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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6. 어정쩡한 겹말을 털고 말꽃으로



  2017년 10월에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이라는 글쓰기 사전을 한 권 써냈습니다. 이 글쓰기 사전에는 모두 1004가지 보기를 다룹니다. 어느 이웃님은 사람들이 어정쩡하거나 엉뚱하게 쓰는 겹말이 이렇게 많으냐며 놀랍니다. 그런데 저도 놀랐습니다. 느낌을 살리거나 힘주어 밝히려는 뜻이 아닌 자리에, 어정쩡하거나 엉뚱하게 말을 겹쳐서 쓰는 버릇이 대단히 널리 퍼졌을 뿐 아니라 숱하게 많은 모습을 보면서 저부터 제 글을 새롭게 가다듬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쓰기 사전인 《겹말 사전》을 써낸 뒤에도 겹말 보기는 꾸준히 모읍니다. 그야말로 끝도 없이 나오는데요, ‘시시때때로’나 ‘삼시세끼’나 ‘한도 끝도 없이’나 ‘누군가가’나 ‘무언가가’나 ‘가끔씩’이나 ‘이따금씩’은 매우 귀엽다고 할 만합니다. 이런 겹말은 살짝 손질해도 쉬 고칠 만하고, 가볍게 알려주어도 고개를 끄덕이겠지요. 그러면 다음에 드는 보기를 함께 살펴봐요. 우리는 참말로 우리 스스로도 못 깨닫는 채 온갖 겹말을 쓰고 맙니다.



마침 타이밍 잘 맞췄네 → 마침 잘 맞췄네

사찰을 다 다녔으나 그 절은 못 찾다 → 절을 다 다녔으나 그 절은 못 찾다

그곳에서 시작한 것이 처음이다 → 그곳에서 처음 했다

두어 번씩 정기적으로 → 두어 번씩 / 두어 번씩 꾸준히


없는 척 가장하더라도 → 없는 척하더라도 / 없는 척 꾸미더라도

해안도로를 달리는 길 → 바닷가를 달리는 길 / 바다를 끼며 달리는 길

종류를 나누다 → 나누다 / 갈래를 짓다 / 갈래짓다

혼자라는 고독을 체감하다 → 혼자라고 느끼다 / 외롭다고 느끼다


침입해 들어오다 → 쳐들어오다 / 마구 들어오다

몸으로 실천하다 → 몸으로 하다 / 몸소 하다

힘든 노동일에 종사하다 → 힘든 일을 하다 / 힘든 일을 맡다

희게 탁해지다 → 허얘지다 / 뿌얘지다


겹겹이 포개다 → 포개다 / 겹겹이 두다

내 적성에 맞다 → 내게 맞다 / 나한테 어울리다

키 작은 관목 → 키 작은 나무 / 떨기나무

꾸미고 치장한다 → 꾸민다

소수의 몇 그루가 생존하다 → 몇 그루가 살아남다 / 몇몇 그루가 살아남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할 일 → 무엇보다도 할 일 / 먼저 할 일

본을 보이다 → 보기를 들다 / 보여주다 / 거울이 되다

날이 잘 서 예리하다 → 날이 잘 서다 / 날카롭다

딸기를 마음껏 만끽하다 → 딸기를 마음껏 먹다 / 딸기를 누리다


스케일이 크다 → 크다 / 통이 크다

이러한 일련의 글을 보면 → 이러한 여러 글을 보면 / 이러한 글을 보면

책의 저자입니다 → 책을 쓴 사람입니다 / 지은이입니다 / 글쓴이입니다

크게 심호흡을 하다 → 크게 숨을 쉬다 / 크게 들이마시다


조용히 침묵하다 → 조용하다 / 입을 다물다

남녀노소 누구나 → 누구나

서울로 상경하다 → 서울로 가다

시골로 낙향하다 → 시골로 가다


농사일로 바쁘다 → 농사로 바쁘다 / 흙짓기로 바쁘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다 → 묵은 것이 내려가다 / 얹힌 것이 내려가다

작은 형태의 책 → 작은 책

도중에 중퇴했다 → 중퇴했다 / 다니다 그만뒀다

직감적으로 느끼다 → 곧바로 느끼다 / 바로 느끼다



  우리는 왜 겹말을 쓸까요? 첫째로는 말이나 글을 쉽게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하면 될 말이나 글에 자꾸 뭔가 덧붙이려 하면서 겹말이 되고 맙니다. 뭔가 붙이거나 꾸며야 그럴듯해 보인다거나 뜻이 또렷하다고 잘못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큰 책이면 “큰 책”이라 하면 됩니다. 빠르게 달리면 “빠르게 달린다”라 하면 됩니다. “큰 형태의 책”이나 “빠른 속도로 달린다”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음으로 한국 사회는 ‘겹말 굴레’에 갇혔습니다. 겹말 굴레란, 쉽거나 수수하거나 또렷한 말로 생각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얽매이거나 꼬인 굴레라 할 만합니다. 우리한테는 한국말이라는 텃말이 있습니다만, 예부터 권력자하고 지식인은 중국 한문을 높이 여겼습니다. 이러다 보니 ‘어머니·아버지’는 낮춤말로 삼고 ‘모친·부친’은 높임말로 삼고 말지요. 여기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말만 써야 한 서른 몇 해를 보냈고, 일본 한자말이 신문이나 책이나 방송을 거쳐 어마어마하게 밀려들었습니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다가 대학 학문까지 죄다 일본 한자말로 범벅이 되었지요.


  그리고 한국 사회는 조선 봉건 부스러기하고 일제강점기 찌꺼기를 털 겨를이 없었어요. 해방 뒤로는 독재와 새마을운동과 경제성장이라는 채찍질에 시달리면서 말을 말답게 건사하거나 글을 글답게 갈무리하는 살림을 못 지었어요. 이러면서 눈부신 인터넷 나라로 달라지는 동안 한국말은 ‘의사소통 도구’로조차 구실을 못할 만큼 나뒹굽니다.


 책의 작가·책의 작자·책의 저자·책의 필자 → 지은이·글쓴이·책쓴이


  불거지거나 늘어나는 겹말을 걷잡지 못하는 까닭을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새로운 낱말을 지어서 살찌우겠다는 생각을 못하기 일쑤입니다. 맞춤법하고 띄어쓰기하고 표준말이라는 데에 너무 얽매이지요. 서로 생각을 즐거이 나누도록 돕는 말법이 아닌, 틀에 맞추지 못하면 ‘틀렸어!’나 ‘잘못이야!’ 같은 손가락질을 하는 말굴레가 억누르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면 고장말(사투리·텃말·마을말·시골말)은 문학에서도 버림을 받고, 책이나 교과서나 방송에서는 더더욱 못 나옵니다. 고장마다 말이 달라 ‘어머니’라는 표준말이 아닌 ‘어무이·오마니·어매·오마이·어마이·엄매·엄메·움마’ 같은 고장말을 쓰지만 정작 이러한 여러 고장말은 차츰 설자리를 잃습니다. 한국말에는 ‘진지’나 ‘여쭈다’나 ‘계시다’처럼 꼴이 아예 다른 높임말이 더러 있으나, 자리나 말씨에 따라서 여느 말도 모두 높이는 느낌을 나타내요. ‘어머니·어무이……’만으로도 얼마든지 높이는 말을 나눌 수 있어요. 토씨에 따라서도 높이고요. 이러한 말결을 제대로 못 가르치면 “저희 어머니 아무개 모친은” 같은 겹말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새로 나온 최신곡”이 아닌 ‘새노래’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바꾸고 교환하”지 말고 그냥 ‘바꾸’면 좋겠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 아닌 ‘옛이야기’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놀랍고 충격적”이라 여기지 말고 ‘놀랍게’ 여기면 좋겠어요. “반질반질 광이 나”게 안 닦아도 좋으니 ‘반질반질’ 닦으면 좋겠어요. “딱 잘라 거절하”지 말고 그냥 ‘딱 자르’면 돼요.


  학교나 사회는 ‘석차순’으로 사람을 가르곤 하는데 ‘석차’나 ‘성적순’으로는 이제 그만 가르면 좋겠어요. “작은 사이즈”인 옷을 입겠다며 “다이어트로 살을 빼”는 일을 굳이 안 해도 되지요. ‘작은’ 옷도 좋고, ‘살빼기’를 안 해도 좋아요. “늦게 핀 대기만성”이 아닌 ‘늦게 핀’ 꽃이거나 ‘늦꽃’일 뿐이에요.


  곱게 말꽃을 피우면서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며 쉽게 말하려고 하면 겹말은 말끔히 사라져요. 투박한 시골말을 쓰거나 수수한 고장말을 사랑할 적에도 겹말은 눈녹듯이 사라져요. ‘오밤중’도 ‘야밤’도 아닌 ‘한밤’에 별잔치를 보며 생각합니다. 겹말이나 군말에서 거품을 빼면서 홀가분하게 피어날 이야기꽃을 그립니다. 2017.11.2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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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4. 어깨동무하는 말로 거듭나기




  냇물이 흐릅니다. ‘내’는 ‘시내’보다 큰 물줄기입니다. ‘시내’는 ‘실 + 내’라고 하니 작은 물줄기예요. ‘시냇물’은 작고 ‘냇물’은 크지요. 그런데 다리가 놓인 냇가에 가 보면 나라에서 세운 알림판에는 ‘하천’이라고만 적혀요. ‘하천(河川)’은 어떤 낱말일까요?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하천 : 강과 시내를 아울러 이르는 말. ‘내’로 순화”로 풀이합니다.


  사람들이 쓰기에 알맞지 않아서 고쳐써야 할 한자말 가운데 하나가 ‘하천’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공공기관을 비롯해서 학계에서도 ‘내·냇물’이라는 낱말을 안 쓰고 ‘하천’만 쓰기 일쑤입니다.


  물이 흐릅니다. 반반한 곳이라면 물이 안 흐르지만, 어느 한쪽으로 조금만 기울어도 물이 흐릅니다. ‘반반하다’나 ‘판판하다’를 두고 한자말 ‘평평하다(平平-)’를 쓰기도 하고 ‘편평하다(扁平-)’를 쓰는 분이 있는데요, ‘반반하다·판판하다’ 두 마디로 넉넉하지 않을까요?




판판하다 : 물건의 표면이 높낮이가 없이 평평하고 너르다


평평하다(平平-) : 1. 바닥이 고르고 판판하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판판하다’는 ‘평평하다’로 풀이하고, ‘평평하다’는 ‘판판하다’로 풀이합니다. 얄궂은 돌림풀이예요. 쉽고 수수한 한국말 한 마디이면 넉넉한데, 쉽고 수수한 한국말을 굳이 한자말로 옮기던 옛날 한문 말씨 버릇 때문에 여러모로 어지럽다고 할 만해요.


  한국말은 결을 살리는 대목이 남다릅니다. ‘빨갛다·발갛다·뻘겋다·벌겋다’처럼 결에 맞추어 가지를 치지요. 한 낱말만 제대로 알면, 결을 살려서 느낌을 살짝살짝 달리하는 낱말을 끝없이 지을 수 있어요.


  이 얼개를 헤아리면서 한국말을 새롭게 배우려는 마음이 된다면, ‘반반하다·판판하다’를 바탕으로 ‘번번하다·펀펀하다’를 쓸 수 있습니다. ‘뻔뻔하다·빤빤하다’로 가지를 칠 수 있고, 말놀이 삼아서 ‘뱐뱐하다·변변하다’나 ‘퍈퍈하다·편편하다’처럼 느낌을 재미나게 북돋울 만하지요.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가리킬 적에 으레 ‘주부·가정주부’라는 한자말을 써요. 한자말을 쓰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이제 한자말은 평등하거나 평화로운 새로운 터전에서 쓰기에는 꽤 낡은 결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주부·가정주부’에서 ‘주부(主婦)’는 가시내만 가리킵니다. 이는 무엇을 나타낼까요?


  집에서 집안일을 맡는 사람은 오직 가시내라고 하는 생각을 한자말 ‘주부·가정주부’로 나타낸다고 할 만해요. 다시 말하자면 가부장 권력 얼거리에서 쓰던 한자말 한 마디는 집에서 일하는 가시내한테뿐 아니라 집에서 일하고 싶은 사내한테도 평등하지 않고 평화롭지 않습니다. 집안일을 도맡거나 즐기는 사내한테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요?


  한국말에는 ‘그녀’가 없어요. ‘그녀’라는 어설픈 말씨는 ‘she’를 옮기려고 애쓰던 일본사람이 지은 일본말이에요. 일본말 ‘피녀(彼女)’를 한글로 바꾸어 ‘그녀’처럼 쓰곤 하지만, 널리 퍼진 말씨라고 해도 한국말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녀’는 한국말이라고 하기 어려울까요? 한국말에서는 사내하고 가시내를 가르는 말씨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 한 마디로 사내도 나타내고 가시내도 나타내요. ‘그이·저이·이이’라는 낱말로 사내랑 가시내를 나란히 나타내지요.


  그러면 집에서 여러 일을 맡는 사람을 한국말로는 어떻게 가리킬까요? 바로 ‘살림꾼’입니다. 한국말 ‘살림꾼’은 살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나 살림을 훌륭히 하는 사람을 가리켜요. ‘살림꾼’은 가시내한테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사내도 살림꾼이고 가시내도 살림꾼이에요.




  우리 사회가 민주·평등·평화로 한 발짝씩 나아가는 길에 힘을 모으려 한다면,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쓰는 수수한 말씨를 더 깊고 넓게 헤아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집에서 밥을 짓고 옷살림을 건사하며 이모저모 치우고 쓸고 갈무리하는 알뜰한 사람을 두고 ‘주부·가정주부’ 아닌 ‘살림꾼’이라는 낱말을 쓸 수 있을 적에 참말로 민주나 평등이나 평화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어요.


  집안일은 사내하고 가시내가 어깨동무하면서 할 일이에요. 집살림도 사내랑 가시내가 손을 맞잡으면서 할 일이지요. 사내도 밥을 짓고 빨래를 잘 해야 합니다. 가시내도 밥짓기랑 빨래하기를 솜씨있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살림꾼’이라는 오래된 한국말에 새롭게 옷을 입혀 보고 싶어요.




 살림지기 / 살림님 / 살림이




  책방을 지키는 이는 ‘책방지기’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이는 ‘나라지기’입니다. 마을을 지키면 ‘마을지기’, 학교를 지키면 ‘학교지기’, 운동경기에서 안방을 지키면 ‘문지기’, 숲을 지키면 ‘숲지기’입니다. 가만히 보면, 광주시장은 ‘광주지기’요, 서울시장은 ‘서울지기’입니다. 시장이라는 공무원이 아닌 여느 사람들도 사랑으로 우리 고장을 지키려 한다면 모두 ‘지기’예요.


  지키는 씩씩한 마음을 헤아려 ‘살림지기’라는 낱말을 쓸 만합니다. 다음으로 ‘님’이에요. ‘살림님’이지요. 지키는 씩씩한 마음에다가 집안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으로 어루만질 수 있는 넋이기에 하느님 같은분이라는 뜻으로 ‘살림님’이라 할 수 있어요.


  둘레에서 “그대는 아름다운 살림지기입니다.”라든지 “아버지는 멋진 살림님이에요.” 하고 부추기거나 기릴 수 있어요. 이때에 살림지기나 살림님이라는 이름이 아무래도 멋쩍다 싶으면, “아니에요. 저는 그저 수수한 ‘살림이’입니다.” 하고 한 마디를 할 만해요.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수수하게 밝혀서 ‘살림이’예요.




  한국말은 ‘-꾼’이나 ‘-이’를 붙여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나타내곤 해요. 여기에 ‘-지기’나 ‘-님’을 가만히 붙이면 한결 재미있고 뜻있기까지 합니다. 아이들은 아직 일꾼이 아니고 심부름꾼이에요. 심부름을 잘 하는 아이들한테 ‘심부름님’이라 해 볼 수 있습니다. 심부름을 도맡는 멋지고 씩씩한 아이들한테는 ‘심부름지기’라 해 볼 수 있어요.


  글을 잘 쓰거나 가다듬는 분이라면 ‘글지기’가 되는데, 이 글지기는 ‘편집자’라는 이름하고 잘 어울려요. 그렇다면 작가는? ‘작가’는 ‘글님’이 되겠지요. 글지기하고 글님이 만나서 글꾸러미(책)를 엮습니다. 글꾸러미를 읽어 주는 이웃님은 ‘글벗’입니다. 함께 글을 쓰는 이웃이라면 ‘글동무’예요. 여기에서도 ‘


글벗지기·글벗님’이나 ‘글동무지기·글동무님’처럼 더 살을 붙일 만합니다.


  즐겁게 생각을 북돋우면서 즐겁게 말을 북돋아요. 상냥하게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상냥하게 말을 북돋웁니다. 어깨동무하려는 평등한 생각에서 어깨동무하는 평등한 말이 태어나고, 손을 맞잡는 평화로운 마음에서 손을 맞잡는 평화로운 말이 싹틉니다. 2017.9.15.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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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3. 가위손을 쥐고 꽃길을 걷고


  책을 부치려고 봉투질을 하다 보면 테이프를 자주 써야 합니다. 이제까지 가위 한쪽 날로 테이프를 끊어서 쓰다가 아무래도 번거롭구나 싶어서 읍내 문방구에 가서 연장을 따로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문방구 일꾼한테 “테이프를 끊어 주는 연장 있잖아요.” 하고 말씀을 여쭙는데, 이 연장을 두고 어떤 이름으로 말해야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읍내 문방구 일꾼은 “아, 가위손이요.” 하고 알아들으신 뒤 물건을 내어줍니다.

  넓은 테이프를 끼워서 척척 끊을 수 있도록 나온 연장은 이삿짐을 나르는 분들이든 상자를 꾸려 소포를 부치는 분들이든 무척 흔하게 써요. 제가 읍내 문방구에서 장만한 연장에는 ‘가위손’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이 이름 말고도 ‘커터기·카타기·컷터기’처럼 영어를 섞거나 ‘절단기’ 같은 한자말을 쓰기도 해요.

  가만히 생각하면 영화 〈가위손〉에서 좋은 보기를 얻으며 테이프를 끊는 연장에 ‘가위손’ 같은 이름을 붙였구나 싶어요. 한국말사전에서 ‘가위손’을 찾아보면 “1. 삿자리 따위의 둘레에 천 같은 것을 빙 돌려 댄 부분. 또는 그 천 2. 그릇이나 냄비 따위의 손잡이”를 가리키는 뜻풀이가 나옵니다.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가위손’은 가장자리를 대는 천이나 가장자리에 있는 손잡이를 가리키니, 테이프를 끊는 연장하고는 사뭇 달라요. 재미나게 잘 살려서 쓰는 낱말이 하나 있고, 이 땅에서 오래도록 흘러온 살림말 하나를 새삼스레 익혀 볼 수 있어요.

  요즈막에 사회에서 ‘흙수저·금수저’ 같은 말이 나돌면서 ‘꽃길’이라는 말이 함께 나돕니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꽃길’이 올림말로 있습니다만 “꽃이 피어 있거나 꽃으로 장식된 길”이라고만 풀이해요. 꽃이 있으니 꽃길일 테고, 꽃으로 꾸몄기에 꽃길일 텐데, 요즈막 사회에서 널리 쓰는 꽃길은 이와는 다른 결입니다. 앞으로 밝게 이어지거나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는 길을 나타내려는 새로운 꽃길이라고 할 만해요.

  또 한 가지 생각해 본다면 영화 〈화양연화〉가 널리 사랑받은 뒤로 ‘화양연화’라는 이름도 제법 퍼지곤 합니다. 사전에 안 나오는 중국말인 ‘화양연화’는 “꽃다운 나날”을 뜻해요.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낱말을 짓는 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꽃다운 나날”이나 “꽃 같은 날”을 간추려서 ‘꽃날’이라는 낱말을 써 볼 만합니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꽃날’이 올림말로 있습니다만, 어느 변말로 다루기만 해요. 꽃다운 나날이나 꽃 같은 날을 가리키는 뜻하고는 좀 동떨어져요.

  눈부신 꽃과 같은 삶을 가리키는 자리에 ‘꽃날·꽃삶’ 같은 새말을 즐거이 써 볼 만합니다. ‘꽃빛·꽃길’ 같은 새말을 함께 써 볼 수 있어요. 낱말에 더 힘을 실어 본다면 ‘꽃잔치날·꽃잔치삶’처럼 써 볼 만하고, ‘꽃잔치빛·꽃잔치길’이라 해 보아도 무척 좋아요.

  수저를 두고 살림살이를 빗대어 보려 한다면 ‘꽃수저’ 같은 이름을 써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하건 가멸차건 어버이가 아이를 꽃다이 돌보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받는 사람을 두고서 꽃수저라 해 볼 만합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라면 ‘시골수저’가 될 테고, 서울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라면 ‘서울수저’가 될 테지요. 여기에서 더 생각한다면 ‘숲수저’나 ‘들수저’ 같은 이름을 써 볼 만해요. 어릴 적부터 숲이라고 하는 너른 터전을 마음껏 누리는 아이라면 숲수저입니다. 들을 시원스레 달리듯이 신나게 뛰노는 어린 나날을 누리는 아이라면 들수저가 되어요.

  바닷가에서 태어난 아이는 ‘바다수저’라 할 수 있습니다. 골목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는 ‘골목수저’라 할 수 있어요. ‘바람수저’라는 이름을 지어서 바람처럼 홀가분하면서 넉넉하고 고운 숨결을 물려받았다는 뜻을 나타내 보아도 돼요. 해님 같은 따사로운 사랑을 받는다는 뜻에서 ‘해수저’라 해 볼 수 있고요.

  우리한테는 생각하는 힘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힘을 놓고 한자말로는 ‘상상력·창의력’이라고도 하는데, 쉽고 수수하게 ‘생각힘’이라 할 수 있고 ‘꿈힘(꿈꾸는 힘)’이나 ‘슬기힘(슬기롭게 내는 힘)’이라는 이름을 써 보아도 재미있어요. ‘지음힘(새롭게 지어낼 줄 아는 힘)’ 같은 이름을 써 볼 수 있을 테고요.

  생각힘을 살짝 북돋아 본다면 커다란 가게에서 흔히 하는 ‘원 플러스 원’을 ‘더하기잔치’나 ‘더하기’나 ‘더하기날’처럼 가다듬어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앞서 읍내마실을 갔다가 읍내가게에서 “이 물건은 더하기 행사를 해요. 하나 더 가져가셔요.” 하고 들려주는 말을 들었어요. 제가 사는 고장은 워낙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계신 시골인 터라, 읍내가게 일꾼이 영어로 ‘원 플러스 원’이라 말할 적마다 다들 못 알아들으셨으리라 느껴요. 이러다 보니 읍내가게 일꾼 스스로 말을 바꾸어 “더하기 행사”라는 이름을 그분들 스스로 지어서 썼구나 싶더군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눈높이를 맞추면서 재미난 말이 하나 태어난 셈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는 문화나 문명이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낮고 작고 여린 사람들 눈높이를 헤아려 보는 마음이 있다면, 무척 쉬우면서 재미있고 뜻있는 낱말을 누구나 새롭게 지을 수 있어요.

  더 헤아려 보면 지난날에는 ‘덤’이라는 말을 썼어요. “하나는 덤입니다”처럼 썼지요. 더 주기에 ‘덤’인데, 덤에 말꼬리가 붙어 ‘덤터기’가 되면 남한테 씌우거나 남한테서 억지로 넘겨받는 짐이나 걱정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말끝 하나로 뜻하고 쓰임새가 사뭇 달라지는 얼거리예요. 말놀이라고 할 만합니다. 삶을 수수하게 나타내면서 살림을 즐겁게 그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이웃님이 열 살 아이한테 “아주머니는 바다 근처에 살아요.” 하고 말씀하는데 열 살 아이는 ‘근처’라는 낱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근처’라는 한자말 소릿결이 낯설고 뜻은 도무지 모르는 눈빛입니다. 옆에서 이 말을 함께 들은 제가 다리를 놓아서 열 살 아이한테 한 마디를 거들어 주었어요. “‘바다 근처’는 바다에서 가까운 곳이라는 뜻이야. 아주머니는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 사신대.” 하고 알려줍니다. 그제서야 열 살 아이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근처(近處)’라는 한자말은 어른한테는 퍽 흔하거나 쉬운 낱말일 수 있어요. 이 한자말을 쓰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굳이 안 써도 될 만하다는 대목을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옆’이나 ‘곁’이나 ‘둘레’나 ‘가까이’ 같은 낱말을 써 보면 누구나 곧장 알아들어요.

  어느 어른은 ‘근린(近隣)’이라는 한자를 붙여 ‘근린공원’ 같은 이름도 쓰는데요, ‘근린공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는 어린이나 푸름이는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근린’이라는 한자말은 이 자리 빼고는 거의 아무 데도 안 써요.

  마을에 가까이 있는 공원이면 ‘마을공원’이나 ‘마을쉼터’라 하면 됩니다. ‘근린’을 뒤집은 한자말 ‘인근’도 ‘옆·곁·둘레·가까이’ 같은 쉬운 한국말로 부드러이 걸러내어 쓰면 한결 좋아요. 때로는 ‘이웃’이라는 낱말로 걸러낼 수 있습니다. ‘마을쉼터’나 ‘이웃쉼터’라 할 수 있고, ‘손바닥쉼터’나 ‘한뼘쉼터’나 ‘자투리쉼터’나 ‘골목쉼터 같은 이름을 얼마든지 새롭고 아기자기하게 붙일 수 있어요.

  가위손을 쥐고 꽃길을 걸어 볼 수 있을까요. 언제나 꽃날 같은 삶을 누리면서 서로서로 즐겁게 꽃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덤터기 아닌 덤을 나누면서 사이좋은 이웃으로 어깨동무하는 나날을 이룰 수 있을까요. 마을마다 마을쉼터가 있는 나라가 되고, 마을쉼터에는 우람한 나무가 자라서 여름에는 그늘을 베풀고 겨울에는 찬바람을 그어 주는 고마움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 곁에 사랑스러운 말이 있습니다. 우리 둘레에서 쉬운 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까이에서 고이 마음을 기울이면 다 함께 눈부시게 피어나는 꽃잔치말을 상냥하게 주거니 받거니 할 만합니다. 꽃내음이 흐르고 꽃노래 같은 기운이 감도는 꽃살림말을 싱그러이 혀에 얹어 봅니다. 2017.7.17.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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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2. 시골사람이 지은 말 ‘다북지다’


  이웃님이 보내 온 글을 읽는데 ‘설렁하다’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설마 ‘썰렁하다’를 잘못 쓰셨나 하고 바라보았어요. 이러다가 다시 생각합니다. 한국말이거든요. 한국말은 아 다르고 어 달라요. 더욱이 한국말은 아랑 어만 다를 뿐 아니라, 아랑 야가 다르고, 어랑 여가 다르지요. 사랑 샤가 다른 한국말이면서, 싸랑 사에다가 쌰까지 다 다른 한국말입니다.

  사전에서 ‘설렁하다’를 찾아봅니다. 올림말로 나옵니다. 말결로 살피면 ‘설렁하다 < 썰렁하다’인 얼거리예요.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설보다 썰을 붙인 ‘썰렁하다’를 쓰시지 싶습니다. ‘설렁하다’처럼 살짝 가붓하게 쓰시는 분은 매우 드물어요.

  말결을 더 살피면 ‘설렁하다·썰렁하다’뿐 아니라 ‘살랑하다·쌀랑하다’가 있어요. 우리는 그때그때 느낌이나 기운을 살펴서 온갖 낱말을 쓸 만해요. 어느 때에는 ‘설렁설렁하다’나 ‘쌀랑쌀랑하다’를 쓸 수 있지요. 마음으로 스미는 결을 고스란히 살려서 이야기할 만합니다.

  익산에 사는 이웃님이 전화를 걸어 말씀을 여쭈셨어요. 그분은 퍽 예전부터 ‘다북지다’라는 낱말을 쓰셨다고 합니다. 때로는 ‘다북차다’라는 낱말도 쓰셨대요. ‘다북지다·다북차다’라는 말을 처음 들을 무렵이든, 이 말을 그분 이웃님이나 동무님한테 쓰든, 누구나 이 말이 무엇을 나타내거나 가리키는가를 잘 느끼거나 알았다고 해요. 딱히 한국말사전을 뒤적여 보지 않아도 도란도란 즐거이 나누던 낱말이라고 합니다.

  이러다가 한국말사전을 살펴보는데 ‘다북지다’도 ‘다북차다’도 사전에 없어서 놀라셨대요. 사전에 없는 말을 함부로 써도 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대요. 사전에 없는 말을 아무나 지어서 쓴 셈이 아닌가 하고 느끼셨대요.

  한국은 한국말사전뿐 아니라 다른 여러 사전을 지은 발자취가 매우 짧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을 담을 사전을 짓겠다는 생각도 거의 못했다고 할 만합니다. 외국사람이 한국말사전을 먼저 지었고, 한국사람은 한참 늦게 한국말사전을 지었어요.

  한국 발자취를 살피면, 사전을 어떻게 짓느냐 하는 틀이 제대로 서지 않은 채 독립운동 물결을 타고서 한국말사전이 태어나요. 해방 뒤에는 제대로 독립한 나라로 서려는 뜻으로 한국말사전이 태어나지요. 이러다 보니 한국말사전은 꼴이나 결을 제대로 가닥을 잡지 않고서 서둘러 나왔습니다. 이 틈바구니에서 일본 사전을 슬쩍 베껴서 낸 사전이 불티나게 팔리며 엉뚱한 일본 한자말이 마구잡이로 퍼지기도 했어요. 이 엉킨 실타래는 요즈막까지도 무시무시하게 퍼져요.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 살지만, 일제강점기라든지 해방 뒤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시골에 살았어요. 그래서 한국말사전 틀을 처음 짜는 일을 하던 분들은 ‘시골말 찾기’나 ‘시골말 캐기’를 했습니다. 지난날 학문을 하던 분들은 들이나 숲이나 바다가 아닌 서울에 있는 학교에 모여 책으로만 배운 터라, 막상 국어학자로 일한다고 하더라도 한국말(시골말)을 잘 몰랐어요. 사전에 어떤 낱말을 실어야 알차며 아름다운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요.

  일제강점기나 해방 뒤에 문학을 한 적잖은 분들은 이녁이 나고 자란 고장에서 쓰던 고장말을 글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예전에는 그랬지요. 예전에는 문학을 한다고 할 적에 서울말이 아닌 시골말로 문학을 했어요. 김유정이든 백석이든 이효석이든 현덕이든 이녁이 나고 자란 고장에서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말로 문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사전 발자취가 매우 짧아도 ‘시골말을 고스란히 담아낸 문학’을 발판으로 삼아서 낱말을 모을 수 있었어요.

  오늘날 한국 문학을 살피면 거의 모두 서울말입니다. 전라말이나 경상말로 소설이나 시를 쓰는 분은 찾아볼 길이 없어요. 제주사람이 제주말로 소설이나 시를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수도권이 아닌 인천이나 수원이나 안산이나 고양이나 부천 같은 고장에서 인천말·수원말·안산말·고양말·부천말로 문학을 하는 이도 찾아볼 길이 없어요. 다 다른 고장에서 나고 자라면서 다 다른 말결을 물려받은 숨결을 꾸밈없이 살려낸 문학은 오늘날 한국에서 씨가 말랐다고 할 만합니다.

  이런 흐름이나 얼개를 헤아려 본다면, ‘다북지다·다북차다’가 사전에 아직 안 오른 까닭을 짚을 만해요. 사전에 없기 때문에 쓰기에 멋쩍거나 꺼릴 만한 낱말이 아니라, 아직 사전에 제대로 담지 못한 시골스럽고 수수한 한국말 몇 가지인 ‘다북지다·다북차다’를 우리 이웃님이 입에서 입으로 지키면서 가꾸어 왔다고 생각해요.

  ‘다북지다·다북차다’는 아직 사전에 없으니 말뜻을 새롭게 붙여야 합니다. 먼저 두 낱말하고 비슷한 다른 낱말을 헤아려 봅니다. ‘소복하다·수북하다’가 사전에 올라요.

  ‘소복하다’는 “1. 쌓이거나 담긴 물건이 볼록하게 많다 2. 식물이나 털 따위가 촘촘하고 길게 나 있다 3. 살이 찌거나 부어 볼록하게 도드라져 있다”로 풀이합니다. 다음으로 ‘다복하다·더북하다’가 사전에 올라요.

  ‘다복하다’는 “풀이나 나무 따위가 아주 탐스럽게 소복하다”로 풀이합니다. ‘더북하다’는 “1. 풀이나 나무 따위가 아주 거칠게 수북하다 2. 먼지 따위가 일어 자욱하다”로 풀이해요. 자, 제 나름대로 새 뜻풀이를 붙여 보겠습니다.

다북하다 : 1. 풀이나 나무가 보기 좋도록 넉넉하게 있다 2. 마음·생각·살림·모습 들이 보기 좋도록 넉넉하다
다북지다 : 1. 풀이나 나무가 참으로 보기 좋도록 아주 넉넉하게 있다 2. 마음·생각·살림·모습 들이 참으로 보기 좋도록 아주 넉넉하다
다북차다 :  1. 풀이나 나무가 더없이 보기 좋도록 대단히 넉넉하게 있다 2. 마음·생각·살림·모습 들이 더없이 보기 좋도록 대단히 넉넉하다

  ‘옹골지다·옹골차다’라는 낱말이 있어요. ‘옹골지다’는 “실속이 있게 속이 꽉 차 있다”를 뜻하고, ‘옹골차다’는 “매우 옹골지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지다·-차다’를 놓고 결이 이처럼 달라요. 이런 결을 살피면서 ‘다북하다·다북지다·다북차다’를 사전에 새롭게 담을 만한 반가운 시골말 한 타래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나눌 말은 사전에 나와야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고받을 말은 표준 말법이나 서울말 얼거리에 들어맞아야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나타낼 말을 즐겁게 나누면서 살림을 기쁘게 지으면 돼요. 우리는 사랑을 말 한 마디에 고이 실어서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하루를 지으면 돼요.

  예부터 말은 학자나 임금님이 아닌 수수한 시골사람이 지었습니다.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은 바로 수수한 시골사람이 지었어요. 게다가 고장마다 말이 다 다른데요, 이는 고장마다 바로 그 고장에서 삶을 지은 수수한 시골사람이 손수 말을 지었다는 뜻이에요. 전라도라는 고장을 놓고 본다면, 곡성이나 고흥이나 구례나 진도나 신안이나 나주에서 쓰는 말이 다 다르지요. 고을마다 삶자리가 다르니, 다 다른 삶자리에 맞추어 다 다른 시골사람이 다 다른 말을 짓습니다. 고을에서도 더 작은 마을로 접어들면 또 마을대로 말이 다르고요.

  남이 지어 주는 말을 쓰던 시골사람이 아니에요. 이른바 학자나 지식인이나 권력자가 지어 주는 말을 쓰지 않은 시골사람이에요. 모든 말을 스스로 지은 시골사람입니다. 모든 말을 즐겁게 지은 시골사람입니다. 모든 말을 삶에서 캐내어 살림을 가꾸면서 홀가분하게 지은 시골사람입니다.

  삶을 짓기에 말을 지을 수 있어요. 살림을 짓기에 이름을 지을 수 있어요. 사랑을 짓기에 이야기를 지을 수 있어요. 시골에 살든 서울에 살든 우리 스스로 삶이나 살림이나 사랑을 스스로 짓는 기쁜 길을 걷는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삶과 살림과 사랑을 슬기롭게 담아내어 생각을 나누는 아름다운 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수수하게 말을 짓고, 스스럼없이 말을 나누어요. 사전을 짓는 사람은 수수한 시골사람을 이웃으로 두면서 말넋을 살찌우는 길을 갑니다. 2017.6.26.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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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17.7.6.) 광주 '동네책방 숨'에 찾아오는 분들하고

함께 나눌 이야기에서 몇 가지 줄거리를 뽑아서 적어 봅니다.

사전과 사진과 시골과 삶과 글이 서로 어떻게 맞물리는가 하는

작은 실마리를 보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 + +


숲에서 짓는 글살림

. 글을 어떻게 쓰는가 - 베껴쓰기 말고 투박한 우리 삶을 글로 써요



  저는 꽤 오랫동안 선풍기를 안 썼어요. 마흔 해 남짓 선풍기 없이 살다가 비로소 선풍기를 집안에 들였습니다. 다만 이 선풍기조차 며칠 안 씁니다.


  저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기도 한데, 선풍기도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무더운 한여름에 에어컨 없이 못 살겠노라 하는 이웃님이 무척 많은데, 저희 집에서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이 이제껏 부채로 여름나기를 한 셈입니다.


  선풍기는 곁님 어머님이 여러 해 앞서 선물해 주셨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선풍기가 아예 없는 살림은 아니었으나, 늘 광에 두고 안 꺼냈으니, 아예 없는 셈이었다고 할까요. 선풍기를 선물받았으나 선풍기를 쓸 일이 없다고 느꼈어요. 선풍기가 있어도 있는 줄 잊고 살았어요.


  큰아이가 아홉 살을 누리던 무렵에 선풍기를 처음 꺼냈으나 저는 선풍기 바람을 안 쐽니다. 아이들이 쐬도록 내주고 제 손에는 부채를 쥡니다. 이러면서 저는 ‘하늘바람을 사랑하자’는 마음이 되어 ‘바람 이야기’를 글로 써 봅니다. 아마 제가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으로 살았거나 도시에서 살았으면, 이처럼 ‘하늘바람’ 이야기는 못 썼겠다고 느껴요.


내가 바라보지 않아도

나를 바라보는

나무가


한 그루 두 그루

어깨동무하면서

짙게 그늘길 내어준다.


눈을 감고 걷는다

뒤로 돌아 걷는다

내 곁을 감싸며

늘 흐르는

새파란 바람을

실컷 마신다.


  글을 어떻게 쓸까요? 다른 분들이 글을 어떻게 쓰는지는 저한테 대수롭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글을 어떻게 쓰는가를 밝혀 보겠습니다. 맨 먼저 삶으로 쓴다고 느낍니다. ‘삶으로 쓰는 글’이라는 말은 ‘우리가 저마다 살아가는 대로 글이 흘러나온다’는 뜻이에요. 도시사람은 도시사람대로 살며 글을 쓰고, 시골사람은 시골사람대로 살며 글을 써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책으로 배우고 얻은 대로 글을 쓰고, 흙을 만지며 살림을 가꾸는 사람은 흙과 집살림이 바탕이 되는 글을 써요. 저는 시골집에서 늘 나무랑 어깨동무하면서 하늘바람을 쐬는 하루를 누리기에 이러한 삶을 고스란히 글로 써요.


  엊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앞서 부엌을 치우려고 불을 켰더니 갑자기 웅웅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군요. 부엌 창문에 친 모기그물에 달라붙는 시커멓고 커다란 녀석이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매우 큰 풍뎅이예요. 어쩌면 장수풍뎅이일는지 모르지요. 여섯 살 아이 주먹만큼 커다란 풍뎅이예요. 난데없는 웬 풍뎅이인가 싶었는데 부엌 불을 끄니 이 풍뎅이는 어디론지 사라져요.


  고흥에서는 한 달 남짓 비가 안 와요. 이렇게 비가 안 오니 밭에서 여느 풀이 거의 안 돋아요. 땡볕이 한 달 넘게 내리쬐기만 하니까 그토록 질기거나 대단한 목숨을 뽐내던 풀조차 한두 번 손으로 뽑으니 더 기운을 못 내고 말라비틀어지기만 하네요.


  그런데 있지요, 풀을 뽑지 않은 땅은 사뭇 다릅니다. 뿌리가 땅속에 있도록 한 채 풀포기만 낫으로 베어 눕혀 놓으면, 이때에는 아무리 땡볕이 오래 가더라도 흙이 마르지 않습니다. 풀포기를 베어서 덮은 흙은 오랜 가뭄에도 가물지 않는다고 할까요. 사람 손을 타지 않는 숲은 사람이 몇 달이든 몇 해이든 물을 안 주어도 풀이나 나무가 안 말라요. 풀과 나무가 서로 어우러지는 자리, 이른바 숲에는 가뭄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삶터가 다릅니다. 삶터가 다른 만큼 겪는 삶이 다릅니다. 겪는 삶도 마음씨마다 다르기 마련이기에, 누구는 풀을 잡초로 보면서 모두 뽑아내고, 누구는 농약을 써서 풀을 모조리 죽이며, 누구는 불을 질러서 활활 태우지요. 이때에 겪는 삶은 다 다르기 마련이요, 다 다른 삶에 맞추어 다 다른 이야기가 피어나서, 다 다른 글이 샘솟아요.


  자, 저는 이렇게 제가 지켜보는 대로 제 삶을 찬찬히 글로 옮겨요. 우리가 글을 쓴다고 할 적에는 누구나 이렇게 늘 지켜보거나 바라보거나 겪거나 느끼는 대로 쓸 수 있어요. 가장 쉬운 글이고 가장 수수한 글이에요. 우리가 서로 만날 적에 인사하며 주고받는 말처럼 쓸 수 있는 글이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대로 글을 쓸 수 있어요.


  여기에 살을 하나 붙인다면, ‘살아가는 대로 쓰되, 살면서 즐거움이나 기쁨을 느낀 대목을 골라서 쓸’ 수 있어요.


아주 천천히

발자국 소리조차 안 내고

살금살금 다가서며

더 천천히

손을 뻗어

드디어 바로 앞에

나비를 잡는구나 싶더니

내 손끝을 톡

치고

펄렁펄렁 날아가는

멧범나비


  사는 대로 쓰는 글이지만, 사는 대로만 글을 쓰면 때로는 밋밋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살며 활짝 웃던 일’이나 ‘살다가 눈물이 흐른 일’이나 ‘사는 동안 노래가 샘솟은 일’을 골라서 쓸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늘 비슷하게 겪거나 거의 똑같이 하는 일’을 날마다 엇비슷하게 글로 쓴다면 재미없거나 질릴 수 있어요. 비슷하거나 같은 말을 동무나 이웃한테 들려준다면 동무나 이웃도 우리 이야기가 이제는 따분할 수 있고요.


  이 다음으로 또 한 가지 글을 생각할 수 있어요. 첫째는 ‘사는 대로’ 쓰고, 둘째는 ‘살며 기쁜 일’을 쓴다면, 셋째는 ‘살고 싶은 꿈’을 써요.


꽃이 피어나는

곳이 됩니다


이곳저곳 골골샅샅

그곳에도 골고루


곱게 꿈꾸는

곳이 되어요


곧게 서고

고이 웃고

고슬고슬 고소한

고마운 살림꽃씨를

곳곳에 심지요.


  꿈을 그리면서 쓸 적에는 그야말로 우리 꿈을 스스로 사랑스레 생각하면서 쓰면 돼요. 다른 사람 꿈을 들여다보거나 옆사람 눈치를 볼 까닭이 없어요. 앞으로 스스로 이루고 싶은 꿈을 기쁜 웃음으로 그리면 돼요.


  아무리 훌륭하거나 멋져 보이는 글이 있어도 구태여 다른 사람 글을 따라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한 마디를 보태어 본다면, 베껴쓰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베껴쓰기를 한자말로 필사라고도 합니다만, 베껴쓰기나 필사 모두 글쓰기하고 동떨어져요. 베껴쓰기나 필사를 하면 할수록 내 삶에서 멀어져요.


  그러면 글이나 책은 안 읽으면 좋을까요? 네, 맞습니다. 글이나 책은 안 읽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스스로 지을 노릇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스스로 짓는 새로운 살림으로 나아갈 노릇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스스로 짓는 새로운 살림을 사랑으로 보듬으며 슬기롭게 가꿀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글이나 책은 왜 있을까요? 이는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제살림을 지을 적에 이웃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에요.


  우리한테 우리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는 이웃을 못 만나요. 우리 이야기가 없는 삶이라면 이웃을 만나는 자리에서 정치나 연예인이나 사회나 스포츠 이야기만 줄줄이 늘어놓고 말아요. 이때에는 아무 새로움이 없어요. 이때에는 아무 새로짓기가 없지요. 남들 이야기에 눈길을 두면 둘수록 우리 이야기하고 멀어져요.


  한국사람은 새로운 만화영화를 거의 못 지어내요. 그러나 한국사람은 일본이나 미국이 새로 지어내는 만화영화 밑그림을 아주 뛰어나게 그리지요. 손재주는 있는 한국사람이지만, 머리가 없는 한국사람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참 부끄러운 말이 될 텐데, 우리는 남이 일구어 놓은 보기 좋거나 그럴듯하구나 싶은 글이나 책에 휘둘리면서 그만 우리 이야기를 얕보거나 낮보는 삶을 보냈어요.


  우리한테 우리 이야기가 없는 채 다른 사람들 글이나 책을 읽으면 꽁무니 좇기에서 그쳐요. 우리한테 우리 이야기가 있는 채 다른 사람들 글이나 책을 읽어야 서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배움이란 어깨동무입니다. 글쓰기나 책읽기는 모두 어깨동무예요. 뛰어난 스승한테서 뭔가 배울 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작가한테서 뭔가 얻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 스스로 가르치고 배웁니다. 내가 나를 가르치고, 내가 나한테서 배우지요.


  스스로 곧게 설 적에 스스로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요. 스스로 고요히 설 적에 이웃을 고요히 바라볼 수 있어요.


  말이란 무엇일까요? 말이란, 사람이 사랑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숨결을 생각이라는 씨앗으로 살뜰히 속삭이면서 살림을 싱그러이 세우는 숨결이라고 할 만하지 싶어요.


 글은 우리 마음으로 씁니다. 살면서 쓰고, 즐겁게 쓰며, 꿈꾸며 씁니다. ‘삶·웃음·사랑’으로 글을 쓴다고 할 만해요. 살면서 쓰기에 ‘삶’이지요. 즐겁게 쓰기에 ‘웃음’이에요. 꿈꾸며 쓰기에 ‘사랑’입니다. 글을 쓰는 걸음을 살피면서 삶이랑 웃음이랑 사랑을 노래합니다.


종이에 얹은 글씨는

우리가 지은 꿈을

아로새긴 이야기


종이에 실은 그림은

우리가 나눈 사랑을

포근히 쓰다듬은 이야기


종이에 놓은 사진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살며시 적바림한 이야기


종이를 묶은 실은

너랑 나랑 잇는

즐거운 이야기 꾸러미


여기에 책 한 권


  저마다 바람이 되어 바람 같은 이야기를 노래하듯이 글을 쓰고 말을 한다면 매우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저마다 해님이 되어 햇살처럼 눈부시고 햇볕처럼 따뜻하며 햇빛처럼 맑게 이야기를 꿈꾸듯이 글을 쓰고 말을 한다면 더없이 사랑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 스스로 하려고 들면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보면 모두 됩니다. 내가 나를 보지 않기 때문에 어느 것도 안 되기 마련이에요. 2017.7.6.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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