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좀 생각합시다 15


 처치 곤란


  이러지도 못하거나 저러지도 못한다고 할 적에는 예부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하고 말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처치 곤란(處置 困難)”이라는 한자말이 유행말처럼 퍼집니다.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건사하지도 못할 적에도 “처치 곤란”이라고 말하기 일쑤입니다.


  영어사전에서 문득 ‘intractability’라는 낱말을 찾아보니 뜻풀이를 “고집스러움, 다루기 힘듦, 처치 곤란”처럼 적습니다. 영어를 이렇게 풀이했기에 “처치 곤란”이라는 말이 퍼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영어사전도 이런 말이 퍼지도록 한몫 거들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영어사전에도 나오지만, 알맞게 쓸 한국말은 “다루기 힘듦”입니다. “다루기 힘들”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요. “다루기 힘든” 나머지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건사하지도 못해요.


  그리고,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을 가리켜 ‘갈팡질팡’이라고 합니다. 어떤 일을 맺고 끊는 실마리를 살필 적에 “‘갈피’를 잡는다”고 해요. 이리하여, “아직 갈팡질팡하는구나”라든지 “여태 갈피를 못 잡았어”처럼 말할 만해요. 때에 따라서 “손도 못 대다”나 “손도 못 쓰다”라 할 수 있고, “어쩌지 못하다”나 “헤매기만 하다”처럼 말할 수 있으며, “어쩔 줄 모르다”나 “어찌할 바를 모르다”라 할 수 있습니다. 4348.11.1.해.ㅅㄴㄹ



고기 구울 때 나오는 기름은 처치 곤란이잖아

→ 고기 구울 때 나오는 기름은 다루기 힘들잖아

→ 고기 구울 때 나오는 기름은 버리기 어렵잖아

《최원형-10대와 통하는 환경과 생태 이야기》(철수와영희,2015) 164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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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14


 농땡이·땡땡이


  ‘농땡이’가 일본말이고, ‘땡땡이’까지 일본말인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한국말로는 ‘노닥거리다’하고 ‘빼먹다’인 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일본말이기에 안 써야 하지 않습니다. 일본말이기에 샅샅이 털어내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쯤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구태여 일본말을 끌어들여서 내 마음이나 뜻이나 생각을 나타내려고 하는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굳이 영어나 한자말을 빌어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는가를 살필 수 있어야지요.


  ‘농땡이’는 ‘油を賣る(あぶらをうる)’라는 일본말에서 왔어요. ‘땡땡이’는 ‘でんでん’이라는 일본말에서 왔고요.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보면 이런 말밑을 밝히지 못합니다. ‘농땡이’랑 ‘땡땡이’ 모두 마치 한국말이기라도 되는듯이 다루지요. 그리고, 어른문학이나 인문학을 하는 분도 이런 일본말을 그냥 쓰고, 어린이책을 쓰거나 어린이문학을 하는 분도 이런 일본말을 버젓이 씁니다.


  어떤 말을 가리거나 골라서 쓰느냐에 따라 내 넋이 달라집니다. 어떤 말을 살피거나 헤아려서 쓰느냐에 따라 내 마음이 바뀝니다. 생각이 없이 아무 말이나 쓸 적에는 내 넋이나 마음도 ‘생각이 없는 채 흐르’기 마련입니다. 말 한 마디에 깃드는 숨결을 찬찬히 살피거나 헤아릴 때에는 내 모든 몸짓에 ‘생각이 깊고 너르게 흐르’지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안 가르쳐 주었다고 탓하지 말고, 바로 오늘부터 한국말을 모두 새롭게 배울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0.25.해.ㅅㄴㄹ



저게 아직도 농땡이네

→ 저게 아직도 노네

→ 저게 아직도 노닥거리네

《금현진·손정혜·이우일-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사회평론,2012) 122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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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13


 준비 땅


  요즈음은 ‘요이 땅(ようい どん)’ 같은 일본말을 함부로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준비(準備) 땅’으로 고쳐서 쓰니까요. 그렇지만, ‘준비 땅’이라는 말마디도 아직 한국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일본말 ‘요이’를 일본사람이 즐겨쓰는 한자말 ‘준비’로 바꾸기만 했을 뿐이니까요.


  일본사람은 총소리를 ‘땅’으로 적습니다. 한국사람은 총소리를 ‘탕’으로 적지요. 일본 사회나 학교에서 운동회나 경기나 대회를 하면서 총을 쏘며 퍼진 말투인 “요이 땅(준비 땅)”인데요, 막상 육상 경기를 지켜보면, 몸짓을 세 번으로 나눕니다. “준비이이, 땅!”이라 하지 않고, “하나, 둘, 셋!”이라 합니다.


  달리기를 하는 자리에서 숫자를 셋 세면서 함께 첫발을 뗀다면, 한국말로는 “하나 둘 셋”이라 하면 딱 어울립니다. 숫자를 셋 세지 않고 둘만 센다면, “자, 가자”라든지 “자, 달려”라 할 수 있어요.


  한국말에서 ‘자’라고 하는 느낌씨는 여러 사람 눈길이나 마음을 모으는 노릇을 합니다. “자, 이제 가 볼까”라든지 “자, 오늘은 이만 마치지요”라든지 “자, 기다려 보라고”라든지 “자, 요놈 보게나”처럼 써요.


  그런데 사람들이 입으로는 으레 ‘자’를 써도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문학에서는 좀처럼 ‘자’라는 말을 못 쓰는 듯합니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어른이라면, 또 어린이가 읽을 글을 쓰는 어른이라면, 어린이가 말을 슬기롭게 배워서 아름답게 쓰도록 한국말을 좀 찬찬히 살피고 생각해서 알맞게 써야지 싶습니다. 4348.10.24.흙.ㅅㄴㄹ



내가 태어날 때도 “준비 땅” 하고 수억 마리 정자가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요

→ 내가 태어날 때도 “자 달려” 하고 수억 마리 정자가 달리기를 겨루었는데요

《박상우-불량 꽃게》(문학동네,2008) 44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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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12


 지나침이 없다


  배가 고플 적에는 “배고파” 하고 말해요. 배가 안 고플 적에는 “배 안 고파”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배고픔이 있어”나 “배고픔이 없어”처럼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나옵니다. 말결을 그대로 살려서 쓰지 않고 일부러 이름씨꼴로 바꾸어서 쓰는 셈입니다.


  입으로 말을 할 적에는 이름씨꼴이 잘 안 나옵니다. 입으로 말을 하지 않고 글부터 먼저 쓰고서 이 글을 읽느라 “만사에 지나침이 없도록 하자”나 “모자람이 없습니다” 같은 말투가 차츰 퍼집니다. “모든 일을 지나치지 않게 하자”나 “모자라지 않습니다”처럼 부드럽게 쓰던 말투를 어느새 잊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같은 말은 그야말로 먼저 글을 쓴 뒤에 줄줄이 읽는 말투입니다. 아마 글을 쓸 적에는 이처럼 이름씨꼴로 맞추어야 더 힘주어 말하는 듯 여길 만하겠지요. 그런데 말에는 알맹이가 있어야 참다이 힘이 있습니다. 말꼴만 이름씨로 바꾼다고 해서 힘이 생기지 않아요.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만지작거리는 글투나 말투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처럼 글을 쓰고 말을 해야지요.


  “망설임이 없다”가 아니라 “망설이지 않다”입니다. “설렘이 없다”가 아니라 “설레지 않다”입니다. 다만, ‘두려움’이나 ‘웃음’은 이름씨꼴로 오래도록 썼기에 “두려운 줄 모른다”, “웃지 않는다”뿐 아니라 “두려움이 없다”, “웃음이 없다”처럼 써도 그리 낯설거나 어설프지 않아요. 그렇다고 “졸음이 없다”나 “기다림이 없이 가다”나 “머무름을 안 하고 바로 떠나다”처럼 쓸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말투도 언젠가 쓸 수 있는 날이 다가올는지 모릅니다만, 모든 말투를 억지스레 이름씨꼴로 맞추어야 하지 않습니다. ‘떨림’이나 ‘새로움’이나 ‘느림’이나 ‘사랑스러움’처럼 차근차근 새 낱말을 빚을 만합니다. 새 낱말을 빚는 까닭은 생각을 넓히면서 삶을 북돋우려는 뜻입니다. 4348.10.23.쇠.ㅅㄴㄹ



기계는 공동체의 파괴자라고 표현해도 지나침이 없다

→ 기계는 공동체를 파괴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 기계는 두레를 무너뜨린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스콧 새비지 엮음/강경이 옮김-그들이 사는 마을》(느린걸음,2015) 242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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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11


 나의 사랑 너의 눈물


  어린이가 읽는 글을 쓰는 사람은 글투를 가다듬으려고 더 마음을 기울입니다. 어른이 읽는 글을 쓰는 사람도 글투를 가다듬기는 하지만, 이보다는 글멋을 부리는 데에 더 마음을 기울입니다.


  어린이가 읽는 글에 아무 낱말이나 함부로 넣는 어른도 더러 있을 테지만, 어린이가 읽는 글을 엮어서 책을 펴내는 어른이라면, 낱말 하나와 토씨 하나까지 꼼꼼히 살피기 마련입니다. 어린이는 글이나 책을 읽으면서도 ‘한국말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글이나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할까요? 어린이가 글이나 책으로도 말을 배우듯이, 어른도 글이나 책으로도 말을 배울까요? 아니면, 어른은 글이나 책에 깃든 줄거리만 받아들일까요?


  어린이는 글 한 줄이나 책 한 권을 놓고도 말을 깊고 넓게 배웁니다. 어른은 이녁 스스로 못 느낄 테지만 어른도 글 한 줄이나 책 한 권을 놓고 시나브로 말을 깊고 넓게 배웁니다. 어른도 글이나 책으로 읽는 ‘글 한 줄’이나 ‘말 한 마디’가 머리와 마음에 아로새겨져요. 그래서 나중에 ‘글이나 책에서 읽은 낱말’이 문득 튀어나오기 마련이에요.


  글을 쓰는 어른이 ‘어른만 읽는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어른도 말을 늘 새롭게 배우는 사람인 줄 헤아린다면 아무 글이나 섣불리 쓰지 않으리라 봅니다. 글을 쓰는 어른이 ‘어린이가 함께 읽는 글’을 쓰려 한다면, 아무래도 어린이 눈높이를 더 헤아릴 테고 ‘어린이가 새롭게 배울 한국말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다루는 사랑’을 담으려고 마음을 쏟을 테지요.


  한국말은 “내 사랑 네 눈물”입니다. 한국말은 “우리 사랑 너희 눈물”입니다. 겉으로는 한글이지만, 속으로는 한국말이 아닌 ‘나의’요 ‘너의’이며 ‘저의’이고 ‘우리의’입니다. ‘나의·너의’를 쓰기에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내·네’를 슬기롭게 쓰면서 문학을 꽃피우는 고운 넋을 그려 봅니다. 4348.10.20.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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