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되는 마음

 


  할 일이 남아 잠자리에 들지 않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일곱 살 큰아이가 한 마디 합니다. “아버지, 일 다 하고 자러 와. 알았지?” 그럼, 자러 가지.


  일을 다 마친 뒤 꼭 제 옆에 누워서 자자면서 부르는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우면서 고맙습니다. 아이 목소리를 되새기면서 바지런히 힘을 모읍니다. 힘을 모아 조금 더 글을 씁니다. 그렇지만 요 석 달 동안 고단한 일을 하느라 몸이 많이 지친 탓에 자꾸 졸음이 밀려듭니다. 어쩌나 그대로 누워야 하나.


  졸음이 온몸을 감쌀 적에 아이들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오늘 하루 동안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고, 어제와 그제 찍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 아이들이 어떤 눈빛으로 사진에 찍혔는지 헤아립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눈길은 얼마나 그윽하거나 사랑스러웠는지 돌아봅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나한테 힘이 됩니다. 그러면, 거꾸로 살펴, 나는 아이들한테 똑같이 힘이 될까요? 틀림없이 힘이 될 텐데, 즐거운 힘이 될는지 살가운 힘이 될는지 어여쁜 힘이 될는지 짜증내는 힘이 될는지 꾸짖는 힘이 될는지, 여러모로 되짚습니다.


  일하는 틈틈이 아이들 이부자리를 살피며 이불깃을 여밉니다. 언제나 한 줄이라도 일을 더 하고 눕자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이 조잘조잘 노래하면서 나를 부르면, 나중에 두 줄을 쓰자고 생각하며 함께 이부자리로 파고들기 일쑤입니다. 아이들만 눕혀서 재우고 일을 할 적보다는, 아이들과 나란히 누워 한 시간쯤 같이 노래를 부르다가 스르르 곯아떨어진 뒤 깊은 밤에 슬그머니 일어나 일을 할 적에 훨씬 새힘이 빨리 솟아나지 싶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개구지게 뛰놀며 날마다 옷을 여러 벌 버려도, 즐겁게 노래하며 웃는 몸으로 내놓는 빨래는 아버지로서도 신나게 비빔질을 하고 물짜기를 할 수 있단다. 웃는 삶이 즐겁지, 빨래 없는 삶이 즐겁지는 않아. 노래하는 삶이 즐겁지, 더 큰 집을 바라지 않아. 그러나 너희들 놀잇감이랑 책이랑 둘 만한 자리는 앞으로 차근차근 마련해야겠지. 너희들이 조용히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고 글도 쓸 조그마한 방을 머잖아 마련해야겠지. 너희들이 손수 일구며 돌볼 땅뙈기도 있어야겠지. 너희들이 사랑스러운 손길로 가꾸며 보살필 숲이 될 만한 땅은 참말 넉넉히 마련해야겠구나. 4347.2.2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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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끝자락 파란하늘 마음

 


  멧자락으로 제법 깊숙하게 들어간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웃집에 마실을 갑니다. 전남 고흥에는 육백 미터 넘는 산조차 드물고 사오백 미터 안팎을 맴도는 야트막한 봉우리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만 한 높이인 멧자락에 깃든 마을에서 올려다보는 하늘도 참 고와요. 나즈막한 들에서 올려다보는 하늘도 곱고요.


  겨울 끝자락 포근한 바람을 느끼며 하늘을 바라봅니다. 파랗게 빛나는 하늘을 언제나 바라보는 사람은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파란 사랑과 꿈을 돌볼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과 하얗게 무늬를 새기는 하늘을 늘 마주하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파랗고 하얀 이야기와 노래를 보듬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자가용을 장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운전면허조차 안 딴 까닭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자가용을 몰거나 얻어탈 적에는 하늘을 보기 어렵습니다. 아니, 하늘을 못 봅니다. 뚜껑을 벗긴 자가용을 탄다면 하늘을 볼까요? 그러나, 자가용을 몰거나 타면 앞이나 옆이나 뒤에서 달리는 다른 자동차를 살펴야 합니다. 하늘을 느긋하게 볼 겨를이 없습니다.


  두 다리로 걸을 적에는 으레 발걸음 멈추고 하늘을 봅니다. 자전거로 달릴 적에도 으레 발판질을 멎고는 하늘을 봅니다. 하늘을 보면서 걷는 하늘걸음이고, 하늘을 누리며 달리는 하늘자전거입니다.


  내 고운 이웃들이 파란하늘을 언제나 가슴으로 품기를 빕니다. 내 좋은 동무들이 파란하늘을 늘 마음 가득 담으면서 활짝 웃기를 빕니다. 나무를 마주하는 이는 언제나 나무마음이 되고, 꽃을 바라보는 이는 늘 꽃노래가 되어요. 파란하늘과 같이 파랗게 눈부신 눈빛으로 맑고 밝게 살아가는 이웃과 동무는 이녁 보금자리와 마을을 알뜰살뜰 가꾸겠지요. 4347.2.1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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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아는 마음

 


  일곱 살 큰아이가 두 팔을 활짝 펼쳐 “안아 줘.” 하고 말할 적에 가슴이 찡합니다. 불쑥 꺼내는 이 말을 어떻게 맞아들여야 좋을까 하고 한참 생각합니다. 아이를 품에 안으면서도 생각하고, 아이를 재운 밤에도 생각합니다. 나도 어릴 적에 우리 아이처럼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지 떠올려 봅니다. 일곱 살 밑일 적에 겪은 일은 하나도 떠올리지 못하는 터라, 그때까지 어떠했는지 모르겠는데, 일곱 살 뒤부터 누구한테도 “안아 줘.”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안긴 아이는 팔과 다리로 척 붙잡습니다. 안긴 채 움직입니다. 나는 아이를 안고는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요 녀석 재미나게 놀고 싶구나 하고 느끼는 한편, 안긴 아이가 느낄 즐거움과 따스함 못지않게 안은 어른이 느낄 즐거움과 따스함이 크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사랑은 어디에서 태어날까요. 사랑은 어디에서 샘솟을까요. 사랑은 언제 깨달을까요. 사랑은 언제부터 느낄까요. 누가 가르치고 누구한테서 배우며 누가 누구하고 주고받는 사랑이 될까요. 간밤에 딱새와 제비가 우리 집 처마에 둥지를 잔뜩 짓고는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처마 밑을 바라보며 딱새와 제비를 부르니 이 아이들이 모두 내 손등에 앉더군요. 함께 새가 되어 훨훨 날며 노래하는 마음이 사랑일까요. 4347.2.1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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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2-16 09:23   좋아요 0 | URL
"안아 줘"할때 하던 일 다 제치고 우선 안아줄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은게 제 바람인데...
아이의 그 말에 가슴 찡하다는 말씀에 저는 또 찡~합니다.

이 장면은 사진으로 보기가 힘들겠네요, 손이 모자라니까요^^

숲노래 2014-02-16 10:25   좋아요 0 | URL
손에 사진기가 있으면 찍겠지만
거의 못 찍는 모습이에요 ^^;;
누군가 곁에서 찍어 주면 찍을 테지만요.

그러나, 아이가 두 팔 벌린 모습은
언제나 마음속에 또렷하게 아로새겼으니
사진으로 안 찍어도
늘 사진처럼 가슴에서 싱그럽게 움직여요~
 

눈빛을 읽는 마음

 

 


  내가 아버지 아닌 어머니일 적에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는지 궁금합니다. 성평등이라는 낱말이 아직 떠도는 만큼, 이 나라와 사회에는 성평등이 없다고 느낍니다. 민주라든지 평화라는 낱말도 아직 떠도니까, 이 나라와 사회에는 민주와 평화 또한 없구나 싶어요.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사랑’이라는 낱말을 들추지 않아요. 꿈이 넘실거리는 데에서는 어느 누구도 ‘꿈’이라는 낱말을 애써 꺼내지 않아요. 모두 사랑이고 꿈이니, 이런 낱말이 없어도 사랑스럽게 꿈꿉니다.

 

아버지로서 언제나 두 아이를 데리고 움직입니다. 아주 드물게 곁님이 함께 움직이지만, 곁님은 시골집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까지 20분을 달릴 적에도 멀미를 하고, 멀미에서 깨어나자면 두 시간쯤 걸립니다. 그러니, 설이나 한가위 같은 때에도 이녁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 만나러 마실을 못하기 일쑤예요. 그동안 억지로 아픈 몸 움직여 마실길 나섰지만, 길을 떠날 적과 시골집으로 돌아올 적에 몹시 힘든 나머지, 지난해와 올해에는 설과 한가위에 혼자 시골집을 지킵니다.


 

  아픈 사람일 때에 아픈 이웃을 알 수 있을까요. 아프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면 아픈 이웃을 알 수 없을까요. 내 이웃과 동무 가운데 우리 곁님이 ‘아프’고 ‘힘든’ 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주는 분이 얼마 없습니다. 이웃이나 동무가 아니라면 더더욱 제대로 헤아리지 못합니다. 몸이 아프다는 이웃이나 동무조차 찬찬히 살펴 주지 못합니다. 아버지로서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다닐 적마다 사람들 눈빛을 읽습니다. 사람들 눈빛이 매우 거북합니다. 서로서로 거북합니다. 그러나, 굳이 거북하게 느낄 일은 없어요. 그분들은 그분들대로 ‘왜 어머니 아닌 아버지가 아이들 데리고 걸어서 돌아다니느냐’ 하고 여길 뿐이니까요.


 

  아이들 재우고 나서 비로소 한숨을 돌리고 허리를 펴는 깊은 밤에 고요히 생각에 젖습니다. 아이들 데리고 다니는 일이 힘들면 얼마나 힘들까요. 너무 힘들어 여느 아버지는 이렇게 살아갈 수 없는 셈일까요. 기운은 사내가 더 세다고들 하면서, 막상 기운 센 사내는 아이 둘조차 데리고 다니지 못할 만큼 바보스러운 셈일까요. 주먹힘은 사내가 훨씬 세다 하지만, 아이들 아끼고 사랑하는 넋과 숨결과 손길과 눈빛은 아무것도 없는 사내들인 셈일까요.


 

  시외버스에서 기차에서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자꾸 묻습니다. 나는 아무 말을 안 합니다. 일곱 살 큰아이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대꾸해 줍니다. “어머니는 집에서 자요.” 아픈 곁님을 돌보지 못하고 두 아이만 데리고 나왔으니, 나로서는 곁님이 시골집에서 제대로 끼니 챙기며 지낼까 생각하는데, 내 둘레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이와 사뭇 다릅니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내 마음을 읽고 어깨동무를 할 이웃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7.1.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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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바라보는 마음

 


  날마다 글을 씁니다. 언제나 새롭게 글을 씁니다. 같은 작가가 선보이는 같은 이름 붙인 만화책을 놓고 1권부터 12권까지, 또는 1권부터 30권까지 새로운 느낌글을 쓰기도 합니다. 언뜻 보기로는 같은 작가 작품 이야기라 할 수 있고, 번호만 더 붙은 같은 만화책이라 바라볼 수 있지만, 번호도 이름도 모두 떼어놓고 들여다보면 다 다른 책과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새로운 마음 되어 새롭게 느낌글을 쓸 수 있습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후박나무를 바라보면서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 담아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글이름은 ‘후박나무’라 붙인 뒤 한 시간에 한 꼭지씩 새로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바라보는 후박나무와 어제 바라본 후박나무가 같지 않거든요. 모레에 바라볼 후박나무하고 글피에 바라볼 후박나무도 같지 않아요. 아침과 낮과 저녁으로 흐르는 후박나무 또한 늘 다릅니다. 후박나무 곁에 서도 후박나무 이야기가 다르게 샘솟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데에 있어도 후박나무를 그리는 이야기가 남달리 샘솟습니다.


  새롭게 바라보는 마음이란 새롭게 사랑하는 마음일까요. 새롭게 바라보는 마음은 즐겁게 마주하는 마음일까요.


  아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자랍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인 나도 날마다 새롭게 자랍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새롭게 웃고 노래합니다. 아이들과 복닥이는 어버이인 나 또한 언제나 새롭게 웃고 노래합니다.


  바람이 불어 겨울 날씨 차갑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지난해에도 그러께에도 올해에도 새삼스럽고 새롭게 받아들입니다. 동짓날 지나 해가 차츰 길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곧 봄이 새롭고 새삼스럽게 찾아오겠다고 깨닫습니다. 다음해에도 다다음해에도 새봄은 또 찾아오겠지요.


  이야기가 새롭게 흐릅니다. 삶이 늘 새롭기 때문입니다. 같은 책을 열 차례 되풀이해서 읽어도 새롭게 스며듭니다. 날마다 새롭게 자라나는 삶이기에, 같은 책만 끝없이 되읽어도 새로운 느낌과 꿈과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끼니마다 똑같다 싶은 밥상을 차려도 언제나 새롭게 먹는 밥인 만큼, 늘 새롭게 숟가락을 듭니다. 사랑이란, 늘 새로운 빛일 테지요. 4347.1.1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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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minee 2014-03-16 16:37   좋아요 0 | URL
후박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