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을 바라보는 마음



  아이들을 씻기거나 내 몸을 씻을 때에도 내 발을 들여다보는 일이 없습니다. 빨래를 하거나 집안을 쓸고닦을 적에도 내 발을 살펴보는 일이 없습니다. 자전거를 달릴 적에도 내 발을 내려다보는 일은 없는데, 이러다가, 아이들과 골짝마실을 가서, 골짝물에 두 발을 담그며 비로소 내 발을 바라봅니다.


  한참 물놀이를 하면서 쪼글쪼글한 발을 바라봅니다. 고무신을 꿰느라 발끝만 하얗게 안 타고 발등부터 종아리와 허벅지 모두 까무잡잡하게 탄 살갗을 바라봅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가파른 언덕을 올라와 골짜기로 찾아온 내 발을 바라봅니다.


  이 발로 이 땅을 버티고 서서 큰아이를 안고 돌아다녔어요. 이 발로 이 땅을 디디고 서서 작은아이를 안고 걸었어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한테 이 발을 물려주었고, 나는 이 발을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테지요. 우리는 서로 어떤 길을 걸어갈까요. 우리는 저마다 어떤 삶을 밝히면서 어떤 꿈을 가꿀까요.


  골짝물이 부서지면서 거품을 냅니다. 골짝물이 콰르르 쾅쾅 쏟아지면서 귀가 멍합니다. 골짝물이 내 발가락을 어루만집니다. 골짝물이 내 발등과 발바닥을 살살 간질입니다. 물거품이 하얗구나 하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4347.8.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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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저린 마음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나들이를 다닙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며 몸무게가 붙습니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자전거 나들이를 할 적에 힘이 더 들 만합니다.


  두 아이를 샛자전거와 수레에 앉혀 나들이를 다니는 동안 ‘예전보다 더 힘들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틀림없이 몸무게가 붙는데, 아이들 못지않게 아버지도 힘살이 붙습니다.


  큰아이는 네 살에 비로소 수레에 앉아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 나들이를 다녔습니다. 작은아이와 큰아이가 함께 수레에 앉다가, 샛자전거를 얻어 큰아이는 샛자전거로 옮깁니다. 아버지 자전거 뒤에 샛자전거와 수레를 붙이고 두 아이를 앉히면, 앞에서 끌어야 하는 무게가 꽤 묵직합니다. 오르막을 달리자면 몇 곱으로 힘을 써야 합니다.


  아이들과 자전거 나들이를 하는 동안 아버지도 천천히 자랍니다. 그런데, 천천히 자라기는 하면서도 팔이 저립니다. 예전에도 팔이 저렸고 요즘에도 팔이 저립니다. 예나 이제나 팔저림은 비슷하지 싶습니다. 팔이 저려 부엌칼 들기에도 벅차지만 새롭게 기운을 내어 통통통 무를 썰고 감자를 썰어 국을 끓입니다. 팔이 저리고 등허리가 결려 끙끙거리지만 아이들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뒤 손빨래를 합니다.


  팔이 저린 마음을 누가 알까요. 먼먼 옛날부터 어머니들은 알 테지요. 먼먼 옛날부터 아버지들은 팔저림을 얼마나 알까요. 집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느끼는 팔저림을 우리 아버지들은 어느 만큼 받아들이거나 헤아릴까요. 팔이 저려 골골대는데, 아이들은 안아 달라 놀아 달라 다시 달라붙습니다. 얘들아 칠월 한복판 무더위에도 안겨야 하겠니? 아무렴, 너희들은 안겨야 하겠지. 안기면서 놀아야 하겠지. 땀이 나도 즐겁고, 땀이 나도록 즐거운 너희들이니까. 4347.7.2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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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07-21 23:09   좋아요 0 | URL
아이들 돌보며 살림도 하고 글도 쓰고... 참 부지런하셔요!
아이들은 몸무게가 늘고 어버이는 힘살이 붙는군요.^^

숲노래 2014-07-22 06:35   좋아요 0 | URL
예전부터 '어머니'들을 보면
'아가씨'였을 적에는 가냘프거나 마른 몸매였어도
'어머니'가 되고 난 뒤에는
팔뚝이 굵어지고 다리통도 단단해지면서
그야말로 '천하장사'가 되는구나 싶었어요.
그렇더군요!
 

취재를 하는 마음



  서울에 있는 ‘베스트 베이비’라는 잡지사에서 취재를 옵니다. 아침 여덟 시에 길을 나섰다 합니다. 전남 고흥까지 즐겁게 나들이를 하셨겠지요. 짧게 만나고 헤어져야 해서 아쉽지만, 돌아가야 할 길이 멀기에 부랴부랴 서울로 떠납니다. 오늘 하루 자동차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보내야 할까 생각하니 참 힘드시겠구나 싶은데, 비록 자동차에서 오랫동안 보내더라도 서울을 벗어나면서 창밖으로 마주하는 숲과 바람과 하늘과 빛을 가슴에 담뿍 담으리라 믿습니다. 취재를 하는 마음이란 바로 새로운 바람을 마시려는 뜻일 테지요.


  우리 식구가 전남 고흥이라는 시골에서 지내는 삶이 참 재미날 만하겠다고 느낍니다. 먼 곳에서 기꺼이 찾아올 수 있으니 여러모로 즐거울 만하겠다고 느낍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그곳 이웃들이 고흥이라고 하는 시골마을에 ‘우리 식구’를 바라보면서 먼길을 달릴 수 있으니 서로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이 되겠다고 느낍니다.


  나와 곁님은 잡지사 기자님한테 우리 삶을 이야기합니다. 내 입을 거쳐서 나오는 말은 새롭게 내 삶으로 빛납니다. 잡지사 기자님은 서울에서 일하며 느끼거나 궁금한 이야기를 묻습니다. 이녁이 듣는 말은 이녁 마음자리에서 새롭게 씨앗으로 드리웁니다. 나도 누군가를 만나러 먼길을 나설 적에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두근두근 설레고 기쁩니다. 4347.7.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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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는 마음



  나는 군대라는 곳에서 지난 1995년 11월부터 1997년 12월까지 보냈습니다. 군대로 끌려가기 앞서가 아스라한 옛날 같으면서도, 군대에서 굴러야 했던 나날이 바로 어제인 듯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풀려나와 내 보금자리로 돌아가던 나날도 바로 오늘 아침이나 엊저녁과 같기도 해요. 곰곰이 돌아보면, 어제와 오늘과 모레는 따로 떨어지지 않다고 할 만합니다. 늘 한 갈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군대라는 곳에 있을 적에 곧잘 생각에 젖었습니다. 군대에서 하는 일이란, 총을 손에 쥐고 저 먼 숲을 바라보기, 삽을 손에 쥐고 호루라기를 불 때까지 땅을 파기, 이십 킬로그램이 넘는 짐을 짊어진 채 잠자리에 들 때까지 쉬잖고 걷기, 주는 대로 먹기, 시키는 대로 하기, 웃사람한테서 물려받은 거친 말을 아랫사람한테 물려주기, 1초만에 한 사람씩 쓰러뜨릴 수 있도록 급소를 노려 총을 쏘거나 칼을 찔러서 죽이도록 배우기, 눈앞에 없는 누군가를 나쁜 놈으로 삼아 끝없이 이러한 생각을 머릿속에 집어넣기, 재빠르게 침낭 개고 천막을 펼쳤다가 걷기,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쓰레기 파묻기 따위입니다. 이러다 보니 멍하니 시키는 대로 지내든,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늘 생각에 잠기든,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 갈밖에 없어요.


  내가 군대라는 데에 끌려가기 앞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쳤을까 돌아보았습니다. 내가 군대라는 데에서 풀려나온 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쳐야 하는지 헤아렸습니다.


  나는 군대에 끌려가기 앞서 제대로 생각해야 했습니다. 군대가 없어지도록. 아니, 군대가 없어진다기보다, 온누리에 사랑이 가득할 수 있도록. 온누리에 사랑이 가득하면서 꿈이 흘러넘치고, 모든 사람이 서로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아름다운 빛이 감돌 수 있도록.


  나 스스로 고운 빛을 사랑으로 품지 않았기 때문에 군대에 끌려가는 얼거리를 되풀이하는구나 싶었어요. 1995년 그날과 1997년 그날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1950년 그 싸움통에서도,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이 한국으로 쳐들어온 때에도, 한국이 일본으로 쳐들어간 때에도, 중국과 몽골이 한국으로 쳐들어온 때에도, 한국이 중국과 몽골로 쳐들어간 때에도, 한국에서 갈기갈기 찢긴 정치권력이 서로 물어뜯고 할퀴면서 스스로 죽이고 죽던 때에도, 사람들은 스스로 고운 빛을 사랑으로 품지 못한 채 흘렀습니다.


  모두들, ‘왜 이렇게 괴로운 싸움을 안 그치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만 했어요. 싸움통을 끝낼 길을, 다시 말하자면, 싸움통이 아닌 우리가 삶으로 이룰 아름다운 빛을 그리지 못했어요.


  예부터 정치권력을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지 못하도록 짓밟았습니다. 신분과 계급을 나누었지요. 예부터 온누리 어느 나라에서나 밥을 굶을 일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는 넉넉합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태어나면서, 정치권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밥과 옷과 집이 모자라’도록 사회를 바꾸었어요. 일부러 정치권력을 키웁니다. 일부러 궁궐을 짓습니다. 일부러 밥과 옷과 집을 함부로 다룹니다. 이렇게 해야 사람들 사이에서 밥과 옷과 집이 모자라고 말아요. 사람들 사이에서 밥과 옷과 집이 모자라면서, 궁궐이 커지면 어떻게 될까요? 권력과 돈을 거머쥐거나 가로챈 사람들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큰 집과 많은 옷과 배가 터지도록 먹는 밥을 누리면 어떻게 될까요?


  때때로 시골사람들이 어깨동무하면서 들고 일어납니다. 들고 일어나서 권력자를 낫으로 베고 칼로 쑤셔서 죽입니다. 그렇지만 그뿐이에요. 평화와 사랑으로 나아가지 않았어요. 너무 짓밟혀서 괴롭다고 여기느라 ‘앙갚음’을 할 생각뿐입니다. 앙갚음을 하고 난 뒤라도, 군대와 정치조직을 없애어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보금자리를 이루려 하는 길로 나아가야 했을 텐데, 이렇게 나아가지 못한 채, ‘반란군 스스로 새로운 정치조직이 되’고 맙니다.


  군대에서는 언제나 ‘눈앞에 없는 적’을 자꾸 머리와 마음에 만들도록 들들 볶습니다. 군대에서는 늘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길들입니다. 온갖 주먹다짐과 발길질과 거친 말로 사람을 괴롭힐 뿐 아니라 다치게 하고, 곧잘 죽입니다. 군대에서 누군가 죽음에 이르면 으레 ‘의문사’라는 이름으로 덮어씌웁니다. 군대가 어떤 조직인지를 사람들한테 숨기기만 합니다. 정치조직이 사람들한테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일하고 똑같습니다.


  사람들이 ‘생계에 벅차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잃을 때’에는 정치권력이 신나게 날뜁니다. 사람들이 ‘먹고살기에 바빠 생각을 안 하거나 못 할 때’에는 정치권력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생각을 하’지요. 아무리 사람들이 생각을 잊거나 잃었어도, 이 틈바구니에서 어김없이 생각이 솟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새로운 무기를 만들려고 합니다. 정치권력은 서로 짭니다. 서로서로 더 새로운 무기를 더 많이 만들려고 하면서, 이러한 데에 모든 돈과 힘과 품을 들이도록 해요.


  한국에서 군대에 쓰는 돈은 어마어마합니다. 지구별에서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무시무시합니다. 그러면 한국에서 군대에 쓰는 돈은 어디로 갈까요? 어떤 사람들 주머니로 가겠지요. 그리고, 어떤 정치권력자한테 빌붙으면서 ‘생계를 잇는 어떤 사람’ 주머니로 갑니다. 한국에서는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이 ‘군대 경제 틀’에서 생계를 잇습니다. 이는 바로 정치권력이 바라는 일이에요. 사람들 스스로 ‘국방산업으로 생계를 이을 때’에는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사람들 스스로 ‘도시 문명사회에서 생계를 이을 때’에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잘 생각해 보셔요. 오늘날 한국에서는 ‘학교와 얽힌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교사부터 학교와 얽힌 회사원입니다. 교과서와 참고서를 만드는 사람도 학교와 얽힌 회사원입니다. 학원강사나 과외교사 모두 학교와 얽힌 회사원입니다. 학생한테 손전화 파는 사람도, 학생한테 ‘학교옷’ 파는 사람도, 학생한테 이것저것 팔려는 모든 사람도, ‘학교와 얽힌 회사원’입니다. 학교 앞 분식집과 옷집과 술집도 ‘학교와 얽힌 회사원’이에요.


  군대와 같은 틀로 짠 것이 학교와 회사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회사(하고 공공기관)에 다니지 못하면 돈을 못 벌 만한 얼거리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면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얼거리입니다. 회사에서는 우리들한테 무엇을 시킬까요? 회사에서도 군대와 똑같이 ‘생각을 못 하게 가로막거나 짓밟’습니다. 회사에서 우리한테 바라는 것은 회사에 돈을 끌어모으라는 일입니다. 이것 말고는 바라지 않아요. 학교는 우리한테 무엇을 바랄까요? 이웃과 동무를 밟고 올라서서 더 높은 점수를 따라는 짓입니다. 학교 또한 이것 말고는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군대에 보내는 일과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과 우리 아이들을 회사에 보내는 일은, 밑바탕으로 따지면 모두 똑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는 얼거리가 바로 ‘군대·회사·학교’입니다. 그리고, ‘감옥’은 이 세 가지하고 똑같지요.


  군대에도 회사에도 학교에도 ‘사랑’과 ‘삶’과 ‘꿈’과 ‘평화’가 없습니다. 사랑을 가르치지 않는 군대요 회사이며 학교입니다. 삶과 동떨어지도록 하는 데가 군대이며 회사이고 학교입니다. 꿈과 평화를 바라지 않는 데가 군대이자 회사이고 학교입니다.


  삶과 사랑을 가르치면서 배울 수 없다면, 학교가 학교일 수 없어요. 그러니, 오늘날 한국에서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도 모두 ‘군대’와 같고 ‘감옥’이겠지요. 지구별도 ‘감옥’이라 하지만, 지구별에서 학교와 군대와 회사는 언제나 똑같이 감옥이에요.


  학교를 높은 점수로 마친 아이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바라보셔요. 높은 점수를 거머쥐는 아이들이 왜 자꾸 스스로 목숨을 끊는지 살펴보셔요. 아이들이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스스로 죽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자살률’은 한국이 지구별에서 가장 높습니다. 아이들 마음속에 사랑이 자라지 못하니, 죽을밖에 없어요. 아이들 마음속에 꿈이 피어나지 못하니, 죽는 길만 있어요. 아이들 마음속에 평화와 빛이 깃들지 못하니, 그대로 죽고 말아요.


  날마다 수십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죽습니다. 그런데 ‘숫자 통계’는 늘 감춰지고, ‘날마다 죽는 아이들 이야기’는 어떤 신문이나 방송이나 교과서나 책에도 안 나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아이들이 날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죽지만, 정치권력은 이를 꽁꽁 감춥니다. 학교에서도 감추고, 어른들 누구나 감춥니다. 왜 감추느냐 하면, 이 사회를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가 그대로 흘러, 사람들이 모두 바보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바보가 되어야, 정치권력은 사람들을 노예로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바라는 일은 그야말로 ‘꿈(이상주의)’입니다. 사랑을 바라는 까닭은 삶을 밝히고 싶기 때문입니다. 삶을 밝혀 아름답게 하루를 짓고 싶기에 꿈을 꿉니다. 아름답게 짓는 하루를 누리고 싶은 꿈은 사랑이 있기에 즐겁습니다.


  사람들이 꿈을 꾸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이 사랑으로 꿈을 지어 삶을 가꾸면 어떻게 될까요? 아주 마땅히 ‘눈앞에 안 보이는 적군’이 곧바로 사라집니다. ‘눈앞에 없는 적군이 참말 없다고 알아볼’ 수 있어요. 적군이 없으니 싸울 일이나 전쟁무기를 갖출 일이 없습니다. 군대가 있을 까닭이 없고, 군대가 없으니, 정치권력이나 정치조직 또한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군대도 사회도 정치권력도 없으면, 도시라는 데가 있을 까닭조차 없고, 회사와 학교가 있을 까닭이 없어요.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볼 것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해야 할 참다운 일을 생각하고, 우리가 참답게 가르치고 배울 이야기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 ‘꿈’이고, 모든 꿈은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온누리에 사랑스러운 빛이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서 자라기를 바라기에 꿈을 꿉니다. 4347.6.2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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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마음


  누군가한테 무엇을 물으려 할 적에는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내 생각을 ‘심어’서는 안 됩니다. 물으려 했으니 물어야지요. 누군가한테 무엇을 묻는다고 할 적에는 서로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녁 눈길과 마음을 먼저 듣고 나서, 나는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말할 노릇입니다.

  “바다에 오니 좋지?”와 같은 말은 묻는 말이 아닙니다. “바다에 오니 어때?”와 같은 말이 묻는 말입니다. “그 사람 참 나쁘지?”와 같은 말은 묻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 어때?”와 같은 말이 묻는 말입니다.

  아이들한테 “너는 어머니가 좋아? 아니면 아버지가 좋아?” 하고 말한다면, 이런 말도 묻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좁은 틀에 가두는 덫일 뿐입니다. 아이들 마음을 알고 싶다면 “너는 어머니 어때? 아버지는 어때?” 하고 말해야지요. 묻는다고 하는 사람이 ‘생각한 지식’을 심으려 할 때에는 서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도 거북하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실마리를 풀지 못합니다.

  묻는 마음은 알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물을 적에는 언제나 실마리가 함께 태어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은 나쁘지요?” 하고 말한다면 이 말은 이대로 끝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좋지요?” 하고 말할 때에도 이 말은 이대로 끝입니다. 더 없습니다. ‘나쁘다’나 ‘좋다’는 말로 스스로 못을 박으면서 읊는 말이니 아무것도 새롭게 태어나지 못합니다.

  “전쟁은 무엇인가?”라 말하거나 “사랑은 무엇인가?”라 말할 때에 비로소 생각이 자랍니다. 전쟁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거나 살피면서 생각이 자랍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스스로 돌아보거나 되새기면서 생각이 큽니다.

  제대로 물을 수 있어야 제대로 바라봅니다. 제대로 묻지 못한다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제대로 묻는 마음이란, 제대로 삶을 가꾸려는 마음입니다. 제대로 묻는 몸가짐이란, 제대로 길을 찾으면서 빛을 밝히려는 몸가짐입니다.

  “삶은 좋은가, 또는 나쁜가?” 하고 못을 박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못을 박는 일은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삶은 무엇인가?” 하고 스스로 물으면서, 스스로 삶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나한테 삶은 무엇이고, 내 이웃한테 삶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생각해야 제대로 압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못박기(가치판단·정의·규정)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전쟁은 나쁘다”와 같은 말은 지식(죽은 기록)은 될 수 있어요. “사랑은 좋다”와 같은 말도 지식(죽은 종교)이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이 되는 말은 생각을 낳지 않으니, 왜 ‘나쁘거나 좋은가’를 깨닫지 못한 채 머릿속에 가득 쌓입니다. 왜 ‘나쁘거나 좋은가’를 알아차리지 못하기에, 스스로 전쟁이나 사랑과 마주했을 적에 이것이 어떻게 나쁘거나 좋은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바르게 바라보지 못해요.

  꽃은 무엇일까요? 숲은 무엇일까요? 도시는 무엇일까요? 농약은 무엇일까요? 남이 적어 놓은 ‘죽은 지식’에 기대어 머릿속을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삶일 때에는 하루가 어떻게 찾아올까요.

  스스로 생각하면서 바라보아야 해요. 스스로 생각하면서 바라보고 느껴야 해요. 스스로 하루를 새롭게 빚어야 해요. 언제나 오늘을 새롭게 맞이하면서 삶을 가꿀 수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날마다 스스로 물어야지요. 날마다 스스로 삶을 묻고 사랑을 물으면서 이야기를 길어올려야지요. 4347.6.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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