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네 손을 펼치렴



  네가 손을 펼쳐야 네 손을 내가 잡습니다. 내가 손을 펼쳐야 내 손을 내 이웃이 잡습니다. 너와 내가 서로 손을 펼치지 않으면, 우리는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너와 내가 서로 손을 펼칠 때에, 우리는 손을 잡기도 하고 손바닥을 맞대기도 하면서 빙그레 웃습니다.


  너와 내가 춤을 추려면 손을 활짝 펴고 만나야 합니다. 너와 내가 춤을 추듯이 삶을 지으려면 마음을 활짝 열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손을 펼치고, 마음을 펼치면서, 사랑을 펼칩니다. 삶을 펼치고, 꿈을 펼치면서, 이야기를 펼칩니다.


  우리는 저마다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한꺼번에 두어 걸음이나 서너 걸음을 나아가지 않습니다. 한달음에 열이나 스무 걸음씩 건너뛰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걷습니다. 씩씩하게 걷습니다. 기쁘게 걷습니다.


  가시밭길이기에 더 고단하지 않습니다. 어느 길을 걷든 스스로 고단하다고 여기니 고단합니다. 꽃길이기에 더 싱그럽지 않습니다. 어느 길을 걷든 스스로 싱그럽다고 여기니 싱그럽습니다. 그러니까, 남이 보기에는 가시밭길이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여느 길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꽃길이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따분한 길입니다.


  내 삶은 늘 내가 손수 일굽니다. 내 밭은 늘 내가 손수 짓습니다. 내 말은 늘 내가 손수 가꿉니다. 내 이야기는 늘 내가 손수 들려줍니다. 내 밥은 늘 내가 손수 차려서 먹습니다. 어느 것이든 언제나 내 마음이 움직이면서 이루는 삶입니다. 좋거나 나쁜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삶이 있습니다. 반갑거나 서운한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이 있습니다.


  신지아 님이 쓴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샨티,2014)라는 책이 있습니다. 살결이 빠알간 빛깔로 물든 몸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신지아 님은 어릴 적에 ‘마음으로 사귀는 동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어린 날을 돌아봅니다. 나한테는 마음으로 사귀는 동무가 있었을까요? 나한테는 여러 놀이동무와 이야기동무가 있었는데, 이들은 나한테 마음동무였을까요? 그리고, 나는 다른 아이들한테 마음동무나 이야기동무가 될 만했을까요?


  신지아 님은 어릴 적에 정신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정신병원에서 얼굴을 마주한 의사 아저씨한테 “엄마가 날 왜 여기 데리고 왔는지 이해가 안 가요. 내가 돌았대요. 학교에서 조퇴하면 인왕산으로 달려갔고, 꽃을 보고 풀 냄새를 맡고, 하늘을 가슴에 안고 낮잠을 자면 너무나 좋아요. 학교 가기 싫은 것이 돈 건가요?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요. 저는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재미없어요(85쪽).”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면서도 인왕산을 오르내렸군요. 인왕산에서 꽃과 풀과 나무를 만났군요. 하늘과 비와 바람과 벼락을 사귀었군요.


  학교에서 보는 어른이나 아이 모두 재미없을밖에 없었겠군요. 풀내음 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이 없고, 꽃송이 같은 웃음을 보여주는 동무가 없으며, 하늘바람 같은 사랑을 나누는 이웃이 없으면, 삶이 재미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날 아이들은 무척 재미없는 하루를 보냅니다. 풀도 꽃도 나무도 없는 채 하루를 보내야 해요. 하늘도 못 보고 구름이나 비나 눈이나 바람을 못 느끼는 채 하루가 지나가요. 햇볕 한 줌 제대로 쬐면서 하루를 보내는 아이나 어른은 얼마나 될까요. 바람 한 줄기가 온몸을 감싸는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채 하루를 지나가는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이 팔다리를 뒤흔드는 몸짓을 지켜보면서, 이런 몸짓이 마치 ‘춤’이라도 되는 양 따라하는 아이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노래하거나 춤추고 싶다는 꿈을 키우는 아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이나 ‘가수’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겠노라’ 외치는 아이만 잔뜩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언제 어디에서나 늘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아이는 드물고, 텔레비전에서 떠도는 춤과 노래를 똑같은 몸짓으로 되풀이하는 아이만 많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지껄이는 갖가지 거칠거나 막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주워담는 아이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른도 똑같은걸요. 어른도 여느 때에 참으로 거칠거나 막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주워담아요. 아이들은 어른 곁에서 이런 거친 말과 막된 말을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배워요.


  사랑을 배우는 아이가 드뭅니다. 꿈을 물려받는 아이가 드뭅니다. “내 삶을 통해서 내 몸과 마음 그 자체가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 그것이 내가 갖고 싶은 다이아몬드였다(178쪽).” 같은 생각을 마음에 씨앗 한 톨로 심으면서 하루를 오롯이 누리려고 하는 아이가 몹시 드뭅니다. 아이들은 교과서와 시험공부에 파묻힙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교과서와 시험공부에 파묻습니다.


  삼월이 무르익는 시골에는 쑥내음이 고루 퍼집니다. 다만, 모든 시골자락에 쑥내음이 퍼지지는 않습니다. 마늘밭을 건사하는 마을 어르신은 바야흐로 경운기 몰고 농약을 치느라 부산합니다. 군청에서는 ‘불조심’을 외치면서 아침 낮 저녁에 걸쳐 ‘불 피우지 말자’라든지 ‘논둑과 밭둑 태우지 말자’ 같은 이야기를 마을방송으로 끊임없이 날마다 시끄럽게 떠듭니다.


  나는 우리 집 큰아이와 뒤꼍에서 쑥을 뜯습니다. 쑥을 뜯는 동안 우리 집에서 쑥내음을 듬뿍 들이켜고, 우리 몸과 옷에 쑥내가 가득 뱁니다. 그런데, 마을 한쪽에서는 농약이 퍼지고, 우리 마을뿐 아니라 이웃 여러 마을은 군청에서 떠드는 ‘녹음테이프 마을방송’ 소리로 귀가 아픕니다.


  신지아 님은 “내가 없으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는 것,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내가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지 못하면 사랑을 안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344쪽).” 하고 말합니다. 내가 나를 아낄 때에 지구별이 나를 아껴 줍니다. 내가 나를 보살필 때에 지구별이 나를 보살펴 줍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때에 지구별을 감도는 바람이 나를 사랑해 줍니다.


  봄은 달력 숫자로 오지 않습니다. 봄은 사람들 옷차림에서 오지 않습니다. 봄은 짧은치마라든지 새빨갛거나 샛노란 옷에서 오지 않습니다. 봄은 저잣거리 쑥떡에서 오지 않습니다. 봄은 따스하면서 너그러운 내 마음에서 옵니다. 봄은 따스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에서 오고, 봄은 너그러운 몸짓으로 홀가분하게 함께하는 춤사위에서 옵니다.


  우리 가슴에서 봄이 자랍니다. 우리 가슴에서 여름과 가을이 자랍니다. 우리 가슴에서 겨울이 찾아와 고요하고 고즈넉하게 쉽니다. 우리는 서로 손을 펼쳐서 기쁨과 꿈과 사랑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내 가슴을 열어서 손을 펼칩니다. 4348.3.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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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차돌 같은 아이들



  한겨울에도 아이들은 맨발로 놀기를 즐깁니다. 맨발로 얼음장을 밟고 싶습니다. 맨손을 찬물에 담가 놀고 싶습니다. 한겨울에 맨발과 맨손으로 놀다가 어느새 아이들은 손발이 꽁꽁 업니다. 빨갛고 차갑지요. 그런데 이런 손발로도 놀이를 그치지 않습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아이들은 때와 철을 가리지 않고 놉니다. 마냥 놉니다. 더워도 놀고 추워도 놀아요. 더운 철에는 온몸을 땀으로 적시면서 놉니다. 추운 철에는 온몸이 꽁꽁 얼어도 놉니다. 어른이 된 사람도 어릴 적에는 이렇게 놀았고, 오늘날 아이도 이렇게 놀며,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아이도 이렇게 놀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이들은 온몸으로 바람과 햇볕과 물과 바람과 흙과 풀을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지식이나 말로 알려주어서 알거나 배우기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몸을 움직여서 찬바람도 쐬고 땡볕도 받으면서 새롭게 배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언제나 놀아야 합니다. 추운 날에는 콧물이 얼어붙도록 놀고, 더운 날에는 땀에 젖은 옷을 하루에도 여러 벌 갈아입을 만큼 놀아야 합니다.


  전북 익산에서 조용히 삶을 짓는 문영이 할머님이 쓴 산문책 《내 뜰 가득 숨탄것들》(지식산업사,2014)을 읽습니다. 흰머리 할머니가 되어 지난날을 찬찬히 돌이키면서 쓴 글이 정갈합니다. 할머니는 “신접살이 어느 해였던가 그 집장 맛을 못 잊어 메주 한 덩이로 담그기 쉬운 찌엄장을 소꿉놀이하듯 담가 놓고, 고만고만한 아이들 손 잡고 봄마중 나물 찾으러 들에 나갔다. 옆집 아주머니는 우리 아이들은 고뿔 한 번 앓지 않는데서 ‘차돌’이라 불렀다(80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문득 그리운 낱말 ‘차돌’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요즈음에는 아이들을 가리켜 ‘차돌’이라 부르는 어른은 매우 드뭅니다. 아이들한테 ‘장군’이나 ‘공주’라고는 말해도, ‘차돌’이라 말하는 어른은 찾아볼 길이 없어요.


  도시이든 시골이든 길바닥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 보기 어려운 탓일까요. 이제는 흙으로 된 골목이나 고샅이 없어서, 그저 시멘트나 아스팔트만 있기 때문일까요. 아이들이 어디에서나 돌을 주워서 돌치기(비석치기)도 하고, 땅바닥에 돌멩이로 금을 긋도 온갖 놀이를 하던 즐거움이 사라졌기 때문일까요. 이쁘장한 돌은 주머니에 넣고 하루 내내 기쁘게 웃는 아이들이 사라졌기 때문일까요. 바닷가에 가야 비로소 조약돌을 구경할 수 있는 메마른 도시 문명 사회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수수합니다. 할머니는 이런 학문이나 저런 이론을 들먹이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오직 이녁 삶을 헤아리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이든 어른이 젊은이와 어린이한테 이녁 슬기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글줄마다 알뜰합니다. “어느 해 산기슭에 박 한 붓을 놓고 늦가을에 가 보니 풀한테 잡혀 겨우 박 한 덩이가 열린 채 덩굴까지 말랐다. 그 박을 삶아 보니 예전에 보던 박처럼 결이 곱고 단단했다. ‘아하! 국수나무가 청정지역 지표수이듯, 바가지가 맑은 공기를 좋아하나 보다!’ 그래서 요즘 박은 겉은 고운데 속이 거칠어, 누구를 선뜻 부를 수가 없어 몇 해째 박 농사가 시들해졌다(91쪽).”


  할머니 이야기에 나오는 ‘박 한 붓’을 가만히 떠올립니다. 아주 어릴 적에 이 말마디를 얼핏 들은 듯합니다. 그렇지만 한국말사전에는 ‘붓’을 가리키는 낱말이 없습니다. 글씨를 쓰는 연장을 가리키는 붓은 있으나, 박씨를 땅에 묻는 일을 가리키는 붓은 안 나옵니다. ‘박 한 붓’을 아는 할머니가 흙으로 돌아가면, 앞으로 이런 말을 쓰는 사람도 사라질 테고, 이러한 한국말이 있는지 떠올릴 수 있는 사람도 없겠구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박씨를 심어서 바가지를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사라질 테지요. 바가지를 얻고 싶어서 박씨를 심을 사람도 사라질 테지요. 공장에서 찍는 플라스틱 조각만 바가지인 줄 아는 사람만 있을 테지요.


  할머니 이야기는 수수하면서 투박합니다. 흔하면서 너른 이야기입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더 흔하지 않은 이야기요, 이제는 그리 너르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손수 들이나 숲에 가서 꽃다지를 캐서 나물로 삼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만큼 아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꽃다지가 노래에만 있는 나물이 된 것처럼 이제 엉겅퀴마저 자취를 감추는가 싶어 애답다. 독일은 들에 난 풀 한 포기도 마음대로 손대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는다고 한다. 우리 나라도 보호할 나무와 풀을 정하고 지킬 일이라고 생각한다(175쪽).” 독일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는 갯벌도 냇물도 바다도 땅도 숲도 나무도 모두 살뜰히 건사하려고 몹시 애씁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일자리 만들기’와 ‘경제개발’만 된다면 무엇이든 모조리 망가뜨리거나 무너뜨립니다. 4대강사업 한 가지를 들자면, 이런 뻘짓을 하느라 수십 조 원에 이르는 돈을 퍼부었는데, 이를 다시 바로잡자면 또 수십 조 원에 이르는 돈을 퍼부을 테지요. 오직 토목공사에만 이 같은 돈을 퍼붓습니다.


  돈을 바라보니까 오직 돈만 따지는 셈일 텐데, 돈을 바라본대서 돈이 우리한테 오지 않습니다. 삶을 알차게 가꾸면서 곱게 일굴 때에 비로소 삶이 살아나면서 돈은 돈대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공장을 잔뜩 지어서 다른 나라에 수십억 원어치 상품을 내다 팔면 언뜻 보기에는 경제성장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공장을 짓느라 숲과 들을 망가뜨리고, 공장을 돌리느라 매연과 폐수가 쏟아지며, 공장으로 원재료를 실어나르고 공장에서 물건을 옮기느라 찻길을 닦고 비행기를 띄울 테니, 다시금 들과 숲이 망가지면서 매연과 폐수가 쏟아집니다. 수십억 원어치 상품을 파는 동안 우리가 잃거나 잊거나 무너지는 삶터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와 달리, 다른 나라에 아무것도 팔지 않으면서 모든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지어서 누릴 때를 생각해 봅니다. 이때에는 경제성장은 없으나 수입도 수출도 없을 뿐 아니라, 무역에 기댈 까닭이 없는데다가, 맑은 물과 바람을 늘 마십니다. 몸이 아플 일이 없고, 우리 삶터는 아주 깨끗합니다.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은 없으나 튼튼한 몸과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 언제나 즐겁지요. 튼튼한 몸과 아름다운 마음에서는 노래가 절로 샘솟고, 노래가 샘솟는 삶에서는 이야기를 기쁘게 지어요. 이 이야기는 문학이 될 수 있고 춤이나 연극이나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공장을 지어 경제성장을 하고 토목사업으로 일자리를 만든다고 할 적에는 아무런 문학도 문화도 삶도 사랑도 꿈도 없습니다. 그저 돈만 있습니다. 돈만 있는 나라에서는 매캐한 바람과 지저분한 물이 흐릅니다. 아이도 어른도 몸이 망가질 테고 병원에 기대야 할 테며 삶에서 웃음과 노래가 사그라질 테지요.


  삶을 짓는 어른이 차돌 같은 아이를 낳아서 돌봅니다. 삶을 사랑으로 가꾸는 어른이 차돌 같은 아이를 키우면서 웃습니다. 삶을 꿈으로 일구는 어른이 차돌 같은 아이한테 맑고 밝은 이야기를 물려줍니다. 4348.1.1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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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경제신문에 싣는 책이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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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마당에 심는 나무



  우리 집 마당에는 후박나무가 퍽 크게 섭니다. 우리 집 뒤꼍에는 감나무도 퍽 크게 섭니다. 우리 집이 깃든 마을에서 마당에 나무가 우람하게 자라도록 두는 다른 집은 없습니다. 옆마을에도 이런 집은 거의 없고, 다른 마을에서도 마당에 나무를 우람하게 키우는 집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우람하게 자라던 나무가 있어도 베에서 넘깁니다. 나무가 잘 큰다 싶어도 어느 만큼 자라면 목아지를 칩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이렇게 하지만, 학교와 길거리에서도 이렇게 합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어디를 가든 ‘아름드리 나무’를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무가 우람하게 자라기 어려운 한국입니다. 마을뿐 아니라 숲에서도 이와 비슷합니다. 숲에서 조용히 씩씩하게 자라던 나무는 산림청에서 솎아내기를 한다면서 벱니다.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즈믄 해를 넘게 살아낸 나무를 곳곳에서 만날 만하지만, 한국에서는 즈믄 해를 살아낸 나무를 찾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즈믄 해를 살아낸 절집이 몇 군데에 있다고 하지만, ‘집 한 채가 즈믄 해를 살아내’는 까닭을 제대로 읽거나 헤아려서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집 한 채가 즈믄 해를 살아내려면 ‘즈믄 해를 살아낸 나무’를 베어서 기둥으로 삼고 서까래를 올립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집 한 채가 오백 해를 살아내려면 ‘오백 해를 살아낸 나무’를 베어서 기둥으로 받치고 도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 짓는 집은 즈믄 해를 살거나 오백 해를 버티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떤 집도 백 해조차 버티도록 짓지 않습니다. 빨리 지으려 할 뿐이고, 돈이 되도록 올리려 할 뿐입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글을 갈무리한 《수집 이야기》(산처럼,2008)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은 야나기 무네요시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일본에서 마련한 ‘민예관’에 둔 ‘아름다운 일본 보물’을 어떻게 그러모을 수 있었나 하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은 ‘민예’라는 낱말을 지었습니다. “백성 예술”이라는 소리요, ‘수수한 사람이 일군 삶이 그대로 예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집 이야기》에 나오는 ‘민예관 소장품’은 여느 시골마을에 있는 여느 시골집에서 여느 시골사람이 수수하게 쓰던 투박한 살림살이입니다.


  “‘아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잘못이다. 물건을 보기 전에 지식을 움직이면,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방해받게 된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70쪽).”와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참말 그렇지요. 섣부른 지식을 앞세우면 어떤 것을 보든 ‘섣부른 지식’이 가로막습니다.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도록 가로막아요. 아름다운 것을 보더라도 아름다움이 아닌 겉모습에 얽매입니다. 사랑스러운 것을 보더라도 사랑스러움이 아닌 겉치레에 휘둘립니다.


  무화과나무에서 맺는 무화과알을 눈으로 보면서 먹으면 눈으로 헤아리는 맛이 더 달콤할 수 있지만, 무화과알을 낯설게 여기거나 달갑잖게 바라본다면 이 열매가 얼마나 달콤한지 알 수 없습니다. 굴이나 조개도 이와 같습니다. 고기를 먹을 적에도 이와 같아요. 눈으로 보며 더 맛나게 즐기기도 하지만, 눈으로 보기 때문에 아예 손을 안 대기도 합니다.


  한편, 이름난 어느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아주 높은 값을 치러야 하는 작품이 있어요. 이와 달리 이름이 안 난 어느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아주 싸디싼 값만 내도 되는 작품이 있어요. 두 작품은 무엇이 다를까요.


  “직관이 고마운 까닭은 망설임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명성 따위에 의지할 필요가 사라진다(152쪽).”와 같은 이야기를 되읽습니다. 사람을 마주할 적이든 물건을 마주할 적이든 늘 같습니다. 돈이 많거나 이름이 높거나 힘이 센 사람을 마주하기에 이녁을 더 섬기거나 우러러야 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거나 이름이 낮거나 힘이 여린 사람을 마주하기에 이녁을 업신여기거나 낮보거나 깔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사람과 만나는 자리가 대수로울 일은 없습니다. 아이들과 놀거나 아이들한테 동시를 읊어 주거나 아이들한테 밥 한 그릇 차려 주는 일이 안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살찌울 만할까요? 이름난 작가나 명사가 추천한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살찌울 만할까요? 많이 팔린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살찌울 만할까요?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크게 알리는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살찌울 만할까요?


  어느 책을 읽든 내 마음을 살찌울 수 있습니다. 다만,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살찌우려고 생각하면서 찬찬히 살피고 고른 책을 읽을 때에만 내 마음을 살찌웁니다.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다기라고도 불리는 각발은, 발견됐을 당시만 하더라도 일반 농민 집에서 닭 모이를 담아 두는 그릇이었다고 나카니시 씨한테서 직접 그 사연을 들었다(256쪽).”와 같은 이야기를 날마다 아이들과 나눕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읽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저 아이들과 이러한 마음을 함께 나눕니다. 나뭇가지 하나를 오랫동안 놀잇감으로 삼으면서 함께 놉니다. 하얀 종이에 함께 그림을 그려서 벽에 붙인 뒤 두고두고 즐깁니다. 아이들과 부대끼는 하루를 사진으로 찍어서 함께 바라보며 웃습니다. 노랫말을 아이들과 함께 지어서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그리는 이야기를 기쁘게 노래로 부릅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거짓말을 가르친다면 아이도 거짓말을 하지만, 어버이가 아이한테 참말을 들려주고 보여주면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값비싼’ 수저나 밥그릇을 딱히 좋아하거나 반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내 것’으로 삼을 만하도록 마음에 드는 수저나 밥그릇이면 다 좋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사랑으로 차려서 주는 밥이면 다 맛납니다. 비싼 과자나 초콜릿이라고 해서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빙그레 웃으면서 함께 먹는 과자나 초콜릿이면 다 좋아합니다.


  마당에 심는 나무는 대단해야 하지 않습니다. 몇 천만 원짜리 나무를 심거나 몇 억 원짜리 나무를 심어야 하지 않습니다. 씨앗 한 톨을 심어서 싹을 틔우고 찬찬히 가꾸어도 됩니다. 어린나무 한 그루를 삼천 원에 장만해서 심어도 됩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어서 서른 해를 지켜보고 쉰 해를 사랑하면 됩니다. 일흔 해를 지켜보고 백 해를 아끼다가 아이들한테 나무를 물려주면 됩니다. 아이들은 또 이녁 아이한테 나무를 물려줄 테지요. 수수한 삶이 가장 빛나는 삶입니다. 4348.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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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1-07 06:12   좋아요 0 | URL
읽고싶은 책을 고르고 살피는 과정 자체도 독서겠지요?

수집이라는걸 어렸을 때는 제법 했던것 같아요. 지우개, 메모지 모으기가 한창 유행이었거든요.

숲노래 2015-01-07 07:19   좋아요 0 | URL
하양물감 님 말씀처럼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모습이 다 `수집`이구나 싶어요.
생각을 모으고 사랑을 모으면서 꿈을 이루는
삶이로구나 싶어요.

어릴 적에는 `눈에 보이는 것`을 모으고,
철이 들면서 `마음으로 보는 것`을 모아서
사랑이 된다고 차츰 깨닫습니다.

[그장소] 2015-01-07 07:29   좋아요 0 | URL
와..와!^^ 함께살기 님! 저 반했어요~
(^o^)/ 안목. 이라는 것이 있어 제
가진 성질을 얼마나 잘 살려 주변과 어우러져 조화있게 자리잡았는가..를 알아주는 일. ㅡㅡ무엇보다 자연스러울
것들...!

숲노래 2015-01-07 07:37   좋아요 0 | URL
누구한테나 그 눈썰미(안목)가 있다고 느껴요.
사람마다 눈썰미는 다 다를 테지요.
다 다른 눈썰미를 살리면
우리 삶을 한결 아름답게 가꾸는 길로 나아가리라 믿습니다~

[그장소] 2015-01-07 07:42   좋아요 0 | URL
음~^^ 다들 각자 좋아서 파고 있는 책들 일
테죠...배울게 없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아침부터 좋은 글로 시작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숲노래 2015-01-08 18:58   좋아요 0 | URL
서로 즐겁게 배우고 가르치면서
삶도 아름답게 가꾸는구나 하고 느껴요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착한 마음으로 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른들은 아이들더러 ‘착하’게 살면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얻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착하게 살면서 돈을 얻는 길이나, 착하게 일하면서 이름을 펴는 길이나, 착하게 어깨동무하면서 힘을 쓰는 길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어른들 스스로 착한 삶을 모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착하게 살기에 돈을 못 벌지 않습니다. 돈을 벌 뜻이 없을 때에 돈을 못 벌 뿐입니다. 그러니까, 착하게 살면서 돈을 벌고 싶다면, 마음과 몸과 넋과 삶이 모두 착한 숨결이 되도록 다스리면서 돈을 벌면 됩니다.


  ‘싼값’을 흔히 ‘착한 값’으로 잘못 생각하곤 합니다. 다른 가게보다 눅은 값으로 팔아야 ‘착한 값’이 아닙니다. 에누리를 더 한다면, 그저 에누리를 더 할 뿐이요, 값을 후려칠 뿐입니다. 남보다 싸게 물건을 판다면 착한 일이 될까요?


  남보다 싸게 물건을 팔면 아마 남보다 물건을 잘 팔는지 모릅니다. 제값을 깨고 싼값으로 후려치면 남보다 장사가 잘되거나 벌이가 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제값을 깨는 짓이 착하다고 할 만할까요? 다른 사람은 장사가 안 되도록 제값을 깨는 짓은 참말 착하다고 할 만할까요? 다른 사람은 돈을 못 벌도록 하면서 싼값을 내세우는 일이 그야말로 ‘착한 값’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국말사전을 보면 ‘착하다’를 “말씨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로 풀이합니다. 그러니까, 싸게 후려치는 값은 ‘착한 값’이 될 수 없습니다. 장사를 하는 모든 사람이 서로 살림을 북돋울 수 있도록 이끄는 제값이 될 때에 비로소 ‘착한 값’이 됩니다. 과자 한 봉지이든 능금 한 알이든 책 한 권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올바른 길을 아름답게 걸을 때에 비로소 ‘착하다’고 합니다. 이른바 ‘공정무역’은 ‘착한 무역’이 될 텐데, 왜 착한 무역이 되느냐 하면, 땀흘려 일하는 사람한테 제몫을 찾아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바르면서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착합니다. 옳고 바르기만 해서는 착하지 않고, 옳고 바름에 아름다움이 더해야 착하다고 할 수 있어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마디타》(문학과지성사,2005)를 읽으면, “마디타도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착한 마음일 때의 느낌이 참 좋았다(99쪽).”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아이는 언제 스스로 착하다고 느꼈을까요. 아이는 착하다고 느낄 적에 어떤 마음이 되었을까요. 스스로 착하구나 하고 말하면서 어떤 얼굴을 지었을까요.


  회사에서 일하거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우리 어른들은 날마다 어떤 몸짓과 얼굴짓으로 이웃을 마주하는지 궁금합니다. 다달이 받는 일삯을 제대로 챙길 수 있으면 된다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언제나 환하게 웃는 마음일까요. ‘감정노동’이라고 하는 고된 일에 짓눌리는 삶일까요, 아니면 스스럼없이 노래하며 일하는 삶일까요.


  내 삶은 남이 지어 주지 않습니다. 내 삶은 늘 내가 스스로 짓습니다. 내 일은 남이 시켜야 하지 않습니다. 내 일은 늘 내가 스스로 찾아서 합니다. 배고픔은 내가 스스로 느끼지, 시계가 알려주지 않습니다. 배고파서 차리는 밥은 손수 지어서 손수 수저를 들어 입에 넣어 먹지, 기계가 모든 얼거리를 맡아 주지 않습니다. 남이 내 입에 밥술을 떠넣어 준다 하더라도, 내 몸이 스스로 움직여서 밥을 삭여야 기운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이 책을 읽어 줄 수 있을 테지요. 그렇지만, 언제나 내가 스스로 귀여겨들어 마음으로 삭여야 합니다. 나 스스로 삭이지 않으면 어느 책을 골라서 읽거나 듣더라도 내 것이 안 됩니다. 추천도서나 명작도서를 읽어야 내 마음이 살찌지 않아요. 어느 책을 읽든 나 스스로 마음을 움직여서 삭여야 합니다. 어느 책을 손에 쥐어 읽더라도 내 마음을 내가 스스로 움직여서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붕 위에서 보니 강물이 저 멀리 굽이를 도는 데까지 보이고, 물 위로 가지를 축 늘어뜨린 수양버들도 보였다. 또 강기슭을 따라 죽 늘어선 집들과 정원들이 다 보였다. 울긋불긋 물든 가을 나뭇잎들이 참 아름답고, 가을 하늘은 한없이 맑고 푸르렀다(71∼72쪽).” 같은 대목을 가만히 되새깁니다. 냇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수양버들을 보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가을 나뭇잎과 이웃집과 뜰을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내 눈으로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내가 내 살갗으로 가을바람을 느끼고 겨울바람을 느낍니다. 겨울에는 차가움을 느끼고, 봄에는 따스함을 느끼며, 여름에는 시원함을 느끼고, 가을에는 푸근함을 느낍니다. 달력이나 시계가 알려주는 철이 아니라, 해가 흐르고 달이 흐르면서 바뀌는 날을 우리가 몸소 느끼면서 헤아립니다.


  그러니까, 착한 삶이 되자면 내가 오늘 하루를 착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고운 마음이 되고 고운 말을 들려줍니다. 바른 몸짓을 하고 바른 눈짓과 손짓을 합니다. 상냥한 몸가짐이 되면서 상냥한 목소리가 됩니다. 이쁘장하다는 아가씨를 뽑는다고 하는 자리에서 흔히 ‘참(진)·착함(선)·고움(미)’ 세 가지를 살핀다고 하는데, 참답고 착하며 고운 숨결일 때에 비로소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얼굴이나 몸매가 이쁘장할 때에 사람다운 모습이 아니라, 삶을 참답고 착하면서 곱게 가꿀 때에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어린이와 푸름이가 학교를 다닐 적에도 참과 착함과 고움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이 일터에서 일을 할 적에도 참과 착함과 고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교사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참과 착함과 고움을 가르치면서 몸소 보여주어야 합니다. 공공기관이든 공장이든 회사이든 어디이든, 우리 어른은 저마다 참과 착함과 고움을 몸으로 맞아들이고 마음으로 삭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문학 《마디타》에 나오는 마디타라는 아이는 “오늘 날씨가 참 아름답다고, 꼭 노래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런 날씨에는 누구나 아주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것 같았다(196쪽).” 하고 혼잣말을 하고 혼잣생각을 합니다. 스스로 느낀 착함과 사랑스러움이 밑거름이 되어 스스로 노래를 부릅니다. 학교에서 음악 시간이 되기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저절로 샘솟는 노래입니다. 길을 가면서 노래를 하고, 밥을 짓거나 심부름을 하면서 노래를 합니다. 동생이나 언니와 놀면서 노래를 하고, 소꿉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노래를 합니다. 편지를 쓰면서 노래를 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노래를 합니다. 삶이 온통 노래일 적에는 삶이 온통 사랑입니다. 삶이 온통 사랑이라면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일 테지요. 내 이웃들 누구나 오늘 하루를 착한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가꿀 수 있기를 빕니다. 4347.12.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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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따스하고 너그럽게



  겨울에는 추운 고장에 눈이 펑펑 내려서 쌓입니다. 추운 고장은 겨울마다 눈나라가 됩니다. 겨울이 되어도 따스한 고장에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습니다. 눈발이 비친다 싶어도 어느새 햇볕에 사르르 녹습니다.


  추운 고장은 추운 날씨를 견딜 수 있는 나무가 자랍니다. 따스한 고장은 따스한 날씨를 즐기는 나무가 자랍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추운 고장은 추운 날씨를 견딘다기보다 추운 바람을 즐기는 나무가 자란다고 할 만합니다.


  동백나무는 볕이 잘 들고 따스한 고장에서 잘 자랍니다. 춥거나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에서는 동백나무가 바람을 견디지 못합니다. 배롱나무도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합니다. 유자나무라든지 석류나무도 차가운 바람에 그만 죽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나무를 추운 고장에서 키우자면 몹시 어렵습니다. 그런데, 동백나무나 배롱나무나 유자나무나 석류나무를 제법 추운 고장에서도 키워서 돌보는 사람이 있어요. 이들은 어떻게 이러한 나무를 돌볼 수 있을까요.


  추운 고장이라 하더라도 마을마다 날씨가 다릅니다. 마을마다 날씨가 다르기도 하지만 집집마다 바람과 볕이 다릅니다. 마을에 나무가 우거져서 숲정이가 깊거나 넓다면, 이러한 마을에는 찬바람이 한결 적게 붑니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나무를 알맞게 심은 다음 바깥바람을 가리도록 한다면, 이러한 보금자리는 추운 고장에 있어도 다른 데와 견주어 퍽 따스합니다.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없이 겨울바람을 고스란히 맞는 데에는 동백나무도 석류나무도 심을 수 없지만, 찬바람을 즐거이 맞아들이면서 자라는 나무를 바깥에 넓게 두르면서 안쪽에 여러 가지 나무를 알맞게 어우를 수 있으면, 안쪽에는 포근한 기운이 돌기에 따스한 고장에서 잘 자라는 나무도 심어서 돌볼 수 있어요.


  나무를 살피는 손길은 사랑스러운 손길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알뜰히 살피는 눈길은 믿음직한 눈길입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사랑스러운 손길로 돌보고, 믿음직한 눈길로 가르칩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스러운 손길을 받고 믿음직한 가르침을 물려받습니다.


  학교를 오래도록 보내야 잘 배우지 않습니다. 학원을 여러 군데 다녀야 제대로 배우지 않습니다. 삶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따스히 돌볼 수 있을 때에 제대로 배웁니다. 삶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너그러이 안을 수 있을 적에 제대로 가르칩니다.


  서홍관 님이 빚은 시집 《어머니 알통》(문학동네,2010)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베푼 사랑을 알알이 엮은 시를 담고,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을 고이 아로새긴 노래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늙은 어머니를 흙으로 보낸 늙은 아이(아저씨가 된)는 문득 어릴 적을 돌아봅니다. “나에게도 꿈이 하나 있지. // 논두렁 개울가에 / 진종일 쪼그리고 앉아 // 밥 먹으라는 고함소리도 / 잊어먹고 // 개울 위로 떠가는 / 지푸라기만 / 바라보는 // 열다섯 살 / 소년이 되어보는(꿈).” 열다섯 살 어린이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요. 나이 지긋한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된 시인은 어떤 꿈을 돌아볼까요.


  어머니한테서 받은 사랑을 알알이 가꾸어 내 아이를 낳아 돌봅니다. 어머니가 가르친 이야기를 고이 건사하면서 내 아이를 낳아 가르칩니다. 어머니가 베푼 사랑을 내 이웃하고도 나눕니다. 어머니가 가르친 이야기를 내 동무하고도 주고받습니다.


  ‘어머니 알통’을 되새기는 늙은 시인은 무덤 앞에 섭니다. 어머니 무덤일까요. 아는 이 무덤일까요. 이름을 모르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 무덤일까요. “무덤 앞에 비석조차 없어 / 누구를 사랑했는지 / 누구를 미워했는지 / 알 길도 없이 // 새소리만 들리는 것이 / 더더욱 맘에 들었네(무덤).”


  따스한 햇살이 봄을 부릅니다. 따스한 햇볕이 겨울바람을 다독입니다. 따스한 햇발이 새싹을 틔웁니다. 따스한 햇귀가 멧새를 깨워 아침노래를 엽니다. 차가운 바람은 봄을 부르지 않습니다. 차가운 바람은 겨울을 더욱 춥게 합니다. 차가운 바람은 나무마다 겨울눈이 더 웅크리도록 누릅니다. 차가운 바람은 멧새한테 오들오들 떠는 추위만 더 몰아세웁니다.


  차가운 손길을 받으면서 기쁠 사람은 없어요. 차가운 눈길을 받으면서 즐거울 사람은 없지요. 차가운 소리를 들으면서 기운이 날 사람은 없습니다. 차가운 미움을 받으면서 일어설 사람은 참말 없습니다.


  나한테 돈이 더 있어서 남을 돕지 않습니다. 나한테 사랑이 있어서 남을 돕습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이웃을 도울 수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나한테 돈이 없더라도 나한테 사랑이 있으면 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이름이 높거나 힘이 세지 않습니다. 돈이 많아야 책을 사서 읽지 않습니다. 돈이 많아도 스스로 바쁘거나 고단하거나 사랑이 없는 사람은 책을 못 읽습니다. 돈이 없지만 스스로 즐겁거나 웃거나 노래하면서 사랑을 키우는 사람은 책방에 서서 책을 읽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든 헌책방에 가서 책을 장만하든 동무한테서 빌려서 읽든 합니다. 왜냐하면, 책은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서 읽기 때문입니다. 남이 읽으라고 해서 읽는 책은 가슴으로 스며들지 않습니다. 내가 읽으려고 하는 책만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큰아이 취학통지서를 받으니 / 어떤 엄마가 가슴이 철렁하더란다. // 아이 손을 잡고 입학식 가던 / 아침 이슬 같은 두근거림은 사라지고 // 수학은 어떻게 시켜야 할지, / 영어는 언제부터 시작해야 할지, / 중학교는 어디로 보내야 할지, / 논술은 어떻게 시켜야 할지(취학통지서).”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할 일은 내 삶을 손수 가꾸는 일이면서, 우리 아이들 삶을 아이들이 앞으로 손수 가꿀 수 있도록 가르치면서 돌보는 일입니다. 남한테 맡길 삶이 아닙니다. 손수 들여다보고 헤아리면서 북돋울 삶입니다. 밖에서 찾는 노래가 아니라 스스로 부를 노래입니다. 먼 데에서 찾는 여행이 아니라, 내 보금자리에서 이룰 마실입니다. 저마다 제 보금자리를 알뜰살뜰 일군다면, 이웃집 나들이가 즐거운 여행이 됩니다. 이웃집을 오가는 길이 즐거울 수 있으면, 마을살이가 아름답습니다. 마을살이가 아름다우면 두레와 품앗이는 저절로 이룹니다.


  따스하고 너그럽게 나아가는 길이 즐겁습니다. 따스하고 너그럽게 내미는 손길이 사랑스럽습니다. 따스하고 너그럽게 일구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즐겁게 웃으면서 읽는 책이 가슴 깊이 새록새록 스며듭니다. 즐겁게 웃으면서 하는 일이 가슴 깊이 기쁘게 뿌리내립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햇볕이 있어서 환하고 따스합니다. 사람들 마음에도 해님 같은 사랑이 퍼질 때에 서로 돕고 아끼는 삶으로 거듭납니다. 4347.1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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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4-12-07 12:44   좋아요 0 | URL
시는 거의 읽지 않습니다만,
함께 살기님의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숲노래 2014-12-07 12:5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섣달 들머리에
날마다 즐거우면서 포근한 이야기 누리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