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까치꽃 논둑
[고흥살이 8] 새봄 알리는 작은 들꽃

 


 며칠 몹시 따스한 저녁을 누렸습니다. 보일러를 돌리지 않고도 방 온도가 18도였어요. 이렇게 따스한 나날이라면 틀림없이 들판 어딘가에 꽃이 피었을 텐데 싶어 대문을 열고 집 앞 논둑에 섭니다. 참말 그러면 그렇지. 대문 앞 논둑에는 줄지어 봄까치꽃이 파랗고 작은 꽃잎을 터뜨렸어요.

 

 언제부터 꽃망울을 터뜨렸을까? 오늘 알아본 꽃망울이 이만큼이라면 훨씬 앞서 꽃망울 터뜨렸겠지. 아직 따스한 바람이 불기 앞서부터 꽃망울 터뜨리지 않았을까? 눈이 펑펑 쏟아지며 금세 녹던 며칠 앞서에도 이 꽃잎들은 눈을 맞으면서 맑은 파랑을 듬뿍 베풀지 않았을까?

 

 논둑에는 봄까치꽃이라면 멧자락에는 무슨 꽃이 피었을까 궁금합니다. 이제는 따스한 나날이니까 집식구 모두 멧자락 마실을 가며 봄꽃 구경을 해야겠어요. (4345.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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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든 동백꽃에 하얀 눈얼음
 [고흥살이 6] 마당에서 자라는 나무 한 그루

 


 네 식구 고흥 살림집에는 후박나무와 동백나무와 산초나무가 마당가에서 자랍니다. 이 집에서 예전에 살던 할머니가 심어 돌본 나무들입니다. 산초나무에서 얻은 열매를 빻아서 국에 넣어 먹어 보았습니다. 후박나무가 우람하게 자랐기에, 이 후박나무 듬직한 줄기에 빨래줄을 드리웠습니다. 동백나무를 마당에서 늘 바라보며 언제 얼마나 꽃이 피고 지는가를 느낍니다.

 

 따스한 봄을 맞이하면 흐드러지게 피어날 동백나무 동백꽃이라는데, 지난겨울에 몇 송이가 곱게 봉오리를 펼쳤어요. 12월 1일에 첫 봉오리가 터졌고 12월 9일에 두세 봉오리가 더 펼쳤습니다.

 

 그러나 서너 봉오리까지만 터지고 다른 봉오리는 입을 꼭 다뭅니다. 일찌감치 봉오리를 터뜨린 서너 봉오리는 시든 모습으로 겨울을 납니다. 앙 다문 다른 봉오리는 찬바람과 눈바람을 모두 견딥니다. 바야흐로 아주 포근해지는 날씨에 이들 동백꽃이 한꺼번에 봉오리를 터뜨릴 테지요. 차디찬 눈바람이 아닌 포근한 햇살을 오래오래 누리고 싶기에 한겨울 며칠 따스한 기운이 퍼지더라도 봉오리를 터뜨리지 않으며 꾹 참을 테지요.

 

 따스한 남녘땅입니다. 이곳에서 몇 봉오리는 그만 한겨울 들머리에 꽃을 터뜨려 철을 잊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철을 앞서갔다 할 수 있고 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 수 있어요. 우리 살림집뿐 아니라 이웃 살림집 동백나무도 일찍 꽃봉오리 터뜨려 일찍 시든 동백꽃이 있습니다. 길가에서 자라는 동백나무도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일찍 터진 꽃은 일찍 시듭니다. 늦게 터지는 꽃은 늦게 시듭니다.

 

 일찍 터져서 일찍 시들기에 더 못나 보이지 않습니다. 느즈막하게 터진대서 더 어여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봄을 피어야 제멋이라 하지만, 한겨울에 피어도 제멋이라고 느껴요. 꽃은 활짝 피어 흐드러질 때에도 멋스럽고, 꽃은 파들파들 시들어 쪼그라들 때에도 멋스럽거든요.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아름답습니다. 푸름이는 푸름이대로 싱그럽습니다.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씩씩합니다. 늙은이는 늙은이대로 슬기롭습니다.

 

 몇 달 일찍 봉오리 터뜨린 동백꽃송이를 날마다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이렇게 시들었으니 잎이 곧 떨어지겠거니 생각합니다. 언제쯤 시든 잎이 흙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며 날마다 들여다보는데, 시든 잎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시든 잎은 찬바람이랑 눈바람을 고스란히 맞습니다. 어쩌면, 다른 꽃봉오리 활짝 터질 봄에도 이 모습 그대로 있을는지 모르고, 다른 꽃봉오리 활짝 터진 다음 하나둘 지며 쪼그라들 때에도 나란히 쪼그라든 모습으로 있을는지 몰라요.

 

 《지는 꽃도 아름답다》(문영이 씀,달팽이 펴냄,2007)라는 책을 떠올립니다. 일흔 넘은 나이에 글꽃을 피운 할머님 삶을 떠올립니다.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박정희 씀,걷는책 펴냄,2011)라는 책을 헤아립니다. 아흔 줄에 접어들었어도 그림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는 할머님 넋을 헤아립니다. 살결이 쪼글쪼글한 할머님들 삶은 그야말로 쪼글쪼글하다 할 만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이나 학교나 문화나 예술이나 정치나 경제나 한결같이 한껏 젊음을 뽐내는 어린 아가씨 허여멀건 몸매와 얼굴에 눈길을 둡니다. 사내이든 가시내이든 더 어려 보이려 애쓰고, 더 젊어지려고 용씁니다.

 

 나이에 걸맞게 슬기로이 살아가는 길을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스무 살에는 스물에 걸맞는 삶길이 있고, 서른 살에는 서른에 걸맞는 삶길이 있으며, 마흔 살에는 마흔에 걸맞는 삶길이 있어요. 쉰 살 삶길은 쉰 자락 걸어온 나날로 이룹니다. 예순 살 삶길은 예순 자락 걸어온 나날로 일구어요. 나이를 더 먹었대서 더 슬기롭지는 않아요. 나이가 어리다고 더 풋풋하거나 싱그럽지도 않아요. 삶은 밥그릇으로 따지지 않으니까요. 삶은 하루하루 얼마나 따순 사랑을 나누며 어깨동무했느냐 하는 꿈날개로 보살피니까요. (4345.2.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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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2-18 11:58   좋아요 0 | URL
전 시댁이 전북 고창이어서 선운사 동백은 가끔 봐요.
빗 속의 동백은 운 좋게 볼 때가 간혹 있었는데...
눈 속의 동백은 사진으로라도 귀한 선물이네요~^^

숲노래 2012-02-18 17:08   좋아요 0 | URL
눈과 꽃은 새삼스레 잘 어울리는구나 싶어요..
 

 


 봄을 기다리는 마늘밭
 [고흥살이 5] 시골바람·겨울바람·살랑바람

 


 가을걷이 끝낸 논은 겨우내 쉽니다. 가을걷이 마친 밭은 겨우내 마늘밭이 됩니다. 날이 추운 시골마을에서는 겨우내 마늘을 심지 못합니다. 날이 포근한 시골마을에서는 가을걷이를 마치기 무섭게 바지런히 두레를 하면서 마늘을 심습니다. 마늘을 심고는 비닐을 씌웁니다. 비닐을 씌우지 않으면 마늘 아닌 다른 풀이 돋을 때에 김매기 할 엄두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골마을에 일흔 여든 아흔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은 채 흙을 일구지 않는다면, 겨우내 마늘밭에 비닐을 안 씌울 수 있을까요. 시골마을에 스물 서른 마흔 젊은 사람들 오순도순 모여 겨우내 마늘밭을 건사한다면, 마늘밭이든 파밭이든 보리밭이든 무슨무슨 밭이든, 저마다 두레를 하면서 김을 매고 막걸리 한 사발 즐거이 나눌 만할까요.

 

 여덟 달째 함께 살아가는 갓난쟁이 아이를 안거나 업히고, 새해에 다섯 살이 된 아이는 걸려 면내로 마실을 갑니다. 우리 시골집 앞자락 밭에는 이웃 할머니들이 알뜰히 심은 마늘이 자랍니다. 우리 시골집 옆자락 밭에도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 함께 심어 돌보는 마늘이 자랍니다. 오가는 자동차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골길을 걷습니다. 이웃마을 밭뙈기에도 마늘이 자랍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늘이 몸에 좋다느니 마늘을 어떻게 먹으면 맛있다느니 하고 이야기하지만, 막상 마늘을 어떻게 심고, 어찌저찌 돌보는 줄 헤아리지 않습니다. 마트에 비닐로 수북히 쌓인 ‘깐마늘’ 값을 어림하거나, 고기집에서 접시 내밀어 ‘마늘 더 주셔요’ 하고 말하기만 합니다.

 

 마늘 또한 풀입니다. 마늘 또한 풀이기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며 잎을 틔웁니다. 꽃을 피우고 푸른 빛깔 흐드러지게 뽐내요.

 

 

 

 마늘은 마늘꽃, 배추는 배추꽃, 벼는 벼꽃, 보리는 보리꽃, 능금은 능금꽃, 배는 배꽃, 무는 무꽃, 복숭아는 복숭아꽃을 피워요. 살구는 살구꽃이 지면서 맺는 열매입니다. 앵두는 앵두꽃이 지면서 맺는 열매예요. 매실은 매화가 지며 맺는 열매입니다.

 

 모든 풀·꽃·나무는 흙땅에 씨앗을 떨구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립니다. 모든 풀·꽃·나무는 고우면서 기름진 흙이 있어야 하고, 맑으면서 따사로운 햇살이 있어야 하며, 밝으면서 싱그러운 바람이 있어야 해요. 우리들이 먹는 마늘이건 배추이건 벼이건 보리이건 능금이건 배이건 무이건 복숭아이건, 흙이랑 햇살이랑 바람이랑, 여기에 깨끗하고 시원한 물이 있을 때에 알차게 여물어요. 곧, 사람들은 마늘만 먹지 않아요. 사람들은 마늘을 먹으며 흙과 햇살과 바람과 물을 함께 먹어요. 흙과 햇살과 바람과 물을 먹으며 사람들 목숨을 이어요. 크고작은 도시는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가득 덮이지만, 시골마을 논밭만큼은, 또 멧자락만큼은 오직 흙으로 덮인 땅에 풀약이나 비료가 흩날리지 않아야 모두들 사랑스레 목숨을 돌볼 수 있어요.

 

 시골바람이 불어 시골마을을 감쌉니다. 겨울바람은 마늘밭을 훑고 지나며 마늘잎이 더 튼튼하도록 다스립니다. 살랑바람은 마늘알이 옹글게 여물도록 재촉합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늘밭 앞에 다섯 살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마늘잎을 쓰다듬습니다. 우리가 심은 마늘이 가득한 밭뙈기는 아니지만, 우리 이웃들 예쁘게 심어 알뜰히 가꿀 흙자락이에요. 여덟 달 갓난쟁이는 마늘밭 스치는 따순 바람을 느끼고, 아이들과 마실하는 어버이는 앞으로 장만해서 돌보고 싶은 텃밭을 생각합니다. (4345.1.2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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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27 12:29   좋아요 0 | URL
와우, 이런 곳에서 사시는군요.
가슴이 탁 트이는 게 좋아보입니다.^^

숲노래 2012-01-28 00:15   좋아요 0 | URL
새로 들어와 여러 달 지내며 너무 어지럽고 고단해
마실을 제대로 못 다녔는데,
이제, 다섯 살 맞이한 아이하고
날마다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뒤꼍 땅뙈기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마녀고양이 2012-01-28 12:40   좋아요 0 | URL
글쿠나,, 겨울에는 마늘밭이 되는거군요.
첨 알았어요... 마늘꽃, 마늘알이 영글어 가는군요.

춥진 않으셔요? 경기도보다 남쪽이라 좀 따스하시려나요?
마지막 사진, 참 좋아보입니다. 모녀가 무엇을 저리 가리킬까요?

숲노래 2012-01-28 13:24   좋아요 0 | URL
경기도나 서울 같은 데보다 10도는 따스해요~
ㅋㅋ

냇물에 가득한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물고기 잡아먹는 해오라기를
나란히 보는 모습이에요~

oren 2012-01-29 00:43   좋아요 0 | URL
시골 풍경사진이 참 아름답고 청명해 보입니다.

작년 11월 하순에 목포,영암,해남 지방으로 여행을 다녀봤는데, 서울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너무 따스해서 '따스한 남쪽지방'에서 사는 사름들은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된장님께서 그런 포근하고 따스한 동네에서 사시는군요.

숲노래 2012-01-29 06:41   좋아요 0 | URL
오~ 다음에는 고흥도 마실해 보셔요.
고흥이나 장흥은 또 다르기도 해요.
고흥보다 북쪽인 벌교는
고흥과 달리 눈이 많고 조금 춥기도 하지만,
참 재미나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새벽 내내 아이들 칭얼거림에 시달리다가 새벽 다섯 시 이십 분 무렵 겨우 잠들었더니, 아침이 밝았다 싶어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열 시. 날이 찌뿌둥하면서 비를 뿌려서일까. 아침이 밝아도 날이 좀 흐려, 열 시나 된 줄 느끼지 못했다. 마침 장날이라 읍내 마실을 하기로 한다. 빨래를 하고 두 아이 옷을 입힌다. 둘째는 아버지가 안고, 첫째는 어머니 손을 잡고 걸린다. 칠 분쯤 기다려 네 식구 군내버스를 탄다. 버스삯 3000원.

 

 집을 나서기 앞서 둘째는 젖을 조금 먹었고, 읍내로 가는 버스길 20분에 사르르 잠이 든다. 설을 앞둔 대목 장날은 여느 장날보다 복닥인다. 우리는 무얼 사면 좋을까. 우리는 무얼 사서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들고 가면 좋을까. 두 아이 옷가지만으로도 가방이 넘치니 많이 들고 갈 수 없다. 여러 날 곰곰이 생각하며 얘기한 끝에 매생이랑 굴을 사서 갖고 가기로 한다. 매생이 세 뭉치 9000원, 굴 10000원 어치를 산다. 감 여든 알 즈음 든 꾸러미 하나를 15000원 치르고 산다.

 

 읍내 밥집에 들러 천천히 밥을 먹는다. 신을 벗고 들어가서 느긋하게 앉을 수 있는 밥집을 찾느라 삼십 분쯤 걸었다. 처음에는 중국집에 가려 했는데, 버스역과 가까운 데에 있는 중국집에서 우리보고 문가에 앉으라 하기에 도로 나왔다. 아기를 안고 문가 걸상에 어찌 앉나. 그저 빨리 시켜 빨리 먹고 나가기를 바라는 셈일까. 집이 아닌 밖에서 밥을 먹을 때에는 후딱 먹고 후딱 나가고 싶지 않다. 다리도 쉬고 몸도 쉬며 한숨을 돌리고 싶다. 아이들 안고 걸리며 데리고 다니면 얼마나 지치는데.

 

 택시를 타고 돌아갈까 하다가 집으로 갈 적에도 군내버스를 타기로 한다. 두 아이랑 돌아가니 자리에 앉아야겠다 싶어 시외버스역으로 간다. 시외버스역에는 우리처럼 자리에 앉으려고 몰린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다. 나와 둘째가 앉을 자리가 없었는데, 고맙게 자리 내어준 분이 있다. 둘째는 버스에 타기 앞서부터 아버지 품에서 잠들었고, 자리에 앉은 뒤에는 새근새근 고이 잔다. 늘 그렇지만, 읍내에 나올 때이든 읍내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이든 군내버스에 아기를 데리고 타는 어버이는 우리뿐이다. 아이와 살아가는 젊은 어버이라면 아마 모두들 자가용이 있겠지.

 

 버스에서 내릴 때에 두 아이는 모두 잠들었는데, 내리고 나서 낑낑 안아 집으로 들어오니 하나씩 잠을 깬다. 쳇. 집에서 더 잠들어 주면 좀 좋니. 쳇쳇. 아버지는 아주아주 졸립고 뻑적지근하다구. (4345.1.1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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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을 밟는 못둑 걷기
 [고흥살이 4] 아름다운 그림이란

 


 내 생일 이튿날, 형이 인천에서 고흥까지 찾아왔다. 참 먼길인데 참 고맙게 찾아왔다. 여러 날 머물다가 인천으로 돌아가던 날까지, 형하고 느긋하게 바닷가 나들이를 다닌다든지, 가까운 산에 오른다든지 하지 못했다. 형이 찾아오고 여러 날 동안 바람 모질게 불고 날이 꽤 춥기도 했고, 때맞춰 이래저래 집일을 건사하느라 몸이 무너져 끙끙 앓기까지 했다. 헌 창호종이를 떼고 새 창호종이 떼는 일을 함께 하다가 나는 그만 자리에 드러누웠다.

 

 더 재미나게 놀지 못하고 형을 떠나 보낸 날, 무언가 허전하고 아쉬우며 속이 안 좋았다. 그러나 아이들 빨래는 끝없이 해야 하고, 아이들 밥을 차려 먹여야 하며, 아이들 씻기며 집도 이럭저럭 쓸고닦아야 한다. 참으로 하루하루 눈코 뜰 사이가 없다.

 

 저녁에 빨래를 걷다가 함께 걷기로 한다. 형이 있을 때에 이렇게 함께 걸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 동백마을 바로 위에 있는 지정마을 못가로 걸어간다. 네 식구끼리 있을 때에도 이 넓은 못가를 좀처럼 걷지 못했다. 지정마을과 신기마을과 동백마을 논자락을 적시는 못물이 꽤 넓다. 이 못물 있는 둑을 걷는다. 못둑은 풀밭길. 시멘트를 깔지 않아 흙을 밟을 수 있다.

 

 옆지기는 둘째를 업고 걷는다. 나는 첫째 손을 잡고 걷는다. 자동차 한 대 안 다니는 찻길을 천천히 지나는 동안, 첫째 아이는 혼자 달리기를 하겠단다. 길가 대숲에 누군가 베어 쓰러진 작은 대나무 하나를 주워서 논다. 어머니랑 아버지가 앞서 가도 아이는 혼자 놀기에 바쁘다.

 

 못물에서 물고기가 펄떡펄떡 뛴다. 오리들이 물고기 잡으려고 되게 빨리 물갈퀴질을 한다. 한겨울 한복판인데 못둑에서 노랗게 꽃을 피우는 작은 풀이 있다. 첫째 아이는 어느새 대나무를 버리고 억새를 뜯어서 논다. 옆지기가 날 따스할 때에 못둑에 앉아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렇구나. 어디를 바라보더라도 두 눈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는걸. 이 아름다이 그려지는 그림을 손을 거쳐 종이에 옮기면 되는걸. 그림은 바로 이 아름다운 풀숲이 들판이 흙땅이 하늘이 구름이 저녁놀이 햇살이 곱게 가르치고 알려주는걸. (4345.1.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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