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탑이 가르쳐 주는



  우리 집에 아직 아이들이 없던 무렵, 게다가 나 혼자 살던 무렵, 내가 아는 책탑이란 책방에 있는 책탑입니다. 집에 아이가 둘이 있고 이 아이들하고 함께 도서관학교를 꾸리는 오늘날, 내가 아는 책탑은 ‘책방에 있는 책탑’보다 ‘아이 곁에 있는 책탑’입니다. 아이들이 그림책으로 쌓기놀이를 하면서 보여주는 책탑이에요.


  작은 그림책은 책탑놀이를 하기에 아주 걸맞습니다. 아이들은 책탑놀이를 하다가 책이 다칠까 하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홀가분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책탑놀이를 해요. 어쩌면 책이 다치는 까닭은 어른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이들은 책탑놀이를 마치고 나서 책을 고이 건사할 만한 손길과 마음이 있는데, 어른이 섣불리 끼어들면서 아이가 스스로 책을 고이 다스리는 길을 막지는 않을까요.


  작은 그림책으로 이루어진 책탑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 책탑을 그대로 두면서 지켜봅니다. 2016.10.15.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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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책



  책을 야금야금 먹어요. 책에 깃든 이야기를 냠냠 먹어요. 책이 들려주는 노래를 신나게 먹어요. 이러다가 문득 ‘아, 손에 감이 있었지? 배도 고프니 감도 먹자.’ 하고 생각하면서 감알을 한입 벱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천천히 먹어요. 책이 베푸는 고운 사랑을 기쁘게 먹어요. 2016.10.10.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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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브랜드’라는 이름



  고흥이라는 작은 군에도 몇 해 앞서 ‘ㅇ 가게’가 조그맣게 열었습니다. 커다란 도시에 있는 커다란 가게는 아니고 작은 가게인데, 이 가게에 들를 적에 ‘노 브랜드(NO BRAND)’라고 큼직하게 새긴 물건을 볼 수 있습니다. 어제 순천에 나가서 ㅇ 가게에 들렀다가 고무나무 도마가 보이기에 장만해 보았어요. 도마를 하나 새로 갖추자고 생각하던 터라 마침 잘 만났다고 여겼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노 브랜드’라는 이름도 ‘없는 이름’이 아닌 ‘있는 이름’이지 싶어요. 사람들(소비자)한테는 ‘이름이 없다’고 내세우지만, 바로 이 이름 ‘노 브랜드’야말로 ㅇ 가게에서 물건을 파는 ‘이름’이 될 테니까요. 참말로 ‘이름을 붙여서 광고하지 않는 물건’이라고 한다면 ‘노 브랜드’라는 이름조차 안 쓸 테지요. 유행과 상표와 명품이 춤춘다고 하는 요즈막에 ‘이름 없다’는 이름이, 영어로 ‘노 브랜드’라는 이름이, 참으로 유행과 상표와 명품으로 슬그머니 올라타는 이름이 되지 싶습니다. 2016.9.20.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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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문턱을 넘어 보지 않았다면



  강은교 님 시집이나 수필책을 제법 읽었다고 여겼는데, 막상 강은교 님이 한창 젊은 날에 뇌출혈로 죽음 문턱을 오갔다는 대목은 이제서야 처음으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아니, 예전에 읽은 적이 틀림없이 있을 텐데, 까맣게 잊었다고 해야 맞지 싶어요.


  강은교 님은 아기를 밴 몸으로 뇌출혈로 이녁뿐 아니라 아기까지 죽음 문턱을 오갔다고 하니 얼마나 아프고 힘든 나날이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나는 오늘 《벽 속의 편지》라는 묵은 시집을 비로소 읽었습니다. 어두컴컴한 시외버스에서 큰아이는 왼쪽에서 자고, 작은아이는 오른쪽에서 내 어깨에 기대어 자는 동안, 눈을 밝히며 읽었지요. 이 시집에 추천글을 써 준 분이 붙인 글에서 ‘죽음 문턱을 넘나들다가 일어선 이야기’를 보았어요. 그리고 생각해 보았지요. 죽음 문턱을 넘어 보지 않았다면 삶을 얼마나 말할 수 있을까 하고요. 아마 그때에는 그때대로 삶을 말하겠지요. 깊이가 있든 없든, 너비가 있든 없든, 그냥저냥 그 결대로 삶을 말하겠지요. 죽음 문턱을 넘나들어 본 삶을 누린 이라면 이녁은 이러한 삶길대로 ‘삶하고 죽음을 새롭게 바라보는 숨결’로 삶을 말할 수 있을 테고요. 그러나 죽음 문턱을 넘어 보았대서 삶을 꼭 새롭게 바라보면서 말할 수 있지는 않다고 느껴요. ‘나 스스로 넘어 본 죽음 문턱’을 깊이 돌아보고 헤아리고 생각할 때에 비로소 삶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말할 만하다고 느껴요.


  나는 내가 겪은 ‘죽음 문턱 넘나들기’를 돌아보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죽음 문턱에서는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어요. ‘때와 곳이 하나도 없’어요. 때와 곳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아주 다른 테두리(차원)예요. 죽음 문턱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아주 짧은 동안에, 그렇지만 때와 곳이 없기 때문에 아주 느긋하게, 참말로 모든 것을 넉넉히 바라본 뒤 깨닫고 배워서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문턱에서 빠져나와 삶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적에 ‘죽음 문턱에서 보고 깨닫고 배운 모두 다 잊거나 잃을’ 수 있어요.


  죽음 문턱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제대로 생각하지 않던 지난날 《벽 속의 편지》라는 시집을 읽었다면 나는 아마 이 시집이 영 재미없네 하고 여겼을 만하다고 느낍니다. 그렇다고 이제는 더 재미있게 읽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오늘 나는 두 아이를 시외버스에서 새근새근 재우면서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빙그레 웃었습니다. 2016.9.19.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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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떻게 읽는 책일까



  며칠 동안 모질게 앓았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앓을 테니 누군가는 그야말로 끔찍하게 앓고, 누군가는 끙끙 앓을 텐데, 누군가는 밥을 못 먹으며 앓기도 하고, 누군가는 숨을 못 쉬며 앓곤 합니다. 나는 몸을 앓을 적에 ‘숨을 못 쉬며’ 앓습니다. 언젠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를 보는데, 이 영화 주인공인 ‘체 게바라’가 천식 때문에 기침이 끊이지 않으면서 숨이 가빠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와요. 나는 이 대목에서 마치 내 몸이 아프듯이 그 천식과 기침을 느꼈습니다. 나한테는 천식이 없지만 갓난쟁이 적부터 달고 살던 축농증이 있어요. 가벼운 축농증도 아닌 퍽 모진 축농증이라 어딘가 아파서 골골거리면 코도 입도 목도 막혀서 숨을 한 번 마시고 뱉을 때마다 코랑 입이랑 목뿐 아니라 온몸이 아프면서 죽을 듯한데, 차마 죽지는 못합니다.


  며칠 동안 숨을 쉬고 뱉는 모든 몸짓이 아프고 힘들었어요. 코감기로 비롯하며 찾아온 몸살이 나흘째인 오늘 새벽은 퍽 괜찮습니다. 이제 숨쉬기가 제법 낫습니다. 숨쉬기가 나아지며 머리가 덜 지끈거리고, 머리가 덜 지끈거리니 집살림이나 책읽기도 좀 할 만한 몸이 됩니다.


  문득 돌아보면, 나는 내 코(숨쉬기)가 괴롭기에 이를 잊으려고 오래도록 책을 읽었구나 싶습니다. 아름다운 책에 사로잡혀서 푹 빠져들면 ‘아픈 코로 숨을 쉴 적마다 몸이 힘들다’는 생각을 잊을 수 있거든요. 그러나 천식을 앓는 사람처럼 숨이 가쁘면서 가슴이 갑갑할 적에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밥짓기도 밥먹기도 못하지만, 드러눕지도 앉지도 서지도 못해요.


  숨이란, 바람이란, 하늘이란, 사람 목숨 가운데 언제나 으뜸이라고 느낍니다. 밥을 굶거나 물을 며칠쯤 안 마실 수 있어도, 똥조차 며칠 안 눌 수 있어도, 숨은 1초 아닌 0.1초나 0.0001초조차 안 마시면 언제나 죽음하고 똑같습니다. 그래서 나로서는 “숨결 같은 이야기”나 “바람 같은 이야기”나 “하늘 같은 이야기”를 다룰 줄 아는 책이어야 비로소 내 곁에 두고 싶습니다. 2016.9.19.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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