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도시사람도 흙을 짓기를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도시를 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울이나 부산처럼 커다란 도시에 나무가 한 그루조차 없다면, 서울사람이나 부산사람 모두 미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해마다 큰돈을 들여 ‘인공 냇물’인 청계천을 전기로 물을 퍼서 돌립니다. 이런 ‘인공 냇물’조차 없으면 서울사람은 그예 숨이 막혀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괴로운 까닭은 온통 시멘트와 쇠창살로 둘러싸인 곳에 갇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풀 한 포기 없고 나무 한 그루 없으며 흙 한 줌 만질 수 없는 데에서 하루 내내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옥에서는 하루에 다문 한 시간이든 십 분이든 재소자를 밖으로 내보내서 햇볕을 쬐게 하고 흙땅을 밟게 합니다. 이렇게 안 하면 재소자는 모두 미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학교마다 아스콘을 깔거나 인조잔디를 깔기 일쑤입니다. 아직 ‘흙 운동장’인 곳이 더러 있으나, 흙땅을 운동장으로 두는 학교는 아주 빠르게 사라집니다. 시골 면소재지에서조차 흙 운동장에 아스콘을 붓거나 인조잔디를 깝니다. 이렇게 하면, 학교에서 아이와 어른 모두 흙을 보거나 만지거나 밟을 일이 거의 사라집니다. 그나마 도시는 길바닥이 온통 아스팔트나 시멘트인데, 학교에서조차 흙을 못 보고 못 만지면, 그만 마음이 메마르거나 거칠거나 팍팍해지고 말아요. 지난날 학교는 콩나물시루 같았어도 10분 쉬거나 낮밥을 먹을 적에는 모두 흙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뛰놀면서 땀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 학교는 얼차려와 매질 따위로 아이들을 들볶았지만, 아이들은 틈틈이 바람을 쐬고 햇볕을 먹고 흙을 만지면서 다시금 기운을 차릴 수 있었어요.


  박창근 님과 이원영 님이 주고받은 이야기로 엮은 《4대강 사업과 토건 마피아》(철수와영희 펴냄,2014)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제 ‘4대강 사업’은 아주 끔찍한 짓이었다고 너나 모두 알아차립니다. 예전 이명박 대통령이 자그마치 22조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돈을 엉터리로 쏟아부었다고 모든 신문과 방송이 한목소리로 꾸짖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러한 사업을 벌이거나 밀어붙이던 지난날에는 이를 꾸짖는 목소리가 신문이나 방송을 타기 어려웠고, 공무원이나 건설회사뿐 아니라 숱한 지식인과 교수와 학자는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또다시 일본에서 대형 핵 재난이 발생했는데, 바로 옆 나라의 원전 전문가들은 탈핵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이 마치 사이비종교의 신자처럼 느껴진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7쪽).”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참말 한국에서는 ‘핵발전소를 멈추자’는 이야기가 잘 안 나옵니다. 핵발전소를 하루 빨리 멈추고, 제대로 된 깨끗하고 아름다운 전기를 쓰는 길을 열자는 이야기가 터지지 않습니다. 송전탑을 둘러싼 아픔과 슬픔도 가시지 않을 뿐 아니라, 송전탑을 안 박으면서 도시사람이 도시에서 손수 전기를 빚어서 쓰는 길을 찾는 일도 없습니다.


  핵발전소는 백 해나 이백 해 동안 돌리지 못합니다. 고작 쉰 해를 돌리지도 못합니다. 게다가, 핵발전소가 목숨을 다하면, 자그마치 십만 해이든 백만 해이든 방사능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 합니다. 고작 쉰 해조차 못 돌리는 발전소를 앞으로 십만 해 동안 ‘쓰레기더미’로 고이 지켜야 한다면, 이러한 일을 하느라 얼마나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제대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끔찍한 전기를 만들고 끔찍한 돈을 쓰면서 우리 삶터까지 끔찍하게 더럽히고 맙니다. 핵발전소와 맞물려 4대강 사업을 돌아보면 더 슬픕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4대강 사업만 하지 않았습니다. 《4대강 사업과 토건 마피아》를 읽으면, “부처별로 살펴보면 현재 국토부가 한 해에 1조 5000억 원, 환경부가 1조 원가량, 소방방재청이 8000억 정도를 하천사업에 씁니다. 국토부는 ‘고향의 강’ 사업, 생태하천 조성·복원 사업을 해요. 환경부는 생태하천 복원사업이고요(24쪽).”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4대강 사업이 아니어도 해마다 몇 조에 이르는 돈을 ‘시골 냇물을 시멘트로 덮었다가 다시 시멘트를 걷어내는 짓’을 되풀이하는 데에 씁니다. 마치 도시에서 길바닥 돌, 그러니까 보도블럭을 갈아치우느라 돈을 꽤 많이 쓰는 일하고 같아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도심지를 가로지르는 냇물’을 둘러싸고 냇바닥과 냇둑에 시멘트를 들이부었다가, 이제 이 시멘트를 걷어내면서 ‘친환경 생태하천’을 만든다고 법석이에요. 간추려 말하자면, 시멘트를 부으면서 토목회사와 공공기관이 돈을 벌고, 시멘트를 걷어내면서 토목회사와 공공기관이 다시 돈을 법니다.


  처음부터 냇물을 그대로 살리면 돈이 들어갈 일이 없습니다. 아니, 돈을 쓰더라도 제대로 올바르게 아름다운 자리에 쓸 수 있습니다. 냇바닥에 시멘트를 붓거나 시멘트를 걷어내느라 해마다 쓰는 돈이면,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까지 누구나 돈을 안 내고 다닐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이 살림돈에 쪼들리지 않도록 멋진 복지정책을 꾸릴 수 있습니다. 전국 도서관에서 책을 알차고 넉넉하게 갖추면서 멋진 책문화를 일굴 수 있습니다. 도시로 떠난 사람들이 다시 시골로 돌아가서 흙을 가꾸며 지내도록 넉넉히 도울 수 있습니다.


  도시에 사람들이 자꾸 몰리기에 더 전기를 많이 써야 하고, 더 자원을 많이 써야 하며, 더 시설투자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굳이 도시로 몰리지 않고 시골에서 지낼 수 있다면, 도시에서도 텃밭뿐 아니라 논을 지어서 밥을 손수 길러서 먹을 수 있다면, 외국에서 쌀이든 열매이든 남새이든 하나도 안 사들이면서 우리가 스스로 길러서 먹을 수 있다면, 이러한 사회에서 새롭게 빚는 ‘재산 값어치나 생산성이나 보람’은 참으로 높고 훌륭하리라 느낍니다.


  《4대강 사업과 토건 마피아》는 “우리가 현대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개개인의 삶 자체가 좀더 생태적이고 순환적인 형태로 변화해야 해요. 삶의 양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직접 농사를 짓는 일도 한 방법입니다. 농사는 생명을 기르고 키운다는 측면뿐만 아니라 자급자족의 삶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합니다(87쪽).”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전문 농사꾼’만 농사를 짓는 길이 아니라, 밥을 먹는 우리 누구나 텃밭과 논을 조금씩 마련해서 밥을 손수 길러서 먹는 길을 밝힙니다. 우리가 어디에서나 논밭을 가꾸면서 밥을 지어서 먹으면, 유기농 곡식을 찾느라 목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즐겁게 삶을 지으니 언제나 기쁘게 웃으며, 도시와 시골 모두 푸른 바람이 흘러 삶터와 보금자리가 아름답게 거듭납니다. 우리가 스스로 짓는 논밭이 바로 ‘공원’ 구실을 합니다. 우리가 가꾸는 흙이 푸른 바람을 일으키는 숲 노릇을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다 함께 눈을 다시 떠야지 싶습니다. 4347.11.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blog.aladin.co.kr/hbooks/720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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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글도 살펴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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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숲이 되려고 기다리는 씨앗



  밥 한 그릇은 벼라고 하는 풀이 맺은 열매이면서, 다시 벼라고 하는 풀이 돋도록 하는 씨앗입니다. 밥이란, 솥이나 냄비에 물을 붓고 쌀을 넣어 끓여서 얻는 먹을거리입니다. 쌀이 밥으로 바뀝니다. 쌀은 겨를 벗긴 벼입니다. 겨를 통째로 먹어도 되지만, 씹기에 한결 수월하도록 겨를 벗깁니다. 겨란 쌀알을 감싸는 껍질입니다. 쌀알에는 씨눈이 있고, 이 씨눈이 바로 새롭게 벼풀로 자라도록 이끄는 알맹이입니다.


  벼도 풀입니다. 벼에서 얻는 볍씨인 나락은 쌀알이면서 풀알입니다. 풀알이란 풀열매입니다. 풀열매를 먹는 우리들은 풀밥을 먹는 셈입니다. 풀밥을 먹으니 풀내음을 먹고, 풀숨을 받아들입니다.


  볍씨 한 톨은 새로운 볍씨를 백 알 즈음 내놓습니다. 이듬해에 새롭게 심어서 돌볼 씨앗을 남긴 뒤, 한 해 내내 즐겁게 쌀밥을 지어서 먹습니다.


  씨앗을 먹기에 목숨을 얻습니다. 새롭게 싹이 틀 수 있는 씨앗을 밥으로 지어서 먹기에 목숨을 잇습니다. 씨앗은 땅에 깃들면 새로운 풀이나 나무가 되고, 우리 몸에 들어오면 새로운 숨결이 됩니다.


  《나무의 아기들》(천개의바람 펴냄,2014)이라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이 그림책을 빚은 이세 히데코 님은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커다란 나무 같은 사람》, 《그 길에 세발이가 있었지》, 《첼로, 노래하는 나무》 같은 그림책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린이와 함께 읽는 그림책을 그리는 이세 히데코 님은 ‘숲·나무·씨앗·노래·사랑·삶’을 한데 엮어서 쉽고 보드라운 결로 이야기합니다. 《나무의 아기들》이라는 그림책은 ‘나무가 낳는 아기 = 씨앗’이라는 얼거리를 바탕으로 ‘씨앗은 다시 어머니 나무가 되는 넋’이라는 줄거리를 들려줍니다.


  “벽오동 아기는 가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배를 타고 바람의 여행을 떠나지요(4쪽).” 나무는 모두 다릅니다. 모두 다르기에 나무마다 이름이 다릅니다. 우리 둘레에는 어떤 나무가 있을까요? 우리 둘레에서 자라는 나무한테 누가 어떤 이름을 어떤 마음으로 붙였을까요? 표준말로 가리키는 이름뿐 아니라, 고장마다 다 다르게 가리켰을 이름을 헤아려 보셔요.


  둘레를 가만히 살펴보셔요. 은행나무가 있나요? 방울나무가 있나요? 느티나무가 있나요? 소나무가 있나요? 벚나무가 있나요? 자, 이밖에 도시에서는 어떤 나무를 더 구경할 수 있나요? 아파트에는 없을 테지만, 퍽 오래된 골목집 마당에는 감나무가 있습니다. 살구를 좋아하면 마당에 살구나무를 심을 만하고, 복숭아를 좋아하면 복숭아나무 몇 그루를 돌볼 만합니다. 포도나무를 마당에 심을 수 있고, 동네 빈터에 오동나무를 심을 수 있어요.


  나무를 심는 사람은 나무마다 다른 이야기를 심습니다. 뽕나무를 심을 적에는 뽕나무가 자라는 결과 함께 누리는 이야기가 있고, 느릅나무를 심을 적에는 느릅나무가 자라는 결과 같이 누리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서 어떤 뜻을 함께 품는가요.


  “북풍이 지나가면 도토리들이 투두둑 떨어져요(10쪽).” 시골마을 우리 집 마당과 뒤꼍에서 자라는 나무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마당에 우람하게 선 후박나무에는 한 해 내내 마을 멧새가 쉼없이 찾아듭니다. 여름에 후박꽃이 핀 뒤 후박알이 까맣게 맺는데, 멧새는 후박알을 먹으려고 찾아오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애벌레를 잡아먹고 싶어서 찾아와요. 날씨가 포근한 남녘은 늦가을에도 애벌레가 꼬물꼬물 기어요. 늦가을부터 돋는 갓이랑 유채를 살펴보면, 갓잎과 유채잎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애벌레를 어김없이 볼 수 있습니다. 한 해 내내 푸른 잎사귀를 내놓는 후박나무에도 늦가을에 애벌레가 있어요. 열매와 애벌레를 찾는 멧새가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오면, 우리 집에는 구성진 노래잔치가 벌어집니다. 새마다 노랫소리가 다르니 언제나 다른 노랫소리를 누립니다. 마당에 우람한 나무 한 그루 있을 뿐이라 할 테지만, 이 나무 한 그루가 있기에 새들이 찾아와서 쉬면서 노래해요.


  한편, 새는 모든 애벌레를 샅샅이 잡아먹지 않습니다. 애벌레 몇 마리 귀엽게 놓아 줍니다. 왜 그러할까요? 애벌레를 샅샅이 잡아서 먹으면, 다음에는 더 잡아먹을 애벌레가 없기 때문입니다. 애벌레가 커서 나비나 나방으로 깨어난 뒤, 다시 알을 낳아 새로운 애벌레가 자라야 새도 두고두고 잡아먹으면서 목숨을 잇습니다. 나무는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으면서 새 잎을 틔울 수 있고, 애벌레는 나뭇잎뿐 아니라 풀잎을 골고루 갉아먹으면서 풀도 알맞게 보듬습니다. 그리고, 이 애벌레가 깨어나 나비나 나방이 되어야, 쉴새없이 날아다니면서 꽃가루받이를 하지요. 나무나 풀은 잎사귀를 애벌레한테 조금 내주고 꽃가루받이를 하니, 서로 돕고 보살피는 사이라고 할 만합니다.


  “느티나무 엄마는 아기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가 봐요. 언제까지나 안고 있으려고 가지째 떨어진대요(22쪽).” 나무가 있으면 그늘이 집니다. 한여름에는 그늘에서 시원하게 쉽니다. 겨울에도 나무는 가지를 벌리면서 춤을 춥니다.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무엇보다 겨울에는 나무가 찬바람을 가려요. 차디차고 매서운 겨울바람을 나무가 고스란히 받아서 노래로 바꾸어 줍니다. 나무가 우거지면 바깥소리를 막지요. 나무는 우리 보금자리에 시끄러운 바깥소리가 덜 들어오거나 안 들어오도록 가립니다. 집이나 건물을 둘러싸고 나무가 겹겹이 있으면, 자동차 구르는 소리를 거의 다 막을 만해요.


  소리를 막는 울타리를 높게 세운들 소리를 제대로 막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무가 한 겹만 있어도 웬만한 소리를 거뜬히 막고, 나무가 두 겹이 있으면 거의 모든 소리를 막으며, 나무가 세 겹으로 둘러싸면 바깥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굴어도 안쪽에서는 포근해요. 게다가 나무가 자라서 우람하게 서면, 나무가 들려주는 노랫소리가 골고루 퍼지면서 아름다운 삶터를 이룹니다. 나무는 언제나 푸른 바람을 일으키니 우리 가슴에서 푸른 이야기가 싹틀 수 있습니다.


  숲이 되려고 기다리는 씨앗은 오랫동안 흙 품에 안겨서 잠을 잔다고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사랑이 되려고 기다리는 ‘사람씨앗’이지 싶어요. 오늘까지 고요히 잠잘 수 있고, 이튿날에도 아직 긴잠에서 안 깨어날 수 있지만, 머잖아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서 온누리를 환하게 밝히는 고운 사랑이 됩니다. 서로 아끼고 보살필 줄 아는 따사로운 마음으로 착하고 참다운 멋진 사랑이 돼요. 4347.11.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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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경제신문'에 싣는 책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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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어머니와 살기



  아이들은 누구나 어머니와 삽니다. 왜냐하면 아이로 태어나려면 먼저 열 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보내지 않고서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 천천히 자라고 난 뒤 이 땅에 태어납니다.


  어머니는 씨앗 한 톨을 사랑스럽게 품어 오롯한 사람으로 키웁니다. 젖만 물 수 있는 갓난쟁이를 포근하고 부드럽게 가슴으로 안아서 젖을 물립니다. 어머니한테서 젖을 받아먹으며 자라는 갓난쟁이는 차츰 손과 발에 힘이 붙고, 팔과 다리가 야뭅니다. 아이 스스로 씩씩하게 서서 걷거나 뛰거나 달립니다.


  혼자 걷거나 뛰거나 달릴 수 있는 아이를 지켜보는 어머니는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아이가 제 마음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게끔 또렷하게 한 마디씩 가르칩니다. 어머니는 학문이나 지식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말을 가르칩니다. 사람과 사물을 가리키는 이름을 아이한테 가르칩니다. 어머니는 아이한테 ‘삶이 고스란히 묻은 사랑이 어린 말’을 아이한테 가르칩니다.


  어머니한테서 몸을 받고 말을 물려받은 아이는 차근차근 놀이를 즐깁니다. 어머니가 가르치는 놀이를 즐기기도 하지만, 아이가 손수 놀이를 지어 즐기기도 합니다. 손수 흙과 돌과 모래를 만집니다. 손수 나무와 풀과 꽃을 쓰다듬습니다. 스스로 바람을 마시고, 스스로 빗물을 받으며, 스스로 밥을 씹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어머니는 바지런히 실을 잣고 천을 짜서 옷을 깁습니다. 나날이 자라는 아이 몸에 맞게 새로운 옷을 입힙니다. 몸 구석구석 알뜰히 씻기면서 나중에 아이가 스스로 몸을 잘 씻도록 이끕니다.


  아이는 언제나 어머니 곁에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한테 하늘과 같습니다. 포근하게 어루만지고 따사롭게 품습니다. 밥과 옷과 집을 주는 어머니는 말과 마음과 사랑을 함께 줍니다. 아이는 어머니한테서 삶을 물려받는 한편, 사랑이 그득한 씨앗을 이어받습니다.


  그림책 작가로 이름이 높은 사노 요코 님이 쓴 《나의 엄마 시즈코상》(이레,2010)이라는 수필책이 있습니다. 사노 요코 님은 이녁 어머니와 얽힌 이야기를 글로 풀어냅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하고 부대낀 이야기를 꾸밈없이 드러내고, 나이가 든 뒤로 어머니하고 부딪힌 이야기를 낱낱이 밝힙니다. “비록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라고 해도 나도 들어가기 싫은 곳에 있게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29쪽).” 하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네, 사노 요코 님을 낳은 어머니는 양로원에 들어갑니다. 사노 요코 님은 그림책을 빚어서 얻은 돈을 ‘어머니 양로원 시설에 쏟아붓’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그림책을 빚어서 얻은 돈으로 양로원에 대지 말고, ‘그림책을 안 그리면서 어머니와 함께 지낼’ 만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러나, 사노 요코 님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하고 수없이 부딪혔다고 해요. 어머니가 더없이 못마땅했고, 어머니와 떨어져 살기를 바랐다고 해요. 이녁을 낳은 어머니가 몹시 포근하면서 따사로웠으면 어떠했을까요? 이때에는 아마 사노 요코 님이 어머니하고 떨어져 살 생각을 안 했겠지요. 어머니와 늘 함께 지내면서 조용히 지낼 만하겠지요. 그러면, 사랑스러운 어머니와 함께 살며 빚을 그림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깃들 만할까요? 사랑스럽지 못한 어머니와 멀리 떨어진 채 양로원에 돈을 대는 삶으로 빚는 그림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흐를까요?


  사랑은 늘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사랑이 아프게 다가올 수 있고 기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만, 사랑은 늘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사랑이 늦게 다가온다고 여길 수 있고 사랑이 언제나 감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만, 사랑은 늘 사랑이지 싶어요.


  사노 요코 님을 낳은 분은 “서른두 살의 나이에 여섯 아이를 낳고 한 명을 떠나보낸 다섯 아이의 엄마였다(40쪽).”고 합니다. 제국주의 일본이 전쟁에서 질 무렵 ‘다섯 아이 어머니인 서른두 살 여자’는 어떤 삶을 일구어야 했을까 헤아리면서, 이와 비슷한 무렵에 ‘일제강점기에서 겨우 벗어났다 싶더니 한국전쟁 불길에 휩쓸리면서 다섯 아이 어머니인 서른두 살 여자’는 한국에서 어떤 삶을 일굴 수 있었을까 헤아립니다.


  나라가 다르고, 사회와 경제와 정치가 다릅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라는 이름은 같습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어머니는 언제나 어머니입니다. “가난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35엔짜리 라면을 반씩 나눠 먹기도 했다. 나는 그보다 맛있는 라면을 지금껏 먹어 본 적이 없다(113쪽).”는 말처럼, 우리 곁에는 이웃이 있고 동무가 있습니다. 가난해도 함께 가난하고, 넉넉해도 함께 넉넉합니다. 기쁠 적에는 기쁨을 나누는 이웃이요, 슬플 적에는 슬픔을 나누는 이웃이에요.


  그러면 요즈음 우리는 어떤 어머니나 아버지로 살아가는지 궁금합니다.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는 어머니나 아버지입니까. 아이와 함께 사랑을 꽃피우려는 어머니나 아버지입니까. 아이한테 가장 아름다운 말을 물려주는 어버이입니까. 아이한테 가장 즐거운 노래를 들려주는 어버이입니까. 아이한테 가장 따스한 밥 한 그릇 내주면서 가장 반가운 옷 한 벌 마련하는 어버이입니까.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야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맨 먼저 집에서 배웁니다. 아이들은 교과서와 책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누구보다 어버이한테서 배웁니다. 학교가 바로서야 아이들이 슬기롭게 배울 수 있기도 하지만, 학교에 앞서 여느 살림집이 바로서야 하고, 여느 마을이 바로서야 합니다.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복지에 앞서, 여느 사람들 보금자리가 바로서야 합니다. 여느 마을에 있는 여느 집에서 여느 어버이가 여느 아이를 따사롭게 돌보면서 즐겁게 삶을 지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아이들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교육부 장관이나 교육감이나 대통령이나 지자체 일꾼도 잘 뽑아야 할 테지만, 이에 앞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곧은 마음으로 착한 꿈을 키워 따순 사랑을 건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버지와 함께 삶을 짓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에 붙들려도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자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회사를 다니더라도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쉬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집밥을 먹고, 집살림을 익히며, 집숲을 가꿀 수 있기를 빌어요. 아이들이 집터부터 튼튼히 세워서 삶터와 일터와 놀이터와 꿈터와 사랑터를 모두 슬기롭게 지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7.11.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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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손수 짓는 이야기



  손수 지은 나락을 손수 거두어 갈무리한 뒤, 손수 빻아서 손수 장작을 패고 손수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손수 솥에 끓여서 손수 밥상에 올리면, 온누리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 태어납니다. 이웃한테서 얻은 열매나 푸성귀도 맛나지만, 우리 보금자리에서 자라는 열매나 푸성귀를 그때그때 따서 먹으면 가장 맛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먼먼 옛날부터 얼마 앞서까지, 이 나라 거의 모든 사람들은 손수 흙을 일구어 손수 숲을 이루었고, 손수 지은 보금자리에서 손수 가꾸는 살림으로 가장 아름다우면서 즐겁고 사랑스러운 삶을 누렸습니다.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새마을운동이 한창 퍼져 시골에 농약과 비료가 마구 들어오기 앞서까지는, 시골집 풀지붕을 슬레트(석면)로 갈아치우는 일이 벌어지기 앞서까지는, 시골에 전기가 들어오기 앞서까지는, 시골에 텔레비전과 신문이 들어오기 앞서까지는, 참말 한국에서도 손수 짓는 삶으로 손수 가꾸는 보금자리가 아주 많았어요. 이무렵까지 한국사람도 ‘돈을 버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짓는 삶’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시골에서도 ‘돈을 버는 삶’입니다. 돈이 될 만한 것을 논밭에 심습니다. 돈이 될 만하도록 기계를 부리고 농약과 비료를 씁니다. 돈이 될 만하지 않기에, 들과 고샅과 논둑과 밭자락마다 돋는 수많은 풀(약초)을 지심으로 여겨 농약으로 죽이거나 기계로 석석 베거나 삽차를 불러 뒤엎습니다.


  ‘돈을 버는 삶’이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돈을 벌어 돈을 쓰는 삶’이 된다면, ‘돈만 생각하고 돈에만 얽매이는 굴레’가 된다면 아름다운 삶하고 멀어지지 싶어요. 우리가 밥을 먹는 까닭이라면, 우리가 아침마다 새로 일어나서 일하는 까닭이라면, 우리가 아이를 낳아 따사로이 돌보는 까닭이라면 ‘돈을 버는 삶’ 때문은 아니라고 느껴요. 우리는 저마다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삶’을 바라기에 온갖 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우리 보금자리를 일굽니다.


  충남 서천 시골마을에서 나무를 만지는 삶을 노래하는 김소연 님이 쓴 《수작사계, 자급자족의 즐거움》(모요사 펴냄,2014)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에서도 드러나지만, 이 책은 ‘자급자족’을 이야기합니다. 손수 짓고 손수 누리는 즐거움을 이야기해요. 손수 가꾸어 손수 나누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흙 속에 씨앗을 넣어두면 저절로 싹이 트고 하룻밤 내린 비에 몰라보게 자라나는 생명력이 놀라웠고 깔아놓은 볏짚 틈바구니와 잎사귀에 붙어 먹이를 찾고 짝짓기를 하며 한철을 보내는 곤충들의 생활이 신기했다. 나는 땅을 좋아하게 되었고 꽃과 채소를 가꾸는 일에서 재미를 발견했다(44쪽).”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그립니다. 시골에서 살면 누구나 이러한 하루를 누립니다. 흙과 풀과 벌레와 나무와 들과 숲과 하늘과 햇볕 사이에서 즐겁게 웃습니다.


  도시에서는 어떠할까요. 도시에서도 텃밭을 일구거나 마당을 보듬거나 뜰을 꾸민다면, 이 같은 이야기를 누릴 만하리라 생각해요. 아파트에서나 연립주택에서 사느라 흙을 밟을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땅바닥하고 붕 뜬 데에서 지내야 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누리지 못하면서, 꿈조차 못 꾸리라 느껴요.


  아이들은 어떠할까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흙을 밟거나 만질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흙운동장을 달리면서, 흙바닥에 돌멩이로 금을 그리면서 놀 수 있을까요. 학교 운동장을 흙이 아닌 아스콘이나 인조잔디로 바꾸지는 않나요? 운동장 귀퉁이를 주차장으로 바꾸어 어른들 자가용을 잔뜩 세우지는 않나요?


  요새는 학교에서 ‘학교 텃밭’을 아이들과 함께 일구는 어른이 차츰 늘어납니다. 도시 아이들이 풀과 흙을 하나도 모르는 채 자라면, 마음이 시드는 줄 깨닫기 때문입니다. 도시 아이들이 햇볕을 쬐지 못하거나 바람을 마시지 못하면, 참말 마음이 시들면서 사랑이 싹트기 어려운 줄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수작사계》에서도 이 대목을 찬찬히 짚습니다. “바느질할 때 내 자리는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 탁자 앞이었다. 흙벽돌에 자연 그대로의 황토를 발라 내부마감을 한 산너울 마을의 집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한낮에도 약간 어둑했다. 나는 그 아늑한 어둠을 좋아했다(9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해가 뜨기에 밤이 지나갑니다. 해가 뜨면서 새벽이 밝습니다. 해가 뜨면서 들과 숲에서 풀과 나무가 깨어납니다. 해가 뜨면서 풀벌레와 숲짐승이 기지개를 켜고, 사람들도 비로소 기운을 차립니다. 한겨울에도 따사롭게 비추는 해입니다. 빙글빙글 도는 지구를 해가 골고루 비추면서 골골샅샅 포근한 기운이 퍼집니다. 알맞게 낮과 밤이 흐르면서 지구별 어느 곳이나 즐거운 삶이 깨어나고 아름다운 사랑이 피어납니다.


  밥 한 그릇에 햇볕 한 줌 서립니다. 김치 한 점에 햇볕 두 줌 깃듭니다. 나물 한 접시에 햇볕 석 점 스밉니다. 된장국에 햇볕 넉 점 감돕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밥에는 햇볕이 흐릅니다. 능금에도, 귤에도, 수박에도, 딸기에도, 그야말로 햇볕이 흘러요. 비닐집에서 키워서 얻는 열매나 남새가 아닌, 햇볕이 키우는 열매나 남새입니다. 수도물을 주어야 자라는 열매나 남새가 아닌, 빗물을 먹으면서 무럭무럭 크는 열매나 남새입니다.


  우리도 풀처럼, 나무처럼, 꽃처럼,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온몸으로 맞아들일 적에 튼튼하면서 싱그럽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예부터 물 맑고 바람 싱그러운 시골로 보냈어요. 처음에는 맑은 물과 바람만 누리면서 기운을 북돋우고, 천천히 기운이 붙으면 조금씩 흙을 만지도록 이끌어 몸을 움직이도록 합니다. 시골에서 기운을 차리는 ‘아픈 사람’은 손수 땀을 흘리면서 흙을 일구면서 온몸이 맑게 깨어납니다. 온몸이 맑게 깨어나기에 온마음이 사랑으로 그득그득 넘칩니다.


  문학을 하는 어른도 도시에서만 글을 쓰지 말고 시골에서 텃밭을 호미로 쪼면서 글을 쓰면 사뭇 다르리라 느껴요. 사진을 찍거나 예술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어른도 도시에서 창작에만 바쁘지 말고, 손수 괭이를 잡고 삽을 쥐면서 흙을 갈고 나무를 심을 수 있으면 모든 문화와 예술이 새롭게 거듭나리라 느껴요.


  “가구는 숲에서 시작되므로 그 안에 반드시 숲의 흔적을 담고 있다(318쪽).”고 합니다. 맞습니다. 옷장도 책상도 나무로 짰으면, 이 옷장과 책상은 나무이며, 나무는 바로 숲에서 왔어요. 우리가 읽는 책을 생각해 봅니다. 책은 종이로 엮는데, 종이는 나무에서 왔습니다. 나무가 없으면 종이가 없고, 종이가 없으면 책이 없어요. 다시 말하자면, 숲이 있어 나무를 얻을 때라야 책이 태어납니다. 숲이 아름다운 시골이 넓게 드리워야 도시도 비로소 발돋움합니다. 우리가 즐겁게 삶을 짓자면, 아파트에 살더라도 시골숲이 아름답게 잇도록 마음을 기울이고 힘을 보탤 노릇입니다. 4347.10.2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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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전쟁무기와 ‘성 노리개’



  사이좋게 노는 아이들은 싸우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사이좋기 때문입니다. 사이좋게 노는 아이들은 총이나 칼을 손에 쥐지 않습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이좋게 노는 아이들은 거친 말을 안 쓰고, 윽박지르거나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짓을 일삼지 않습니다. 서로 믿으며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서로 사이좋게 지낸다고 한다면, 서로한테 총을 겨누거나 칼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들은 뒤에서 해코지를 하거나 거짓말을 퍼뜨리거나 괴롭히지 않아요.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스러운 곳에는 평화가 감돕니다. 사랑스러워서 평화가 감도는 곳에는 민주와 평등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화와 민주와 평등이 있는 곳에는 싸움이나 다툼이 없습니다. 평화와 민주와 평등이 있는 곳에는 사랑만 있으니, 싸움이나 다툼이 들어설 일이 없어요.


  전쟁무기를 갖추면 평화가 찾아올까요? 아닙니다. 경찰이나 군인이 많아야 평등이나 민주를 이룰까요? 아닙니다. 전쟁무기와 경찰과 군인은 평화·민주·평등에 등돌립니다. 전쟁무기는 전쟁을 부릅니다. 전쟁무기를 앞에 내밀어 보셔요. 누구나 벌벌 떨며 무섭습니다. 전쟁무기를 든 사람 앞에서 다른 전쟁무기를 들고야 맙니다. 전쟁무기는 전쟁무기를 부르고, 전쟁무기로는 오직 전쟁을 할 뿐입니다.


  한반도 남녘이나 북녘 모두 전쟁무기를 키워서는 어떠한 평화도 못 이룹니다. 일본이나 중국도 전쟁무기를 자꾸 늘려서는 아무런 평화를 부르지 못합니다. 미국과 러시아도 전쟁무기를 멈추지 않고서야 지구에 평화를 심을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 핵무기를 만드니 저 나라도 핵무기를 만들어요. 핵무기가 핵무기를 막아 주지 않아요. 핵무기는 자꾸 새로운 핵무기를 부를 뿐이에요.


  가는 말이 고울 때에 오는 말이 곱다는 옛말처럼, 우리 손에 사랑을 들었으면 우리와 마주선 사람도 두 손에 사랑을 듭니다. 우리가 두 손에 총칼을 들었으면 우리와 마주선 사람도 두 손에 총칼을 들어요. 그러면, 우리 앞에 누군가 총칼을 들고 찾아올 적에 어떡해야 할까요? 이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시카와 이쓰코 님이 쓴 《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들》(삼천리 펴냄,2014)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일제강점기 ‘성노예’와 얽힌 이야기를 일본사람이 스스로 낱낱이 밝혀서 썼습니다. 이 책을 쓴 일본사람은 머리말에서 “유엔의 기관들이 수차례 권고와 제언을 했지만 일본 정부는 일관되게 무시해 오고 있습니다. 교과서 검정을 통해 ‘위안부’에 관한 기술을 완전히 삭제해 버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소녀들에게만큼은 진실을 알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6∼7쪽).” 하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위안부’라고 하는 ‘성노예’ 이야기를 학교에서 어느 만큼 가르칠는지 궁금합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왜 ‘위안부’라는 이름을 붙여서 ‘성노예’가 된 가녀린 여자를 짓밟았는가 하는 대목을 어느 만큼 꼼꼼히 밝혀서 가르칠는지 궁금합니다.


  역사를 더듬으면, 일본 제국주의만 이웃나라 여자를 강간하거나 학살하지 않았습니다. 지구별에 있는 모든 나라가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면 어김없이 이웃나라 여자를 강간하거나 학살했습니다. 한국(예전에는 고려나 조선)으로 쳐들어온 중국이나 몽고도 이 나라 여자를 강간하거나 학살했습니다. 임진왜란이라고 일컫던 때에는 어떠했을까요? 더 앞선 역사를 살펴,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서로 다투던 때에는 어떠했을까요? 고구려가 만주로 땅을 넓히던 때에는 어떠했을까요?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땅을 넓히던 이들은 이웃나라 여자를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들》이라는 책은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정복당한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정복할 땅과 자원, 훈장과 명예, 그리고 여자의 몸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을 쟁취하기 위해 사기와 폭력, 살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저질렀는데, 여기에 국가권력이 개입하면 이 모든 행위는 ‘성전’으로 둔갑해 버렸다. 이러한 미사여구로 국민들을 교육하고 선전하고 속여 정신까지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저항하는 자들은 체포하여 처형하거나 ‘비애국자’로 낙인찍어 규탄하였다(141쪽).”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전쟁이 하는 일이란 이웃나라 자원과 땅을 빼앗는 짓인 한편, 이웃나라 여자를 짓밟으면서 괴롭히는 짓입니다. 티벳을 식민지로 삼은 중국도 이 짓을 똑같이 저질렀어요.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 군대 이야기가 퍽 자주 불거집니다. 사단장이 누군가를 성추행한 이야기가 불거지고, 후임병을 성추행하다가 주먹과 발로 두들겨패서 죽인 이야기가 불거지며, 하사관이나 장교와 선임병이 저지른 폭력과 학대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가 불거집니다.


  예나 이제나 군대는 비슷합니다. 군대가 있는 마을 둘레에는 술집과 ‘여자 파는 집’이 있습니다. 주한미군 부대가 있던 곳마다 술집과 ‘여자 파는 집’으로 커다란 장삿마을을 이루곤 했습니다. 군인옷을 입은 사내가 서울역이나 용산역이나 강변역 같은 데에서 기차나 버스를 내리면 어김없이 누군가 달라붙어서 ‘여자를 돈으로 사지 않겠느냐?’면서 추근댑니다. 군부대 내무반에는 옷을 홀딱 벗은 여자 사진을 붙이는데다가, ‘여자를 노리개로 삼는 비디오’를 문화생활(?)이라면서 보여주기 일쑤입니다.


  군대가 참말 평화를 지키는 곳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군대에서 여자를 ‘성 노리개’로 삼도록 길들이는 얼거리를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일본 군국주의자는 ‘위안소’를 만들었고, 한국 군대는 ‘창녀촌’을 만들었습니다. 4347.10.1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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