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꽃/숲노래 우리말 2024.4.24.


말꽃삶 33 읽고 말하는 아이어른

― ‘식물도감 읽기’와 ‘풀꽃 읽기’



  날씨를 읽는 길은 여러 가지입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날씨알림’을 손전화를 켜서 살필 수 있고, 보임틀(텔레비전)에서 흐르거나 새뜸(신문)에 적힌 ‘날씨알림’을 듣거나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옆사람이나 이웃사람한테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어디서나 한 일이 있는데, 스스로 하늘과 땅과 바람과 해와 별을 살피고 느껴서 헤아리는 ‘날씨읽기’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어질게 돌보는 길은 여럿입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아이 나이에 따라서 배움터를 보내는 길이 있습니다. ‘아이돌봄’을 다룬 책을 찾아서 읽거나, 다른 보임틀(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는 옆사람이나 이웃사람한테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어디서나 한 일이 있으니, 스스로 아이랑 눈을 마주보면서 온하루를 함께 살아내고 같이 살림하면서 배우는 길이 있습니다.


 ㄱ 식물도감 읽기

 ㄴ 풀꽃 읽기


  풀과 꽃과 나무를 아는 길도 여럿으로 꼽을 만합니다. 먼저 “식물학자가 엮은 식물도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식물학자가 가르치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어디서나 한 일이 있어요. 스스로 풀과 꽃과 나무를 눈여겨보고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지켜보고 바라보고 찾아보는 길입니다.


  모든 식물도감에는 ‘사투리’를 담습니다. 푸른별을 아우르는 ‘큰이름’이 라틴말로도 있을 테지만, 모든 나라마다 다 다른 말씨로 풀이름에 꽃이름에 나무이름을 스스로 지어서 가리킵니다.


  이제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다 다른 나라마다 풀이름을 누가 붙였을까요? 꽃이름과 나무이름을 누가 붙였을까요? 어느 나라 어느 겨레도, 풀꽃나무 이름은 ‘식물학자’ 아닌 ‘수수한 사람’이 스스로 붙였습니다.


  들살림을 하는 사람이 붙인 풀이름입니다. 숲사람을 하는 사람이 지은 나무이름입니다. 들숲살림을 하는 사람이 생각한 꽃이름입니다.


 ㄱ 작명소 아이이름

 ㄴ 어버이 아이이름


  아이이름을 짓는 길은 여럿입니다. 이른바 ‘작명소’에 맡길 수 있습니다. 빼어나거나 이름나거나 훌륭한 글어른을 찾아뵙고서 이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지을 만합니다. 우리 스스로 “아이하고 앞으로 사랑으로 지을 살림살이와 보금자리를 꿈으로 그리는 마음”으로 지을 만합니다.


  식물도감을 엮은 식물학자는 다른 식물도감을 읽고서 새롭게 식물도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곁에 둘 만한 식물도감이라면, “식물학자 스스로 풀꽃나무를 바라보고 살펴서 깨달은 이야기”를 담게 마련입니다.


  더 생각해 봐요. 우리는 누구나 “식물학자가 바라본 풀꽃나무 이야기”를 굳이 읽어야 할 까닭이 없이, “우리 눈으로 풀꽃나무를 바라보고 나서, 우리 마음으로 풀꽃나무 한살림을 알아본 이야기”를 품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상담”을 받아야 “우리 아이 마음”을 제대로 알까요? 우리 스스로 우리 아이하고 이야기를 하고 함께 살아가는 보금자리에서 지켜보고 바라보고 살펴보는 동안, 스스럼없이 “우리 아이 마음”을 느끼고 읽을 수 있지 않나요?


 ㄱ 사전 뜻풀이 읽기

 ㄴ 내가 뜻풀이 붙이기


  낱말뜻을 헤아리는 길도 매한가지입니다. 다른 언어학자나 국어학자가 낱말 하나를 오래오래 들여다보고서 요모조모 살핀 끝에 붙인 뜻풀이를 낱말챡을 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어느 낱말 하나를 오래오래 헤아리고 두고두고 생각한 끝에 스스로 뜻풀이를 붙일 수 있습니다.


  풀과 꽃과 나무를 알고 싶다면, 식물도감을 펼 수도 있되, 이에 앞서 우리 스스로 풀과 꽃과 나무 곁에 서서 풀과 꽃과 나무를 들여다볼 노릇입니다.


  새를 알고 싶다면, 조류학자가 갈무리한 조류도감을 펴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새를 가만히 지켜보고 오래도록 살펴보면서 이웃으로 삼을 노릇입니다.


  텃밭을 짓고 싶으면, 땅을 마련해서 손수 호미질에 낫질에 가래질로 돌볼 노릇입니다. ‘텃밭도감’을 읽거나 ‘귀농학교’를 다녀야 텃밭을 지을 수 있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배움길은 ‘고비’하고 ‘고개’를 넘으며 천천히 돌아갑니다. 품을 들이고 짬을 들이는 배움길입니다. 텃밭을 스스로 짓다가 엉뚱하거나 뜬금없는 짓을 벌이고 말아서, 그만 몽땅 죽이거나 빈손이 될 수 있습니다. 남한테 안 기대고서 혼자 나아가다가 막다른 길에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해보다가 으레 담벼락에 막혀서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식물학자도 국어학자도 조류학자도 모두 이런 빈손질과 눈물질을 거칩니다. 빈손질과 눈물질을 안 거치는 전문가란 아무도 없습니다. 수학자와 과학자도 끝없이 헛발질을 합니다. 틀린 길(공식·방정식)을 그야말로 오래도록 붙잡고서 씨름한 끝에 “아하! 내가 이렇게 틀렸구나!” 하고 깨닫는 전문가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내가 이렇게 틀린 줄 깨달을 때”에 “이제부터 슬기롭고 어질게 길을 밝히는 살림”에 눈을 뜹니다.


 ㄱ 아이 : 눈을 뜨려는 길

 ㄴ 어른 : 눈을 틔우려는 길


  아이는 어른 곁에서 눈을 뜨려는 사람입니다. 어른은 아이 곁에서 눈을 틔우는 사람입니다. 낳은 아이뿐 아니라, 온누리 모든 아이는 “우리 아이”입니다. 아이들도 어른을 이처럼 바라봅니다. 아이로서는 온누리 모든 어른이 “우리 어른”입니다.


  눈을 뜨려고 태어나서 하나씩 손수 해보고 맛보고 겪으면서 배우는 길인 아이입니다. 아이는 손수 해보는 동안 차츰 철이 듭니다. 어느 해에 이르러 무르익는 마음이 확 움트고 싹틀 적에 꽃봉오리가 터지지요. 꽃빛으로 환하게 눈뜬 아이는 어른이라는 ‘철빛’을 품고서 일어섭니다.


  어른도 손수 해보는 동안 천천히 철을 가다듬습니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쓰러지고 자빠지는 동안에 빙그레 웃으면서 다시 하고 또 하고 거듭 합니다. 먼저 이 길을 걸어 보면서 쓴맛과 단맛을 누리는 길잡이가 어른입니다. 이리하여 어른다운 어른이란, “손을 잡아끄는 사람”이 아니라, “여태 걸어온 길을 즐겁고 상냥하게 이야기로 들려주어서, 모든 아이가 저마다 즐겁게 스스로 새길을 나아가도록 북돋우면서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할 만합니다.


 읽기에 잇고 익혀서 이곳에 있다


  읽는다고 해서 다 알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읽습니다. 읽으며 느끼고 받아들입니다. 읽은 여러 살림을 헤아리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잇노라면, 어느새 손에 익고 눈에 익으며 마음에 익어요. 바야흐로 무르익어 열매를 이루고 씨앗을 맺을 즈음에는 이곳에서 새롭게 서는 길을 알아차리지요. 드디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날씨알림을 손전화로 챙기는 길이 나쁘지는 않되, 스스로 하늘읽기하고 등지게 마련입니다. 식물도감에 기대기에 나쁘지는 않되, 스스로 풀빛과 꽃빛과 나무빛을 놓치거나 잊게 마련입니다. 아이를 배움터(학교)에 보내는 길은 안 나쁘되, 아이하고 함께 보금자리를 사랑으로 짓는 살림을 그만 놓치거나 잊기 일쑤입니다.


  스스로 다 하자면 오래 걸리거나 버거울 수 있겠지요. 이때에는 어른답게 아이한테 일손을 넘기면 느긋해요. 혼자 붙잡는 사람은 어른이 아닌 꼰대입니다. 기꺼이 나누면서 스스럼없이 노래하는 사람이기에 어른입니다. 기쁘게 받아들여서 함께 펴고 짓는 살림길을 익히는 사람이기에 아이예요.


  우리 보금자리에 우리 품을 들이고 우리 짬을 내기를 바랍니다. 서로 아이어른으로 마주하는 하루를 차근차근 지어 봐요. 품을 들이기에 풀어내어 알아봅니다. 짬을 내기에 작은 곳부터 씨앗이 움트면서 눈을 뜹니다. 아이는 어른을 눈여겨보며 자라려는 숨결인 사람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들여다보며 크려는 숨빛인 사람입니다. 아이는 어른을 귀담아들으며 일어서려는 숨소리인 사람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귀여겨들으며 일을 하려는 숨길인 사람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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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18 나의 내 내자



  우리말은 ‘나·너’입니다. ‘나·너’는 저마다 ‘ㅣ’가 붙어서 ‘내·너’로 씁니다. “나는 너를 봐”나 “내가 너를 봐”처럼 쓰고, “네 마음은 오늘 하늘빛이야”처럼 쓰지요. 그리고 ‘저·제’를 씁니다. “저로서는 어렵습니다”나 “제가 맡을게요”처럼 쓰지요.


 my 私の 나의


  어느새 참으로 많은 분들이 ‘나의(나 + 의)’ 같은 말씨를 뜬금없이 씁니다. 이 말씨는 오롯이 ‘私の’라는 일본말을 옮겼다고 할 만합니다. 일본사람은 영어 ‘my’를 ‘私の’로 옮기더군요.


  우리나라는 스스로 영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첫째로는 우리나라로 들어온 선교사가 영어를 알리고 가르쳤습니다. 이들 선교사는 ‘한영사전’까지 엮었지요. 이다음으로는 일본이 총칼로 쳐들어와서 억누르던 무렵 확 들어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손으로 엮은 책으로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어요. 선교사가 가져온 책으로 배웠거나, ‘일본사람이 영어를 배우려고 일본사람 스스로 엮은 책’을 받아들여서 배웠습니다.


  일본사람은 웬만한 데마다 ‘の’를 붙여서 풀이했고, 일본책으로 영어를 배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말씨 ‘の’를 ‘-의’로 적었어요. 일제강점기에 ‘-의’ 말씨가 부쩍 퍼졌습니다. 일본이 물러난 뒤에 비로소 우리 손으로 영어 배움책(교재)하고 낱말책(사전)을 엮는데, 웬만한 책은 일본 배움책하고 낱말책을 고스란히 옮겼어요. 겉으로는 한글이되 속으로는 일본말씨가 ‘영어를 배우는 길’에 밀물처럼 쏟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내는 영어 낱말책조차 아직 ‘my = 나의’로 풀이합니다. 우리말 ‘내’나 ‘제’로 못 적습니다.


  우리말로 ‘내·제’나 ‘우리’를 써야 할 곳에 ‘나의’를 적는 말씨가 몹시 번졌어요. “나의 가족”이나 “나의 마을”이나 “나의 바람”이나 “나의 살던 고향”이나 “나의 손”이나 “나의 엄마”나 “나의 여름”이나 “나의 작은 집”이나 “나의 투쟁”처럼 끝없이 퍼집니다.


  우리는 우리 말씨를 차근차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 집”이나 “우리 마을”이나 “내 바람”이나 “내가 살던 마을” 같은 수수한 우리 말씨를 찾아낼 수 있을는지요. “내 손·우리 손”이나 “우리 엄마”나 “여름·올여름·내가 보낸 여름”이나 “이 작은 집·작은 집·우리 작은 집”이나 “나는 싸운다·싸우다·우리는 싸운다”처럼 우리답거나 나다운 말씨를 차근차근 돌아볼 수 있을는지요.


 내 나라 내 집 


  ‘나의’가 아닌 ‘내’로 적어야 알맞은데, ‘내’를 쓸 적에 외려 안 어울리는 곳이 있습니다. “내 나라 내 겨레” 같은 자리입니다. “내 집”이라 할 적에는 제대로 갈라야 하지요.


다시 만난 내 나라 문화와 내 부모의 언어는 그 존재만으로도 큰 위로이자

→ 다시 만난 우리나라 삶과 우리 어버이 말은 그대로 반갑고

→ 다시 만난 이 나라 살림과 우리 어버이 말은 그저 다독여 주고


  나라나 겨레나 어버이를 가리킬 적에는 ‘내’가 아닌 ‘우리’를 씁니다. “내 아버지”가 아닌 “우리 아버지·울 아버지”입니다. 또는 ‘우리’를 안 붙이고서 “아버지”라고만 단출히 씁니다. “우리나라”나 “우리 옛살림”이나 “우리 노래”로 써야 알맞을 텐데, “이 나라”처럼 ‘이’를 써도 어울립니다. 곧 “이 나라 이 겨레”라 할 수 있습니다. 집도 “이 집”이라 할 수 있고요.


  스스로 장만해서 살아가는 집이라는 뜻으로 “내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이 집에 나 혼자 안 산다면 “우리 집”이라 해야 어울려요. 곁님하고 아이들하고 어버이가 함께 있으면 “내 집”이 아닌 “우리 집”입니다.


 내자 안해 아내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은 다음처럼 풀이합니다.


내자(內子) : 1. 남 앞에서 자기의 아내를 이르는 말 2. 옛날 중국에서, 경대부의 정실(正室)을 이르던 말

아내 :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 ≒ 규실·내권·처·처실

처(妻) :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 = 아내


  1920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朝鮮語辭典》은 다음처럼 풀이하지요.


內子 : 自己の妻の稱.

안해 : 妻

妻 : つま


  1940년에 문세영 님이 펴낸 《조선어사전》은 다음처럼 풀이하더군요.


내자(內子) : 자기의 안해

안해 : 1. 남편이 있는 여자. 아낙. 妻 2. 남편이 자기의 처를 일컫는 말.

처(妻) : 안해


  우리는 언제부터 ‘안해’라는 이름을 썼을까요? 일본은 일찌감치 ‘內子’라는 한자말을 썼습니다. ‘처(妻)’는 그저 한자말입니다. ‘아내·안해’는 “= 안사람”입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요, “집에 머물며 집일을 하는 사람”이란 뜻을 담는 얼개입니다.


  우리 발자취를 보면, 임금이나 벼슬아치가 아닌, 흙을 가꾸어 살림을 하면서 아이를 사랑으로 낳은 여느 사람들은 집일을 가시버시가 함께 맡았습니다. 가시(여성)만 집일을 하지 않아요. 버시(남성)도 집일을 함께하지요.


  아기가 태어나면 세이레 동안 어머니가 어두운 바깥채에 가만히 누워서 몸을 추스르면서 아기를 돌보는데, 아기를 낳는 어머니는 집일을 마땅히 못 해요. 그러면 누가 아기 어머니를 먹이고 입힐까요? 바로 지아비이지요. 세이레 동안 누가 집일을 할까요? 바로 사내인 아버지입니다.


  모든 살림집에 할머니가 함께 살았다고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단출히 살아가는 조그마한 집을 헤아리면 쉽게 실마리를 얻을 만해요. 지난날 흙사람(농민)은 손수 밥옷집을 건사했습니다. 순이(여성)하고 돌이(남성)는 나란히 밥옷집 살림을 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한쪽은 바깥일을 하고 한쪽은 집일을 하는 얼개가 아닌, 함께 바깥일이며 집일을 하던 살림이었어요.


  일본말 ‘내자’를 아직까지도 쓰는 낡은 분이 이따금 있어요. 1992년에 나온 《全斗煥 육성증언》(조선일보사)을 보면 “그래서 공식 행사에서 내자가 잘 따라나서지 않으려고 해요(174쪽)” 같은 대목이 있더군요. 예전에 나라지기(대통령)를 맡은 적 있는 전두환 씨는 ‘내자’라 하더군요. 아마 이이뿐 아니라 나이든 적잖은 사내는 일본말 ‘내자’를 오래도록 그냥 썼으리라 봅니다.


 여보 짝 곁님


  조선 무렵에도 ‘안해’란 말을 썼다 하지만, 이 말을 오늘날 그대로 쓰기에는 걸맞지 않다고 느낍니다. ‘순이 = 안사람’이라는 틀이나 굴레는 옳지 않거든요. 가시버시를 이루는 짝을 가리키는 이름을 새롭게 헤아릴 노릇입니다.


  먼저 오래도록 쓴 ‘여보’가 있습니다. ‘이녁’도 있어요. 가볍게 부르는 이름인데, 수수하게 ‘짝·짝꿍’이 있으며, ‘사랑’으로 가리킬 만합니다. 또는 ‘사랑꽃’으로 가리킬 수 있는데, ‘짝·짝꿍’이나 ‘사랑·사랑꽃’은 순이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돌이도 이 이름으로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곁님·곁씨’ 같은 이름을 새로 지어서 쓸 만해요. 곁에 있으면서 함께 집안을 돌보고 살림을 일구는 사이라는 뜻을 ‘곁님·곁씨’에 담는 얼개입니다.


  우리말은 순이돌이를 억지로 안 가릅니다. 우리말은 순이돌이를 아우릅니다. ‘나·너’도 ‘우리’도 순이돌이를 가르지 않아요. 일본말 ‘내자’뿐 아니라 ‘안사람·아내·안해’ 같은 슬픈 말도 고요히 내려놓고서 새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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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17 지지배배 한글날 보금숲

― 어진내와 주시경



  해마다 10월 9일은 ‘한글날’입니다. 한글을 기리고 돌아보면서 우리 말글살림을 헤아리는 하루입니다. 흔히 세종 임금님이 한글을 지었다고 여깁니다만, ‘한글’이란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주시경 님이 처음으로 붙였습니다. 세종 임금님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뜻은 ‘훈민’을 하는 ‘정음’이요, ‘사람들을 가르치’는 ‘바른소리’를 나타냅니다.


 바른소리


  우리가 오늘날 쓰는 글은 처음에는 ‘소리(바른소리)’였습니다. 우리글은 말소리를 비롯해 물소리에 바람소리에 새소리를 고루 담는 얼거리일 뿐 아니라, 웃음짓과 몸짓과 빛결을 두루 담는 얼개입니다. ‘말을 담는 그릇’을 넘어 ‘소리를 옮기는 그릇’인 ‘바른소리(정음)’예요. ‘말’이란, ‘마음’을 귀로 알아듣도록 담아낸 소리입니다. ‘글’이란, ‘말’을 눈으로 알아보도록 옮긴 그림입니다.


  마음을 담고 소리를 옮길 수 있는 놀라운 글(바른소리)인 훈민정음인데, 조선 오백 해 내내 ‘암글’이나 ‘아해글(아이나 쓰는 글)’이었고, 한문은 ‘수글’이었어요. 임금님도 벼슬아치도 글바치도 모두 사내(수)였고, 가시내(암)는 집에서 조용히 집안일을 맡는 몫으로 억눌렸어요. 애써 지은 우리글을 스스로 ‘큰글’이자 ‘한겨레 글씨’로 여겼다면 처음부터 빛났으리라 생각해요. 곰곰이 보면, 암글이란 이름으로 가시내하고 어린이만 쓰는 글로 억눌린 긴 나날이란, “우리글을 지키고 돌보고 가꾼 사람은 바로 가시내(여성)하고 어린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힌샘


  일본이 이 나라를 집어삼키던 무렵, 주시경 님은 〈독립신문〉을 여미는 일을 맡았어요. 펴낸이는 서재필이요, 엮은이는 주시경입니다. 인천 제물포에 있던 ‘이운학교’를 다닌(1895∼1896) 주시경 님은 스스로 말글빛을 깨우치면서 ‘우리말틀(국어문법)’을 처음으로 세웁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는 첫 길잡이(교사)로 바쁘게 살았습니다. 이런 땀방울이 시나브로 모여, ‘국문·언문’처럼 가리키던 우리글을 ‘한글’로 일컫자고 밝혔고, 스스로 ‘한힌샘’이란 이름을 지었어요. ‘한힌샘’은 “한글을 널리 알리는 맑은(하얀) 샘”이란 뜻입니다.


  우리 겨레는 ‘한겨레’입니다. 서울 한복판을 가르는 냇물은 ‘한가람(한강)’입니다. 한자로는 ‘한국(韓國)’이되, 우리말로는 ‘한나라’입니다. ‘한글’에 붙인 ‘한-’은 ‘하늘(한울)’을 가리키고, ‘크다’와 ‘하나’를 가리키며, ‘해’와 ‘하얗다’를 가리킵니다. 10월 9일 한글날이란, 누구나 마음을 밝히고 생각을 가꾸는 밑씨앗을 말 한 마디와 글 한 줄로 담아서 널리 배우고 나누자는 뜻을 펴자는 꿈을 담은 하루예요.


 어진내


  ‘인천’이라는 이름을 곧잘 ‘어진내’로 풀곤 합니다. ‘어질다’란 ‘어른다운’ 매무새와 마음결을 가리켜요. ‘내(냇물)’란 늘 맑고 밝게 뭇목숨을 살리고 살찌우며 사랑하는 가없는 빛살을 가리킵니다. ‘어진내’란, “스스로 깨닫고 먼저 앞장서는 이슬받이처럼 참하고 아름답게 눈빛을 틔워 이 삶터에 사랑을 펴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고을”을 밑뜻으로 품습니다.


  새길(신학문)을 배우려고 인천으로 걸음을 뗀 주시경 님이 지어서 편 ‘한글’이라는 이름처럼, ‘어진내’ 고을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참하면서 착하고 아름답게 말길을 열고 글길을 틔울 만합니다. 하늘빛으로 함께 하나되면서 해맑게 노래하는 마음으로 한글·한말을 돌아볼 수 있다면, 한마음·한뜻·한넋·한사랑으로 피어나는 한마을을 일굴 만합니다.


 보금말


  봄에 찾아온 제비가 가을 첫머리에 하늘을 까맣게 덮으면서 빙그르르 돌다가 어느새 한덩이를 이루더니 훅 날아갑니다. 예전에는 인천에도 봄제비가 많이 찾아왔지만 이제는 봄을 맞이하는 제비에, 가을에 떠나는 제비를 찾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도 제비는 퍽 줄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적잖은 제비가 골골샅샅 찾아와서 처마밑에 깃들며 사랑스레 노래해요. 뭇새가 알을 낳아 새끼를 돌보려고 둥그렇게 지어서 보듬는 자리를 ‘둥지’나 ‘보금자리’라 합니다. 마을에 찾아와 노래하는 새를 지켜본 사람들은 ‘집살림’이 포근하거나 아늑할 적에 ‘둥지’나 ‘보금자리’란 이름을 붙입니다. 보금자리처럼 보금마을과 보금숲을 이루고, 보금말을 쓰는 넉넉한 가을이기를 바랍니다.


  집안을 보듬고 보살피듯, 말결을 돌보고 토닥일 수 있기를 바라요. 어른스럽게 살림을 지어 어린이 곁에서 사랑을 물려주듯, 서로서로 따사로이 마주하고 즐겁게 어우러지는 마음을 우리말과 우리글에 어질고 슬기로이 담아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쓰고 나눌 말이란 “보금자리를 가꾸는 말”인 ‘보금말’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돌보고, 이웃이랑 동무하고 어깨를 겯고 나아갈 줄 아는 보금말입니다. 풀꽃나무를 돌아보면서 들숲바다를 품을 줄 아는 보금말입니다.


 지지배배


  제비나 참새가 잇달아 노래하는 소리를 ‘지지배배’로 담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이나 수다를 떠는 사람한테 으레 ‘지지배배·지지배’ 같은 또이름을 붙이곤 하는데, “새처럼 노래하듯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지지배배·지지배’는 ‘계집·계집아이·계집애’로 가리키는 말씨하고 어울리기도 합니다. ‘지지배’하고 ‘계집’은 말밑이 다르지만, ‘글이 아닌 말로 살림을 짓던 지난날’을 헤아려 봅니다. 집에서 순이가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삶을 가르치고 살림을 물려줄 적에 늘 끊임없이 ‘말을 펴야 하던’ 매무새를 고스란히 담은 자취를 보여주거든요.


  오늘날이야 책을 손쉽게 장만하거나 빌릴 수 있고, 글을 매우 쉽게 만납니다. 꼭 책이 아니어도 손전화로 글을 잔뜩 읽어요.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은 ‘누구나 글살림’인데, 지난날은 ‘누구나 말살림’이었어요. 지난날에는 보금자리에서 집밥옷이라는 세 가지 살림살이를 돌이보다는 순이가 떠맡았다고 여길 만하고, 살림살이를 돌보면서 ‘글 아닌 말’만 썼으니, ‘지지배배’ 노래하듯 자꾸자꾸 말로 타이르고 알려주고 가르치고 보여주었지요.


 굴레


  훈민정음이 1443년에 태어났어도 돌이는 수글인 한문만 썼습니다. 훈민정음은 조선 오백 해 내내 ‘우리글’ 아닌 ‘순이글·암글·아해글’이었습니다. 이 굴레를 비로소 떨치려고 움직이는 사람이 나타난 때는 총칼굴레(일제강점기)였으니, 곱으로 굴레였던 터전을 그야말로 새롭게 일으키려는 마음이 말글을 바탕으로 샘솟거나 터져나왔다고 여길 만합니다.


  누구나 들숲바다를 누릴 적에 누구나 튼튼합니다. 누구나 넉넉하게 살림을 펼 적에 누구나 즐겁습니다. 몇몇 사람만 푸른들과 파란하늘을 누려야 하지 않아요. 누구나 풀빛과 하늘빛을 즐겁게 머금으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아름나라입니다. 이처럼 누구나 스스로 뜻한 바나 꿈이나 길을 말글에 넉넉히 실어서 나눌 수 있어야 열린터예요.


  억누르거나 가두는 굴레로는 생각에 날개를 못 답니다. 어깨동무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홀가분한 터전일 적에 생각날개를 펴면서 꿈을 이루는 길에 나설 만해요. 말 한 마디는 작고, 글 한 줄은 조그맣지요. 그런에 이 작은 말씨하고 글씨는 풀꽃씨나 나무씨처럼, 앞으로 숲을 푸르게 이룰 바탕이에요. 말씨 하나를 가다듬고, 글씨 하나를 추스르면서 함께 빛나는 한글날로 삼아 봐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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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16 묻다



  우리말 ‘묻다’는 세 가지입니다. ‘파묻는’ 길이 하나요, ‘물어보는’ 길이 둘이요, ‘물드는’ 길이 셋입니다. 소리는 같되 쓰임새나 뜻이 사뭇 다른 세 가지 ‘묻다’입니다.


  글은 말을 옮긴 그림입니다. 한글을 으레 ‘소리글(표음문자)’로 여기지만, ‘묻다’를 비롯한 숱한 우리말을 하나하나 짚노라면, 한글은 ‘소리글 + 뜻글’인 ‘뜻소리글(표의표음문자)’이라 해야 걸맞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은 “소리만 담는 글”이 아닌 “뜻을 함께 담는 글”입니다.


  우리말 ‘묻다’를 알맞게 쓰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말 ‘묻다’를 도무지 안 쓰는 사람도 많습니다. 삶을 가꾸고 살림을 돌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수수한 사람들은 글을 모르거나 책을 안 읽되, 말을 말다이 여미어요. 글을 알거나 쓸 뿐 아니라 책을 많이 읽는 이들은 삶·살림·사랑하고 등진 채 ‘묻다’가 아닌 ‘중국스럽거나 일본스러운 한자말’하고 영어를 붙잡곤 합니다.


묻다 1 ← 매장(埋葬), 사장(死藏), 은닉, 은폐, 호도, 매립, 매몰, 장사(葬事), 장례, 장례식, 초상(初喪), 상(喪), 삽목


묻다 2(물어보다) ← 질문, 문의, 문제(문제점·문제적), 설문(設問/설문조사), 질의, 질문대답, 질의응답, 큐앤에이(Q&A), 상의(相議), 상담, 요구(요구사항), 요청, 간청, 권유, 대답 요구, 책임 요구, 전갈, 부탁, 청탁, 청구, 청원, 타진, 섭외, 장소섭외, 주문(注文/주문사항), 제언, 제시(제안), 제의(提議), 오퍼(offer), 제기, 제창(提唱), 문제 제기, 의뢰, 의심(의심스럽다·의심쩍다), 인터뷰, 조사(調査), 사찰(査察), 연구, 탐문, 탐색, 탐사, 신문(訊問), 심문, 허락, 신청, 고문(顧問), 시험(試驗), 시험문제, 취조, 발본색원, 수소문, 안부(安否), 문안(問安), 청취조사, 사정청취(事情聽取), 연락, 자문(諮問), 자문(自問), 구애(求愛/구애자), 구혼(구혼자), 청혼(청혼자), 프로포즈(프러포즈),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실례(失禮)합니다


묻다 3 ← 흔적이 남다


  우리말은 ‘묻다’ 하나가 아니기에 ‘파묻다’나 ‘끝장내다’나 ‘보내다’나 ‘감추다’나 ‘숨기다’를 쓰기도 합니다. ‘여쭈다·여쭙다’나 ‘알아보다·알리다’나 ‘캐다·캐묻다’나 ‘좇다·짚다’나 ‘찾다·찾아보다’나 ‘시키다’를 쓰기도 해요. ‘물들다’나 ‘붙다·들러붙다’나 ‘남다’를 쓰기도 하고요.


  미국사람은 ‘화이트 하우스’처럼 수수하게 말할 뿐인데, 막상 우리나라는 ‘하얀집·흰집’이 아닌 ‘백악관’으로 옮깁니다. ‘하우스’하고 ‘화이트’처럼 쉬운 영어를 쓴 미국인데, 우리나라 글바치는 ‘집’하고 ‘하얗다·희다’처럼 쉬운 우리말을 안 씁니다.


  기와가 푸른빛이라면 ‘푸른기와집’이나 ‘푸른지붕집’이나 ‘푸른집’입니다만, 이 나라 글바치는 애써 ‘청와대’처럼 이름을 붙였어요. 우리말로 쉽게 쓰면 멋도 안 나고 높지도 않다고 여기는 마음 탓입니다. 영어나 한자말을 붙여야 멋스럽거나 높다고 여깁니다.


하얀집 ← 백악관

푸른집 ← 청와대


  갖추거나 차려서 입는 옷이니 ‘갖춤옷’이나 ‘차림옷’이지만, 굳이 ‘양복’이란 한자말을 쓰는 우리나라예요. ‘수레’를 가리키는 ‘카(car)’를 그냥 쓰는 미국이요 영어인데, 우리는 ‘수레’를 새롭게 살리는 길을 아예 생각조차 안 합니다. 다만, 아이들이 ‘자동차’를 못 알아들으니 할매할배는 ‘부릉부릉’이나 ‘부릉이’처럼 소리를 흉내낸 이름을 쓰지요.


  이때에 생각해 볼 만합니다. 할매할배가 아이한테 “자, 우리 부릉이 타러 가자.” 하고 말한 지 무척 오래되었는데, ‘부릉이’를 ‘자동차·차·자가용’을 풀어낸 즐겁고 새로우며 쉬운 우리말로 언제쯤 삼을 수 있을까요?


  영어 ‘트레인’은 뜻이 대단하지 않습니다. 한자말 ‘기차’도 뜻이 대단하지 않아요. 할매할배는 아이한테 “오늘은 칙폭이 타러 갈까?” 하고 말합니다만, 이 ‘칙폭이’를 언제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삼으려나요?


부릉이 ← 자동차

칙폭이 ← 기차


  생각하는 사람은 눈망울이 반짝반짝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힘(권위)을 내세우려 하고, 눈망울이 죽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삶·살림·사랑을 짓기에, 말도 스스로 지으니,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여 지은 말을 ‘사투리’라 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힘을 내세우고 멋을 앞세우려 들더군요. 지난날에는 중국을 섬기거나 따르거나 우러르면서 중국말이며 한문이어야 한다고 여겨요.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니 스스로 말을 지을 줄 모르고, 글조차 스스로 안 짓습니다. 중국을 섬긴 이들은 중국글을 흉내내었을 뿐입니다.


  일본이 총칼로 치고들어와서 거의 마흔 해를 억누르다 보니, 이동안 이 나라 글바치는 거의 다 일본물이 들었어요. 일본말을 아주 잘 쓸 뿐 아니라, 일본글을 숱하게 써냈지요. 이들 글바치는 일본이 물러간 뒤에 “마흔 해나 써서 익숙하다면 일본 한자말도 우리말로 삼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희승이 엮은 《콘사이스 국어사전》은 일본 낱말책 이름인 ‘콘사이스’까지 베꼈는데요, 이만큼 속속들이 썩었어요. 일본 한자말을 섬긴 이들도 스스로 새말을 지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저 그들 스스로 익숙한 일본 한자말을 외워서 흉내내었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저는 늘 물어봅니다. 낡은 마음은 파묻으면 어떻겠어요? 낡은 마음을 파묻어야 겨울을 지나 새흙이 되어 새싹이 돋는 밑거름이 됩니다. 낡은 한자말로 쓴 흉내낸 글은 이제 떠나보내면 어떻겠어요? 낡은 말씨로는 새나라도 새마을도 새마음도 새길도 새글도 새넋도 새살림도 새터도 새빛도 새꿈도 못 그리게 마련입니다.


  이제는 사투리를 쓸 때입니다. 스스로 지은 새말인 사투리를 저마다 즐겁게 쓰면서 어깨동무할 때입니다. 어린이 눈높이로 바라보고 헤아리면서 말빛을 북돋울 때입니다.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묻지 않더군요. 묻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고이고 갇힌 채 흉내쟁이에 머물 뿐 아니라, 우두머리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가더군요. 묻지 않아 스스로 고이거나 갇힌 이들은 어린이를 바라보지 않고, 푸름이를 마주하지 않기도 해요. 나이가 들어 늙은 티를 낼 뿐, 스스로도 아기로 태어나 어린이로 살며 푸름이로 자란 삶길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풀꽃·풀꽃나무 ← 화초(花草), 무명초(無名草), 백화(百花), 백화초목(百花草木), 초목, 목초, 화훼, 화훼식물, 식물, 녹색식물, 자연(자연환경·자연조건), 대자연, 천지자연, 산야, 산천, 산하(山河), 산수(山水), 산천초목, 백성(백인百人), 백정, 민중(민초), 양민, 중생(衆生), 인민, 서민, 시민, 소시민, 불가촉(불가촉천민), 천민(賤民), 프티부르주아, 대중(대중적), 도민(道民), 만백성, 만인, 국민, -자(者), -인(人), -민(民), 잡상인, 잡스럽다(잡놈雜-·잡배雜輩·잡물雜物·잡다雜多·잡동사니雜同散異·잡종·잡학), 잡초(잡풀), 잡화(雜花/잡꽃), 무명화(無名花), 방초(芳草), 야생초, 허브, 약초, 약풀, 초야(草野), 생화(生花)


  풀꽃나무를 보기를 바라요. 산천초목도 식물도 백화초목도 떠나보내요. 백성도 시민도 서민도 인민도 민중도 국민도 대중도 아닌, 풀꽃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언제까지 잡초나 야생초처럼 낡은 말씨에 사로잡히려는지요?


  쉬운 말이기에 사랑이요 어깨동무(평화·평등)입니다. 안 쉬운 말이기에 미움이요 싸움이여 겨룸이며 다툼입니다. 쉬운 말이기에 어린이 마음을 읽고 나누면서 아끼고 돌봅니다. 안 쉬운 말이기에 어린이를 다그치고 나무라고 가르치고 길들이려 합니다.


  어린이는 부릉이를 안 몹니다. 어린이는 걸어다니다가 뛰고 달립니다. 숱한 어른들은 어린이 곁에서 걷지 않더군요. 어린이를 부릉이에 태울 마음은 있어도, 부릉이를 내다버리고서 어린이랑 손을 잡고서 걷고 뛰고 달릴 마음은 좀처럼 못 봅니다.


  둘레를 봐요. 안 걸어다니는 사람이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는 길(정책)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하고 손을 잡고서 느긋이 걷다가 놀다가 쉬다가 하늘바라기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배움수렁(입시지옥)을 걷어낼 생각을 할까요?


  참말로 스스로 물어볼 때입니다. ‘질문’ 따위는 집어치울 때입니다. 묻고 묻고 묻으면서 스스로 꽃으로 하늘빛으로 바람으로 거듭날 오늘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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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15 ‘-의’ 안 쓰려 애쓰다 보면



  어쩐지 갈수록 ‘나의’를 책이름에 넣는 분이 늘어납니다. 이원수 님이 쓴 노래꽃(동시) 가운데 〈고향의 봄〉은 첫머리를 “나의 살던 고향은”으로 엽니다. 이원수 님하고 오랜 글벗인 이오덕 님은 “내가 살던 고향은”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짚었고, 이원수 님도 바꾸어야 맞다고 여기면서도 “사람들이 다 그렇게 익숙하게 쓰는데 어쩌지요?” 할 뿐, 스스로 바꾸지 못 하였습니다.


  잘 쓰든 잘못 쓰든, 입에 붙고 손에 붙은 말씨를 털기는 만만하지 않을 만합니다. 그런데 “익숙하니 못 바꾸겠다”고 여기면 앞으로도 잘못을 고스란히 퍼뜨리겠다는 뜻입니다. 총칼을 앞세워 우리나라로 쳐들어온 일본은 우리말·우리글을 짓밟으면서 일본말·일본글만 쓰도록 억눌렀어요. 때로 치면 1910∼1945년이라지만, 일본 총칼무리는 더 일찍 이 나라에 스며들었기에 마흔∼쉰 해에 걸쳐 일본말·일본글에 길들고 익숙했다고 여길 만합니다.


  이 때문에 1945년 8월 15일 뒤에도 일본말·일본글을 그대로 쓰는 사람이 수두룩했습니다. 우리로서는 1945년 8월 15일이 ‘풀려남(해방)’이지 않아요. 하루아침에 뚝딱 씻거나 털었을까요? 아닙니다. 글바치는 1946년에도 1948년에도 “그동안 익숙하게 쓴 일본말·일본 한자말을 왜 나쁘다고 여기느냐?”고 따졌어요. 1953년에도 1960년에도 1975년에도 1985년에도 1990년에도 1994년에도 “일본 한자말을 굳이 털어내야 하지는 않잖은가?” 하고 되레 따졌지요. 2000년으로 넘어선 오늘날에는 일본말씨인지 일본 한자말인지 아예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그림 속 나의 마을 → 그림으로 남은 마을 . 우리 마을을 그리다 . 우리 마을 그림

나의 외국어, 당신의 모국어 → 나는 바깥말, 그대는 겨레말 . 나는 이웃말, 너는 우리말

나의 두 사람 → 나와 두 사람 . 내 사랑 두 사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내가 디딘 문화유산 . 내가 본 문화유산 . 내가 찾은 문화유산 . 내가 만난 문화유산


  책이름에 스민 ‘나의’는 어떻게 손질하면 어울릴까요? 일본 글바치는 영어 ‘my’를 ‘私の’로 옮겼습니다. 일본이 총칼로 쳐들어온 뒤로 우리나라 글바치는 ‘私の’를 ‘나의’로 옮겨서 퍼뜨렸습니다.


  아이는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익힙니다. 아이로서는 ‘넘어지기가 익숙하’니까 늘 넘어져야 할까요? 넘어지던 몸짓을 털어내고서 신나게 뛰고 달리고 걷는 새길로 나아가야 할까요?


  일본말씨나 일본 한자말을 그냥 쓰는 말버릇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그저 우리말을 등지는 버릇입니다. 우리는 우리말씨하고 우리 낱말이 있으니, 우리말씨를 살피고 우리 낱말을 헤아릴 노릇일 뿐입니다. 우리한테 우리말이 없으면 일본말이건 영어이건 받아들일 만합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아직 없는 말이 있으면, 우리 나름대로 생각을 기울여 처음으로 새로 지을 만합니다.


  모든 말은 마음을 담습니다. 마음이 맞는 사이라면 말이 없어도 서로 알아볼 뿐 아니라 즐겁습니다. 마음이 맞든 안 맞든, 무엇을 생각하는지 또렷하게 알 수 있도록 ‘마음을 소리에 얹어 나누면서 태어나는 말’입니다.


  글이란, ‘마음을 소리에 얹어 나누면서 태어난 말을 눈으로도 볼 수 있도록 담은 그림’입니다.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글쓰느냐란, 어떻게 마음을 기울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나의 종이들 → 나와 종이 . 나랑 종이 . 내 곁에 종이 . 나를 스친 종이 . 내가 만진 종이 . 나한테 온 종이 . 내가 읽은 종이

나의 투쟁 → 나는 싸운다 . 나는 싸웠다 . 싸운 길 . 싸우다 . 우리 싸움 . 우리는 싸운다


  아무렇게나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여기는 분은 “되도록 ‘-의’를 안 쓰려고 애쓰”십니다. 애쓰기란 안 나쁩니다. 다만, 안 쓰려고 애쓰면 오히려 자꾸자꾸 ‘안 쓸 말씨’나 ‘안 쓰고 싶은 말씨’를 마음에 둔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씨를 안 쓰겠다고 마음에 두기보다는, 스스로 새롭게 살려내면서 즐겁게 쓸 말씨에 마음을 기울이는 길이 그야말로 우리말·우리글을 북돋우리라 봅니다.


  글을 쓰면서 “‘-의’를 안 넣으려 노력하면” 오히려 자꾸 ‘-의’를 생각하느라 어느새 ‘-의’를 쓰고 맙니다. 그러니 굳이 애쓰지(노력하지) 않으시기를 바라요. 글자락에 ‘-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쳐다보느라 정작 글을 글답게 여미지 못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서 어느 글을 쓰든 ‘다섯 살 어린이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마음이자 눈빛’으로 서 보기를 바랍니다. 일터에서 글(보고서)을 내든, 글꽃(문학)을 여미려고 하든, 언제나 ‘다섯 살 어린이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마음이자 눈빛’일 적에 그야말로 글결이 살아나면서 빛납니다.


나의 자전거 → 내 자전거 . 자전거 . 우리 자전거 . 짝꿍 자전거

나의 작은 집 → 이 작은 집 . 우리 작은 집 . 작은 집

나의 작은 헌책방 → 작은 헌책집 . 이 작은 헌책집 . 나와 작은 헌책집

나의 작은 화판 → 내 작은 그림판 . 작은 그림판 . 이 작은 그림판


  다섯 살 어린이하고 이야기하려는 마음이라면, 허튼 생각이나 어설픈 길이나 엉성한 마음을 글로 옮기지 않아요. 다섯 살 어린이한테 들려줄 이야기라면, 일부러 어렵게 써야 할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글자랑을 부리지 않고, 글멋을 내지도 않습니다.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우리가 글을 어렵거나 딱딱하게 쓴다면, 자꾸 ‘의·적·화’ 같은 일본말씨에 젖어들거나 물들거나 길든다면, 바로 ‘누가 읽을 글’인지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섯 살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말을 고스란히 글로 옮기려는 마음이라면, 아마 어느 누구도 일본말씨를 함부로 안 쓰겠지요. 더구나 어쭙잖게 치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말장난도 안 할 테고요.


  글을 쓰지만 막상 ‘글’이 아닌 ‘보고서·리포트·논문·서류·양식·질의응답서·회신·PPT·자료……’처럼 자꾸 뭔가 이름을 따로 붙이면서 스스로 ‘높은 글’을 써야 한다고 여기기에 일본말씨나 옮김말씨(번역체)가 불거집니다. 보고서나 리포트나 논문을 쓸 적에도 다섯 살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인다면, 이 나라 배움길(학문)은 알뜰살뜰 빛나리라 봅니다.


나의 바람 → 나는 바란다 . 내가 바라는 . 내 꿈 . 바란다 . 꿈

나의 사과나무 → 내 능금나무 . 우리 능금나무 . 능금나무

나의 여름 → 여름 . 내가 누린 여름 . 여름을 살다 . 여름에 . 여름날 . 여름 이야기

나의 원피스 → 내 치마 . 내 한벌옷 . 내 꽃치마 . 내가 지은 옷 . 치마


  우리가 쓰는 글에서 ‘의·적·화’만 글에서 털어낸대서 끝나지 않습니다. 숱한 일본 한자말하고 중국 한자말이 넘실거리고, 얄궂게 끌어들인 영어가 너울거립니다. 그러니 ‘다섯 살 어린이가 나한테서 말을 배우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말결을 추스르듯 글결을 다독이면, ‘-의’도 ‘-적’도 ‘-화’도 처음부터 아예 쓸 일이나 까닭이 없습니다.


  ‘의·적·화’를 안 쓰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의·적·화’를 더 생각하는 얼거리입니다. ‘의·적·화’에 마음을 기울이지 말고, ‘우리가 아이들한테 물려주면서 나눌 즐거운 살림빛’에 온마음을 쏟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면 넉넉하고, 이렇게 하면 말빛이 아름다이 피어납니다.


  우리 여름입니다. 우리 옷입니다. 우리 꿈입니다. 나와 두 사람입니다. 나랑 두 사람입니다. 나하고 두 사람입니다. 내가 지은 옷입니다. 내가 입는 옷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옷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찾으면 됩니다. 나는 ‘나’를 바라보면 됩니다. 서로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즐겁게 나아갈 생각을 스스로 짓고 나누기를 바랍니다. 바라기에 바람을 이루고, 가을바람처럼 봄바람처럼 싱그러이 어루만지는 숨결로 피어납니다.


  덧붙여 ‘바라다·바람’을 ‘바래다·바램’으로 틀리게 쓰는 분이 꽤 있더군요. 꿈을 그리듯 ‘바라다·바람’을 말로 풀어내지 않을 적에는 그만 ‘빛바래다·빛바램’으로 기울고 말아요. 빛바래는 마음이나 말이나 글이 아닌, 빛나는 바람을 담은 말이며 글을 누구나 살려쓰면서 활짝 웃고 노래하기를 바라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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