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가는 마음

 


  칼을 갑니다. 작은아이가 아버지 곁으로 다가와서 묻습니다. “아버지 뭐 해?” “응, 칼 갈아.” “칼 갈아?” “응, 칼 갈아.” 작은아이는 아침에도 묻고 저녁에도 묻습니다. 칼을 가는 소리가 부엌을 울릴 때면 으레 뽀로롱 달려와서 달라붙습니다. 밥과 국을 바삐 하는 한편 지짐판에 무언가 하나를 볶느라 불을 셋 쓰면서 칼을 갈 적에는 작은아이한테 대꾸할 겨를이 없습니다. 냄비마다 불을 살피고, 때 맞추어 이것저것 썰어서 넣어야 하니, 작은아이는 자꾸 묻고 아버지는 입을 꼬옥 다뭅니다.


  아침저녁으로 칼을 갈면서도 무나 당근이나 오이를 썰다가, 곤약을 썰고 감자를 썰다가 칼을 새로 갈곤 합니다. 더 잘 들기를 바라고, 가볍게 통통 썰 수 있기를 꾀합니다.


  밥을 다 차려 놓고 아이들을 부르며 칼을 갈기도 하고, 설거지를 마친 뒤 칼을 갈기도 합니다. 바쁜 날을 밥을 차리는 때에 칼을 새로 안 갈지만, 바쁘지 않은 날은 아침에 설거지 마치고 칼을 갈았어도 한 번 가볍게 더 갈고 씁니다. 갈면 갈수록 날이 잘 서고, 날이 잘 설수록 도마질이 노랫소리처럼 똑똑똑 흐릅니다.


  칼갈이를 아침저녁으로 하지 않던 어린 날이 문득 떠오릅니다. 칼갈이도 모르는 채 “칼을 간다” 같은 말을 쓰곤 했습니다. 어릴 적에 동무들 누구도 “너, 칼을 가는 일이 무언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니?” 하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나도 동무들도 칼을 어떻게 가는 줄 몰랐겠지요.


  물고기 살점을 바르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새롭게 칼을 갑니다. 칼질을 하다가도 칼을 갑니다. 빈틈없이 일을 하려는 뜻일 수 있고, 밥 먹을 사람들한테 한결 맛나며 보기 좋게 차려서 베풀고 싶은 마음이리라 느낍니다. 칼날이 잘 들어 무채를 또박또박 썰고, 오이를 반듯하게 썰며, 감자알이나 곤약을 정갈하게 썰어서 접시에 담으면, 젓가락질 하는 아이들도 더 예쁜 모습을 누리리라 생각해요.


  석석석 칼을 갑니다. 석석석 칼을 갈며 기운을 손목과 손가락에 그러모읍니다. 칼날이 곧게 서도록 숫돌에 문지릅니다. 깔끔하게 칼갈이 마친 부엌칼을 흐르는 물에 씻어 나무도마에 얹습니다. 자, 이제 아침일은 끝났네. 기지개를 켜고 등허리를 펴 볼까. 4346.9.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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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9-09 08:29   좋아요 0 | URL
숫돌에 칼 가는게 보기보다 쉽지 않더군요. 칼의 방향도 그렇고 적당히 물을 뿌려가면서, 적당한 힘을 주어 꽤 오래 갈아야하고요. 예전엔 아버지께서 휴일이면 집안의 칼을 다 가져다가 한참동안 가시는걸 오며가며 구경 하며 '재밌겠다~' 생각했었는데 ^^ 어느 새 제가 칼을 갈고 있어요.

숲노래 2013-09-09 15:14   좋아요 0 | URL
틈이 나면 오랫동안 갈고, 바쁘면 날이 무디지 않을 만큼만 갈아요.
아무튼 날마다 칼을 갈아야 칼이 쓸 만하더라고요.

그리고, 아무리 서툰 사람이라 하더라도 갈다 보면,
또 쓰다 보면 잘 갈 수밖에 없는 듯해요 ^^;;
 

육아일기 쓰는 마음

 


  첫째 아이 태어나고부터 ‘육아일기’를 씁니다. 아이랑 살아가니 마땅히 쓰는 육아일기인데, 육아일기를 쓰는 까닭은 이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 아주 즐겁고 새로우며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육아일기를 쓰면서 아이를 한결 따사롭고 보드랍게 마주할 수 있기도 하지만, 이보다 내가 나를 한결 따사롭고 보드랍게 바라봅니다. 내가 나를 참말 사랑하도록 이끄는 육아일기로구나 하고 느껴요.

 

  첫째 아이와 여섯 해, 둘째 아이와 세 해 살아오면서, 육아일기를 느긋하게 쓸 틈은 한 차례도 없습니다. 언제나 졸음과 고단함을 쫓으며 씁니다. 때로는 바쁜 일 넘치지만 뒤로 미루고 씁니다. 왜냐하면, 다른 어느 글보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쓸 적에 나 스스로 빙그레 웃음꽃이 피어나거든요. 이렇게 즐거운 글을 가장 먼저 더 마음을 기울여 쓸 수밖에 없다고 느껴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적에도 이와 똑같은 마음이에요. 아이들이 참으로 예뻐서 찍는다고만 할 수 없어요.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길이란 바로 나 스스로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되어요. 아이들한테서 예쁜 빛을 느껴 사진을 찍는다면, 바로 나 스스로 나를 예쁜 눈빛으로 어루만진다는 이야기가 돼요.


  살림 도맡는 어머니가 가계부 쓰는 까닭은 살림돈 아끼려는 뜻만이 아닙니다. 살림을 돌아보면서 어머니 스스로 이녁 마음을 보살피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기를 쓰는 까닭은 ‘하루 일 기록’ 하는 뜻이 아니에요. ‘하루 일 기록’도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 내 삶을 깊고 넓게 사랑할 수 있기에 일기를 써요.


  내가 육아일기를 쓸 적에 누군가 옆에서 내 얼굴을 바라본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테지요. “이야, 환하게 웃으면서 글을 쓰네?” 하고. 4346.9.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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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9-07 08:35   좋아요 0 | URL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면서 육아일기를 쓰시니 이렇듯
환하고 착하고 예쁘게, 벼리와 보라가 날마다 즐겁게 무럭무럭 자라겠지요~
이 사진 참으로 예쁘고 정말 좋습니다~*^^*

숲노래 2013-09-07 08:40   좋아요 0 | URL
육아일기 쓸 때뿐 아니라
언제나 웃으려고 합니다 ^^;;;;

일에 치이면 해롱해롱거리니까요 @.@
 

저녁밥 떠올리는 마음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우체국에 들렀다가 골짜기로 놀러갑니다. 작은아이는 수레에서 새근새근 잡니다. 큰아이는 샛자전거에 가만히 앉아서 잘 따라옵니다. 멧길을 오르다가 힘에 부쳐 자전거에서 내려 낑낑 소리를 내면서 끌어당기면, 큰아이는 으레 “나 내릴래.” 하고는 내려서 걷는데, 오늘 따라 내려오지 않고 조용히 앉았습니다. 그래, 네가 힘든가 보구나, 그러면 그대로 앉으렴, 속으로 생각하며 다른 날보다 땀을 더 흘려 가파른 오르막을 지납니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 오르막길 훅훅 숨을 몰아쉬면서 다 오르면, 우리 식구들 놀러오는 골짜기.


  골짜기에서 신나게 놀고 샛밥을 먹입니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올라올 때에는 한참 낑낑거리던 길을 한달음에 싱 하니 내려옵니다. 아이들은 샛자전거와 수레에서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합니다.


  이웃마을 어귀까지 내려올 무렵, 오늘은 저녁밥으로 무엇을 차릴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차, 아까 아침을 먹고서 설거지만 마치고 저녁밥 지을 쌀을 미리 불리지 않았다고 떠올립니다. 흰쌀 없이 누런쌀 먹는 밥차림이니 미리 불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바로 쌀을 불려야 하는데 이렇게 잊었네. 뒤늦게 뉘우친들 하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샛밥 먹었으니 아이들이 배고프다 하지 않을 테고, 집에 닿으면 막바로 쌀부터 불리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 좀 놀리고, 이럭저럭 있다가 물을 여느 때보다 많이 붓고 아주 여린 불로 더 천천히 밥을 지으면 되겠지요. 4346.8.2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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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보면서 자는 마음

 


  날이 더워 아이들 재우며 한참 부채질을 합니다. 부채질을 하다가 팔이 아프면 좀 쉬었다가 아이들 이마와 목과 팔을 만집니다. 땀이 돋는다 싶으면 다시 부채질을 합니다. 땀이 마를 때까지 부채질을 하고는 또 쉽니다. 이렇게 부채질을 하다가 더는 땀이 안 돋는다 싶으면 슬그머니 대청마루로 나옵니다. 두 아이가 방에서 잘 자도록 하고, 나는 대청마루에 드러눕습니다.


  방에서 누울 적에도 밤노래는 잘 들리는데, 대청마루에 누우면 밤노래는 훨씬 잘 들립니다. 마당으로 내려서면 더욱 잘 들리겠지요.


  아이들 새근새근 자고, 나도 시원한 대청마루에 눕고, 이런 밤은 참 한갓지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귀를 거스르는 소리 하나 없이, 우리 집 풀밭에 깃든 수많은 풀벌레가 저마다 예쁜 노래 베푸니, 이런 밤을 누릴 수 있는 하루란 얼마나 즐거운가 하고 돌아봅니다.


  가만히 밤노래를 듣다가 문득 눈을 뜹니다. 제법 밝다 싶더니 보름달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마루에 누워 밤하늘 올려다보니 바로 옆으로 보름달이 보입니다. 그런데, 보름달빛이 내 얼굴로 드리우지만 ‘밝아서 잠을 못 자겠다’는 느낌이 아닙니다. ‘달빛이 보드라우니 잠이 더 잘 들겠다’는 느낌입니다.


  먼 옛날 사람들은 달빛과 별빛을 누리며 밤잠이 들었을까요. 등으로는 흙과 풀을 느끼고, 눈과 배로는 달과 별을 느끼면서 잠들었을까요.


  한여름 보름달은 깁니다. 오래도록 하늘에 걸리며 마루까지 스며듭니다. 형광등이나 가로등이나 자동차 앞등이 켜졌다면 눈이 따갑고 머리가 아플 테지만, 달빛과 별빛이 고이 어우러져 드리우는 시골마을 밤은 고즈넉합니다. 4346.8.2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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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8-23 08:31   좋아요 0 | URL
'달빛이 보드라우니 잠이 더 잘 들겠다'는 느낌.
보름달 누워 바라보시는 정경이 아름다이 눈에 선합니다...

숲노래 2013-08-23 15:38   좋아요 0 | URL
누구라도 달을 바라보며 잠들고
해를 마주하며 일하면
참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항공방제 대피하는 마음

 


  오늘 2013년 8월 12일과 13일은 우리 마을 논에 항공방제를 하는 날입니다.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우리 마을을 비롯해 고흥군 곳곳에 항공방제를 합니다. 이리하여,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한동안 고흥을 떠나기로 합니다. 항공방제는 친환경농약 뿌려서 벼멸구와 나방을 잡으려 한다는 일이라는데, 이 항공방제가 지나가고 나면 벼멸구와 나방도 죽을 테지만, 잠자리와 나비뿐 아니라 온갖 풀벌레가 모조리 죽습니다. 개구리도 죽고 제비도 죽습니다. 해오라기는 아예 자취를 감춥니다. 온 들판과 마을에서 아무런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항공방제가 지나간 시골은 ‘죽은 소리만 고요하게 퍼질’ 뿐입니다.


  사람을 뺀 모든 목숨이 죽어서 사라지는 일을 무섭게 느끼지 않는다면, 사람만 살아남고 다른 모든 목숨은 죽어도 된다고 여기는 짓을 끔찍하게 느끼지 않는다면, 사람은 스스로 사람됨을 내버리는 노릇이라고 봅니다.


  시골마을에 늙은 어르신만 있어 농약을 치기 어렵다 하지만, 늙은 어르신들은 늙은 몸으로 농약을 잘 치십니다. 항공방제가 아니어도 여느 때에 곳곳에 수없이 농약을 칩니다. 논둑에도 밭둑에도 길섶에도 온통 농약투성이입니다. 독재정권이 새마을운동 앞세워 시골마을 골골샅샅 풀지붕을 슬레트지붕으로 바꾸고, 온 나라 흙길을 시멘트길로 바꿀 무렵부터 길든 농약농사 버릇은 이제 쉰 해 마흔 해 동안 몸에 착 달라붙어 안 떨어집니다. 시골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적에 농약을 마시고 죽으면서, 정작 이 농약을 들과 숲에 뿌리면 사람들 몸이 어떻게 달라질는지를 조금도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 몸에 나쁘지 않을 만큼 뿌린다’고 할 뿐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하루빨리 시골 떠나 도시로 가는 길’만 배운 탓에, 시골에 늙은 할매 할배만 남았으니 어쩔 수 없을는지 모릅니다. 시골에서 늙은 할매 할배와 함께 흙을 만지며 아끼고 사랑할 어린이와 젊은이가 몽땅 사라졌다 할 만하니, 늙은 몸으로 농약을 만지며 흙을 죽이고 달달 볶을밖에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늙은 몸이기에 농약만 써야 한다고 여겨, 흙을 죽이거나 망가뜨리면, 나중에라도 어린이와 젊은이가 시골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흙이 농약에 절디전 마당에, 비닐농사 지으며 밭마다 1미터 깊이까지 비닐쓰레기 파묻어 비닐쓰레기 넘치는 마당에, 어떤 도시 어린이와 젊은이가 시골이 좋다고 돌아올 수 있을까요? 시골을 아끼며 사랑할 젊은 일꾼이 시골로 찾아들기를 바란다면, 마을 어르신부터 군수와 공무원 모두 ‘흙을 살리고 살찌우는 길’을 북돋우면서 ‘숲을 지키고 돌보는 삶’을 가꾸어야 할 텐데요.


  오늘날 시골은 농약도 농약이지만, 밭자락에 몰래 함부로 파묻은 쓰레기가 그득그득합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고흥 시골마을 작은 집에 깃들었지만, 이 시골마을 작은 집에 와서 한 첫 일이란 밭에 파묻힌 쓰레기 캐내기였습니다. 우리 식구는 우리 밭에서만 1톤에 가까운 쓰레기를 캐내어 고흥쓰레기매립지로 옮겨야 했습니다. 쓰레기를 캐낸 밭은 아직 아무것도 심을 수 없습니다. 쓰레기냄새와 쓰레기물을 들풀이 걸러내고 씻어내기까지 앞으로 열 해쯤 기다려야겠지요. 여기에, 시골 어르신들은 비닐이나 농약병이나 플라스틱을 따로 가르지 않고 몽땅 그러모아서 ‘흙바닥 빈터’에서 태웁니다. 쓰레기를 태운 흙바닥 빈터는 마을마다 집집마다 있습니다.


  우리 시골에 언제부터 이처럼 쓰레기가 넘쳤을까요. 우리 시골에 언제부터 이렇게 ‘쓰레기농사’가 뿌리내렸을까요. 왜 농사짓기를 마친 논밭 둘레에 쓰레기가 잔뜩 굴러다녀야 할까요. 해마다 비닐쓰레기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데, 이 비닐쓰레기는 누가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농약병과 농약봉지와 비료푸대와 막걸리병이 도랑이며 개울이며 밭둑이며 굴러다닙니다. 이것들은 누가 어디에 치워야 할까요.


  지난 7월 첫 항공방제 지나간 뒤부터 새벽멧새 노랫소리를 못 들으면서 새벽을 맞이합니다. 우리 집 풀밭에 깃들어 살아가는 풀벌레 몇몇 울음소리로 겨우 새벽을 느낍니다. 4346.8.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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