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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와 빨래와 책읽기


 - 1 -

 아기가 8월 16일에 태어났습니다. 한가위 명절인 오늘은 9월 14일. 한 달이 서른 날이기도 하고 서른한 날이기도 하니, 오늘은 아기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는 갓 태어난 아기, 갓난아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명절에 어디로 가지 못합니다. 아니,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옆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전거는 잘 타지만, 제 자전거 짐수레에는 아이만 둘 태울 수 있지 어른은 태울 수 없습니다. 옆지기만 시외버스를 타고 부모님 댁에 찾아갈 수 있을 터이나, 옆지기는 집이 아닌 병원에서 아이를 낳게 되면서 회음부를 자르는 바람에 몸이 많이 다치고 아파서 자리에 앉지도 못합니다. 서기는 하되 걷기도 힘들고 앉기도 힘든데 시외버스에서 자리를 얻어 앉는다고 하여도 두 시간 넘는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제가 자가용을 몰 줄 알고, 자가용을 끌고 간다고 해도 못 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세 식구는 한가위 명절을 우리 살림집에서 조용하게 보냅니다. 집에 텔레비전을 들여놓지 않고 사니까 텔레비전을 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집에 텔레비전이 있었다 한들 들여다볼 틈이 없습니다. 아기를 낳아 길러 본 분이라면 누구나 알 테지만, 갓난아기를 돌보는 데에는 하루 스물네 시간 꼬박 옆에 붙어서 아기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어디 텔레비전에 눈이 갑니까. 더구나, 갓난아기한테 텔레비전 전자파를 쏘이게 하면 안 되지요.

 두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먹어야 하는 아기는, 시간마다 옆지기와 나란히 누워서 젖을 빱니다. 이동안 저는 씻는방에서 아기 기저귀와 옆지기 기저귀와 우리 옷가지를 빱니다. 오늘은 아기와 옆지기가 덮는 담요까지 석 장 빨아냅니다.

 손빨래는 제가 혼자 살림을 하던 1995년부터 이제까지 줄곧 이어왔습니다. 여태껏 모든 빨래는 손빨래로 너끈히 해냈고 이불빨래든 뭐든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기 기저귀 빨래 앞에서는 두 손을 듭니다. 청바지를 한 날에 여러 장 빨았어도, 추운 겨울날 군대에서 얼음물로 야상을 빨았어도 아프지 않던 손바닥이요 손가락인데, 기저귀 빨래 한 달 만에 손가락 마디마디 저리지 않은 데가 없고, 팔뚝과 어깨죽지까지 몹시 결립니다. 씻는방 바닥에서 비빔질을 하는데 이거야 원,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억지로 억지로, 온몸을 던져서 겨우 비빕니다.

 엊그제부터 손가락이 다시 아픕니다. 기저귀 빨래 며칠 만에 손가락과 손바닥이 아프더니 새 굳은살이 돋았는데, 이번에는 세 번째로 아픔이 찾아오면서 세 번째로 새로운 굳은살이 손가락 마디마디와 손바닥에 배입니다. 맨손으로 온갖 일을 하고, 책을 수만 권 나르고, 자전거를 열 몇 시간을 타면서도 이렇게까지 굳은살이 박인 적이 없습니다. 신문딸배를 하면서도 이렇게 굳은살이 박이지 않았습니다. 새 목숨을 부여받고 태어난 아기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지아비한테 이런 어마어마한 빨래감을 선사하면서 ‘여태까지 해 온 빨래는 웃음거리밖에 아녀라. 내 기저귀 빨래쯤 치러내야 참 빨래지.’ 하고 깨우쳐 주는 듯합니다.





 - 2 -

 아기 기저귀를 빨면서 어머니와 아버지 생각을 새삼스레 합니다. 나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꼭 여쭐 생각인데, 우리 아버지가 우리 형이나 내 기저귀를 손빨래로 빨아 주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집에 세탁기를 들인 때는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가운데 무렵. 그러니까 그때까지 우리 집은 손빨래만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떠올리기로는, 집안 빨래는 모두 어머니가 하셨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고 떠오르는 모습 가운데 하나는 제 국민학교 때 본 우리 어머니 손입니다. 그때 저는 열 살 남짓이었고 어머니는 서른 가운데무렵이었지 싶은데, 그때 제 생각으로는 어머니가 나이가 참 ‘많았’습니다. 제 또래동무들 어머님이 퍽 젊었기에 우리 어머니는 서른 가운데무렵밖에 안 되었어도 나이가 많다고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저러나, 그때 우리 어머니 나이는 지금 제 나이와 얼추 비슷했을 텐데, 어머니 손은 아주 누랬습니다. 핏기를 찾아볼 수 없도록 누랬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손은 왜 이렇게 누래?” 하고 여쭈었습니다. 어머니는 다른 말씀이 없이 쓴웃음인지 빙긋웃음인지 웃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어머니 나이쯤 되면 우리 어머니 손 빛깔에 담긴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까?’

 올해 나이 서른넷. 아기가 백 일이 지나고 며칠 있으면 서른다섯. 날마다 하루 1/4쯤 빨래하는 데에 들이면서 제 손은 지난날 우리 어머니 손마냥 거칠고 누런 빛을 띄면서 굳은살이 몇 겹으로 박입니다. 자잘한 생채기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칼질을 하며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비비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아기 낳기 앞서까지는 날마다 방바닥을 걸레질로 훔쳤는데, 요사이는 방바닥 걸레질도 못합니다. 걸레질할 짬도 안 나지만, 힘도 없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 옛날, 내 어릴 적에 온갖 집안일을 다하시면서도 방바닥을 꼬박꼬박 날마다 걸레질을 하면서 훔치셨다고. 그러는 가운데 바람이 들어 자리에 누워 꼼짝을 못하는 할아버지 똥오줌 받아내기에다가 수발까지 다 하셨고.





 - 3 -

 아침나절, 아기가 죽어라 울어댑니다. 왜 우는지는 우리 두 사람이 알 길이 없습니다. 하두 똥을 지려서 똥구멍이 아파 우는지, 날이 많이 더워 우는지, 동네 공기가 나빠(동네에 공장이 많고 차도 많으니) 코가 막혀 우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아기를 씻기는 동안, 아기가 배고파서 울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두 시간에 한 번 젖을 먹는 아기이지만, 꼭 두 시간 만이 아닌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 만에도 젖을 먹고 싶을 테니까요.

 낮나절, 아기는 아주 조용히 잠들어 있습니다. 두 시간이 지나도 깨지 않습니다. 하긴, 두 시간에 한 번 젖을 먹는다고 해서 꼭 두 시간을 맞추지는 않고, 세 시간에 한 번 먹기도 하니까요.

 옆지기는 아기 옆에서 책을 읽습니다. 모처럼 이루어진 평화로운 때, 책장을 가만가만 넘깁니다. 그러나 잠도 자야 할 텐데. 밤에 아기가 오줌이나 똥을 눈 다음 보채면 젖을 물려야 하는데,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면서 이렇게 책을 읽어도 되나.

 그러나 지아비 된 사람은 또 지아비 된 사람대로 낮나절에 잠들지 못합니다. 지아비 된 사람도 책을 펼치고 글을 몇 줄 끄적입니다. 그러다가는 밤 사이 밀린 기저귀 빨래를 해치웁니다. 다른 빨래도 확 해 버립니다.

 졸린 몸이었어도 이렇게 빨래를 해치우고 보면 졸음이 싹 달아납니다. 그러면서 보리술 생각이 납니다. 흘린 땀방울만큼 뭔가 속으로 집어넣고 싶습니다. 맨마음으로는 잠이 오지 않고, 보리술 한두 잔 몸속에 집어넣어야 달게 잠이 듭니다. 그렇게 한두 시간이나마 달게 잠을 자야 비로소 밤에도 아기하고 신나게 기저귀 다툼을 치를 수 있습니다.


.. 그러다가 2003년에 이라크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친구들은 온통 이라크에서 전쟁을 중단하자는 메시지를 대대적으로 보내 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매달려 있느라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고 있으며, 지구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써야 할 자원까지 고갈시키고 있다. 전쟁이 있는 곳에는 환경보호란 있을 수 없으며 파괴만이 있을 뿐이다. 기후변화 같은 중요한 문제와 산업계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정부는 국가 안보가 위협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며 국가 방위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 그러나 석유 같은 자원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정부의 책임인가? 석유회사의 책임인가? 군수산업체의 책임인가? 자동차회사의 책임인가? 자동차 판매상의 책임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의 책임인가? ..  《지구를 걸으며 나무를 심는 사람, 폴 콜먼》(그물코,2008) 282∼283쪽


 모든 빨래와 일거리를 끝낸(그러나 아주 잠깐 동안만 끝낸) 다음, 자전거를 타고 동네 구멍가게로 찾아가서 보리술 석 병을 사 옵니다. 몸을 씻고 나서 한 병씩 꺼내어 마십니다. 한 병씩 마시면서 책을 읽습니다. 아기는 깨어나지 않습니다. 싱긋 웃으면서 책장을 넘깁니다.


.. 병으로 괴로워하다 죽었기 때문에 실패한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병이 낫도록 그것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다면 낫지 않은 것은 사실상 실패가 될 것이다. 하지만 병을 그대로 인정하고 마지막을 신에게 맡기기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괴로움 속에서도 감사로 가득 찬 마음과 평온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고맙구나, 네가 내 아이라서…》(제이북,2003) 41쪽


 오늘은 모처럼 꽤 많이 읽습니다. 몸은 고되지만 아기가 이처럼 오래도록 조용히 잠든 때, 저나 옆지기나 퍽 오래 책읽기에 마음을 쏟을 수 있고, 저도 자전거를 타고 구멍가게 마실을 할 수 있으며, 잠깐이나마 밀린 일거리를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기가 오래도록 젖을 물지 않으니 옆지기는 젖이 불어서 괴롭습니다. 얼른 아기가 깨어나서 젖을 물어야 할 텐데 하면서 아픔을 참습니다. 잘 잠든 아기를 억지로 깨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보채도 걱정이지만, 보채지 않아도 걱정입니다. 그러나 이 아기는 누구를 닮았겠습니까. 지아비와 지어미를 닮았을 테지요. 그리고 지아비와 지어미가 살아가는 대로 물려받아서 자기도 그처럼 살아갈 테지요. 우리 두 사람이 우리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부대끼고 껴안느냐에 따라서, 이 아이도 제 나름대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부대끼고 껴안을 테지요.

 이제 저녁을 먹고 밤새워 새벽까지 아기하고 신나게 기저귀 다툼을 치를 때가 다가옵니다. 읽던 책을 모두 덮습니다. (4341.9.1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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