우거나 가르칠 만하다고 여깁니다. 참말로 그럴까요? 우리는 ‘셈’이라는 낱말을 아직 모르거나 찬찬히 생각한 적이 없지는 않을까요?


셈(셈하다·셈나다) ← 계산, 산(算), 산수(算數), 산술, 심산, 짐작, 가정(假定), 발상, 심리, 측량, 계량, 결과, 정산, 추산, 연산(演算), 추정, 작정, 예산, 예상, 예견, 예측, 예기, 요량, 판정, 판단, 판별, 분별, 타산, 이해타산, 채산, 통계(統計), 격(格), 경우, 숫자, 수치(數値), 형편, 생활 형편, 수(數), 조(條), 시추에이션, -책(策), 법(法), 방법, 내막, 수법, 존재, 필요, 견적, 형국, 국면, 형세, 전술, 전략, 작전, 책략, 방책, 방도, ……


  ‘셈’이란 낱말을 쓰는 자리를 곰곰이 생각하니 끝이 없이 나옵니다. ‘셈’은 어떻게 이런 여러 자리에 쓸 수 있는 낱말일까요?

 

 셈 = 세다 = 헤다 = 헤아리다 = 생각

 

  ‘세다’에 ‘-ㅁ’을 붙여 이름씨 꼴로 바꾸기에 ‘셈’입니다. ‘세다’는 ‘꼽다’하고 맞물리는 뜻이 바탕인데, 무엇을 꼽는다고 할 적에는 ‘알아보다’를 나타내요. 알아본다고 할 적에는 “알려고 본다”는 뜻입니다. “알려고 보다”에서 ‘보다’는 ‘생각’을 뜻하기도 해요. ‘세다 = 생각’으로 잇닿는 얼개인데, 이 사이에 ‘헤다·헤아리다’가 있지요.


  “헤아릴 길이 없도록 가득한 별”처럼,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처럼, “조금씩 헤아리면 누구나 알 만하지”처럼 쓰는 ‘헤아리다’이고, ‘세다’는 이러한 말결로 오래도록 우리 뜻이며 속내를 드러내는 자리에 쓰던 낱말입니다.

 

셈값 ← 수치(數値)

셈길 ← 계산법, 공식(公式), 연산(演算), 수학, 산수(算數)

 

  산수이든 수학이든, 이 배움길은 숫자로만 따지지 않습니다. ‘따지’되 ‘생각’이라는 마음쓰기가 바탕이지요. 그러니 ‘셈본’이란 이름으로 교과서 이름을 붙일 만했고, ‘컴퓨터’라는 살림을 ‘셈틀’로 풀어내자는 목소리가 나올 만했습니다. 하나하나 꼽는 결이자, 깊고 넓게 헤아리는 결을 품은 낱말이 ‘셈’이거든요.

 

셈대 ← 계산대

셈돈 ← 예산

셈말 ← 숫자

셈속 ← 계산속, 계산, 타산, 이해타산, 수법

셈씨 ← 수사(數詞)


  모든 말은 널리 쓰기에 결이 깊어갑니다. 어느 말이건 안 쓴다면 결이 얕아지다가 스러집니다. ‘세는 길’을 더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세는 마음’을 더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말밑을 차근차근 짚으면서 새롭게 쓸 만한 길을 알아보면 어떨까요? 즐겁게 쓰면서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할 말씨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셈틀 ← 컴퓨터, 피시

셈틀말 ← 컴퓨터 용어

셈틀집 ← 컴퓨터 대리점, 컴퓨터 판매점, 피시방

셈틀칸 ← 피시방(PC방)

 

  나이가 든 분은 좀처럼 말을 새롭게 익혀서 가다듬으려고는 안 한다고 느낍니다. 이와 달리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모든 말을 새롭게 받아들여서 즐겁게 쓴다고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처음으로 어떤 낱말로 이것이며 저것을 가리키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맞아들이면서 생각하는 힘이나 너비나 바탕이나 숨결은 확 달라요.


  아이한테 “저기 보렴, 파란띠제비나비가 후박나무를 휘휘 돌면서 나는구나.” 하고 말할 적에는 아이한테 ‘파란-’이며 ‘-띠’를 붙여서 쓰는 말씨를 물려주는 셈입니다. 아이한테 ‘호접몽’을 말하면 아이는 얼마나 알아들을까요? ‘호·접·몽’이라는 중국 말씨를 얼마나 살려서 쓸 만할까요? 아이한테 ‘나비꿈’을 말할 적에는 다르겠지요. 말을 뒤집어 ‘꿈나비’라 해도 될 테고요.


셈판 ← 원인, 이유, 형편, 생활 형편, 처지, 견적

셈평 ← 이해타산, 타산, 형편, 생활 형편, 처지, 견적

 

  벌이랑 나비를 아울러 ‘벌나비’라 합니다. 말이랑 소를 아울러 ‘마소’라 합니다. 밤이랑 낮을 묶어 ‘밤낮’이라 하고, 아침이랑 저녁을 함께 살피며 ‘아침저녁’이라 하지요. 봄하고 여름을 이어 ‘봄여름’이라 하며, 가을하고 겨울을 맞물려서 ‘가을겨울(갈겨울)’이라 합니다.


  말은 삶에서 피어납니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기에 말을 꾸밈없이 합니다. 삶을 고스란히 맞아들여서 차근차근 생각을 지피기에 어린이도 어른도 바로바로 알아듣고서 그때그때 생각을 더 펼치는 길로 나아갑니다.

 

셈꽃 ← 수학


  예전에는 ‘-갈’이란 말씨를 붙여 배움길을 나타냈습니다. 《한글갈》 같은 책이 있어요. ‘-갈’을 붙여도 좋은데, ‘-꽃’을 붙이면 어떨까요? 문학이란, 말로 일군 꽃다운 길이에요. 그래서 ‘말꽃’이란 이름으로 문학을 나타내어도 어울립니다. 셈을 짚거나 다루는 배움길이라면 ‘셈갈’이라 할 만하면서도, ‘셈꽃’처럼 한결 꽃다이 바라보아도 좋으리라 봅니다.


  얼마 앞서 《다시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필요한 순간” 같은 말씨를 요새 나이든 분은 그냥그냥 쓰겠지요. 더구나 이런 말씨는 어린이책이나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어렵잖이 찾아봅니다.


  그러나 저는 숨을 가누면서 더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이 말씨를 새롭게 추스르는 길을 헤아리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수학을 생각할 때”나 “수학을 할 때”라 말할 만하지 않을까요? 말결을 곰곰이 보듬으면서 “수학을 곁에 둘 때”나 “수학을 즐길 때”라 해도 될 테고요.


  꽃다움 셈길을 곁에 두고 싶습니다. 나비처럼 부드럽고 상냥하게 날갯짓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즐기고 싶습니다. 어렵거나 딱딱한 말을 안 쓴다기보다, 어린이 곁에서 무릎맞춤을 하고 눈맞춤을 하며 마음맞춤을 하는 신바람나는 말씨를 쓰도록 생각을 펴고 싶습니다. 더 좋은 말이 아니라, 더 생각을 가꾸면서 더 슬기롭게 철드는 어른으로 나아가는 길에 동무할 만한 말을 자꾸자꾸 헤아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이 꽃이 된다면, 꽃으로 피어난다면, 꽃내음처럼 맑다면, 꽃빛처럼 싱그럽다면, 우리 글쓰기는 글꽃으로 거듭나겠지요. 생각꽃이요, 마음꽃이며, 슬기꽃이고, 사랑꽃에, 살림꽃이자, 노래꽃인, 하루꽃이며, 길꽃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https://book.naver.com/search/search.nhn?query=%EC%B5%9C%EC%A2%85%EA%B7%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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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46. 길을 찾는 글



  우리가 쓰는 말을 곰곰이 보면 ‘씨’라는 낱말이 곧잘 붙습니다. ‘씨나락·씨암탉·씨돼지’처럼 쓰고, ‘씨알·씨주머니·씨물’처럼 쓰며, ‘솜씨·마음씨’처럼 씁니다. ‘맵시’도 ‘씨’하고 얽히는 낱말이지만 글로는 ‘시’로 적되 말로는 ‘씨’로 소리를 냅니다.


  ‘씨’하고 ‘시’는 오가는 사이예요. ‘씨앗’하고 ‘시앗’은 말밑이 같습니다. 어느 고장에서는 겹닿소리를 쓰고, 어느 고을에서는 홀닿소리를 쓸 뿐입니다.


  이 ‘씨’라는 말을 넣어 ‘이름씨·그림씨·움직씨·어찌씨·셈씨’ 같은 낱말을 짓기도 합니다. 영어를 한자로 옮긴 일본 말씨인 ‘명사·형용사·동사·부사·수사’가 아닌, 우리 나름대로 이 삶자락을 헤아려서 우리말을 찬찬히 쓰자는 뜻으로 지은 낱말이에요.


  우리말로만 쓰자고 얘기하거나 외우도록 하는 일이든, 꽤 오래 익숙하게 쓰거나 자리잡은 일본 한자말을 그냥 쓰자고 뒷짐지는 일이든, 그리 알맞지 않다고 여깁니다. 말밑을 차근차근 짚으면서 우리 생각을 슬기롭고 사랑스레 가꾸는 징검다리가 될 만하도록 말길을 가르치고 글길을 여며야지 싶어요.


  왜 이름씨일까요? 이름 하나가 씨앗이 되거든요. 왜 그림씨일까요? 그리는 모습이나 느낌이나 결이나 마음이 언제나 씨앗이 돼요. 왜 움직씨일까요? 움직이는 몸짓이 고스란히 씨앗으로 뿌리내립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처럼 우리가 혀나 손에 어떤 낱말을 얹느냐에 따라서 생각도 삶도 달라집니다. 즐겁게 부를 이름인가요? 기쁘게 그릴 말인가요? 아름답게 움직이는 말인가요?


 명운을 좌우하다 → 삶을 가르다

 국가의 명운은 청년들에게 달려 있다 → 나라 앞길은 젊은이한테 달렸다

 책이란 출판사의 명운을 건 상품이 아닐까요 → 책에 출판사 목숨을 걸지 않을까요

 명운이 다한 것처럼 보였던 → 숨이 다한 듯 보인 / 삶이 다한 듯 보인 / 길이 다한 듯 보인


  한자말 ‘명운(命運)’은 “1.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 운명 2. 앞으로의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숨’이나 ‘숨결·목숨’이나 ‘삶·삶길’이나 ‘앞·앞길’이나 ‘길·가다’로 풀어낼 만합니다.


  씨앗 한 톨을 손바닥에 얹고 바라보다가 문득 길을 생각했습니다. 이 ‘길’하고 ‘글’은 참 닮은, 그렇지만 다른 낱말이구나 싶습니다. 닮았으나 다른, 다르지만 닮은, 두 낱말을 둘러싼 수수께끼란 무엇이려나 어림해 봅니다.


 하지만 운명의 상대를 도무지 만날 수가 없어서 → 그러나 꽃짝을 도무지 만날 수가 없어서 / 그런데 아름짝을 도무지 만날 수가 없어서

 어머니와 같은 운명의 길을 갔습니다 → 어머니와 같은 삶길을 갔습니다 / 어머니와 같은 길을 갔습니다

 우리에게 남북관계는 운명입니다 → 우리는 남북사이를 타고났습니다 / 남북사이는 우리가 갈 길입니다


  앞뒤만 바꾼 다른 한자말 ‘운명(運命)’은 “1.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 명·명운 2. 앞으로의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를 가리킨다지요. ‘명운’이든 ‘운명’이든 ‘숨’이나 ‘숨결·목숨’이나 ‘삶·삶길’이나 ‘앞·앞길’이나 ‘길·가다’나 ‘둘도 없다·대단하다·놀랍다’나 ‘타고나다’로 고쳐쓸 만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이처럼 쓰면 됩니다.


  글을 쓰거나 다루는 숱한 어른은 한자말 ‘명운·운명’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그러나 글을 안 쓰거나 안 다루는 적잖은 어른은 ‘명운·운명’이 어떤 낱말인가를 어렴풋이 알더라도 제대로 모르기도 하고, 아예 모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한자말은 어린이한테 대단히 낯설고 어렵습니다.


  어른만 읽는 책이나 신문에 ‘명운·운명’ 같은 한자말이 나온들 대수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어린이부터 읽는 그림책이나 동화책에 이런 한자말을 쓴다면 거추장스럽습니다. 어린이가 책을 읽는 길이나 배우는 길을 가로막지요. 어린이가 생각을 새롭게 짓거나 가꾸는 길하고 동떨어지고요.


  적기는 ‘운명’이라는 똑같은 한자말이지만, ‘운명(殞命)’은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을 가리킨답니다. 더 생각해 봐요. 어린이 곁에서 이런 한자말을 구태여 써야 할까요? 어린이 곁에서 구태여 안 쓰는 길이 낫다 싶은 말씨라면, 어른 사이에서도 되도록 꺼리거나 털어낼 적에 나은 말씨이지 않을까요?


  우리말로는 ‘죽다’가 있습니다. 높임말로 ‘가시다’가 있고, 에둘러 ‘떠나다’나 ‘돌아가다’나 ‘눈을 감다’라고도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부드러우면서 쉽고, 깊으면서 너른 말이 꽤 많습니다. 한자말을 써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닙니다. 한자말을 써도 되느냐 아니냐도 아닙니다. 어린이가 달달 외워야만 하는 말이라면 생각날개를 펴지 못하도록 꽁꽁 싸매고 말지요. 달달 외워야만 하는 입시지옥 시험문제 같은 낱말이라면, 스스로 생각하는 날개를 꺾고 말기에, 이런 낱말로는 틀에 맞추고 판에 박히며 길을 들이고 말아요.


 길을 찾다 ↔ 길을 들이다


  같은 낱말 ‘길’이지만 쓰임새가 갈립니다. “길을 찾다”라 할 적에는 새롭게 닦거나 내거나 짓는다는 몸짓이자 마음입니다. “길을 들이다”라 할 적에는 케케묵은 대로 물들이면서 틀에 박힌 채 그저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종살이입니다.


  개나 고양이를 길들이듯 사람을 길들여도 되지 않습니다. 아니, 개나 고양이도 섣불리 길들이지 말아야 할 노릇입니다. 개는 개답게, 고양이는 고양이답게 살아야지요. 사람도 사람답게 생각을 펴고 꿈을 키우며 사랑을 나눌 노릇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이란, 우리가 쓸 말이란, 우리가 쓰려는 말이란, 언제나 이 ‘길’을 헤아리는 마음에 심는 ‘씨앗’이어야지 싶습니다. 그저 착한 ‘마음씨’가 되라고만 외는 얘기가 아닌, 마음을 상냥하고 슬기로우면서 새롭게 사랑하는 씨앗을 품는 길인 ‘마음씨’가 되도록 어른하고 어린이가 어깨동무해야지 싶습니다.


 글씨. 말씨.


  이제 ‘길·글’하고 맞물려서 ‘씨·씨앗’을 짚겠습니다. 글로 옮겨서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한 ‘글씨’일 테지만, 글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생각을 담아서 나누려고 하는 ‘글씨’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모습인 ‘말씨’일 텐데, 말이라는 소리로 나타나도록 생각이며 사랑이며 뜻이며 마음을 담아서 함께하려고 하는 ‘말씨’이기도 합니다.


  일본 말씨란, 일본사람이 즐겨쓰면 될 말씨입니다. 우리는 우리 말씨를 즐겨쓸 노릇입니다. 번역 말씨란, 일본사람이 서양말을 옮기면서 불거진 말씨입니다. 우리는 굳이 번역 말씨를 안 끌여들여도 돼요. 갖은 서양말이며 일본말이며 중국말을 옮길 적에는 차근차근 가다듬어 우리다운 말씨로 피어나도록 손보고 가꾸면 즐겁습니다. 부드러이 어루만지고 즐겁게 쓰다듬습니다. 따뜻하게 감싸고 아늑하게 돌봅니다. 글로 드러나는 마음이기에 글씨입니다. 말로 나타나는 마음이기에 말씨입니다.


  ‘손글씨’란 마음을 드러낼 적에 우리 손길을 더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마음이 되어 오늘 하루를 여는 길을 가면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 봐요. 어떤 생각을 펼쳐 오늘 하루를 짓는 글을 쓰면 사랑스러울까 하고 꿈꾸어 봐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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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2020년 5월치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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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44. 돌봄칸


  아픈 사람이 퍼집니다. 불길처럼 번집니다. 곳곳에서 앓기에 ‘돌림앓이’라고 합니다. 돌고 도는 아픈 눈물은 무엇으로 달랠까요. 비가 주룩주룩 내려 씻어 줄까요. 바람이 싱싱 불어서 보듬어 줄까요.


  비가 뿌리고 바람이 스친 하늘은 파랗습니다. 비바람이 훑은 뒤에는 한결 상큼하면서 맑은 날씨가 됩니다. 그 무엇으로도 비바람처럼 맑으면서 싱그러우면서 고우면서 파랗고 푸르게 달래듯 씻어 주지는 못하는구나 싶어요. 우리 삶터에 아픈 사람이 사라지고 앓는 사람도 기운내어 일어나도록 하자면, 틈틈이 비바람이 찾아들어 온누리를 어루만져 줄 노릇이지 싶습니다.


 돌림앓이


  요사이는 ‘병(病)’이란 말을 흔히 쓰고, ‘병원’이란 이름을 붙이며, 이곳에는 ‘병실’이 가득합니다. 이 땅에서 ‘병’이란 한자를 쓴 지는 얼마 안 됩니다. 참으로 오래도록 이 땅에서 쓰던 말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아프다’요, 둘은 ‘앓다’입니다.


  몸이 다칠 적에 ‘아프다’라면, 몸에서 무엇이 잘못되어 움직이기 어려울 적에 ‘앓다’예요. 참거나 견디기에 힘이 들어 ‘아프다’라면, 참거나 견딜 만해도 몸을 움직이기 힘이 들거나 눕거나 누울 판이기에 ‘앓다’입니다.


  아픈 몸이지만 참거나 견디면서 움직입니다. 앓는 몸이니 참거나 견디면서 움직이면 비틀거리고, 이내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며 별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람만 돌림앓이로 고단하지는 않다고 느껴요. 어느덧 사람한테도 돌림앓이가 퍼졌을 뿐, 숲이며 들이며 바다이며 하늘이며 아프다 못해 앓아누울 판이라고 느낍니다.


 아프다·앓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해야 아픈 몸을 달래고, 앓는 몸을 고칠까요. 살림을 어떻게 가누어야 아픔을 싹 씻을까요. 삶을 어떻게 추슬러야 앓던 몸을 일으킬 기운이 새롭게 솟을까요.


  사람들이 흙이랑 사귀고 풀이랑 동무하며 나무랑 이웃하던 무렵에는 숲이며 땅이며 별이 아픈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흙을 등지고 풀을 짓밟으며 나무를 밀어없애어 큰고장으로 갈아엎는 동안 숲이며 땅이며 별이 아픈 소리를 낼 뿐 아니라 앓아눕습니다.


  밭자락에 덮는 비닐 때문에 땅이 앓습니다. 논밭에 뿌리는 화학약품 때문에 땅이 앓아요. 끝없이 뻗는 아스팔트 찻길에 비행기에 자동차물결에 숱한 공장에 발전소 탓에 땅이 앓습니다. 평화를 지킨다면서 나라마다 거느리는 전쟁무기 탓에 이 별은 구석구석 아픕니다. 새로 뚝딱거린 무기가 얼마나 센지를 알아본다며 미사일을 쏘고 핵폭탄을 터뜨리며 잠수함이며 항공모함이 갖은 쓰레기를 남기니 이 별은 결리고 쑤시고 저릴 뿐 아니라 눈물을 흘립니다.


  아파서 죽을 판이 별인 터라, 이 별이 흘린 눈물이 돌림앓이로 온누리에 퍼지지 않을까요. 앓아눕고 만 별이기에, 이 별이 앓으며 뱉는 끙끙 소리가 온누리에 번지지 않을까요.


 고치다·다스리다·달래다·낫다


  아픈 아이를 살살 달래던 포근한 손은 어디에 있을까요. 앓아누운 아이를 따사롭게 어루만지던 손길은 어디에 있는가요. 거칠거나 사나운 손으로는 아픈 아이가 낫지 않습니다. 마구잡이나 억지스러운 손길로는 앓는 아이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땜질을 해서는 아픈 데가 낫지 않아요. 슬그머니 넘어가려 하면 앓는 몸을 못 일으키지요. 바야흐로 밑자리부터 샅샅이 훑으면서 푸르게 가꿀 오늘이라고 생각해요. 이 별에 있는 모든 나라에서 하늘길을 멈추고 바닷길까지 막고 보니 하늘빛이며 바다빛이 그토록 맑게 열린다지요.


  중국이며 인도에 때려지은 공장을 한동안 멈추니 먼지구름이 사라집니다. 한국에서도 공장을 멈추면 먼지구름뿐 아니라 지저분한 구정물도 말끔히 사라지겠지요. 이제 생각해 봐야지요. 왜 매캐한 먼지하고 지저분한 구정물이 쏟아져나오는 공장이나 발전소를 돌려야 할까요? 돌리고 돌리더라도 돌림앓이가 되지 않는, 맑고 밝은 터전을 돌보도록 이바지하는 공장이 되도록 마음하고 머리를 쓰기가 어려울까요. 전쟁무기를 새로 뚝딱거리는 데에 돈을 쏟아붓지 말 노릇이면서, 이 땅을 푸르게 가꾸는 길에 힘을 기울일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돌봄칸


  아프거나 앓는 이를 다스리는 곳이라면 ‘돌봄집’이로구나 싶습니다. 돌보아서 낫게 하는 집이요, 돌보는 손길로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집이에요. 돌봄집은 칸을 알맞게 나눕니다. 아프거나 앓는 사람이 마음을 푸근히 다독이면서 몸을 튼튼하게 가꾸도록 바라지하려는 칸을 두어요. 이러한 칸은 ‘돌봄칸’이 됩니다.


  돌보는 사람이기에 ‘돌봄이’예요. 어버이는 아이를 돌봅니다. 배우는 곳이라면 어린이·푸름이를 배움으로 돌볼 테고, 아프거나 앓는 사람이 낫도록 하려는 터에서는 포근손이며 사랑손으로 돌볼 테지요.


  돌봄집에서도, 보금자리에서도, 마을에서도, 나라에서도, 배움터에서도, 저마다 돌봄이라는 눈빛이 되어 환하며 즐거운 기운을 나눕니다. 돌봄일꾼이 되고, 돌봄지기가 됩니다. 돌봄빛이 되고 돌봄님이 됩니다.


 누리맞이


  나라 곳곳에 돌림앓이가 퍼지면서 멈추는 곳이 많습니다. 배움터도 멈추지요.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올해에도 슬기롭게 배우기를 바라는 뜻으로 저마다 집에서 조용히 배우도록 하는 틀을 마련합니다. 셈틀을 켜서 이야기를 듣고 살피도록 하는 이러한 틀은 ‘누리맞이’라고 할 만합니다.


  누리집이 있어요. 누리글월을 주고받아요. 누리판에서 나누는 누리글이며 누리그림입니다. 누리판에서 어우러지는 사람들은 서로 누리님이자 누리벗입니다. 누리판에서 한결 홀가분하게 만나는 누리날개를 펴고, 누리가게에서 이것저것 사기도 합니다. 이제는 누리책집에서 책을 만날 수 있으며, 손전화를 켜고 누리마실을 즐기기도 합니다.


  누릴 수 있는 곳은 마을입니다. 두 다리로 걷고 두 손으로 보듬는 풀꽃나무가 자라는 마을이기에 다같이 짙푸른 바람을 누리고, 새파란 하늘을 누립니다. 맑게 흐르는 냇물을 다함께 누릴 수 있다면, 굳이 플라스틱에 물을 안 담아도 될 테며, 시멘트를 땅에 파묻거나 커다란 시멘트담을 세우지 않아도 되겠지요.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셈틀을 켜서 배우는 ‘누리배움’을 한다면, 어른은 무엇을 하면 아름다울까요? 우리는 온누리를 어떤 새누리가 되도록 가꿀 적에 어깨동무를 하는 즐거운 살림길을 열 만할까요?


  예전 그대로 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예전대로 살아가지 않기를 빕니다. 새길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억지스러운 새나라나 새마을이 아닌, 슬기롭고 참다우며 아름다운 새터에 새빛에 새말에 새싹이 될 새삶을 생각하기를 바라요.


  새마음이 되는 새사람입니다. 새봄에 마주하는 새꽃입니다. 멧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같이 들을까요? 들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함께 누릴까요? 바야흐로 제비가 둥지를 새로 짓거나 고칩니다. 제주부터 백두까지, 전라남도 고흥부터 서울을 거쳐 중간진까지, 새바람이 싱그러이 불면서 곱다시 피어나기를 꿈꿉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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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2020년 3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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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42. 엄마쉼 아빠쉼


  어른이 어른한테 쓰는 말이 있고, 어른이 아이한테 쓰는 말이 있습니다. 두 말은 다릅니다. 어른 사이에서 흐르는 말을 아이한테 섣불리 쓰지 않아요. 거꾸로 아이가 아이한테 쓰는 말은 어떤가요? 아이가 아이한테 쓰는 말은 어른한테 써도 될까요, 안 될까요?


  어린이하고 어른이 함께 알아듣는 말이 있고, 어른만 알아듣는 말이 있어요. 그러면 어린이만 알아듣는 말이 있을까요? 아마 어린이만 알아듣는 말도 있을 테지만, 어린이가 알아듣는 말이라면 어른도 가만히 생각을 기울일 적에 ‘아하, 그렇구나’ 하고 이내 알아차리곤 합니다.


  이와 달리 어른끼리 알아듣는 말이라면, 어른들이 아무리 쉽게 풀이하거나 밝힌다 하더라도 어린이가 좀처럼 못 알아차리곤 해요. 이를테면 ‘출산휴가’ 같은 말을 생각해 봐요. 어른이 일하는 자리에서는 으레 쓰는 말이지만 어린이한테는 도무지 와닿지 않습니다. 어린이한테 ‘출산’이나 ‘휴가’란 말을 써도 좋을까요?


  동생을 낳는 어머니나 아버지라면 언니나 누나나 오빠가 될 아이한테 “네 동생을 낳으려고 어머니가 일터를 쉰단다.”라든지 “엄마가 너희 동생을 낳거든. 그래서 아빠가 일을 쉬는 틈을 얻었어.”처럼 말하겠지요.


  이 대목에서 뭔가 반짝하고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면, 어린이부터 어른 누구나 새롭게 쓸 낱말을 얻을 만해요. 먼저 ‘엄마쉼’하고 ‘아빠쉼’입니다.


  1990년대까지 택시에서는 ‘空車’라는 한자를 적어 알림판으로 세우고 다녔습니다. 저도 떠오르는데요, 어머니한테 여쭈었지요. “어머니, 저 택시에 뭐라고 적혔어요?” “저거? ‘공차’라고 하는데.” “공차? 공차가 뭐예요? 공을 차라는 말이에요?” “아니. 호호. 손님이 없는 차라는 뜻이야.” 지난날 저처럼 물어본 어린이가 많지 않았을까요? 이제 택시는 ‘쉬는차’라는 알림판을 씁니다.


  자동차가 빨리 달리는 길에서 쓰는 말도 ‘휴게소’ 못지않게 ‘쉼터’를 널리 써요. 그렇다면 일터나 학교에서 쉬는 짧은 틈을 ‘쉬는틈·쉴틈’이나 ‘쉬는때·쉬는짬’이나 ‘쉴때·쉴짬’처럼 새말을 쓸 만합니다. 생각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어느 자리에서나 한결 쉽게 가다듬을 만해요. 갓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일고여덟 살 어린이한테 어떤 말을 들려주면서, 어린이가 생각을 어떻게 살찌우도록 이끌면 좋을까를 헤아리면 좋겠습니다. 이리하여 ‘엄마쉼·아빠쉼’이나 ‘엄마말미·아빠말미’라든지 ‘아기쉼·아기말미’ 같은 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라밖 그림책을 한글로 옮기는 분이 누리글월을 띄워서 옮김말을 어린이 입말에 맞게 손질해 줄 수 있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기꺼이 손질해서 알려주었습니다.


내 친구 알록달록 빛깨비예요

→ 동무인 알록달록 빛깨비예요

그건 가지가지 느낌이 휘휘 뒤섞였기

→ 아마 가지가지 느낌이 휘휘 뒤섞였기

그리 변했지

→ 그리 됐지


  “내 친구”는 번역 말씨입니다. 한국 말씨는 “우리 친구”처럼 ‘우리’를 넣어요. 또는 ‘우리’조차 안 쓰지요. ‘동무’ 한 마디만 쓰면 됩니다. ‘그건(그것은)’을 앞머리에 넣는 말씨도 번역 말씨입니다. 앞자락하고 잇는 말씨로 ‘아마’나 ‘그리고’를 쓰면 돼요. ‘변하다’ 같은 외마디 한자말은 ‘바뀌다·달라지다’로 손보면 되는데, 이 흐름에서는 ‘되다’로 손보아도 어울립니다.


찬찬히 살필 수 있어

→ 찬찬히 볼 수 있어

이건, 행복이야

→ 자, 기쁨이야

해님처럼 노랑 빛을 퐁퐁

→ 해님처럼 노랑을 퐁퐁


  “찬찬히 살피다”는 겹말입니다. ‘찬찬히’나 ‘살피다’는 ‘잘’ 보려고 하는 몸짓을 나타내요. “찬찬히 볼”이나 “잘 볼”이나 “살펴볼·살필”로 가다듬습니다. 앞머리에 ‘이건(이것은)’을 섣불리 넣을 적에도 ‘그건(그것은)’하고 똑같이 번역 말씨예요. 이 자리는 ‘자’를 넣으면 좋아요. 또는 ‘여기’를 넣을 수 있습니다. ‘행복’ 같은 한자말은 널리 쓴다지만, 어린이부터 읽는 그림책이라면 ‘기쁨’이란 낱말이 어울립니다. “노랑 빛”은 ‘노랑’이나 ‘노란빛’으로 다듬습니다.


누군가와 몽땅 나누고 싶어져

→ 누구하고 몽땅 나누고 싶어

슬퍼지면 눈물이

→ 슬프면 눈물이

손을 꼭 잡아 줄 거야

→ 손을 꼭 잡아 줄게


  ‘누·누구’라는 낱말에 자꾸 군말을 붙여서 쓰는 버릇이 퍼졌습니다. ‘누군가가’처럼 쓰는 분이 꽤 보이는데 겹말입니다. ‘누군가와’는 틀린 말씨까지는 아니지만 군살을 덜고 ‘누구하고’나 ‘누구랑’처럼 손질하면 입으로 말하기에 부드러워요. ‘-지다’를 자꾸 넣어도 번역 말씨예요. ‘슬퍼지면’보다는 ‘슬프면’이라 하면 되어요. “잡아 줄 거야”처럼 ‘것’을 자꾸 넣는 버릇도 군더더기이면서 일본 말씨예요. “잡아 줄게”나 “잡을게”처럼 짧게 끊습니다.


한밤중처럼 캄캄하고

→ 한밤처럼 캄캄하고

겁쟁이 고양이처럼 숨어 있지

→ 두렴쟁이 고양이처럼 숨지

달랑 혼자인 기분이라고 느껴

→ 달랑 하나라고 느껴 / 혼자라고 느껴

지금 네 기분은 어떠니

→ 오늘 네 마음은 어떠니


  ‘한밤’이라 할 노릇이고 ‘한밤중’은 겹말입니다. ‘겁쟁이’라면 ‘두렴쟁이’로 손볼 만하고, “-고 있다” 같은 번역 말씨·일본 말씨는 ‘있다’를 덜어서 “숨어 있지”는 “숨지”로 다듬습니다. ‘기분’이란 한자말은 ‘느끼다’를 나타내기에 “기분이라고 느껴”는 겹말이에요. 한자말 ‘기분’은 자리를 살펴 ‘느낌’이나 ‘마음’으로 알맞게 손볼 만합니다.


  우리가 쓰는 말이 참으로 말다우려면 흙을 만지며 일하는 사람 눈길로 말해야 한다고도 하지요. 그런데 요즈막 흙일꾼은 농협에서 쓰는 일본 한자말에 물든 말씨가 매우 깊이 퍼졌어요. 흙내음 나는 말씨를 쓰는 손길이 되면서,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는 눈빛으로 가다듬는 말씨라면 한결 고우면서 즐겁고 알맞으리라 생각합니다.


  숲을 그리는 말씨로 추스르는 셈입니다. 숲에서 노는 어린이 마음으로 가다듬는 셈입니다. 숲을 사랑하여 폭 안기는 어린이 눈빛이자 사랑으로 돌보는 셈입니다. 어린이 마음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듯, 오늘 우리 어른들이 쓰는 말씨도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하는 말씨가 될 적에 넉넉하고 알차고 슬기롭고 빛나고 즐거우면서 새로우리라 생각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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