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용 책? 초등 용 명작도서?



  어느 나라에서나 ‘어린이 용’이나 ‘초등 용’이나 ‘청소년 용’ 같은 이름을 앞에 붙이는 책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런 이름이 붙는 책이 좀 지나치도록 많다고 느낍니다. 어른문학을 간추리거나 손질해서 ‘초등학생도 읽는’ 이런저런 세계문학이나 명작소설이 꽤 많이 자주 나오는구나 싶어요. 어린이한테는 걸맞지 않다 싶거나 어렵구나 싶은 대목을 덜거나 자르는 ‘어린이 용’인 셈일 텐데, 처음부터 ‘문학’을 쓴 어른이 따로 ‘어린이 용’으로 글을 고쳤을까요? 아니면 한국에 있는 출판사 편집자가 ‘문학을 요리조리 손질하거나 고쳐’서 선보이는 ‘어린이 용’일까요?


  쥘 베른이나 허먼 멜빌이나 찰스 디킨스를 구태여 ‘어린이 용’으로 손질해서 어린이한테 읽혀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이 문학을 혼자 스스로 읽기 어렵다면, 앞으로 어린이가 이 문학을 혼자 스스로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이 문학을 어린이한테 건네지 않아야 할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문학을 구태여 어린이한테 주어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린이가 기쁘게 알아들으면서 재미나게 읽을 책’이 대단히 많아요. 아이가 책읽기를 즐겁게 누리도록 곁에서 돕거나 이끌 마음이라면, 처음부터 어린이 눈높이하고 숨결을 헤아린 글(문학)을 어버이부터 즐겁게 읽은 뒤에 이 글(문학)을 아이한테 사랑으로 건넬 일이라고 느낍니다. ‘어린이 용’ 책을 아이한테 주지 말고, ‘어린이도 어른도 함께 읽는 책’을 아이하고 함께 읽을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말괄량이 삐삐’ 이야기는 처음부터 어린이 눈높이로 썼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른 용’으로 고쳐서 어른한테 읽히지 않습니다. 수많은 아름다운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문학이면서 어른도 마음에 기쁨이 샘솟도록 북돋우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문학을 ‘어른 용’으로 고치기에 어른이 어린이문학을 읽지 않습니다.


  어른도 어른 스스로 배우고 생각을 넓혀야 비로소 어린이문학을 기쁨으로 읽을 수 있어요. 어린이는 어린이 스스로 새롭게 배우고 생각을 넓히면서 차근차근 어른문학도 기쁨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한테 ‘어린이 용 간추린 책’을 건네려 하지 마셔요. 어린이한테는 ‘어린이 용 간추린 책’이 아니라 ‘아름다운 어린이문학’을 건네 주시기를 바라요. 함께 아름다운 이야기를 누리기를 바라요. 2016.3.20.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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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을 함께 읽는 아버지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나는 어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어린이책이 즐거우니 이 책을 읽습니다. 만화책을 읽거나 시집을 읽는다면 만화책이나 시집이 즐겁기 때문일 테지요. 소설책이 즐거운 사람은 소설책을 읽듯이, 나는 어린이책이 즐거우니까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나로서는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살려는 하루이기에 어린이책을 읽는다고 할 만합니다. 어린이다운 마음을 어른으로서도 고이 다스리고 싶어서 어린이책을 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은 어른이되 마음은 늘 어린이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싶기에 어린이책을 읽는다고 할 테지요. 우리 살림집에서 두 아이를 건사하는 나날이기도 해서 어린이책을 읽지만, 스스로 어린이다운 꿈과 사랑을 한결같이 다스리고 싶어서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내 어린 날을 문득 돌아보니, 내가 어릴 적에는 내 곁에서 ‘어린이책을 읽는 어른’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린이책을 읽는 어른’은 좀처럼 못 보았습니다. 어른들은 ‘어린이책을 안 읽으’니까 우리한테 ‘어떤 어린이책을 읽히면 아름다운가’를 거의 알지 못했지 싶습니다. 추천도서 목록이나 명작도서 목록은 뽑아서 읽히려 하고 독후감 숙제를 내라 했으나, 막상 어린이책을 어린이가 읽으면서 어느 대목에서 기쁨을 누릴 만한가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글씨가 큼직하거나 그림을 많이 곁들여야 어린이책이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그림 하나 없거나 글씨가 잘아도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어린이책에 사로잡힙니다. 글꼴이나 그림은 크게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재미없이 글꼴을 키우고 그림만 많이 넣는다면, 이런 어린이책은 아이들이 한 번쯤 손을 댄 뒤에는 다시 건드리지 않기 마련입니다. 글씨가 잘고 그림이 없더라도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아이들은 책이 낡고 닳도록 다시 읽고 거듭 읽기 마련이에요.


  두고두고 깨끗하게 모셔 둘 책이 아니라, 그야말로 종이가 너덜너덜 낡고 닳을 만한 어린이책을 즐겁게 찾아서 읽습니다. 이 책 하나를 곁에 두면서 마음을 살찌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 하나를 발판으로 삼아서 마음에 사랑을 가득 가꾸는 길을 엿볼 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찾고 꿈을 그리면서 살림을 웃음꽃으로 일구는 슬기로운 어른으로 살고자 오늘도 신나게 어린이책을 두 손에 곱게 쥐면서 찬찬히 읽습니다. 2016.3.18.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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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그림책



  괴물이나 공룡을 다룬 그림책이 참 많아요. 왜 이렇게 아이들은 괴물이나 공룡을 좋아하나 하고 돌아보면, 나도 어릴 적에 이런 그림책을 곧잘 보았습니다. 괴물이나 공룡이 잔뜩 나오는 그림책이나 만화책이나 영화를 보다가 밤에 무서워서 오줌 누러 나오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쩐지 자꾸 이런 이야기에 눈길이 갑니다.


  어른이 된 오늘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흔한 말로 ‘괴물’이라고 해도, 눈을 감고 바라보면 얼굴이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만날 수 있어요. 괴물이나 공룡으로 드러나는 목숨은 겉모습 아닌 속마음으로 마주할 적에는 그저 우리 이웃이요 동무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괴물이라고 느낀다면, 내 눈에 괴물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속에 괴물만 가득하기 때문이지요. 바로 내가 스스로 괴물이라는 넋이 되었기에, 다른 괴물을 찾거나 느낀다고 할까요. 또는 내가 괴물이나 공룡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에 괴물 그림책이나 공룡 그림책을 찾는 셈이요, 괴물 그림책이나 공룡 그림책으로 마음을 달래기도 합니다.


  덩치가 크다거나 생김새가 무시무시하다고 해서 괴물이나 공룡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덩치가 작거나 생김새가 귀여워도 괴물 짓이나 공룡 놀음을 할 수 있어요. 겉모습 때문에 괴물이나 공룡이 되지 않아요. 속마음 때문에 괴물이나 공룡이 되지요. 다시 말하자면, 우리 어른이나 어버이가 아이들 앞에서 괴물 짓이나 공룡 짓을 일삼기 때문에 아이들은 괴물 그림책이나 공룡 그림책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괴물인 어른하고 함께 살아야 하니까, 공룡인 어버이하고 같이 지내야 하니까, 아이들도 괴물이나 공룡 노릇을 해야 할 테지요.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없는 문명사회를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골목이나 학교 앞에서도 자동차는 거침없이 달리기만 해요. 도시에서 사는 아이들은 학원을 으레 여러 군데를 다녀야 해요. 중학교 문턱에 이르면 놀이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오직 입시지옥으로 내달려야 해요. 아이들은 이 모든 사회 얼거리를 온마음과 온몸으로 느껴요. 그러니, 아이들이 마음을 달래려고 괴물이나 공룡을 찾을 수밖에 없구나 싶기도 합니다.


  윌리엄 스타이그 님은 《엉망진창 섬》이나 《슈렉》 같은 그림책을 그렸어요. 두 그림책을 보면 괴물이나 공룡이 잔뜩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책에 나오는 괴물이나 공룡은 그리 안 무섭다고 느낍니다. 저만 안 무섭다고 느낄는지 모르겠는데, 이 그림책에 나오는 괴물이나 공룡이 ‘어떤 마음씨’인가를 살핀다면 이야기가 사뭇 달라져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를 어떤 마음씨로 바라보는가요? 우리 어버이들은 아이를 어떤 마음결로 마주하는가요? 괴물 그림책에서 괴물이 참말 괴물인지 아닌지 곰곰이 되돌아봅니다. 2016.3.14.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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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으로서 그림책 읽기



  예쁜 그림책은 우리 가슴속에 있는 고운 빛을 살려 주는구나 싶어요. 어린이는 그림책을 읽으면서 가슴속에서 고운 빛이 자라는구나 하고 문득 느끼거나 시나브로 깨달으리라 봅니다. 어른도 그림책을 읽으면서 마음속에서 고운 숨결이 샘솟는구나 하고 문득 알아차리거나 시나브로 배우리라 봅니다.


  《와일드 보이》라는 그림책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숲에서 숲에서 태어난 뒤로 혼자 살아가는데, 이 숲아이는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습니다. 숲에서는 외로울 틈이 없기도 하지만 날마다 새로운 일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픔을 알다가 배부른 기쁨을 배웁니다. 무서움을 느끼다가 무서움을 떨치는 길을 스스로 배웁니다. 이러던 아이는 그만 사냥꾼한테 사로잡혀서 도시에서 실험 대상이 되었고, 실험 가치가 없다고 내팽개쳐지면서 더욱 슬픈 나날을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이 숲아이를 건사한 과학자 한 사람이 숲아이를 다른 과학자하고 달리 따스하게 보살피려고 했다는데, 막상 그 과학자도 이 아이를 지켜본 실험보고서를 쓸 뿐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빚은 그림책을 읽으면서 ‘사람과 삶과 아이’를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이를 어떻게 보살필 마음일까요? 과학자 자리에 서는 어른이라면 숲아이가 되든 도시아이가 되든 실험 대상이나 연구 대상으로만 바라보아도 될까요? 회사나 공장이나 일터에서 바쁘기 때문에 어버이 자리에 선 어른들은 집밖에서 돈 버는 일에만 바빠도 될까요?


  나라에서는 보육시설이나 교육시설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나라에서 보육시설이나 교육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어도 우리는 우리 보금자리에서 우리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꿈으로 가르치며 노래로 즐겁게 놀 수 있는 살림이어야지 싶어요. 무엇보다도 어른이자 어버이로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으면서 가르칠 수 있는 삶을 지어야지 싶습니다.


  어른으로서 그림책을 읽는다고 할 적에는, 우리 아이들하고 읽을 그림책을 ‘전문가 추천’에 맡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아이들하고 읽을 그림책이니 어른이자 어버이인 내가 스스로 하나하나 챙기고 살피고 읽은 뒤에 아이한테 건넵니다. 우리 아이들이 마음밥으로 삼을 그림책이니 어른이자 어버이인 내가 손수 찬찬히 돌아보고 따지고 느낀 뒤에 아이하고 함께 누립니다. 그리고, 그림책을 때때로 덮은 뒤에 종이랑 연필이랑 크레파스를 꺼내어 아이하고 함께 그림을 그리지요. 우리 살림을 북돋울 우리 그림을 그려요. 아이하고 어버이가 함께 지을 삶을 꿈꾸면서 우리 그림을 새롭게 그립니다.


  어른으로서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이 아름다운 사랑을 배우도록 이끄는 즐거운 그림책을 어른으로서 꼼꼼히 살핍니다. 아이들이 따사로운 살림을 가꾸도록 돕는 신나는 그림책을 어른으로서 바지런히 헤아립니다. 2016.3.14.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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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읽을 시



  아름다운 손길로 노래를 부르듯이 쓴 시 한 줄은 삶을 곱게 빛내는 이야기가 되리라 느낍니다. 아이와 함께 읽을 시라면, 동시이든 어른시이든, 참으로 아이와 함께 읽을 시라면, 우리가 이 삶을 아름다운 손길로 아름답게 가꾸려는 마음이 되어서 쓴 시일 때에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멋진 문학이나 훌륭한 예술이 되려고 쓰는 시가 아니라, 마음 가득 기쁨이 우러나오면서 쓰는 시일 때에 아이하고 함께 읽고 듣고 새기고 나눌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을 두고 시인이라 하는데, 시인은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나와야 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시집을 내야 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이름난 어떤 시인한테서 시를 배워야 되지 않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되면서 이야기를 글 한 줄에 여밀 수 있으면 누구나 시인이 되리라 느낍니다. 살림을 사랑스레 짓는 손길이 되면서 이야기를 글 두 줄에 담을 수 있으면 서로서로 시인이 되리라 느낍니다. 이웃하고 동무를 따스히 아끼고 너그러이 품을 줄 아는 몸짓이 되면서 이야기를 글 석 줄에 옮길 수 있으면 저마다 어여쁜 시인이 되리라 느낍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 누구나 시인이라고 느껴요.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아이한테 자장노래도 불러 주고 놀이노래도 불러 주지요. 아이한테 모든 말을 새롭게 들려주고 가르치지요. 아이한테 맛난 밥을 차려 주고, 아이가 깨끗하며 고운 옷을 입도록 해 주지요. 이 모든 ‘아이돌봄 손길과 살림’에서 즐거운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올 테니, 아이하고 지내는 하루를 가만히 돌아보면서 수수하게 글로 옮기면, 참말 모두 시가 되리라 생각해요.


  어느 모로 본다면, 아이와 함께 읽을 시란 ‘아이와 함께 가꾸는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할 만합니다. 아이와 함께 읽을 시란 ‘아이와 함께 짓는 살림’처럼 ‘아이와 함께 쓰는 시’라고 할 만해요. 책상에 공책을 펴고 아이하고 나란히 둘러앉아서 함께 글을 써 봐요. 함께 시를 쓰고, 함께 시를 읽으며, 이 시를 벽에 붙여서 함께 노래처럼 불러요. 2016.3.12.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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