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경제신문에 싣는 '책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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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우리는 모두 이웃



  아침에 뒤꼍에서 감을 두 알 줍습니다. 나무에 달린 감을 딸 수도 있지만, 스스로 똑 떨어진 감을 주울 수도 있습니다. 흙바닥에 떨어진 감을 주으니, 한 알에는 개미가 열 마리 남짓 신나게 파먹고, 다른 한 알은 딱정벌레 두 마리가 바쁘게 파먹습니다. 어떻게 할까 하고 한동안 생각하다가 손으로 감알 살점을 떼어냅니다. 개미와 딱정벌레도 함께 먹을 감알이니까요.


  뒤꼍에서 난 커다란 호박을 한 덩이 잘라서 삶았습니다. 엊저녁에 남은 덩이에서 속을 파는데 꼬물꼬물 하얀 벌레가 여러 마리 보입니다. 이 벌레는 어떻게 호박덩이에 파고들었을까요. 호박 속을 조금 더 긁습니다. 다 긁은 속은 옆밭 귀퉁이로 던집니다. 호박벌레는 옆밭 귀퉁이 풀밭에서 남은 속을 더 먹다가 풀잎을 먹고 자랄까요. 아니면 흙으로 파고들어 조용히 겨울잠을 자려 할까요.


  만화를 그리는 이희재 님이 빚은 《낮은 풍경》(애니북스,2013)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낮은 풍경》은 만화책이라 할 수도 있고 그림책이라 할 수도 있으며 이야기책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나즈막한 곳에서 나즈막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이웃으로 만나서 그림 몇 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입니다.


  서울 광화문에 나들이를 가서 만난 수많은 이웃을 바라보던 이희재 님은 도란도란 어우러지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사람들은 모여서 떠들고 노래하고 토론의 순간을 즐겼다. 끼리끼리 노래 부르다 낯선 이들과도 거침없이 뒤섞였다. 한 자리에서 머물다 파도를 타듯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와 같은 말을 붙입니다. 그렇습니다. 너른 마당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입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모두 너른 마당에서 모입니다. 너른 마당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왁자지꼴 이야기잔치를 벌입니다. 막걸리 한 사발이 오가기도 하고, 밥 한 그릇이나 지짐이 하나 나누어 먹기도 합니다.


  너른 마당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놉니다. 너른 마당은 그야말로 너른 마당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이야기꽃이요 아이들은 놀이꽃입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는 어른들은 바닥에 펑퍼짐하게 주저앉습니다. 놀이꽃을 피우는 아이들은 온몸에 땀을 내면서 나무도 타고 흙바닥에 그림도 그립니다. 너른 마당이 있을 때에 삶에서 꽃이 피지 싶습니다. 삶꽃입니다.


  돈을 들여서 지을 공원이 아니라, 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는 흙바닥 너른 마당입니다. 자동차가 들어오지 않는 너른 마당입니다. 사람들이 두 다리로 오가는 너른 마당입니다. 들일을 쉬는 너른 마당이요, 도시에서 사람들이 숨을 돌리는 너른 마당입니다. 시원한 들바람을 쐬는 너른 마당이며, 도시에서 사람들이 자동차 배기가스와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날 만한 너른 마당입니다.


  이야기책 《낮은 풍경》을 읽으면 이야기가 조물조물 흐릅니다. 이희재 님은 서울에서 나즈막한 동네로 마실을 갑니다. 나즈막한 동네에서 나즈막한 집을 짓고 나즈막하게 살림을 꾸리는 이웃을 만납니다. 이러다가 또 그림을 그리고, “타향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곳은 삶의 터전이었고 고향이었다. 2009년 이래, 재개발을 하네 마네 하며 지축이 흔들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말이 춤을 추었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갔고, 남은 이들은 철거와 보상의 저울추 사이에서 불안과 싸웠다.”와 같은 말을 붙입니다.


  삶터가 일터입니다. 삶터가 놀이터입니다. 어른들은 삶터에서 일을 하고 사랑을 속삭입니다. 아이들은 삶터에서 놀이를 하고 사랑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습니다.


  돈을 벌어서 돈을 써야 할 삶이 아닙니다. 사랑을 지어서 이야기를 나눌 삶입니다. 돈만 많이 번대서 살림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경제개발이나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우리 삶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즐겁게 어우러질 삶이 되어야 살림이 나아집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하루가 될 때에 비로소 삶이 나아집니다.


  생각해 보셔요. 4대강사업 같은 끔찍한 막공사를 저지르면서 쏟아부은 돈이 얼마이고, 4대강사업으로 지은 시멘트 건물을 지키려고 들여야 할 돈이 얼마인가요. 처음부터 이런 돈을 세금으로 거두지 않았으면 사람들 살림살이는 넉넉했겠지요. 이만 한 돈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마을과 보금자리를 가꾸도록 도와주었으면, 정부가 따로 하는 일이 없어도 사람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레 하루를 일구겠지요. 더욱이 남녘과 북녘은 군사비로 지나치게 많은 돈을 쏟아붓습니다. 남녘은 남녘대로 ‘평화 지키기’를 외치면서 값비싼 전투기와 탱크와 미사일과 전함을 사들입니다. 북녘은 북녘대로 ‘평화 지키기’를 외치면서 온갖 전쟁무기를 스스로 큰돈 들여서 만듭니다. 남녘과 북녘이 서로 참다운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무기를 차츰 줄이거나 없애면서 참으로 평화로운 길을 걸어야 마땅합니다. 전쟁무기를 자꾸 늘리면 그예 전쟁으로 갈 뿐입니다. 전쟁무기를 줄여야 평화로 갑니다. 전쟁무기를 자꾸 늘리면 북녘뿐 아니라 남녘도 그 많은 전쟁무기를 사들이고 지키느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써야 하니, 나라살림이 와르르 무너질밖에 없어요.


  그림쟁이, 또는 만화쟁이, 또는 이야기쟁이 이희재 님은 “나는 둑길에 앉아 점심을 먹는 것도 잊고 장터의 풍정에 홀려 사람들을 그렸다.” 하고 말합니다. 저잣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살갑고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답구나 싶기에 그만 배고픔까지 잊은 채 그림을 그립니다.


  이 마음이 곱습니다. 이웃을 살갑고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답게 바라보는 이 마음이 곱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아이들이 해맑고 웃으면서 노래하거나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 배고픈 줄 모릅니다. 아이들은 서로서로 까르르 웃고 노래하면서 어울려 놀 때에 배고픈 줄 모릅니다. 한참 노는 아이들을 불러서 ‘얘, 배고프지 않니?’ 하고 물어야 아이는 비로소 ‘어, 배고프네.’ 하고 말합니다.


  삶을 가꾸거나 살림을 펴는 길은 먼 데에 없습니다. 삶을 북돋우거나 살림을 일구는 길은 가까운 데에 있습니다. 돈을 더 벌어야 삶이나 삶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과 살림에 사랑이 깃들어야 하루가 즐겁습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듯이, 어른들이 기쁘게 이야기꽃을 피우듯이, 우리는 저마다 즐거운 아름다움을 사랑스럽게 찾아서 누릴 때에 새로운 삶과 살림을 가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웃입니다. 이웃끼리는 밥 한 그릇을 즐겁게 나눌 뿐, 밥값을 받지 않습니다. 이웃끼리는 즐겁게 선물을 나눌 뿐, 선물값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지구별 이웃인 줄 느끼며 살아간다면,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과학도 교육도 슬기롭게 가다듬는 길을 열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4347.10.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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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경제신문에 싣는 책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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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내 동무는 어디에 있나



  우리 집 두 아이가 마당에서 놉니다. 우리 집은 시골집이기에 마당이 제법 있습니다. 그리 넓지는 않으나 두 아이가 놀기에는 이럭저럭 알맞습니다. 자전거를 탈 수 있고, 공을 찰 수 있으며, 잡기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마당 한쪽에 놓은 큰 고무대야에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나란히 들어갑니다. 여느 때에는 물을 받아서 물놀이를 했는데, 물이 없는 빈 고무대야에 두 아이가 쏙 들어갑니다. 이 모습을 보고는 옳거니 재미난 놀이가 하나 떠오릅니다. 고무대야에 앉은 두 아이 뒤로 살그마니 다가가서, 고무대야를 두 손으로 턱 집고는 슬슬 흔듭니다.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흔들 때마다 아이들이 웃으면서 소리를 칩니다.


  내 어릴 적을 돌아봅니다. 1980년대 첫무렵에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교실에서 걸상으로 말을 타듯이 놀았습니다. 동무들도 걸상으로 말타기를 했어요. 나무걸상에 거꾸로 앉아서 등받이를 손잡이로 삼아서 앞뒤로 흔들며 앞으로 똑딱똑딱 나아갑니다. 이러다가 어른한테 들키면 된통 꾸지람을 들을 뿐 아니라, 걸상을 머리 위로 치켜들면서 팔이 빠져라 땀을 빼야 합니다. 그렇지만 ‘나무걸상 말타기’는 더없이 재미난 놀이입니다.


  옛날부터 우리 겨레는 집집마다 마당을 두었습니다. 마당이 없는 집이란 없었습니다. 오늘날 도시는 사람이 너무 많아 땅밑에까지 방을 두고 옥탑에까지 집을 두어요. 사람이 알맞게 모여서 살기에는 어려우니 자꾸자꾸 땅밑으로 파고들거나 하늘로 높입니다. 땅밑에서 사는 사람은 햇볕을 쬐기 어렵고, 하늘 높이 올라가는 사람은 여름 땡볕과 겨울 찬바람에 고달픕니다. 게다가, 땅밑이건 하늘 높은 곳이건 마당을 못 누려요. 아니, 옥탑집이라면 옥상마당이 조금 있겠지요. 1층도 2층도 3층도 마당이란 없는 집이 되는 도시 얼거리입니다. 흙을 밟기 어렵고, 맨 땅바닥을 두 발로 디디기 어렵습니다.


  마당이 사라진 도시에서는 마당을 잊습니다. 마당이 있는 집은 아이들이 뛰노는 집이요, 어른들이 평상에 앉거나 돗자리를 깔아 어우러지는 집이었습니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텃밭과 꽃밭을 둡니다. 텃밭과 꽃밭 사이에는 나무를 심어 돌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나무를 심었고, 아이라면 누구나 ‘내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흐름을 모두 잊지요. 마당을 잊으며 텃밭과 꽃밭을 잊고, 나무를 잊으며, ‘내 나무’뿐 아니라 ‘이웃집 나무’와 ‘동무네 나무’를 모두 잊어요.


  어린이책 《내 친구 비차》(사계절,1993)를 읽습니다. 니콜라이 노소프라는 분이 쓴 러시아 어린이문학입니다. 러시아에서는 1951년에 처음 나왔다고 하는군요. 참으로 오래된 작품이라 할 만한데, 오늘날 한국 아이들한테 읽혀도 재미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험 문제를 풀다가 “괜히 복잡하게 써서 헷갈리게 해 놓고는, 깊이 생각을 하지 않아서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트집을 잡다니(12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아이가 문제를 못 풀어서 이렇게 말했을 수 있고, 참말 아이한테 너무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문제를 못 풀었다면, 아이가 더 깊이 생각했다면 풀 수 있는 문제였다는 뜻입니다. 아이한테 너무 어려웠다면, 학교는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는 곳인가 하고 되새길 노릇입니다.


  어린이책 《내 친구 비차》에 나오는 ‘비차’라는 아이는 꾀병을 부리면서 학교를 빠지는 동무한테 어느 날 “나는 오늘 너랑 마지막으로 얘기하러 온 거야. 만일 내일도 학교에 안 오면 올가 선생님한테 네가 여태까지 꾀병을 부렸다고 모두 말씀드릴 거야(209쪽).” 하고 말합니다. 동무네 어버이도, 두 아이를 맡은 담임 교사도, 다른 어른뿐 아니라 동무들도, 비차와 동무인 아이가 왜 꾀병을 부리는지 모르고, 얼마나 오래 꾀병을 부리면서 학교를 빠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모를까요. 왜 알려고 하지 않을까요. 왜 깊이 살피지 않으며, 왜 더 가까이 다가가서 ‘꾀병을 부릴 만큼 마음앓이 하는 아이’를 살가이 안지 못할까요.


  오늘날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어떻게 사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동무가 제대로 모르는 대목이 있으면 차분하면서 따뜻하게 잘 알려주는 아이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엇나가는 동무를 따뜻한 말로 타이르거나 너그러운 말로 감싸려고 하는 아이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집집마다 마당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마당이 사라져서 집집마다 아이들이 풀도 꽃도 나무도 못 보기 때문입니다. 마당이 사라진 집에서 아이들은 놀이를 잊고, 마당뿐 아니라 골목을 빼앗긴 아이들은 놀이를 못 합니다. 함께 어울려 놀지 못하는 아이들은 동무를 얼마나 아끼거나 돌볼 수 있을까요? 같이 어우러져 노는 하루를 못 누리는 아이들은 동무를 얼마나 사랑하거나 헤아릴 수 있을까요?


  어릴 적에 으레 나무타기를 하면서 놀던 아이는 나무를 아끼는 마음을 키웁니다. 어릴 적에 으레 풀을 베고 나물을 뜯어서 먹던 아이는 풀이 자라는 들과 숲을 아끼는 사랑을 키웁니다.


  내 동무는 어디에 있는가요. 내 동무는 누구인가요. 학교에서 옆자리에 앉은 아이는 동무인가요, 아니면 ‘시험성적을 겨루는 맞수’인가요. 옆자리에 앉은 아이뿐 아니라 같은 교실에 있는 다른 아이들은 살가운 동무인가요, 아니면 ‘내 시험성적을 높이려면 밟고 올라서야 할 맞수’인가요.


  예부터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이리 얼크러지고 저리 섞이면서 놀았습니다. 들을 달리고 숲을 가르며 냇물에 뛰어들고 모래밭에서 뒹굴었습니다. 씩씩하게 놀며 자란 아이들은 ‘어릴 적에 놀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싱그럽게 떠올립니다. 이와 달리, 어릴 적에 시험공부만 죽어라 하던 아이들은 어떤 시험문제를 풀었는지 도무지 떠올리지 못합니다. 시험공부는 시험을 치르면 모두 사라집니다. 시험성적도 시험을 치르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지요. 합격이나 불합격이라는 도장은 찍을 테지만, 이런 도장이 삶을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이 된 우리 모습을 돌아보셔요.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된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셔요. 어른인 우리가 아이들한테 “얘들아, 너희 어머니(아버지)가 어릴 적에 이렇게 시험을 잘 봤단다!” 하면서 성적표를 보여줘 보셔요. 아이들 눈망울이 어떠할까요? 그리고, 어른인 우리가 아이들한테 “얘들아, 너희 아버지(어머니)가 어릴 적에 이런 놀이를 하며 하루를 길게 보냈단다!” 하면서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놀아 보셔요. 두 가지 모습을 아이들한테 보여주면, 아이들은 어느 때에 따분해 하고, 어느 때에 눈망울을 빛내면서 까르르 웃을까요? 아이들은 어느 때에 어른들 말을 귀여겨들으면서 마음을 살찌울까요? 4347.9.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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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사랑하는 마음



  둘레를 살펴보면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랑을 다루는 문학이나 영화나 연속극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을 사랑대로 그리는 일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말하려는 사람들 가운데 참으로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란 살섞기가 아닙니다. 살을 섞는 일은 ‘살섞기’입니다. 돈을 바라보며 ‘정략 결혼’을 한 사람이 ‘그래도 너를 사랑했어’ 하고 말하는 연속극이나 영화나 문학이 참 많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나오는 사랑은 참말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속마음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읊는대서 사랑이 되지 않아요. 마음이 참다이 움직일 때에 사랑입니다. 마음이 곱게 흐르고, 마음이 착하면서 따스할 때에 사랑이에요.


  사랑이란 나와 네가 서로 아끼는 마음입니다. 사랑이란 나와 네가 서로 살뜰히 보살피면서 즐겁게 노래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이란 나와 네가 서로 그리면서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이란 나와 네가 서로 섬기면서 북돋우는 마음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가장 흔하면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까닭은, 바로 ‘사랑’이 삶을 살찌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삶이 빛나며, 사랑이 있어서 삶이 즐겁습니다. 사랑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신나게 몰면서 자라고, 사랑을 보듬으면서 어른들은 저마다 제 꿈을 찾아 씩씩하게 일합니다.


  학문을 할 때에도 참다운 사랑을 가슴에 품습니다. 참다운 사랑을 가슴에 품는 사람은 학문을 하면서 올바르게 섭니다. 참다운 사랑을 가슴에 품지 않는 사람은 이른바 관변학자가 되거나 사대주의에 사로잡히거나 일제강점기나 군사독재일 때에 부역을 하는 지식인이 되어요.


  과학을 하는 사람이 참다운 사랑을 안 품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때에는 과학이 과학 아닌 전쟁무기 만드는 끔찍한 길을 걸을 테지요. 유전자를 건드린 씨앗을 퍼뜨려 지구별 곡물재벌이 온 나라를 망가뜨리면서 환경재앙을 일으켜는 앞잡이 구실을 합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참다운 사랑을 품지 않을 때에는 사회를 어지럽힙니다. 뒤에서 검은 돈을 빼돌리는 짓을 합니다. 경제를 하는 사람은 어떠할까요. 참다운 사랑이 없이 경제를 한다면, 사회를 어떻게 일그러뜨릴까요.


  오자와 마리 님이 빚은 만화책 《은빛 숟가락》(학산문화사 펴냄)이 있습니다. 2014년 9월에 일본에서는 10권까지 나왔고, 한국에서는 6권까지 한국말로 나옵니다. 한국말 번역이 느려서 아쉬운데, 6권을 읽으면 앞선 다섯 권과 사뭇 다른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만화책에는 ‘리츠’라는 젊은 사내가 주인공인데, 이 젊은이는 ‘낳은 어머니’와 ‘기른 어머니’가 다릅니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낳은 어머니’가 있는 줄 처음 알아차립니다. 만화책 6권째에 이르러, 이 젊은이는 ‘낳은 어머니’가 궁금해서 찾아갑니다. ‘기른 어머니’는 더없이 따스한 사랑으로 품으면서 돌보았어요. 굳이 ‘낳은 어머니’를 찾아야 하지 않지만, 이 젊은이를 낳은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는지, 어떤 사랑이었을는지 궁금했어요. 아기였을 때 있었다는 위탁시설에 찾아가니, “성장한 당신이 본인 의지로 만나러 와 준 걸 안다면 분명 당신을 낳아 준 부모님도 기뻐하실 거예요(46쪽).”와 같은 말을 듣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눈물을 지어요.


  자, 이제 어떻게 할까요. 곧바로 ‘낳은 어머니’한테 찾아갈까요. 쉽지 않겠지요. 어느 날, 도시락을 싸서 대학교에 공부하러 간 날, 마침 낮에 말미가 납니다.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습니다. 문득 ‘낳은 어머니 주소’를 받은 일을 떠올립니다. 천천히 걸어서 그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 ‘낳은 어머니’가 사는 곳에서 ‘낳은 어머니’는 못 만나고, 아마 ‘낳은 어머니가 낳았구나 싶은 어린이’를 만납니다. 만화책 주인공인 젊은이는 “동생일지 모르는 이 어린 남자아이가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150∼151쪽).” 하고 속으로 말합니다. 젊은이를 낳은 어머니는 나중에 동생을 낳았는데, 이 아주머니는 동생인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요. 젊은이한테 동생인 아이는 집에서 고작 아이스크림 하나 얻어 먹습니다. 집에서 굶기 일쑤입니다. 마침 젊은이가 싼 도시락이 있어 ‘동생이로구나 싶은 아이’한테 건넵니다.


  ‘기른 어머니’와 ‘기른 어머니가 낳은 동생’이 있는 집으로 돌아온 저녁에, 젊은이는 마음이 몹시 무겁습니다. 저를 낳은 어머니하고 함께 살았다면 어떤 나날이었을까 싶으면서, 저를 기른 어머니가 두 동생하고 누리는 따사롭고 포근하면서 아름다운 삶이 즐거우면서 괴롭고 말아요.


  젊은이는 이튿날 다시 도시락을 쌉니다. 다섯 살짜리 어린이가 좋아하고 기뻐할 만한 도시락을 앙증맞게 쌉니다. 그러고는 이 도시락을 들고 ‘동생이로구나 싶은 아이’한테 찾아가서 건넵니다. ‘동생이로구나 싶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살며시 안으면서 마음속으로 다시 생각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엄마에게선 아이스크림 하나밖에 얻지 못한 이 아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지, 대체 뭘 할 수 있을지, 그것뿐이다(186쪽).”


  사랑은 언제나 따스합니다. 따스하지 않은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넉넉합니다. 넉넉하지 않은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즐겁지 않거나 웃음을 불러들이지 않거나 노래가 흐르지 않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이 대목을 헤아리면 돼요. 따스한가요? 넉넉한가요? 즐거운가요? 웃음이 피어나나요? 노래가 흐르나요?


  바닷속에 가라앉은 아이들은 몹시 아프고 슬픕니다. 이 아이들을 품을 수 있으려면 사랑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이런 이론도 저론 논평도 부질없습니다. 한국 정부가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려면 이 나라 시골마을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는 넋으로 맺어야 합니다. 돈이나 이익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사랑을 품지 않은 채 저질렀기에 4대강사업이 막나갔습니다. 사랑을 담지 않은 채 밀어붙이기에 밀양과 청도에서 송전탑 때문에 앓는 이웃이 많습니다. 사랑을 키우지 않으면서 때려짓기에 핵발전소가 크게 말썽거리가 됩니다. 지구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아이들과 숲과 이 땅과 우리 삶을 사랑한다면, 엉터리 짓이나 멍청한 일을 벌일 수 없어요. 부디 이 나라에 사랑이 흐르기를 빌어요. 아무쪼록 우리 스스로 사랑을 가꾸기를 빌어요. 4347.9.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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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가을이 찾아온 날



  예부터 한가위나 설은 ‘한가위’나 ‘설’이었습니다. 한가위나 설은 ‘귀성’이나 ‘역귀성’으로 가리키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한가위나 설은 한가위나 설이라기보다 ‘고단한 마실길’입니다. 너도 나도 자가용을 몰아 도시에서 시골로 찾아가는 길이니, 어디에서나 끔찍합니다. 아마 천만 대 즈음 될 자가용이 한꺼번에 도시를 빠져나가 시골로 간다 할 수 있을 테니, 생각으로만도 끔찍한 일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끔찍한 ‘귀성’이나 ‘역귀성’을 해야 할까요. 반가우면서 따사롭고 즐거운 한집이라면, 늙은 어버이를 시골에 외따로 두지 말고, 다 같이 큰집을 이루어 즐겁게 살 노릇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시에 살거나 시골에 살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잘게 쪼개진 집이 아닌 큰집을 이룰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곁에서 보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언제나 함께 어우러지는 집이면 됩니다. 회사 때문에 잘게 쪼개어질 수 없습니다. 돈 때문에 서로 갈라져서 살아야 하지 않습니다. 회사를 왜 다니고, 돈을 왜 벌까요. 우리가 저마다 이루고 싶은 뜻이나 꿈이란 무엇인가요. 어린 아이들하고 늙은 어버이는 동떨어진 채 무슨 뜻과 꿈을 이루려 하는가요.


  도시에서 숫자싸움만 하면서, 이를테면 경제개발과 성과와 성적을 내세운 숫자싸움을 하는 동안 이웃과 동무는 언제나 맞수가 됩니다. 남남입니다. 도시에서는 이웃과 동무가 없습니다. 겨루거나 다투면서 밟고 올라서야 할 맞수일 뿐입니다. 운동경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몸을 다스리면서 마음을 살찌운다는 운동경기라지만, 정작 모든 운동경기는 ‘이기고 지는’ 틀이 더 단단해집니다. 즐겁게 몸을 가꾸는 운동경기가 없습니다. 이웃과 동무를 아끼면서 서로 사랑하려는 운동경기가 아닙니다. 돈을 벌고 광고를 따는 스포츠만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도시와 달리, 이를테면 경제개발이나 성과와 성적을 내세우는 숫자싸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골은 젊은이와 어린이가 몽땅 도시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시골에 남은 늙은 어버이는 농약과 비료와 농기계와 비닐에 기댑니다. 일손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새마을운동 언저리에 이녁 아이들을 도시로 보내면서 학비를 대느라 ‘농협에 곡식과 열매를 팔아서 돈을 버는’ 틀에 갇혔습니다. 이제 시골마을 늙은 어버이가 낳은 아이들이 다 자라서 손자를 낳는데, 아직도 예전 틀에 얽매인 채 농약과 비료와 농기계와 비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굳이 돈을 더 만져야 하지 않으나, 즐거운 시골일이 못 됩니다. 애써 돈을 더 만들어야 하지 않는데, 땅을 망가뜨리거나 무너뜨리는 농약과 비료와 비닐을 끝없이 씁니다.


  도시에 있는 젊은 어버이들 곁에 늙은 어버이가 있다면, 이웃과 동무를 밟고 올라서서 돈만 바라는 틀이 누그러지리라 느낍니다. 늙은 어버이는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는 슬기로운 이야기를 젊은이한테 들려줄 수 있습니다. 시골에 있는 늙은 어버이들 곁에 젊은 딸아들이 있다면, 시골에서는 농약도 비료도 농기계도 비닐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가장 정갈하고 깨끗하며 싱그러운 남새와 열매와 곡식을 얻을 수 있어요. 시골집 사람들이 먹을 만큼 거두는 남새와 열매와 곡식이 되면, 손으로 얼마든지 심고 거둘 만합니다. 그런데, 시골에서는 작은 땅뙈기에 남새와 열매와 곡식을 거두어도 다 못 먹기 마련이에요. 아주 정갈하고 깨끗하게 키운 곡식과 남새는 도시에 있는 이웃한테 ‘농협 수매값’보다 훨씬 나은 값을 받으며 팔 수 있습니다. 몸도 살리고 마음도 가꾸며 돈까지 더 버는 길이 열립니다.


  서정홍 님 동시집 《닳지 않는 손》(우리교육,2008)을 조용히 읽습니다. 서정홍 님은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시골로 들어가서 흙을 만지는 흙지기가 되었습니다. 기름내 나던 손이 이제는 흙내 나는 손이 됩니다. 시골살이를 누리면서 아이들한테 시 한 줄 나누어 주는 어른이 매우 드뭅니다. 서정홍 님은 이 땅 아이들한테  흙내음과 풀내음과 숲내음을 들려줍니다.


  〈봄〉이라는 노래를 읽습니다. 어른시도 동시도 모두 노래입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노래를 책으로 읽는 셈입니다. “지난봄에도 올봄에도 / 창원대로에 벚꽃이 피었어요. // 한 해 내내 매연을 마시고도 / ‘야, 봄이다 봄이야!’ / 보란 듯이 벚꽃이 피었어요. // 자동차 매연도 / 봄한테는 이길 수 없나 봐요” 참말 그렇습니다. 도시 한복판에 나무가 꽤 있어요. 다만, 돈을 들여서 심은 나무입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자라는 나무는 몇 해 못 삽니다. 웬만한 나무는 천 해나 이천 해는 거뜬히 살지만, 도시는 끝없이 재개발을 하기 때문에, 서른 해나 쉰 해를 버티기 힘들어요. 도시에서 재개발을 하는 어른들은 시멘트집만 허물어 재개발을 하지 않습니다. 시멘트집 둘레에서 우람하게 자란 나무를 아무렇지 않게 뭉텅뭉텅 베어서 죽여요. 도시에서 자라는 나무는 모두 슬픈 삶이라 할 텐데, 그래도 봄이 되면 모든 나무가 곱게 꽃을 피워요. 고운 봄꽃으로 도시사람한테도 맑은 숨결을 베풀어요.


  경제지표로 따진다면, 봄꽃 한 송이는 ‘돈’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봄꽃 한 송이는 사람들 마음을 따스하게 덥힙니다. 봄꽃 한 송이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마음이 싱그럽게 열립니다. 해사하며 그윽한 기운이 온몸에 퍼집니다.


  공기청정기나 에어컨으로는 이런 기운을 주지 못합니다. 화장품이나 향수도 이 같은 숨결을 베풀지 못합니다. 오직 나무 한 그루가, 풀잎 하나가, 꽃송이 하나가, 씨앗 한 톨이, 사람들한테 맑고 깊게 스며듭니다.


  〈어떻게 살까〉라는 노래를 읽습니다. “나는 얼굴을 씻으면서 / ‘물을 아껴 써야지.’ / 이를 닦으면서 / ‘물을 아껴 써야지.’ / 이런 생각을 자꾸자꾸 하다가 / 겁이 덜컥 났습니다. // 이대로 수돗물이 안 나오면 / 도시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참말 그래요. 도시에서 수돗물이 끊기면 어떻게 될까요? 전기가 끊기면 어떻게 될까요? 가스가 끊기면 어떻게 될까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대목을 생각하나요? 그리고, 이웃나라에서 한국에 곡식과 남새와 열매를 팔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사람은 으레 ‘중국산은 먹지 말자’고 말하지만, ‘한국산만으로 한국사람이 먹고살 수 없’습니다. 시골이 와장창 무너졌고, 도시는 너무 뚱뚱하게 커졌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칠레와 베트남과 캐나다와 미국과 러시아와 다른 여러 나라에서 이것저것 사들여야 합니다. 하루라도 이웃나라에서 먹을거리를 사들이지 않는다면, 수돗물이 끊긴다면, 참말 도시에서는 어떤 삶을 이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도시 사회와 문명이란 무엇일까요? 시골에서는 수돗물이건 전기이건 가스이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도시는 뭐 하나라도 끊어지면 죽음과 같은 전쟁통이나 난장판입니다. 이 가을에 도시와 시골을 헤아려 봅니다. 한가위를 맞이하는 이 가을에 아름다운 삶과 사람과 사랑이란 무엇인지 헤아려 봅니다. 4347.9.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사람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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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호미와 연필을 들자



  한가위를 앞둔 늦여름 막바지에 비가 오래 많이 내렸습니다. 시골마을에는 이삭이 팰 무렵인데, 이즈음 내리는 큰비는 논이고 밭이고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이삭 패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비가 잦든 눈이 내리든, 도시에서는 으레 출·퇴근만 살필 뿐입니다. 방송국이 수없이 많이 있어 ‘교통방송’이 있을 뿐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교통방송을 듣지만, 막상 ‘시골방송’은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제도권 방송국에서 벗어나자는 ‘대안방송’이나 ‘동네방송’이 있으나, 시골에는 ‘마을방송’이 따로 없습니다.


  아무래도 도시에서는 사람이 많고 이야기가 많다 싶어 작은 동네에서도 방송국을 꾸릴 만하고, 작은 도시에서도 신문을 따로 낼 만합니다. 아무래도 시골에서는 사람이 적고 이야기가 적다 싶어 시골 군을 통틀어 신문 한 부 변변하게 나오기 힘들 만합니다.


  그러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다룰 이야기란 무엇일까요. 도시에 있는 방송국과 신문사는 어떤 이야기를 다룰까요. 도시에서 지내는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찾아 텔레비전을 켜거나 신문을 펼치거나 책을 쥘까요. 


  이삭 패는 이야기를 글로 쓰는 신문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벼꽃이 맺어 벼알이 맺는 동안 천천히 ‘벼 꽃대’가 차츰 기울어지면서 고개를 숙이는 이야기를 찍는 방송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날마다 늘 먹는 밥 한 그릇인데, 밥 한 그릇이 태어나는 얼거리나 흐름을 제대로 살피거나 알거나 깨닫는 도시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시골에 있는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도 ‘벼 한 살이’를 제대로 모르기 일쑤입니다. 교과서에서 안 다루니까요. 삶터가 시골이라 하더라도, 시골학교조차 교과서로만 가르치고, 시골살이를 이야기하지 않으니까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두 손에 한 가지씩 쥘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왼손에 호미를 쥡니다. 스스로 땅을 일구어 집을 짓고 밥과 옷을 얻는 바탕은 바로 ‘호미’입니다. 호미질부터 삶짓기가 태어납니다. 둘째, 오른손에 연필을 쥡니다. 스스로 하루를 그리면서 꿈을 짓습니다.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사랑할 때에 스스로 즐거운 나날인가를 연필로 그립니다. 삶을 지을 수 있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역사학자이면서 대학교 총장까지 지낸 일이 있는 강만길 님이 쓴 《역사가의 시간》(창비,2010)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강만길 님은 1933년에 태어났으며, 일제강점기와 해방 언저리와 한국전쟁을 두루 겪었습니다. 한국전쟁 동안에 부산에서 막일을 하며 살림돈을 벌다가, 전쟁이 끝날 즈음 대학생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 군대에 들어가 세 해 동안 지낸 이야기를 《역사가의 시간》에서 아주 덤덤하게 들려주다가, “속없는 사람들이 흔히 ‘남자는 군대에 가 봐야 된다’ 같은 말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방의무는 신성하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인간사회가 미개해서 전쟁이 문제해결의 최고수단이던 시대나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활개치던 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조직 중에 가장 비인간적인 것의 하나가 군대라는 생각이다(13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강만길 님은 남·북녘 푸르디푸른 젊은이가 한창 나이라 할 때에 저마다 총칼을 들고 살인훈련을 받으면서 썩어야 하는 일 때문에 남북 두 나라에 평화와 민주와 자유와 평등이 뿌리내리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는 군대에서 1995∼1997년을 보냈는데, 군대에서 하는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적을 만들어서 죽이는 훈련. 둘째, 사람을 신분과 계급으로 나누어 부속품처럼 부리거나 부려지는 훈련. 셋째, 내 마음에서 평화와 사랑을 지우는 훈련.


  앳된 스무 살 나이에 총칼을 손에 쥐는 젊은이는 무엇을 꿈꿀 만할까요. 앳된 스무 살 나이에 총칼을 손에 쥐고 이웃 군인을 두들겨패거나 괴롭히면서 거친 말을 일삼는 젊은이는 무엇을 사랑할 만할까요. 군대에서 일어난 폭력과 성추행(또는 성폭력)이 가끔 신문·방송에 큼지막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신문이고 방송이고 조그맣게나마 안 나오는 폭력과 성추행은 끔찍하게 많습니다. 군대에서 ‘의문사’로 죽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남·북녘 젊은이가 총칼이 아닌 호미와 연필을 두세 해 동안 쥘 수 있도록 하면 두 나라는 아주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군사훈련, 그러니까 살인훈련이 아니라, 시골에서 흙을 일구거나 가꾸어 스스로 밥을 짓는 삶을 배울 수 있다면, 스스로 바느질을 할 뿐 아니라, 길쌈과 물레잣기와 베틀밟기를 배워 옷을 짓는 삶을 익힐 수 있다면, 여기에 스스로 나무를 베고 깎고 다듬어 기둥을 세운 뒤 돌과 흙과 짚을 써서 손수 집을 짓는 삶을 나눌 수 있다면, 참말 이 나라에 제대로 된 아름다운 평화와 평등이 뿌리내어 자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강만길 님은 “대학총장 한 임기를 겪으면서 절실히 느낀 점은 모든 대학은 총장의 업무추진비를 비롯해서 재정 일체를 세목까지 철저히 공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44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대학총장이 업무추진비나 재정을 공개하지 않나 봐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는 이녁 업무추진비나 재정을 낱낱이 공개하지 않나 봐요. 마땅히 드러내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마땅히 드러내어야 할 테지요. 어느 공직에 있든, 이녁이 쓰는 돈은 바로 우리가 내는 돈, 세금에서 나오니까요. 돈을 뒤로 빼돌리라고 내는 세금이 아니라, 살림을 알차게 꾸리라면서 내는 세금이니까요.


  스무 살 앳된 젊은이뿐 아니라,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시장과 군수도 한 주에 한 차례 한나절 동안 호미를 손에 쥐어야 하리라 느낍니다. 또는 날마다 이른새벽이나 아침에 한 시간씩 호미를 손에 쥐어야 하리라 느낍니다. 텃밭을 일구든 꽃밭을 가꾸든 나무를 돌보든, 공직에 있는 누구나 손에 호미를 쥐고 흙을 만져야지 싶습니다. 그리고, 이들 손에 연필을 쥐어야지요. 날마다 일기를 쓰도록 해서 사람들이 이녁 일기를 읽을 수 있도록 해야지 싶어요. 날마다 그리는 꿈을 사람들이 읽도록 하고, 날마다 생각하며 나누는 사랑을 사람들이 알도록 해야지 싶어요.


  아파트를 짓든 공장을 짓든 학교를 짓든 회사를 짓든, 이곳에 깃드는 사람들이 손에 호미를 쥘 수 있도록 너른 땅을 두어야지 싶습니다. 주차장을 반드시 두도록 건물을 짓지 말고, 텃밭을 꼭 두도록 건물을 지어야지 싶어요. 초등학생도 대학생도 학교 수업뿐 아니라 ‘텃밭 수업’을 받으면서 제 밥을 손수 가꾸는 보람과 즐거움을 배우도록 해야지 싶습니다. 이러면서 날마다 일기를 쓰도록 해야지요. 쳇바퀴처럼 빙글빙글 제자리걸음을 하는 삶이 아닌, 날마다 새롭게 꿈꾸고 노래하는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해야지요. 평화를 바라면서. 자유와 민주를 꿈꾸면서. 사랑과 꿈을 그리면서. 4347.8.2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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