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 1

어떤 이들이 “헌책방 동호회 1호”라고 자랑하면서 서울신문사하고 만난 이야기가 신문에 나왔더라. 며칠 지나고서 누가 알려주어 알았다. 그들이 꾸린다는 “헌책방 동호회”는 내가 1998년 1월 6일에 “헌책방 사랑 누리”라는 ‘헌책방 사랑이 모임’을 열었기에 비로소 생긴 곳이다. 나는 내가 연 모임에서 모임지기 노릇을 꼭 한 해를 하고서 그곳을 떠났다. 누구나 모임지기가 되기를 바랐고, 누구나 즐겁게 책모임·책방사랑을 깨달아 널리 즐거이 나누기를 바랐다. 서울신문사하고 만난 그 모임 분들은 프리챌이란 곳에서 모람이 400 남짓인 듯한데, 내가 싸이월드에 새로 연 “우리말과 헌책방 쉼터”에는 오늘로 모람이 3904이다. 내가 한국에서 ‘헌책방 사랑이 모임’을 처음 열었다지만, 처음 연 일, 이른바 1호가 뭐 대수로운가. 나로서는 ‘헌책방 사랑이 모임’을 처음 열었으나, 예전에 여러 어른들은 ‘고서 수집회’를 열었다. 예전 어른들은 값진 책을 모아서 전시회도 하고 자료집도 펴내는 ‘고서 수집회’였다면, 나는 알맹이를 기쁘게 읽어 오랜 책에서 새로운 슬기를 배우고 나누자는 수수한 ‘헌책방 사랑이’가 되자는 뜻이 다를 뿐이다. 서울신문사하고 만난 분들이 2호이건 3호이건, 굳이 이런 숫자를 따지지 말고, 너른 책사랑하고 깊은 책방사랑으로 새롭게 이야기꽃을 펴기를, 또 신문기자는 취재를 제대로 해서 글을 쓰기를 빈다. 2005.8.20. (덧말 : 2007년에 싸이월드 모임을 접고서 네이버로 옮겼다. 싸이월드 모임을 접을 무렵 모람이 7000이 되었다. 모임에 들어와서 이름만 걸친 분을 3000쯤 솎아내고서 7000이었으니, 한국에서 헌책방을 사랑하고 싶어 모인 분이 1만이 될 수 있었네 싶어 무척 반가우면서 고마웠다. 이제 다들 뿔뿔이 흩어져서 저마다 다른 길을 갈 텐데,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든, 책하고 책터를 고이 아끼는 숨결이자 맑은 눈빛으로 살림을 지으실 테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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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3

이제까지 읽은 책 때문에 대단한 사람은 없다이제부터 새로 읽을 책 때문에 대단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이제까지 쓴 책 때문에 놀라운 사람은 없다이제부터 새로 쓸 책 때문에 놀라운 사람이 있을 뿐이다. 2012.1.13.

 

책 14

나한테 책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다··고등학교 적 교사들 가운데에도다섯 학기를 머물던 대학교 교수 가운데에도출판사에서 일하며 만난 책마을 일꾼이나 글쟁이나 그림쟁이나 사진쟁이 가운데에도참말로 어디에도 없다헌책집 아저씨나 아주머니도 나한테 책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헌책집 아저씨나 아주머니는 책이 아닌 삶을 가르쳐 주었다나한테 책을 가르쳐 준 사람은 늘 나였다책을 알아본 사람은 나요책을 사들인 사람은 나요책을 짊어지고 집으로 나른 사람은 나요책을 펴서 읽은 사람은 나요책에 어떤 숨결이 흐르나 하고 헤아린 사람은 나요책을 건사하고 책꽂이를 들인 사람은 나요도서관을 열어서 꾸린 사람은 나요이웃님한테 책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나요새로운 책을 쓰는 사람은 나요책을 읽겠다는 아이들한테 어떤 책을 읽히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요그야말로 오롯이 마주하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이다. 2014.6.16.

 

책 15

큰아이가 묻는다. “아버지아버지는 이 책 다 읽었어요우리가 읽는 책을 아버지는 예전에 다 읽었어요이 책은 다 아버지가 산 책이에요?” “모두 아버지가 읽은 책이고 산 책이야아버지는 책을 살 적에 다 읽고서 사때로는 앞으로 읽으려고 미리 사는 책도 있어너희가 앞으로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할 적에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장만한 책도 있지예전에는 쉽게 볼 수 있던 책이라 해도 그때부터 서른 해쯤 지난 뒤에 자라날 어린이가 그 책을 찾으려 할 적에는 막상 책집에서 사라져서 안타까워할 수 있겠구나 싶은 책도 미리 사서 건사해 놓았어너는 여기에서 네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그때그때 즐겁게 읽으렴굳이 다 읽지 않아도 돼읽은 책이 재미있어서 그 책을 또또또 읽어도 되고.” 2015.9.19.

 

책 16

수다가 꽃으로 피니 책으로 되네. 2019.3.19.

 

책 17

책이란이렇게 서로 아껴 주는 사랑이지 싶다아무리 멀리 떨어졌어도 종이꾸러미가 되어 준 숲을 손에 쥐면서너랑 나랑 이어지는 따사로운 숨결. 2019.3.20.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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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1

왜 이렇게 시장이며 군수이며, 또 국회의원이며 장관이며 대통령이며, 막삽질을 밀어붙이는지 몰랐다가, 이제 환하게 안다. 그분들은 마을에 안 살고 아파트에 산다. 그분들은 흙을 안 만지면서 살고, 언제나 심부름꾼을 곁에 두고서 운전수 거느린 자가용에 앉을 뿐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길을 가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시골 면장까지, 모든 공공기관 벼슬아치가 된 사람한테는 ‘마을집 + 자전거’를 주어야지 싶다. 도시라면 가장 오래된 골목마을 골목집을 한 채 주고, 자전거를 한 대 주어, 골목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그분 일터로 날마다 오가도록 하기. 그분 곁에 경호원이 있어야 한다면 경호원도 같이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면 되지. 경호원도 골목마을 골목집에 깃들어서 살고. 이렇게 하면 나라도 마을도 확 달라지리라.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2007.12.20.


마을 2

자주 다니지 못하더라도 틈틈이 떠올리면서 마실을 할 수 있으면 즐겁다. 굳이 날마다 다녀야 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걸음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다운 하루이다. 마을을 알고 싶다면 마을에서 살면서 마을을 거닐어야 할 텐데, 바쁘다는 핑계로 골목마실을 도무지 못 한다고 하지 말고, 이레에 한 걸음을 해도 좋고, 바쁘게 일터를 오가는 길에 1분쯤 말미를 내어도 좋다. 바로 이 1분을 써서 샛길로 접어들어 해바라기를 할 수 있다면, 마을도 골목도 이웃도 새삼스레 품을 수 있다. 2008.6.17.


마을 3

엄청난 돈을 퍼부어서 다 때려부수고 아파트를 올리는 재개발을 해야 마을이 살아나지 않는다. 돈을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돈에 얽매이는 쳇바퀴가 된다. 마을사람 스스로 차근차근 손질하고 가꾸는 살림을 아끼는 나라길을 편다면, 이때에는 돈 한푼 안 들여도 더없이 사랑스러운 마을이 태어난다. ‘마을살리기’란 이름을 함부로 쓰지 마라. 어느 마을이 언제 죽었느냐? 멀쩡히 살아서 싱그럽게 춤추는 마을을 들여다볼 생각을 안 하면서 돈에 눈이 먼 막삽질을 ‘마을살리기’란 이름으로 밀어붙이지 마라. 2009.4.16.


마을 4

골목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골목’이란 말을 쓸 일이 없었다. 동무들하고 늘 ‘거기’나 “너희 집”이나 “우리 집”이라 했다. 때로는 ‘빈터’를 찾아서 놀 뿐이었고. 이런 곳에 꽃이 피고 나무가 우거지며 밭이 있는 줄 깨달은 때는 서른이 한참 지나고서. 이윽고 아이가 태어나 갓난쟁이를 안고 업으며 해바라기를 다니고 걸음마를 가르치면서 온골목이 꽃밭이요 나무숲이며 텃밭인 줄 깨닫는다. 마을이 서기 앞서 들꽃이요, 마을이 서며 마을꽃이었을 텐데, 인천 같은 고장에서는 ‘골목꽃’이 될 테지. 골목이웃 스스로 살아내는 터에 사랑이란 손길을 담아 살림을 지으니 어느새 보금자리 되고, 이곳에 새빛이 서리더라. ‘골목빛’이다. “산다고 해”서 보지는 않더라. “사랑해”라는 마음이기에 바라보고 알아보더라. 2019.1.29.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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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자

얼토당토않은 짓을 그만 겪고 싶어서 보리출판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지 한 달.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기에 관공서를 찾아갔더니 사람을 아주 바보로 여기는 눈빛에 갖은 서류더미를 안기고, 철없는 짓(사표 던지기)을 앞으로 안 할 만한 다짐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철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다짐으로 바지런히 ‘구직활동’을 한다는 증거를 내놓아야 실업급여를 주겠단다. 오늘 이곳에서 그대 벼슬아치 앞에서 나나 둘레 여러 사람이 실업자일 테지만, 우리도 그대하고 같은 사람이거든? 그대들은 왜 이렇게 실업자란 이름이 살짝 붙은 이들한테 딱딱거리고 쉽게 토막말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마음을 벅벅 긁는 말을 내뱉을까. 무슨 설문을 받는다는 자리가 있기에 ‘직업 칸’을 ‘실업자’로 적으니, 설문을 받는다며 종이를 내밀던 이들도 혀를 차며 뭔 미친놈이 다 있느냐는 눈으로 쳐다본다. 왜? 그러면 ‘가정주부’로 적어야 하나? ‘직업 = 하는 일’이고, 오늘 나는 딱히 하는 일이 없이 몸도 마음도 쉬면서 지내니 실업자이다. 실업자를 딱하다고 쳐다보는 그대들이야말로 마음이 가난하고 딱해 보인다. 2000.7.30.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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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숲

누가 묻더라. “다른 사람도 아닌 최종규 씨라면 도서관을 ‘도서관’이라 하면 안 되지요. 한국말로 새롭게 풀어내어 써야 하지 않습니까?“ 좀 어처구니없고 뜬금없다고 여겼다. 도서관에 새 이름을 붙이기를 바란다면, 그분 스스로 생각할 노릇 아닌가. 나는 도서관을 ‘도서관’이라 쓰면 되리라 여기니 그냥 쓸 뿐인걸. 그렇지만 이웃님 말씀이 틀리지는 않은 터라 새로 가리킬 만한 이름을 헤아리기로 했고, 이레쯤 뒤에 ‘책숲집’이란 낱말을 지었다. 책이란 숲이고, 숲이란 책이다. 그래서 ‘책숲’이라 하면 똑같은 숨결을 맞붙인 얼개인데, 둘이 똑같은 숨결이라 하더라도 이 땅에서 선보이는 빛은 다르다. 그래서 책은 책대로 숲은 숲대로 우리 삶을 이루는 슬기하고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자는 뜻으로 ‘책숲 + 집’이란 얼개로 낱말을 지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박물관은 ‘살림숲집’이라 할 만하고, 전시관은 ‘그림숲집’이라 할 만하겠더라. 이러다가 요새는 ‘집’이란 낱말을 덜어 ‘책숲’이라고만 쓴다. “책숲 = 도서관”, “도서관 = 책숲”이지 싶다. 숲이라는 터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만한 집이자 보금터 노릇을 할 만할 테니, ‘집’이라고 붙이기보다는 ‘책숲’이라고만 해도 참 어울리겠구나 싶다. 2019.3.2.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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