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1.9.20.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이장희 글·그림, 문학동네, 2013.3.20.



한가위 앞두고 작은아이랑 읍내에 갔다. 이맘때는 시골이 북적이되 시골버스는 느긋하다. 마을에서 읍내로 나가는데 시골버스에 할매 할배가 한 분도 없다. 집으로 돌아올 적에도 똑같되, 이때에는 낯선 젊은이가 많다. 아직 부릉이 없이 큰고장에 나가 사는 이들이 한가위에 시골버스를 탄다. 솔떡(송편)을 조금 장만했다. 어릴 적에 우리 어머니는 갖가지 먹을거리를 장만하느라 쉴 겨를이건 눈 붙일 짬이건 없다시피 했다. 함께 일하다가 한밤이 되어서야 “너희는 이만 자.” “어머니는요?” “할 일이 수두룩한데 어떻게 자.” “그런데 우리는요?” “너희는 자도 돼.” “혼자 하시게요?” “그럼 어떻게 하니. 도우려고 오는 사람도 없는데.” 우리 아버지도, 작은집 아이어른도 언제나 ‘먹고 잔뜩 싸가기’만 할 뿐 일을 아예 안 거들다시피 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를 읽다가 작은집 아이어른이 살던 서울이 불쑥 생각난다. 먼먼 곳도 아닌 인천 코앞인 서울에 사는 작은집 아이어른은 왜 늘 올림자리(차례)를 다 차리고서야 왔을까. 서울이란 어떤 곳일까. 서울은 어떻게 나아갈 적에 아름다울까. 오늘날 서울을 이룬 사람들은 무슨 꿈일까. 앞으로 서울에서 나고자랄 어린이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물려받을 적에 사랑스러울까.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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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1.9.18.


《별거 아냐》

 메리 앤 호버만 글·메일로 소 그림/허은미 옮김, 구몬학습, 2005.9.1.



바람 자고 하늘 파란 날 골짝마실을 한다. 이제 슬슬 골짝물에 온몸을 풍덩 담그며 노는 나들이는 저물 듯하다. 어제까지 큰바람이 몰아쳤기에 골짝물이 불었을까 싶더니 그리 안 불었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땀도 방울져서 떨어지는 일이 확 줄어든다. 《별거 아냐》는 대단히 멋진 그림책이지만 ‘학습지 별책부록’처럼 나오고 만 탓인지 쉽게 판이 끊어졌다. 아이들이 무척 어릴 적에 한 자락 장만해 놓기는 했는데, 마침 헌책으로 보여서 새로 장만한다. 천천히 되읽는다. “별거 아냐”로 옮겼는데 “아무렇지 않아”로 손질하고 싶다. 예전에도 오늘도 아이들은 ‘별거’가 뭔지 잘 모른다. 띄어쓰기를 요렇게 하면 웬만한 어른은 ‘따로살다’를 가리키는 한자말 ‘別居’를 생각하겠지. 어린이는 한자 ‘別’이 ‘다르다’를 가리키는 줄 모른다. 그런데 한자 ‘별(別)’은 ‘다르다’뿐 아니라 ‘아무’로 옮겨야 하기도 하다. ‘별것(별거)’에서는 ‘아무것’이다. “아무 일 아냐”나 “아무렇지 않아” 하고 느끼는 아이들이 얼마나 신나게 하루를 놀며 노래하는가를 아름다이 밝히는 그림책일 텐데, 언젠가 이 빛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겠지. 곁님은 ‘보는이(무당)’가 궁금하단다. 누구나 마음을 틔우면 다 본다. 그냥 트면 다 된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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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1.9.17.


《의》

 주나이다 글·그림/이채현 옮김, 비룡소, 2021.8.17.



지나가는 큰바람이다. 우리 집은 새뜸(신문·방송)을 다 안 보니 바깥에서 아무리 떠들든 안 쳐다본다. 둘레에서는 “태풍 지나간다는데 괜찮은가?” 하고 물으나 “큰바람이 지나갈 적에 왜 걱정해요?” 하고 되묻는다. 걱정이 걱정을 낳고, 버릇이 버릇을 낳는다. 그저 하늘을 보면서 바람하고 속삭이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배워야 하기에 찾아오니?”라든지 “우리가 앞길을 어떻게 그릴 적에 새롭고 아름다울까?” 같은 말을 바람한테 묻자. 아침이 지나니 비도 바람도 잦아들면서 볕이 뜨겁게 내리쬐고 하늘이 새파랗다. 일본 그림책 《の》를 옮긴 《의》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가 ‘일본말 그림책’으로만 본다면 일본사람이 ‘の’를 잔뜩 쓰든 말든 대수롭지 않다. 이와 달리 ‘우리말로 옮긴 그림책’으로 본다면, 그림결뿐 아니라 말결을 함께 살필 노릇이다. 여느 낱말책은 ‘-의’를 토씨로 삼지만, 기나긴 한겨레 말살림으로 본다면 “잇는 토씨”는 ‘-ㄴ’이나 ‘-은·-는’이다. 바깥말(외국말)을 배우는 분이 참 많은데, 우리말을 배우는 분은 왜 이렇게 드물까? 옮기든(번역) 스스로 쓰든(창작) 다 ‘우리말’로 하는데, 정작 우리말을 안 배우면서 무슨 글이나 책을 쓰거나 읽을까? 푸른 숲말을 배울 노릇이다.


わたしの 나의 → 나는

お氣に入のコ-トの 마음에 드는 코트의 → 마음에 드는 옷은

ポクットの中のお城の 주머니 속의 성의 → 주머니에 담은 성은


#の福音館 #junaida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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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1.9.16.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김헌수 글, 모악, 2020.9.27.



큰아이하고 가랑비를 맞으며 읍내로 간다. “우산 챙길까요?” “아니, 챙기지 말자.” 그러나 아무래도 큰아이가 걱정을 못 놓겠다고 느낀다. 접이슈륩(접이우산)을 둘 내 등짐에 챙긴다. 마을 앞에서 시골버스를 타다가 생각한다. ‘큰아이는 비가 오면 젖을까 걱정’을 한다면, 나는 ‘큰아이가 걱정하는 일은 걱정거리가 아니지만, 큰아이가 걱정하는 마음을 걱정했구나’ 싶다. 알고 보면 둘 다 걱정꾼인 셈. 큰고장에서 산다면 다를 텐데, 참 다를 텐데, 시골에서 살기에 슈룹을 쓸 일이 없다시피 하다. 집에서야 그냥 맨몸으로 비놀이를 한다. 비를 쫄딱 맞으면서 다니는 나를 보며 “우산 없나?” “우산 살 돈이 없나?” 하고 걱정하는 이웃님이 있다. “해가 나면 해가 좋고, 비가 오면 비가 좋을 뿐입니다.” 해도 자꾸 우산을 쥐어 주시려고 한다.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를 읽었다. 읽으면서 한참 생각했다. 내가 읽은 노래책(시집) 가운데 아이들더러 읽으라고 건넬 만한 노래책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고. 왜 이렇게 비비 꼬려고 할까? 왜 이렇게 멋을 부리려고 할까? 왜 이렇게 스스로 사랑하지 않을까? 시골버스에서 혼잣말을 하다가 큰아이한테 속삭인다. “짐순이가 되어 주어서 고마워.” “아버지도 고마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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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1.9.15.


《우리 곧 사라져요》

 이예숙 글·그림, 노란상상, 2021.8.17.



해가 난다. 구름밭을 본다. 한가위를 앞두고 바쁜 사람이 많듯 나도 바쁘다. 이달 24일부터 인천 〈북극서점〉에서 ‘그림책하고 노래꽃(동시)이 어우러지는 자리’를 꾸리기로 해서 꽃종이(홍보지)를 꾸민다. 그동안 맡기던 곳에 다시 맡길는지 새곳을 찾아볼는지 생각하다가 그냥 맡겨 본다. 툭하면 하염없이 질질 끄는 곳인데, 그동안 겪기로 새곳을 찾아도 안 달라지더라. 사람들이 “돈! 돈!” 하는 까닭이 있다. 앞에서는 “조금만 맡겨도 된다(소량주문 가능)”고 떠들지만, 정작 “조금만 맡기”면 뒤로 한참 민다. 여러 곳을 돌다가 이곳에 다시 맡기는 까닭은 하나이다. 뒤로 한참 밀어도 “빛결이 망가지지는 않으”니까. 숱한 곳은 뒤로 미룰 뿐 아니라 빛결까지 망가진 채 보내더라. 《우리 곧 사라져요》를 읽으며 여러 삶길을 떠올렸다. 사람 스스로 바보가 되기에 푸른별 이웃이 숱하게 사라졌다. 그런데 ‘사라지다’라기보다 ‘죽였다’고 해야 맞겠지. 숱한 푸른별 이웃이 먼저 스스로 ‘떠났다’고 할 수도 있다. 멍청한 사람들이 스스로 멍청한 줄 깨닫거나 배울 생각이 없구나 싶어 도무지 봐주지 못하겠어서 떠난다. ‘바보’는 아직 모르는 줄 알아서 배우는 사람이지만, ‘멍청이’는 배울 줄 모르는 쳇바퀴이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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