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99 책숲



  오늘 우리는 ‘도서관(圖書館)’ 같은 이름을 그냥 쓰지만, 일본이 지은 이름이요, 이 나라 첫 도서관조차 일본이 조선총독부를 앞세워 지었습니다. 조선에 ‘규장각’이 있었되 임금·임금붙이·벼슬아치만 드나들고 흙님이 못 읽을 글만 가득했으니 ‘도서관’이란 이름이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규장각 = 임금님 책터”이지요. 이런 책자취를 아는 이웃님은 제가 2007년에 〈사진책 도서관〉을 열고서 〈사전 짓는 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꾸는 2017년 무렵까지 못마땅히 여겼어요. 왜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그냥 쓰느냐고 따지셔요. 혼잣힘으로 ‘도서관’을 꾸리며 늘 생각했어도 뾰족히 새이름을 못 찾다가, 2017년에 ‘책숲집’이란 낱말을 엮었습니다. “책 = 숲”이긴 하지만, “도서관 = 책을 숲처럼 건사하며 사람들이 느긋이 드나들어 쉬는 집”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책 + 숲 + 집’입니다. 책을 사고파는 곳은 ‘책가게·책집’이요, 책숲집하고 책집은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될” 적에 수수하게 ‘책숲’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집에 책을 건사하는 자리는 ‘책마루(← 서재)’요, 혼잣힘으로 책숲집을 연다면 ‘책마루숲(← 서재도서관)’이에요. 나라책숲(← 국립도서관)이고, 마을책숲(← 지역도서관)이고요.


ㅅㄴㄹ

#책숲 #책숲집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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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98 책집지기



  ‘배운’ 사람은 읽지 않습니다. ‘배운’ 사람이 아닌, ‘배우려는’ 사람이 읽습니다. ‘배우려는’ 사람이 쓰고, ‘배우려는’ 사람이 책집지기라는 살림을 펴며, ‘배우려는’ 사람이 책수다를 나누면서 도란도란 생각날개를 폅니다. ‘배운’ 사람은 가르치려 합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하나씩 바라보면서 마음에 심을 생각을 즐겁게 맞아들입니다. ‘배운’ 사람은 이미 몸이며 마음에 틀을 굳게 올린 터라, 새길(생각)을 좀처럼 안 맞아들일 뿐 아니라, 내치거나 손사래치기까지 합니다. 배웠고 알았다지만 새삼스레 배우려는 마음을 일으키기에 책읽기에 책쓰기를 하고, 책집이나 책숲을 열겠노라 꿈을 지핍니다. 배웠고 알았으니 ‘끝났다’고 여기기에 책을 겉치레로 보고 글을 겉꾸밈으로 쓰려고 합니다. “배운 사람은 나쁘다”고 할 수 없어요. “배운 사람은 쉽게 고이네” 싶습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흐르는 물줄기 같다”고 할 만하며, 즐겁게 노래하듯 흐르는 냇물·빗물 같으니, 스스로 생각이 샘솟아 어깨를 활짝 펴며 걷거나 달려요. 마을에 조촐히 책집을 여는 이웃·동무란 눈·생각·마음을 틔워서 사랑을 짓는 길을 가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저는 책집지기 곁으로 마실을 하며 눈망울을 별빛처럼 틔우고 싶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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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2022.3.22.

책하루, 책과 사귀다 97 책값 털썩



  새책집에서는 책을 한 바구니씩 장만하지 않습니다만, 헌책집에서는 책을 몇 바구니씩 장만합니다. 새책은 언제라도 다시 살펴서 장만할 수 있으나, 판이 끊긴 헌책은 이다음에 새로 만나기가 몹시 어려워요. 눈앞에서 볼 적에 바로 장만하지 않으면 스무 해나 서른 해 뒤에까지도 다시 못 찾습니다. 마흔 해 만에 다시 찾아내어 고이 품은 책이 제법 있는데, 이렇게 책집마실을 하면서 책장만을 하는 터라, 책값이 털썩털썩 나가요. 장만해서 곁에 두면서 되읽고 싶은데 어쩌나 하고 망설이면 곁님이 속삭여요. “여보. 사야 할 책은 사. 돈은 나중에 벌 수 있지만, 책은 나중에 못 만나잖아.” 곁님은 책을 거의 안 읽지만 책이란 무엇인가를 더없이 깊고 넓게 헤아려서 짚어 줍니다. “여보, 며칠 굶어도 되지만, 살 책을 못 사서 몇 해씩 끙끙거릴 바에는 아무리 돈이 들어도 살 책을 사야지요.” 든든한 길잡이인 곁님을 섬기기에 이분이 배움마실을 떠나겠다고 하면 천만 원이고 이천만 원이고 낑낑대며 그러모아 보내 놓고서 몇 해에 걸쳐 겨우 빚을 갚습니다. 책은 우리 삶에 크게 이바지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만, 오랜 슬기를 언제나 새롭게 돌아보도록 북돋우는 숲빛을 종이꾸러미에 얹으면서 아이들한테 물려주는 길동무라고 느낍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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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2022.3.21.

책하루, 책과 사귀다 96 까닭(근거)



  “그렇게 보는 근거는 있는가?” “까닭은 없습니다만, 사랑하기에 반갑게 읽고 즐거이 나누는구나 싶어요.” “그게 뭔 소리인데?” “글쎄, 그저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오늘을 살고 하루를 그리면서 삶이라는 이 자리에 사랑이라는 손길로 살림을 돌본다고 느껴요.” “어떻게 천기저귀를 쓰고 유리병을 쓰고 아기를 안고 다니고 자전거에 태우며 살아?” “딱히 까닭은 없어요. 손길에서 묻어나는 기운이 가장 즐거우면서 슬기롭고 참한 사랑이라고 여기니 천기저귀를 손빨래하지요. 똥오줌이 묻은 천기저귀를 손으로 빨아 보면 이 아이들 뱃속을 느낄 만하고, 먼먼 옛날부터 아기를 사랑으로 보살핀 사람들 마음빛이 물씬 스미는걸요.” “그대니까 그렇게 하지, 요새 누가 그러는가?” “옛날부터 누구나 수수하게 스스럼없이 하던 살림이에요. 대단한 일도 안 대단한 일도 아닌 살림이고, 이 살림이란 바로 삶을 사랑하는 길인걸요. 손수 하는 사람들은 손수짓기라는 자리에서 책 하나 없이 모든 길을 꿰뚫었어요. 우리 손발은 언제나 온빛을 스스로 알려주는 책이에요.” “허참.” “우리는 글을 모르던 옛사람이 지은 말을 물려받아서 써요. 글을 아는 사람은 말을 못 짓는데, 삶·살림·사랑을 스스로 안 지으니 말빛이 없구나 싶어요.”


ㅅㄴㄹ


언제 어느 곳에서 누구하고

주고받은 말인지는 가물거리지만

이런 이야기를 으레 자꾸

되풀이합니다.


굳이 까닭을 찾자면

모두 사랑입니다.


어떻게 다 손수 하려고 드느냐고 물으면

손발로 스스로 하고 보면

스스로 삶을 깨우쳐

사랑을 펼 수 있어요.


책은 안 읽어도 즐거워요.

책을 온몸으로 온삶에서 길어올리면

누구나 스스로 새말(사투리)을 짓거든요.


(사진 : 서울 무아레서점 202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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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95 글



  ‘nonfiction’을 ‘非小說’로 옮긴 사람은 누구일까요. ‘fiction’은 ‘꾸며낸’을 가리키고, ‘novel’은 ‘새로운’을 가리킵니다. ‘小說’은 “꾸민 이야기”요, ‘논픽션 = 비소설’로 옮길 만하기도 합니다. 일본은 저쪽(서양) 삶길을 받아들이면서 ‘소설·비소설’로 갈랐습니다. 언뜻 보자면 ‘소설·비소설’이 옳을는지 모르나, 곰곰이 보자면 “소설이 아닌”이란 이름으로 갈라야 할는지 아리송해요. “꾸민 이야기”를 쓸 생각이 처음부터 없는 사람들이 쓴 글을 가리켜 “꾸미지 않은 이야기”란 이름을 붙이면 어울릴까요? ‘수필·에세이’란 이름도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는 ‘글’을 놓고서 왜 ‘글’이란 이름을 못 붙일까요? ‘이야기’를 놓고서 왜 ‘이야기’란 이름을 안 붙일까요? 글꽃(문학)은 노래(시)·이야기(소설)·삶글(수필)·마당글(희곡)로 가를 만합니다. ‘이야기’는 ‘삶글’ 같다고 여길 만하고, ‘삶글’은 또 ‘이야기’ 같다고 느낄 만합니다. 가르는 자리에 따라 이곳에도 저곳에도 들어갑니다. 그런데 모든 글꽃은 바탕이 ‘글’입니다. 글로 삶자락과 마음에 꽃을 피웁니다. 구경꾼 이야기가 아닌, 스스로 지은 삶을 스스로 여미는 이야기이기에 글입니다. 이제는 우리 눈으로 글을 바라볼 때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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