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



  책을 한 번만 읽어도 다 알아차릴 수 있는가? 사전에서 어느 낱말을 한 번만 찾아봤으면, 그 낱말을 두 번 다시 안 찾아봐도 되는가? 영어를 배우는 이가 영어사전에서 영어 낱말을 한 번 찾아보았으면 그 낱말은 더 안 찾아보아도 잘 아는가? 한국말사전에서 한국말을 한 번 찾아보았으면 그 낱말은 매우 잘 알아서 더 안 찾아보아도 되는가? 한 번 읽고서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열 번 읽으면서 차근차근 뜻을 새기는 사람은 누구인가? 백 번 천 번 새로 읽으면서 배우는 사람은 누구인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읽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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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못하는 마음



  믿지 못하는 마음이라면 처음부터 하나도 믿지 않습니다. 믿는 마음이라면 처음부터 모두 믿습니다. 내가 너를 믿으려 하기에 나는 너를 믿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믿으려 하지 않기에 나는 너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여주거나 저런 말을 들려주어야 믿을 만할까요? 아니지요. 믿음은 언제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르는 숨결입니다.


  배우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면 처음부터 하나도 배우지 않습니다. 배우려는 마음이라면 처음부터 모두 배웁니다. 내가 너를 가르치기에 네가 나한테서 배우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가르치기에 내가 너한테서 배우지 않습니다. 배움이란 서로 마음으로 하나가 되려고 하는 몸짓일 때에 이룹니다. 놀라운 스승이나 멋진 책이 있어야 배우지 않아요. 모든 지식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마음을 열 때에 배웁니다.


  사랑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면 처음부터 하나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려는 마음이라면 처음부터 모두 사랑합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어떻게 사랑할까요? 아이가 어버이를 어떻게 사랑할까요? 이것을 해야 사랑이고, 저것을 하면 안 사랑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든 안 하든, 저것을 못 하든 해내든, 그저 사랑은 사랑입니다.


  누군가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나는 나를 안 믿는 그 사람이 나를 믿게 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스스로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요. 내가 누군가를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나한테 아무리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한들 믿지 못해요. 내가 스스로 마음을 열지 않으니까요. 마음을 먹어야 비로소 실타래를 풀면서 차근차근 삶을 짓는 사랑으로 거듭나는 사람이 됩니다. 4348.12.18.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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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런히 서울 다녀오려는 마음



  이듬해에 새롭게 쓸 책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서울마실을 갑니다. 읍내에서 여덟 시 반에 서울로 가는 첫차를 타려면, 우리 마을 앞을 지나가는 군내버스로는 때를 못 맞추기에, 이웃마을 앞을 지나가는 군내버스를 타려고 아침 일곱 시 이십 분에 길을 나서야 합니다. 아이들이 새근새근 잠을 다 자고 개운하게 일어날 무렵 즐겁게 새 하루를 맞이하기를 바라면서, 쌀을 미리 씻어서 불리고, 감이랑 능금을 씻어 둡니다. 집을 나서기 앞서 달걀을 삶고 국을 하나 끓여야지요. 서울에서 뵐 분들한테 드릴 유자차 담은 병을 챙기고, 시외버스로 오가는 길에 읽을 책도 챙겨야지요. 새벽에 머리를 감는 김에 빨래를 몇 점 하고, 걸레 한 장도 빨아 놓습니다. 부디 오늘하고 이 다음 날도 햇볕이 곱게 비추면서 아이들이 마당에서 개구지게 뛰놀 수 있기를 빕니다. 모두 즐겁게 놀고 일하며 웃는 살림을 꿈꾸면서 씩씩하게 마실길을 다녀오려고 합니다. 4348.11.23.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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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한 자루 켜는 마음



  촛불을 켭니다. 초를 아끼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촛불을 켭니다. 밥상을 다 차리고 나서 촛불을 켭니다. “아버지 초 왜 켜?” 하고 묻는 아이한테 “응, 이제부터 밥을 차리니까 기다리는 동안 가만히 보라고.” 밥을 먹는 동안 초를 볼 일은 없지만, 문득 초를 느낍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촛불을 잊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떠올리면서 “아버지, 촛불 껴요?” 하고 묻습니다.


  책상맡에서 일하며 초를 켭니다. 몸이 몹시 고단해서 얼른 자리에 드러눕기 앞서 초를 켭니다.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가만히 앉아서 초를 바라봅니다. 깊은 밤에 전깃불을 켜고 싶지는 않아서 초 한 자루를 살며시 켜기도 합니다. 촛불에 기대어 책을 천천히 읽어 봅니다. 전깃불 아닌 촛불에 기대어 읽는 책은 사뭇 다릅니다. 창문을 모조리 닫아서 조용하기만 한 커다란 도서관이 아닌, 시골마을 작은 숲에서 읽는 책은 사뭇 다르듯이, 초 한 자루를 켜는 삶은 늘 사뭇 다릅니다.


  내가 먼저 촛불에 녹습니다. 나부터 스스로 촛불에 녹습니다. 내 몸을 녹이고 내 마음을 녹여서 새로운 몸이랑 마음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초 한 자루를 켭니다. 앙금도 아쉬움도 시샘도 걱정도 고단함도 모두 촛불에 천천히 태워서 녹인 뒤, 마음 가득 담으려 하는 꿈과 사랑을 새롭게 그립니다. 4348.9.2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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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켜는 고슈’를 영화로 빚는 마음



  미야자와 겐지 님 작품 가운데 하나인 〈첼로 켜는 고슈〉가 일본에서 1981년에 만화영화로 나왔다고 합니다. 이 만화영화는 한국에서도 디브이디로 살 수 있지만, 이 디브이디를 다루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그야말로 구경하기 아주 어렵습니다. 나는 고맙게 이 만화영화를 얻어서 한가위에 아이들하고 봅니다. 작은아이는 썩 재미있어 하지 않지만 큰아이는 아주 재미있게 봅니다. 나도 즐겁게 이 영화를 봅니다. 글로만 읽던 〈첼로 켜는 고슈〉가 만화영화에서 아주 새롭게 옷을 입고 아름답게 태어납니다. 나중에 야후재팬을 살펴보니, 일본에서는 〈첼로 켜는 고슈〉를 놓고 온갖 그림책이 나왔군요.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그림결로 이 작품 하나를 그야말로 저마다 새롭게 빚었어요.


  만화영화를 보면 기모노를 입고 서양 악기를 켜는 가시내가 나오는데 하나도 안 어설픕니다. 참으로 잘 어울립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 ‘한복 입고 바이올린 켜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여길까요? 한국에서는 아주 안 어울린다고 여길 테지요.


  문화란 무엇일까요.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야기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누릴 노래와 꿈과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4348.9.2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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