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95 : 손으로 만지는 책

 


  작은 가게가 문을 닫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가게로 찾아드는 손님이 줄기 때문입니다. 작은 가게에 가기보다 커다란 가게에 가서 더 값싸게 살 수 있다고 여기기도 하고, 큰 가게에 한 번 찾아가면 여러 갈래 가게가 두루 있으니, 다리품을 적게 들일 만하다고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작은 가게가 문을 닫는 참된 까닭이라면, 큰 가게가 다루는 물건하고 똑같은 물건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큰 가게는 돈을 벌 생각으로 판을 더 크게 벌리는데, 작은 가게 또한 돈만 바라보는 얼거리에 스스로를 가둔 채 거듭날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예 문을 닫을밖에 없습니다.


  가게가 많지 않을 때에는 가게에 물건만 갖다 두면 이럭저럭 팔리겠지요. 이를테면 깊은 멧골짝에 가게 하나 있다 하면, 이 가게에 물건을 이럭저럭 두거나 물건값을 꽤 비싸게 매기더라도 이럭저럭 팔리기 마련입니다. 두멧시골에 작은 가게 하나 달랑 있으면, 이 작은 가게는 이럭저럭 장사가 되기 마련입니다.


  작은 책방이 문을 닫습니다. 어쩔 수 없는지 모르나, 작은 책방으로 찾아드는 책손이 줄기 때문입니다. 작은 책방보다 큰 책방으로 갑니다. 큰 책방에 ‘책 가짓수가 더 많다’고들 말하는데, 정작 큰 책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큰 책방에서 장만하는 책은 ‘더 많은 가짓수’가 아닌 ‘잘 팔리는 책’, 곧 작은 책방에도 어엿하게 놓인 책입니다. 이제 퍽 많은 사람들이 큰 책방으로도 잘 안 가고 인터넷책방에서 책을 사곤 합니다. 큰 책방은 따로 인터넷책방을 엽니다. 처음부터 인터넷으로만 책을 다루는 책방도 있습니다. 이들 큰 책방이랑 인터넷책방이라 해서 ‘책 가짓수’가 더 많지 않습니다. 나는 두멧시골에서 살아가니까 여느 때에는 인터넷책방에 책을 주문해서 받지만, 내가 바라는 책치고 ‘하루 만에’ 오거나 ‘한 주 안에’ 오는 책은 드뭅니다. 어느 책은 보름이 지나서야 오고, 어느 책은 달포쯤 기다려야 받습니다. 큰 책방이건 인터넷책방이건 ‘모든 책을 갖추어 곧장 팔’ 수는 없습니다. 책시렁에 안 갖춘 책은 그때그때 출판사에 말해서 받은 다음 보내니, 내가 작은 책방에 전화를 걸어 주문한 다음 받거나 큰 책방이나 인터넷책방에 주문을 넣어 받거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책방이 자꾸 문을 닫는 까닭이란, 사람들이 사서 읽는 책이 외곬로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큰 책방에 잔뜩 놓이고, 인터넷책방에서 그날그날 보내 줄 수 있는 ‘잘 팔리는 책’에 사람들 눈길이 더 기울어지기 때문이에요.


  한 나라가 아름답자면 서울이나 부산 같은 데에 사람들이 끔찍하게 몰려들지 않아야 합니다. 도시와 시골이 서로 알맞게 살림을 꾸려야 하고, 도시에도 숲과 논밭이 있어야 합니다. 책방과 책손과 출판사가 나란히 아름답게 어깨동무하자면, 삶과 사랑과 꿈을 살찌우는 책을 서로 아끼면서 북돋울 줄 알아야 하며, 책손 스스로 어떤 책으로 이녁 삶과 사랑과 꿈을 가꿀 때에 즐거운가 하고 새롭게 눈을 뜰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책은 손으로 만져서 읽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읽더라도 손가락 움직여 읽습니다. 컴퓨터도 손으로 움직이고, 종이책도 손으로 넘깁니다. 손이 하는 일을 느끼고, 몸이 움직이는 결을 헤아리며, 마음이 자라는 흐름을 알아챌 때에, 비로소 책읽기이고 삶읽기이며 사랑읽기가 됩니다. 4346.1.2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민사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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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24 15:10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의 글 속에 들어 있는 '어깨동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정겹고도 절실하게 들립니다.ㅎㅎ

숲노래 2013-01-25 04:11   좋아요 0 | URL
책을 읽는 사람들 가슴속에서 좋은 사랑이 싹틀 수 있기를 빌어요
 

 

 책으로 보는 눈 194 : 후박나무와 함께 읽는 책

 


  이오덕 님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 (1)》(한길사,1992)를 요즈음 들어 새삼스레 다시 읽습니다. 나는 이 책을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3년에 처음 읽었고, 그 뒤로 틈틈이 다시 읽습니다. 《우리 글 바로쓰기》를 찬찬히 읽다 보면 마음을 차분히 다스릴 수 있어요. 어떤 말지식을 얻으려고 읽는 책이 아니기 때문일까요. 내가 살아가는 이 길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슬기로운가를 헤아리려고 읽는 책이기 때문일까요. 한참 되읽다가 269쪽에서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그들이 살던 마을, 바라보는 산, 골짜기와 내들의 이름을 모두 지었다고 했다. 그 이름들은 말할 것도 없이 순수한 우리 말 이름이다 … 그런데 중국글자를 숭상하던 양반들은 이런 마을 이름들을 중국글자말로 지어 붙였다.” 하는 대목을 보고는 다시 밑줄을 긋습니다.


  그래요. 우리 겨레 옛사람은 이 나라 골골샅샅 마을 이름을 모두 한국말(토박이말)로 지었어요. 냇물 이름, 멧골 이름, 들판 이름, 바다 이름 모두 한국말로 붙였어요. 조그마한 오솔길 하나에까지 이름이 있어요. 야트막한 동산 하나에도 이름이 있어요. 작은 벌레 한 마리한테까지 이름이 있어요. 들풀과 들꽃한테도, 숲을 이루는 나무한테도, 냇물과 바닷물에서 살아가는 물고기한테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한테도, 숲에서 살아가는 짐승한테도 모두 어여쁜 이름을 붙였어요. 구름에도 이름이 있지요. 별에도 이름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늘 말하는 가장 쉽고 가장 흔하며 가장 빛나는 이름들, ‘해·달·물·불·바람·밥·옷·집·흙·돌·하늘·땅·바다’ 같은 낱말도 우리 겨레 옛사람이 붙였어요. ‘손·발·머리·마음·코·입·귀·눈·허파·염통·애·손가락·머리카락’ 같은 이름도 참말 알맞고 살갑게 붙였습니다. 이뿐인가요. ‘사랑·꿈·믿음·생각·웃음·눈물·빛·무지개·미리내·하느님·이야기’ 같은 이름은 그지없이 아름다우며 해맑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름답다’나 ‘어여쁘다’나 ‘아리땁다’나 ‘예쁘다’ 같은 낱말은 어떻게 빚었을까요. ‘맑다’나 ‘밝다’나 ‘놀다’나 ‘좋다’ 같은 낱말은 어떻게 일구었을까요.


  한삶을 교육자 한길 걸으며 한겨레 말삶을 북돋우려고 힘쓴 이오덕 님이 쓴 책은 ‘바로쓰기’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먼먼 옛날 우리 옛사람이 온누리에 새 이름 즐겁게 붙이던 고운 넋을 이야기꽃으로 피우려는 《우리 글 바로쓰기》라고 느껴요. 사랑을 살찌우는 말입니다. 꿈을 빛내는 글입니다. 믿음을 나누는 말입니다. 생각을 북돋우는 글입니다. 이야기를 즐기는 말입니다. 사람들 마음속마다 아리땁게 드리우는 하느님 넋을 밝히는 글입니다. 아이들과 까르르 웃으며 누리는 말입니다. 논술이나 문학을 하라는 글이 아니라, 삶을 일구며 이웃과 어깨동무하라는 글이에요.


  한겨울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맨손으로 눈송이 뭉쳐 노는 아이들은 마당 한켠 후박나무 밑에서 서로서로 웃고 떠들며 달립니다. 후박나무는 겨우내 찬바람 마시며 꽃봉오리 단단히 여밉니다. 새봄 찾아와 따스함 무르익으면 천천히 잎사귀 벌려요. 우리들 가슴에도 착한 사랑 싹트면 천천히 자라 알차게 피어나겠지요. 개구지게 놀며 손 꽁꽁 언 아이들을 무릎에 앉혀 내 큰 손으로 작은 손을 꼬옥 감싸며 녹입니다. 글 한 줄에서 생각을 읽고, 아이들 몸짓 하나에서 노래를 읽습니다. 4345.12.3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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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93 : 두 줄에서 읽는 얼

 


  우리가 애써 책을 읽어야 한다면 어떤 책을 읽을 때에 ‘즐거울’는지 ‘아름다울’는지 ‘참다울’는지 ‘착할’는지 ‘신날’는지 ‘빛날’는지 ‘거룩할’는지 ‘재미날’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책을 읽어야 한다면, 줄거리를 살펴 독후감이나 서평을 써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곧, 우리가 어버이한테서 새 목숨 선물받아 살아가야 하는 까닭은 ‘어른 되어 일자리 얻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삶을 누리는 까닭을 생각하듯, 책을 읽는 까닭을 헤아려 봅니다.


  밥을 먹어야 한다면 어떤 밥을 먹을 때에 즐거울는지 생각해 봅니다. 밥은 왜 먹을까요. 밥은 왜 지을까요. 밥집은 왜 이다지도 많을까요. 회사원이나 공무원은 왜 바깥 밥집에서 밥을 사다 먹을까요. 학교는 왜 급식을 할까요. 집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왜 도시락을 싸려고 하지 않을까요. 도시락을 싸지 못할 만큼 바쁠까요. 도시락을 쌀 겨를에 ‘생산성 높은’ 다른 일을 해야 할까요. 밥짓기는 ‘생산성 낮은’ 일이라, 돈 몇 푼 치러서 사다 먹거나 급식실 만들어서 밥판에 척척 밥을 올려놓고 먹은 다음 설거지조차 안 해도 그만인 셈일까요.


  내 어릴 적을 돌이켜봅니다. 나와 형과 아버지는 날마다 도시락을 둘씩 싸들고 다녔습니다. 나와 형은 중학생과 고등학생 여섯 해를 도시락 둘 싸들고 다녔고, 집과 일터 사이가 먼 아버지도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날마다 도시락 다섯 통 싸는 일을 해야 했고, 나와 형은 도시락 설거지‘라도’ 했습니다.


  요즈음 여느 어머니(아버지 아닌 어머니)들 얘기를 살짝 엿들으면, 소풍날이나 현장학습날 같은 자리에 김밥을 싸 주거나 김밥을 ‘사 주’거나 하는데, 아이들은 빈 도시락통 아닌 ‘빈 스티로폼 통과 나무젓가락과 비닐봉지’ 따위를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집으로 돌아온다고 해요. 열 번 백 번 천 번, 열 해 스무 해 서른 해 고이 건사하며 쓰는 도시락통 쓰는 집이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우리 식구가 시골집을 떠나 할머니 할아버지 댁까지 기차 타고 찾아갈 적을 떠올립니다. 집에서 바지런히 손을 놀려 도시락을 싸기도 하고, 때때로 김밥집에서 사다 먹기도 합니다. 집에서 도시락을 싸면 쓰레기가 안 나오지만, 김밥집에서 사다 먹으면 쓰레기가 한 봉지씩 나옵니다. 독일사람 에냐 리겔 님이 쓰고 한국사람 송순재 님이 옮긴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착한책가게,2012)라는 책을 읽으면, “우리는 학생들이 프랑스어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역할극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대신, 파리 중앙역에 배낭 하나 메고 내려서 거기에서 리옹까지 혼자서 찾아가는 특명을 수행할 날을 꿈꾸었다. 또한 학생들이 아일랜드에서 도보여행을 할 날도 꿈꾸었다(107쪽).”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참말, 아이들은 교과서를 배울 아이들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고 배우며 받아들일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짓고 생각을 지으며 사랑을 지을 아이들입니다. 체험학습 아닌 ‘삶’을 누릴 아이들이에요. 손수 밥을 짓고, 손수 빨래를 하며, 손수 이야기를 엮을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자전거 타고 집과 학교 사이를 다니기를 빌어요. 아이들이 스스로 흙을 만져 곡식이랑 푸성귀를 거두기를 빌어요. 아이들이 서로 어깨동무하며 고운 노래 부르기를 빌어요. 4345.12.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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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92 : 한 줄에서 읽는 넋

 


  우리는 굳이 책을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책은, 읽고 싶은 사람이 읽을 노릇이지만, 읽고 싶은 사람이 읽고 싶은 대로 읽되, 스스로 넋과 삶과 말을 아름답게 북돋우려는 마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즐거이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나 아무 책을 골라 아무렇게나 읽는대서 책읽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글쓰기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아무나 아무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쓴대서 글쓰기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밥하기도, 빨래하기도, 아이돌보기도 늘 이와 같습니다. 아무나 아무 아이를 골라서 아무렇게나 돌본대서 아이돌보기라 하지 않아요. 스스로 가장 깊이 우러나오는 따순 사랑으로 돌볼 때에 비로소 아이돌보기예요. 값진 먹을거리를 손질해서 차려야 멋스럽거나 맛난 밥하기라 하지 않아요. 값싼 먹을거리이든 아니든, 스스로 가장 너른 사랑과 꿈결을 담는 가장 따사로운 손길로 먹을거리를 다루며 밥 한 그릇 차릴 때에, 비로소 밥하기라는 이름이 걸맞습니다.


  어릴 적부터 둘레 어른들이 말놀이 삼아 “너, 야구의 ‘야’가 무언지 아느냐?” 하고 묻곤 했습니다. 비슷한 말꼴로 “너, 공부의 ‘공’아 무언지 아느냐?” 하고도 물으며, “너, 학교의 ‘학’이 무언지 아느냐?” 하고 묻기도 했어요. 동무들하고 ‘아무 생각 없이’ 야구를 하다가, 시험을 앞두고 ‘아무 생각 없이’ 시험점수 따는 공부를 하다가,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학교를 다니다가 이 물음을 곰곰이 되뇝니다. 그래, 참말 야구란 뭐지? 참말 공부란 뭐지? 참말 학교란 뭐지?

 

  이 물음은 가지를 뻗습니다. 삶은 무엇일까? 사람은 무엇일까? 사랑은 무엇일까? 밥은 무엇일까? 흙은 무엇일까? 온누리는 무엇일까? 달과 별과 해는 무엇일까?


  나는 어느 한 가지조차 대꾸하지 못합니다. 아직도 어느 한 가지 이야기를 짓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어느 한 가지조차 풀이말을 달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언가 한 가지를 느낍니다. 나 스스로 ‘아무 생각 없이’ 휩쓸리거나 이끌린다면, 나는 무엇 하나라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아이들을 품에 안고 자장노래를 부를 수 없어요. 아무 생각 없이 오랜 동무를 불러 이야기꽃 피울 수 없어요. 아무 생각 없이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 수 없어요.


  언제나 생각해야 해요. 언제나 내 삶을 돌아봐야 해요. 언제나 내 사랑이 얼마나 따뜻하거나 너른가 생각해야 해요. ‘반드시 무얼 해야 한다’라는 굴레가 아니라, ‘즐기는 삶은 어떤 빛일까’라는 꿈을 품는 길이로구나 싶어요.


  야마오 산세이 님 이야기를 갈무리한 《애니미즘이라는 희망》(달팽이,2012)이라는 두툼한 책을 읽다가 “배운다고 하면 무슨 대단한 공부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게 아니라 감동을 받는다는 말입니다(225쪽).”라 나오는 한 줄에 밑줄을 반듯하게 긋습니다. 나는 시골마을 시골숲을 바라보며 예쁜 삶을 배웁니다. 나는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면소재지 우체국을 다녀오면서 고운 삶을 누립니다. 나는 날마다 밥짓고 빨래하면서 멋진 삶을 나눕니다. 나는 아름다운 책 하나에 깃든 어여쁜 글 한 줄을 읽으며 환한 꿈을 꿉니다. 4345.12.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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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91 : 허물을 쓰는 책

 


  강예린 이치훈 두 분이 일군 책 《도서관 산책자》(반비,2012)를 읽으면 첫머리에 “도서관 건축을 먼저 읽어냈다. 그런데, 그렇게 도서관 탐방을 하다 보니, 탐방 횟수가 더해질수록 점점 막막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건축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자면, 아무래도 도서관의 장점보다는 허물을 드러내는 데에 치중하게 될 것 같았다(13쪽).”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건축일을 하는 두 사람이 도서관을 즐겁게 찾아다니다가 문득 ‘도서관 나들이’를 글로 쓰면 좋겠다고 여겨 새삼스레 도서관을 바라보노라니 ‘건축일 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허물’이 너무 많아, 자칫 허물만 잔뜩 늘어놓는 글이 되겠다고 느꼈다 합니다.


  건축으로 바라보는 자리뿐 아니라, 언론으로 바라보는 자리라든지, 정치로 바라보는 자리라든지, 교육이나 문화나 예술로 바라보는 자리라든지, 막상 ‘옳고 바르며 아름다운가’ 하는 잣대를 놓고 바라본다면, 어디에서건 허물이 잔뜩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는 건축이든 언론이든 정치이든 교육이든 허물이 참으로 많아요. 어느 곳에서건 줄세우기가 이루어집니다. 교육보다 입시지옥으로 들끓는데, 입시지옥에서 허덕이는 아이와 어버이조차 스스로 입시지옥으로 뛰어들 뿐, 입시지옥에서 스스로 벗어나거나 이를 뜯어고치려고 힘쓰지 못해요.


  왜 이렇게 모두들 악다구니처럼 엉겨붙거나 다툴까요. 왜 이렇게 모두들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고 용을 쓸까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아름다운 나날일 텐데요. 서로 믿고 기대며 어깨동무할 때에 빛나는 삶일 텐데요.


  이시카와 다쓰조 님이 쓴 《인간의 벽》(양철북,2012) 셋째 권을 보면 “문부성이 요구하는 교육과정은 획일적이다. 아이들마다 다른 성격을 무시하면 교육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다(407쪽).”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0∼60년대 일본 교육밭 이야기인데, 한국 교육밭을 놓고 본다면 2010년대에도 이 같은 이야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할 만합니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도, 중·고등학교도 몽땅 ‘줄세우기(획일)’예요. 유치원과 어린이집도 줄세우기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모두 ‘대학바라기’를 놓고 줄세우기를 시켜요. 더 빨리 영어를 가르치고, 더 많은 교과서 지식을 끝없는 시험으로 달달 외우도록 시켜요. 아이들한테 삶도 사랑도 꿈도 가르치지 않아요. 들꽃을 따사로이 바라보도록 놓아 주지 않아요. 흙땅에서 뒹굴며 뛰놀도록 놓아 주지 않아요. 하늘을 누리고 냇물을 즐기도록 놓아 주지 않아요.


  하나하나 따지면 서글픈 이야기만 가득합니다. 온통 허물을 까밝히는 글이 나올 만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렇게 서글프거나 허물을 까밝혀야 할까 궁금해요. 나부터 스스로 사랑스러운 길을 찾고, 나부터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누리며, 나부터 스스로 어여쁜 이야기를 일구면 될 노릇이 아닌가 싶어요. 도서관 나들이를 할 적에는 도서관 책시렁에 꽂힌 책을 즐기면 되듯, 한국 교육밭이 엉망진창이라면 열 걸음 백 걸음 멀찍이 물러서거나 아예 발을 안 담그면서 시골마을에서 우리 아이들과 호젓하게 삶을 누리면 돼요. 사랑스레 뛰놀며 힘차게 노래할 예쁜 삶을 꽃피우면 돼요. 허물을 까밝히며 쓰는 글도 있어야 할는지 모르지만, 이보다는 사랑을 길어올리는 글부터 즐거이 써서 나누어야 한다고 느껴요. (4345.1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책으로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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